지문날인 거부운동에 대한 고백
주민증없이 시의원도 되는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년을 살아왔지만 그동안 주민등록증을 갖고 살아본 기간은 2년이 채 못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처음 주민등록을 하라고 주민등록카드와 안내문이 왔을 때 한편으로는 이제 어른이 돼나보다 좋아라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웬일인지 주민등록을 하러가기가 싫었다. 경찰서에 간다고 무서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결국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았다. 집에는 본의아니게 거짓말을 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어린 나이에 범법자가 되어야 했다. 그대로 몇달을 살아도 별 말이 없길래, 그리고 대학을 다닐 때도 학생증이라는 것이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7, 8년이 흘러갔다. 그러던 중 대학 졸업을 앞두고보니 덜컥 겁이 났다. '이제는 신분증명서가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무려 8년 만에 주민등록증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과태료 2만 몇천원을 물고서.
그렇게 한 2년을 갖고 다녔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실수로 지갑을 분실했는데, 그 속에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스스로 상당한 고민에 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을 막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이 남긴 성과의 하나로서 주민등록증 소지의무가 폐지된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주민등록증을 분실했을 때 재발급을 받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래서 다시 범법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은 채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한가지 더 해보자. 30대 초반의 젊은 시의원이 한사람 있었다. 현재 지문날인 거부운동에 동참하고 있고, 그 때문에 주민등록증 갱신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이렇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몇 년 전에 분실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려고 그랬나 어쨌나 모르겠지만, 시의원 후보로 나가서 당선될 때, 주민등록증이 없었어. 주민등록증 없이 시의원도 되는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별 필요도 없고… 이렇게 주민을 통제하는 제도는 빨리 고쳐야지."
공동의 책임을 갖는 지문날인 거부운동
그러나, 주민등록증을 안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인가. 주민등록증 없는 삶이란…. 뭔가 중요한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 혹시 불이익을 당하거나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안절부절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부터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말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두렵기도 했고 긴장도 되는 운동이었다.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이야 정부를 상대로 전자주민카드 시행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국민을 상대로 '같이 외칩시다'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문날인을 거부합시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말고 개선될 때까지 주민등록증 없이 삽시다'라는 외침은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과는 그 무게를 달리하는 운동이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라도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함께 책임져야 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초기 이 운동은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이슈로 쉽게 달아올랐다.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도, 그리고 과거 재일한국인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연상작용으로 민족적 감정까지 교차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지난해 7월 1일 사회인사 151인의 지문날인 거부선언에 이어, 7월 19일 1453인의 2차 거부선언이 발표되었고, PC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지문날인 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람들만 수천명에 이르렀다.
왕따가 되어버린 지문날인 거부자들
문제는 이 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지문날인 거부자들, 정말로 열정과 신념을 갖고 동참해 준 수천명의 사람들이 당했던 개인적인 고난들은, 말로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과태료를 문다, 주민등록이 말소된다는 협박을 동사무소 직원들에게서, 거의 매일같이 들어야 했다.(이들의 협박은 대부분이 거짓말이다) 통장, 반장의 경우에는 대부분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라서 평소 같으면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던 사이였건만, 언제부턴가 이들로부터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당하거나 반상회 때에 집단 따돌림(왕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동네어귀나 아파트 입구, 집 앞에 '아무개씨는 주민증 갱신을 조속히 하라'는 대문짝만한 공문을 붙여놓기도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지문날인 거부자들은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못들고 다니겠다', '호적 파서 집 나가라'는 부모님의 노기를 진정시키기에도 힘에 부쳤다. 그나마 도시가 이 정도였으니 농촌이나 시골은 얼마나 심했을까.
시골에 사는 어떤 지문날인 거부자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저 집안은 빨갱이가 사는 집'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사람들… 참, 어렵게 어렵게 의지를 굽히지 않고 여태까지 버텨왔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필자도 이 운동을 하라고 선동(?)한 사람 중에 한 명이고 보니 한 사람, 한 사람, 지문날인 거부로 인해 이런 고난을 겪고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면 도대체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행정자치부나 자치단체에 항의서한을 보낸다고 이들의 피해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그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지문날인 거부운동, 안팎의 항의들
그러나 솔직히,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제기한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을 잘못 풀어 왔다고 고백한다. 며칠 전, 밀린 업무가 있어서 일요일에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그 날 어떤 분이 전화를 하여 거기가 지문날인 거부운동 하는 곳이냐고 다소 도발적으로 질문을 해 왔다. 명확히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항의의 어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현재 상황의 어려움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몇가지 양해를 구해보기도 하였지만, 전화를 걸어온 그 사람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어디 그 뿐인가. 올 초부터 지문날인거부 홈페이지(http://fprint.jinbo.net)에는 지문날인거부운동본부(준)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게 올라왔다. 뭔가 대책을 세우고 활동을 다시 해야 하는게 아니냐는 질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급기야 같이 이 운동에 동참했던 한 단체에서는 '유령공대위는 가라'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공대위와 같은 단체간 협의를 통한 운동진행에 대해 거세게 문제제기를 하였다.
거부자들이 '유령공대위'에 바란 것
사실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함께 했던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이 운동은 사태의 해결보다는 문제제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그럴 조짐이 생길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다음과 같은 비유도 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도 30년이 넘게 진행되어 오지만 별로 개선된 것이 없다. 더욱이 지문날인제도와 주민등록제도는 국가의 기본운영체계로 이미 굳어져 온 지 30년이 넘는 제도들이다.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부에서 형성되어 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판단도 판단이지만, 운동의 결과를 속단하면서 실제로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로 고통받는 것은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지문날인거부 운동본부(준)이 지문날인 거부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끝까지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말고 개기세요'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문날인 거부자들 중에 그렇게 개기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을까. 사실상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이 유령공대위에 요구한 것은, 최소한 개길 수 있는 명분을 달라고 한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너 하나만 아직까지 주민증 갱신을 안했다. 너 혼자 잘났냐' 고 몰아세우는 사람들에게 떳떳히 주장하고 밝힐 수 있는 그 명분을.
솔직히 고백한다
필자를 포함한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주체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참혹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현실에 굴복해 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동안 이들이 고난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신념을, 인간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던 그 당당한 자신감을 상실케 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혁명전사가 인민을 앞세워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자신의 안위를 도모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혁명전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들은 최소한 지문날인 거부자들의 고난과 이들의 신념과 의지가 꺾이는 일만은 방어하도록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떤 운동이건 성공할 수도 있고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아무런 성과를 못 남기고 그대로 무너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할 때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운동은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는 그 동력을 잃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스스로 보기에도 최근의 지문날인 거부운동은 참여한 사람들을 오히려 참혹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앞으로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지속시켜 나갈 동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우려가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문날인거부 운동본부입니다'
단언하건데, 이 싸움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3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지문날인과 주민등록제도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문제만은 아니다. 그동안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운동이 서서히 지문날인 거부자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강릉과 춘천, 원주에서 부산, 대구, 진해, 마산, 창원에서 광주, 전주, 대전에서 인천과 수원 그리고 서울에서,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스스로를 세우고자 했던 의지들이 이어져 그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고난들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이 최초의 고비를 넘기는 것 역시 이 사람들의 몫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다시 어떻게 모일 수 있는가, 그리고 이들이 어떤 행동을 다시 시작하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아직도 싸울 여지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지문날인 거부 홈페이지에 '우리가 지문날인거부 운동본부입니다'고 말한 어떤 거부자의 말과 같이, 우리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그동안의 침잠을 걷고 다시 행동하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것, 올바르지 않은 제도를 거부하고 이를 바로잡는 것도 이러한 노력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년을 살아왔지만 그동안 주민등록증을 갖고 살아본 기간은 2년이 채 못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처음 주민등록을 하라고 주민등록카드와 안내문이 왔을 때 한편으로는 이제 어른이 돼나보다 좋아라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웬일인지 주민등록을 하러가기가 싫었다. 경찰서에 간다고 무서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결국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았다. 집에는 본의아니게 거짓말을 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어린 나이에 범법자가 되어야 했다. 그대로 몇달을 살아도 별 말이 없길래, 그리고 대학을 다닐 때도 학생증이라는 것이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7, 8년이 흘러갔다. 그러던 중 대학 졸업을 앞두고보니 덜컥 겁이 났다. '이제는 신분증명서가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무려 8년 만에 주민등록증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과태료 2만 몇천원을 물고서.
그렇게 한 2년을 갖고 다녔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실수로 지갑을 분실했는데, 그 속에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스스로 상당한 고민에 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을 막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이 남긴 성과의 하나로서 주민등록증 소지의무가 폐지된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주민등록증을 분실했을 때 재발급을 받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래서 다시 범법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은 채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한가지 더 해보자. 30대 초반의 젊은 시의원이 한사람 있었다. 현재 지문날인 거부운동에 동참하고 있고, 그 때문에 주민등록증 갱신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이렇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몇 년 전에 분실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려고 그랬나 어쨌나 모르겠지만, 시의원 후보로 나가서 당선될 때, 주민등록증이 없었어. 주민등록증 없이 시의원도 되는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별 필요도 없고… 이렇게 주민을 통제하는 제도는 빨리 고쳐야지."
공동의 책임을 갖는 지문날인 거부운동
그러나, 주민등록증을 안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인가. 주민등록증 없는 삶이란…. 뭔가 중요한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 혹시 불이익을 당하거나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안절부절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부터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말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두렵기도 했고 긴장도 되는 운동이었다.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이야 정부를 상대로 전자주민카드 시행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국민을 상대로 '같이 외칩시다'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문날인을 거부합시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말고 개선될 때까지 주민등록증 없이 삽시다'라는 외침은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과는 그 무게를 달리하는 운동이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라도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함께 책임져야 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초기 이 운동은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이슈로 쉽게 달아올랐다.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도, 그리고 과거 재일한국인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연상작용으로 민족적 감정까지 교차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지난해 7월 1일 사회인사 151인의 지문날인 거부선언에 이어, 7월 19일 1453인의 2차 거부선언이 발표되었고, PC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해 지문날인 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람들만 수천명에 이르렀다.
왕따가 되어버린 지문날인 거부자들
문제는 이 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지문날인 거부자들, 정말로 열정과 신념을 갖고 동참해 준 수천명의 사람들이 당했던 개인적인 고난들은, 말로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과태료를 문다, 주민등록이 말소된다는 협박을 동사무소 직원들에게서, 거의 매일같이 들어야 했다.(이들의 협박은 대부분이 거짓말이다) 통장, 반장의 경우에는 대부분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라서 평소 같으면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던 사이였건만, 언제부턴가 이들로부터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당하거나 반상회 때에 집단 따돌림(왕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동네어귀나 아파트 입구, 집 앞에 '아무개씨는 주민증 갱신을 조속히 하라'는 대문짝만한 공문을 붙여놓기도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지문날인 거부자들은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못들고 다니겠다', '호적 파서 집 나가라'는 부모님의 노기를 진정시키기에도 힘에 부쳤다. 그나마 도시가 이 정도였으니 농촌이나 시골은 얼마나 심했을까.
시골에 사는 어떤 지문날인 거부자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저 집안은 빨갱이가 사는 집'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사람들… 참, 어렵게 어렵게 의지를 굽히지 않고 여태까지 버텨왔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필자도 이 운동을 하라고 선동(?)한 사람 중에 한 명이고 보니 한 사람, 한 사람, 지문날인 거부로 인해 이런 고난을 겪고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면 도대체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행정자치부나 자치단체에 항의서한을 보낸다고 이들의 피해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그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지문날인 거부운동, 안팎의 항의들
그러나 솔직히,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제기한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을 잘못 풀어 왔다고 고백한다. 며칠 전, 밀린 업무가 있어서 일요일에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그 날 어떤 분이 전화를 하여 거기가 지문날인 거부운동 하는 곳이냐고 다소 도발적으로 질문을 해 왔다. 명확히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항의의 어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현재 상황의 어려움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몇가지 양해를 구해보기도 하였지만, 전화를 걸어온 그 사람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어디 그 뿐인가. 올 초부터 지문날인거부 홈페이지(http://fprint.jinbo.net)에는 지문날인거부운동본부(준)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게 올라왔다. 뭔가 대책을 세우고 활동을 다시 해야 하는게 아니냐는 질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급기야 같이 이 운동에 동참했던 한 단체에서는 '유령공대위는 가라'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공대위와 같은 단체간 협의를 통한 운동진행에 대해 거세게 문제제기를 하였다.
거부자들이 '유령공대위'에 바란 것
사실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함께 했던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이 운동은 사태의 해결보다는 문제제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그럴 조짐이 생길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다음과 같은 비유도 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도 30년이 넘게 진행되어 오지만 별로 개선된 것이 없다. 더욱이 지문날인제도와 주민등록제도는 국가의 기본운영체계로 이미 굳어져 온 지 30년이 넘는 제도들이다.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부에서 형성되어 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판단도 판단이지만, 운동의 결과를 속단하면서 실제로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로 고통받는 것은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지문날인거부 운동본부(준)이 지문날인 거부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끝까지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말고 개기세요'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문날인 거부자들 중에 그렇게 개기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을까. 사실상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이 유령공대위에 요구한 것은, 최소한 개길 수 있는 명분을 달라고 한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너 하나만 아직까지 주민증 갱신을 안했다. 너 혼자 잘났냐' 고 몰아세우는 사람들에게 떳떳히 주장하고 밝힐 수 있는 그 명분을.
솔직히 고백한다
필자를 포함한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주체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참혹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현실에 굴복해 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동안 이들이 고난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신념을, 인간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던 그 당당한 자신감을 상실케 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혁명전사가 인민을 앞세워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자신의 안위를 도모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혁명전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들은 최소한 지문날인 거부자들의 고난과 이들의 신념과 의지가 꺾이는 일만은 방어하도록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떤 운동이건 성공할 수도 있고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아무런 성과를 못 남기고 그대로 무너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할 때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운동은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는 그 동력을 잃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스스로 보기에도 최근의 지문날인 거부운동은 참여한 사람들을 오히려 참혹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앞으로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지속시켜 나갈 동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과 우려가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문날인거부 운동본부입니다'
단언하건데, 이 싸움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3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지문날인과 주민등록제도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문제만은 아니다. 그동안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운동이 서서히 지문날인 거부자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강릉과 춘천, 원주에서 부산, 대구, 진해, 마산, 창원에서 광주, 전주, 대전에서 인천과 수원 그리고 서울에서,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스스로를 세우고자 했던 의지들이 이어져 그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고난들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이 최초의 고비를 넘기는 것 역시 이 사람들의 몫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다시 어떻게 모일 수 있는가, 그리고 이들이 어떤 행동을 다시 시작하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아직도 싸울 여지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지문날인 거부 홈페이지에 '우리가 지문날인거부 운동본부입니다'고 말한 어떤 거부자의 말과 같이, 우리 지문날인 거부자들이 그동안의 침잠을 걷고 다시 행동하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것, 올바르지 않은 제도를 거부하고 이를 바로잡는 것도 이러한 노력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