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64호
5.31 지방선거를 둘러싼 정세와 사회운동의 대응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지방자치
1)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국가의 개조
87년 이후 한국사회가 겪은 가장 커다란 변화는 한편으로 이른바 '민주화'이고 다른 편으로 신자유주의 재편이다. 한국에서 민주화는 이른바 '반공훈육국가'에 의한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의 보다 많은 국가화' ― 사회의 요구가 국가를 통해 보다 많이 대표되고 중재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 로 나아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사회'의 실체가 무엇인가 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면서, 자본과 금융과 시장이 곧 사회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때문에 민주화 기획은 다름 아닌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로 귀결된다. 개혁주의 세력과 NGO를 중심으로 한 이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를 관통하는 갈등과 적대에 기초한 사회비판/사회운동에 따라 다른 식으로 국가를 민주화하려는 기획, 예컨대 민중민주주의 등을 주장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등으로 인해 이들의 세력이 크게 축소되면서 결국 신자유주의가 승리하게 된다.
김대중 정부 당시 정부혁신방안으로 채택된 '신공공관리론'은 이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집약한다. 국가는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조건 아래 관료제와 권위주의를 일소하고 효율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업의 혁신방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는 이제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경영적 목표 하에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아니, 그 자신이 하나의 '기업가 국가'가 된다. 신자유주의, 이는 사회비판/사회운동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역설적 비극이다.
2) 신자유주의와 지방자치, 그리고 경영기법의 도입
지방자치의 도입 역시 정확히 이 같은 흐름의 일부다. 민주화는 반공훈육국가의 권위주의적인 중앙정부 권력을 문제삼으면서 분권화를 처방했지만, 그 결과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막론한 국가 전반의 신자유주의 재편이었다. 지방자치의 원리로 거론되는 것들은 신자유주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예컨대 '분권(화)'는 행정서비스라는 상품을 하나의 민족국가가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체제에서 다수의 지방정부가 경쟁적으로 공급하는 체제로 개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율' 또한 정부의 관여나 규제 없이 민간, 곧 시장경제가 행정을 지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개방' 역시 외부의 진입과 퇴출에 제한을 두지 않고 누구나 동등한 자격으로, 예컨대 사기업도 중앙정부와 동일한 자격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듯 분권과 자율, 개방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재편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동일선상의 가치로 기능한다.
실제로 중앙정부는 분권화라는 명분하에 지방정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전 세계적 경쟁 속에서 지방정부가 알아서 살아남을 것을 강제한다. 특히 취약한 재정자립도로 대표되는 지방정부의 만성적 재정위기의 제약 속에서, 지방재정력 강화와 지역소득 증대를 위한 지역경제 활성화가 지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바로 경영기법의 도입을 통한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다.
경영기법의 도입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고객, 핵심적으로 자본과 (세금을 낼 수 있는) 인구 중심으로 전반적인 행정서비스를 개조한다. '지역' 자체를 상품으로 변화시키고, 이 상품을 구매하는 구매자를 유치하기 위한 적극적 전략을 실행함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공공서비스가 자본유치라는 지상과제의 유인 요소로 변질되는 한편, 자본의 참여와 발언이 무제한적으로 보장되고, 이들에게 질 좋고 유순하게 관리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연계복지(workfare)가 적극적으로 실행된다. 둘째, 무한경쟁 및 재정위기 상황에서 한정된 인적, 물적 자원 및 정보를 전략적으로 사용할 필요성이 강조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른바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전면화한다. 그 이면은 물론 수익성 없는 분야에 대한 과감한 포기와 배제다. 이 같은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경영담론은 말끝마다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배제에 대한 공포' 류의 정념을 강화하고 이에 따라 대중들을 규율한다. 셋째, 이상의 목표를 실행할 수 있도록 대중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기법들을 도입한다. 예컨대 99년에 실행된 성과급제 대폭 보완이나 목표관리제 전면 도입/실시는 공직사회 내 경쟁을 보다 강화하여 공무원들을 규율한다. 이렇게 규율된 공무원들은 복지부동에서 벗어나 지역의 많은 대중들 특히 NGO들을 국가의 '에이전시'(agency)로 호명해 내야 한다. 이와 함께 사회적 합의나 파트너쉽, 또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른바 '협치'(協治,governance)가 강조된다. 이것의 기본 모형은 주식회사인데, 지역주민, 노동자, NGO, 기업 등을 지역의 이해관계자(stakeholder) 곧 '주주'의 형태로 참여시켜 지역적 합의를 도출(실제로는 강제)한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낳는 민중생존의 위기 때문에 위협받는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고 정책적 실행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의 과정은 지자체의 부활과 궤를 같이 한다. 후술하겠지만, 이렇듯 오늘날 지자체의 근본적 문제는 몇몇 토호세력들의 군림이 아니라 그 신자유주의적 운영원리와 구조에 있다.
5.31 지방선거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하여
위에서 우리는 간략하게 지자체를 규정하는 구조적 제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지자체일 뿐만 아니라 지자체 '선거'이며, 이는 전자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번 지자체 선거를 '대선 전초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번 지자체 선거가 2007년 대선까지의 정치지형을 규정짓는 중요한 계기점 중 하나라는 뜻이다. 한나라당은 이를 직접적으로 지자체 선거 전략으로 삼아, 노무현 정권 심판론을 전면화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한 정권의 지지기반 파괴가 지자체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봐 '지방권력교체론'이나 인물론/지역일꾼론 등으로 이 쟁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 의미를 모를 리 없고, 실제로 대통령, 행정부, 정당, 후보 등이 역할을 분담하여 특히 양극화 쟁점을 제기하고 이를 중심으로 개혁/보수 구도를 재형성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는 지방선거 전략 중 하나이지만, 그를 넘어서 2007년 대선과 이듬해 총선까지를 바라보는 전략의 성격을 띤다.
이렇듯 지배계급들은 지방선거를 전후하여 대선(이라는 지배계급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치일정)을 가름할 쟁점과 전선을 형성하려고 분주하다. 그렇다면 사회운동 역시 그 수준의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선거를 전후하여 제기된 쟁점을 이 같은 맥락에서 읽어내는 한편, 이 쟁점에 유능하게 대응함으로써 앞으로의 국면이 사회운동이 활동하기에 보다 유리한 구도로 갈 수 있게끔 하는 실천이 절실하다. 아래의 글은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1) 노무현정권심판론 對 지방권력교체론
최근 한나라당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법조브로커 윤상림 사건과 금융로비스트 김재록 사건,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관련사항을 이 정권의 3대 권력형 게이트로 규정하면서 이를 4월 국회에서 집중적으로 쟁점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들은 "특히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매각 의혹의 경우 정부차원의 인수과정 개입이 외국자본에 의한 국부유출을 불러왔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칠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한나라당은 각종 부정부패 사건을 매개로 5.31 지방선거의 핵심 기치인 노무현 정권 심판론을 전면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반면 열린우리당 은 이 쟁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 하고 있다. 이때 크게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는데, 우선 강금실 카드 등을 통해 전국적 쟁점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당 대 당 대결보다는 인물 선거로 가려고 한다. 동시에 이들은 정권심판론에 대응하기 위한 '지방권력교체론'을 내세우면서, 정치개혁의 '최후 단계'로서 지방토호세력들의 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현재 지자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나라당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 담론은 최근까지 크게 쟁점화되지 않았는데, 열린우리당은 최근 공천비리사태를 지방권력교체론을 띄울 수 있는 결정적 계기로 보고 노무현의 강력한 수사 지시 등을 통해 공세를 개시하고 있다.
이 자체는 선거 시기에 국한된 제한적 쟁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참여연대, 전국 YMCA 연맹, 함께하는 시민행동, 환경련, 문화연대 등의 단체와 광역지방자치단체의 지방선거 연대기구 참가단체 등 280여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2006년 지방선거연대가 열린우리당과 동일한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은 이 쟁점이 지방선거를 넘어서 개혁/보수 전선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월에 발표한 출범선언문에 따르면, 이들은 분권화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참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평가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들이 민생정치나 생활정치 식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채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흐름은 신자유주의 비판에 크게 미달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동원될 위험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들이 표방하는 지방권력교체론은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논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반한나라당 또는 반보수 전선으로 귀결되어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교란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다. 주지하듯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개혁 세력들의 집권 10년 동안 NGO에 대한 포섭 정책이 적극적으로 실행된 결과, 개혁 세력들과 NGO 사이에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앞서 분석한 것처럼 지자체의 도입 및 '협치' 전략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음을 NGO들이 적합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민주화의 시도로 오해한다는 점,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의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해 주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이 제시하는 민생정치나 생활정치 식의 담론도 문제다. 이들은 지방선거가 중앙 차원의 '정파적'인 논쟁에 휘둘려서는 안 되며, 지역 '현안'에 입각한 민생정치룰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접근이다. 우선 현재 지배정치의 위기를 알리바이 삼아 정치 자체를 공격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들은 정치/이념 논쟁이 과잉되고 민생 문제가 중심에 서지 못하는 것을 지배정치의 문제로 지적한다. 하지만 오늘날 지배정치의 문제는 정반대로 그것이 오직 민생 문제, 즉 행정적이고 통치적인 문제에 국한되어 있을 뿐, 그러한 행정적 조치의 근본 방향을 기초 짓는 정치/이념 논쟁이 철저히 억압되어 있다는 데 있다. 지배계급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관해서 완벽한 '합의'를 이루는 상황에서 민생 문제 차원에서의 차별성을 만들어내기가 극히 곤란하거니와, 이 같은 근본적 유사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억지로 차별점을 만들기 위해 매우 의사적이지만 동시에 극히 필사적인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생정치라는 접근은 오히려 현재 정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또 중앙/지방 차원의 구도를 만드는 것도 문제인데, 현재 중앙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가 지방정부를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에서, 전자를 문제 삼지 않고 후자만 얘기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앞서 지적했듯 오늘날 민생정치의 본질이 현실적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이기 때문에, 이것이 중심 쟁점이 되면 그때부터는 문제는 누가 더 자본이나 국책사업을 더 잘 유치해 올 수 있느냐 하는 논의가 되고, 결국 지역의 신자유주의적 개조에 대중들을 동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물론 민주적 제도/장치를 확대하자는 입장은 의미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조차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기치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배치되지 않는다면 심지어 반동적일 수조차 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민주화를 통해 정부의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사회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하에 있는 한에서, 사회비판/사회운동을 동반하지 않는 민주화란 결국 자본과 금융과 시장의 민주화,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의 가속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은 전통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타락한 자유주의자들, 곧 신자유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2) 사회양극화-사회통합 對 감세-작은정부
노무현 정권 내내 별다른 실체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던 성장-분배 논쟁은, 올해 초 노무현의 신년연설과 그에 이은 박근혜의 연두기자회견을 거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노무현은 집권 후반기 핵심 전략으로 사회양극화-사회통합 기획을 제시하고, 열린우리당은 아예 당 강령에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를 명시한다. 이에 대해 박근혜와 한나라당은 양극화 논란이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문제는 현 정부의 정책실정으로 인한 경기침체이며 이는 오직 성장을 통해서만 극복된다고 반박한다. 동시에 그들은 세인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양극화 재원 마련 문제를 적극적으로 부각하여 증세/감세, 큰정부/작은정부라는 쟁점을 만들어낸다. 이 쟁점을 둘러싸고 언론과 NGO를 비롯한 제 세력이 논쟁에 뛰어들고, 정부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아예 특별기획코너까지 마련하여 논쟁을 이어간다.
이처럼 전국 차원에서 제기된 담론과 의제는 지방선거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열린우리당은 행정수도이전을 비롯한 현 정부의 이른바 '지역균형발전정책'이 (사회양극화의 지역 판본으로서) 지역양극화 해소책이었다고 주장하고, 한나라당은 현 정부의 정책이 '하향평준화'였다면서 모든 지방을 서울수준으로 발전시키는 '상향평준화 지방발전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담론 수준뿐만이 아니다. 현재 정부가 사회양극화 극복 방안으로 제시하는 이른바 '동반성장론' 곧 '성장을 통한 고용'과 '고용을 통한 성장'은 각각 중소기업육성과 이른바 '사회적 일자리' 확대를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많은 중소기업들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일자리' 사업에서 지방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이는 지역 차원의 주요 의제로 다뤄질 수밖에 없다. 이 의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한 열린우리당은 물론, 한나라당도 중앙정부가 실패한 일자리 창출을 지방정부가 주도하겠다는 식으로 노무현 정권 심판론이라는 기조 아래 동일한 정책을 배치하고 있다.
언론 등에서는 현재의 논쟁 구도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특히 세금 논쟁의 경우 '대변하고자 하는 계층, 지향하는 이념적 좌표, 세우려는 정부의 성격'(『경향신문』 2006년 1월 27일자 사설)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은 지난 3월 23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세금 올려도 부자들이 더 부담'한다고 말하는 등, 증세가 마치 부유층을 겨냥한 급진적 정책인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가을 자본에게 법인세, 소득세, 개발부담금, 교통유발부담금 등 각종 조세지원과 부담금 감면혜택을 제공하는 '기업도시개발특별법'을 통과시킨 자들은 다름 아닌 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다. 또 대통령 직속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는 지난 2005년 중장기 조세개혁 과제를 담당할 조세개혁특별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이 위원회의 목표가 '국가 간 조세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 법인세, 소득세 등의 세율을 주요 경쟁국에 비해 불리하지 않도록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미 2005년 현재 국내 법인세율은 2004년보다 각각 2%포인트 낮아졌으며, 2005년 소득세율도 2004년보다 1%포인트 낮아진 7~35%로 조정됐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세금만 수십 조 원에 달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주장하는 증세는 이 같은 기존 조치들과 모순되는 것인가? 겉모습과 달리 양자는 완벽한 논리적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 핵심은 현 정부가 초기부터 표방한 바 있는 '넓은 세원과 낮은 세율'이다. 즉 금융과 기업의 무한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법인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은 아낌없이 깎아주되('낮은 세율'), 이렇게 해서 깎인 세금 및 신자유주의가 필연적으로 양산하는 사회갈등을 관리하기 위한 재원은 노동자 민중에게서 벌충하겠다는 것이다('넓은 세원'). 증세를 얘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집단이 전문직과 자영업자다. 그러나 이른바 고소득 전문직들이라 불리는 엘리트 기술관료 집단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지지기반인 한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들 집단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 현재 한국 자영업자들의 평균 소득은 2003년 임금 노동자보다 낮은 수준으로 반전된 이후 그 격차가 해마다 점점 커지고 있다. 또한 2003년 기준으로 고용주의 월평균 소득은 319만 1,000원인 데 비해 자영자는 이의 절반도 안 되는 152만 9,000원에 불과하며, 이중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에도 못 미치는 자영업자의 비중이 전체 자영업자의 24.7%인 110만 명에 이른다. 즉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IMF 경제위기와 대량실업으로 양산된 빈민들인 셈이다. 현재 정부가 산업 양극화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중소기업 곧 자영업자 중 고용주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방향을 밝힌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 빈민이 세금 징수의 주된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재경부는 지난 1월 31일 저출산 대책 및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한 추가재원 일부를 확보하기 위해 2007년부터 1~2인 가구의 근로소득에 대한 추가공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 재원 마련을, 다른 편으로 사회적 규범 강제를 목표/명분으로 국가가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한 집단에게 세금징수를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담배세나 주세 등 간접세 인상을 통해 복지재원을 마련한다는 주장에 이르면 이른바 '좋은 정부'의 본질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비겁한 정부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증세를 해서 확보한 재원을 가지고 집행하는 정책이 문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현재 국가적 의제로 설정한 것은 한편으로 사회양극화 해소이고 다른 편으로 저출산/고령화 해결이다. 전자의 핵심 조치 중 하나로 제시되는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산업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이번 비정규법 개악안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이목희 등이 분명히 말했듯 비정규직 확대를 비롯한 노동권에 대한 전면 공격이 필수적이다. 또 양극화 해소와 저출산/고령화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묘수로 제시되는 '사회적 일자리' 확대 나아가 '사회적 기업'의 설립이란, 국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복지 등 기초서비스를 상품화된 형태로 도입하여 자본에게 새로운 이윤의 원천을 제공해 주는 것이면서, 대량실업을 저임금불안정노동과 '사회안전망'의 형태로 분할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라는 신자유주의 복지 이념과 궤를 같이 하는데, 주지하듯 이는 대량실업과 재정위기가 기존의 복지 제도에 내재한 탈노동유인(work disincentive)과 그에 젖은 '나태한 개인들'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위기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호도한다. 최근 정부가 도입하겠다고 주장하는 근로소득보전세제(EITC) 역시 정확히 동일한 전제 위에 서 있다. 이는 '일을 통한 빈곤 탈출'이라는 그럴 듯한 명목 하에 노동의 성격에 대한 문제제기를 체계적으로 억압하여 불안정노동을 존속시킨다. 또 사람들이 단 몇 만원의 유인 때문에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따라서 단 몇 만원의 탈유인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리하여 이 몇 만원의 탈유인을 제거하는 식으로 복지 제도를 개악하면 대량실업이 해결될 것이라고 대중들을 모멸하는 파렴치한 논리를 펼친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발본적 저항이 조직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본에게 '좋은 정부'의 본질이다.
3) '역(逆)색깔론' 對 국가정체성 논쟁
현 정부 들어 지겹게 반복되던 또 다른 논쟁 중 하나가 바로 '정체성' 논쟁이다. 과거사 진상규명법을 비롯한 이른바 '4대개혁입법'을 둘러싸고 절정에 달했던 정체성 대립은, 한나라당의 사립학교법 장외투쟁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을 둘러싼 논란,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분배/성장, 증세/감세, 큰정부/작은정부 논쟁에서도 빠짐없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이 독도 인근의 한국 측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대해 수로측량계획을 밝힌 것을 기화로, 오히려 열린우리당 쪽에서 정체성 논쟁을 도발한다.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강금실은 지난 4월 19일 '마흔여섯 돌을 맞는 사월혁명, 그리고 독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독도분쟁의 기원이 박정희의 굴욕외교라면서 박근혜와 한나라당을 겨냥하는 한편,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 '일부 아시아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역사에 얽매여 국가 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이명박을 비난한다. 경기지사 후보인 진대제는 박정희가 4.19를 짓밟았고 박근혜는 그의 딸이기 때문에 독도 문제를 다룬 청와대 만찬에 불참한 것이라는 한층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다음 날인 20일 노무현이 조찬기도회에서 독도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확언하는 한편, 25일 대부분의 내용을 노무현 스스로 썼다는 대통령 특별담화문에서 각종 원색적 수사를 사용해 가며 일본에 '전면전'을 선포한다. 한편 보수세력들은 '독도분쟁 원인제공 김대중 규탄'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또 최근 이회창은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담론이 '무산대중이여 집결하라'는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투쟁 선동을 연상케 한다는 실로 어이없는 비난에서 시작하여 현 정부의 정책 전반을 색깔론 차원에서 맹비난하면서, 이 '좌파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비(非)좌파세력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식의 논란이 지방선거를 비롯한 앞으로의 부르주아 정치일정에서 얼마나 쟁점화될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몸소 체험했듯 정체성 논쟁은 여전히 가장 손쉽게 개혁/보수 구도를 (재)형성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이회창이나 뉴라이트 등 극단적 보수세력이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는 한, 그들에 대한 증오와 공포 따위의 정념을 체계적으로 부추기고 활용하는 비이성적 '비판적 지지론'은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들어선 각종 위원회와 국책프로젝트 사업, 정부지원금 등이 사회운동의 NGO화 경향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 왔고 그 결과 실제로 많은 NGO들이 신자유주의 정치세력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수준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비지론은 이른바 진보주의 세력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물질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사회운동의 NGO 경향과 견결히 단절하고 사회운동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로 나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 이미지 정치와 정치의 미디어화
최근 이미지 정치가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서울시장 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강금실과 오세훈 때문이다. 정치개혁의 방향 중 하나로 '미디어 정치'를 합의한 지배계급들이 보기에도 이건 심하다고 할 정도인데, 이는 오늘날 정치위기의 현실을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주지하듯이 강금실 카드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정권 기반의 파괴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지자체에서 필패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당 지도부는 물론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개혁세력들 모두로부터 '강다르크'가 되어 달라는 러브콜을 받았고, 출마 여부를 둘러싸고 언론의 이목도 그녀에게 집중됐다. 그런 상황이 한참 계속되다가 마침내 강금실이 출마 의사를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당 지도부와의 공식회동 같은 곳에서가 아니라 그녀를 서울시장후보로 만들려고 누구보다 앞장서 노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였다(『한겨레 21』 2006.03.07(제599호) 「표지이야기」). 그런데 이렇게 출마의사를 밝힌 후 정식으로 출마선언을 한 것은 이로부터 무려 한 달 가까이 지난 4월 5일이었다. 한 기자는 이것이 광고기법의 일종인 티저(teaser)광고, 즉 정식으로 제품이 출시되기 전까지 제품의 일부만 보여주거나 극히 제한된 정보만 제공해 소비자들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높여 최종적으로는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마케팅 전략을 사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출마선언을 한 날의 광경은 더 기막히다. 식목일인 4월 5일, 봄꽃이 만발한 정동길을 15분 넘게 걸어 기자회견장인 정동극장에 도착한 강금실은 보라색 일색의 복식을 한 채 보라색 천으로 장식된 '극장' 무대에서 보라색 아이리스 화분을 배경으로 출마선언문을 낭독하고, 식목일에 맞게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생명의 푸르른 나무'라는 괴테의 경구를 읊는다. 출마선언이 있은 바로 다음날 MBC <100분 토론>에서는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강금실 단독 초청 토론회를 개최한다. 4월 7일 청계천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전태일 거리를 찾음으로써 이명박과의 차별화를 꾀한다. 또 '시민후보', '춤을 즐기는 자유로운 개인', '문화', '삶의 질', '주5일 근무시대에 맞는 후보' 등 열린우리당과 강금실을 차별화하는 (다시 한번 한 기자의 분석을 빌리자면) '개별브랜드 전략'이 가동된다.
이러한 '강풍'에 힘입어 오세훈이 등장한다. 온 언론이 떠들썩한 가운데 강금실의 인기가 한창 치솟던 4월 3일, 오세훈은 처음으로 출마 얘기를 꺼내고, 4월 9일에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오세훈 효과'에 힘입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무려 8.3%가 급상승한다.
이들의 등장과 인기는 신자유주의 하 정치위기가 취하는 형태를 잘 보여 준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추진은 여야를 막론한 기존 정치세력들의 지지율 하락을 초래하고, 이 때문에 과거 노무현이 그랬고 지금 강금실과 오세훈이 그런 것처럼 정당과 차별화하여 개인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이 일반화된다. 당의 정강을 가장 잘 표현하기보다는, 당과 거리를 두고 당을 상대화하는 권위를 더 선호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정당정치에 기반한 대의제 전반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이른바 '인민주의'의 출현과 궤를 같이 한다. NGO를 비롯한 각종 '씽크탱크'(Think Tank)와 미디어, 그리고 행정부를 핵심 축으로 하는 반(反)대의제적인 기술관료체계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한편, 이 기술관료체계의 정당성을 보충해 주는 '미디어 스타' 정치인이 출현한다. '대표'(representative)로서의 정치인은 기술관료와 미디어 스타로 '양극화'되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미디어가 정치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이해하기 위해 미디어의 특성과 효과를 잠시 고찰해 보자. 미디어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신체를 초월하여 사건을 체험하고 다른 인물/집단과 동일화될 수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즉 미디어는 신체 간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라는 느낌을 상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 이는 연극이나 영화 등 모든 형태의 상상적이고 미학적인 체험 안에 매양 있어왔던 것인데, 이것이 미디어를 통해 일상생활 전반으로 더욱 강하게 확산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전혀 다른 조건 예컨대 서로 다른 계급적 기반에 속한 이와 동일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리고 미디어는 개인에게 새로운 관계들을 개방할 뿐만 아니라 그 관계들이 개인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느낌을 준다. 시청자에게는 수많은 채널이 제공될 뿐 아니라 언제든 채널을 돌릴 수 있고, 네티즌 역시 무한히 많은 주소들 사이를 자의로 넘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현실과의 거리두기를 목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는 차이나 갈등을 배척하고 협소한 동일성 주위를 회전할 가능성이 높다. 언제든 별다른 제약 없이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굳이 차이나 갈등을 인내하려 들지 않으며, 결국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취향과 기호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관계는 폐쇄적인 거울관계로 흐를 위험을 갖는다.
또한 미디어의 본질 중 하나는 '전송', 즉 공간적/시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전에는 쉽게 또는 심지어 전혀 접할 수 없던 현상이나 '지각' ― 텔레비전은 말 그대로 'tele-vision', 즉 거리를 넘어선 '시(청)각'이다 ― 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생생함은 전송에 필연적으로 포함된 '편집'이라는 계기를 은폐한다. 한두 가지 극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몇 년 전 한 TV 방송에서 세계무역센터 폭격 장면을 보여준 직후 환호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게 편집된 뉴스를 내 보낸 적이 있다. 이렇게 편집된 뉴스를 본 대중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아랍인'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심지어 일종의 '외계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미디어는 이런 식의 장면을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전송함으로써 극히 낯선 존재가 아주 가까이 있다 ― 극히 낯선 존재가 아주 멀리 있거나 유사한 존재가 가까이 있다 는 식이 아니라 ― 는 역설적 느낌을 줄 수 있고, 이는 극도의 불안(과 그 이면으로서 알 수 없는 매혹)과 같은 정서를 일으킬 수 있다. 정반대로 우리와 매우 다르고 낯선 존재의 이미지 또는 불안을 자아내고 따라서 뭔가 행동을 촉구하는 현상을 매우 친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서사와 틀 안으로 편집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상투화(stereotype) 수법에 따라 안락함이, 따라서 부주의와 무관심이 생겨날 수 있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여러 가지 편집 효과가 있을 텐데, 전혀 다른 계급적 조건에 처한 개인이나 집단을 흔히 말하는 '인간적 모습'의 틀로 편집해 친근감을 자아낼 수도 있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가령 범죄자에 대한 선정적 보도에서처럼 편집함으로써 '공공의 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처럼 미디어에 고유한 편집 ― 이는 '조작'으로 환원될 수 없다 ― 은 보도와 '진실' 또는 차라리 다른 식의 해석가능성 간의 구조적 거리를 낳게 되고, 이 거리에서 나오는 불투명성을 한번이라도 겪어 본 대중들로 하여금 '사실'이나 '지각' 등 세상을 체험함에 있어 안정적이고 객관적인 준거점으로 기능하는 것들을 회의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같은 회의가 상당한 혼란과 불안을 초래하는 한에서, 미디어가 주는 불투명성을 부인하고 사실과 지각에 오히려 맹목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세상을 체험하는 안정적 방식을 (재)획득하려는 시도가 발생하기도 한다. 혹자는 그 대표적 사례로 스포츠 경기 중계를 든다. 스포츠 경기에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결정되며, 모든 경쟁자들은 마찬가지로 분명한 순위 안에 배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간단하게 소묘한 미디어의 특성은 갈등에 기초한 민주주의 정치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컨대 계급적대와 같은 근본적 차이와 갈등을 상대화하는 '사회통합' 정치 또는 극단적으로는 파시즘 정치(주지하듯 벤야민은 파시즘을 ‘정치의 미학화’라 불렀다)를 지지한다거나, 갈등을 대면하고 인내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정치보다는 폐쇄적인 동일성의 정치를 부추긴다거나, 세상을 스포츠 경기처럼 분명하고 위계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나 경쟁 원리, 카리스마적 스타에 대한 열광 등을 일반화하는 '정치의 스포츠화' 따위의, 정치를 체험하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한다든가,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상투화된 사고/지각방식이 현실에 대한 사고/지각방식을 점점 더 크게 규정한다든가 하는 따위가 그런 것이다. 어쨌든 정치의 미디어화가 단순히 정치에서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훨씬 넘어 정치 전반의 변형을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을 때 지배정치 위기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식의 우익적 비판이 아니라 좌익적인 정치 비판과 정치 개조에 관한 입장을 세우는 것이 매우 시급할 것이다. 이는 좀 더 깊이 고민해 볼 과제인데, 다만 두 가지 정도의 일반 원칙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현재의 상황에서 의회정치라는 부르주아 대의제 ― 물론 한국에서는 이것이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되어 본 적 없지만 ― 를 정상화시키자는 주장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르주아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를 조야하게 대립시키거나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식의 접근은 현 정세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특히 전문가주의에 입각한 행정권력의 강화와 NGO를 동원한 '협치' 전략, 그리고 정치의 미디어화에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점점 확대되는 '대표되지 않는 권력'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대중들의 정치적 발언권과 결정권을 유효하게 확대할 수 있는 정치의 새로운 민주화 방안을 사고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미디어를 거부하는 투명한 대면소통/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재 식의 정치의 미디어화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정치의 미디어화는 기술관료제 및 거기에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는 미디어 스타 정치인을 만들어 냄으로써 대중정치를 제약하고 인민주의를 물질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미디어가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만일 사실과 지각과 같은, 우리가 가장 안정적이고 객관적이라고 간주하는 준거점조차 항상 이미 미디어를 매개한 것임을 드러낸다면, 대중들의 사고 양식 전반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미디어에 대한 일방적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라 미디어 비판과 변혁, 이를 통한 새로운 사고 양식의 구성이다.
지방선거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 평가
1) '선거투쟁'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이번 지방선거에 대한 민중운동 진영을 간략히 평가하는 것으로 서툰 분석을 마칠까 한다. 현재 지방선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집단은 단연 민주노동당이다. 현재 민주노동당은 전국적으로 15% 곧 300만 표의 지지를 확보하여 전국 정당 및 명실상부한 제3 정치세력으로서의 정치적 위상을 획득하고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대응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현재 자신들이 '체제비판적인 시민운동단체' 정도로 여겨질 뿐 집권을 추구하는 정당으로서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는 원내에서 결정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이번 선거에서 전국 곳곳에서 단체장과 지방의회에 진출함으로써 수권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300 공직자 시대 개막'을 기치로 지난 2002년 지방선거에 비해 6배나 많은 후보들을 출마시키는 등 지방선거에 당력을 총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무현정권심판론과 지방권력교체론을 각각 핵심 기치로 내건 양당 사이에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부각시키기 위해 비정규법안과 한미FTA, 그리고 평택미군기지 확장 등의 이슈가 모든 선거공간에서 발언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민주노동당이 매우 활발한 선거활동을 펼치고 있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NGO 세력들이 열린우리당과 보조를 맞춰 선거에 대응하는 데 반해, 양자와 구별되는 계획과 위상을 가지고 선거에 개입하는 사회운동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드물다. 선거에 대응하려는 이들은 주로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전에 하던 사업을 계속하는 식으로 양자가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중에는 이번 선거가 총선이나 대선이 아니라 지자체 선거라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87년 이래 경험한 이른바 '선거투쟁', 즉 선거라는 국면을 계기로 정당과 대중운동이 결합하는 방식이 점점 더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좀 더 일반적인 경향의 징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핵심 원인 중 하나는 미디어 정치의 강화다. 지난 2004년에 통과된 정치관계법 개정안 중 선거법에 따르면, '선거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공정히 치러지도록 각종 제도적 장치를 신설, 보완하고 합동연설회 및 정당후보자 등에 의한 연설회를 폐지하고 신문방송 등 각종 미디어매체를 통한 선거운동을 확대함으로써 고비용 선거구조를 혁신하고 선거비용 지출의 투명화를 기하는 등의 새로운 선거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우리 정치문화의 선진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개정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합동연설회, 정당, 후보자연설회가 폐지되고, 후보자 외 3인 이상이 무리를 지어 연호하거나 인사하는 행위 등도 금지된다. 대신 미디어 선거가 강화되는데, 이번 지방선거에는 16개 광역시/도를 비롯한 238개 지자체의 법정 방송토론회만 470여회에 달하며, 이 외로 각종 언론매체와 인터넷 동영상까지를 합한다면 미디어의 비중은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거 사회운동들이 '선거투쟁'에 결합하면서 주되게 기여했던 방식, 특히 장외 대중집회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당에 결합하여 선거운동을 하는 이들에게조차 관건이 되는 것은 비중이 높아진 미디어 선거를 지지하기 위해 각종 후원회를 조직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이 안정화되면서 자체적인 의사결정구조가 강한 물질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과거처럼 제도화된 당이 없는 상태에서의 결합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거니와, 우리는 이 점을 이미 지난 대선과 총선 때 경험한 바 있다. 특히 당에서 선거 사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높고 그에 따라 평상시에도 선거 일정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거나 실행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운동들이 선거 시기에 닥쳐 다소 급작스럽게 당과 선거대응 문제를 논의하는 식으로는, 제대로 된 개입이 거의 불가능하고 대개의 경우 기존에 만들어진 당의 사업을 대중운동들이 따라가는 수준을 크게 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 정당들이 하는 식으로 선거대응을 중심으로 '외부인사'를 영입한다거나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도 별로 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것 같다.
이런 식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정도의 길을 구별해 볼 수 있는데, 양자는 사고의 편의상 구별한 것일 뿐 현실에서는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선거를 비롯한 제도 정치 전반에 대한 개입과 관련하여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사고와 계획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 사고와 계획 안에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이 포함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으로 환원되지 않는 심지어 이를 상대화하는 기획이다. 왜냐하면 민주노동당이 선거 및 제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전담'하는 조직은 아니고, 또 그것은 다른 운동조직은 물론 민주노동당 자신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04년 총선 당시 제기되었던 '국민발의/국민소환'의 문제의식을 상기해 볼 수 있다. 특히 국민발의에서 핵심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당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규모의 대중운동이 자신의 역량에 기반을 두어 제도를 쟁점으로 한 대중운동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조건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연장하는 가운데, 다른 여러 수준의 사고와 계획을 진척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의 경우에도 의사결정구조 및 당 자체의 구조를 당 외부의 사회운동에 보다 개방적이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처럼 당의 의사결정구조 안에 거대대중운동 단위의 지분을 인정하는 문제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운동 스스로 대중적 의제를 설정할 수 있는 독자적 역량을 갖추고 독립적 활동을 펼침으로써 선거나 제도가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 상층 수준에 결합해 선거에서 무슨 무슨 의제를 다뤄달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에 대해, 이조차도 현재 시점에서는 당을 통해 실행되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부 당내 좌파들은 선거 등의 시기에 당이 일종의 '충격자' 역할, 즉 사회운동적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사회화하는 역할을 놂으로써 사회운동에 유리한 정치지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우에 따라 사회운동들이 당 특히 상층 구조에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당이 사회운동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 내에 수권/정책정당 경향과 사회운동적 경향이 공존하고 있고 양자가 모두 당의 의사결정구조 안에 반영되어 있는 상황에서 후자를 앞세우는 것은 당분간 어렵거나 정세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의 사회운동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 전통적인 당의 전술적 활용론, 즉 합법공간에서 선전선동을 수행하는 부대라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수권/정책정당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당 내에 적지 않고 정서적으로는 아마 이들이 다수파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조직 안에 이런 류의 갈등이 있다고 했을 때 이는 갈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가면서 해결해 갈 문제지, 단순히 상층 차원에서 급진적인 기획을 제시한다고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가려면 특히 당 내의 사회운동적 기획이 고사하지 않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당 외부의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역량을 구축해 가는 것이 필수적 조건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당이나 제도 전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과 제도의 생명력의 원천이 사회비판/사회운동에 있고, 그럴 때에만 정당의 사회운동적 추동이, 선언이나 바람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국한해 보자면, 민주노동당 스스로 중요 쟁점으로 삼겠다고 밝힌 비정규법안/한미FTA/평택미군기지 확장 문제와 관련하여 공동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수권/정책정당론에 입각해 이런 투쟁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이 당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특히 지자체 선거에서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이 투쟁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전개함으로써 당을 추동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회운동 스스로의 몫이다.
2) '대안주의' 및 수권/정책정당론 비판: 대중적 대안을 구성하기 위한 우리의 실천
현재 민주노동당 안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경향 중 하나는 수권/정책정당화 기획이다. 특히 2012년 집권이 어쨌거나 당의 공식적 목표인 한에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실제로 집권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믿음을 주자는 것이 민주노동당을 기초 짓는 주장 중 하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비단 민주노동당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비판에 머물지 말고 '대안' 세력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활동가들 역시 동일한 논리를 갖는다. 이는 특히 90년대 들어 세력을 확장한 NGO식 전문가주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겉보기에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당위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안을 얘기하는 것도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말의 부정적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보이는 정책, 이른바 '대중들의 이해와 요구'라는 제한을 넘지 않는 정책을 제시하고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실용주의'적 태도는 실상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좌표 안에 머물 수밖에 없고, 이는 현재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합의에 복종하라는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이른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대안일 것이다. 이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좌표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일 수밖에 없고, 그런 한에서 아직 비현실적이거나 심지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항상 갖는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의 대안은 사실상 실용주의의 변종에 불과한 대부분의 '대안 이데올로기'와 근본적 거리를 둔 채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에 관한 우리의 일차적 기준은 신자유주의냐 반신자유주의냐 에 놓여야지, 실용주의적 현실성 여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대안은 오직 대중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의 사고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얼핏 보면 또 다른 당위적 명제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당위로 환원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포함된다. 즉 대안을 생산하고 또 그것을 대중들과 공유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대중들의 사고를 제약하는 구조/모순들에 맞서 싸우고, 대중들이 비판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인 사고를 하거나 또는 그런 사고와 교통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그것이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서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의 유명한 테제, '하나의 전체 ― 만약 이 전체가 충분한 크기를 갖고 있다면 ― 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 다수가 어떤 부조리한 일에 동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정치론』 6장 1절)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이 테제의 기초에는 사고와 정서의 분리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통찰이 있다. 즉 대중들이 국가장치에 개별적으로 종속되어 있을 때 겪는 정서 가장 핵심적으로 '공포'는 대중들의 사고를 크게 제약하는 한편, 대중들이 국가장치를 변혁하여 새로운 형태의 집단을 구성함으로써 생산해 내는 '기쁨' 등의 정서는 대중들의 사고 역량을 크게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대안, 그것도 대중적인 대안을 추구한다면, 이 대안의 생산과 수용을 가로막는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고 새로운 정서적/지적 조건을 창출해 내야만 한다.
우리가 사회운동이라는 말을 통해 지시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합의와 이에 동반되는 공포('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를 재생산하는 국가장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가운데 그것을 해체/변혁/재배치하여 대중들의 집합적 역량을 증대시키고 이로부터 나오는 기쁜 정서들에 힘입어 대중들의 사고를 전진시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한 철학자의 말처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명제는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는 유물론적 명제로 전도되어야 한다.
이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정책대안론을 비판할 수 있다. 사실 현실성이나 수권능력의 입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정책대안인데, 사실 민주노동당이 이런 정책대안 자체를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다. 또 설사 만들어 낸다 할지라도 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 있는 경로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책대안론은 필연적으로 NGO를 비롯한 전문가들과 미디어 등 넓은 의미의 '지식인'들과의 동맹을 필요로 한다. 전문가들을 '씽크탱크'로 활용하여 정책대안을 생산하는 한편 이를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화하는 것이 정책대안론의 실행 형태일 것이다.
앞서 정치의 미디어화 문제는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지식인과의 동맹 문제만을 얘기해 보자. 이 역시 겉보기에 부정할 수 없는 당위적 명제다. 하지만 그 형태와 방식은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즉 그것은 기존 지배구조에 내재한 지적 위계와 불평등 문제를 변혁해 가는 문제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발언권을 확대하는 민주주의적 조치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지식인들에게 가해지는 이데올로기적/물질적 제약을 변혁하고 새로운 지적 발전의 조건을 구성하는 문제다. 전통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부르주아 헤게모니에 입각한 계급동맹을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입각한 계급동맹 ― 물론 이에 대한 비판과 심지어 해체를 허락하는 ― 을 형성하는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날 지식인들 또는 차라리 지식을 생산하는 양식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적/물질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해야 한다. 이 같은 비판적 인식과 사회운동 없이 당위적으로 지식인들과의 동맹을 선언하는 것은 결국 부르주아 헤게모니와 관료제로 귀결될 뿐이다.
'민주화'의 역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사회비판과 사회운동에 기초한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90년대 이후 지자체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지자체 일반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의 국가가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진단한다고 해서 국가 일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와 다를 바 없었던 기존 '민주화' 기획을 (단순히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민중민주주의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 마찬가지로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효과 면에서 거의 다를 바 없는 '지방권력교체론'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는 지자체 변혁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를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보면 현실의 복합성을 통찰하는 변증법 같지만, 실상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요소들이 정세 속에서 모순적 통일을 이룰 수 있음을 몰이해하는 기계론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화 기획이 신자유주의로 이어진 것은 사회비판/사회운동의 계기가 억압됐기 때문이다. 사회와 국가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억압받고 배제되는 적대와 갈등의 '몫소리'를 외치고 듣는 것만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속에서 극히 축소된 민중민주주의 또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기획을 재개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회비판/사회운동은 당위가 아니라, 대중에 기초해 '대안'을 생산하고 대중에게 대안을 검증받으며 대중에 힘입어 대안을 실현하고자 하는 민중민주주의의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몇몇 전문가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대안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미혹을 버리고, 대안의 이데올로기적/물리적 조건을 구축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대중들의 자유와 사고를 억압하고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대중적 대안의 출현을 한층 어렵게 만들 비정규직법안과 한미FTA, 그리고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통한 전략적 유연성 기도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적’ 쟁점으로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개혁/보수 전선을 재구축하려는 신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1)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국가의 개조
87년 이후 한국사회가 겪은 가장 커다란 변화는 한편으로 이른바 '민주화'이고 다른 편으로 신자유주의 재편이다. 한국에서 민주화는 이른바 '반공훈육국가'에 의한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의 보다 많은 국가화' ― 사회의 요구가 국가를 통해 보다 많이 대표되고 중재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 로 나아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사회'의 실체가 무엇인가 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면서, 자본과 금융과 시장이 곧 사회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때문에 민주화 기획은 다름 아닌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로 귀결된다. 개혁주의 세력과 NGO를 중심으로 한 이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를 관통하는 갈등과 적대에 기초한 사회비판/사회운동에 따라 다른 식으로 국가를 민주화하려는 기획, 예컨대 민중민주주의 등을 주장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등으로 인해 이들의 세력이 크게 축소되면서 결국 신자유주의가 승리하게 된다.
김대중 정부 당시 정부혁신방안으로 채택된 '신공공관리론'은 이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집약한다. 국가는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조건 아래 관료제와 권위주의를 일소하고 효율성과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업의 혁신방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는 이제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경영적 목표 하에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아니, 그 자신이 하나의 '기업가 국가'가 된다. 신자유주의, 이는 사회비판/사회운동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역설적 비극이다.
2) 신자유주의와 지방자치, 그리고 경영기법의 도입
지방자치의 도입 역시 정확히 이 같은 흐름의 일부다. 민주화는 반공훈육국가의 권위주의적인 중앙정부 권력을 문제삼으면서 분권화를 처방했지만, 그 결과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막론한 국가 전반의 신자유주의 재편이었다. 지방자치의 원리로 거론되는 것들은 신자유주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예컨대 '분권(화)'는 행정서비스라는 상품을 하나의 민족국가가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체제에서 다수의 지방정부가 경쟁적으로 공급하는 체제로 개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율' 또한 정부의 관여나 규제 없이 민간, 곧 시장경제가 행정을 지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개방' 역시 외부의 진입과 퇴출에 제한을 두지 않고 누구나 동등한 자격으로, 예컨대 사기업도 중앙정부와 동일한 자격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듯 분권과 자율, 개방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재편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동일선상의 가치로 기능한다.
실제로 중앙정부는 분권화라는 명분하에 지방정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전 세계적 경쟁 속에서 지방정부가 알아서 살아남을 것을 강제한다. 특히 취약한 재정자립도로 대표되는 지방정부의 만성적 재정위기의 제약 속에서, 지방재정력 강화와 지역소득 증대를 위한 지역경제 활성화가 지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바로 경영기법의 도입을 통한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다.
경영기법의 도입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고객, 핵심적으로 자본과 (세금을 낼 수 있는) 인구 중심으로 전반적인 행정서비스를 개조한다. '지역' 자체를 상품으로 변화시키고, 이 상품을 구매하는 구매자를 유치하기 위한 적극적 전략을 실행함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공공서비스가 자본유치라는 지상과제의 유인 요소로 변질되는 한편, 자본의 참여와 발언이 무제한적으로 보장되고, 이들에게 질 좋고 유순하게 관리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연계복지(workfare)가 적극적으로 실행된다. 둘째, 무한경쟁 및 재정위기 상황에서 한정된 인적, 물적 자원 및 정보를 전략적으로 사용할 필요성이 강조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른바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전면화한다. 그 이면은 물론 수익성 없는 분야에 대한 과감한 포기와 배제다. 이 같은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경영담론은 말끝마다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배제에 대한 공포' 류의 정념을 강화하고 이에 따라 대중들을 규율한다. 셋째, 이상의 목표를 실행할 수 있도록 대중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기법들을 도입한다. 예컨대 99년에 실행된 성과급제 대폭 보완이나 목표관리제 전면 도입/실시는 공직사회 내 경쟁을 보다 강화하여 공무원들을 규율한다. 이렇게 규율된 공무원들은 복지부동에서 벗어나 지역의 많은 대중들 특히 NGO들을 국가의 '에이전시'(agency)로 호명해 내야 한다. 이와 함께 사회적 합의나 파트너쉽, 또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른바 '협치'(協治,governance)가 강조된다. 이것의 기본 모형은 주식회사인데, 지역주민, 노동자, NGO, 기업 등을 지역의 이해관계자(stakeholder) 곧 '주주'의 형태로 참여시켜 지역적 합의를 도출(실제로는 강제)한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낳는 민중생존의 위기 때문에 위협받는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고 정책적 실행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상의 과정은 지자체의 부활과 궤를 같이 한다. 후술하겠지만, 이렇듯 오늘날 지자체의 근본적 문제는 몇몇 토호세력들의 군림이 아니라 그 신자유주의적 운영원리와 구조에 있다.
5.31 지방선거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하여
위에서 우리는 간략하게 지자체를 규정하는 구조적 제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지자체일 뿐만 아니라 지자체 '선거'이며, 이는 전자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번 지자체 선거를 '대선 전초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번 지자체 선거가 2007년 대선까지의 정치지형을 규정짓는 중요한 계기점 중 하나라는 뜻이다. 한나라당은 이를 직접적으로 지자체 선거 전략으로 삼아, 노무현 정권 심판론을 전면화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한 정권의 지지기반 파괴가 지자체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봐 '지방권력교체론'이나 인물론/지역일꾼론 등으로 이 쟁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 의미를 모를 리 없고, 실제로 대통령, 행정부, 정당, 후보 등이 역할을 분담하여 특히 양극화 쟁점을 제기하고 이를 중심으로 개혁/보수 구도를 재형성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는 지방선거 전략 중 하나이지만, 그를 넘어서 2007년 대선과 이듬해 총선까지를 바라보는 전략의 성격을 띤다.
이렇듯 지배계급들은 지방선거를 전후하여 대선(이라는 지배계급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치일정)을 가름할 쟁점과 전선을 형성하려고 분주하다. 그렇다면 사회운동 역시 그 수준의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선거를 전후하여 제기된 쟁점을 이 같은 맥락에서 읽어내는 한편, 이 쟁점에 유능하게 대응함으로써 앞으로의 국면이 사회운동이 활동하기에 보다 유리한 구도로 갈 수 있게끔 하는 실천이 절실하다. 아래의 글은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1) 노무현정권심판론 對 지방권력교체론
최근 한나라당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법조브로커 윤상림 사건과 금융로비스트 김재록 사건,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관련사항을 이 정권의 3대 권력형 게이트로 규정하면서 이를 4월 국회에서 집중적으로 쟁점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들은 "특히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매각 의혹의 경우 정부차원의 인수과정 개입이 외국자본에 의한 국부유출을 불러왔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칠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한나라당은 각종 부정부패 사건을 매개로 5.31 지방선거의 핵심 기치인 노무현 정권 심판론을 전면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반면 열린우리당 은 이 쟁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 하고 있다. 이때 크게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는데, 우선 강금실 카드 등을 통해 전국적 쟁점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당 대 당 대결보다는 인물 선거로 가려고 한다. 동시에 이들은 정권심판론에 대응하기 위한 '지방권력교체론'을 내세우면서, 정치개혁의 '최후 단계'로서 지방토호세력들의 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현재 지자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나라당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 담론은 최근까지 크게 쟁점화되지 않았는데, 열린우리당은 최근 공천비리사태를 지방권력교체론을 띄울 수 있는 결정적 계기로 보고 노무현의 강력한 수사 지시 등을 통해 공세를 개시하고 있다.
이 자체는 선거 시기에 국한된 제한적 쟁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참여연대, 전국 YMCA 연맹, 함께하는 시민행동, 환경련, 문화연대 등의 단체와 광역지방자치단체의 지방선거 연대기구 참가단체 등 280여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2006년 지방선거연대가 열린우리당과 동일한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은 이 쟁점이 지방선거를 넘어서 개혁/보수 전선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월에 발표한 출범선언문에 따르면, 이들은 분권화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참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평가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들이 민생정치나 생활정치 식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채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흐름은 신자유주의 비판에 크게 미달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동원될 위험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들이 표방하는 지방권력교체론은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논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반한나라당 또는 반보수 전선으로 귀결되어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교란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다. 주지하듯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개혁 세력들의 집권 10년 동안 NGO에 대한 포섭 정책이 적극적으로 실행된 결과, 개혁 세력들과 NGO 사이에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앞서 분석한 것처럼 지자체의 도입 및 '협치' 전략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음을 NGO들이 적합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민주화의 시도로 오해한다는 점,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의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해 주는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이 제시하는 민생정치나 생활정치 식의 담론도 문제다. 이들은 지방선거가 중앙 차원의 '정파적'인 논쟁에 휘둘려서는 안 되며, 지역 '현안'에 입각한 민생정치룰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접근이다. 우선 현재 지배정치의 위기를 알리바이 삼아 정치 자체를 공격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들은 정치/이념 논쟁이 과잉되고 민생 문제가 중심에 서지 못하는 것을 지배정치의 문제로 지적한다. 하지만 오늘날 지배정치의 문제는 정반대로 그것이 오직 민생 문제, 즉 행정적이고 통치적인 문제에 국한되어 있을 뿐, 그러한 행정적 조치의 근본 방향을 기초 짓는 정치/이념 논쟁이 철저히 억압되어 있다는 데 있다. 지배계급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관해서 완벽한 '합의'를 이루는 상황에서 민생 문제 차원에서의 차별성을 만들어내기가 극히 곤란하거니와, 이 같은 근본적 유사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억지로 차별점을 만들기 위해 매우 의사적이지만 동시에 극히 필사적인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생정치라는 접근은 오히려 현재 정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또 중앙/지방 차원의 구도를 만드는 것도 문제인데, 현재 중앙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가 지방정부를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에서, 전자를 문제 삼지 않고 후자만 얘기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앞서 지적했듯 오늘날 민생정치의 본질이 현실적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이기 때문에, 이것이 중심 쟁점이 되면 그때부터는 문제는 누가 더 자본이나 국책사업을 더 잘 유치해 올 수 있느냐 하는 논의가 되고, 결국 지역의 신자유주의적 개조에 대중들을 동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물론 민주적 제도/장치를 확대하자는 입장은 의미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조차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기치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배치되지 않는다면 심지어 반동적일 수조차 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민주화를 통해 정부의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사회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하에 있는 한에서, 사회비판/사회운동을 동반하지 않는 민주화란 결국 자본과 금융과 시장의 민주화,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의 가속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은 전통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타락한 자유주의자들, 곧 신자유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2) 사회양극화-사회통합 對 감세-작은정부
노무현 정권 내내 별다른 실체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던 성장-분배 논쟁은, 올해 초 노무현의 신년연설과 그에 이은 박근혜의 연두기자회견을 거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노무현은 집권 후반기 핵심 전략으로 사회양극화-사회통합 기획을 제시하고, 열린우리당은 아예 당 강령에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를 명시한다. 이에 대해 박근혜와 한나라당은 양극화 논란이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문제는 현 정부의 정책실정으로 인한 경기침체이며 이는 오직 성장을 통해서만 극복된다고 반박한다. 동시에 그들은 세인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양극화 재원 마련 문제를 적극적으로 부각하여 증세/감세, 큰정부/작은정부라는 쟁점을 만들어낸다. 이 쟁점을 둘러싸고 언론과 NGO를 비롯한 제 세력이 논쟁에 뛰어들고, 정부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아예 특별기획코너까지 마련하여 논쟁을 이어간다.
이처럼 전국 차원에서 제기된 담론과 의제는 지방선거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열린우리당은 행정수도이전을 비롯한 현 정부의 이른바 '지역균형발전정책'이 (사회양극화의 지역 판본으로서) 지역양극화 해소책이었다고 주장하고, 한나라당은 현 정부의 정책이 '하향평준화'였다면서 모든 지방을 서울수준으로 발전시키는 '상향평준화 지방발전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담론 수준뿐만이 아니다. 현재 정부가 사회양극화 극복 방안으로 제시하는 이른바 '동반성장론' 곧 '성장을 통한 고용'과 '고용을 통한 성장'은 각각 중소기업육성과 이른바 '사회적 일자리' 확대를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많은 중소기업들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일자리' 사업에서 지방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이는 지역 차원의 주요 의제로 다뤄질 수밖에 없다. 이 의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한 열린우리당은 물론, 한나라당도 중앙정부가 실패한 일자리 창출을 지방정부가 주도하겠다는 식으로 노무현 정권 심판론이라는 기조 아래 동일한 정책을 배치하고 있다.
언론 등에서는 현재의 논쟁 구도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특히 세금 논쟁의 경우 '대변하고자 하는 계층, 지향하는 이념적 좌표, 세우려는 정부의 성격'(『경향신문』 2006년 1월 27일자 사설)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은 지난 3월 23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세금 올려도 부자들이 더 부담'한다고 말하는 등, 증세가 마치 부유층을 겨냥한 급진적 정책인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가을 자본에게 법인세, 소득세, 개발부담금, 교통유발부담금 등 각종 조세지원과 부담금 감면혜택을 제공하는 '기업도시개발특별법'을 통과시킨 자들은 다름 아닌 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다. 또 대통령 직속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는 지난 2005년 중장기 조세개혁 과제를 담당할 조세개혁특별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이 위원회의 목표가 '국가 간 조세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 법인세, 소득세 등의 세율을 주요 경쟁국에 비해 불리하지 않도록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미 2005년 현재 국내 법인세율은 2004년보다 각각 2%포인트 낮아졌으며, 2005년 소득세율도 2004년보다 1%포인트 낮아진 7~35%로 조정됐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세금만 수십 조 원에 달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주장하는 증세는 이 같은 기존 조치들과 모순되는 것인가? 겉모습과 달리 양자는 완벽한 논리적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 핵심은 현 정부가 초기부터 표방한 바 있는 '넓은 세원과 낮은 세율'이다. 즉 금융과 기업의 무한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법인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은 아낌없이 깎아주되('낮은 세율'), 이렇게 해서 깎인 세금 및 신자유주의가 필연적으로 양산하는 사회갈등을 관리하기 위한 재원은 노동자 민중에게서 벌충하겠다는 것이다('넓은 세원'). 증세를 얘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집단이 전문직과 자영업자다. 그러나 이른바 고소득 전문직들이라 불리는 엘리트 기술관료 집단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지지기반인 한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들 집단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 현재 한국 자영업자들의 평균 소득은 2003년 임금 노동자보다 낮은 수준으로 반전된 이후 그 격차가 해마다 점점 커지고 있다. 또한 2003년 기준으로 고용주의 월평균 소득은 319만 1,000원인 데 비해 자영자는 이의 절반도 안 되는 152만 9,000원에 불과하며, 이중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에도 못 미치는 자영업자의 비중이 전체 자영업자의 24.7%인 110만 명에 이른다. 즉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IMF 경제위기와 대량실업으로 양산된 빈민들인 셈이다. 현재 정부가 산업 양극화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중소기업 곧 자영업자 중 고용주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방향을 밝힌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 빈민이 세금 징수의 주된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재경부는 지난 1월 31일 저출산 대책 및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한 추가재원 일부를 확보하기 위해 2007년부터 1~2인 가구의 근로소득에 대한 추가공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 재원 마련을, 다른 편으로 사회적 규범 강제를 목표/명분으로 국가가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한 집단에게 세금징수를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담배세나 주세 등 간접세 인상을 통해 복지재원을 마련한다는 주장에 이르면 이른바 '좋은 정부'의 본질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비겁한 정부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증세를 해서 확보한 재원을 가지고 집행하는 정책이 문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현재 국가적 의제로 설정한 것은 한편으로 사회양극화 해소이고 다른 편으로 저출산/고령화 해결이다. 전자의 핵심 조치 중 하나로 제시되는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산업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이번 비정규법 개악안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이목희 등이 분명히 말했듯 비정규직 확대를 비롯한 노동권에 대한 전면 공격이 필수적이다. 또 양극화 해소와 저출산/고령화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묘수로 제시되는 '사회적 일자리' 확대 나아가 '사회적 기업'의 설립이란, 국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복지 등 기초서비스를 상품화된 형태로 도입하여 자본에게 새로운 이윤의 원천을 제공해 주는 것이면서, 대량실업을 저임금불안정노동과 '사회안전망'의 형태로 분할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라는 신자유주의 복지 이념과 궤를 같이 하는데, 주지하듯 이는 대량실업과 재정위기가 기존의 복지 제도에 내재한 탈노동유인(work disincentive)과 그에 젖은 '나태한 개인들'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위기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호도한다. 최근 정부가 도입하겠다고 주장하는 근로소득보전세제(EITC) 역시 정확히 동일한 전제 위에 서 있다. 이는 '일을 통한 빈곤 탈출'이라는 그럴 듯한 명목 하에 노동의 성격에 대한 문제제기를 체계적으로 억압하여 불안정노동을 존속시킨다. 또 사람들이 단 몇 만원의 유인 때문에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따라서 단 몇 만원의 탈유인 때문에 일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리하여 이 몇 만원의 탈유인을 제거하는 식으로 복지 제도를 개악하면 대량실업이 해결될 것이라고 대중들을 모멸하는 파렴치한 논리를 펼친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발본적 저항이 조직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본에게 '좋은 정부'의 본질이다.
3) '역(逆)색깔론' 對 국가정체성 논쟁
현 정부 들어 지겹게 반복되던 또 다른 논쟁 중 하나가 바로 '정체성' 논쟁이다. 과거사 진상규명법을 비롯한 이른바 '4대개혁입법'을 둘러싸고 절정에 달했던 정체성 대립은, 한나라당의 사립학교법 장외투쟁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을 둘러싼 논란,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분배/성장, 증세/감세, 큰정부/작은정부 논쟁에서도 빠짐없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이 독도 인근의 한국 측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대해 수로측량계획을 밝힌 것을 기화로, 오히려 열린우리당 쪽에서 정체성 논쟁을 도발한다.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강금실은 지난 4월 19일 '마흔여섯 돌을 맞는 사월혁명, 그리고 독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독도분쟁의 기원이 박정희의 굴욕외교라면서 박근혜와 한나라당을 겨냥하는 한편,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 '일부 아시아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역사에 얽매여 국가 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이명박을 비난한다. 경기지사 후보인 진대제는 박정희가 4.19를 짓밟았고 박근혜는 그의 딸이기 때문에 독도 문제를 다룬 청와대 만찬에 불참한 것이라는 한층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다음 날인 20일 노무현이 조찬기도회에서 독도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확언하는 한편, 25일 대부분의 내용을 노무현 스스로 썼다는 대통령 특별담화문에서 각종 원색적 수사를 사용해 가며 일본에 '전면전'을 선포한다. 한편 보수세력들은 '독도분쟁 원인제공 김대중 규탄'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또 최근 이회창은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담론이 '무산대중이여 집결하라'는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투쟁 선동을 연상케 한다는 실로 어이없는 비난에서 시작하여 현 정부의 정책 전반을 색깔론 차원에서 맹비난하면서, 이 '좌파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비(非)좌파세력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식의 논란이 지방선거를 비롯한 앞으로의 부르주아 정치일정에서 얼마나 쟁점화될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지만,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몸소 체험했듯 정체성 논쟁은 여전히 가장 손쉽게 개혁/보수 구도를 (재)형성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이회창이나 뉴라이트 등 극단적 보수세력이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는 한, 그들에 대한 증오와 공포 따위의 정념을 체계적으로 부추기고 활용하는 비이성적 '비판적 지지론'은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들어선 각종 위원회와 국책프로젝트 사업, 정부지원금 등이 사회운동의 NGO화 경향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 왔고 그 결과 실제로 많은 NGO들이 신자유주의 정치세력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수준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비지론은 이른바 진보주의 세력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물질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사회운동의 NGO 경향과 견결히 단절하고 사회운동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로 나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 이미지 정치와 정치의 미디어화
최근 이미지 정치가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서울시장 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강금실과 오세훈 때문이다. 정치개혁의 방향 중 하나로 '미디어 정치'를 합의한 지배계급들이 보기에도 이건 심하다고 할 정도인데, 이는 오늘날 정치위기의 현실을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주지하듯이 강금실 카드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정권 기반의 파괴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지자체에서 필패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당 지도부는 물론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개혁세력들 모두로부터 '강다르크'가 되어 달라는 러브콜을 받았고, 출마 여부를 둘러싸고 언론의 이목도 그녀에게 집중됐다. 그런 상황이 한참 계속되다가 마침내 강금실이 출마 의사를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당 지도부와의 공식회동 같은 곳에서가 아니라 그녀를 서울시장후보로 만들려고 누구보다 앞장서 노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였다(『한겨레 21』 2006.03.07(제599호) 「표지이야기」). 그런데 이렇게 출마의사를 밝힌 후 정식으로 출마선언을 한 것은 이로부터 무려 한 달 가까이 지난 4월 5일이었다. 한 기자는 이것이 광고기법의 일종인 티저(teaser)광고, 즉 정식으로 제품이 출시되기 전까지 제품의 일부만 보여주거나 극히 제한된 정보만 제공해 소비자들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높여 최종적으로는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마케팅 전략을 사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출마선언을 한 날의 광경은 더 기막히다. 식목일인 4월 5일, 봄꽃이 만발한 정동길을 15분 넘게 걸어 기자회견장인 정동극장에 도착한 강금실은 보라색 일색의 복식을 한 채 보라색 천으로 장식된 '극장' 무대에서 보라색 아이리스 화분을 배경으로 출마선언문을 낭독하고, 식목일에 맞게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생명의 푸르른 나무'라는 괴테의 경구를 읊는다. 출마선언이 있은 바로 다음날 MBC <100분 토론>에서는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강금실 단독 초청 토론회를 개최한다. 4월 7일 청계천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전태일 거리를 찾음으로써 이명박과의 차별화를 꾀한다. 또 '시민후보', '춤을 즐기는 자유로운 개인', '문화', '삶의 질', '주5일 근무시대에 맞는 후보' 등 열린우리당과 강금실을 차별화하는 (다시 한번 한 기자의 분석을 빌리자면) '개별브랜드 전략'이 가동된다.
이러한 '강풍'에 힘입어 오세훈이 등장한다. 온 언론이 떠들썩한 가운데 강금실의 인기가 한창 치솟던 4월 3일, 오세훈은 처음으로 출마 얘기를 꺼내고, 4월 9일에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오세훈 효과'에 힘입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무려 8.3%가 급상승한다.
이들의 등장과 인기는 신자유주의 하 정치위기가 취하는 형태를 잘 보여 준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추진은 여야를 막론한 기존 정치세력들의 지지율 하락을 초래하고, 이 때문에 과거 노무현이 그랬고 지금 강금실과 오세훈이 그런 것처럼 정당과 차별화하여 개인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이 일반화된다. 당의 정강을 가장 잘 표현하기보다는, 당과 거리를 두고 당을 상대화하는 권위를 더 선호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정당정치에 기반한 대의제 전반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이른바 '인민주의'의 출현과 궤를 같이 한다. NGO를 비롯한 각종 '씽크탱크'(Think Tank)와 미디어, 그리고 행정부를 핵심 축으로 하는 반(反)대의제적인 기술관료체계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한편, 이 기술관료체계의 정당성을 보충해 주는 '미디어 스타' 정치인이 출현한다. '대표'(representative)로서의 정치인은 기술관료와 미디어 스타로 '양극화'되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미디어가 정치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이해하기 위해 미디어의 특성과 효과를 잠시 고찰해 보자. 미디어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신체를 초월하여 사건을 체험하고 다른 인물/집단과 동일화될 수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즉 미디어는 신체 간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라는 느낌을 상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 이는 연극이나 영화 등 모든 형태의 상상적이고 미학적인 체험 안에 매양 있어왔던 것인데, 이것이 미디어를 통해 일상생활 전반으로 더욱 강하게 확산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전혀 다른 조건 예컨대 서로 다른 계급적 기반에 속한 이와 동일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리고 미디어는 개인에게 새로운 관계들을 개방할 뿐만 아니라 그 관계들이 개인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느낌을 준다. 시청자에게는 수많은 채널이 제공될 뿐 아니라 언제든 채널을 돌릴 수 있고, 네티즌 역시 무한히 많은 주소들 사이를 자의로 넘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현실과의 거리두기를 목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는 차이나 갈등을 배척하고 협소한 동일성 주위를 회전할 가능성이 높다. 언제든 별다른 제약 없이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굳이 차이나 갈등을 인내하려 들지 않으며, 결국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취향과 기호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관계는 폐쇄적인 거울관계로 흐를 위험을 갖는다.
또한 미디어의 본질 중 하나는 '전송', 즉 공간적/시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전에는 쉽게 또는 심지어 전혀 접할 수 없던 현상이나 '지각' ― 텔레비전은 말 그대로 'tele-vision', 즉 거리를 넘어선 '시(청)각'이다 ― 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생생함은 전송에 필연적으로 포함된 '편집'이라는 계기를 은폐한다. 한두 가지 극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몇 년 전 한 TV 방송에서 세계무역센터 폭격 장면을 보여준 직후 환호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게 편집된 뉴스를 내 보낸 적이 있다. 이렇게 편집된 뉴스를 본 대중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아랍인'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심지어 일종의 '외계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미디어는 이런 식의 장면을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전송함으로써 극히 낯선 존재가 아주 가까이 있다 ― 극히 낯선 존재가 아주 멀리 있거나 유사한 존재가 가까이 있다 는 식이 아니라 ― 는 역설적 느낌을 줄 수 있고, 이는 극도의 불안(과 그 이면으로서 알 수 없는 매혹)과 같은 정서를 일으킬 수 있다. 정반대로 우리와 매우 다르고 낯선 존재의 이미지 또는 불안을 자아내고 따라서 뭔가 행동을 촉구하는 현상을 매우 친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서사와 틀 안으로 편집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상투화(stereotype) 수법에 따라 안락함이, 따라서 부주의와 무관심이 생겨날 수 있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여러 가지 편집 효과가 있을 텐데, 전혀 다른 계급적 조건에 처한 개인이나 집단을 흔히 말하는 '인간적 모습'의 틀로 편집해 친근감을 자아낼 수도 있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가령 범죄자에 대한 선정적 보도에서처럼 편집함으로써 '공공의 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처럼 미디어에 고유한 편집 ― 이는 '조작'으로 환원될 수 없다 ― 은 보도와 '진실' 또는 차라리 다른 식의 해석가능성 간의 구조적 거리를 낳게 되고, 이 거리에서 나오는 불투명성을 한번이라도 겪어 본 대중들로 하여금 '사실'이나 '지각' 등 세상을 체험함에 있어 안정적이고 객관적인 준거점으로 기능하는 것들을 회의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같은 회의가 상당한 혼란과 불안을 초래하는 한에서, 미디어가 주는 불투명성을 부인하고 사실과 지각에 오히려 맹목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세상을 체험하는 안정적 방식을 (재)획득하려는 시도가 발생하기도 한다. 혹자는 그 대표적 사례로 스포츠 경기 중계를 든다. 스포츠 경기에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결정되며, 모든 경쟁자들은 마찬가지로 분명한 순위 안에 배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간단하게 소묘한 미디어의 특성은 갈등에 기초한 민주주의 정치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컨대 계급적대와 같은 근본적 차이와 갈등을 상대화하는 '사회통합' 정치 또는 극단적으로는 파시즘 정치(주지하듯 벤야민은 파시즘을 ‘정치의 미학화’라 불렀다)를 지지한다거나, 갈등을 대면하고 인내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정치보다는 폐쇄적인 동일성의 정치를 부추긴다거나, 세상을 스포츠 경기처럼 분명하고 위계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나 경쟁 원리, 카리스마적 스타에 대한 열광 등을 일반화하는 '정치의 스포츠화' 따위의, 정치를 체험하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한다든가,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상투화된 사고/지각방식이 현실에 대한 사고/지각방식을 점점 더 크게 규정한다든가 하는 따위가 그런 것이다. 어쨌든 정치의 미디어화가 단순히 정치에서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훨씬 넘어 정치 전반의 변형을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을 때 지배정치 위기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식의 우익적 비판이 아니라 좌익적인 정치 비판과 정치 개조에 관한 입장을 세우는 것이 매우 시급할 것이다. 이는 좀 더 깊이 고민해 볼 과제인데, 다만 두 가지 정도의 일반 원칙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현재의 상황에서 의회정치라는 부르주아 대의제 ― 물론 한국에서는 이것이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되어 본 적 없지만 ― 를 정상화시키자는 주장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르주아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를 조야하게 대립시키거나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식의 접근은 현 정세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특히 전문가주의에 입각한 행정권력의 강화와 NGO를 동원한 '협치' 전략, 그리고 정치의 미디어화에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점점 확대되는 '대표되지 않는 권력'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대중들의 정치적 발언권과 결정권을 유효하게 확대할 수 있는 정치의 새로운 민주화 방안을 사고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미디어를 거부하는 투명한 대면소통/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현재 식의 정치의 미디어화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정치의 미디어화는 기술관료제 및 거기에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는 미디어 스타 정치인을 만들어 냄으로써 대중정치를 제약하고 인민주의를 물질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미디어가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만일 사실과 지각과 같은, 우리가 가장 안정적이고 객관적이라고 간주하는 준거점조차 항상 이미 미디어를 매개한 것임을 드러낸다면, 대중들의 사고 양식 전반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미디어에 대한 일방적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라 미디어 비판과 변혁, 이를 통한 새로운 사고 양식의 구성이다.
지방선거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 평가
1) '선거투쟁'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이번 지방선거에 대한 민중운동 진영을 간략히 평가하는 것으로 서툰 분석을 마칠까 한다. 현재 지방선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집단은 단연 민주노동당이다. 현재 민주노동당은 전국적으로 15% 곧 300만 표의 지지를 확보하여 전국 정당 및 명실상부한 제3 정치세력으로서의 정치적 위상을 획득하고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대응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현재 자신들이 '체제비판적인 시민운동단체' 정도로 여겨질 뿐 집권을 추구하는 정당으로서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는 원내에서 결정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이번 선거에서 전국 곳곳에서 단체장과 지방의회에 진출함으로써 수권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300 공직자 시대 개막'을 기치로 지난 2002년 지방선거에 비해 6배나 많은 후보들을 출마시키는 등 지방선거에 당력을 총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무현정권심판론과 지방권력교체론을 각각 핵심 기치로 내건 양당 사이에서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부각시키기 위해 비정규법안과 한미FTA, 그리고 평택미군기지 확장 등의 이슈가 모든 선거공간에서 발언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민주노동당이 매우 활발한 선거활동을 펼치고 있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NGO 세력들이 열린우리당과 보조를 맞춰 선거에 대응하는 데 반해, 양자와 구별되는 계획과 위상을 가지고 선거에 개입하는 사회운동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드물다. 선거에 대응하려는 이들은 주로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전에 하던 사업을 계속하는 식으로 양자가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중에는 이번 선거가 총선이나 대선이 아니라 지자체 선거라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87년 이래 경험한 이른바 '선거투쟁', 즉 선거라는 국면을 계기로 정당과 대중운동이 결합하는 방식이 점점 더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좀 더 일반적인 경향의 징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핵심 원인 중 하나는 미디어 정치의 강화다. 지난 2004년에 통과된 정치관계법 개정안 중 선거법에 따르면, '선거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공정히 치러지도록 각종 제도적 장치를 신설, 보완하고 합동연설회 및 정당후보자 등에 의한 연설회를 폐지하고 신문방송 등 각종 미디어매체를 통한 선거운동을 확대함으로써 고비용 선거구조를 혁신하고 선거비용 지출의 투명화를 기하는 등의 새로운 선거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우리 정치문화의 선진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개정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합동연설회, 정당, 후보자연설회가 폐지되고, 후보자 외 3인 이상이 무리를 지어 연호하거나 인사하는 행위 등도 금지된다. 대신 미디어 선거가 강화되는데, 이번 지방선거에는 16개 광역시/도를 비롯한 238개 지자체의 법정 방송토론회만 470여회에 달하며, 이 외로 각종 언론매체와 인터넷 동영상까지를 합한다면 미디어의 비중은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거 사회운동들이 '선거투쟁'에 결합하면서 주되게 기여했던 방식, 특히 장외 대중집회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당에 결합하여 선거운동을 하는 이들에게조차 관건이 되는 것은 비중이 높아진 미디어 선거를 지지하기 위해 각종 후원회를 조직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이 안정화되면서 자체적인 의사결정구조가 강한 물질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과거처럼 제도화된 당이 없는 상태에서의 결합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거니와, 우리는 이 점을 이미 지난 대선과 총선 때 경험한 바 있다. 특히 당에서 선거 사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높고 그에 따라 평상시에도 선거 일정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거나 실행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운동들이 선거 시기에 닥쳐 다소 급작스럽게 당과 선거대응 문제를 논의하는 식으로는, 제대로 된 개입이 거의 불가능하고 대개의 경우 기존에 만들어진 당의 사업을 대중운동들이 따라가는 수준을 크게 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 정당들이 하는 식으로 선거대응을 중심으로 '외부인사'를 영입한다거나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도 별로 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것 같다.
이런 식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정도의 길을 구별해 볼 수 있는데, 양자는 사고의 편의상 구별한 것일 뿐 현실에서는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선거를 비롯한 제도 정치 전반에 대한 개입과 관련하여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사고와 계획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 사고와 계획 안에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이 포함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으로 환원되지 않는 심지어 이를 상대화하는 기획이다. 왜냐하면 민주노동당이 선거 및 제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전담'하는 조직은 아니고, 또 그것은 다른 운동조직은 물론 민주노동당 자신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04년 총선 당시 제기되었던 '국민발의/국민소환'의 문제의식을 상기해 볼 수 있다. 특히 국민발의에서 핵심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당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규모의 대중운동이 자신의 역량에 기반을 두어 제도를 쟁점으로 한 대중운동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조건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연장하는 가운데, 다른 여러 수준의 사고와 계획을 진척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민주노동당의 경우에도 의사결정구조 및 당 자체의 구조를 당 외부의 사회운동에 보다 개방적이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처럼 당의 의사결정구조 안에 거대대중운동 단위의 지분을 인정하는 문제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운동 스스로 대중적 의제를 설정할 수 있는 독자적 역량을 갖추고 독립적 활동을 펼침으로써 선거나 제도가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 상층 수준에 결합해 선거에서 무슨 무슨 의제를 다뤄달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에 대해, 이조차도 현재 시점에서는 당을 통해 실행되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부 당내 좌파들은 선거 등의 시기에 당이 일종의 '충격자' 역할, 즉 사회운동적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사회화하는 역할을 놂으로써 사회운동에 유리한 정치지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우에 따라 사회운동들이 당 특히 상층 구조에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당이 사회운동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 내에 수권/정책정당 경향과 사회운동적 경향이 공존하고 있고 양자가 모두 당의 의사결정구조 안에 반영되어 있는 상황에서 후자를 앞세우는 것은 당분간 어렵거나 정세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의 사회운동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 전통적인 당의 전술적 활용론, 즉 합법공간에서 선전선동을 수행하는 부대라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수권/정책정당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당 내에 적지 않고 정서적으로는 아마 이들이 다수파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조직 안에 이런 류의 갈등이 있다고 했을 때 이는 갈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가면서 해결해 갈 문제지, 단순히 상층 차원에서 급진적인 기획을 제시한다고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가려면 특히 당 내의 사회운동적 기획이 고사하지 않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당 외부의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역량을 구축해 가는 것이 필수적 조건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당이나 제도 전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과 제도의 생명력의 원천이 사회비판/사회운동에 있고, 그럴 때에만 정당의 사회운동적 추동이, 선언이나 바람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국한해 보자면, 민주노동당 스스로 중요 쟁점으로 삼겠다고 밝힌 비정규법안/한미FTA/평택미군기지 확장 문제와 관련하여 공동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수권/정책정당론에 입각해 이런 투쟁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이 당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특히 지자체 선거에서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이 투쟁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전개함으로써 당을 추동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회운동 스스로의 몫이다.
2) '대안주의' 및 수권/정책정당론 비판: 대중적 대안을 구성하기 위한 우리의 실천
현재 민주노동당 안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경향 중 하나는 수권/정책정당화 기획이다. 특히 2012년 집권이 어쨌거나 당의 공식적 목표인 한에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실제로 집권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믿음을 주자는 것이 민주노동당을 기초 짓는 주장 중 하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비단 민주노동당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비판에 머물지 말고 '대안' 세력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활동가들 역시 동일한 논리를 갖는다. 이는 특히 90년대 들어 세력을 확장한 NGO식 전문가주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겉보기에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당위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안을 얘기하는 것도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말의 부정적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보이는 정책, 이른바 '대중들의 이해와 요구'라는 제한을 넘지 않는 정책을 제시하고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실용주의'적 태도는 실상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좌표 안에 머물 수밖에 없고, 이는 현재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합의에 복종하라는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이른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대안일 것이다. 이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좌표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일 수밖에 없고, 그런 한에서 아직 비현실적이거나 심지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항상 갖는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의 대안은 사실상 실용주의의 변종에 불과한 대부분의 '대안 이데올로기'와 근본적 거리를 둔 채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에 관한 우리의 일차적 기준은 신자유주의냐 반신자유주의냐 에 놓여야지, 실용주의적 현실성 여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대안은 오직 대중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의 사고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얼핏 보면 또 다른 당위적 명제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당위로 환원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포함된다. 즉 대안을 생산하고 또 그것을 대중들과 공유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대중들의 사고를 제약하는 구조/모순들에 맞서 싸우고, 대중들이 비판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인 사고를 하거나 또는 그런 사고와 교통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그것이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서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의 유명한 테제, '하나의 전체 ― 만약 이 전체가 충분한 크기를 갖고 있다면 ― 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 다수가 어떤 부조리한 일에 동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정치론』 6장 1절)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이 테제의 기초에는 사고와 정서의 분리불가능한 관계에 대한 통찰이 있다. 즉 대중들이 국가장치에 개별적으로 종속되어 있을 때 겪는 정서 가장 핵심적으로 '공포'는 대중들의 사고를 크게 제약하는 한편, 대중들이 국가장치를 변혁하여 새로운 형태의 집단을 구성함으로써 생산해 내는 '기쁨' 등의 정서는 대중들의 사고 역량을 크게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대안, 그것도 대중적인 대안을 추구한다면, 이 대안의 생산과 수용을 가로막는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고 새로운 정서적/지적 조건을 창출해 내야만 한다.
우리가 사회운동이라는 말을 통해 지시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합의와 이에 동반되는 공포('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를 재생산하는 국가장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가운데 그것을 해체/변혁/재배치하여 대중들의 집합적 역량을 증대시키고 이로부터 나오는 기쁜 정서들에 힘입어 대중들의 사고를 전진시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한 철학자의 말처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명제는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는 유물론적 명제로 전도되어야 한다.
이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정책대안론을 비판할 수 있다. 사실 현실성이나 수권능력의 입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정책대안인데, 사실 민주노동당이 이런 정책대안 자체를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다. 또 설사 만들어 낸다 할지라도 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 있는 경로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책대안론은 필연적으로 NGO를 비롯한 전문가들과 미디어 등 넓은 의미의 '지식인'들과의 동맹을 필요로 한다. 전문가들을 '씽크탱크'로 활용하여 정책대안을 생산하는 한편 이를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화하는 것이 정책대안론의 실행 형태일 것이다.
앞서 정치의 미디어화 문제는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지식인과의 동맹 문제만을 얘기해 보자. 이 역시 겉보기에 부정할 수 없는 당위적 명제다. 하지만 그 형태와 방식은 좀 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즉 그것은 기존 지배구조에 내재한 지적 위계와 불평등 문제를 변혁해 가는 문제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발언권을 확대하는 민주주의적 조치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지식인들에게 가해지는 이데올로기적/물질적 제약을 변혁하고 새로운 지적 발전의 조건을 구성하는 문제다. 전통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부르주아 헤게모니에 입각한 계급동맹을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입각한 계급동맹 ― 물론 이에 대한 비판과 심지어 해체를 허락하는 ― 을 형성하는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날 지식인들 또는 차라리 지식을 생산하는 양식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적/물질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해야 한다. 이 같은 비판적 인식과 사회운동 없이 당위적으로 지식인들과의 동맹을 선언하는 것은 결국 부르주아 헤게모니와 관료제로 귀결될 뿐이다.
'민주화'의 역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사회비판과 사회운동에 기초한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90년대 이후 지자체의 역사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지자체 일반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의 국가가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진단한다고 해서 국가 일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개조와 다를 바 없었던 기존 '민주화' 기획을 (단순히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민중민주주의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 마찬가지로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효과 면에서 거의 다를 바 없는 '지방권력교체론'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는 지자체 변혁 기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를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보면 현실의 복합성을 통찰하는 변증법 같지만, 실상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요소들이 정세 속에서 모순적 통일을 이룰 수 있음을 몰이해하는 기계론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화 기획이 신자유주의로 이어진 것은 사회비판/사회운동의 계기가 억압됐기 때문이다. 사회와 국가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억압받고 배제되는 적대와 갈등의 '몫소리'를 외치고 듣는 것만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속에서 극히 축소된 민중민주주의 또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기획을 재개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회비판/사회운동은 당위가 아니라, 대중에 기초해 '대안'을 생산하고 대중에게 대안을 검증받으며 대중에 힘입어 대안을 실현하고자 하는 민중민주주의의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몇몇 전문가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대안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미혹을 버리고, 대안의 이데올로기적/물리적 조건을 구축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대중들의 자유와 사고를 억압하고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대중적 대안의 출현을 한층 어렵게 만들 비정규직법안과 한미FTA, 그리고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통한 전략적 유연성 기도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적’ 쟁점으로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개혁/보수 전선을 재구축하려는 신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