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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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1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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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렸다. 그러나 투쟁은 이어진다!

박훈영 | 회원
1993년 1월 겨울 어느 날, 겨울방학인지라 여느 때처럼 지난 밤 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시원 자그마한 방에서 해가 중천에 뜨도록 실컷 단잠을 자고 있던 중에 내가 학교에서 ‘짤렸다’는 소식을 전하는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부모님의 애타는 목소리에서 내가 집안을 아주 발칵 뒤집어 놓은 게 분명해 보이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무척 당황스러웠을 뿐 더러 말문까지 막혀버릴 지경이었다.

노태우 군사정권은 면학분위기 조성이라는 미명아래 학사경고 제적제도를 도입하여 학생운동권 세력을 통제하고 제거해버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첫 케이스로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다.

상황은 설상가상이었다.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후 이 땅의 변혁을 갈망하던 다수의 동지들이 그랬듯이 내 주위 동지들은 1992년 대선 민중후보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1993년 한 해 동안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학생운동판을 떠나갔다.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활동을 상당부분 제약하는 제적상태에서 동지들을 다시 조직해서 새로운 운동적 전망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나도 또한 안타깝게도 운동과 멀어져만 갔다.

그 후 몇 년간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어색하게 전공 책 붙잡고 공부란 것도 하고 아쉬운 마음에 이런저런 사회과학서적 몇 권을 뒤적이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1999년 총학생회와 인연이 닿아 자그마한 힘이나마 보태볼 생각으로 2000년도까지 직·간접적으로 학생회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런데 학생회 활동에서 1994년 이후의 운동공백으로 인해 활동역량이 부족함을 실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더 강고한 계급의식과 투쟁을 요하는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은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유연적 생산체제에 관한 대학원 논문을 준비 할 때, 건설노동자에게 더 높은 노동강도를 강제하는 논문을 써야하는 자괴감과 생존권을 억압하고 극도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제하는 건설자본에 대한 분노는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건설현장의 객관적인 계급조건에서 변혁적인 계급의식을 유지하고 역량을 축적하기위해서는 한 3년 정도 상근활동을 수행한 후 현장노동자로 생활하는 과정 등을 포함하여 20년가량의 장기계획을 세워야한다. 솔직히 혹독한 노동강도를 견뎌내며 소위 ‘노가다’라는 천대와 멸시의 대명사인 건설노동자로 살아가겠다는 확신을 갖기가 쉽지만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학전공을 건축으로 선택할 때부터 건설현장에 애착이 있어왔고 휴학 중에 1년 정도 목수조공으로 일했던 경험도 있었기에 가능하리라고 전망했다.

벌써 노조활동 시작한지 만 3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적절한 상황에서 현장노동자로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위원장과의 불화를 계기로 불미스럽게 상근을 그만두게 되었다. 부상당한 무릎도 수술하고 노조활동하면서 일상적인 업무에 바쁜 관계로 학습할 시간이 부족했었기에 현장대중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좌파진영의 다양한 핵심 이론을 학습하고서 내년 4월 정도부터 현장노동자로 생활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개인적으로 1994년 이후의 운동공백기는 주로 주·객관적인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극복하지 못했다는 자기부정의 시기이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노동운동 시작할 때 운동의 장기전망을 주체적으로 세우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현장활동가 회원으로서 정세적, 구체적, 실천적 판단을 옹호하기에 사회진보연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에 대해 단체활동가와 일정정도 이견이 있어왔다. 이 자리를 빌어 사회진보연대에서 강력한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는 집행위원에게 겁 없이 까불었던 점에 대해 애정이 배어있는 미안함을 살짝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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