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기업지배구조 개혁과 재벌: 정주영 부자 퇴진과 소유·경영분리를 중심으로
재계순위 1위 현대그룹의 정주영 3부자가 경영퇴진을 선언했다. 정몽구 회장이 이 결정에 반발하고 있긴 하지만 정주영, 정몽헌 2부자는 실제로 그룹 회장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말만 무성했던 현대그룹의 계열간 분리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기업 소유지배구조 개혁의 본막이 오른 것이다. 과연 이번 현대사태의 의미와 한국경제에 미칠 파장은 무엇인가.
정주영 부자는 왜 퇴진했는가
정주영 부자의 퇴진은 직접적으로는 현대 건설의 자금난으로 이어진 현대그룹의 유동성위기에 기인했다. 몽헌·몽구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과 현대투신 사태를 거치면서 내부불안이 불거진 현대는 4월 이후 5월 중순까지 불과 한 달 반 동안, 현대건설발행 CP(기업어음)과 회사채 만기연장이 제대로 안 되면서 6400억원을 금융권에 회수당했다. '대우 다음은 현대'라는 소문이 증권가를 강타했고, 현대의 자금줄은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급기야 지난 5월 31일 현대는 유동성 위기에 대한 두가지 자구책을 발표했다.
첫째, 정주영·정몽구·정몽헌 3부자가 경영일선에서 퇴진한다는 것과 둘째, 선진외국업체와의 전략적 제휴 및 계열사 보유지분·자산 매각을 추진한다는 것.
이에 정몽구 회장이 반발하였고, 삼성, LG 등은 불똥이 자신들에게까지 튈까 노심초사했지만, 어찌되었건 시장과 정부는 이같은 자구책을 받아들였고 현대의 주가와 자금줄은 다시 안정을 되찿았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현대그룹 정씨일가의 퇴진을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로 현대그룹의 총부채는 1999년 현재 50조가 넘는데 왜 하필 이제와서, 현대건설의 일시적인 자금난을 계기로 이같은 충격적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답해야 한다. 의외로 이유는 간단하다.
재벌체제의 경쟁력과 수명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주영 부자는 누구보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벌의 역사는 일찌기 미국의 원조물자와 일본인 자산불하가 이루어졌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재벌이 실제 지금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성장한 직접적인 배경에는 군사독재정권이 시행해온 196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존재한다. 이는 1980년대 중반까지 시행되었던 미국의 '역(逆)개방' 정책에 힘입은 것으로 이로부터 우리나라 경제는 반도체·자동차·컴퓨터·조선·석유화학 등 수출주력산업을 중심으로 한 종속적인 신흥공업국 경제체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한국경제의 발전모델은, 미국의 '역(逆)개방' 정책이 철회되고 본격적인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1997년말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하여 붕괴되었다. 한국경제 발전의 보배로서 비호되던 재벌은 이제 하루아침에 경제위기의 원흉이 된 것이다. 정부 경제정책과의 효율적인 공조체제는 정경유착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던 거대한 덩치는 문어발식 확장경영으로, 그리고 뚝심과 집념의 경영은 일순간 '황제경영'으로 배척받게 된다.
정주영 부자가 퇴진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같은 재벌지배체제의 위기와 '재벌개혁의 진보성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 아닌 폭탄선언을 하고 물러난 것이다.
"본인은 현재 시대의 흐름과 우리 경제의 앞날을 생각할 때 과거에는 그룹 체제가 각사간의 협조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이제 세계적인 흐름과 여건은 각 기업들이 독자적인 전문경영인체제로 운영하는 것만이 국제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제 오늘부터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또한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도 함께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중략.... 우리는 앞으로 전문경영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주주로서만 남아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2000년 5월31일 정주영
재벌개혁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
재벌체제가 한국경제발전의 유일한 대안이라면서 재벌개혁에 저항하고 있는 일부재벌과 보수정치권, 일본식 경제모델의 사수를 외치는 오마에 겐이치를 필두로 한 보수적 반신자유주의 논객들을 제외한다면, 이번 정주영 부자 동반퇴진에 대한 평가에 관한 한 신자유주의와 일부 진보진영간에는 어느정도 합의가 존재한다. 어찌되었건 '황제경영'이 종식되고 전문경영인체제가 도입된 것은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혁의 강도와 속도, 범위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과 이견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합의'는 결코 안정적으로 결정된 무엇이 아니라 '위기적 조절양식'으로써 갈등의 수렴과정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번 정주영 부자의 퇴진은 즉각적인 현대그룹의 해체와 황제경영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현대 각계열사의 주식지분이 그대로 존재하고, 각 계열사간에 얽힌 복합상호출자가 여전히 그들의 지배력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소유구조하에서 정씨 일가는 언제든지 경영일선에 복귀할 수 있을뿐더러, 설령 전문경영인체제가 출범한다하더라도 그것은 가신(家臣)경영인에 의한 대리지배체제일 뿐 아직 실질적인 경영관행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번 정씨부자의 퇴진이 삼성, LG 등 타재벌총수일가의 퇴진으로 곧바로 연결된다고 볼 수도 없다. 적어도 이들 타재벌에게 있어 이번 현대사태는 현대투신, 건설의 유동성위기에 대한 현대측의 특수한 자구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저간의 사정이 재벌개혁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틀 자체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합의틀 내의 갈등이 재생산해낼 부당한 쟁점들과 각종 이데올로기들은, 그때 그때 결정되어질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확정시키는 데에 일조할 것이다.
재벌개혁의 진실 : '소유·경영의 분리'와 미국식 '글로벌 스텐다드 경영 도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보다 본격적으로 정주영 부자 퇴진이 상징하는 재벌개혁의 본래 의미와 그것이 몰고 오게 될 한국기업(경제)의 미래에 대해 살펴보자.
정주영은 5·31 발표문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주주로서만 남아서 지켜보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6월 21일 법무부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안 용역보고서]를 발표하여, 이사회와 주주총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오너와 대주주의 경영횡포를 막고 경영 투명성을 높일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지배구조개선안은 사외이사의 수와 권한을 늘리고, 소수주주권 강화를 위한 집단소송제도, 집중투표제등을 도입하며, M&A(인수합병) 때 주주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상대회사의 M&A 시도에 방어조치를 못하게 하고,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여 기업지배에 관여토록 하는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이른바 재벌의 전문경영인체제로의 전환,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의 도입이다.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은 이같은 '소유·경영의 분리'가 재벌의 황제경영과 정경유착을 근절시킴으로써 소유자의 경영권 집착을 합리화하고 소유권을 순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강변한다. 때마침 재벌들은 일제히 법무부의 개선안이 기업경영을 둘러싼 소송 러시를 이루고 경영권이 위협받는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재벌개혁의 진보성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러나 경영에서 손을 뗀 소유권자는 경영권을 박탈당한 피징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의미의 자본가인 금융자본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재벌의 반발은 이미 그들 또한 잘 알고 있는 수명을 다한 재벌지배체제 사수의 의미라기보다는, 그 시기를 늦추고 보다 많은 개혁의 인센티브를 따내기 위한 저항이다. '소유·경영 분리'의 진정한 의미는 극단적인 사적 소유권의 옹호이며, 금융주도적 축적체제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사적 소유권 재구축의 신호탄일 뿐이다.
1> 소유·경영 분리의 역사
일찌기 20세기 초에 우리나라 재벌과 비슷한 기업가(Entrepreneur)체제를 제한하고 전문경영인체제를 도입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는 '소유·경영분리'의 의미와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은 1890년에 반독점 셔면법(Sherman Act)을 제정하였다. 이는 자유경쟁에 대한 독점의 위협이라는 19세기 말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처하려는 미국 자본주의의 선택이었다. 뒤메닐&레비에 따르면, 셔면법은 그와 같은 시기에 제정된 주식보유를 허용하는 법과 함께, 오히려 록펠러와 모건과 같은, 금융적 융합에 의한 거대 법인기업이 등장하게 된 주요한 배경원인이 된다.
셔먼법은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독점)협약이나 협회를 금지함으로써 독점을 규제하였지만, 이 법에 의해 유일하게 허용되는 순수하고 단순한 합병을 촉진함으로써 거대 법인자본의 형성과 발전에 공헌했던 것이다. 이후 미국 자본주의는 20세기 초부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봉급을 받는 피고용인 관리자와 금융이 결합되는 전문경영인체제를 갖추어나간다. 이른바 경영혁명이었다. 미국경제는 비로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그러나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거대한 20세기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거대한 제국은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며 등장한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에 의해 법인자본주의를 확립시켰다. 그리고, 다시 1970년대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케인즈주의에 의해 억압되어온 소유 또는 금융의 주도권을 되찾아줌으로써 1920년대와는 또 다른 금융화를 거쳐 1980~90년대 '구조조정 CEO체제'를 등장시킨다.
2> 경영과 분리된 소유 : 금융자본가의 출현과 사적소유권의 재구축
소유와 경영이 분리됨에 따라 소수의 지분만으로 거대 기업집단을 지배경영하던 소유경영자(재벌총수)의 전횡은 사라지겠지만, 소유경영자의 전횡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지배비용?)과 경영의 자율성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경영과 분리된 소유는 지배를 위한 소유가 아니라 소유를 위한 소유로 바뀌게 된다. 국민경제 내에서의 기업의 역할과 성격, 기업내 이해관계자들간의 타협과 갈등은 개개 소유자들의 직접적인(금융적) 이해관계에 의해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재벌지배체제하에서도 모든 M&A(기업인수합병)가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벌지배체제는 기업의 소유권을 대주주의 지배에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M&A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한 기업의 소유권에 대한 공격은 기업자체의 방어로 이어졌고 국민경제주권 방어와도 직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업 소유권이 경영권과 분리된 시점에서, 기업의 소유권에 대한 공격은 기업가치와 주가차익만 보장된다면 언제든지 가능할뿐더러 그같은 행위 자체가 독자적이고 필수적인 경제활동의 일부가 된다. 가진만큼 행사하고 남의 것은 건들지 않으며, 그로부터 그 자체로 정당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사적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은 극단적으로 옹호된다.
이제 적어도 소유와 경영이 가장 확실하게 분리된 미국에서, 기업(의 일부)을 소유하고 있는 연기금·뮤츄얼 펀드 등의 기관투자자들에게(이들은 대부분 소수주주들이다) 기업(의 일부)은, M&A시장에서 결정되는 기업가치와 주식시장에서 주가로 표시되는 포트폴리오의 한 구성부분일 뿐이다. 기업과 산업의 국민경제적 의미와 역할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경영과 분리된 소유는 오로지 금융자산의 가치로서만 평가되고 운동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가로 전환된 소유자들의 이윤은 자신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생산적 경제활동이 아니라, 소유와 분리된 피고용관리자(구조조정 CEO)의 경영과 갖가지 금융기법으로 이루어진 투기적 기술에 따라 결정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같은 변화를 투명경영이 정착된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시장에 의한 사회적 통제'의 실현이라고 말하지만, 시장의 무정부성에 의탁한 사회적 통제란, 달리는 기차안의 평온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우리는 변화한 국가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강한정부란 금융자본가들의 현란한 투기기술이 본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갖추기 위해, 결국 달리는 기차의 창문을 닫고 기차 안의 평온을 강제하는 역할을 강화하는 것을 주업무로 한다. 기차의 속도가 빨라지고 국가의 통제가 강력해질수록 기차 안의 평온이 깨지는 순간의 충격은 커져만 갈 것이다.
3> 소유와 분리된 경영 : 구조조정 경영과 극도의 고용불안(감원-다운사이징 경영, 평생직장에서 평생직업으로)
갈브레이드와 같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은 소유와 분리된 경영의 등장을 경영자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미화시키려 했지만 1980~90년대를 장식한 구조조정 CEO들의 악랄함과 점증하는 세계적인 금융 불안정성, 각종 금융 테러는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반민중성과 구조적 모순을 증명할 뿐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CEO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잭 웰치는 1990년대 GE의 조직개편 3대 방향을 [계층구조를 네트워크 구조로, 관리위주를 유연한 조직으로, 중앙집권에서 권한이양으로]이라고 간명하게 구호화했다. FLAT형 조직, 철저한 성과-실적별 임금제와 책임독립사업부제, 1980~90년대에 이르는 10여년에 간에 걸친 구조조정과 감량경영, 과감한 정리해고 단행(예: 1992년 이후 GM 7만4천명, IBM 6만3천명 해고감원), 바로 이런 것들이 이른바 '구조조정 CEO'와 '구조조정 경영'의 등장으로 인한 경영조직·관행상의 대표적인 변화들이다. 전체고용인력의 핵심 5%이하만이 보존되었고, 그외 노동인력은 불안정 노동자층으로 관리되었다.
CEO들은 그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전문경영인 시장에서 평가·거래됨으로써 특정 CEO의 임금과 이미지·능력은 주가·기업가치와 직결되었으며, 연간 수조원대의 연봉+스톡옵션 수입을 올리는 CEO들이 속출했다. CEO는 경영에 관한 배타적 전권을 보유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급을 받는 피고용관리인으로서 그의 가격을 평가해줄 주주들의 조급한 기분을 맞춰준 후에야 유지될 수 있다. CEO에게는 기업가치와 주가를 높이기 위한 대량감원조치를 거부할만큼 자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기업 내부에서는 그의 지위와 권한을 제어할만한 세력이 없었던(없어야 하기도 하고) 관계로 감원-다운사이징 경영은 CEO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손쉬운 경영비법이 되었다. 더구나 이들 CEO들은 주주들만큼이나 그 자신들이 금융적 이해에 직접적으로 종속되어 있기도 하다.
이같은 '소유·경영의 분리'는 '감독·경영의 분리'에 입각한 미국식 이사회 구조의 기본원리에 의해 보강된다. 즉 이사회의 경영기능은 CEO(최고 경영자)와 CFO(재무담당임원) 등의 집행임원(executive officer)에게 전적으로 이전되고, 이사회 회장(Chairman)과 사외이사들로 이루어진 이사회(또는 감사회)는 집행임원들의 경영을 감독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 이로써 [주주총회-감사(사외이사로 이루어진 감독기관)-이사회(집행기능)]간의 역할분담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기업지배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나 정부와 소유경영자/(기존)이사회간에 존재해온 타협과 긴장은 이 철의 삼각구조 속에서 질식할 수밖에 없다.
설령 사외이사 중 일부가 노동자대표라도, 이같은 소유·경영·감독 분리의 틀 내에서 그 본질적인 기능을 바꿀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경영과 분리된 사외이사의 감독권이란, 주주가치/기업가치를 증대시켜야 한다는 경영의 목적 실행에 대한 감독일 뿐이기 때문이다.
4> 금융중심적 기업조직·경영관행
재벌개혁론자들은 재벌지배체제의 전통적인 금융관행인 관치금융과 담보대출, 차입경영을 비판하면서 투명한 금융관행과 사적 금융시스템, 신용대출 정착, 내부유보(內部留保)를 이용한 자금조달방식의 도입을 추진한다.
관치금융 타파와 투명성 확보
재벌지배체제의 핵심은 정부와 (국유)은행의 지원에 있다. 여기에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갖가지 부정부패가 상존하기 마련이였다. 동시에 이같은 체제는 정부-은행-기업 내부간의 사정에 어두운 기관투자자들과 초민족자본들의 기업지배소유를 가로막는 장막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가져오는 가혹한 결과들로 인한 정책개혁 실행가능성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결정적인 해결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진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정경유착, 관치금융을 타파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독립과 금융건전·투명성 확보, 사적 금융시스템개혁이 외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이 가져온 부정부패의 문제는 부패한 국가권력의 민주화를 통해 이루어져 할 과제이지, 금융의 재사유화를 통해 이루어질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또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는 금융의 재사유화가 불법적인 밀실거래를 공공연하고 합법적인 거래로 탈바꿈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하며, 이것이 사회적 금융통제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재벌지배체제하에서 우리나라 기업의 자금조달경로는 은행을 통한 간접금융 중심으로서 담보대출이 전체 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담보위주의 대출관행이 정착되어 있다. 돈이 필요한 기업은 당연히 자금확보를 위하여 담보자산의 확보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수익보다는 자산증식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기업의 수익성은 왜곡되었고, 기업의 부동산투기와 같은 병폐를 불러왔다. 또한 호경기에 오른 땅값이 경기가 하강하는 시점에서 담보자산가치의 하락, 금융부실화으로 연결되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기업재무자료의 높은 신뢰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직접금융시장(채권, 주식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금융체제하에서 이러한 금융관행은 철저히 금지된다. 수요자 중심의 금융관행과 신용대출이 정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용대출이 가지는 이같은 우월성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이 칭송받을 이유는 없다. 땅투기가 해로운만큼, 기업 스스로가 주식·금융투기의 대상이자 그 주체가 되는 경제체제가 안정적일리 없기 때문이다.
차입경영과 기업의 탈금융중계기관화(financial-disintermediation)
「大馬不死」(Too big to fail)라는 말이 있다. 망하기엔 너무 큰, 그래서 일단은 몸을 부풀리고 봐야 하는 체제가 바로 재벌경제의 큰 특징이었다. 당연히 재벌들은 외부차입에 의한 외형불리기를 경영의 제1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한국경제는 한때 차입에 의한 매출확대가 부동산 양도차익의 증가로 이어져 선순환 고리를 이루었으나, 외형부풀리기식 차입경영은 거품붕괴와 국내 시장개방에 따른 판매부진으로, 이제는 국가경제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악의 근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재벌개혁론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이 바로 '내부유보를 이용한 자금조달방식의 도입'이다. 즉 기업활동의 이익을 고정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내부에 유보하여 건전한 재무구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고정자산에 대한 투자보다는 경영수익의 내부유보를 선호한다는 것은 땅투기를 하지말라는 좋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고정자산 투자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이는 생산적 투자보다는 금융시장에 내놓기좋은 재무구조를 갖추어 주주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증진에 힘쓰라는 다른 목적과 나아가 기업 스스로가 금융투기의 주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기업이 직접 자금을 조달하고 금융을 중계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기업의 탈금융중개기관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기업의 경영수익은 장기적인 생산플랜을 세우고 그 설비를 확충하는 데 사용되기 이전에 금리, 통화스왑과 같은 새로운 각종 금융투기의 재원으로 활용된다.
이같은 기업의 탈금융중개기관화 현상은 가계의 금융화와 함께 금융화의 가장 주요한 축을 이루며, 결과적으로 이는 유동적 가동자본을 통제하는 금융자본, 특히 연기금, 뮤추얼펀드,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의(이들도 하나의 기업이다) 지배력을 한층 더 강화한다.
정주영 부자는 왜 퇴진했는가
정주영 부자의 퇴진은 직접적으로는 현대 건설의 자금난으로 이어진 현대그룹의 유동성위기에 기인했다. 몽헌·몽구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과 현대투신 사태를 거치면서 내부불안이 불거진 현대는 4월 이후 5월 중순까지 불과 한 달 반 동안, 현대건설발행 CP(기업어음)과 회사채 만기연장이 제대로 안 되면서 6400억원을 금융권에 회수당했다. '대우 다음은 현대'라는 소문이 증권가를 강타했고, 현대의 자금줄은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급기야 지난 5월 31일 현대는 유동성 위기에 대한 두가지 자구책을 발표했다.
첫째, 정주영·정몽구·정몽헌 3부자가 경영일선에서 퇴진한다는 것과 둘째, 선진외국업체와의 전략적 제휴 및 계열사 보유지분·자산 매각을 추진한다는 것.
이에 정몽구 회장이 반발하였고, 삼성, LG 등은 불똥이 자신들에게까지 튈까 노심초사했지만, 어찌되었건 시장과 정부는 이같은 자구책을 받아들였고 현대의 주가와 자금줄은 다시 안정을 되찿았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현대그룹 정씨일가의 퇴진을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로 현대그룹의 총부채는 1999년 현재 50조가 넘는데 왜 하필 이제와서, 현대건설의 일시적인 자금난을 계기로 이같은 충격적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답해야 한다. 의외로 이유는 간단하다.
재벌체제의 경쟁력과 수명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주영 부자는 누구보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벌의 역사는 일찌기 미국의 원조물자와 일본인 자산불하가 이루어졌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재벌이 실제 지금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성장한 직접적인 배경에는 군사독재정권이 시행해온 196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존재한다. 이는 1980년대 중반까지 시행되었던 미국의 '역(逆)개방' 정책에 힘입은 것으로 이로부터 우리나라 경제는 반도체·자동차·컴퓨터·조선·석유화학 등 수출주력산업을 중심으로 한 종속적인 신흥공업국 경제체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한국경제의 발전모델은, 미국의 '역(逆)개방' 정책이 철회되고 본격적인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1997년말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하여 붕괴되었다. 한국경제 발전의 보배로서 비호되던 재벌은 이제 하루아침에 경제위기의 원흉이 된 것이다. 정부 경제정책과의 효율적인 공조체제는 정경유착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던 거대한 덩치는 문어발식 확장경영으로, 그리고 뚝심과 집념의 경영은 일순간 '황제경영'으로 배척받게 된다.
정주영 부자가 퇴진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같은 재벌지배체제의 위기와 '재벌개혁의 진보성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 아닌 폭탄선언을 하고 물러난 것이다.
"본인은 현재 시대의 흐름과 우리 경제의 앞날을 생각할 때 과거에는 그룹 체제가 각사간의 협조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이제 세계적인 흐름과 여건은 각 기업들이 독자적인 전문경영인체제로 운영하는 것만이 국제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제 오늘부터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또한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도 함께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중략.... 우리는 앞으로 전문경영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주주로서만 남아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2000년 5월31일 정주영
재벌개혁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
재벌체제가 한국경제발전의 유일한 대안이라면서 재벌개혁에 저항하고 있는 일부재벌과 보수정치권, 일본식 경제모델의 사수를 외치는 오마에 겐이치를 필두로 한 보수적 반신자유주의 논객들을 제외한다면, 이번 정주영 부자 동반퇴진에 대한 평가에 관한 한 신자유주의와 일부 진보진영간에는 어느정도 합의가 존재한다. 어찌되었건 '황제경영'이 종식되고 전문경영인체제가 도입된 것은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혁의 강도와 속도, 범위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과 이견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합의'는 결코 안정적으로 결정된 무엇이 아니라 '위기적 조절양식'으로써 갈등의 수렴과정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번 정주영 부자의 퇴진은 즉각적인 현대그룹의 해체와 황제경영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현대 각계열사의 주식지분이 그대로 존재하고, 각 계열사간에 얽힌 복합상호출자가 여전히 그들의 지배력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소유구조하에서 정씨 일가는 언제든지 경영일선에 복귀할 수 있을뿐더러, 설령 전문경영인체제가 출범한다하더라도 그것은 가신(家臣)경영인에 의한 대리지배체제일 뿐 아직 실질적인 경영관행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번 정씨부자의 퇴진이 삼성, LG 등 타재벌총수일가의 퇴진으로 곧바로 연결된다고 볼 수도 없다. 적어도 이들 타재벌에게 있어 이번 현대사태는 현대투신, 건설의 유동성위기에 대한 현대측의 특수한 자구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저간의 사정이 재벌개혁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틀 자체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합의틀 내의 갈등이 재생산해낼 부당한 쟁점들과 각종 이데올로기들은, 그때 그때 결정되어질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확정시키는 데에 일조할 것이다.
재벌개혁의 진실 : '소유·경영의 분리'와 미국식 '글로벌 스텐다드 경영 도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보다 본격적으로 정주영 부자 퇴진이 상징하는 재벌개혁의 본래 의미와 그것이 몰고 오게 될 한국기업(경제)의 미래에 대해 살펴보자.
정주영은 5·31 발표문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주주로서만 남아서 지켜보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6월 21일 법무부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안 용역보고서]를 발표하여, 이사회와 주주총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오너와 대주주의 경영횡포를 막고 경영 투명성을 높일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지배구조개선안은 사외이사의 수와 권한을 늘리고, 소수주주권 강화를 위한 집단소송제도, 집중투표제등을 도입하며, M&A(인수합병) 때 주주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상대회사의 M&A 시도에 방어조치를 못하게 하고,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여 기업지배에 관여토록 하는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이른바 재벌의 전문경영인체제로의 전환,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의 도입이다.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은 이같은 '소유·경영의 분리'가 재벌의 황제경영과 정경유착을 근절시킴으로써 소유자의 경영권 집착을 합리화하고 소유권을 순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강변한다. 때마침 재벌들은 일제히 법무부의 개선안이 기업경영을 둘러싼 소송 러시를 이루고 경영권이 위협받는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재벌개혁의 진보성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러나 경영에서 손을 뗀 소유권자는 경영권을 박탈당한 피징벌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의미의 자본가인 금융자본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재벌의 반발은 이미 그들 또한 잘 알고 있는 수명을 다한 재벌지배체제 사수의 의미라기보다는, 그 시기를 늦추고 보다 많은 개혁의 인센티브를 따내기 위한 저항이다. '소유·경영 분리'의 진정한 의미는 극단적인 사적 소유권의 옹호이며, 금융주도적 축적체제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사적 소유권 재구축의 신호탄일 뿐이다.
1> 소유·경영 분리의 역사
일찌기 20세기 초에 우리나라 재벌과 비슷한 기업가(Entrepreneur)체제를 제한하고 전문경영인체제를 도입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는 '소유·경영분리'의 의미와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은 1890년에 반독점 셔면법(Sherman Act)을 제정하였다. 이는 자유경쟁에 대한 독점의 위협이라는 19세기 말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처하려는 미국 자본주의의 선택이었다. 뒤메닐&레비에 따르면, 셔면법은 그와 같은 시기에 제정된 주식보유를 허용하는 법과 함께, 오히려 록펠러와 모건과 같은, 금융적 융합에 의한 거대 법인기업이 등장하게 된 주요한 배경원인이 된다.
셔먼법은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독점)협약이나 협회를 금지함으로써 독점을 규제하였지만, 이 법에 의해 유일하게 허용되는 순수하고 단순한 합병을 촉진함으로써 거대 법인자본의 형성과 발전에 공헌했던 것이다. 이후 미국 자본주의는 20세기 초부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봉급을 받는 피고용인 관리자와 금융이 결합되는 전문경영인체제를 갖추어나간다. 이른바 경영혁명이었다. 미국경제는 비로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그러나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거대한 20세기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거대한 제국은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며 등장한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에 의해 법인자본주의를 확립시켰다. 그리고, 다시 1970년대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케인즈주의에 의해 억압되어온 소유 또는 금융의 주도권을 되찾아줌으로써 1920년대와는 또 다른 금융화를 거쳐 1980~90년대 '구조조정 CEO체제'를 등장시킨다.
2> 경영과 분리된 소유 : 금융자본가의 출현과 사적소유권의 재구축
소유와 경영이 분리됨에 따라 소수의 지분만으로 거대 기업집단을 지배경영하던 소유경영자(재벌총수)의 전횡은 사라지겠지만, 소유경영자의 전횡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지배비용?)과 경영의 자율성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경영과 분리된 소유는 지배를 위한 소유가 아니라 소유를 위한 소유로 바뀌게 된다. 국민경제 내에서의 기업의 역할과 성격, 기업내 이해관계자들간의 타협과 갈등은 개개 소유자들의 직접적인(금융적) 이해관계에 의해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재벌지배체제하에서도 모든 M&A(기업인수합병)가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벌지배체제는 기업의 소유권을 대주주의 지배에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M&A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한 기업의 소유권에 대한 공격은 기업자체의 방어로 이어졌고 국민경제주권 방어와도 직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업 소유권이 경영권과 분리된 시점에서, 기업의 소유권에 대한 공격은 기업가치와 주가차익만 보장된다면 언제든지 가능할뿐더러 그같은 행위 자체가 독자적이고 필수적인 경제활동의 일부가 된다. 가진만큼 행사하고 남의 것은 건들지 않으며, 그로부터 그 자체로 정당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사적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은 극단적으로 옹호된다.
이제 적어도 소유와 경영이 가장 확실하게 분리된 미국에서, 기업(의 일부)을 소유하고 있는 연기금·뮤츄얼 펀드 등의 기관투자자들에게(이들은 대부분 소수주주들이다) 기업(의 일부)은, M&A시장에서 결정되는 기업가치와 주식시장에서 주가로 표시되는 포트폴리오의 한 구성부분일 뿐이다. 기업과 산업의 국민경제적 의미와 역할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경영과 분리된 소유는 오로지 금융자산의 가치로서만 평가되고 운동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가로 전환된 소유자들의 이윤은 자신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생산적 경제활동이 아니라, 소유와 분리된 피고용관리자(구조조정 CEO)의 경영과 갖가지 금융기법으로 이루어진 투기적 기술에 따라 결정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같은 변화를 투명경영이 정착된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시장에 의한 사회적 통제'의 실현이라고 말하지만, 시장의 무정부성에 의탁한 사회적 통제란, 달리는 기차안의 평온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우리는 변화한 국가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강한정부란 금융자본가들의 현란한 투기기술이 본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갖추기 위해, 결국 달리는 기차의 창문을 닫고 기차 안의 평온을 강제하는 역할을 강화하는 것을 주업무로 한다. 기차의 속도가 빨라지고 국가의 통제가 강력해질수록 기차 안의 평온이 깨지는 순간의 충격은 커져만 갈 것이다.
3> 소유와 분리된 경영 : 구조조정 경영과 극도의 고용불안(감원-다운사이징 경영, 평생직장에서 평생직업으로)
갈브레이드와 같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은 소유와 분리된 경영의 등장을 경영자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미화시키려 했지만 1980~90년대를 장식한 구조조정 CEO들의 악랄함과 점증하는 세계적인 금융 불안정성, 각종 금융 테러는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반민중성과 구조적 모순을 증명할 뿐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CEO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잭 웰치는 1990년대 GE의 조직개편 3대 방향을 [계층구조를 네트워크 구조로, 관리위주를 유연한 조직으로, 중앙집권에서 권한이양으로]이라고 간명하게 구호화했다. FLAT형 조직, 철저한 성과-실적별 임금제와 책임독립사업부제, 1980~90년대에 이르는 10여년에 간에 걸친 구조조정과 감량경영, 과감한 정리해고 단행(예: 1992년 이후 GM 7만4천명, IBM 6만3천명 해고감원), 바로 이런 것들이 이른바 '구조조정 CEO'와 '구조조정 경영'의 등장으로 인한 경영조직·관행상의 대표적인 변화들이다. 전체고용인력의 핵심 5%이하만이 보존되었고, 그외 노동인력은 불안정 노동자층으로 관리되었다.
CEO들은 그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전문경영인 시장에서 평가·거래됨으로써 특정 CEO의 임금과 이미지·능력은 주가·기업가치와 직결되었으며, 연간 수조원대의 연봉+스톡옵션 수입을 올리는 CEO들이 속출했다. CEO는 경영에 관한 배타적 전권을 보유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급을 받는 피고용관리인으로서 그의 가격을 평가해줄 주주들의 조급한 기분을 맞춰준 후에야 유지될 수 있다. CEO에게는 기업가치와 주가를 높이기 위한 대량감원조치를 거부할만큼 자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기업 내부에서는 그의 지위와 권한을 제어할만한 세력이 없었던(없어야 하기도 하고) 관계로 감원-다운사이징 경영은 CEO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손쉬운 경영비법이 되었다. 더구나 이들 CEO들은 주주들만큼이나 그 자신들이 금융적 이해에 직접적으로 종속되어 있기도 하다.
이같은 '소유·경영의 분리'는 '감독·경영의 분리'에 입각한 미국식 이사회 구조의 기본원리에 의해 보강된다. 즉 이사회의 경영기능은 CEO(최고 경영자)와 CFO(재무담당임원) 등의 집행임원(executive officer)에게 전적으로 이전되고, 이사회 회장(Chairman)과 사외이사들로 이루어진 이사회(또는 감사회)는 집행임원들의 경영을 감독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 이로써 [주주총회-감사(사외이사로 이루어진 감독기관)-이사회(집행기능)]간의 역할분담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기업지배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나 정부와 소유경영자/(기존)이사회간에 존재해온 타협과 긴장은 이 철의 삼각구조 속에서 질식할 수밖에 없다.
설령 사외이사 중 일부가 노동자대표라도, 이같은 소유·경영·감독 분리의 틀 내에서 그 본질적인 기능을 바꿀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경영과 분리된 사외이사의 감독권이란, 주주가치/기업가치를 증대시켜야 한다는 경영의 목적 실행에 대한 감독일 뿐이기 때문이다.
4> 금융중심적 기업조직·경영관행
재벌개혁론자들은 재벌지배체제의 전통적인 금융관행인 관치금융과 담보대출, 차입경영을 비판하면서 투명한 금융관행과 사적 금융시스템, 신용대출 정착, 내부유보(內部留保)를 이용한 자금조달방식의 도입을 추진한다.
관치금융 타파와 투명성 확보
재벌지배체제의 핵심은 정부와 (국유)은행의 지원에 있다. 여기에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갖가지 부정부패가 상존하기 마련이였다. 동시에 이같은 체제는 정부-은행-기업 내부간의 사정에 어두운 기관투자자들과 초민족자본들의 기업지배소유를 가로막는 장막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가져오는 가혹한 결과들로 인한 정책개혁 실행가능성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결정적인 해결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진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정경유착, 관치금융을 타파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독립과 금융건전·투명성 확보, 사적 금융시스템개혁이 외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이 가져온 부정부패의 문제는 부패한 국가권력의 민주화를 통해 이루어져 할 과제이지, 금융의 재사유화를 통해 이루어질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또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는 금융의 재사유화가 불법적인 밀실거래를 공공연하고 합법적인 거래로 탈바꿈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하며, 이것이 사회적 금융통제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재벌지배체제하에서 우리나라 기업의 자금조달경로는 은행을 통한 간접금융 중심으로서 담보대출이 전체 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담보위주의 대출관행이 정착되어 있다. 돈이 필요한 기업은 당연히 자금확보를 위하여 담보자산의 확보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수익보다는 자산증식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기업의 수익성은 왜곡되었고, 기업의 부동산투기와 같은 병폐를 불러왔다. 또한 호경기에 오른 땅값이 경기가 하강하는 시점에서 담보자산가치의 하락, 금융부실화으로 연결되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기업재무자료의 높은 신뢰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직접금융시장(채권, 주식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금융체제하에서 이러한 금융관행은 철저히 금지된다. 수요자 중심의 금융관행과 신용대출이 정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용대출이 가지는 이같은 우월성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이 칭송받을 이유는 없다. 땅투기가 해로운만큼, 기업 스스로가 주식·금융투기의 대상이자 그 주체가 되는 경제체제가 안정적일리 없기 때문이다.
차입경영과 기업의 탈금융중계기관화(financial-disintermediation)
「大馬不死」(Too big to fail)라는 말이 있다. 망하기엔 너무 큰, 그래서 일단은 몸을 부풀리고 봐야 하는 체제가 바로 재벌경제의 큰 특징이었다. 당연히 재벌들은 외부차입에 의한 외형불리기를 경영의 제1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한국경제는 한때 차입에 의한 매출확대가 부동산 양도차익의 증가로 이어져 선순환 고리를 이루었으나, 외형부풀리기식 차입경영은 거품붕괴와 국내 시장개방에 따른 판매부진으로, 이제는 국가경제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악의 근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재벌개혁론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이 바로 '내부유보를 이용한 자금조달방식의 도입'이다. 즉 기업활동의 이익을 고정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내부에 유보하여 건전한 재무구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고정자산에 대한 투자보다는 경영수익의 내부유보를 선호한다는 것은 땅투기를 하지말라는 좋은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고정자산 투자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이는 생산적 투자보다는 금융시장에 내놓기좋은 재무구조를 갖추어 주주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증진에 힘쓰라는 다른 목적과 나아가 기업 스스로가 금융투기의 주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기업이 직접 자금을 조달하고 금융을 중계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기업의 탈금융중개기관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기업의 경영수익은 장기적인 생산플랜을 세우고 그 설비를 확충하는 데 사용되기 이전에 금리, 통화스왑과 같은 새로운 각종 금융투기의 재원으로 활용된다.
이같은 기업의 탈금융중개기관화 현상은 가계의 금융화와 함께 금융화의 가장 주요한 축을 이루며, 결과적으로 이는 유동적 가동자본을 통제하는 금융자본, 특히 연기금, 뮤추얼펀드,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의(이들도 하나의 기업이다) 지배력을 한층 더 강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