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4.73호
첨부파일
73_반전_김병수.hwp

사회주의와 세계대전

: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3)

조르주 옵트 |

[편집자 주]

이번 호에는 조르주 옵트의 『사회주의와 세계대전: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의 마지막 연재분을 싣는다. 1차 세계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방어해야 했고, 독일은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해야 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조약 때문에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러시아를 도와주어야 했다. 전쟁은 대전으로 발전하였으며, 드디어 제2 인터내셔널은 자신들의 결의들을 실행에 옮길 시간을 맞았다. 이 막중한 임무는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두 어깨 위에 올려졌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했던 조레스가 광신적인 국수주의자에게 암살당한다. 프랑스는 지도력을 상실했고, 반전운동의 모든 책임이 독일 사민당에게 위임되었다. 당시 SPD는 제국의회 내에 110명의 프락션을 갖고 있었으며, 이 숫자는 전체 숫자의 27.7%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SPD는 독일의 전쟁국채 발행을 막을 수 있었으며, 독일의 전쟁 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 지도부들은 점점 회의주의에 빠져들고 있었으며, 노동자 계급에게는 전쟁지지와 민족주의가 점점 더 퍼져가고 있었다. 당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중정당으로 성장한 SPD는 자신의 존립기반인 노동자 대중들의 요구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사회주의 이념은 구체적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며, 전술적 실천에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했다. 1914년 8월 4일 SPD가 전쟁공채 찬성투표를 하면서 인터내셔널은 와해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대중들의 민족주의로의 경도를 비난하거나,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지 못하고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배반'하거나 혹은 그 이념 자체에서 이미 전쟁을 반대할 수 없었던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부들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격렬한 정치 사회적 갈등과 투쟁들을 살펴보고, 민족주의의 팽창과 사회주의 운동, 보수주의 운동이라는 각각의 흐름들을 분석해야 한다. 특히 국제주의를 통해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적 이행을 기획했던 사회주의 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전쟁을 막지 못했는지에 관해서 살펴보는 것은 현재의 사회운동이 점점 더 변해가는 전쟁의 양상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난점과 과제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14년 7월의 국제사회주의사무국

1914년 6월 28일에 일어난 사라예보 암살 사건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여론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 사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분쟁 때문에 러시아, 프랑스,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과 그 부인의 암살을 발칸 비극 중 또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했다. 조레스(Jaur s)는 이 살인을 '발칸반도에 흐르는 피의 강에 [또 하나의] 시내가 [합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암살이 일어난 다음날 독일사회민주당(SPD,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집행부는 이 사건으로 비엔나 국제대회가 위태로워질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당 의장 하제(Hugo Haase)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그 국가들이 다시 전쟁의 위협에 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분위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그 수도에 모여서 제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입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에베르트(Ebert Friedrich)는 '암살이 국제적 파문을 일으키거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긴장이 증대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의 결과, 오스트리아 대표들이 비엔나 회의를 변경할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몰켄부르(Hermann Molkenbuhr)가 대표로 국제사회주의사무국(ISB, 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 전원회의 소집을 요구하기로 했다. SPD가 솔선해서 ISB 회의를 발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위스망스(Camille Huysmans)는 즉시 오스트리아 당 서기장 아들러(Friedrich Adler)에게 SPD의 제안을 전했다. 아들러는 독일의 공포가 근거 없는 것이라며 위스망스를 안심시켰다. 개최 장소는 변경되지 않았으며 비엔나에서는 대회 준비가 거의 끝났다. 모든 가맹 정당들이 1914년 3월 ISB의 공식 초대를 수락했고, 지난 대회보다 더 많은 대표들을 보낼 예정이었다. 또한 이전에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중국, 페르시아, 몇몇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대표들도 참석의사를 밝혔다. 남은 문제는 국제 대회 이후에 개최될 집회의 연사를 결정하는 정도의 기술적인 세부사항들 뿐이었다.
ISB 사무국은 비엔나 대회 전에 각국 분파들 사이의 단결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그들 내의 차이를 해소해야 했다. 1913년 12월 ISB 집행위는 러시아와 폴란드 사회민주당 내의 상충하는 분파들을 중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볼셰비키는 이런 논의에 참석하는 것을 계속 거부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어려운 임무였다. 1914년 1월 ISB 사무국장은 브뤼셀에 잠시 체류하고 있던 레닌(Vladimir Ilich Lenin)을 설득하여 러시아 모든 분파의 대표를 모으는 회의를 ISB의 후원으로 개최하자는 제안에 대한 볼셰비키 지도자의 부정적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6월과 7월에 이르기까지 ISB 사무국은 폴란드와 러시아 사회민주당 당원들 내부의 이견을 해결하는 데 전념했고, 결국 7월 16, 17일 브뤼셀에서 통일회의(Unification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며 ISB가 제안한 통일의 기초를 계속 거부했다. 레닌은 공개적으로 반대를 표명했지만, 집행위는 회의 결과에 대해 만족했고, 비엔나 대회에서 조직 간 불화가 해결되었다는 결정적 선언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1914년 여름은 그 전보다 특히 조용하지도, 더 많은 파란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정치와 외교의 세계는 모두 휴가 중이거나 휴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가수장들과 마찬가지로 카우츠키(Karl Kautsky),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에베르트,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 빅터 아들러(Victor Adler)와 같은 인터내셔널의 많은 지도적 인사들이 7월 중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인터내셔널은 전체적으로 고요했으며, 서신왕래나 국제 대회 준비를 위한 회의에서도 전쟁의 징후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7월 21일에 이르러서야 프리드리히 아들러가 인터내셔널 대회의 개최여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미 언론 검열이 진행 중이었고, 『노동자 신문(Arbeiter Zeitung)』에 보도된 프랑스통합사회당(SFIO, Section Fran aise de l'Internationale Ouvri re) 특별대회의 내용에서 바이앙( douard Vaillant)-키어 하디(Keir Hardie) 제안에 대한 모든 언급이 삭제되었다. 하지만 아들러가 이 심상치 않은 소식들을 함께 논의할 당 집행부들은 모두 휴가 중이었다. 7월 23일이 되어서야 아들러는 이 문제에 대한 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 제안은 만장일치로 수락되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쟁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회의가 끝나고 세 시간 후,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아들러는 ISB에 즉시 보고서를 보내, 이런 상황에서 국제대회를 비엔나에서 개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위스망스는 언론보도를 기초로 스위스에서 대회를 개최할 준비를 했다.1) 하지만 여전히 국제 정세는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더 국지적인 분쟁을 예상했다. 그러나 7월 24일과 25일에도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고, 사람들은 지켜보자는 태도를 취했다. 7월 24일 위스망스는 중앙 유럽의 위급한 상황을 이유로 ISB 긴급 전원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그러나 집행위원들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관련 국가들로부터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내일까지는 회의를 소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휴가 중이었던 반데르벨데(Emile Vandervelde)는 다음 날 전보로 아들러가 동의한다면 회의를 소집해도 좋고, 자신도 참석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위스망스는 즉시 조레스, 바이앙, 아들러, 몰켄부르에게 회의 소집에 관한 의견을 묻는 전보를 보냈고 긍정적인 답신들이 도착했다. 7월 26일 아침 위스망스는 7월 29일 브뤼셀에서 회의를 연다는 전보를 보내 대표들을 소집했다. 이 때 일이 빠르게 진행된 것은 일의 심각성보다는 조직적으로 얻은 경험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때 역할이 바뀌었는데, SPD 집행부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ISB의 다른 조직들보다 빠르게 반응한 것은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7월 24일에 이미 카우츠키는 최후통첩으로 세르비아와의 전쟁발발이 확실해졌다고 믿었다. 7월 25일 SPD는 '최근 수십 년 중에서 가장 심각한 시기가 왔다. 우리는 전면전의 위협을 받고 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인류와 문명의 이름으로, 전쟁광의 범죄 음모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선언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런 긴박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SPD 집행부의 대다수는 분쟁이 국지전에 그칠 것으로 확신하면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했고, 카우츠키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날인 7월 25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도 인민들에게 무장 분쟁의 결과를 강조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호소문도 분쟁의 국지적 특성을 강조했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 미칠 효과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또한 전쟁에 저항하려는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의 의지나 능력에 관한 언급도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많은 도시들에서 반전 집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집회들은 실제의 불안함보다는 상황에 따른 동요 때문에 개최되었다. 카우츠키는 7월 25일 아들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중의 수동성과 무관심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최후통첩 이후에 세르비아와의 전쟁 발발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상황은 바이앙-키어 하디 수정안의 존재이유를 말해줍니다. 이제 오스트리아에서 대중 파업을 포함한 반전 행동이 실제로 벌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어떤 저항의 징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당의 통일을 보존하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특히 폴란드 동지들이 이를 매우 어렵게 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7월 25일과 27일 사이에 1913년 11월과 12월 유럽을 휩쓸었던 노동자들의 저항은 반복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노동조합총연맹(CGT)만 홀로 임박한 위협에 관심을 기울였고, 반전집회에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SFIO의 상임운영위원회(CAP, Commissin Administrative Permanante de la SFIO)도, ISB의 프랑스 대표들도 아가디르 위기나 발칸전쟁 때만큼 우려하지 않았다. 확실히 새로운 국제 위기가 예상되었지만, 조레스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타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의 심각함을 알고 있었지만 조레스도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고, 바이앙, 게드(Guesde Jules), 셈바트(Marcel Sembat)과 같은 다른 프랑스 대표들은 분쟁이 국지적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1912년 12월의 거짓 경보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 정부가 진정으로 평화를 보존하길 원한다고 확신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사회주의 정당들의 몫이라 생각했다. 인터내셔널 대부분의 분파들도 CAP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반데르벨데는 이 소식들이 '매우 불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전쟁 발발이나 심지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국지전의 발발도 믿지 않았다. 그는 국제 데탕트의 시기가 끝났고, 세계가 '위기와 분쟁의 또 다른 시기'를 맞이했다는 견해를 가졌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이 비교적 침착했던 까닭은 이들이'유럽 전체 운동의 국제적 협력'을 달성하기 위한 ISB 회의 결과를 기다렸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결국 혼란한 상황을 낙관하고, 지난 경험에 따라 국제상황을 성급하게 과장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ISB 회의의 논의와 그 결과를 보면, 우리는 실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회의 직전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입장을 검토해보고 회의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1913년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지난 몇 년간의 정치적 부침을 잊을 수 있도록' 유럽의 평화(비록 위태롭긴 했지만)를 믿고자 했다. 유럽을 뒤흔든 다양한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주의자들은 발칸과 같은 지역적 분쟁이 유럽 차원의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외교로 진정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관점은 정치적 근시안이나 부족한 현실감 때문은 아니었다. 1914년의 발칸 분쟁은 동맹 문제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의 개입 위험이 있던 1909년 러시아-오스트리아 분쟁과 흡사했다. 게다가 팽배한 혼란으로 인해 ISB 대표들 대부분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그리고 특히 조레스가 외교적 해법이 가능하다고 확신한 것은 논리적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모순적인 언론 보도에 정보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외교 상황의 미스터리를 풀지 못했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지배자들의 의도를 예측하지도 못했다.
1912년 11월과 대조적으로 인터내셔널은 상황에 압도되었다. 사실 우익과 좌익 모두 같은 시각에서 상황을 분석했다. 독일 급진좌파들도 심각한 전쟁 위험은 없다고 결론지었고,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이후에야 약간의 불안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베를린이 중재안을 거부한 후, 7월 27일이 되어서야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점차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로자(Rosa Luxemburg)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 날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 의원과 당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어 이탈리아의 중립을 요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CAP도 파리에서 회합을 갖고, '유럽의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무력정책에 대해 경고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CAP는 여전히 외교적 해법을 믿었고, 프랑스 정부를 신뢰했다. 그들은 프랑스 정부가 화해와 중재 정책을 펼치고, 동맹국인 러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선언들에 따르면 ISB 회의의 주된 목적은 '평화 유지라는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공동 결정을 천명하고', 전쟁 위협에 맞서 '강력한 공동행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성명들은 사무국의 실제 계획보다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7월 25일에서 28일 사이 위스망스가 주고받은 서신에 따르면, 그가 회의 소집을 결정했을 때 그의 관심은 오직 국제대회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오스트리아 대표들로부터 직접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에 있었다. 처음에 반데르벨데만은 관련국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가 참석하는 확대 집행위원회 회의를 생각했다. 그는 아들러에게 정보를 받고 나서야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대체로 이런 생각으로 브뤼셀에 갔다. 그들은 상황의 엄중함을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 정확한 의견을 갖고 있었는가? 아니면 오직 협의를 하기 위해 모였을까? 회의의 기록을 보면 이런 질문에 대해 얼마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ISB의 마지막 회의: 낙관주의 혹은 맹목?

매 시간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어가던 1914년 7월 29일 아침 민중회관 6층의 노동자교육센터에서 회의가 열렸다.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선언과 이에 동조하는 파리와 베를린의 성명이 회의의 배경이었다. 유럽에서 명망 있는 다수의 대표단이 모였다. 그러나 세 대표의 불참이 문제가 되었다. 상황에 대해 보고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세르비아 대표와 독일 대표 에베르트, (크라코프에 체류하던 레닌을 대신해 참석하기로 한) 볼셰비키 대표 리트비노프(Maxim Litvinov)가 참석하지 않았다.
이미 언론이 통제되었고 회의는 비밀리에 진행되어, 공식기록이 발표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참석자들의 설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글들은 대회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작성되었으며 1914년 이후의 관점으로 회의를 묘사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반데르벨데는 전쟁에 반대하는 인터내셔널의 결정을 강조하고, 짐머발트와 3인터내셔널의 추종자인 발라바노프(Angelica Balabanoff)2)는 회고록에서 2인터내셔널의 무능력을 강조한다.) 신중히 다뤄져야 한다.3)
ISB 마지막 회의에서 논의는 두 가지 문제에 집중되었다. 첫 번째는 국제정세에 관한 것, 두 번째는 다가올 국제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회의는 카우츠키가 베벨 사후 인터내셔널의 유일한 지적, 도덕적 지도자라고 본 빅터 아들러의 보고로 시작되었다. 그는 '어떤 것도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확신하면서' 회의에 참가했고, 희망을 잃은 듯 보였다. 그는 상황을 어둡게 묘사했으며,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막기에 자신의 당이 무능력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 상황에서 아들러의 소망은 존재하는 노동자 조직과, 무엇보다 자신의 당을 지키는 것이었다. 체코 대표 네멕(Anton Nemec)만이 아들러와 같은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이 실망스럽고 애처로운 진술을 듣고 참석자들은 참담함에 사로잡혔다. 아들러의 이야기를 들은 대표들은 그의 진술이 '과장된 비관'이며 무엇보다 '이런 비극적인 시간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표들이 아들러의 정치적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그의 이런 소견으로 매우 실망했다.
아들러의 연설에 하제는 불쾌해했고, 로자는 격분했다. 로자는 회의가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되어서는 안 되고,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반전 운동을 보고하여 아들러에게 열정적인 연설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제와 조레스도 이런 생각에 동의했다. 국제 대회의 날짜와 의제를 논의한 후, 회의는 정치 정세를 논의하기 위해 속행되었다. 비관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대표들은 모든 전쟁 위협에 효과적으로 개입해야 하며, 또 그것은 가능하다고 확신시키려 노력했다. 사회혁명당의 루바노비치(Rubanovich)와 멘셰비키 사회민주주의자 악셀로드(Pavel Axelrod)는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결의를 전하며 ISB에 새로운 낙관주의와 자신감을 고취시키려고 했다. 악셀로드는 '전쟁이 일어나면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영국 대표 글래시어(Bruce Glasier)는 더욱 선동적으로 연설하면서 영국 프롤레타리아는 인터내셔널의 가장 세부적인 지침까지도 따를 것이라 강조했다. 정세에 대한 보고에서 하제는 지배계급, 무엇보다 독일 산업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확언했다. 오직 러시아가 공격을 했을 때만 독일이 개입할 것이다. 하제는 정부를 압박함으로써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당은 '의무를 다할 것이라' 단언했다.
국제 정세에 대한 ISB의 관점은 회의의 최종 결의안에서 드러난다. 비록 대다수 대표들이 상황이 위태롭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국제 대회를 개최할 시간이 있다고 믿었고, 공동행동을 결정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오직 대회 날짜를 앞당기는 것뿐이었다. 대회는 8월 9일, 파리에서 열릴 것으로 결정되었고, 대회 첫 번째 의제로 '프롤레타리아와 전쟁'이 제안되었다. 그들은 이 국제 대회가 바젤대회처럼 새로운 평화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조레스는, 회의를 연기하고 ISB가 필요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발라바노프의 제안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조레스는 '대회의 논의와 결의안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신감을 줄 것이며, 대회를 취소한다면 그들은 실망할 것이다. 우리는 대회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조레스는 ISB가 독자적으로 내리는 결정은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국 정당들이 강제력도 없는 집행위의 결정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한다고 느낄 때 공동 행동에 참여할 수 있고, 대회는 이를 위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조레스와 마찬가지로 브뤼셀 회의에 참석한 대다수 대표들은 인터내셔널 대회를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 간주했고, 이후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전쟁의 예방·제한에 대한 결정이나 즉각적인 행동에 대해 합의하기를 원했다. 결국 ISB 회의에서 인터내셔널의 예방 전략, 무엇보다 총파업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이 문제들이 회의 도중에 논의되기는 했지만, 다른 맥락에서, 즉 총파업 문제가 인터내셔널 대회의 의제로 남아야 하는지의 여부만이 논의되었다. 빅터 아들러는 '의견차가 있는 문제'는 대회 의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고 중재하려 했다. 조레스는 '의견차가 있는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며, 총파업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젤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고, 우리는 아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탈리아 대표 모가리(Oddino Morgari)가 자국 상황을 보고하면서 총파업 문제를 제기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모가리는 '총파업 등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난점을 이해한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스페인 대표의 기록에 따르면 모가리는 '우리는 이탈리아 정부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가장 확고한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각 총파업을 일으킬 것이다. 총파업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총파업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모가리는 '이탈리아는 생각하는 것만큼 훌륭한 동맹자가 아니다. 우리는 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모든 곳에서 시위가 진행 중이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탈리아에서 총파업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회의 참석자 중 가장 단호하게 총파업을 지지하는 바이앙과 키어하디가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까닭은 인터내셔널 대회가 며칠 후에 예정되어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총파업이 정당화될 수 있을 만큼 정세가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ISB 회의에서 유일하게 구체적인 제안을 한 사람은 바이앙이었다. 그는 1912년 12월의 위기 때와 같이 '약소국(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의 사회주의자들이 자국 정부가 중재 재판소를 설립하도록 제안해야 한다.'는 제안을 반복했다. 이 제안은 원칙 수준에서 채택되었고, 제안에서 언급된 국가들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고 결정되었다.
ISB 회의로 하루를 꼬박 보낸 후에 주요국 대표들은 7월 29일 저녁 대규모 국제 평화 집회에서 연설했다. 대표들은 모두 자신감에 찬 연설을 했고 수천의 시민들이 열광했다. 집회 이후 ISB 회의로 모인 대표들은 달성된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 비밀리에 개최된 데다 무능력과 패배를 시인하면서 시작된 회의는 긍정적인 분위기로 전환되었으며, 인터내셔널의 결정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 속에 절정에 다다랐다.
다음 날 아침의 회의는 짧았다. 하제가 제출한 공식 성명이 채택되었다. 같은 날 언론에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공식 성명은 각국 조직들이 이전에 발표한 성명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공식 성명은 국제정세 악화로 프롤레타리아의 근심이 늘고 있으며 반전 시위와 중재수단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긴급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파리 국제대회의 소집을 발표했다. 세계 규모의 충돌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ISB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회의를 끝냈다. 왜냐하면 각국 대표들은 오직 국제 사회주의자 의회(International Socialist Parliament)만이 사회주의자의 공동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대회가 열리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반데르벨데에 따르면 조레스는 파리로 떠나기 직전에 '이것은 또 다른 아가디르가 될 것이고, 우리는 부침을 겪게 될 것이지만 이 위기는 다른 때처럼 해결될 것이다.'고 말하려 했다.
회의 막바지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ISB는 유럽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평화가 곧 재건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지도자들, 특히 하제와 조레스는 '국지화 정책'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고,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인터내셔널의 역량과 각 조직의 행동 결의를 굳게 믿었다. 발라바노프는 이후에 '조레스와 로자를 비롯한 극소수만이 노동자 계급에게 닥쳐올 것을 짐작하는 듯 했다. 그러나 가장 통찰력이 깊은 사람조차도 재앙이 어떤 차원에서, 얼마나 근접해있는지 알지 못했다.'고 썼다. 그리고 그녀는 자서전에서, 7월 29일 오후 회의 중 러시아의 동원령이 전해졌을 때 러시아 대표 루바노비치와 악셀로드조차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데르벨데도 '심지어 우리가 전쟁의 코앞에 있을 때조차, 낙관주의는 계속 팽배했다.'고 썼다. 이것은 낙관주의인가, 맹목인가? 이 두 요소가 모두 존재했는데, 이것은 평화주의와 인도주의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이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인류가 재앙의 위협에 처해있다는 반복된 예측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든 나라의 인도적 인간들과 각국의 통치 책임을 알고 있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재앙과 절망으로 끌어들일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조레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성과 양식의 승리를 믿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하제에게는 평화주의적 환상의 영향이 덜했다. 이런 차이가 있었지만 하제도,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세계전쟁으로 발전할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7월의 혼란 속에서도 모든 사회주의 서클은 위기의 진행 양태를 비슷하게 분석했다. 로스메르(Alfred Rosmer)는 7월 30일에 '좌우간 유럽 전쟁의 위협은 처음만큼 절박하지 않다. 상황 전개에 따라 위기는 며칠 또는 몇 주간 지속될 수 있다.'라고 썼다.
7월 29일과 30일에 사회주의자들이 이렇게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자신할 수 있었던 정치적 요소들을 살펴보자. 먼저 러시아를 제외한 대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정부의 평화주의적 개입을 확신했다. 글래시어는 ISB 회의에서 영국의 내각 전체가 평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조레스는 프랑스 정부가 적극적 평화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며 일부 무기상인과 군국주의자 그룹만 침략 정책을 지지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명시적으로 밝혔다. 이에 따라 프랑스 사회주의들의 임무는 정부에게 평화정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간섭하지 않을 것을 프랑스 정부가 강력하게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제와 로자도 빌헬름 2세(Wilhelm Ⅱ)와 정부의 평화적 의향을 확신했다. 그들이 보기에 베를린과 비엔나가 같은 수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4) 하제는 7월 26일 독일 총리와 회견을 하면서 이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7월 28일 로자도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변덕 때문에 러시아, 프랑스,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위험과 테러를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5)
일반적으로 SPD는 독일 정부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 이후 당 지도부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신들이 정확한 사실을 모른 채 혼란을 야기하는 정부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인정했다. 사실 일의 진행 속도는 가차 없었다. 누군가가 세르비아 때문에 평화를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는 없었다. 이은 소위 자본주의의 이해라는 '논리'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정부의 정책을 상상할 수 없었다.
어떤 문서들은 8월 4일 항복을 위한 심리적 전제, 신성동맹(Union sacr e)의 정신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브뤼셀 회의에도 있었다. 회의에서는 국제위기와 침략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랑스 대표들과 독일 대표들의 의견이 달랐다. 7월 29일의 회의와 집회에서 조레스는 공공연히 독일의 외교정책을 공격하면서 특히 제국 정부의 타산적인 책략들을 비난했다. 바이앙도 '오스트리아가 최후통첩을 보낼 때 독일이 이것을 합의했다면, 이는 전쟁을 위해서 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옳든 그르든, 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방어전쟁만을 생각했다. 반면 SPD 지도부는 7월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독일정부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독일이 방어전쟁을 치르게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7월 29일 하제는 '독일은 평화를 원하지만 만약 러시아가 개입한다면 독일 또한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ISB 회의의 모든 참석자들은 SPD가 러시아에 갖고 있는 혐오에 대해 알고 있었다. 1917년 글래시어는 '마지막 ISB 회의에서 SPD 지도자들은 독일이 러시아로부터 침략당할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독일인들은 동원령에 저항할 수 없고, 만약 할 수 있다해도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고 솔직히 선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회의에서는 아무도 이런 뉘앙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인터내셔널의 낙관주의에서 더 중요한 요인은, 비록 오스트리아에게 낙심했지만, 다른 모든 국가의 당들이 이전에 채택된 결의안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대부분의 대표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당이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들러의 비관론보다는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하제의 보장을 듣는 쪽을 택했다. 모든 참석자들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부의 책략에 저항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SPD에 대한 조레스의 신뢰는 사실 어느 정도는 가장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SPD 지도부들이 1914년의 결정적인 순간들에서 진지하게 숙고된 조치들을 사용하거나 당의 강력한 조직들을 동원해서 전쟁을 반대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누군들 8월 4일의 사건을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1914년 7월에는 조레스가 의심을 품을만한 징후는 거의 없었지만, 환상을 품을만한 이유는 많았다. 조레스가 이 중요한 몇 주간 연락을 취한 사람들은 당내 우익의 영향력과 권력을 과소평가했던 신념 있는 국제주의자들이었다. 조레스는 7월 14일 파리에서는 독일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를 확신했던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만났으며, ISB 회의에서는 중도 좌파에 속한 하제와 만났다.
특히 하제는 브뤼셀에서 매우 급진적이고 자신감에 찬 태도를 보였다. 하제가 브뤼셀에 있는 동안 독일에서는 쉬데쿰(Rolle Albert S dekum)이 총리 베트만 홀벡(Bethmann-Hollweg)과 회견을 했다.6) 쉬데쿰은 이 회견에서 총리에게 '평화를 위한 어떤 행동도 (총파업 혹은 부분파업, 사보타지나 비슷한 어떤 것도) 계획되어 있지 않으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확언했다. 하제가 쉬데쿰의 조치들에 대해 보고를 받았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만약 보고를 받지 않았다면 여기에는 실질적인 '음모'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틀 후 ISB 회의에 대한 하제의 보고를 받기 위해 SPD 집행위가 소집되었을 때, 사건은 이미 끝나 있었다. 쉬데쿰 사건은 전쟁 준비에 대한 SPD의 실질적 지원이 당의 입장을 통제하던 우익의 승리로 끝난, '음모'의 결과라는 관점을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하지만 몇몇 역사가들은 8월 4일 SPD의 투표가 우익의 승리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중앙파의 실패라고 본다. 이들에게 그 원인은 (계속해서 혁명적 용어들을 사용했지만) 실천에서는 1914년 훨씬 이전부터 성내평화(Burgfrieden)로 끝난 합의와 개량주의의 길을 택한 SPD와 마르크스주의 중앙파의 발전 과정에 있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7월 말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반전 시위로 집중되었고, 좌익이 우위를 점한 것이 사실이다. 각각의 입장이 무엇인지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명확해졌다. ISB 회의 당시에는 SPD 모두가 평화주의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SPD의 평화주의는 승인된 집회와 저항운동 안에서만 작동했다. 예방 전략이 실패했을 때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했고, 무능력하고 분열된 좌파와 이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을 준비하고 있던 우파 사이의 간극이 명백해졌다. 7월 말의 결정적 순간들에서 우익만이 전쟁의 가능성을 고려했으며,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 우익이 시니시즘에 가까운 현명함으로 미래를 예측한 반면 좌익은 평화주의적 환상에 갇혀 현실을 오독했다.
참석자 간의 불비례나 회의의 결과는 놀랍다.7) ISB는 가맹 조직 중 하나를 지원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거나 행동의 공동방침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능력했다. 대표단의 다수가 부득이하다고 체념하거나, 행동이 아닌 도덕적 압력에 의존하는 것에 찬성했다. 회의 이틀 후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예측과 달리 상황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브뤼셀 회의에서는 조금도 예견하지 않았던 결말을 맞아 이제 즉각적 행동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신속한 결정이 필요했다. 또한 합의된 국제 행동이 필요했다. 이 중요하고도 극적인 3일 동안 사건은 너무 빨리 변해서 모든 순간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예방 전략이 실패하고 어떤 대안도 부재한 상황에서 인터내셔널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붕괴했다.

전쟁인가? 혁명인가?

1914년 8월의 반전은 상당한 문제들을 제기했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SPD가 제국의회에서 전쟁공채에 찬성투표를 하고, 신성동맹이 선포된 8월 4일은 혼란스럽지만 분명히 구별되는 두 가지 순간과 문제를 내포한다. 하나는 인터내셔널의 '실패', 즉 국가 간 전쟁을 막는 것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무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내셔널과 국제주의의 붕괴, 즉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에 찬성하고 전쟁을 지원했다는 사실이다.8) 8월 4일은 물론 중요한 지점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출발점도 도착점도 아니다. 이는 단순한 노선변화나 갑작스러운 전환,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사실 ISB의 마지막 회의가 인터내셔널의 종말에 결정적이었다. 사건이 빠르게 진행되자 대표들은 자신들의 예측이 거짓임이 밝혀져 거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8월 1일 독일과 프랑스가 국가 총동원령을 내렸을 때 인터내셔널이 더 이상 집합적 세력으로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위스망스는 가맹 당들에게 '최근 상황전개에 따라 파리 대회는 추후 통보가 있을 때까지 연기한다.'는 최후의 회람을 보냈다. 이는 인터내셔널이 사태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지침이나 전술도 없이 각국의 지부들은 지도자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도록 방치되었다. 숙명론적 체념이 횡행했고, 전쟁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8월 1일 SPD가 정부의 모든 집회 불허 방침에 대해 발표한 선언문은 최소한의 항의 표시도 없이 행동의 불가능성과 패배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SPD는, 프롤레타리아는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지만 사건들의 압박이 노동자들의 결의에 비해 너무 벅찼다며 스스로와 인터내셔널을 정당화한다.
8월 1일은 '인터내셔널과 전쟁'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8월 1일의 사건은 노동자 운동 전체가 결정적인 패배라고 인식했지만, SPD의 전쟁공채 찬성투표와 신성동맹을 배신으로 간주한 사람은 소수였다. 8월 1일에는 누구도 3일 후에 나타날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었다. 7월 말, 8월 초에 제국주의에 대한 관점이 달랐던 다수파와 혁명적 소수파는 상황의 중대함과 평화적 해결 가능성에 대해 같은 입장이었으며, 위기의 결과에 대해 동일한 예측을 했다. 따라서 전쟁의 충격은 양측에 같았다. 그러나 일치는 여기까지였고, 일단 전쟁이 발발한 후 사회주의자의 행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두고 다시 불일치가 시작된다. 8월 1일 이후 다수파는 체념하는 입장이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던 소수파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기존의 역사적 접근은 두 가지 유형의 해석 사이에서 동요했다. 첫 번째는 '기회주의에 물들어' 이전의 맹세들을 저버린 지도부의 배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신'이라는 용어가 감정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명백한 모순을 설명할 수는 없다. 1914년 8월 추종자들을 '배신'했던 그 지도자들이, 마찬가지로 극적이었던 1912년 11월의 상황에서는 왜 약속을 지켰나? 그들이 조직했던 대중들의 압력 때문인가? 그러나 왜 같은 운동이 1914년 7월에는 실패했나? 왜 동일한 대중들이 전쟁의 광기와 민족주의에 굴복했나?
두 번째 유형의 해석은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한다. 즉 조국을 방어하고 혁명을 포기할 것인가 혹은 자신의 당을 지키고 국제주의의 존재 이유를 포기할 것인가라는 딜레마다. 갑작스럽게 모호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사태에 직면하면서 이들은 국제주의와 애국주의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 가설을 옹호하는 구체적 전제에서 시작하는 것은 곧 가상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사실 국제사회주의는 갈등적 추진력에 의해 움직여졌고, 그 정책은 사회주의자들이 무시하려 했던 모호성으로 점철되었다. 그들은 단기적 해법과 타협에서 도피처를 찾았고, 분명한 태도를 정해야 하는 문제들은 회피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인터내셔널의 총체적 무능력은 조직의 많은 모순과 예방 전략의 이론적 취약함에서 비롯되었다. 인터내셔널의 평화주의 전략은 두드러진 모순으로 점철되어있다. 그 모순은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인식, 위협의 긴급성에 대한 평가, 세계적 충돌 가능성을 무시한 위기에 대한 낙관주의와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세계적 차원에서 인터내셔널의 활동은 무계획적이었고, 위기의 심각성에 따라 바뀌었다. 인터내셔널 지도부의 생각 속에는 '전쟁=혁명'이라는 등식도 '전쟁이냐, 혁명이냐'라는 양자택일도 없었다.
1914년 7월에 노동자 운동은 전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마지막 ISB 회의에서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전쟁은 불가능하며, 위기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6년 뒤 카우츠키는 '회의 참석자들 중 누구도 전쟁이 발발할 경우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이 전쟁에서 사회주의당은 어떤 입장을 택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쓴다. 현실과 이론은 달랐으며, 바젤 대회 이후 제국주의가 이제 평화주의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공식 정책을 정식화한 당대의 가장 훌륭한 분석가의 예측은 무효가 되었다. 아들러는 '제국주의의 위험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반전 선전에 가장 헌신한 "인터내셔널의 브레인"이었던 카우츠키 역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사회민주주의자의 입장에 대해 결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9)고 분석하면서, 초제국주의 이론의 약점 때문에 생긴 문제를 폭로하고 예방 전략 이외의 대안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 변명했다.
카우츠키와 바우어(Otto Bauer)의 제국주의 이론에서는 더 이상 혁명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혁명은 선전 항목이었고, 정부를 위협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이 '혁명'의 개념과 형태에 있어서는 모호했다. 개량적 실천은 급진적 언사 뒤에 가려졌다. 아들러(Max Adler)는 '전쟁 이전 10년 동안 사회민주주의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어떤 측면에서도 혁명적 성격을 강화하지는 않았다. 반면 수준은 저하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질서에 순응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다수파가 혁명을 먼 미래의 일로 격하시키고 '현재의 개량적 실천을 미래의 혁명적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면, 사회주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중간계급이 노동자 운동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혁명에 대한 공포가 중요한 안정요인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소렐(Georges Sorel)이 20세기 초 사회주의의 변질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항상 폭력의 위협에 무너질 것 같은 중간계급의 공포에 기초한 사회정책은 부르주아가 결국 실패할 것이며, 부르주아의 소멸은 단지 시간문제뿐이라는 관념을 만들었다.'
비판적 의견들도 제기되었다. 1911년 쿠엘치(Harry Quelch)는 카우츠키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무장 경쟁이 항상 경제 상황을 악화시키지는 않으며 전쟁이 항상 혁명적 위기 속에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10){{)조레스도 '유럽 전쟁으로부터 혁명이 밀어닥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장기간의 반혁명의 위기와 격렬한 반동, 민족주의의 격분, 독재, 극악무도한 군국주의, 퇴행적 폭력의 순환일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극좌파만이 전쟁이 촉매가 되는 혁명 전략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그러나 1914년 7월의 혼란기에는 이런 논쟁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개량주의나 기회주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8년 후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쟁의 위협에 맞서 투쟁하는 데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쉬운 문제라고 보는 관념을 극복하는 것이다. 유명한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에게 전쟁에 파업이나 혁명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명백한 급진주의가 매번 노동자, 협동조합원, 농민들을 진정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관점을 가장 날카롭게 논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의 전쟁 이후, 가장 어리석거나 불성실한 사람들만이 전쟁에 맞서 투쟁하는 문제에 이런 답변이 유용하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1914년 7월 말 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인사들을 사로잡은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ISB 회의 직전에 몇몇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인터내셔널이 중요한 위기에 맞설 준비가 조금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어야 했을까? 어떤 압박 수단을 사용해야 했을까? 바이앙과 에베르트는 인터내셔널이 상황에 능동적·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성명을 발표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바젤 대회가 다시 반복될 수는 없었다.
1912년 11월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바젤 대회는 유럽이 '지옥의 문 앞'에 와있다고 경고했다. 바젤 대회의 성공은 유럽 전역에서 모인 사회주의 대표들의 회의와 연설 때문이 아니라, 이미 1911년에 시작된 노동자들의 반전운동과 어떤 침략도 저지하려는 압력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1914년 7월에는 심지어 이 평화주의 불길의 재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1913년 국제적 긴장이 완화된 이래, 인터내셔널은 제국주의의 발전 방향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초하여 입장을 급격하게 정정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열정이 줄어든 것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전술 때문이었나?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인터내셔널의 지도부라는 한정된 범위를 넘어선다. 여기서 노동자 대중의 행동과 정부의 계산이라는 두 가지 '미지수'가 개입된다.
1912년 11월 사회주의자들은 역사의 주체로 행동했던 반면, 세계대전 직전 그들의 역할은 수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1912년 11월 사회주의자들은 공세적 운동의 선두에 있었고, 그들의 태도는 정부의 결정에 뚜렷하게 영향을 미쳤다. 1914년 7월 사회주의자들은 사태에 휘둘렸고, 노동자들의 저항이라는 역동성을 빼앗겼고, 관전자의 수세적 위치로 밀려들어갔으며, 결국 민족주의의 물결에 침몰했다. 사회주의적 대중들의 태도 변화는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하루 전만 해도 전쟁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이 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조국을 방어하러 달려갔는가? 왜 조직된 노동자들이 애국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혔으며, 왜 '계급적 인간'이 그렇게 쉽게 스스로를 국가와 통합시킬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이론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하나는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방향을 잃은 노동자 대중들이 그들의 국제주의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반대의 다른 시각은 범상치 않은 민족 통합의 기운, 모든 이데올로기를 압도한 저항할 수 없는 애국주의적 열망의 발호를 강조한다. 즉, 민족주의적 열망에 쏠린 대중의 태도가 당 지도자들에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는 자신의 원칙을 버리고 노동자 대중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진정한 정치적 표현으로 남아 있었다. 노선변화는 갑작스러웠고, 이런 반전이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준 충격은 분명하다. 지도자들 때문에 대중이 타락한 것인가 아니면 대중이 지도자들을 저버린 것인가?
인터내셔널이 예방 전략을 호소하는 데는 확실히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다. 1914년 7월 22일 조레스는 평화를 위한 세 가지 요인을 열거했다. (1) 군비 지출 증가는 대중들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2) 여론은 분쟁을 침략이 아닌 평화적 수단, 중재를 통해 해결하길 바란다. (3) 1913년 벨기에 총파업과 영국의 사회적 불안, 프랑스에서 3년 징병법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에서 증명된 것처럼 조직된 노동자 운동이 확장되고, 더욱 급진화되었다. 그러나 조레스는 '폭풍우를 몰고 올 구름이 모이는 것을 보면, 인민들이 햇빛이 비추던 때처럼 행동할 수 없다.'며, 전쟁이 발발하면 대중들의 평화주의적 결의가 더 이상 저항의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전쟁이 노동자 대중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킬 것이며, 어떤 국제주의적 교육도 민족주의의 맹공을 견딜 수 없다고 보았다. 유럽 전쟁으로 인해 쇼비니즘의 창궐과 운동의 후퇴가 예상되었다. 또한 인민들이 전쟁의 책임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국제주의자들조차 맨 먼저 애국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네덜란드의 사회주의 지도자 블리겐(Willem Hubertus Vliegen)은 비엔나 대회에 제출할 제국주의에 관한 보고서에서 유럽 전쟁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도, 이를 교란시킬 수 있는 요인들이 개입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그는 사회주의의 성장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갖춰졌다고 낙관하면서도, 일단 전쟁이 선언되면 상식이 아니라 총이 지배할 것이며 민족적 감정이 다른 무엇보다 강하기 때문에 호전적인 사조가 급격하게 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평가하면서 레닌도 수정주의자 블리겐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헤이그 대회를 위해 준비한 보고서에서 그는 전쟁은 가장 비밀스럽게 준비되며, 일반적인 노동자 조직들은, 스스로를 혁명적 조직이라고 부르더라도, 실제 전쟁이 임박하면 무능력하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레닌은 인민들에게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난 전쟁에서 문제는 어떻게 발생했고, 왜 그것을 해결할 수 없었는지를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고, '조국 방어'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되어 노동 대중의 압도적 다수가 부르주아 편에 설 것이라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1)
1916년 프리드리히 아들러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실천적 취약함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일상적 투쟁의 정치적 유효성은 노동자 계급의 분명한 원칙을 희생시켜 달성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사회민주주의는 항상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1922년 레닌도 아들러와 같은 관점을 제시한다. 바젤 선언문을 포함한 모든 사회주의자의 선전은 조직된 노동자들 사이에서 희망을 고취시키는 방식으로 전쟁 문제를 제기했다. '전쟁은 범죄이며, 사회주의자는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등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구체적 문제도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쓸데없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로는 전쟁이 어떻게 임박해지고 시작되는지를 대중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이 침착하고 자신 있는 분위기를 유포했던 하위문화에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강력한 조직을 갖고 있으며 수적·지리적으로 엄청난 팽창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양산하는 의식, 언어, 상상으로 지탱되던 노동자 운동의 국제주의는 자코뱅의 애국주의나 '본능적인' 러시아 혐오와 같이 저 깊은 감수성에서 발호하는 것들과 대적할 수 없었다.
몇몇 해석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의 모호성, 국제적 개입의 한계, 민족주의 감수성이 증대한 상황을 지적하고, 이렇게 보면 1914년의 전환은 놀랍지 않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은 오직 징후만을 보여줄 뿐, 기원과 전제들은 감춘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이분법적인 개념도 추상적인 감정도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어떤 사회적·정치적 조건에서 노동자 운동이 각각을 가장 잘 받아들이게 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 운동의 변동과 경제적 특성의 진동 사이의 변증법을 통해 사회적 긴장기의 대중동원의 동역학을 제시할 수 있다. 경제적·사회적 투쟁 강도의 증가와 동원된 노동자들의 '전쟁에 대한 전쟁'과 같은 사회주의적·국제주의적 슬로건에 대한 지지 사이의 상호관련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910년과 1912년의 경제성장기에 주요 유럽 국가들은 생계비 증대에 반대하는 집회와 빈번한 대중파업으로 나타난 사회적 불안을 경험했다. (바젤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한) 반전투쟁의 규모는 이런 경제적·사회적 불안과의 연관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회적 긴장의 굴곡과 급진적인 노동자의 요구, 평화주의 투쟁의 강화를 식별할 수 있는 반(反)자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 선택 사이에는 상호관련이 있다.
1912년의 사례는 두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1. '전쟁에 대한 전쟁' 슬로건에 대한 집단적 감정의 구체화는 여론 형성을 목표로 했던 사회주의 언론의 논평들보다는 실제적인 운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2. 이 구체화는 노동자들의 급격한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단기적·우연적 현상이다. 1910년과 1914년 사이의 이러한 변동은 사회적 선동과 이데올로기적 선택의 압력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사회적 긴장은 1914년 8월 직전에 눈에 띄게 감소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회복되었고, 노동자 지위가 향상되었다. 더욱이 1909년에서 1914년까지의 파업통계를 보면 1913년 이후 파업은 하강곡선을 그린다. 1913년 이후 평화주의 선전은 사회주의자의 활동에서 부차적인 지위로 격하되었다.
비록 1914년 7월 노동자 계급이 이전보다 반군국주의 슬로건을 덜 수용했지만, 그들이 애국주의에 쉽게 무너질 것이라 결론을 내리거나 노동자 계급의 정신 상태가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늦은 반응을 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7월 25일 이후 카우츠키는 이 '대중들의 정신 상태'를 언급하면서 지도부의 행동 부족을 정당화했다. 대규모 평화주의 운동은 자발성과 지도, 자각과 수동성 모두를 요소로 했으며 자발성만을 결정적 특성으로 볼 수 없다. 노동자 조직의 지도부가 이런 운동들을 발의하고 지도한다. 하지만 7월에 노동자 동원은 소심하게 추진되었다. 7월 27일 이후부터 프랑스와 독일에서 노동자들의 반전 집회가 개최되었다. 프랑스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은 독일에서 진행된 집회들을 좋게 평가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프랑스 동지들을 예로 들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독일의 집회들은 대규모 노동자들의 반격을 예고하지도 다른 운동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사회주의 지도부는 계속해서 신중하라고 조언을 했다. 너무 경솔하고 성급한 운동에 착수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사회주의당의 주요 지도자들이 가진 딜레마였다. 냉정을 유지할 것인가, 사건들에 압도될 것인가? 이 악순환에서 그들은 무력감에 굴복했다. 다양한 동기로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신중하자는 의견을 채택했다. 독일인들은 너무 성급한 모험 때문에 당의 미래를 해칠까봐 두려워했다. 행동만큼이나 '인내의 용기'를 주장했던 조레스는 성급한 행동으로 원했던 효과들과 정반대의 심각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부동주의 정책을 채택했고, 급진 좌파들도 대체로 혼란스러워 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조치들을 취해야 하는가? 독일과 프랑스의 좌파들도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할 수 없었다. 7월 27일 독일에서 급진파들은 지도부에게 대중을 조직할 것을 요구했지만, 사실 그들도 그런 행동이 긴급하게 필요하다는 인식은 없었다. 모두가 행동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정확한 제안을 하지는 못했다. 8월 1일 아무런 행동이 취해지지 않자 이 혼란은 더욱 커졌고, 8월 4일의 경험 이후에는 도덕적 해이 수준으로까지 악화되었다.
급진주의의 성장기보다 '쇠퇴기' 동안 노동자 대중들은 더욱 쉽게 민족주의적 선전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애국주의적 열정으로 가득 찬 이 '특이한 분위기'는 정확히 언제 나타났는가? 8월 1일 전인가, 후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목격자들이 1914년 이후 어떤 진영에 속했는가에 따라 다르다. 소수파 국제주의자들은 이 현상이 8월 1일 이후에 벌어졌다고 본다. 8월 1일이야 말로 '정신을 완전히 잃게 된 날'이었다. 이들은 조레스의 비극적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주의당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1914년 7월 31일을 민족주의적 조류가 나라를 휩쓸고, 사회주의자와 노조 지도부를 마비시키고 모든 저항을 좌절시킨 순간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이런 증언들에서 '민족주의의 물결'은 원인이 아니라 사회주의당이 붕괴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동원령에 대처하지 못한 무능력에 직면하여 사회주의자들의 희망과 예측은 좌절되었다.
다음으로 정부의 계산이라는 두 번째 '미지수'에 대해 검토해보자. 어떤 정부라도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기 전에 여론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특히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자 운동은 정부의 결정에 매우 중요했다. 그렇다면 정부의 결정은 순전히 도박이었는가, 아니면 사회민주주의의 장단점에 대한 진지한 평가에 기초한 것이었나?
동원령 이전과 전쟁 발발 이후라는 결정적 시기의 첫 번째 단계에서 각 국 정부들은 노동자 운동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험에 노동자 운동을 끌어들이려 했다. 비록 국가마다 수단과 방법은 달랐지만 그 유사함은 놀라울 정도다. 경찰기록에 따르면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모든 노동자 운동의 의식 상태나 논의, 결정들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12)
7월 말, 정부는 인터내셔널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결점과 평화주의 전략의 약점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정부들은 오래 전부터 전쟁이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위협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결의안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지, 대중들이 그들을 따를 것인지와 관련해서, 모든 경우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1911~12년의 경험에서 인터내셔널이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동원하고, 개인의 인식을 집단적 심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오랜 준비가 필요했다. 정부들은 이런 문제가 수 일 만에 제거되지 않을 것이며, 애국주의와 쇼비니즘의 물결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부들은 당연히 이 문제에 주목했고, 여기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7월 독일에서 반전 투쟁이 벌어졌고, 만약 미연에 방지하려는 조치가 없다면 반전 투쟁은 다시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벌어질 수도 있었다. 7월 24일 독일에서는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소수 민족과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내무부장관이며 부총리였던 델브뤽(Hans von Delbr ck)과 홀벡은 전쟁 직전에 테러를 이용하는 것이 아무런 이득도 없는 실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부에 대한 공개적 적대를 표현할 기회를 허용해서는 안 되고, 책략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의 신뢰를 얻어서, 전쟁 발발 시 국내의 반대를 피하는 것이 나았다.
독일 정부가 SPD의 의도를 파악하고 실질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SPD 집행부와 직접 접촉할 필요가 있었다. 델브뤽은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쉬데쿰에게 접근했지만 예상했던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하제는 전쟁의 위협에 대한 홀벡의 언급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총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부를 믿고 있다는 확증을 얻었다. 홀벡은 SPD에 대해서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보장하고, 직접 협상한다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지침을 바꾸지 않았다. 쉬데쿰과의 비밀회견을 통해 홀벡은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결의 수준을 가늠하고, 다른 계획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정부는 SPD가 능동적이지만 정부와의 의리를 지키는 반대에 머무를 것이며 총동원령을 선포하더라도 그들의 저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쉬데쿰은 단숨에 사회주의자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무기를 망쳐버렸다. 그것은 며칠 전만 해도 반복되던 어떤 주전론에도 전력을 다해 응수할 것이라는 위협이었다.
정부의 목적은 SPD의 무력화가 아니라 그들을 민족 통합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SPD의 충성을 얻기 위해서는 러시아에게 책임을 뒤짚어 씌울 필요가 있었다. 7월 26일 하제는 SPD가 러시아의 침략에 핑계를 줄 수 있는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기 위해 총리에게 소환되었다. 홀벡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전 국민이 전쟁을 정당하다고 여길 수 있도록 전쟁을 자기방어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유럽 여론과 국제 평화주의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하지만 침략자가 러시아의 짜르일 경우 SPD가 전쟁을 지지할 것은 확실했다. 수 년 동안 SPD와 조직된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러시아 혐오에 대해 홀벡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정부가 당근과 채찍 정책을 채택하게 한 데는 다른 요인도 있었다. 1910년 이래로 당과 노조는 자신의 조직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1914년 7월에는 이런 일들이 충분히 예상되고 있었다. ISB 마지막 회의에서 노련한 사회주의자이며 상당한 지식인인 빅터 아들러와 네멕은 전쟁의 결과로 생길 다른 정신적·육체적 재앙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 사무실의 폐쇄, 언론탄압, 당 물품의 징발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8월 1일 많은 SPD 임원들은 비상사태법을 경험했고, 노조들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비극으로 이끌 수 있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이 공포를 잘 알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경찰은 SFIO와 노조가 행동을 취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조직적 약점은 모든 것이 조레스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이며, 그의 암살은 곧 전쟁을 뜻했다. 조레스 암살 직후 CGT 연합위원회는 총파업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내무부장관 말비(Louis-Jean Malvy)는 이 결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카르네 B에 열거된 사람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중지시켰다.13)
1차 세계대전의 기능 중 하나는 무력을 통해 임박한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열강들 사이의 경쟁과 동맹에서 뿐만 아니라 잠재적 혁명과 관련해서도 중요했다. 1914년 전에도 이런 관념이 몇몇 사회주의 서클 사이에서 퍼졌다. 예를 들어 1913년 초 라포포트(Charles Rappoport)에 따르면 전쟁은 혁명을 낳거나 또는 '프롤레타리아 최대의 적'인 대규모 반혁명이 낳을 수 있었다. 지배계급이 자신의 적대자들을 제거하는 확실한 방법은 감금이나 교수형보다는 이들을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즉 전쟁은 어느 특정한 국가의 자본주의가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민족의 통합을 호소함으로써 혁명을 피할 수 있는 궁극의 시도였다.
혁명에 대해서 검토하려면 이것이 어느 지역에서 누구에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봐야한다. 우선 노동자 운동의 무한히 복잡한 환경에서부터 사회부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검토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해왔지만 근본적 치료를 처방하는 것은 절제했다. 그들은 질서의 편에 섰고, 전쟁 직전에는 점점 전투적이 되어가는 급진적 소수파와의 투쟁에 집중했다. 이 사실은 왜 인터내셔널 지도자의 대다수가 신성동맹이나 성내평화에 동의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SPD의 경우에 애국주의의 유혹과 민족국가에 대한 헌신, '충성스런' 반대보다 당내 좌익에 대한 병적 공포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베르트와 카우츠키는 '로자의 추종자들'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수파의 급진주의와 공세에 덧붙여서 생계비 인상에 따른 소동과 노동자 운동의 급진주의라는 문제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반응은 종종 당의 지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생계비 인상은 계급적대를 강화했고, 독일, 영국, 러시아에서 거대한 계급투쟁으로 나타났다. 개량의 환상은 사라졌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서는 개량주의가 축출되었다. 모든 곳에서 노동자 계급은 마르크스의 행로를 따랐으며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적대,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발전, 세계경제가 금융자본에 급격히 종속되는 과정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결정적 충돌의 전조였다. 카우츠키는 1913년 10월 이 비극이 심해진다면 야만적인 파업과 폭동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고, 곧 더 가혹한 탄압과 당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우츠키가 모든 원인을 유럽 노동자 운동에 돌린 반면 좌익들은 이것이 급진주의로 이동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지도부의 행동 부족을 비난했다.
유럽의 침체와 이에 따른 불안정성은 다른 사회부문들에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기성사회에 잠재적으로 반항적인 청년 세대를 사로잡았다. 낭만적인 폭동은 노동자 계급의 청년들이 전투적 조직인 '청년사회주의자국제조직'에 매혹되게 했고, 중간 계급의 청년들이 일탈적인 운동에 열중하게 했다. 심지어 부르주아의 자식들도 시대에 불만을 갖고 부모들의 세계를 증오했다. 마르크 페로도 1차 세계대전을 에너지의 '해방'이라고 보았다. 참전을 통해 1914년의 병사들은 혁명적 열망을 어느 정도 대신할 새로운 이상을 찾았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 사회주의 청년들에게 만족스러운 대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전쟁은 그들을 더욱 급진화시켰고, 국제주의적 성향을 강화시켰다. 전쟁을 통해 청년 운동에서 급진주의와 국제주의의 간극이 넓어지는 것으로 보였지만 분열은 일시적이었고, 두 경향은 1918~19년의 혁명의 물결에서 다시 만난다.
소동의 중심과 민감한 지역은 어디였는지에 관한 문제도 중요하다. 여기서는 전쟁 직전에 대규모 파업으로 절정에 달한 러시아의 혁명의 물결과14)1870년 이래 이탈리아가 가장 강력한 반란의 열광을 경험한 1914년 7월 7일에서 14일까지의 '피의 주간'과 같은 사례들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
전쟁이 혁명적 위기의 리듬을 깨서 1918년에 그 위기가 더욱 폭력적으로 드러난 것인지, 또는 전쟁이 혁명적 위기의 발전에 영향을 끼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전쟁이 민족주의적 해법으로 기울고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혁명으로 왜곡되고 독일에서는 심각한 패배로 끝난 것인지에 관해서 묻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1917~19년의 혁명은 세계 대전의 역사에 인위적으로 삽입된 사건이나 장기적 발전을 중단시킨 폭력적인 재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혁명은 전쟁이 촉매가 아니라 혁명을 지연 혹은 일탈시키는 힘으로 작용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전쟁이 장기적인 체념을 혁명의 실제적 전망으로 구체화했으며, 인터내셔널을 자기모순의 미로에 빠뜨리고 인터내셔널을 불가피한 붕괴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그는 베른에서 국제 대회가 개최되는 데 필요한 조치들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스위스 사회당은 실제 대회 준비를 했다.본문으로

2)[역주] (1878-1965)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브뤼셀에서 대학생 시절 급진적 사상을 접했다. 그녀는 로마에 살면서 섬유 산업에 종사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녀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당과 사회민주당의 수장이 되었다. 발라바노프는 러시아 혁명 운동과 가까워지면서, 여성 사회주의자 연합의 이사회에서 일했으며, 여성 의회에서 제틴(Clara Zetin)과 일했다. 볼셰비키 승리 직후, 그녀는 러시아로 돌아갔고, 1919년 제3 인터내셔널의 비서로 일했다. 이후 그녀는 볼셰비즘을 비판하면서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나, 파시즘 정권이 그녀를 스위스로 추방했다. 그녀는 1964년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계속해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관계했다.본문으로

3)참석자들이 이 회의에 대해 남긴 기록들은 숫자도 매우 적고, 평가도 다양하다. 안젤리카 발라바노프의 기록이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그녀의 기억은 부정확하며 편향적이다. 심지어 회의의 날짜조차 잘못 기록되어있다.본문으로

4) 러시아 대표였던 루바노비치는 조레스와 하제가 당시 정세에 대해 논의한 것을 기록했다. '저녁 여섯 시쯤 조레스는 카우츠키와 하제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상황을 분석하면서 말한 것처럼 독일 정부와 제국이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에 관해 아무 것도 몰랐다고 확신합니까?"라고 물었다. 하제는 "나는 독일 정부가 분쟁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답했다. 조레스는 고개를 저으며 의문을 나타냈다.'본문으로

5) 오스트리아가 혼자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가 최소화되었다. 이런 관점에 프랑스와 독일의 사회주의 언론들이 동의했다. 7월 30일 로스메르는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서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했다.'고 평했다. 본문으로

6) 그로티얀(Alfred Grotjahn)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7월 29일 확실히 동요하는 것으로 보였던 쉬데쿰은 홀벡이 전화로 자신을 불렀다고 나에게 말했다. 회견은 오후 2시에서 3시 반까지 진행되었다. 총리는 전쟁의 위협이 점점 더 임박하고 있으며, 자신이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우리 당들 중 하나가 전쟁을 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외국의 지도자들에게 대해 이야기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모든 과정들을 진행시킬 수 있는 성급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한편 비엔나는 이성이 아니라 열정의 물결에 휩쓸려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은 그레이뿐이었지만 그는 (독일이 아니라) 영국의 정책에 대처하느라 바빴다. 쉬데쿰은 총리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본문으로

7)베르트랑(Louis Bertrand)은 '따라서 인터내셔널이 국가 간 무장 분쟁을 막는 데 무능력하다는 것은 명확했다. 이 회의에서 긍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환멸은 뿌리 깊었다.'고 썼다.본문으로

8)결국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막는 데 무능력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 인터내셔널을 비난할 수는 없다. 전쟁의 발발은 이를 막지 못한 인터내셔널의 무능력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럼에도 1914년 8월에 인터내셔널은 그 이전에 쓰고 있던 혁명의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인터내셔널의 소멸로 보였다.본문으로

9)판네쿠크의 논평도 아들러의 이야기를 확인시켜 준다. '전쟁이 저항해야 할 수준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확고한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적합하게 제기되지 않았다.'본문으로

10)『권력을 향한 길』에서 카우츠키는 혁명이 전쟁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를 질문한다. 세 가지 가능성을 열거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전쟁의 결과로서 혁명이 다른 많은 전쟁의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혁명은 "전적으로 필연적"이다.'본문으로

11)이것은 또한 트로츠키가 시종일관 갖고 있던 관점이었다. 그는 전쟁 발발 몇 주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동원령이 발표되자마자 사회민주주의는 자신이 강력한 군사기구의 지원을 받고 모든 부르주아 당 및 기구들과 협력하여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준비가 된 집중된 정부의 힘에 대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당이 혁명적 행동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없다.본문으로

12)예를 들어 SPD 지도부의 회의나, 노조 집행부와 의원그룹의 공동회의 결과에 대한 개요가 베를린 7-4 지국의 경찰 문서에서 발견되었다.본문으로

13)카르네 B에는 정부가 지사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근거를 두고 작성한 3,000~4,000 명의 전투적 노동자들의 명단이 있었다. 총동원령을 내릴 경우 정부는 리스트에 이름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할 예정이었다.본문으로

14)로자가 보기에 전쟁의 기능은 '우리가 수년 동안 분출하고 있다고 느낀 러시아 혁명의 부활을 막는 것이었다. 1911년 이후 반(反)혁명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던 2년 반을 제외하고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들은 전쟁이 자신들을 파괴하거나, 칼의 독재가 억압하거나, 민족주의가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본문으로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