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가에게 듣고싶은 말
후배의 문제제기에 대해
내가 성공회대학의 노동대학 강좌를 신청했다는 걸 알고, 어느 후배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공부를 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우나 이제는 다른 사람(다른 관심과 내용을 가진)이 만들어놓은 교육프로그램에 안주하지 말자. 노동조합에서는 지금 노동대학을 만들겠다고 하나 그것도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최근에 공부 열풍(사실 열풍이라기보다는 자기 만족을 위한 조그만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물론 너무 지나친 표현이다)은 지금 당장 필요하기도 하고 앞으로 10년 이내에 노동운동 담당자가 갖추어야 할 내용들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또 많은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종강 선배의 학구열은 열 번 칭찬해도 모자라지만, 지금은 배울 때가 아니라 앞으로 가르칠 내용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거기에 앞서 지금 당장 앞에 놓인 시급히 꺼야 할 불길도 너무나 많다. 미래를 여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 후배의 문제 제기에 대한 변명을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생각해오다가, 오늘 잠시 시간이 난 틈에 재빨리 정리한다.
따지자면, 굳이 '변명'이랄 것도 없다. 내 생각도 그 후배와 같으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항상 강조해 온 것도 바로 그런 내용이었으니까.
마치 1980년대처럼 '오늘 잡혀갈까? 내일 잡혀갈까?' 하는 긴장감으로 쇠파이프를 다듬어야 하는 노동자들, 지금 이 시간에도 용산역 구내에 있는 높이 30미터의 철탑 꼭대기나 성남공단 아스팔트 도로에 천막을 치고 한 달 넘게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을 일주일을 멀다하고 만나야 하는 생활을 하면서, 한가하게 "공부나 해보자"는 생각이었다면 그건 내가 우선 받아들일 수 없다.
현장에서 대학으로 옮겨가는 마음
성공회대학의 노동대학은 말이 '대학'이지 내가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노동교실'과 거의 같은 수준의 강좌이다. 고대의 노동대학원이나 성공회대의 NGO대학원 같은 '제도권 교육과정'과는 격이 다르다. 맨날 만나던 노조 간부들을 거기서 또 만날 뿐이다. 그러니 후배여, 내가 '대학'에 갔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말기를.
그런데 그 후배의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것이, 강좌에 몇 번 참여하면서 나는 아주 심각한 고민과 맞닥뜨렸다. 거기에 모인 노조간부들 -지금도 현장의 조직에서 직함을 하나씩 갖고 있는 명실상부한 '활동가'들- 이 '스토아학파'들이 되어가는 것이다.
일찍이 1980년대 초 '야학비판'에서 제기됐던 문제점도 그 비슷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야학의 좋은 분위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이제는 현장조차 빼앗기겠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노동대학에 참여하는 노동자들도 마음의 중심이 '현장'에서 서서히 '노동대학'으로 옮겨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마음이 옮겨지면 활동의 중심까지 옮겨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절반 이상 빼먹으면서 어쩌다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내내 그 고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수진의 강의 내용이 '너무' 훌륭했던 탓이겠지만 '정치경제학' 강의를 듣고나면 거기 모인 노동자들은 '하던 활동을 잠시 미뤄두고 정치경제학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느꼈고, '한국 자본주의'를 공부하고나면 '이렇게 맨날 임·단투에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활동을 미룬 채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자고 모인 사람들이, 우리 노동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힘을 잃어가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하나. 나는 짬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여기서 배운 것들이 우리의 무기가 되도록 하는 일에 기여할 수 없다면, 우리는 노동운동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며칠 전 진행된, 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의 강의 시간에 더욱 두드러졌다. 박원순 변호사가 그날 했던 구구절절 옳은 주장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찬란한 시민운동 대 초라한 노동운동'
그 날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찬란한 시민운동의 승리와 초라한 노동운동의 패배'가 시종일관 비교되는 자리였다. 놀라운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참여연대의 선거 전술과, 열심히 싸울수록 시민들로부터 지탄받을 뿐인 노동자들의 구태의연한 투쟁 전술이 비교되었다.
참여연대 회원들은 1천명만 모여도 세상을 바꾸지만, 노동자들은 10만명이 모여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비교되기도 했다.
우리들은 강의 시간 내내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렸고, 질문 시간에도 우리의 숨막힐 듯한 그 답답함을 조리있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노동자들도 모두 시민인데 왜 시민단체에 가입하지 않느냐"는 질책에 대해, "시민단체 회원들도 대부분 노동자인데 왜 자기가 속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냐"고 맞받아칠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옛날부터 우리의 힘은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사회자가 "마지막 질문 하나만 더 받겠다"고 했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동시에 다른 참석자 한 사람도 손을 들었다. 내가 얼른 "저는 취소하지요"라고 했지만, 내 뒷편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 이야기 모두 다 들어봅시다"라고 급히 말했다. 누군지 모르는 그의 말 속에 나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스며있다고 느꼈다면, 나의 자가당착이었을까.
내 발언 순서가 되었을 때, 내 목소리는 거의 떨려서 나왔다.
감히 그렇게 말할 자리가 아니다!
"질문이라기보다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자기 활동의 중심을 노동운동에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노동운동을 조금이라도 더 잘해보자고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마치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더욱 본질적인 운동인 것처럼 느껴져서, 우리가 모두 노동운동을 포기하고 시민운동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계급투쟁으로서의 노동운동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시민운동과 차별성을 갖는 노동운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시민운동가의 입으로 한번 듣고 싶습니다.
여기 이 자리는 말입니다. 시민운동가가 와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들 지금까지 노동운동 잘못했소. 우리 시민운동 보시오. 얼마나 잘하고 있소?'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부탁합니다. '당신들이 하는 노동운동도 중요한 거니까 계속 열심히 하시오'라고 선배 시민운동가의 입으로 한번 말해 주십시오."
존경하는 박원순 변호사가 아니었다면(박원순 변호사와 같이 일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분을 존경하더군요. 같이 일해본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겠지요.) 나는 "여기는 당신이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감히'란 단어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만나는 길은?
박원순 변호사는 끝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들었다면 내가 오늘 강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웃으며 받았다. 늦은 밤, 강의실을 빠져 나올 때,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하 소장님 마지막 질문 아니었으면, 저 오늘 집에 가서 잠도 못 잤을 겁니다."
또 다른 사람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시민운동하는 사람이 와서 노동운동을 개떡을 만들고 있어. 에이 씨발, 그냥 확..."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시민운동은 (아직) 계급투쟁이 아니다.
* 진보네트워크 참세상 하종강 칼럼(go ha)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글을 싣게 허락해 주신 하종강 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성공회대학의 노동대학 강좌를 신청했다는 걸 알고, 어느 후배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공부를 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우나 이제는 다른 사람(다른 관심과 내용을 가진)이 만들어놓은 교육프로그램에 안주하지 말자. 노동조합에서는 지금 노동대학을 만들겠다고 하나 그것도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최근에 공부 열풍(사실 열풍이라기보다는 자기 만족을 위한 조그만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물론 너무 지나친 표현이다)은 지금 당장 필요하기도 하고 앞으로 10년 이내에 노동운동 담당자가 갖추어야 할 내용들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또 많은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종강 선배의 학구열은 열 번 칭찬해도 모자라지만, 지금은 배울 때가 아니라 앞으로 가르칠 내용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거기에 앞서 지금 당장 앞에 놓인 시급히 꺼야 할 불길도 너무나 많다. 미래를 여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 후배의 문제 제기에 대한 변명을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생각해오다가, 오늘 잠시 시간이 난 틈에 재빨리 정리한다.
따지자면, 굳이 '변명'이랄 것도 없다. 내 생각도 그 후배와 같으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항상 강조해 온 것도 바로 그런 내용이었으니까.
마치 1980년대처럼 '오늘 잡혀갈까? 내일 잡혀갈까?' 하는 긴장감으로 쇠파이프를 다듬어야 하는 노동자들, 지금 이 시간에도 용산역 구내에 있는 높이 30미터의 철탑 꼭대기나 성남공단 아스팔트 도로에 천막을 치고 한 달 넘게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을 일주일을 멀다하고 만나야 하는 생활을 하면서, 한가하게 "공부나 해보자"는 생각이었다면 그건 내가 우선 받아들일 수 없다.
현장에서 대학으로 옮겨가는 마음
성공회대학의 노동대학은 말이 '대학'이지 내가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노동교실'과 거의 같은 수준의 강좌이다. 고대의 노동대학원이나 성공회대의 NGO대학원 같은 '제도권 교육과정'과는 격이 다르다. 맨날 만나던 노조 간부들을 거기서 또 만날 뿐이다. 그러니 후배여, 내가 '대학'에 갔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말기를.
그런데 그 후배의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것이, 강좌에 몇 번 참여하면서 나는 아주 심각한 고민과 맞닥뜨렸다. 거기에 모인 노조간부들 -지금도 현장의 조직에서 직함을 하나씩 갖고 있는 명실상부한 '활동가'들- 이 '스토아학파'들이 되어가는 것이다.
일찍이 1980년대 초 '야학비판'에서 제기됐던 문제점도 그 비슷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야학의 좋은 분위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이제는 현장조차 빼앗기겠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노동대학에 참여하는 노동자들도 마음의 중심이 '현장'에서 서서히 '노동대학'으로 옮겨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마음이 옮겨지면 활동의 중심까지 옮겨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절반 이상 빼먹으면서 어쩌다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내내 그 고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교수진의 강의 내용이 '너무' 훌륭했던 탓이겠지만 '정치경제학' 강의를 듣고나면 거기 모인 노동자들은 '하던 활동을 잠시 미뤄두고 정치경제학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느꼈고, '한국 자본주의'를 공부하고나면 '이렇게 맨날 임·단투에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활동을 미룬 채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자고 모인 사람들이, 우리 노동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힘을 잃어가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하나. 나는 짬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여기서 배운 것들이 우리의 무기가 되도록 하는 일에 기여할 수 없다면, 우리는 노동운동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며칠 전 진행된, 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의 강의 시간에 더욱 두드러졌다. 박원순 변호사가 그날 했던 구구절절 옳은 주장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찬란한 시민운동 대 초라한 노동운동'
그 날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찬란한 시민운동의 승리와 초라한 노동운동의 패배'가 시종일관 비교되는 자리였다. 놀라운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참여연대의 선거 전술과, 열심히 싸울수록 시민들로부터 지탄받을 뿐인 노동자들의 구태의연한 투쟁 전술이 비교되었다.
참여연대 회원들은 1천명만 모여도 세상을 바꾸지만, 노동자들은 10만명이 모여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비교되기도 했다.
우리들은 강의 시간 내내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렸고, 질문 시간에도 우리의 숨막힐 듯한 그 답답함을 조리있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노동자들도 모두 시민인데 왜 시민단체에 가입하지 않느냐"는 질책에 대해, "시민단체 회원들도 대부분 노동자인데 왜 자기가 속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냐"고 맞받아칠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옛날부터 우리의 힘은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사회자가 "마지막 질문 하나만 더 받겠다"고 했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동시에 다른 참석자 한 사람도 손을 들었다. 내가 얼른 "저는 취소하지요"라고 했지만, 내 뒷편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 이야기 모두 다 들어봅시다"라고 급히 말했다. 누군지 모르는 그의 말 속에 나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스며있다고 느꼈다면, 나의 자가당착이었을까.
내 발언 순서가 되었을 때, 내 목소리는 거의 떨려서 나왔다.
감히 그렇게 말할 자리가 아니다!
"질문이라기보다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자기 활동의 중심을 노동운동에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노동운동을 조금이라도 더 잘해보자고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마치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더욱 본질적인 운동인 것처럼 느껴져서, 우리가 모두 노동운동을 포기하고 시민운동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계급투쟁으로서의 노동운동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시민운동과 차별성을 갖는 노동운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시민운동가의 입으로 한번 듣고 싶습니다.
여기 이 자리는 말입니다. 시민운동가가 와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들 지금까지 노동운동 잘못했소. 우리 시민운동 보시오. 얼마나 잘하고 있소?'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부탁합니다. '당신들이 하는 노동운동도 중요한 거니까 계속 열심히 하시오'라고 선배 시민운동가의 입으로 한번 말해 주십시오."
존경하는 박원순 변호사가 아니었다면(박원순 변호사와 같이 일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분을 존경하더군요. 같이 일해본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겠지요.) 나는 "여기는 당신이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감히'란 단어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만나는 길은?
박원순 변호사는 끝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들었다면 내가 오늘 강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웃으며 받았다. 늦은 밤, 강의실을 빠져 나올 때,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하 소장님 마지막 질문 아니었으면, 저 오늘 집에 가서 잠도 못 잤을 겁니다."
또 다른 사람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시민운동하는 사람이 와서 노동운동을 개떡을 만들고 있어. 에이 씨발, 그냥 확..."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시민운동은 (아직) 계급투쟁이 아니다.
* 진보네트워크 참세상 하종강 칼럼(go ha)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글을 싣게 허락해 주신 하종강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