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4 가을.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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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주의란 무엇인가

영국과 미국 헌정사로 살펴본 헌정주의의 의미와 원리

김성균 | 정책교육국장

1. 헌정사를 검토하는 이유

 
여전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과 북한, 그리고 과거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는 현재에 이르러 권위주의 진영의 중심 국가가 됐다. 이들 모두 과거에나 지금이나 체제에 의한 인권 탄압이 핵심적 이슈로 부상하기도 했다.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고귀한 이상(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된 혁명이 역설적으로 인권 유린이 만연한 야만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혁명사를 반성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반면, 권위주의 진영과 대립하는 서방의 국가를 보면, 현재로서는 적어도 인권에 관하여 토론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여러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필자는 이 차이가 인권, 법치, 헌정에 대한 인식과 몰인식에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현대적 헌정이 시작된 영국과 미국에서 헌정의 원리가 성립되는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헌정이란 무엇인지, 헌정의 원리는 무엇인지가 이번 호 글의 주제다.

다음 호에서는 이러한 헌정의 의미와 원리를 기준으로 한국 헌정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몇 가지 사례를 간단히 보자. 우선 1987년에 성립된 현행 헌법은 내각제적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평가된다. 먼저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는 국무총리가 내각의 장관 임명을 대통령에게 제청하는 권한이 있다. 또한, 국회의원이 장관을 겸임할 수 있다. 1987년 헌법의 이런 요소는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상호 존중하며 협치를 추구하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정치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또 헌법으로 조문화된 것은 아니지만, 헌정질서에 부합하는 정치적 관례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국회 내 소수당이 법사위원장을 맡는 관례가 있었다. 이는 국회 내 다수당이 전횡을 일삼는 걸 방지하고 소수당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하도록 하는 관행이었다. 그러나 국회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개혁입법을 위해 필요하다면서 이런 관행을 아무렇지 않게 파괴했다. 또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이 된 우원식 의장은 그간 유지되어 온 국회의장의 중립에 대해 “국회의장은 단순한 국회의 사회자는 아니”라며 반박하고, 민주당이 추진하는 소위 ‘개혁입법’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처럼 특정한 목적이 옳다는 명분 아래 기존에 합의해 온 질서를 파괴하는 걸 ‘개혁’이라 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최근 한국 정치의 난맥상은 87년 헌법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정치 문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혹은 둘 모두일까. 이런 부분을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헌정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2. 헌정과 헌정주의란 무엇인가

 

1) 헌정이란 무엇인가

‘Constitution’이라는 단어는 보통 ‘헌법’으로 번역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이 단어를 헌법과 정치과정을 포괄하는 입헌정치의 준말인 ‘헌정’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사실 ‘Constitution’이라는 단어는 17세기에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았다. 원래 ‘Constitution’은 설립, 설치, 구성 등의 의미로 쓰였는데, 17세기 초 체질(quality), 본질(nature)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1688년 명예혁명 이후부터 ‘Constitution’은 ‘국가의 근본법’(a fundamental act of state)이라는 의미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영국 보수당의 지도자이자 육군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한 정치인 헨리 세인트 존 볼링브룩(1678~1751)은 ‘Constitution’을 “특정의 확고한 이성 원칙에서 유래한 일단의 법, 제도, 관례이며, 공동체의 통치원칙으로 동의한 일반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특정의 확고한 공공선을 지향”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어서 그는 ‘Constitution’의 원칙과 목적에 엄격하게 부합하는 정부를 좋은 정부라 부른다고 설명한다.

‘법의 지배’라는 개념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영국의 헌법학자 앨버트 V. 다이시 역시 ‘Constitution’을 법, 제도, 관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다이시는 자신의 저서 『헌법학 입문』에서 법적 형식의 헌법과 헌법적 관행을 구분한다. 동시에 그는 헌법의 발전을 단순히 객관적 규범(법조문)의 발전이 아니라, 정치 과정에서 점진적인 상호작용을 거치며 살아있는 규범이 진화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가 강조하는, “헌법은 만들어진 게 아니라 생성되어 왔다”라는 영국의 유명한 법언은 이런 맥락의 말이다. 이렇듯 ‘Constitution’이라는 용어는 법조문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한되어 활용되기보다는, 제도와 관례를 포괄하는 용어로 활용됐다. 

제도와 관례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던 ‘Constitution’이 우리가 아는 ‘헌법’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미국 헌법의 영향이다. 당시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연방주의자들은 무제한적 권능을 가지는 영국의 의회를 비판하면서, 입법부가 만든 법을 포함하여 모든 법의 상위에 위치하는 최고의 법으로서 헌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반영해 작성한 것이 미국 헌법이다. 미국 헌법은 입법부를 비롯한 정부의 권한과 그에 대한 제약 규정을 담은 문서로 작성되었다. 더불어 개인의 권리는 원래 주어진 것이고 정부는 그 권리를 양도받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헌법에 열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명시했다. 이러한 미국의 시도가 영국 정치제도에 대한 혁신으로 평가받으면서 ‘Constitution’이 ‘헌법’으로 굳어진 셈이다. 

정리해보면, ‘Constitution’은 법, 정치제도, 관습을 포괄하는 용어로 활용되었고, 18세기 말 미국 헌법 제정의 영향으로 ‘헌법’이라는 의미가 도드라지게 됐다. 다만 미국 헌법 역시 1787년 제정 당시에는 전문과 7개조로 구성됐을 뿐이고, 이후 수정헌법이라는 형식으로 추가된 27개 조문이 전부다. 그 외 나머지에 대해서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관습에 따른 해석과 판례로 보충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Constitution’을 헌법과 정치과정을 포괄하는 ‘헌정’이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 글에서는 이런 헌정의 개념을 대체로 활용할 것이나, 맥락상 법조문을 의미할 때는 헌법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
 

2) 헌정주의란 무엇인가

이렇게 헌정을 법과 정치제도, 관습을 포괄하는 단어로 이해한다면, ‘헌정주의’(입헌주의)라고 보통 번역되는 ‘Constitutionalism’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헌정주의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통치 및 공동체의 모든 생활이 헌법에 따라서 영위되어야 한다는 정치원리”다. 그런데 “헌법에 따라서 영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국가 권력의 자의적 행사로 인한 개인의 권리침해를 막기 위해서다. 여기서 헌법을 헌정으로 이해하면, 자의적 권한 행사를 법으로, 그리고 정치제도와 관습으로 제한한다는 것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해에 따라 헌정주의를 ‘법적 헌정주의’와 ‘정치적 헌정주의’로 나눠볼 수 있다. 
 

(1) 법적 헌정주의와 정치적 헌정주의

20세기 행정법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법학자 케네스 컬프 데이비스는 정부의 권한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한(confining), 구조화(structuring), 견제(checking)로 구분했다. 제한은 정부의 권한을 정해진 범위 내에 두는 것, 구조화는 그것이 행사되는 방법이나 절차를 규제하는 것, 견제는 외부인이나 외부기관이 그것을 심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헌정주의 원리는 헌정이 정부의 권한을 효과적으로 규제하고 통제하여 시민에 대한 정부의 자의적 권한 행사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적용하자면, 법적 헌정주의는 정부 권한에 법적 ‘제한’을 가하고 사법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법의 지배 원리를 정부 최고 기관에 적용하는 것이다. 법의 지배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생명·자유·재산에 대해 자의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도록 공직자와 시민을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이 법에 따라 통치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법의 지배에 관해서는 곧 자세히 살펴본다.) 

한편 정치적 헌정주의는 정치적 메커니즘을 활용해 정부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원제·권력분립·연방제를 통해 정치적 의사결정을 ‘구조화’하고, 각 권부가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며, 행정부가 입법부와 (궁극적으로는) 유권자에 대해 소명 책임을 지게 한다.

헌정은 법과 제도, 관습을 모두 포괄하므로, 헌정주의를 구현하고 있느냐를 논할 때 성문화된 헌법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영국의 경우 성문화된 헌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국은 관습법과 의무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비법적 규범(영국에서는 이를 보통 헌정적 관행이라 부른다)과 제정법 등으로 헌정이 구성된다. 
 
영국의 정치 구조를 나타낸 그림이다. 영국은 의회의 입법권한을 중심으로 한 의회의 지배를 기초로 하므로 의회의 권한이 강하다. 의회 내에서도 하원은 국민의 대표로서 선출되기에 민주적 정통성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입법 권한을 가지므로 매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이 막강한 권한을 남용한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기에 이를 견제하는 의회 내부 안전장치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상원이다. 상원은 일부 세습귀족을 포함해 성직귀족, 국왕이 임명하는 일대귀족(본인에 한하여 작위를 가지는 귀족)으로 구성된다. 일대귀족에는 주로 총리 역임자나 장관 등 은퇴한 공직자나 정치인이 임명된다. 따라서 상원은 전문적이며 초당파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 상원은 실질적 권한은 제한적이나 구성원의 권위를 바탕으로 불문 헌정을 심대하게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법안으로부터 헌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정부는 행정부 각료로 구성되는 행정기관인 내각과 그 수장인 총리가 속하며, 하원 다수당에 의해 구성된다. 국왕은 의례적인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의회의 발달과정에서 국왕 역시 의회의 한 구성요소로 여겨졌으나, 점차 권한이 축소됐고, 현재는 실질적인 정치적 권한을 가지지는 않는다. 영국의 사법부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만약 내각이 법률을 위반한 자의적 권한 행사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경우, 피해를 당한 시민은 사법부에 판단을 요청할 수 있다. 다만 제정법에 대한 사법심사 권한은 없다. 영국은 입법주권을 의회가 보유하므로 의회의 제정법은 헌정 정신에 부합한다고 추정한다. 사법부는 이런 의회가 제정한 제정법을 적용한다.
(그림출처: https://ourgoverningprinciples.wordpress.com/the-uks-westminster-system/)

그런데 정부 기관을 효과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성문화된 헌법이 있는 경우보다 없는 경우 아무래도 좀 더 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영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왕의 권한이 점차 법과 의회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그 범위나 정도는 모호했다. 결국 국왕의 권한 행사가 적법한가를 두고 논란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내전(1642~51년)이 발생했고, 명예혁명(1688년)으로 국왕의 권한을 의회가 실질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명예혁명 이후 의회가 주권적 입법권을 가진다는 ‘의회의 지배’ 원칙이 정치적으로 확립되었다. 이 원칙은 여전히 영국 헌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영국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행정부조차 사법적 통제에 비교적 약하게 기속되었고, 입법부는 여전히 사법부가 집행할 수 있는 헌정적 제한을 적용받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영국 헌정이 정치적 헌정주의를 대표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의회의 지배와 관련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한편, 영국의 헌정 역사를 잘 알고 있던 미국 건국자들은 독립적인 사법부에 의해 집행되고 수정하기 어려운 성문헌법에 정부에 대한 법적 한계를 설정하도록 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헌정의 모호성, 과도한 변경 가능성, 집행 불가능성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하기를 바랐다.  미국의 성문헌법은 입법·행정·사법권을 각기 다른 기관에 부여하는 권력분립제도를 명시해 견제와 균형을 통한 헌법의 집행을 도모했다. 

나아가 미국의 헌정은 주권자인 인민이 투표를 통해 (또는 최종적 수단으로서 무장 반란을 통해) 자신이 선출한 대표자를 문책할 수 있는 권한을 헌법의 집행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사고했다. 2차 세계전쟁 후 다수의 나라에서 영국식 정치적 헌정주의 모델보다는 미국처럼 법적 헌정주의와 정치적 헌정주의를 모두 구현하는 모델이 수용되었다. 이를 모델화하면 다음과 같다. 

• 양원제 입법부와 (행정부가 입법부와 분립한 경우) 행정부 수반에 대한 민주적 선거
• 다양한 권부가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의 중첩(overlapping)
• 개인의 권리 보장
• 개인의 권리 보장을 포함한 헌정적 요건을 집행할 권한과, 일반적으로 법적 분쟁을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배타적 권위를 가진 독립적 사법부
• 헌정은 일반 입법 절차보다 더 폭넓은 합의와 신중한 심의를 요하는 특별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만 변경할 수 있다는 요건
 
 

3. 영국 헌정주의의 발달: 법의 지배와 의회의 지배

 
정부 권한의 자의적 행사를 제한함으로써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헌정’이고, 그 핵심 원칙 중 하나가 ‘법의 지배’이며, 영국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의회의 지배’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낯선 이야기일 수 있다. 특히 법이나 의회를 지배계급의 억압적 도구로 인식해 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법의 지배가 내포하는 관념과 그것이 성립되어 온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1) 법의 지배

일반적으로 법의 지배라는 말보다는 법치(法治)라는 말이 좀 더 익숙할 것이다. 법치는 한 사람 혹은 권력을 장악한 집단이 자의적으로, 그때그때 자신의 이익에 맞춰 권한을 행사하는 인치(人治)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즉 인치를 방지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미리 정해둔 규칙에 따라서 권한 행사를 제한하자는 발상이 법치다.

법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뉜다.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와 ‘법의 지배’(rlue of law)가 그것이다. 법에 의한 지배는 통치자가 법을 수단으로 활용해 지배한다는 개념이다. 이런 이해에서는 통치자는 법에 기속되지 않으며, 통치자의 통치가 주안점이 되기 때문에 통치자의 권한 자제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에 도움이 된다거나, 통치자의 의지 그 자체가 명분이 되어 반인권적인 법이 제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법의 지배는 말 그대로 ‘법이 지배’한다는 의미로, 통치자는 법 아래서, 이미 존재하는 법에 따라 통치 권한을 행사해야만 한다. 이는 통치자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즉, 법의 지배에서 핵심 문제의식은 통치자의 권한 자제다. 또한 법의 지배는 단순히 제정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일반적 정의 관념의 지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기본적인 인권에 반하는 제정법이 존재할 때, 이런 법이라도 법으로서 제정됐으니 지켜야만 한다고 이해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이라는 형식만 갖추면 그것이 인권과 같이 일반적인 정의 관념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중요하게 따지지 않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법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법의 지배가 법조인에 의한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의회와 행정부의 무능으로 모든 정치적 결정 과정이 법적 결정으로 대체되는 ‘정치의 사법화’와 법의 지배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사법부의 권한 비대화라는 쟁점을 넘어서, 사법적 판단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사법의 정치화’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만약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된다거나 정치영역에서의 거센 비난을 받을 것들을 우려하여 사법적 판단을 회피한다면, 이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사법부에 주어진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 된다. 즉, 사법적 판단의 기준을 충족함에도 정치적인 이유에서 사법적 심사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그 자체가 위헌이다.
 

2) 법의 지배를 구현하는 현실적 조건

20세기 영국 최고의 법관이라 평가받는 톰 빙험은 법의 지배가 현실에서 구현되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8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법은 접근성이 있고, 가능한 한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며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권리나 의무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둘째, 권리나 책임은 법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며 재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즉, 행정부와 사법부의 관료는 공표된 기준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지 재량적으로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법적으로 불복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가의 법률은 객관적 차이에 근거한 차등 대우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현대 법률에서 객관적 차이로 언급하는 것은 어린이, 정신질환자 등이 있는데, 이외의 경우에는 평등한 법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모든 직급의 공무원은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을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공평하게, 그 권한이 부여된 목적을 위하여, 그 권한의 범위 내에서 합리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행정부의 권한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현대에 이를 적절히 견제할 수 있는 사법심사는 불가피한데, 이 역할은 사법부가 담당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고 해서 법관에게 독자적이고 일차적인 결정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의회가 제정법이나 하위 명령에 위임해 특정 공무원 또는 특정 기구에 대해 결정권한을 부여하고, 법관은 이를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

다섯째, 법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적절한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빙험은 이 원칙이 법의 지배의 원칙인지에 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으나, 특정 국가가 자국의 법으로써 국가 구성원을 야만적으로 탄압하는 정부는 법의 지배를 준수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여섯째, 당사자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적 분쟁을 과도한 비용이나 지나친 지연 없이 해결할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하나로 꼽히는 글래드스턴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유명하다. 그만큼 적절한 비용으로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법의 지배의 원칙을 지킴에 있어서 중요하다. 

일곱째, 국가의 사법절차는 공평해야 한다. 공평하다는 것은 소추인·청구인과 피고인·피청구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를 위해서 사법부의 독립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법조인의 독립도 필요한데, 당사자가 아무리 빈축을 사는 사람이라도 변호사는 두려움 없이 사건을 변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법의 지배는 국가가 그 의무를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제법 관계에서도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국제법은 국내법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법과 비슷한 원칙에 근거하고 있으며 국내법과 비슷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즉 국제질서에서 법의 지배는 적어도 상당 부분은 국내법에서의 법의 지배 원리가 확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법의 지배가 형성되어온 역사

지금까지 법의 지배의 개념과 원칙에 관해 살펴봤다. 앞서 헌정은 법의 지배를 정부 기관에 적용함으로써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의 지배의 원칙과 함께, 법의 지배가 확립되어온 역사를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빙험 역시 자신의 저서 『법의 지배』에서 법의 지배의 원칙을 설명하기에 앞서 영국에서 법의 지배가 형성되어온 역사를 고찰한다.
 

(1) 대헌장(1215년)

대헌장은 영국 헌정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빙험은 네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당시 기준에서는 이례적으로 모든 자유민을 대등하게 전제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생겨나는 데 기여했다. 둘째, 대헌장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문서가 아니라 영국 사회와 정치의 관습에서 비롯했다. 대헌장은 역대 왕들의 즉위선서 내용, 특히 헨리 1세가 반포한 권리양허장의 내용을 많이 원용하는데, 여기에는 추상적인 혹은 기본권으로서 자유권이 아니라 구체적인 권리, 특권, 특혜가 담겨있었다. 영국의 당시 관례상 국왕은 종전 국왕이 허가한 특권을 다시 확인하는 취지의 양허장을 서명해 공표하면서, 그러한 권리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대헌장은 제약도 없고 책임지지도 않는 형태의 왕권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표명하는 것으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도 그 위에 존재하는 규칙에 복속해야 한다는 입장을 담고 있다. 법의 지배는 바로 여기서 배태된 것이다. 넷째, 대헌장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미권 헌정에서 여전히 구심점이 되어 왔다. 1940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 연방 대법원이 대헌장을 인용하며 판결한 사건이 60건이 넘는다.
 

(2) 구속적부심사 제도: 불법 구금에 대한 저항

구속적부심사 제도의 정식 명칭은 ‘구금인의 신병을 대령하도록 명하는 명령장’이다. 애초 이 제도는 법원에 피고를 출석시키는 목적으로 활용됐으나 16세기부터 구금의 적법 여부를 심사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절차는 아주 간단하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사람이 구금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어떤 이유든 ‘갑’ 본인이 구속이 위법하다고 생각하면, ‘갑’은 형무소장을 수신인으로 하는 국왕의 명령장 발급을 신청할 수 있다. 이 명령장은 해당 형무소장에게 ‘갑’을 중앙법원의 단독 판사 또는 합의재판부에 출석하도록 하여 “구금 개시일과 구금 이유를 명시하여 법원이 그 구금에 적법한 원인이 있는지를 심사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이 영장의 위력과 효력은 그 단순함에 있다. 이 제도는 행정부의 적법하지 않은 권한 행사를 막는 세계 각국의 제도 중 가장 실효성이 있는 것으로 널리 여겨진다.


(3) 고문 철폐

잉글랜드과 웨일즈는 증인이 한 명만 있어도 그 증언에 근거해 판결이 가능했다. 피고인의 유죄 여부는 배심원이 판단했다. 반면 유럽 대륙은 유죄판결에 두 명의 증인이 있거나 피고인의 자백이 필요했다. 두 명의 증인을 확보하기 어렵고 피고인이 자백을 거부하면 고문을 활용했다. 영국 일반법원은 고문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국왕 특권의 일환으로 고문이 잔존하다가 1640년 소집된 의회가 이를 완전히 폐지했다. 범죄자가 법망을 피할 위험이 있더라도, 아무리 국가의 최고 권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인신을 침해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시각은 법의 지배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
 

(4) 권리청원(1628년)

찰스 1세는 스페인 원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강제 대출금에 의존하려 했고, 이를 거부하는 귀족 일부를 투옥했다. 투옥된 이들은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하려 했으나 국왕은 ‘국왕의 특별지시’에 근거한 것이라고만 할 뿐 다른 조치가 없었다. 1628년 소집된 의회는 국왕이 아무런 법적 제약 없이 구금할 수 있는가, 강제대출이라는 방식으로 의회 동의 없이 재산권을 박탈할 수 있는가를 두고 문제를 제기했다. 하원은 분명하고 포괄적으로 법의 지배를 확립하고자 했고, 1628년 권리청원을 채택했다. 권리청원 제8조는 “어떠한 자도 법률의 형태로 표시되는 의회의 동의에 의하지 않고서는 선물, 대출, 기부, 세금 등과 같은 부담을 지도록 강요되지 않을 것과, 누구도 그와 관련하여 또는 그 거절과 관련하여 소추되거나 서약이나 출석을 강요당하거나 구금되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불편을 겪지 않도록 할 것을 국왕에게 청한다. 또한 자유민은 위에 언급한 어떠한 이유로도 구금되거나 투옥되지 않도록 한다”라는 것을 규정한다.
 

(5) 권리장전(1689년)과 왕위계승법(1701년)

대헌장과 권리청원은 국왕도 법의 지배에 복속된다는 단도직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존 왕은 대헌장을 폐기하였고, 찰스 1세는 권리청원에 반하여 의회를 무시하고 11년간 통치했다. 이후 전제왕권을 강화하려는 제임스 2세의 시도에 맞서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차기 계승자인 메리와 윌리엄 공에 의회의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이를 수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왕위를 제안했다. 일종의 헌법적 협약이 이뤄진 셈이다. 

이렇게 채택된 권리장전은 의회의 권위와 독자성을 선언했고, 의사 절차의 자율성을 보장했으며, 평화 시에는 의회의 동의 없이 상비군을 둘 수 없도록 하였다.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은 위법한 것으로 규정했고, 과다한 벌금이나 보석 보증금을 금지하고 ‘잔인하고 특이한 형벌’을 금지함으로써 신체의 자유와 안전이 보호되도록 하였으며, 배심원 재판도 보장했다. 그런데 이를 법으로 집행하려면, 특히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그렇게 하려면 법관의 신변이 보호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1701년 왕위계승법에서 법관의 신분 보장에 관한 규정이 채택됐다. 독립된 사법부까지 갖춰지면서 영국에는 법의 지배가 자리 잡게 된다.
 

4) 법의 지배를 보완하는 의회의 지배

(1) 배경

지금까지 법의 지배의 기본 원리와 그것이 형성되어온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봤다. 법의 지배는 국왕(행정부)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제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명예혁명으로 불완전하게나마 달성됐다. 여기서 불완전하다는 의미는 혹시 이후에라도 왕이 법을 위반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남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명예혁명 이전에 벌어진 잉글랜드 내전은 당시 왕인 찰스 1세가 권리청원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으며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전제왕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벌어졌다. 따라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왕권을 정치적으로 제한하기 위해 의회 주권이 천명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의회파인 조지 필립스는 “모든 사람은 의회의 대표로 간주되며, 의회의 동의는 모든 사람의 동의로 간주된다” “따라서 [의회의] 법령은 반드시 공동체의 안녕을 증진시킨다”는 것을 강조했다. 덧붙여 필립스는 의회가 실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법은 이러한 오류에 대한 구제책과 개혁 방법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후속 의회가 이전 의회의 오류를 개선할 수 있으니 의회에 권한을 맡겨도 무방하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의회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포함한 공동체의 복지를 보호하는 궁극적인 책임을 맡게 됐다. 이후 수 세기 동안 오로지 의회만이 공동체 내부의 다양하고 상충되는 의견과 이해관계를 모두 경청하고 공적 의사결정에 반영할 수 있다는 말이 통용되었다.
 

(2) 의회의 지배의 원리

의회의 지배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의회가 최고의 주권기관으로서 입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영국의 헌법학자 다이시를 참고하면서 의회의 지배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주권은 정치적 의미로 인식된다. ‘국가의 의지가 궁극적으로 국민에 의해 지배된다’와 같은 방식의 이해다. 이는 선거인의 의사가 헌법적 수단에 의해 최고의 영향력을 가지는 걸 보장한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그런데 의회의 지배 개념에서 주권은 법적 주권을 의미한다. 즉 어떤 법적 제한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법 제정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의회는 가능한 모든 종류의 문제에 관하여 자유롭게 입법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의회의 입법권은 선거인에 의해서라도 직접적으로 제한될 수 없다. 선거인은 투표를 통해 의회를 검증(선출)한다. 그렇게 검증(선출)된 의회는 국가 최고의 입법기관으로, 선거인의 단순한 대리인이 아니다. 만약 의회가 이들의 의사에 반하는 입법을 했다고 하더라도, 의회가 합법적 절차에 의해 입법권을 행사해 입법 활동을 수행했다면 그것을 제한할 수는 없다. 다만 선거인은 다음 선거에서 회고적으로 이를 평가함으로써 책임을 지울 수 있다.

또한, 의회의 지배 아래서는 행정명령이나 조례가 아니라 오직 의회 제정법만이 주권의 표현이며, 법원은 제정법을 제정된 것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의무다. 법관은 의회의 입법 취지가 도덕원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추정’해야 하며, 도덕원리와 제정법 양자에 부합하도록 해석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제정법이 단지 도덕원리에 위반된다는 것을 근거로, 법관이 법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법원은 의회 권위의 표현인 제정법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중요한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법관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주체가 의회였다. 법관은 부정행위나 양원의 면직 요구에 의해서만 해임됐다. 이를 두고 다이시는 의회 주권이 확립된 결과 사법부의 독립 역시 보장됐다고 말한다.
 

(3) 의회의 지배의 제약

이런 점에서 의회의 지배는 곧 의회가 ‘전능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의회가 무제한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다이시는 의회의 주권 행사에 외적 한계와 내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외적 한계는 국민이 저항할 가능성이다. 따라서 정부는 여론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다. 내적 한계는 의회가 속한 사회나 시대의 도덕적 정서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이런 한계의 경계선이 명료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적 한계든 외적 한계든 한계를 넘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다이시는 이 부분에서 대의제 정부의 의의를 말한다. 대의제 정부가 성립하기 이전 시대에 사회의 개혁을 주도한 주권체는 대체로 대다수 국민과 괴리된 사회지도층(왕, 귀족)에 국한되었다. 반면, 대의제 정부는 주권체인 의회가 국민을 대표한다. 따라서 주권체와 국민의 의사가 일치하게 되므로 의회와 국민이 함께 발전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일치성을 영국의 의회파(휘그당) 정치인이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로 유명한 에드먼드 버크는 “(국민과 평민원[의회]) 양자 간에 혈연관계에 버금가는 밀접성이 존재”하며, “이와 같은 성격일치가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평민원[의회]일 수 없게 된다”라고 표현했다.

한편 몽테스키외는 “헌정의 직접적 목적을 정치적 자유에 두고 있는 국가”로서 영국을 언급하며 영국 헌정을 상찬한다. 그는 영국 헌정의 탁월함이 권력의 문제를 해결한 데 있다고 봤다. 몽테스키외는 권력은 언제나 남용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한 권력이 다른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영국은 정치조직에 대한 대항력(countervailance) 이론을 발전시켜 권력기관을 분리하고 고유 영역에서 권한을 행사하게 하면서 상호 통제하는 제도를 발전시켰다. 즉, 영국은 당시 행정부로 간주할 수 있는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여 국가의 강압적 통치를 통제했고, 또한 입법부도 상원과 하원으로 나누어 상호 특권으로 서로를 견제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들이 단순히 견제만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정책을 실제로 실행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세 기관 모두가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견제하는 가운데 상호 의존 역시 필요했다. 

몽테스키외의 이런 평가는 의회의 지배에서 의회 역시 실질적 제약을 받으며, 그런 요소가 정치제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이런 평가는 앞서 정치적 헌정주의의 대표로 영국이 꼽힌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권력기관이 상호 견제하면서도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정치의 작동을 요구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런 시스템이 존재했기에 영국에서 “온건한 정부”가 성립될 수 있었으며, 이런 정부야말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겼다.
 
 

4. 미국 헌정주의의 발달: 권력의 견제와 균형

 
지금까지 현대 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영국 헌정과, 그것의 기본 원리로서 법의 지배와 의회의 지배를 살펴봤다. 그런데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모델이 존재한다. 바로 미국 헌정이다. 삼권분립과 대통령제로 널리 알려진 미국 헌정은 20세기 세계 각국에 전파되었다. 한국 헌정 역시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인데, 미국 헌정의 근저에 깔려 있는 정신을 살펴보면 한국 정치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미국 헌정은 영국 헌정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 비판자로서 탄생했다. 18세기 후반 영국 헌정은 개인의 자유, 안정과 질서, 물질적 부와 같은 다양한 목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경험적 증거를 토대로 널리 존중받았다. 미국의 건국자들 역시 이런 영국의 정치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새로이 헌정을 수립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영국 헌정보다 더 좋은 모델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영국 헌정을 계승하고자 했다는 점은 자주 간과되는데, 잊지 말아야 할 요소다.

그렇지만 그들이 영국 헌정을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 건국에 앞장선 지식인들은 ‘전능한 의회’에 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법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의회조차도 더 상위의 법인 ‘헌법’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봤다. 또 권력기관 간 견제가 좀 더 확실한 근거로 이뤄지기를 바랐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삼권을 분립하고 성문헌법을 제정했다.
 

1) 미국 헌정주의의 배경

미국 헌정주의의 배경으로 아메리카 식민지 시기의 경험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미국 헌정은 영국식 형태와 원칙을 상당 부분 계승했지만, 동시에 영국의 그것과는 상이한 형태를 띠는데, 이는 식민지 시기의 특징에서 비롯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북미에 건설된 영국 식민지의 기원은 다양했지만, 이민이 크게 증가하면서 식민지 사회는 신분의 격차나 빈부의 격차가 비교적 작은 동일한 상태를 유지했다. 한편 식민지는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대외관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식민지 주민 역시 잉글랜드 내전이나 명예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목격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식민지 정치제도는 영국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게 발전한다. 법률 거부권을 가지고 행정 책임자로서 정책집행을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식민지 총독이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민지 의회의 정치적 권한이 점차 커져 갔다.

견제와 균형에 관한 교리도 식민지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문헌에는 보통 ‘혼합정체’로 남아 있으나 당대 사람들은 이를 권한이 제한되는 ‘제한 정부’로 해석했다. 그리고 많은 식민지 정치가는 시민의 자유가 새로운 공동체의 필수적 특징이 되어야 하며, 제한 정부만이 시민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고 봤다. 예를 들어, 훗날 미국의 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 각 권력이 다른 두 권력과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폭정을 향한 인간 본성의 노력이 견제되고 억제될 수 있으며, 헌법에 보장된 자유가 보존될 수 있다”고 썼다.

정치적 권한이 커지고 제한 정부에 관한 인식이 성장하면서, 식민지인은 자연스레 모국인 영국에 대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 대륙의 국가들과 벌인 7년 전쟁으로 인해 늘어난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식민지에 인지세를 과세한다.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과세에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이듬해 이 법안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이후 각종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타운젠드법이 통과되어 또다시 저항이 일어났고, 주둔하던 영국 군대와 식민지인이 충돌하며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식민지인들은 이런 사건이 영국에서 100여 년 전에 벌어진 일과 유사하다고 봤다. 즉 찰스 1세가 전비 마련을 위해 의회 승인 없이 선박에 세금을 부과했던 일이 잉글랜드 내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식민지인의 동의 없이 조세를 부과하는 부당함이 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독립전쟁 동안 스스로를 영국인으로 여기며 영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의 근저에는 기존 체제를 청산하고 새롭게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정치제도와 그 이상을 보존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2) 연합규약 시대

독립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인 1777년, 식민지 주들은 전쟁을 위해 힘을 합쳐야겠다고 판단했고, 연합규약을 채택했다. 연합규약은 이후 13개 주의 승인을 받아 1781년 발효되었다. 연합은 국방, 외교, 주화(鑄貨) 등의 권한을 가지기는 했으나, 과세권과 상비군을 유지할 권한이 없는 매우 느슨하고 약한 연합이었다. 

느슨한 연합이었던 만큼 이 시기 미국 헌정을 검토하는 핵심은 연합규약보다는 주 헌법일 것이다. 독립 선언 후 작성된 각 주 헌법에는 직접적으로 견제와 균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 원칙을 충분히 반영했다. 1776년 버지니아 주 헌법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분리되고 구별되어 어느 쪽도 다른 쪽에 속하는 권한을 실제로(properly) 행사할 수 없다”라고 선언했고, 1780년 매사추세츠 주도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 안에서 자신의 안전을 찾을 수 있도록 공정한 법률 제정 방식과 공정한 법 해석, 충실한 법 집행을 규정”하며, 이런 목적을 위해 “(정부의 각 권부는 어느 쪽도 다른 권부에 권한을 행사할 수 없으니) 결국 사람의 정부가 아니라 법의 정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독립전쟁의 와중이기는 했지만, 각 주의 헌법의 모델은 역시 영국의 정치제도였다. 각 주는 주지사(군주), 행정부(내각), 양원제를 구성했다. 다만 미국에는 세습귀족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상원은 귀족의 이해관계를 대표한다기보다는 보다 철저한 법안의 검토를 임무로 삼았다.
 

3) 연방 헌법의 제정

(1) 배경

독립전쟁은 끝났으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자체만으로는 각 주의 안전을 확보하기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정부의 질서유지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내부 갈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정적 사건은 1786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일어난 ‘셰이스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무거운 조세와 가혹한 부채상환 채근에 반발하여 독립전쟁의 영웅이던 대니얼 셰이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봉기였다. 주정부가 무거운 조세를 부과한 건 독립전쟁 비용으로 늘어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한편 영국의 보복조치로 단행된 경제 봉쇄도 경제난을 가중했다. 주정부는 민병대를 조직해 곧 봉기를 진압했지만, 결과적으로 세금을 경감하고 부채 탕감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은 “사유재산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임박한 무정부 상태”라는 위기감을 조성했다. 이런 중대한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연방 헌법을 수립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1786년 메릴랜드주에서 1차 토론회의가 열렸고, 1787년에 ‘별도 회의’를 열어 ‘각 주 사이의 상업 및 무역 관계를 검토’하자고 결론지었다. 이 ‘별도 회의’가 훗날 제헌회의로 역사에 기록되는 필라델피아 회의다. 각 주는 인구 규모와 구성이 매우 다양했고,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도 달랐다. 주정부와 연방 정부의 역할과 권한이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연방을 구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분명했고, 127일간의 치열한 토론 끝에 연방 헌법이 제정되었다.
 

(2) 핵심 문제의식: 정치권력의 통제

연방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반복해서 제기되었던 핵심 문제의식은 국가와 정부의 권력이 통제되고 제한되지 않으면 시민의 자유가 위협받는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통치자의 무지나 악덕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며, 이는 공화주의 정부를 세운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군주의 자리를 새로운 정치권력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를 구성하는 게 중요했다.

미국 헌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견제와 균형을 도모했다. 우선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정치권력을 공유하되 어느 한쪽이 우월한 권한을 갖지 않는 형태를 취했다. 또한,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양원제)에 각각 독립된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각각이 다른 권부에 종속되지 않도록 했다. 각 권부는 다른 권부에 어느 정도 간섭하면서 권력의 남용을 방지했다. 예컨대, 대통령에게는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한 거부권과 연방 판사 지명권이 부여되었고, 상원에는 대통령의 연방 판사와 내각 구성원 임명에 대한 거부권이 부여되었으며, 의회(congress)에는 대통령과 연방 판사를 탄핵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무엇보다도 미국 건국자들은 주권자인 인민이 투표를 통해, 또는 최종적 수단으로서 무장 반란을 통해 대표자를 문책할 수 있도록 했다.
 

(3) 소수자의 권리 보호

무엇보다 미국의 건국자는 인민주권이라는 교리를 수용했다. 다만 이는 규범적인 원칙으로 해석됐다. 즉 정치권력이 진정으로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정하는 기준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에 대한 국가의 강압을 막아야 한다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됐다.

당시 건국자들은 ‘민주적 전제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인민주권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만장일치만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일 수는 없었다. 결국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소수자의 권리는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토론주제였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고」에서 역사적으로 직접민주주의 아래서는 소수가 다수의 희생양이 되어왔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매디슨은 일시적인 다수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춘 대표자에 통치권을 부여하는 한편,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갖춘 확장된 연방을 구성할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개별 주보다 더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연방은 소수를 억압하는 다수가 형성되기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연방이 자유의 최고의 보호자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사실상 매디슨은 자유로운 공화국이 정부 형태뿐만 아니라 더 큰 의미에서 다원주의 사회에 의존한다고 봤다.
 

(4) 권리장전과 사법심사

연방 헌법이 제정된 후 곧바로 제정된 10개의 수정조항은 기본적인 권리를 담고 있다고 하여 미국의 ‘권리장전’으로 불린다. 미국의 권리장전은 연방 헌법이 각 주에서 비준되는 과정에서 기본권의 내용이 명시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매디슨은 연방의 첫 번째 의회에서 기본권을 명시한 문서의 초안을 작성할 위원회를 임명할 것을 제안했고, 1789년 9월 25일 수정헌법이라는 형태로 권리장전이 발의되어 1791년 12월 15일에 비준되었다. (참고로 미국 연방이 승인된 때는 1788년 6월이다.) 

그런데 권리장전이 그 자체로 국가를 제약하는 역할을 한다는 개념은 모호한 것이었다. 권력은 다른 권력에 의해서만 통제된다는 관점에서는, 의회의 법 제정 권한을 견제할 구체적인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권리장전은 도덕적 제약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을 보장하기 위해 사법심사라는 연방법원의 권한이 인정됐다.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에서는 몇몇 대표가 헌법 위반을 해석할 권한을 연방 법원에 부여할 것인지 문제를 언급했지만 명시적으로 이 문제가 다뤄지지는 않았다. 해밀턴은 좀 더 적극적으로 연방 법원에 사법심사 권한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연방주의자 논고」에서 “사법 재판소(the courts of justice)의 완전한 독립은 제한 헌법(limited constitution)에서 특히 필수적이다. … 제한 헌법은 입법 권한에 대한 특정 예외를 포함하는 헌법이다. 예를 들어 사권(私權)을 박탈하는 어떠한 법안도 통과시킬 수 없고, 소급 적용하는 어떠한 법도 통과시킬 수 없다는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종류의 제한은 헌법의 명백한 취지(tenor)에 반하는 모든 행위를 무효로 선언하는 것이 의무인 사법 재판소를 매개로하는 것(through the medium of courts of justice)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는 실질적으로 보존할 수 없다”고 썼다.  

이런 견해가 얼마나 널리 퍼져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법심사에 관한 연방대법원의 권한은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을 통해 비교적 초창기에 승인됐다. 다만 사법부의 이런 역할이 헌법 개정을 통해 확립되지는 않았고 미국 헌정의 관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후 삼권분립에서 법원 역시 견제와 균형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헌법 위반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권한이 반드시 연방대법원에 있어야 하느냐는 건 쟁점이 될 수 있었다. 위헌을 명분으로 의회의 입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서다. 매디슨의 경우 헌법 위반을 시정할 수단이 필요함은 인정했지만,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따라 “일차적으로는 행정부와 사법부가 입법부의 위반 행위를 통제하되, 최후의 수단으로 … 보다 충실한 대표자를 선출하여 … 국민으로부터 구제책을 얻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분 아래 수행되는 연방대법원의 사법적극주의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존재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헌정의 근본이라고 전제한다면 적어도 사법적극주의가 적극적으로 권장될 사안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정당체계의 시작

끝으로, 연방의 성립은 정당체계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18세기 후반에는 정부에 반대하는 행위를 그리 관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큰 성취였다. 국가에 대한 개인의 비판은 허용되더라도 국가에 반대하는 조직을 형성하는 것은 곧 반역으로 간주되었던 시기에, 미국에서는 정당을 조직해 정부와 여당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연방이 성립한 직후에는 연방의 권한을 강조하는 연방당과, 주의 권한을 강조하는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어 경쟁했다. 미국 헌정에서는 정당 간의 정치적 경쟁에서 민주공화당이 패배한다고 해도 자유나 재산,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5. 헌정사 검토의 시사점

 
지금까지 영국과 미국의 헌정사를 살펴봤다.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은, 권력은 그 자체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위험성을 가지며, 이를 막기 위해 권력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국과 미국은 법으로서 권력기관에 권한을 부여하고, 법으로서 그 행사를 구체적으로 제한하며, 권력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정치제도를 고안했다. 법의 지배 원리를 따르는 헌정을 구현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고귀한 이상을 추구했던 혁명인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의 사례는 어떠했나.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공회는 비상사태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이 제정한 1793년 헌법의 시행을 미룬 뒤 혁명의 안정을 위해 ‘혁명의 적’을 극단적 폭력으로 다스리는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덕과 공포가 민주주의의 일반원리의 귀결이라 주장했는데, 덕은 “조국과 법에 대한 사랑”이었기에 이를 위해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억압할 수 있었다. 이는 공포에 기반한,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일 따름이었다.

소련은 1917년 10월 혁명 직후 법원과 검찰을 비롯한 기존의 ‘부르주아적’ 사법제도를 모두 해체하고 ‘혁명적 양심’과 ‘혁명적 법의식’에 따라 판결하는 혁명재판소를 신설했다. 프랑스혁명의 공포정치를 답습한 셈이었다. 여기에 더해 사법 처리를 효율화하기 위해 사실상 경찰, 검찰, 판사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비밀경찰을 운용하면서 ‘혁명의 적’을 단죄하는 혁명적 폭력이 일상화됐다. 

중국 역시 소련과 대동소이했다. 중국은 건국 후 소련을 모방한 혁명법제를 수립했고, 반우파투쟁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인치(人治)가 법치를 대체했다. 개혁개방 이후 문화혁명에 대한 반성으로 법치의 필요성이 부상하나, 이는 당시 만연한 부패를 강력히 통제하기 위한 형벌을 도입하는 것일 따름이었고, 법의 예측가능성보다는 통치자의 재량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즉 법의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법치라고 할 수 없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법 위에 공산당이 존재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이런 역사의 근저에는 민중 혹은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의 기반이며, 그들의 의지를 담지하는 통치자(통치기관)의 모든 행위는 정당하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사고에는 권력자와 통치자의 자기제한이라는 관념이 부재했다. 다수라는 이유로, 목적이 정당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다수의 의지를 명분으로 소수를 체계적으로 승인된 폭력으로써 억압하는 사회와 다수의 횡포를 막고 소수의 의견도 충분히 보장될 수 있는 장치를 구축하려 한 사회 중 어느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을 준다. 제한·견제·구조화를 통한 정부 권력의 제한, 그리고 이를 실질적으로 존중하는 정치세력의 존재와 그들이 수행한 정치적 실천이 어떤 차이를 낳았는지 확인하는 건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점을 제공할 것이다. 과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통치자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영국과 미국 헌정을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식에 대한 인식이 한국 정치에 있었는가.

이 질문은 군사독재에 맞서 한국이 민주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현재는 정치권의 주요 세력이 된 운동권에게도 적용된다. 한국 헌정사에서 권위주의 혹은 보수주의 세력이든, 그를 비판했던 운동권 세력이든 권력의 자기제한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혁명사의 계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법을 통치자의 통치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법에 의한 지배’를 따른 것은 아니었을까. 또 그로 인해 제왕적 대통령제에 맹목이 있었던 건 아닐까. 다음 호에서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며 한국 헌정에 관해 고찰해 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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