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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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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폭력 추방을 위한 '세계여성행진 2000'(World March of Women in the Year 2000)

정주연 |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1995년 '빵과 장미' 행진에서 시작된 여성행진

'희망, 평등, 평화, 민주주의를 위한 행진'. 이것은 세계여성행진2000에 붙여진 또 하나의 슬로건이다. 1995년 캐나다 퀘벡주에서 여성들은 빈곤추방을 위해 경제정의와 관련한 9개의 요구사항을 가지고 '빵과 장미' (Women's Bread and Roses March Against Poverty)라고 이름붙여진 행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바 있다. 세계여성행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0일 동안 전세계 NGO에서 모인 850여명의 여성들이 행진을 하고 많은 인파의 호응을 얻으며 진행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95년 베이징대회에서 국제적인 여성행동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빵과 장미'의 행진을 성공적으로 이끈 퀘벡여성연합이 주축이 되어 1997년부터 '세계여성행진2000'(이하 세계여성행진)이 구상되었다. 행진은 현재까지 153개국의 4000여개 이상의 여성NGO가 참가하기로 결정하여 진행되고 있고, 무려 89개국에서 각국 추진본부가 설치되어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이 행진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장 일차적인 두가지 문제, 즉 '빈곤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폭력은 오랫동안 여성운동의 이슈로 자리해왔으며, UN과 같은 국제적 공간에서 여성폭력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빈곤의 문제는 '기아'와 '난민'의 문제에서 다루어질 뿐 여성들만의 고유한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세계여성행진이 빈곤을 주요 척결과제로 제시한 것은, 세계화로 인한 여성빈곤의 실상이 가속화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화 과정에서 빈곤과 폭력에 묶여버린 여성들

신자유주의 정책에 기반한 세계화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장 극심한 피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농업부문의 40%, 산업부문의 4분의 1, 서비스 부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노동력이 여성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또한 오늘날 세계 식량 생산량의 50%는 개도국의 여성농민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인터내셔널뉴스 제91호). 가부장제의 뚜렷한 공사분리전략과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오랫동안 '가정영역'이 우선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통념들은 위와 같은 통계수치들 앞에서 무색해지고 만다. 이토록 여성이 생산과정에 주요주체로 참여하는 데도 불구하고, 전세계 빈곤층 인구 13억명 중에서 여성은 무려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 수입의 10%, 전세계 부의 1%만을 자신들의 노동의 대가로 가져오고 있을 따름이다.

여성들은 빈곤 측면에서만 세계화의 영향하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집약적이고 환경파괴적인 다국적 기업의 해외진출 산업분야에 여성들의 고용이 현상적으로는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은 때로 직업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운좋은 노동자'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면서 갈수록 낮아지는 노동조건 속에서 착취당하고 있다. 또한 비인격적 대우와, 심한 경우 본국 간부들에 의한 폭력(성적폭력을 포함하여)에 시달리고 있다. 가난한 자신의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국경 너머로 이동시키며 생계 유지의 수단을 찾으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섹스산업으로 유입되는 악순환을 맞게 된다.

선진국의 여성들도 세계화의 악영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제3세계 여성들에 비해 낫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전세계적으로 하향평준화되는 노동조건 속에서 갈수록 줄어드는 복지정책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선진국에서도 여성들은 경제위기마다 남성들의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세계화의 영향으로 전세계 여성들은 빈곤이 심화되고 있으며, 빈곤을 탈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오히려 여성들의 인권마저 말살당하는 현실에 봉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배격을 위한 세계여성요구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세계화의 피해 앞에서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 배격'을 첫번째 목적으로 명백히 밝히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밀월관계를 맺으며, 여성들을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그들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는데 상승작용을 미쳐온 가부장제도 주요한 배격대상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의 계기로 여성운동단체간의 연대의 도모, 지구상의 자원에 대한 책임있는 관리 촉구 등 다양한 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세계여성행진은 빈곤과 폭력에 대해 단순히 '반대'의 외침만을 높이지 않는다. 위와 같은 목적에 기반하여 전세계적으로 여성들의 요구를 모아 세계화의 첨병들을 향해 제기할 수 있도록 준비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빈곤과 폭력의 추방이라는 목적에 따라서 요구안도 두가지 측면에서 마련되었다. 세계여성요구 중에서 신자유주의 배격을 통한 빈곤 퇴치의 안으로 제시된 기본 골격을 간략히 살펴보자.

첫째, 모든 국가가 빈곤을 추방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할 것을 촉구한다.

둘째로는 빈곤에 대한 대책으로 토빈세의 징수, 선진국 GNP의 0.7%를 개발도상국이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UN의 재정지원, 구조조정프로그램의 종식, 사회복지예산 감소의 종식, 다자간 투자협정(MAI)의 취소 등을 요구하고 있다.

셋째는 제3세계의 부채를 탕감하고 책임성과 투명성을 가질 것을 제기하고 있다.

넷째, 국제원조에서 지원국이 제공하는 총액의 20%를 사회개발에 할당하고 수혜국 정부예산의 20%를 사회프로그램에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다섯째, 세계기구에 모든 국가가 동등하고 민주적으로 참여하며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대표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성과 어린이에게 특히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의 무역제재조치를 해제할 것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 골격에 덧붙여, 참가하고 있는 국가들의 여성현실에 기반한 요구안이 각국 참여단체들에 의해 마련되고 전체적으로 모아져 다가오는 10월 행동에 제출될 것이다.

세계여성행진의 결집된 행동은 10월 15일 워싱턴과 10월 17일 뉴욕에서 그 정점을 맞게 될 것이다. 우선 워싱턴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World Bank)앞에서 시위가 이루어질 것이며 이 두 기관의 회장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고, 뉴욕에서는 UN 앞의 시위 및 UN사무총장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다. 면담에서 '빈곤과 폭력'추방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서명이 담긴 엽서를 전달할 것이며, 각 국가에서는 17일 같은 시간에 참가단체들을 중심으로 공동행동이 진행될 것이다.
국내에서도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으로 악칭한다)을 중심으로 세계여성행진의 본부가 설치되어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1997년 IMF에 의한 구조조정의 한파를 겪으며 세계화의 간혹한 얼굴을 직면했던 한국의 여성운동으로서도 빈곤의 문제는 더 한층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고, 그러한 기저하에서 이 행진의 참여가 결정되었다.


제1세계 엘리트 여성주도의 한계를 넘어

글을 마치며 세계여성행진이 지금 시기에 갖고 있는 의미와 한계를 짚어보고자 한다.
국제연대측면에서 보면, 그간 여성운동은 UN을 통한 여성관련 국제협약을 이끌어내어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 위상이 향상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여성운동은 남성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보다는 여성들이 빼앗겨온 '권리'를 되찾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제연대운동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기 힘들다는 점에서, 일반 여성대중을 제외시키고 상층의 소수 엘리트 여성이 축이 되어 진행되어온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또 다른 요인은 대체로 국제회의를 통한 여성의제를 다루는 방식, 다시 말해 로비와 협상 과정으로 여성운동의 국제화가 이루어져왔다는 점이다. '빵과 장미행진', 그리고 '세계여성행진2000'은 여성들이 국제회의 중심의 연대방식을 넘어서 단일한 이슈로 여성일반을 포괄하는 전세계적인 저항의 대오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허구적인 면이 개입한다.

즉 다수 국가에서 많은 NGO가 참여하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그러할 뿐, 실제로는 제1세계 여성운동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으며, 각국 추진본부도 실질적인 대중포섭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봐도 여연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이 행진이 조직상층부들의 참여로 이루어질 뿐, 실제로 산하에 조직화되어있는 여성조차도 이러한 일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 알고있다 해도 '행진'이라는 이벤트성 캠페인 정도로 인식하는 게 고작이다. 여성의 '빈곤과 폭력' 추방이라는 절실한 의제가 각국 여성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이끌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성들 스스로 대안의 세상을 향해

세계여성행진의 한계는 그들이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배격'의 목적에서도 드러난다. 세계여성들의 요구안으로 제시되는 내용을 보면, 그 동안 세계화반대투쟁에서 제기된 대안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여성들만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행진의 정점이 반세계화투쟁으로서 여성들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는, 요구안을 가지고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의 회장, 그리고 UN사무총장과의 면담으로 풀어가려 한다. 이는 세계화 속에서 여성의 피해를 줄이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여연이 제출한 세계여성행진의 한국 요구안을 살펴보면, 신자유주의 배격보다 여성의 복지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성들의 빈곤과 폭력에서의 탈출을 위해서 구체적인 방안이 수립되는 것이 절실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라는 망령을 차단하지 않는 한 이는 허탈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계점들에도 불구하고 세계여성행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을 필요는 없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따름이다. 그리고 반드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모든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위해 억압의 원인과 가능한 대안을 분석하고, 공동계획·행동의 통일을 통해 시장지구화의 시대에 남반구와 북반구의 연대를 이루내고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단초는 현재 준비되고 있는 행진에서도 맹아를 볼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전 민중이 해결하고 갈 문제라고 해도 여성들의 투쟁이 전체운동 속에 묻혀갈 때, 그 투쟁이 승리하는 순간에도 여성들의 해방은 저절로 오지 않았음을 경험한 바 있다. 이제 여성들은 스스로 대안의 세상을 향해 달려가야 할 것이다. 세계여성행진의 정신이 이것을 잊지 않고 가기를 마지막으로 바라는 바이다.
주제어
여성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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