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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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0.3-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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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이관술, 박헌영

정희찬 | 회원
안재성, 『경성 트로이카』, 사회평론, 2004.
______ ,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006.
______ ,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9.

1930년대 세계정세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조건

1930년대 정세는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척 엄혹한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주도하는 ‘파시스트 동맹’의 ‘로마진군’에 뒤이은 집권(1922년 10월)이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스)의 ‘뮌헨봉기’(1923년 11월)와 집권 및 독재체제 구축(1933년 1월~7월) 등의 사건은, 유럽의 파시즘 세력이 더 이상 변방의 사회적 불만세력이 아니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영국 미국과 더불어 (혹은 경쟁적으로) 세계 재분할을 도모하는 주요 국제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였다. 이들 파시즘 국가들은 대외적으로는 국제질서의 규범들(1차 세계대전을 종결지은 베르사유 조약 등)을 무시하고 유럽 대륙 내에서의 영토적 팽창을 추구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좌파 세력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지식인을 포함한 반대세력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켰다. 특히 자유주의 세력의 무기력한 투항과 침묵 속에서 가장 혹독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좌파 계열의 조직(노동조합이나 공산당), 공산주의에 동조하던 청년과 지식인들로서 이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처형되기 일쑤였다.
1930년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처한 내외적 조건 역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오르는 데 성공한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중국 대륙에서 경제적 이권과 영토적 분할을 공고히 하려던 ‘대중국 21개조 요구’가 영국미국의 반대로 좌절되었음에도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은 영국 헤게모니의 해체를 상징하는 금본위제가 붕괴된 직후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과 ‘노구교(蘆溝橋) 사건’(1937년 7월 7일)을 통해 만주 및 중국 전역으로 전역(戰域)을 확대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국체’(國體)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적 지식인 및 공산주의자들을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특히 ‘사상범’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던 공산주의자들 및 이들이 결성한 조직은 경찰의 집중적인 감시와 처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1928년 이른바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 조선 지부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이후 당 재건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체포와 투옥, 야만적인 고문 속에서 목숨을 걸고 활동해야 했다.

1930년대 이후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시련과 성과

1930~40년대 대표적인 공산주의자로서 이재유(1905~44), 이관술(1902~50), 박헌영(1900~56) 등의 인물에 대한 안재성의 서술은 개별 인물에 대한 평전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당시 공산주의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고뇌와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1905~53), 박헌영 등은 1930년대 중반 이후 경성트로이카, 경성콤그룹으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공산주의 그룹의 계보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계보는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남조선노동당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남한 좌익운동을 사실상 이끌어갔던 조직과 인물의 계보이기도 하다.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일제 당국의 탄압과 회유가 거세지면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역시 수세에 몰렸다. 공산주의자들 및 이들이 조직한 노동자와 농민들은 이렇다 할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도 이전에 대부분 경찰에 검거되어 다양한 고문기법이 이용된 고통스런 심문에 시달렸다.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탄압에 굴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로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최선의 투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30년대 후반~1940년대 민중의 저항의식과 저항형태의 특징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모든 합법적 정치결사의 활동이 중단된 당시 조건에서 민족주의ㆍ사회주의를 막론하여 대부분의 저항은 소규모 비밀결사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낙서나 유언비어, 태업과 작업장 이탈 등의 소극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역시 주로 몇몇 소그룹을 통해 기관지나 잡지 등을 배포하고 정세를 토론하는 회합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탄압을 피해 지하로 내려간 공산주의자들은 소규모 공산주의 그룹의 조직(세포, 혹은 야체이카)하고 지도했다. 그러나 귀신같이 은신처를 알아내는 경찰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생존을 건 도피가 활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재유의 경우, 왕성한 독서열로 인한 독학을 통해 이미 18세에 각종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스스로가 유물론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중앙위원이나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가 8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된 이후 1932년 12월말까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석방된 후 1933년에 노동자, 농민, 학생들 사이에 상당한 조직원을 확보하며 ‘경성 트로이카’ 조직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재유는 이효정, 이현상, 이순금, 김삼룡 등 중추적인 활동가들이 대거 검거된 직후인 1934년 1월 체포되었다. 그는 3월 호의적인 일본 순사의 도움으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4월 재차 탈출을 시도해 성공하였다. 이재유는 5월까지 공산주의에 동조하던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 미야케의 관사에 숨어지내던 중 미야케마저 체포되자 박진홍과 함께 아지트를 마련하고 부부로 행세하며 조직을 재건하고 2기 트로이카라 할 수 있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1935년 1월 또다시 경찰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었고 이재유는 이관술과 함께 양주군 공덕리에서 ‘김씨 형제’로서 진짜 농부로 생활하면서 여러 활동가들과 접촉하고 직접 등사기를 제작하여 3기 트로이카라 할 수 있는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 명의의 『적기』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새로운 조직활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36년 12월 접선 장소에서 잠복하던 형사들에게 붙잡혔고 결국 모진 고문과 옥살이 끝에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44년 10월 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절명하고 만다. 원래 이재유는 6년형을 언도받았고 형기를 모두 마친 상태였으나, 전향을 거부한 사상범을 무한정 구금할 수 있는 ‘사상범 예비구금제’에 따라 석방되지 못한 채 계속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재유는 1926년 11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이후 무력 13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경성 트로이카’ 활동은 4년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일제 경찰의 끈질긴 추적을 받아 번번이 조직이 와해되었다.
이관술의 활동 이력도 조직활동과 투옥을 반복했다는 점에서 이재유와 별로 다르지 않다. 애초 이관술은 일본에서도 명문학교인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민족주의적 교육자로서 실력양성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것은 1929년 10월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시위와 동맹휴학의 영향을 받아 1930년 일어난 경성여학생 만세운동에 참가한 동덕여고 학생들에 대한 학교측의 징계조치에 대해 민족주의자들인 동료 교사들이 보였던 비겁하고 무능한 태도를 목격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1932년 11월 이관술은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반제동맹 경성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특이하게도 이 조직은 일본에서 노동자운동에 참여하고 조선에 취직하여 여러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던 일본인 와다 모리히또가 조직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은 1933년 1월초 조직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이관술 역시 구속되었다가 1934년 4월 가석방되었다. 이관술은 당시 사건 관련자만 1천 명에 달했던 ‘경성 트로이카’의 핵심 성원이었던 이재유의 탈출 소식에 고무되었고, 9월에는 이순금과 박진홍을 매개로 하여 이재유와 접선할 수 있었다. (이순금은 이관술의 이복누이였고, 박진홍은 이순금의 동덕여고보 동창이자 이관술의 제자로서 둘 다 모두 경성여학생만세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자가 된다.)
이후 이관술은 경성재건그룹의 활동에 동참하였고 공덕리에서는 이재유와 함께 ‘김씨 형제’로 위장하여 생활하던 중 이재유가 체포된 1936년 12월 이후에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도주하는 데 성공, 1937년 6월부터 다시 경성에 잠입하여 조직 재건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는 여동생 이순금과의 접선이 경찰에게 우연히 발각되어 체포된 상태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한 이후 대구로 피신하여 1년여 동안 반제반전 다수의 소그룹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관술은 1939년 1월부터 이순금과 함께 다시금 조직 재건을 위한 준비작업을 개시하였다. 이관술 남매는 1934년 ‘경성 트로이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된 이현상과 김삼룡 등과 의기투합, 드디어 경성콤그룹을 결성하고 1939년 12월에는 형기를 마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해 있던 박헌영을 영입하였다. 경성콤그룹은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며 정세분석과 각지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투쟁을 선전하는 동시에, 1930년대 혁명적 노동자운동을 경과하면서 단련된 우수한 활동가들을 규합하였다. 경성콤그룹은 차츰 경인, 대구, 마산, 부산 등 지역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금속, 섬유, 출판부문 등 생산의 각 부문의 노동자들을 포괄해 조직적 규모를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경성콤그룹은 1940년 12월 이관술이 검거된 이후 이듬해 12월까지 대부분의 지도부 성원들과 100여 명에 달하는 조직원들이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사실상 와해되었다. 경성콤그룹은 최후의 대규모 공산주의 그룹인 동시에 최후의 항일조직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관술은 고문과 열악한 감옥생활로 인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1944년 12월에 3개월 기한으로 병보석 판정을 받아 고향인 울산의 입암리에서 요양할 수 있었다. 그는 재수감되기 직전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남부지역에서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경성콤그룹 와해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더이상 당재건을 위한 조직적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다.
이재유, 이관술의 활동에서 알 수 있듯이 당재건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이 2년 이상 존속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출옥과 동시에 활동을 재개할 경우 또다시 체포와 투옥이 반복되었다. 1940년대에는 ‘사상범 예방구금령’으로 인해 전향을 거부할 경우 무기한 감옥에 있어야 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공산주의자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정치범은 수천 명 규모였다. 박헌영은 일제시대 공산주의자들의 투옥 연수를 헤아리면 6만 년에 달한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1928년 이후 비록 자신들의 당을 재건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당재건을 위해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가장 헌신적이고 비타협적인 저항세력이었다. 공산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절한 채 감옥에 갇힌 수천 명의 정치범의 존재는 식민지 조선에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대표성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해방 직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여타의 어떤 정치세력보다도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해방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간 공산주의자들의 비극적 최후

이관술은 해방 직후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의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는 1946년 5월 이른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수배되고 결국에는 2개월 후에 검거되었다. 이관술은 재판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다른 좌익사범과 함께 총살되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란 미군정이 정판사에서 발생한 조선은행권 원판 분실ㆍ매매사건을 수사하던 중 ‘위폐의 제조ㆍ유통’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중앙이 조직적으로 주도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량의 위조지폐가 발견되지 않았고 구속된 피의자들이 모두 경찰에 의해 이루어진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음을 폭로한 점, 그리고 공산당의 건물 입주 시기와 원판의 도난 시점이 일치하지 않는 점 등 사실상 미군정이 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해방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구속된 이관술과 달리, 박헌영은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서 활동을 지속하였다. 일제시대 박헌영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서 조선공산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1924~25년, 경성콤그룹에 참여한 1940~41년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제1차 공산당 사건 당시 꿋꿋한 기개를 잃지 않고 보여주었던 법정투쟁과 정신병으로 인한 가출옥 및 소련으로의 극적인 탈출은 당시 세간을 무척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코민테른으로부터 당 재건의 전권을 부여받은 극동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 위원으로서 그가 지닌 권위와 명성은 압도적이었다.
1933년 상해에서 체포된 이후 다행히 ‘사상범 예방구금령’이 선포되기 전인 1939년 형기만료로 석방된 박헌영은 이관술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마저 경찰의 검거로 인해 2년을 넘기지 못하고 1941년 이후 피신생활을 시작하여 해방될 무렵에는 이순금과 함께 광주의 벽돌공장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경성 주재 소련영사관과 비밀리에 접촉을 유지하면서 임박한 일제의 패망에 대비해 해방 직후에 인민민주주의적 정치노선에 입각한 ‘8월 테제’를 신속하에 제시할 수 있었다.
박헌영은 해방공간에서 조선공산당의 당수였다. 1946년 9월 총파업이 전개되고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이 본격화된 이후 극비리에 월북한 이후에는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준비하는 등 좌익세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박헌영에 대한 평가는 그가 북한에서 숙청된 이후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와 관련하여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그동안 박헌영에 대해 제기된 몇몇 의혹들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첫째, 공산당이 민족주의 세력을 적절히 포용하지 못한 채 고립을 자초하고 주도권을 잃었다는 주장은 순진한 발상이거나 고의적인 왜곡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공산당의 원칙주의가 아니라 “공산당을 벌레보다도 혐오한” 우익들의 “본능적인 증오”였다. 미국과 결탁한 이승만ㆍ한민당의 정치테러 앞에서 박헌영보다 유연한 태도로 좌우합작을 모색했던 여운형ㆍ조봉암ㆍ백남운 등 온건한 좌익세력 뿐 아니라, 송진우ㆍ김규식 등도 모조리 실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헌영 등은 타협이 불가능한 미군정 등에 대해 유일하게 정면으로 맞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른바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의 두목’으로서 박헌영 등에게 적용된 간첩혐의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김일성 지지세력에 의해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인 1953년 3월 신흥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정치적 균형을 조절하고 있었던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박헌영은 임화ㆍ이승엽ㆍ이강국 등 남로당계 인물들과 함께 체포되어 내무성 건물의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간첩과 공화국 전복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1955년 12월에야 정식재판이 열릴 때까지 2년여 동안의 조사를 거치고도 김일성 등은 혐의를 입증할만한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제출된 공소장조차 상호모순적인 진술로 채워진 ‘완전한 창작’일 뿐이었다. 공소장에 적시된 혐의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박헌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이래 미국인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친미의식을 주입받아 줄곧 미국의 첩자였던 동시에, 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는 조기에 석방되기 위해 일제에 협력하여 첩자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월북한 이후에는 집무실에 설치된 교신기를 통해 미국과 교신해왔던 것이 된다. 하지만 어떻게 교전 중인 미국과 일본의 첩자를 동시에 하고, 또한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로서 3중 첩자로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다른 전향자들이 돈과 직위를 보장받았던 데 비해 가장 거물급에 속하는 그가 20년 동안 일제의 첩자였으면서도 3차례에 걸쳐 10년이나 감옥생활을 했던 것이나, 일제가 마지막까지 사상범들에 대해 박헌영의 거처를 자백하도록 고문을 가했던 것, 남한정부와 미국이 한국전쟁의 발발 초기 속수무책으로 후퇴했던 정황 등은 ‘일제와 미제의 간첩’이라는 혐의와 도무지 부합하지 않는다. 게다가 박영빈ㆍ박창옥ㆍ박정애ㆍ박금철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선 4명을 북한 인민들이 러시아어로 ‘개(犬’)를 의미하는 ‘사박가(사바까)’로 부르며 빈정댔다는 것 등은 당시 북한 내부에서도 숙청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마오쩌둥이 ‘공화국의 애국자’인 박헌영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격분하면서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을 숙청하지 못했음을 후회했다는 증언이나, 소련과 중국이 계속해서 박헌영을 구명하기 노력했다는 점은 소련과 중국이 납득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북한이 제시하지 못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다만 스탈린 사후 최고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부상한 마오쩌뚱이 1956년 박헌영을 망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고무된 북한의 연안파들이 김일성 계열을 축출하기 위한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켰다는 설명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 등에 대한 숙청은 조작된 것으로서 북한의 내외부에서 공감대를 얻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사건의 예심을 주관한 내무성의 부상으로서 재판의 과정을 지켜보고 내막을 잘알고 있었던 강상호의 회상에 따르면, 법정에서 박헌영은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고 마지막에는 일제 말기부터 고락을 함께 했던 다른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데 대한 희생양이 절실했기에 박헌영의 요청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결국 ‘8월 종파사건’ 직후 수감 중인 박헌영은 김일성의 직접 지시에 의해 한밤중에 끌려나와 총살되었다. 그때는 이미 남한에서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이 처형된 이후였고, 북한에서 함께 기소된 이강국ㆍ이승엽 등에게도 형이 집행된 이후였다. 따라서 박헌영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이재유의 ‘경성 트로이카’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공산주의자들의 계보는 단절되었다.
안재성이 70~80년 전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생생하게 서술할 수 있었던 데는 누구보다 이효정 여사를 비롯하여 아직 생존해있던 당시 활동가들과의 우연한 만남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저자가 현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당시 북한과 남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양비론적 입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전혀 없다.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잡힐 듯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희비가 교차하는 다소 복잡한 여운을 남긴다.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시련을 안겨주는 작금의 정세 속에서 안재성의 책을 음미할 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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