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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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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정상회의에 우리 미래를 맡길 것인가?

구준모 | 정책위원
11월 12일 20개국 행정부 수반이 정상(summit)에 선다. 1년에 한두 번씩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셰르파의 도움을 얻었다. 스무 명은 해가 지기 전에 힘든 등정을 끝내고 맞잡은 손을 강조하며 성명을 발표할 것이다.
‘정상(회의)’이라는 용어는 윈스턴 처칠이 만들어낸 말이다. 냉전이 막을 열던 1950년 처칠은 소련에 “정상에서의 회담”을 제안했다. 어떤 계기로 처칠이 ‘정상’이라는 등산 용어를 외교에 적용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시대상을 반영한 점은 분명하다. 당시 그 용어는 영국 신문에 자주 등장했다. 1940년대 후반,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 등반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처칠이 평화의 의지를 다지는 최고위층 회담을 다시 호소하던 바로 그때, 세계 최고봉은 1953년 5월에 마침내 정복되었다.
정상회의는 20세기의 산물이다. 이전에도 정상회의가 없진 않았으나 안전과 체면의 문제 때문에 일반적으로 기피되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타국으로 장기간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그의 낮은 신분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회의 중간에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동반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정상회의는 빈번한 외교술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항공기 여행의 발달은 육로나 해로로 며칠씩 걸리던 여행길을 한나절 내외로 획기적으로 줄였다. 두세 명의 국가 원수들이 만나 며칠 동안 안건을 협상하는 형식의 전형적 정상회의는 1930년대 후반부터 활발하게 벌어졌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첫 시험비행에 성공한 지 30년이 지나자 항공기는 운송과 여행의 수단이 되었고 상업적인 항공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정치인으로서 최초로 항공기 여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국적인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1940년대에만 해도 여전히 전통적인 이동수단을 이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처칠은 1940년대 초반 미국을 방문할 때 두 번이나 배를 타고 갔으며,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1945년 처칠과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흑해연안의 얄타까지 가는 데 열하루가 걸렸다. 미국에서 지중해까지 열흘 동안 배를 타고 갔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정상회의가 빈번했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 때문이다. 열전과 냉전이 정상회의의 주 무대였다. 먼저 전쟁을 막기 위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전후 처리를 위해서 정상회의가 열렸다. 나치의 독일인 거주 체코슬로바키아 지역 병합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1938년 뮌헨회담,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과 파병 확대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1940년대 초반 처칠-루즈벨트 회담, 전후 처리문제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을 논의한 1945년 얄타회담이 각각을 대표한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과 소련 간의 정상회의가 이어졌다. 1961년 케네디와 후르시초프, 1972년 닉슨과 브레즈네프, 1985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정상회의는 냉전의 격화, 데탕트, 신데탕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대 정상회의의 계보를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G7이나 G20 정상회의에 적절한 자리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다. 두 회의는 20세기 정상회의의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일과 프랑스의 재무부장관이던 헬무트 슈미트와 지스카르 데스탱은 1974년에 각각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은 1년 전에 처음으로 열렸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재무부장관이 참가하는 G5 회의 경험을 정상회의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1970년대의 위기로 긴급한 경제 문제를 다룰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75년 이탈리아가 포함된 G6 정상회의가 시작되었고 곧이어 캐나다가 포함된 G7 정상회의로 확대되었다.
G7 정상회의는 기존의 정상회의와 다른 점이 많다. 먼저 두세 명이 모이는 소수의 회의가 아니라 일곱 명이라는 상대적으로 많은 인원이 모였다. 모임의 주기도 일 년으로 정례화되면서 긴급한 현안 논의보다는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협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정상회의의 초점이 정치ㆍ군사가 아니라 경제 문제에 맞춰졌다.
그런데 경제 문제는 어렵다. 정치인인 한 국가의 수장이 경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매년 열리는 회의를 준비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각국 지도자는 장관이나 보좌관을 자신의 개인 대리인(셰르파)으로 지정하여 회의 준비와 합의의 얼개를 짜는 일을 담당시켰다. 또한 1년에 네 차례 열리는 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 회의는 독자적인 리듬과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정상회의를 보조했다. 이렇게 되자 G7은 지도자들의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의 의미는 퇴색되고 의례화되고 제도화된 정상회의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공식적인 국제기구는 아니지만 제도화된 정상회의라는 G7의 독특한 지위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국제정치의 틈새를 파고드는 데 적격이었다. 초기에는 선진국 간의 환율조정이나 경제정책 공조 문제를 주로 논의했지만 점차 다룰 문제가 늘어났다. 1980년대가 되자 서유럽 미사일 배치와 같은 정치ㆍ군사 문제가 회의석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동구권의 붕괴 이후 이 지역 경제와 정치를 시장 자본주의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부수적’ 문제들, 외채탕감이나 빈곤퇴치를 다루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된 가장 중요한 일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공개되는 자료인 성명에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좋은 말이 넘쳐났다. G7 정상회의의 성명은 점차 길어졌지만 정상회의에 앞서 몇 달 동안 정성스럽게 준비된 이 문서는 실제 논의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예를 들어 1989년 파리 성명의 3분의 1은 환경문제로 채워져 있었지만 이것은 만찬 때 잠깐 이야기되었을 뿐이었다. 또한 말과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15년 동안의 G7 정상회의 성명에 대한 1992년의 연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각국 정부는 209건의 약속 가운데 3분의 1만을 이행했고, 특히 미국과 프랑스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
대신에 G7은 비공식적인 결정, 자신들의 네트워크와 담론을 통해서 실제 권력을 행사했다. 독자적인 집행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유연하게 활용해서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에 비공식적이지만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먼저 G7은 국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유엔과 국제금융기구를 활용했다. G7은 IMF와 세계은행을 사실상 지배했다. G7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총재는 IMF와 세계은행의 봄ㆍ가을 회의 직전에 회의를 열어 이 기관의 대출 절차와 정책에 대해 미리 토론하고 합의를 꾀했다. 그리고 연이어 열리는 IMF와 세계은행의 회의에서 G7은 보다 공식적인 절차와 기구를 통해서 주변국들을 설득하고 논의를 주도했다. 따라서 G7의 회의 결과에 따라 IMF와 세계은행 회의의 주요 의제가 정해지고, 이들이 인정하지 않는 의제는 공식적으로 상정되지 않았다. 즉 G7은 IMF와 세계은행의 의제를 설정하고 논의를 주도하고 거부권을 가짐으로써 국제금융기구의 활동에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했다.
또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진행되는 G7 정상회의는 국제 문제에 관한 담론을 주도하면서 세계경제, 비G7 정부, 국제기구, 초국적 정책기구, 국내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G7 정상회의가 문제를 제기하고 의제를 설정하고 네트워크를 창출하고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면 국내에서 정치적인 결정을 하기도 한층 쉬워진다. G7 정상회의의 성명(코뮈니케)은 비공식적이고 법적인 효력이 없는 순수한 도의적 합의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 내용 중에서 국내 정치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국제적인 합의’나 ‘글로벌스탠더드’의 이름으로 쉽게 강요할 수 있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국제 정치ㆍ경제 엘리트와 집권 세력의 필요에 따라 선택된 3분의 1 정도만을 그렇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G20 정상회의는 G7 정상회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심지어 2년간의 조정 끝에 20개국을 최종적으로 선정한 것도 G7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G20은 G7의 운영구조와 역할을 많이 계승하고 있다. G7의 주요 역할은 달러화 가치 조정과 신자유주의 확산이었다. 전자는 미국 경제를 보호하고 활성화시키는 일로 1985년의 플라자합의가 대표적인 사례다. 후자는 무엇보다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배후 개입이었다. 이러한 두 축은 G20에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행태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환율전쟁’이 한 사례다. 환율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의 저달러 정책에 있다. 실업률이 계속해서 10%를 위협하고 소비와 투자의 부진으로 내수회복이 지체되면서 미국 경제는 다시 한 번 침체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부동산과 금융 거품에 힘입어 지탱되던 고소비의 경제가 거품 붕괴 후에 지속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오바마 정부는 이전과는 달리 수출을 통해서 미국 경제의 활로를 개척하려고 분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저달러 기조를 유지하고 타국 환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개도국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미국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의 피해자가 범죄자로 몰리는 형국이다. 환율갈등은 이번에도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조정하는 문제, 즉 미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문제의 다른 이름인데도 말이다.
물론 1985년의 G7과 2010년의 G20은 다르다. 1985년의 일본과 독일처럼 미국을 위해 일방적인 양보를 감행할 수 있는 당사자가 없다. 미국이 중국을 강하게 압박할 경우 중국은 달러표시 자산을 매각해버릴 수 있지만, 이러한 선택은 서로 의존하고 있는 둘에게 모두 좋지 않다. 미국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글로벌 불균형 문제의 구조적인 해결이 없다면, 10월 경주 재무장관회의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환율문제는 계속 제기되고 때때로 갈등적인 방식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
IMF에 대한 개입은 G20이 더욱 노골적이다. 세부적인 금융규제의 방안 마련과 관리ㆍ감독 절차는 대부분 IMF와 FSB(금융안정위원회)에 위임되었다. IMF에 국제적인 금융 감독의 권한까지 부여해준 것이다. 각국의 환율과 무역수지 균형을 다루는 ‘지속가능한 균형성장 협력체계’는 향후 G20의 핵심 과제인데 이를 지원하고 감독하는 역할도 IMF에 맡겨졌다. 이렇게 IMF의 권한은 대폭 확장된 반면 IMF의 지배구조 개혁은 생색내기로 진행되고 있다. 개도국에게 IMF의 지분을 일부 이양한다고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IMF와 세계은행의 총재를 유럽과 미국이 나눠먹는 관례,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거부권, 고위관료들의 회전문 인사 관행, 지분에 따라 부여되는 투표권이 문제의 근본적인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IMF-미 재무부-월스트리트의 견고한 동맹은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적인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별로 없다. G20은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분주하다. 금융세계화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수준에서 금융규제 정책을 손질하고 있고, 각국 간의 정책조율 틀을 짜고 있다. 이 일에 개도국을 일부 포함시켜 적절한 관리와 포섭을 모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발전과 환경 같은 국제 이슈를 포함시키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G20 정상회의가 이렇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이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전권을 위임 받은 비상대권을 쥐고, 위기와 위기에 대한 대응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G20은 위기를 일으킨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위기 대응을 경영학으로 즉 관리의 기술로 다룬 것이다.

비상대권은 일상적 권력 밖에 있는 권력이다. 비상 상황 때문에 기존의 법과 절차를 뛰어넘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이다. 이러한 권한이 아래로부터 부여된다면 민중의 혁명일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지배자의 계엄령이 된다. 정상회의의 역사는 바로 지배자의 위치에서 비상대권을 부여받은 자들의 모임에 관한 기록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서 그들은 모였다. 그 자리에서 영토를 분할하고, 국경선을 긋고, 한 민족과 세계의 미래를 결정했다. 미국과 소련, 양극이 맞붙을 때도 정상회의는 필요했다. 당장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동적인 요소는 덜 했으나, 핵무기를 둘러싼 지루한 긴장감은 더 했기 때문이다.
반면 G7과 G20은 미국 헤게모니의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정상회의다. 잘못하면 목이 날아간다는 긴장보다는 합의의 꽃이 만발하는 축제 같은 분위기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권력의 문제, 정치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있다. 복잡한 경제 용어와 화려한 언론 보도 속에 숨어 있는 정상회의는 더 이상 정치적인 사건의 장소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정상회의에서 다루는 내용뿐만이 아니라, 정상회의라는 형식 자체도 비정치적인 문제로 숨어버린다. 그렇다면 개도국이 포함된 일은 좋은 것이다. 정치는 기껏해야 각국 간의 이해관계 차이로 드러날 뿐이다. 그 이해관계는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 위에 세워진 것이지만 더 이상 누구도 그 점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과거의 정상회의가 열강 지도자가 약소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 그러한 까닭에 제도정치의 의미에서든 대중운동의 의미에서든 정치적 쟁투의 핵심에 위치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경제 용어와 수치 속에 감추어진 정상회의는 월드컵과 같은 축제이고, 국가브랜드 향상을 통해 수십조 원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세일즈의 장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세상을 만들 권리가 민중이 아니라 지배자의 손에 있다고 선언될 때, 그들의 수중에 놓인 비상대권이 당연한 권력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의 미래를 둘러싼 정치는 정말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래를 원하지 않는 자라면 G20 정상회의에 부여된 권력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싸울 수밖에 없다.


11월 11-12일 서울에서 20개국 지도자가 모여 세계경제의 향방을 논의한다. G20이 그리는 미래는 “강하고 지속가능한 균형 성장”이라는 수려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자본주의 위기를 관리하고 노동자 민중을 공격하는 계급적 본질을 감출 수는 없다.
하지만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알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질문은 체제의 변혁을 꿈꾸는 민중운동의 주체적인 상태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노동자 민중 내부의 분할과 분열을 극복하고 정치적 운동으로서 스스로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사회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조금이나마 더 열심히 대답하고자 10월 21일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가 출범했다. 지난 호에 그 동안의 고민을 정리하여 실었고, 이번 호에는 연구소 출범기념 토론회를 정리하고 박하순 연구소장을 인터뷰했다. 연구소 출범을 기념하여 번역 출간한 『마르크스의 임금이론』은 책소개에 실었다.
집권 전반기에 타임오프제 시행과 민주노조 파괴 공격을 밀어붙였던 이명박 정부는 집권 하반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국가고용전략 2020을 내놓았다. 앞으로 진행할 노동유연화 공세를 종합한 이 보고서는 노동자운동에 대한 공격이 새로운 방향에서 한층 강화될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박준도 노동위원장의 글은 이명박 정부의 선전포고에 대한 긴급한 분석을 담았다. 경제위기 책임전가에 맞서 싸우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 돌봄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 모색에 관한 글에 현재 운동의 구체적인 과제를 담았다.
북한 당 대표자회의 후 지도체제의 변화와 북한 사회 전망에 대한 글, 한미동맹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글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최근 정세를 분석했다. 2010년 마지막 호는 다소 얇게 발행되지만 독자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의미는 가볍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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