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민영화와 금융화,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적 노령연금의 민영화바람
1970년대의 소위 복지국가 위기 이후, 의료보장, 노령연금 등 공공복지 제도들은 끊임없이 민영화의 압력에 직면해왔다. 그 중 전세계적으로 민영화로의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여온 것은 노령연금 제도이다. 1980년대에 피노체트의 칠레를 필두로 했던 중남미, 1990년대에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겪은 동유럽, 그리고 전통적인 복지국가인 영국, 호주 등 전세계에서 공적연금을 축소 혹은 폐지하는 연금 개혁의 열풍이 불었다. 뿐만 아니라 대공황시기에 도입된 연금체계를 수십년간 고수해 온 미국에서도 1996년, 사회보장자문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공적연금제도의 부분민영화안을 연금 개혁안의 하나로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 이어, 2000년 현재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부시 또한 공적연금을 부분적으로 민영화하는 연금개혁안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사회보장 제도 중, 노령연금 제도가 시장주의자들의 집중포화를 받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공적연금 개혁의 주원인으로 지목받는 것은 재정 문제이다. 공적연금 제도를 이대로 유지시킨다면 노인인구 증가에 따른 급여지출 증가와 젊은층의 납세거부 등으로 결국은 파산할 것이며, 최소한 노령연금의 일부를 민간기업이 운영하도록 해야 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민영화로 바뀌는 것은 부담비용이 아닌 부담메커니즘
하지만 과연 실제로 그러할까? 연금재정 문제에 대처하는 해결책은 민영화만 있는 게 아니다. 공적제도라는 틀을 유지한 채 부분적인 수정을 통해 대응하는 방식도 존재한다. 민영화라는 대응방식 또한 노인부양부담 증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한 사회가 노인들에게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근본적으로 재정부담 증가 문제는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비시장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든 민간금융기관에서 구매하는 체계가 되든, 연금제도가 어떤 방식이 되든지간에 이는 마찬가지이다. 노인인구 비중이 늘어난다면, 현재 한 사회의 총산출량에서 노인인구의 생활을 위해 들어가는 몫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민영화로 바뀌는 것은 부담비용이 아니라 부담의 메커니즘이다.
기존의 공적연금이 비용부담과 보장체계에 소득재분배적이고 사회적인 요소와 개인주의적인 요소를 적당히 혼합했다면, 민영화는 이 긴장을 깨뜨리고 노후소득보장을 철저하게 개인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연금재정 문제는 공적연금이냐 민영화냐의 선택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정도까지의 부담을 사회적으로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결국 공적연금 문제는 본질 자체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호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융세계화의 도구가 된 노령연금
연금 개혁의 방향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했다기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한 사회에서 지배력을 획득했는지, 또는 고소득층과 중간소득계층의 연대 혹은 그 반대의 연대 가능성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결국 연금재정 문제는 연금 개혁의 필요성을 부여할 뿐, 그것이 곧 논리적으로 민영화로의 개혁방향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은행(World Bank)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공적 연금 개혁 민영화의 구체적인 플랜을 주도면밀하게 제시해왔으며, 개별 국가의 연금제도 개편 과정에 개입하여 이행 비용까지 지원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은 지난 십여년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과 일본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왔는데, 이러한 태도를 견지해온 이유는 노령연금 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매력에서 찾을 수 있다. 노령연금 제도는 운영방식에 따라 엄청난 규모의 기금과 금융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산재보험이나 실업보험은 노동자들만을, 공공부조 제도는 빈곤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비해 노령연금 제도는 원칙적으로 전국민을 포괄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상 풀(pool)이 훨씬 크다. 물론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대부분 국가의 의료보장 제도도 마찬가지이지만, 의료보장은 주로 단기성으로 이루어져서 노령연금과 같이 장기간 조세 혹은 기여금을 내는 제도에 비해 기금 규모가 대체로 작아진다. 이는 기금형성 규모를 최소화하는 부과방식을 공적연금의 재정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 노령연급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연금 이외의 여타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재정투입이 적지 않은 서구 선진산업국들조차도 사회보장제도 중 급여지출이나 기금 면에서 운영규모가 가장 큰 것은 단연 노령연금이다.
게다가 노령연금은 흔히 개인저축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민영화 압력에 대한 취약해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 "산업재해, 질병 등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위험다운 '위험'이지만 '노령'은 얼마든지 예측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굳이 전사회적인 보장체계로 대응해야 할 '위험'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개인들의 근면성실한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자력으로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연금제도의 존재이유는 미래를 대비하기보다 현재의 소비를 선택하는 개개인들의 근시안적인 성향일 따름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저축의 강제화이며, 여기에서 소득재분배의 문제, 사회보장의 이념-모두에게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소득을 보장한다는-은 불필요해진다. 불안정 고용의 확산으로 인해 꾸준히 연금보험료를 적립할 수 있는 개인들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점, 빈부격차가 노후에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재생산될 것이라는 전망 등은 이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금융시장의 파이 확대와 이를 위해 연기금을 포함한 모든 자본이 자유롭게 해외이동하는 것이다.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한 국민연금 개혁안(?) 그러나
공적연금 민영화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우리나라 국민연금에 대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세계은행은 수년간의 면밀한 조사 끝에 올해 초 나름대로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한, 상당히 용의주도한 공적연금 개혁안을 내놓았다. 이는 현재로서는 논의의 전면으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계은행이 공적연금 제도 개혁을 위한 연구 및 정책개발에, 정부를 비롯한 다른 어떤 사회세력보다 꾸준하고도 많은 물적·인적 지원을 하는 상황에서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자유기업센터 등 일부 세력이 본격적으로 국민연금 민영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 전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지는 못하다. 이런 점에서 전면적인 민영화 주장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전면적으로 제기된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을 분리하자는 주장과 기금에 대한 규제완화 주장이다.
민영화로 가기 위한 디딤돌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을 분리하자는 주장은 얼핏 보면 공적연금 체계 내에서의 개편의 문제일 뿐 민영화와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개개인들이 낸 연금 보험료 실적에 철저하게 비례하여 급여를 지급하는 공적연금체계를 독립적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 경우 평등주의적 요소가 없는 소득비례 부분만큼은 공적연금 체계로 놔둘 이유가 별로 없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 기초연금만을 실시하다가 1970년대에 소득비례 연금을 따로 도입하여 분리운영해 왔다. 그런데 소득비례연금은 도입될 당시부터 기업연금으로 공적 소득비례연금 가입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부는 보험료 혜택까지 주어가면서 이를 권장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대처정부 하에서 공적연금을 대체할 수 있는 사연금의 범위는 급여를 확정하는 방식의 기업연금 뿐만 아니라 개인연금, 또 급여를 확정하지 않는 방식의 기업연금까지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연금에 대한 요건과 규제는 점점 완화되었다. 이는 공적연금 지출감소를 위한 대처 정부의 민영화 플랜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 흐름은 블레어 정부하에서도 마찬가지며 이들이 내놓은 그린페이퍼의 연금개혁안 또한 자기책임의 원칙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 결과 공적연금체계에는 가난한 자들만이 남게 되었고, 안정된 수입원을 갖는 고소득층은 기업연금에, 중산층은 개인연금에 가입하게 되는 소득계층별 연금의 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기초연금액의 실질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은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분리로 인해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즉, 중상계층에게는 이미 소득비례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커졌기 때문에 기초연금의 후퇴에는 저항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결국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의 분리 운영은 영국에서는 민영화로 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에 불과했다.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호주나 다른 몇몇 국가의 경우에 마찬가지이다. 공적 소득비례 연금이 전세계적으로 현재같은 변화를 겪고 있는 속에서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의 분리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또한 이러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국민연금의 공적성격의 거세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적어도 기금운용 면에서 살펴 보면 국민연금이 아무리 공적연금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우리나라 국민연금 기금운용 정책은 민간 보험과 다를 바 없는 영리추구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 맥락에서 정당화되고 있다, 하나는 연금재정 위기론의 맥락이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익률을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기금운용에 대한 정치적 개입 배제, 자율성 증대라는 맥락이다. 기금투자 방식이 공공기금 운영의 원칙인 공공성, 안전성보다는 사기금 투자원칙인 수익성을 강조하는 쪽을 지향하는 것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연금기금이라는 사회화된 기금이 서로 뺏고 뺏기는 게임장인 주식시장으로 유입되는 게 타당한가? 어느 일국의 국가 경제를 이윤이란 잣대 하나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외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그 성격에 걸맞는 것일까? 또한 사회화된 기금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메커니즘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민간 자율성을 운운하면서 민간을 시장과 등치시키는 것이 과연 정치논리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인지 의심스럽다.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실제로 연금재정의 안정화와 개인들에 대한 소득보장 정도를 높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개개인들의 중요한 노후 소득원 역할을 할 연금급여가 생계비나 물가, 여타 기준은 모두 무시된 채 민간금융기관들의 주식투자 실적에 따라 엄청난 폭으로 좌우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또한 개인연금의 강점으로 얘기되는, 개개인들이 자신의 소득과 상황에 맞추어 다양한 종류의 상품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볼 때 허구이다. 세일즈 직원들의 성과급은 계약 건수에 따른 것이지, 합리적인 계약 실적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 공적소득비례연금에서 개인연금으로 바꾼 사례의 약 30%는 잘못된 계약 사례로 판명되었다.
국민연금의 공적 성격을 되살리기 위해
2000년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제도는 민영화로 가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제도의 불안정성과 취약한 지지 기반을 갖고는 민영화로의 압박을 어느 정도 수준에서,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취약성은 우리 사회의 연대의식의 박약함을 드러내는 것이자 공적연금 제도가 갖는 원죄-사회보장 제도이면서도 결국에는 개인의 능력에 비례하는 보장체계라는 점과 공적기금이어도 결국은 자본주의 시장제도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인하는만큼 전망은 밝지 않다. 그러나 앞서 연금을 민영화시킨 사례들에서 보았던 교훈을 되새기자. 소득보장의 개별화로 인한 불평등의 증가와 노인층의 극단적인 빈곤, 그리고 연금 급여액의 불안정성의 증가라면 공적연금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과 동시에 연금민영화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막아야 한다.
1970년대의 소위 복지국가 위기 이후, 의료보장, 노령연금 등 공공복지 제도들은 끊임없이 민영화의 압력에 직면해왔다. 그 중 전세계적으로 민영화로의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여온 것은 노령연금 제도이다. 1980년대에 피노체트의 칠레를 필두로 했던 중남미, 1990년대에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겪은 동유럽, 그리고 전통적인 복지국가인 영국, 호주 등 전세계에서 공적연금을 축소 혹은 폐지하는 연금 개혁의 열풍이 불었다. 뿐만 아니라 대공황시기에 도입된 연금체계를 수십년간 고수해 온 미국에서도 1996년, 사회보장자문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공적연금제도의 부분민영화안을 연금 개혁안의 하나로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 이어, 2000년 현재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부시 또한 공적연금을 부분적으로 민영화하는 연금개혁안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사회보장 제도 중, 노령연금 제도가 시장주의자들의 집중포화를 받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공적연금 개혁의 주원인으로 지목받는 것은 재정 문제이다. 공적연금 제도를 이대로 유지시킨다면 노인인구 증가에 따른 급여지출 증가와 젊은층의 납세거부 등으로 결국은 파산할 것이며, 최소한 노령연금의 일부를 민간기업이 운영하도록 해야 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민영화로 바뀌는 것은 부담비용이 아닌 부담메커니즘
하지만 과연 실제로 그러할까? 연금재정 문제에 대처하는 해결책은 민영화만 있는 게 아니다. 공적제도라는 틀을 유지한 채 부분적인 수정을 통해 대응하는 방식도 존재한다. 민영화라는 대응방식 또한 노인부양부담 증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한 사회가 노인들에게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근본적으로 재정부담 증가 문제는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비시장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든 민간금융기관에서 구매하는 체계가 되든, 연금제도가 어떤 방식이 되든지간에 이는 마찬가지이다. 노인인구 비중이 늘어난다면, 현재 한 사회의 총산출량에서 노인인구의 생활을 위해 들어가는 몫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민영화로 바뀌는 것은 부담비용이 아니라 부담의 메커니즘이다.
기존의 공적연금이 비용부담과 보장체계에 소득재분배적이고 사회적인 요소와 개인주의적인 요소를 적당히 혼합했다면, 민영화는 이 긴장을 깨뜨리고 노후소득보장을 철저하게 개인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연금재정 문제는 공적연금이냐 민영화냐의 선택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정도까지의 부담을 사회적으로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결국 공적연금 문제는 본질 자체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호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융세계화의 도구가 된 노령연금
연금 개혁의 방향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했다기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한 사회에서 지배력을 획득했는지, 또는 고소득층과 중간소득계층의 연대 혹은 그 반대의 연대 가능성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결국 연금재정 문제는 연금 개혁의 필요성을 부여할 뿐, 그것이 곧 논리적으로 민영화로의 개혁방향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은행(World Bank)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공적 연금 개혁 민영화의 구체적인 플랜을 주도면밀하게 제시해왔으며, 개별 국가의 연금제도 개편 과정에 개입하여 이행 비용까지 지원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은 지난 십여년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과 일본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왔는데, 이러한 태도를 견지해온 이유는 노령연금 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매력에서 찾을 수 있다. 노령연금 제도는 운영방식에 따라 엄청난 규모의 기금과 금융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산재보험이나 실업보험은 노동자들만을, 공공부조 제도는 빈곤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비해 노령연금 제도는 원칙적으로 전국민을 포괄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상 풀(pool)이 훨씬 크다. 물론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대부분 국가의 의료보장 제도도 마찬가지이지만, 의료보장은 주로 단기성으로 이루어져서 노령연금과 같이 장기간 조세 혹은 기여금을 내는 제도에 비해 기금 규모가 대체로 작아진다. 이는 기금형성 규모를 최소화하는 부과방식을 공적연금의 재정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 노령연급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연금 이외의 여타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재정투입이 적지 않은 서구 선진산업국들조차도 사회보장제도 중 급여지출이나 기금 면에서 운영규모가 가장 큰 것은 단연 노령연금이다.
게다가 노령연금은 흔히 개인저축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민영화 압력에 대한 취약해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 "산업재해, 질병 등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위험다운 '위험'이지만 '노령'은 얼마든지 예측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굳이 전사회적인 보장체계로 대응해야 할 '위험'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개인들의 근면성실한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자력으로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연금제도의 존재이유는 미래를 대비하기보다 현재의 소비를 선택하는 개개인들의 근시안적인 성향일 따름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저축의 강제화이며, 여기에서 소득재분배의 문제, 사회보장의 이념-모두에게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소득을 보장한다는-은 불필요해진다. 불안정 고용의 확산으로 인해 꾸준히 연금보험료를 적립할 수 있는 개인들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점, 빈부격차가 노후에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재생산될 것이라는 전망 등은 이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금융시장의 파이 확대와 이를 위해 연기금을 포함한 모든 자본이 자유롭게 해외이동하는 것이다.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한 국민연금 개혁안(?) 그러나
공적연금 민영화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우리나라 국민연금에 대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세계은행은 수년간의 면밀한 조사 끝에 올해 초 나름대로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한, 상당히 용의주도한 공적연금 개혁안을 내놓았다. 이는 현재로서는 논의의 전면으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계은행이 공적연금 제도 개혁을 위한 연구 및 정책개발에, 정부를 비롯한 다른 어떤 사회세력보다 꾸준하고도 많은 물적·인적 지원을 하는 상황에서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자유기업센터 등 일부 세력이 본격적으로 국민연금 민영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 전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지는 못하다. 이런 점에서 전면적인 민영화 주장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전면적으로 제기된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을 분리하자는 주장과 기금에 대한 규제완화 주장이다.
민영화로 가기 위한 디딤돌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을 분리하자는 주장은 얼핏 보면 공적연금 체계 내에서의 개편의 문제일 뿐 민영화와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개개인들이 낸 연금 보험료 실적에 철저하게 비례하여 급여를 지급하는 공적연금체계를 독립적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 경우 평등주의적 요소가 없는 소득비례 부분만큼은 공적연금 체계로 놔둘 이유가 별로 없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 기초연금만을 실시하다가 1970년대에 소득비례 연금을 따로 도입하여 분리운영해 왔다. 그런데 소득비례연금은 도입될 당시부터 기업연금으로 공적 소득비례연금 가입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부는 보험료 혜택까지 주어가면서 이를 권장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대처정부 하에서 공적연금을 대체할 수 있는 사연금의 범위는 급여를 확정하는 방식의 기업연금 뿐만 아니라 개인연금, 또 급여를 확정하지 않는 방식의 기업연금까지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연금에 대한 요건과 규제는 점점 완화되었다. 이는 공적연금 지출감소를 위한 대처 정부의 민영화 플랜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 흐름은 블레어 정부하에서도 마찬가지며 이들이 내놓은 그린페이퍼의 연금개혁안 또한 자기책임의 원칙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 결과 공적연금체계에는 가난한 자들만이 남게 되었고, 안정된 수입원을 갖는 고소득층은 기업연금에, 중산층은 개인연금에 가입하게 되는 소득계층별 연금의 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 기초연금액의 실질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은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분리로 인해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즉, 중상계층에게는 이미 소득비례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커졌기 때문에 기초연금의 후퇴에는 저항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결국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의 분리 운영은 영국에서는 민영화로 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에 불과했다.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호주나 다른 몇몇 국가의 경우에 마찬가지이다. 공적 소득비례 연금이 전세계적으로 현재같은 변화를 겪고 있는 속에서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의 분리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또한 이러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국민연금의 공적성격의 거세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적어도 기금운용 면에서 살펴 보면 국민연금이 아무리 공적연금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우리나라 국민연금 기금운용 정책은 민간 보험과 다를 바 없는 영리추구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 맥락에서 정당화되고 있다, 하나는 연금재정 위기론의 맥락이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익률을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기금운용에 대한 정치적 개입 배제, 자율성 증대라는 맥락이다. 기금투자 방식이 공공기금 운영의 원칙인 공공성, 안전성보다는 사기금 투자원칙인 수익성을 강조하는 쪽을 지향하는 것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연금기금이라는 사회화된 기금이 서로 뺏고 뺏기는 게임장인 주식시장으로 유입되는 게 타당한가? 어느 일국의 국가 경제를 이윤이란 잣대 하나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외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그 성격에 걸맞는 것일까? 또한 사회화된 기금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메커니즘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민간 자율성을 운운하면서 민간을 시장과 등치시키는 것이 과연 정치논리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인지 의심스럽다.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실제로 연금재정의 안정화와 개인들에 대한 소득보장 정도를 높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개개인들의 중요한 노후 소득원 역할을 할 연금급여가 생계비나 물가, 여타 기준은 모두 무시된 채 민간금융기관들의 주식투자 실적에 따라 엄청난 폭으로 좌우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또한 개인연금의 강점으로 얘기되는, 개개인들이 자신의 소득과 상황에 맞추어 다양한 종류의 상품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볼 때 허구이다. 세일즈 직원들의 성과급은 계약 건수에 따른 것이지, 합리적인 계약 실적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 공적소득비례연금에서 개인연금으로 바꾼 사례의 약 30%는 잘못된 계약 사례로 판명되었다.
국민연금의 공적 성격을 되살리기 위해
2000년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제도는 민영화로 가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제도의 불안정성과 취약한 지지 기반을 갖고는 민영화로의 압박을 어느 정도 수준에서,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취약성은 우리 사회의 연대의식의 박약함을 드러내는 것이자 공적연금 제도가 갖는 원죄-사회보장 제도이면서도 결국에는 개인의 능력에 비례하는 보장체계라는 점과 공적기금이어도 결국은 자본주의 시장제도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인하는만큼 전망은 밝지 않다. 그러나 앞서 연금을 민영화시킨 사례들에서 보았던 교훈을 되새기자. 소득보장의 개별화로 인한 불평등의 증가와 노인층의 극단적인 빈곤, 그리고 연금 급여액의 불안정성의 증가라면 공적연금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과 동시에 연금민영화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