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 아이켄그린, 『달러 제국의 몰락』
달러는 대부분의 국제 거래에서 사용되며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누린다. 한국에서 수출입과 외환거래를 할 때 가장 눈여겨봐야 하는 수치는 원/달러 환율이다. 소말리아 해적들도 납치한 선원을 넘겨주는 대가로 달러가 든 자루를 낙하산으로 떨어뜨릴 것을 요구한다.
미국을 거치지 않는 국제거래에서도 달러가 가장 중요한 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은 대미 수출비중이 20%에 불과한데도 80%가 넘는 국제거래에서 달러로 가격을 표시한다. 세계적으로 달러를 이용하는 외환거래의 비중은 85%에 달한다. 또한 달러 표시 채권은 국제 채권시장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각국 중앙은행들은 외환보유고의 60% 이상을 달러표시 채권으로 쌓아두고 있다.
그러나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침체로 인해,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에 대한 의구심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 금융시장의 기능장애와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인플레이션은 해외투자자들로 하여금 달러에 대한 신뢰를 악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서유럽과 독일경제의 재건, 그리고 신흥국의 약진은 달러에 대한 우려를 더욱 심화시킨다. 더 이상 세계 총생산의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미국의 통화를 국제거래에 사용해야하는 이유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와 더불어 새로운 기축통화에 대한 논의와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위안화, 유로화, IMF 특별인출권(SDR)이 달러를 대체할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배리 아이켄그린의 『달러 제국의 몰락』(북하이브, 2011)은 이와 같은 현재의 논의 맥락에서, 미국이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인 달러로 인해 누려온 ‘과도한 특권’을 잃을 운명에 처해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과는 달리, 그는 “이러한 변화가 달러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Exorbitant privilege』로, 미국이 그 동안 누려온 ‘과도한 특권’을 잃을 수 있지만 달러는 쉽게 몰락하지 않을 것이며, 달러와 함께 복수의 통화가 국제통화로 사용되는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본 글에서는 『달러 제국의 몰락』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후, 마지막에 이를 평가하고자 한다.
과도한 특권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 덕분에 미국은 상당한 혜택을 누린다. 예를 들어 독일 기업은 중국에 기계를 수출하고 대금을 달러로 받아서 다시 유로로 바꾸어야 한다. 반면 미국 기업은 따로 환전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스위스 은행은 프랑으로 받은 예금을 해외고객에게 빌려줄 때 달러로 주어야 한다. 그 결과 환율변동에 따른 손실위험이 존재한다. 물론 선물계약으로 이러한 위험을 회피할 수 있으나, 이 경우에도 추가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혜택은 달러의 ‘발권이익’(seigniorage)이다. 현재 약 5,000억 달러가 미국 외 지역에서 유통되고 있는데, 이 돈을 얻기 위해 각국은 5,000억 달러에 해당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반면,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는 지폐생산비용만을 부담한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해외 기업과 은행들이 거래의 편의성과 이자소득의 매력 때문에 미국의 채권을 보유한다는 점이다. 해외중앙은행들은 거의 5조 달러에 달하는 미 재무부 및 준정부기관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 엄청난 혜택을 안겨준다. 미국이 해외부채에 지급하는 이자는 미국의 해외투자 수익률보다 2~3% 낮고, 미국은 그 차이만큼 국제수지 적자를 감당할 수 있다. 이러한 국제금융체제는 다른 국가들이 “미국인들의 높은 생활수준을 부양하고 미국의 다국적기업을 지원”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에 대한 불만은 2007-2009년 금융위기를 통과하면서 폭넓게 일어났다. 신흥국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들이 제공한 저렴한 자금이 미국인의 “방탕한 소비”와 “잘못된 (금융)관행” 즉, 무리한 영업관행과 느슨한 규제를 뒷받침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위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도 미국의 특권은 더욱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2007년 전반적인 달러 약세에 따라, 미국의 해외투자는 그 가치가 더욱 늘어난 반면 미국의 부채는 달러로 표시되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의 변동이 없었다. 2008년 이후 현재까지도 미국의 국채는 여전히 안전자산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미국은 저금리로 거액을 빌려올 수 있다.
달러의 현직 프리미엄과 취약한 대안들
결국 2007-2009년 금융위기는 달러와 미국 금융시장이 안정적 금융거래를 확보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계기였고, 이에 따라 미국이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확산되었다. 2007년 OPEC 국가들은 유가를 달러로 표시할지의 여부를 두고 설전을 벌인 바 있고, 2009년 걸프국가들이 중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와 공모하여 달러를 버리려 한다는 보도가 흘러나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달러의 국제적 역할은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다. 아이켄그린은 달러의 국제적 역할이 급격하게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 “모든 소동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고 평가한다. 달러는 여전히 건재한 반면, 그 대안은 취약하기 때문이다.
1) 달러의 현직 프리미엄
미국은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이고, 세계최대의 금융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여전히 수출기업들은 안정적 거래를 위해 가격 변동을 최소화하려 하며 이에 따라 달러를 선호한다. 외환시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2010년도 국제결제은행 조사에 따르면 85%의 외환거래에 달러가 사용되고 있다. OPEC도 여전히 달러로 유가를 표시한다.
각국 중앙은행 입장에서도 여전히 달러를 기준으로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환율기준으로 삼는 통화를 보유해야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외환보유고를 운용하는 목적은 해외부채와 교역 흐름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역에 사용하는 통화를 보유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IMF에 따르면 2010년 1분기 기준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61%로 2002-2003년 66%에서 소폭 하락했을 뿐이다.
사실 위기 이후에도 각국 중앙은행들은 미 국채 매입을 더욱 늘려왔다. 미 국채시장이 회전율이나 거래비용 측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가졌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미 국채시장은 세계에서 유동성이 가장 풍부한 금융시장이다. “기존 구도는 자기강화적 속성을 띠고 있다. 미 국채시장은 유동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해외투자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새롭게 유입된 해외투자자들은 미 국채시장의 유동성을 늘려준다.”
2) ‘나라없는 통화’ 유로
유로는 최근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우선, 유로존의 수출규모는 미국의 두 배에 달한다. 특히 독일은 신흥국에 자본재를 수출하는 주요 국가다. 유로존 기업들은 동유럽에 생산거점을 마련하고 있으며, 은행들도 동유럽에 지점망을 확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접지역에서도 유로를 교역에 활용하는 일이 늘어난다.
다음으로, 유럽중앙은행(ECB)는 물가안정에 만전을 기하는 통화정책을 고수하며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한다. 동시에 ECB는 유로존에서의 최종대부자로서의 책임을 진다. 특히 ECB는 2008년 위기 상황에서 유로존 밖에 있는 유럽국가들에 비상 유동성을 제공하는 역량이 그들 국가의 중앙은행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 유로는 투자자들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찾는 통화로 떠올랐다. 유로는 달러에 비해 한참 뒤쳐지기는 하지만 국제통화를 향한 모든 경쟁부문에서 2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유로는 아직까지 달러와 어깨를 견주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유럽 채권시장은 미국보다 규모가 작고 유동성도 부족하다. 독일 국채는 안전하지만 유통량이 미국의 1/4에 불과하고, 다른 나라들의 국채는 유통량은 많지만 안전성이 떨어진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유로가 '나라 없는 통화'”라는 점이다. 유로존에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도울 능력과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할 권한을 가진 기구가 없다. 무용지물이 된 ‘안정 및 성장에 관한 협약’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유로존 국가들의 강한 결속, 그리고 유로 채권시장의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유로가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누리기는 쉽지 않다. 아이켄그린은 이 외에도 유로존이 △회원국 경제규모 확대 △남유럽 국가의 재정건전성 확보 △노동시장 유연화 △저출산 고령화 문제해결 같은 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보완적 역할에 불과한 특별인출권(SDR)
1970년부터 도입된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 제도에 따라 가맹국은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을 때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무담보로 외화를 인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특별인출권 사용이 국제거래에서 보편화된다면, 달러의 과도한 특권을 제한할 수 있고 국제수지관리에 따르는 위험도 낮출 수 있다. 2009년 3월 저우 사요찬 중국인민은행 총재는 국제보유통화를 IMF의 특별인출권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올 11월로 예정되어있는 G20 칸 정상회담에서는 특별인출권 바스켓에 위안을 포함시키는 제안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거대한 달러보유고로 인한 딜레마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이 가진 2.5조 달러의 외환보유고 중 65%가 달러 자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이 달러를 대량 매도하면 달러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달러 자산을 보유한 중국인민은행의 회계 상 손실을 의미한다. 또한 달러가 절하되면 중국 수출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중국이 외환보유고를 다변화하고자 하는 우회로로서 특별인출권이 고려된다. 통화바스켓으로 구성되는 “특별인출권을 축적하면 달러의 비중을 완만하게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인출권은 국제통화로 자리매김하기에는 그 활용도가 매우 부족하다. 특별인출권의 활용도는 정부와 IMF 사이의 부채를 결제하는 데에 그친다. 특별인출권을 거래하는 민간시장도 없고, 교역 시 청구와 결제에도 활용할 수 없으며, 특별인출권을 다시 달러나 유로로 바꾸는 데에는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대체계정 도입으로 인해 달러가치가 하락할 경우 그 손실을 누가 감수할지에 대한 회원국 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체계정은 좌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특별인출권은 기껏해야 기존 보유고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각국 중앙은행이 특별인출권을 통해 달러 비중을 완만하게 줄이는 것은 미국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을 일부 제한하는 방법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들은 유동성이 부족하고 시장 개입에 활용할 수 없는 특별인출권을 보유고의 일부로만 유지할 것이다.” 특별인출권은 기존 기축통화의 기능을 대체할 수 없다.
4) 국제통화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위안
중국이 가장 선호하는 대안은 위안을 국제통화로 만드는 방안일 것이다. 2008년 중국은행감독위원회 상하이지부 부지부장인 장광핑은 2020년까지 위안이 국제통화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안의 비태환성은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다. 외국인들은 중국에서 상품을 구입할 때만 위안을 쓸 수 있다. 중국은 몽고,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북한 같은 인접국 그리고 홍콩, 마카오 같은 특별행정구역과 교역을 할 때만 위안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기업들의 경우에도, 상하이와 광둥에 있는 기업들에게만 위안 시범결제 프로그램이 적용되어 있다. 이런 조치는 자본규제를 우회하기 위해 수출입액을 조작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자본흐름의 변동성으로부터 중국경제를 보호해준다. 또한 정부가 원하는 대로 금융시장을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위안화의 국제적 역할을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위안은 국제통화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로서 위안의 위상을 높이려면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자유화를 조화시키기는 과정은 매우 까다로우며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는 “은행대출과 고정환율제에 기반을 둔 성장정책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0년까지 상하이를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검증된 성장모델을 폐기하고 해외투자자들의 접근을 자유화하여 깊고 유동적인 시장을 구축해야한다.
그러나 아이켄그린은 2020년까지 위안이 국제통화로 잡리잡을 것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중국 경제가 향후 10년간 연7%씩 성장한다고 해도 그 GDP가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안은 2020년대에도 달러보다 작은 도약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위안 표시 채권시장의 유동성도 달러 표시 채권시장에 견줄 바 아니다. 그만큼 위안의 국제보유고비중은 제한될 것이다.” 그는 위안이 중국과 교역량이 많은 국가들에게 주로 활용되면서, 유로 보유고가 인접 국가들에 집중되듯, 위안 보유고는 아시아 지역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5)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전망
이상의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아이켄그린은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이행을 전망한다. 서유럽과 독일경제의 재건, 그리고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의 약진으로 미국의 경제 지배력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달러 현직프리미엄의 감소, 유로와 위안의 역할 확대로 인해 이 세 통화가 국제통화가 되지만 어느 하나 시장을 완전하게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세계경제가 다극화되면 통화체제도 다극화되는 것이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달러 폭락 가능성
그렇다면,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전망이라는 연착륙 전망과는 달리, 달러 폭락이라는 경착륙 가능성은 없는가? 아이켄그린은 달러 투매를 촉발할 잠재적 계기들이 있으나 그것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전망한다.
달러 투매를 촉발할 수 있는 잠재적 계기 중 하나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다. 미중 간의 무역불균형과 환율갈등이 심화될 가능성, 북한이나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과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 가능성 등 미중 간에 정치적 갈등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 상황을 파운드의 몰락 및 달러의 부상과 유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이 보유한 미국 채권과 대미수출을 고려할 때 중국이 달러의 가치를 무너뜨리면 자신도 치명적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협력하지 않으면 세계 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 더 어려워진다.” 그런 점에서 두 나라의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경제적 무기를 쓰는 일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계기는 시장심리가 급변하는 것이다. 전반적인 달러 약세 추세가 이어질 경우, 스마트머니를 시작으로 달러자산을 보유한 투자자들이 갑작스럽게 달러를 매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연준의 개입능력, 그리고 “달러주도의 국제금융체제를 안정시키는 일에는 모든 나라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패닉이 발생하면 연준은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달러를 부양할 것이고, “투자자들이 이성을 되찾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또한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들 그리고 손해를 회피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의 “이해관계가 파국을 막을 것이다.”
세 번째, 가장 현실성있는 계기는 미국의 재정정책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미국의 재정상황은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금융위기 이전 이미 사정이 심하게 악화되었다. 다음으로, 금융위기로 인해 엄청난 재정적자가 발생했다. 마지막으로,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은퇴하는 2015년 무렵이 되면 의료보장비용과 연금 때문에 재정적자가 더 늘어날 것이다.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의 성장 잠재력이 근본적으로 훼손되었다면 부채비율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1%p 감소하면 부채비율이 2011년에는 5%p, 2015년에는 10%p 더 늘어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투자자들이 미국의 재정적자가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재정위기는 달러 투매로 갑작스럽게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대안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요소는 [미국] 경제와 재정의 기초체력이다.”(결코, 그 역이 아니다.) 따라서 한편으로 수출경쟁력을 강화하여 경상적자를 감축해야하고, 다른 한편으로 긴축을 통해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수출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있어 생산성을 높이기는 쉽지 않으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인재, 유연한 노동시장, 수익성 있는 농업과 광활한 농지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량, 도로 등 새 인프라를 구축하고, 교육에 대한 투자가 성과를 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생산성을 기적적으로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비용절감뿐이다.”
아이켄그린은 우선,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독일의 임금인상 억제정책을 참고사례로 제시한다. 독일은 임금인상 억제에 대한 노조와의 합의를 바탕으로 2003년에서 2010년 사이 두 자릿수로 수출을 늘릴 수 있었다. 다음으로, 미국은 달러 절하를 인정하고 수입품 가격 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단, 달러가 30% 절하된다고 해도 미국의 미숙련 노동자들이 중국의 미숙련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금융상품 발행, 설계 용역, 경영 컨설팅, 소프트웨어 지원 같은 서비스업이 수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수출과 관계되는 농업 부문 역시 자본집약적 성격을 띠며 많은 고용을 창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생활수준의 정체, 소득격차라는 대가를 감내해야 하며, “세금이나 교육 및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 등 다른 수단을 활용”하여 소득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증세와 재정지출 삭감을 동시에 시행”해야 하지만, 이러한 방안이 의회를 통해 추진되기란 쉽지 않다. 공화당은 새로운 세금에 무조건 반대할 것이고, 대통령은 중산층에 대한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공약했으며, 은퇴자협회는 복지연금비용과 의료보장비용 축소에 맞서 강력한 로비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의회와 국민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평가: 달러 연착륙과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이행이라는 전망의 비현실성
미국은 동아시아로부터의 수출달러환류를 통해 이중적자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거대 적자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흑자국이, 각각 자금 이전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득과 실물경제의 또 다른 이득을 향유하는 독특한 구조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제통화의 요건으로서 유동성과 신뢰성이라는 두 요소가 모순된다는 트리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브레튼우즈 체제가 현재까지 작동하는 이유이다. 이처럼 이중적자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미국의 ‘과도한 특권’, 즉 달러의 발권이익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적자로 표현되는 미국의 부채경제가 무한정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달러의 지위 역시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경기부양을 위한 팽창정책과 이중적자 감축을 위한 긴축정책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미국은 무역수지 개선을 그 해결책으로 사고해왔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환태평양경제파트너쉽(TPP)를 통해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구체화는 것은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문제다. 아이켄그린이 제시하는 미국의 대안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달러가치 하락을 통해 대중국 부채를 탕감하는 효과를 누리는 한편, 주로 서비스업에서 무역수지를 대폭 개선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실업을 타국에 수출하고 자국 민중들에게 저임금, 노동유연화, 복지축소를 강제하는 것이 바로 아이켄그린의 대안이다.
하지만 아이켄그린 식으로 표현하면 ‘미국 경제와 재정의 기초체력의 저하’를 반전시킬만한 요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선, 미국의 경기회복세가 둔화되어 있고 특히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이 매우 불안정하고 악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장기화될 위험이 높다. 다음으로,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미국의 경기부양 수단의 제약이 커지고 있다. 국가신용등급 하락 이후 재정지출 삭감이 계획되었고, 재정위기로 인한 미 국채금리 인상 압력으로 인해 연준의 통화정책 역시 그 효과가 약화될 수 있다. 결국 위기를 타국과 자국 민중들에게 전가하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일정기간 가능할 지 몰라도, 미국의 경제성장을 통해 이중적자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이중적자를 점진적으로 해소해나가면서 달러의 지위도 점진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아이켄그린의 전망은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게다가 미국 경제 및 달러의 연착륙뿐만 아니라, 유로존 국가들의 강한 결속 및 위기극복, 중국 외환보유고의 점진적 다변화 및 중국경제의 체질개선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 이행할 것이라는 아이켄그린의 전망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유로존은 ‘재정동맹 없는 화폐통맹’이라는 모순을 해결할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이중적자 메커니즘의 일부를 이루면서 달러 본위 체제의 모순을 공유한다.
달러의 신뢰성 위기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달러의 신뢰성 위기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안전자산 선호로 이어져, 달러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이중적자가 심화되고 그에 따라 추세적으로 달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지금 국면은 달러 본위 체제의 모순이 응축되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달러의 신뢰성 위기를 매개로 해서 국제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될 위험이 있다. 게다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가 은행위기로 심화되고, 이를 매개로 미국 금융기관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2007-2009년과는 또 다른 형태의 금융위기가 전개될 가능성이 잠재해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을 거치지 않는 국제거래에서도 달러가 가장 중요한 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은 대미 수출비중이 20%에 불과한데도 80%가 넘는 국제거래에서 달러로 가격을 표시한다. 세계적으로 달러를 이용하는 외환거래의 비중은 85%에 달한다. 또한 달러 표시 채권은 국제 채권시장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각국 중앙은행들은 외환보유고의 60% 이상을 달러표시 채권으로 쌓아두고 있다.
그러나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침체로 인해,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에 대한 의구심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 금융시장의 기능장애와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인플레이션은 해외투자자들로 하여금 달러에 대한 신뢰를 악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서유럽과 독일경제의 재건, 그리고 신흥국의 약진은 달러에 대한 우려를 더욱 심화시킨다. 더 이상 세계 총생산의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미국의 통화를 국제거래에 사용해야하는 이유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와 더불어 새로운 기축통화에 대한 논의와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위안화, 유로화, IMF 특별인출권(SDR)이 달러를 대체할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배리 아이켄그린의 『달러 제국의 몰락』(북하이브, 2011)은 이와 같은 현재의 논의 맥락에서, 미국이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인 달러로 인해 누려온 ‘과도한 특권’을 잃을 운명에 처해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과는 달리, 그는 “이러한 변화가 달러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Exorbitant privilege』로, 미국이 그 동안 누려온 ‘과도한 특권’을 잃을 수 있지만 달러는 쉽게 몰락하지 않을 것이며, 달러와 함께 복수의 통화가 국제통화로 사용되는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본 글에서는 『달러 제국의 몰락』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후, 마지막에 이를 평가하고자 한다.
과도한 특권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 덕분에 미국은 상당한 혜택을 누린다. 예를 들어 독일 기업은 중국에 기계를 수출하고 대금을 달러로 받아서 다시 유로로 바꾸어야 한다. 반면 미국 기업은 따로 환전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스위스 은행은 프랑으로 받은 예금을 해외고객에게 빌려줄 때 달러로 주어야 한다. 그 결과 환율변동에 따른 손실위험이 존재한다. 물론 선물계약으로 이러한 위험을 회피할 수 있으나, 이 경우에도 추가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혜택은 달러의 ‘발권이익’(seigniorage)이다. 현재 약 5,000억 달러가 미국 외 지역에서 유통되고 있는데, 이 돈을 얻기 위해 각국은 5,000억 달러에 해당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반면,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는 지폐생산비용만을 부담한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해외 기업과 은행들이 거래의 편의성과 이자소득의 매력 때문에 미국의 채권을 보유한다는 점이다. 해외중앙은행들은 거의 5조 달러에 달하는 미 재무부 및 준정부기관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 엄청난 혜택을 안겨준다. 미국이 해외부채에 지급하는 이자는 미국의 해외투자 수익률보다 2~3% 낮고, 미국은 그 차이만큼 국제수지 적자를 감당할 수 있다. 이러한 국제금융체제는 다른 국가들이 “미국인들의 높은 생활수준을 부양하고 미국의 다국적기업을 지원”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국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에 대한 불만은 2007-2009년 금융위기를 통과하면서 폭넓게 일어났다. 신흥국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들이 제공한 저렴한 자금이 미국인의 “방탕한 소비”와 “잘못된 (금융)관행” 즉, 무리한 영업관행과 느슨한 규제를 뒷받침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위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도 미국의 특권은 더욱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2007년 전반적인 달러 약세에 따라, 미국의 해외투자는 그 가치가 더욱 늘어난 반면 미국의 부채는 달러로 표시되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의 변동이 없었다. 2008년 이후 현재까지도 미국의 국채는 여전히 안전자산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미국은 저금리로 거액을 빌려올 수 있다.
달러의 현직 프리미엄과 취약한 대안들
결국 2007-2009년 금융위기는 달러와 미국 금융시장이 안정적 금융거래를 확보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계기였고, 이에 따라 미국이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확산되었다. 2007년 OPEC 국가들은 유가를 달러로 표시할지의 여부를 두고 설전을 벌인 바 있고, 2009년 걸프국가들이 중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와 공모하여 달러를 버리려 한다는 보도가 흘러나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달러의 국제적 역할은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다. 아이켄그린은 달러의 국제적 역할이 급격하게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 “모든 소동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고 평가한다. 달러는 여전히 건재한 반면, 그 대안은 취약하기 때문이다.
1) 달러의 현직 프리미엄
미국은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이고, 세계최대의 금융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여전히 수출기업들은 안정적 거래를 위해 가격 변동을 최소화하려 하며 이에 따라 달러를 선호한다. 외환시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2010년도 국제결제은행 조사에 따르면 85%의 외환거래에 달러가 사용되고 있다. OPEC도 여전히 달러로 유가를 표시한다.
각국 중앙은행 입장에서도 여전히 달러를 기준으로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환율기준으로 삼는 통화를 보유해야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외환보유고를 운용하는 목적은 해외부채와 교역 흐름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역에 사용하는 통화를 보유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IMF에 따르면 2010년 1분기 기준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61%로 2002-2003년 66%에서 소폭 하락했을 뿐이다.
사실 위기 이후에도 각국 중앙은행들은 미 국채 매입을 더욱 늘려왔다. 미 국채시장이 회전율이나 거래비용 측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가졌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미 국채시장은 세계에서 유동성이 가장 풍부한 금융시장이다. “기존 구도는 자기강화적 속성을 띠고 있다. 미 국채시장은 유동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해외투자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새롭게 유입된 해외투자자들은 미 국채시장의 유동성을 늘려준다.”
2) ‘나라없는 통화’ 유로
유로는 최근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우선, 유로존의 수출규모는 미국의 두 배에 달한다. 특히 독일은 신흥국에 자본재를 수출하는 주요 국가다. 유로존 기업들은 동유럽에 생산거점을 마련하고 있으며, 은행들도 동유럽에 지점망을 확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접지역에서도 유로를 교역에 활용하는 일이 늘어난다.
다음으로, 유럽중앙은행(ECB)는 물가안정에 만전을 기하는 통화정책을 고수하며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한다. 동시에 ECB는 유로존에서의 최종대부자로서의 책임을 진다. 특히 ECB는 2008년 위기 상황에서 유로존 밖에 있는 유럽국가들에 비상 유동성을 제공하는 역량이 그들 국가의 중앙은행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 유로는 투자자들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찾는 통화로 떠올랐다. 유로는 달러에 비해 한참 뒤쳐지기는 하지만 국제통화를 향한 모든 경쟁부문에서 2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유로는 아직까지 달러와 어깨를 견주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유럽 채권시장은 미국보다 규모가 작고 유동성도 부족하다. 독일 국채는 안전하지만 유통량이 미국의 1/4에 불과하고, 다른 나라들의 국채는 유통량은 많지만 안전성이 떨어진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유로가 '나라 없는 통화'”라는 점이다. 유로존에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도울 능력과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할 권한을 가진 기구가 없다. 무용지물이 된 ‘안정 및 성장에 관한 협약’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유로존 국가들의 강한 결속, 그리고 유로 채권시장의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유로가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누리기는 쉽지 않다. 아이켄그린은 이 외에도 유로존이 △회원국 경제규모 확대 △남유럽 국가의 재정건전성 확보 △노동시장 유연화 △저출산 고령화 문제해결 같은 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보완적 역할에 불과한 특별인출권(SDR)
1970년부터 도입된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 제도에 따라 가맹국은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을 때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무담보로 외화를 인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특별인출권 사용이 국제거래에서 보편화된다면, 달러의 과도한 특권을 제한할 수 있고 국제수지관리에 따르는 위험도 낮출 수 있다. 2009년 3월 저우 사요찬 중국인민은행 총재는 국제보유통화를 IMF의 특별인출권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올 11월로 예정되어있는 G20 칸 정상회담에서는 특별인출권 바스켓에 위안을 포함시키는 제안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거대한 달러보유고로 인한 딜레마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이 가진 2.5조 달러의 외환보유고 중 65%가 달러 자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이 달러를 대량 매도하면 달러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달러 자산을 보유한 중국인민은행의 회계 상 손실을 의미한다. 또한 달러가 절하되면 중국 수출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중국이 외환보유고를 다변화하고자 하는 우회로로서 특별인출권이 고려된다. 통화바스켓으로 구성되는 “특별인출권을 축적하면 달러의 비중을 완만하게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인출권은 국제통화로 자리매김하기에는 그 활용도가 매우 부족하다. 특별인출권의 활용도는 정부와 IMF 사이의 부채를 결제하는 데에 그친다. 특별인출권을 거래하는 민간시장도 없고, 교역 시 청구와 결제에도 활용할 수 없으며, 특별인출권을 다시 달러나 유로로 바꾸는 데에는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대체계정 도입으로 인해 달러가치가 하락할 경우 그 손실을 누가 감수할지에 대한 회원국 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체계정은 좌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특별인출권은 기껏해야 기존 보유고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각국 중앙은행이 특별인출권을 통해 달러 비중을 완만하게 줄이는 것은 미국이 누리는 과도한 특권을 일부 제한하는 방법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들은 유동성이 부족하고 시장 개입에 활용할 수 없는 특별인출권을 보유고의 일부로만 유지할 것이다.” 특별인출권은 기존 기축통화의 기능을 대체할 수 없다.
4) 국제통화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위안
중국이 가장 선호하는 대안은 위안을 국제통화로 만드는 방안일 것이다. 2008년 중국은행감독위원회 상하이지부 부지부장인 장광핑은 2020년까지 위안이 국제통화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안의 비태환성은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다. 외국인들은 중국에서 상품을 구입할 때만 위안을 쓸 수 있다. 중국은 몽고,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북한 같은 인접국 그리고 홍콩, 마카오 같은 특별행정구역과 교역을 할 때만 위안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기업들의 경우에도, 상하이와 광둥에 있는 기업들에게만 위안 시범결제 프로그램이 적용되어 있다. 이런 조치는 자본규제를 우회하기 위해 수출입액을 조작하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자본흐름의 변동성으로부터 중국경제를 보호해준다. 또한 정부가 원하는 대로 금융시장을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위안화의 국제적 역할을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위안은 국제통화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로서 위안의 위상을 높이려면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자유화를 조화시키기는 과정은 매우 까다로우며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는 “은행대출과 고정환율제에 기반을 둔 성장정책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0년까지 상하이를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검증된 성장모델을 폐기하고 해외투자자들의 접근을 자유화하여 깊고 유동적인 시장을 구축해야한다.
그러나 아이켄그린은 2020년까지 위안이 국제통화로 잡리잡을 것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중국 경제가 향후 10년간 연7%씩 성장한다고 해도 그 GDP가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안은 2020년대에도 달러보다 작은 도약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위안 표시 채권시장의 유동성도 달러 표시 채권시장에 견줄 바 아니다. 그만큼 위안의 국제보유고비중은 제한될 것이다.” 그는 위안이 중국과 교역량이 많은 국가들에게 주로 활용되면서, 유로 보유고가 인접 국가들에 집중되듯, 위안 보유고는 아시아 지역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5)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전망
이상의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아이켄그린은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이행을 전망한다. 서유럽과 독일경제의 재건, 그리고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의 약진으로 미국의 경제 지배력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달러 현직프리미엄의 감소, 유로와 위안의 역할 확대로 인해 이 세 통화가 국제통화가 되지만 어느 하나 시장을 완전하게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세계경제가 다극화되면 통화체제도 다극화되는 것이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달러 폭락 가능성
그렇다면,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전망이라는 연착륙 전망과는 달리, 달러 폭락이라는 경착륙 가능성은 없는가? 아이켄그린은 달러 투매를 촉발할 잠재적 계기들이 있으나 그것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전망한다.
달러 투매를 촉발할 수 있는 잠재적 계기 중 하나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다. 미중 간의 무역불균형과 환율갈등이 심화될 가능성, 북한이나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과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 가능성 등 미중 간에 정치적 갈등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 상황을 파운드의 몰락 및 달러의 부상과 유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이 보유한 미국 채권과 대미수출을 고려할 때 중국이 달러의 가치를 무너뜨리면 자신도 치명적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협력하지 않으면 세계 경제를 안정시키는 일이 더 어려워진다.” 그런 점에서 두 나라의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경제적 무기를 쓰는 일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계기는 시장심리가 급변하는 것이다. 전반적인 달러 약세 추세가 이어질 경우, 스마트머니를 시작으로 달러자산을 보유한 투자자들이 갑작스럽게 달러를 매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연준의 개입능력, 그리고 “달러주도의 국제금융체제를 안정시키는 일에는 모든 나라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패닉이 발생하면 연준은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달러를 부양할 것이고, “투자자들이 이성을 되찾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또한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들 그리고 손해를 회피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의 “이해관계가 파국을 막을 것이다.”
세 번째, 가장 현실성있는 계기는 미국의 재정정책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미국의 재정상황은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금융위기 이전 이미 사정이 심하게 악화되었다. 다음으로, 금융위기로 인해 엄청난 재정적자가 발생했다. 마지막으로,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은퇴하는 2015년 무렵이 되면 의료보장비용과 연금 때문에 재정적자가 더 늘어날 것이다.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의 성장 잠재력이 근본적으로 훼손되었다면 부채비율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1%p 감소하면 부채비율이 2011년에는 5%p, 2015년에는 10%p 더 늘어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투자자들이 미국의 재정적자가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재정위기는 달러 투매로 갑작스럽게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대안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요소는 [미국] 경제와 재정의 기초체력이다.”(결코, 그 역이 아니다.) 따라서 한편으로 수출경쟁력을 강화하여 경상적자를 감축해야하고, 다른 한편으로 긴축을 통해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수출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있어 생산성을 높이기는 쉽지 않으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인재, 유연한 노동시장, 수익성 있는 농업과 광활한 농지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량, 도로 등 새 인프라를 구축하고, 교육에 대한 투자가 성과를 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생산성을 기적적으로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비용절감뿐이다.”
아이켄그린은 우선,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독일의 임금인상 억제정책을 참고사례로 제시한다. 독일은 임금인상 억제에 대한 노조와의 합의를 바탕으로 2003년에서 2010년 사이 두 자릿수로 수출을 늘릴 수 있었다. 다음으로, 미국은 달러 절하를 인정하고 수입품 가격 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단, 달러가 30% 절하된다고 해도 미국의 미숙련 노동자들이 중국의 미숙련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금융상품 발행, 설계 용역, 경영 컨설팅, 소프트웨어 지원 같은 서비스업이 수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수출과 관계되는 농업 부문 역시 자본집약적 성격을 띠며 많은 고용을 창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생활수준의 정체, 소득격차라는 대가를 감내해야 하며, “세금이나 교육 및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 등 다른 수단을 활용”하여 소득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증세와 재정지출 삭감을 동시에 시행”해야 하지만, 이러한 방안이 의회를 통해 추진되기란 쉽지 않다. 공화당은 새로운 세금에 무조건 반대할 것이고, 대통령은 중산층에 대한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공약했으며, 은퇴자협회는 복지연금비용과 의료보장비용 축소에 맞서 강력한 로비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의회와 국민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평가: 달러 연착륙과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의 이행이라는 전망의 비현실성
미국은 동아시아로부터의 수출달러환류를 통해 이중적자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거대 적자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흑자국이, 각각 자금 이전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득과 실물경제의 또 다른 이득을 향유하는 독특한 구조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제통화의 요건으로서 유동성과 신뢰성이라는 두 요소가 모순된다는 트리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브레튼우즈 체제가 현재까지 작동하는 이유이다. 이처럼 이중적자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미국의 ‘과도한 특권’, 즉 달러의 발권이익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적자로 표현되는 미국의 부채경제가 무한정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달러의 지위 역시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경기부양을 위한 팽창정책과 이중적자 감축을 위한 긴축정책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미국은 무역수지 개선을 그 해결책으로 사고해왔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환태평양경제파트너쉽(TPP)를 통해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구체화는 것은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문제다. 아이켄그린이 제시하는 미국의 대안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달러가치 하락을 통해 대중국 부채를 탕감하는 효과를 누리는 한편, 주로 서비스업에서 무역수지를 대폭 개선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실업을 타국에 수출하고 자국 민중들에게 저임금, 노동유연화, 복지축소를 강제하는 것이 바로 아이켄그린의 대안이다.
하지만 아이켄그린 식으로 표현하면 ‘미국 경제와 재정의 기초체력의 저하’를 반전시킬만한 요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선, 미국의 경기회복세가 둔화되어 있고 특히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이 매우 불안정하고 악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장기화될 위험이 높다. 다음으로,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미국의 경기부양 수단의 제약이 커지고 있다. 국가신용등급 하락 이후 재정지출 삭감이 계획되었고, 재정위기로 인한 미 국채금리 인상 압력으로 인해 연준의 통화정책 역시 그 효과가 약화될 수 있다. 결국 위기를 타국과 자국 민중들에게 전가하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일정기간 가능할 지 몰라도, 미국의 경제성장을 통해 이중적자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이중적자를 점진적으로 해소해나가면서 달러의 지위도 점진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아이켄그린의 전망은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게다가 미국 경제 및 달러의 연착륙뿐만 아니라, 유로존 국가들의 강한 결속 및 위기극복, 중국 외환보유고의 점진적 다변화 및 중국경제의 체질개선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다극적 국제통화체제로 이행할 것이라는 아이켄그린의 전망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유로존은 ‘재정동맹 없는 화폐통맹’이라는 모순을 해결할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이중적자 메커니즘의 일부를 이루면서 달러 본위 체제의 모순을 공유한다.
달러의 신뢰성 위기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달러의 신뢰성 위기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안전자산 선호로 이어져, 달러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이중적자가 심화되고 그에 따라 추세적으로 달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지금 국면은 달러 본위 체제의 모순이 응축되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달러의 신뢰성 위기를 매개로 해서 국제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될 위험이 있다. 게다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가 은행위기로 심화되고, 이를 매개로 미국 금융기관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2007-2009년과는 또 다른 형태의 금융위기가 전개될 가능성이 잠재해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