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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9-10.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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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를 쓰기 시작한 일본 반핵운동

2박 3일간의 반핵대회 참가기

박상은 | 정책위원
7월 16일, 도쿄 요요기공원에서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 가 열렸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핵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반핵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2011년 4월 도쿄에서 1만 5천 규모의 집회가 처음 열린 이후, 몇 만 단위의 집회가 2-3개월마다 한 번씩 열렸다. 이번 집회는 2011년 9월 도쿄에서 6만 명이 모인이래,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일본정부가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오이 핵발전소를 가동시킨 지 약 보름, 전력수급량이 급증하는 한여름을 목전에 둔 7월 14일, 이틀 뒤에 열릴 집회참가를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탈핵텐트

도쿄는 이제 막 무더위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가스미가세키 역에 내려 햇빛이 내리쬐는 빌딩 숲을 걸었다. 도쿄의 가스미가세키는 대부분의 일본 중앙행정기관과 대기업들의 본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일본 행정의 중심지이다. 일본인들이 관료들을 비꼴 때 ‘가스미가세키 문학’이라는 말을 쓰는데, 자기들끼리 일반인들이 못 알아들을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그 가스미가세키 한가운데,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경제산업성 앞이자, 도쿄전력 본사와 총리관저를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탈핵텐트가 있다. 지난해 9월 11일 경제산업성 인간띠잇기 집회 후 첫 번째 텐트가 세워지면서, 300일이 넘는 농성이 시작되었다. 작년 10월 25일과 28일에 텐트가 연이어 세워진 후 총 3개의 농성텐트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두 번째 텐트가 세워질 때 ‘핵발전소 필요없다! 후쿠시마의 여성들’이 2박 3일간의 투쟁을 한 뒤 농성에 결합하기 시작했고, ‘핵발전소 필요없다! 전국의 여성들’이 그 뒤를 이었다.
세워진 순서대로 제1~제3텐트라고 불리는데, 제1텐트는 접수처 역할을 하는 메인텐트이고, 제2텐트는 여성들이 주로 지킨다고 한다. 접수처에 가서 방명록을 적고 나니, 후쿠시마 여성들이 와 있으니 제2텐트로 가보라고 한다. 4명의 여성들이 텐트를 지키고 있다. 평일에는 도쿄에 있는 여성들이 당번을 정해 지키고, 주말에는 후쿠시마에서 사람들이 와서 함께 지킨다고 한다. 텐트 안에는 지금까지 나온 유인물이 정리되어 있고, 세계 곳곳에서 전해온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텐트는 경제산업성의 요청으로 철거위기에 내몰리기도 하고, 핵발전소를 찬성하는 우익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반핵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일본의 레이버넷에는 거의 매일 텐트일지가 업데이트된다.
후쿠시마 여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첫 번째 텐트 뒤쪽에 붙어 있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지켜주세요’라는 슬로건과 ‘미래를 잉태한 여성들의 열 달 열흘의 텐트’ 라는 이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여성들은 농성투쟁의 상징이고, 실제로도 텐트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서 지난해 12월 1일에 시작된 것이 ‘미래를 잉태한 여성들의 열 달 열흘의 텐트행동’ 이다. 텐트에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나오는 길에 보니 정말 이런 이름이 제2텐트에 붙어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4명의 여성들은 나이도 사는 지역도 달랐는데, 이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니 금새 토론이 활발해졌다. 주로 이러한 구호들이 여성들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것 같고, 어머니 역할을 너무나 강조하여 불편하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을 이야기할 때, 가임기 여성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또한 ‘기형아’에 대한 공포도 심어준다. 그러나 여성들은 ‘미래의 어머니’ 정체성만으로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지켜주세요’ ‘미래를 잉태한 열 달 열흘’과 같은 구호는 그녀들의 투쟁을 축소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본 여성 활동가들의 토론에 운 좋게 동석하게 된 내가 이런 이야기를 이전에도 했었냐고 묻자, 놀랍게도 오늘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단다. 뭔가 불편하긴 한데,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며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다가 우연히 토론이 시작된 것이었다. 토론은 서로의 의견이 대략 일치함을 확인하고, 반핵운동의 구호에서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다른 천막농성자들과 이야기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구는 30년 넘게 반핵운동을 하고, 누구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반핵운동에 나섰고, 누구는 후쿠시마에 살고, 또 누구는 도쿄에 사는데, 텐트농성을 진행하면서 이 자리가 이들의 토론의 장이 되고 서로를 교육하는 장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운동이 축소 재생산되었던 일본에서, 누군가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일본에서 이러한 경험은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본 활동가들과의 교류회

14일과 15일 저녁에는 교류회에 참석하였다. 첫 번째 교류회는 일본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에 속한 활동가들과의 소규모 간담회였고, 둘째날은 ‘반핵발전신문’에서 주최하는 전국교류집회였다.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는 일본의 노동조합이 분열할 때, 중핵파와 혁마루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소수노조들의 연합 중 하나이다.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는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 준비회에 함께하고 있는데, 교류회를 통해 핵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최근 방사선량이 약간 낮아지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낮아졌다는 사실, 핵발전소 노동자로 취직하여 조직화에 나선 활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고,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가 핵발전소 노동자들에게 배포하고 있는 피폭노동을 방지하기 위한 매뉴얼도 받을 수 있었다.
이외에 소위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총리관저 앞 금요집회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오이 핵발전소의 재가동이 목전에 다가온 6월부터 집회 참가자가 몇 만 단위로 급증하자 활동가들도 크게 놀랐는데, 들어보면 집회 분위기가 마치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했다. 활동가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자발적 참가자들의 역동성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조직의 깃발을 내리라는 요구가 튀어나오고, 핵발전소 재가동 저지 외의 주제로는 발언을 금지하는 등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무정형의 집회가 대중의 창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이자, 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이라는 주장과 이를 둘러싼 쟁점은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나 2011년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에서도 제기되었는데, 아무래도 21세기의 운동은 이 쟁점을 결코 우회할 수 없을 듯하다.
15일의 전국교류집회는 150여 명의 전국의 반핵활동가들이 참가한 자리였다. 케이오 대학의 카네코 마사루 교수의 짧은 강연 후, 전국의 반핵활동가들이 각 지역의 활동내용을 보고했다. 후쿠시마에서는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피난생활과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노인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고농도 오염 지역이 늘어나고 있는 등의 피해를 보고했다. 그리고 사고 직후 방사성 물질의 누출이 가장 심각했던 날의 행동기록을 남겨 피해를 확실히 기록하자는 운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핵발전소 노동자들이 큰 위험에 노출됨에도 임금이 낮아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핵발전소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 전망했다. 후쿠시마 외의 각 지역에서도 자기 지역의 핵발전소 가동을 멈추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활동을 보고했다. 주로 서명운동, 현지사 선거 대응, 핵발전소 피해에 대한 재판 등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운동에 대해서는 총리관저 앞에서 열리는 집회와 같은 직접행동을 강화해야 하며, 전국적인 운동과 지역적인 운동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다.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

7월 16일,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의 날이 밝았다. 집회 장소까지 인솔해주신 분이 집회 실무도 담당하고 있다보니 집회시작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대규모 집회인 만큼, 미리 모여서 할 일을 나누는 스텝들 만해도 200여 명은 되어 보인다. 스텝들 중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더운 여름날 체력이 될까 싶을 정도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젊은 활동가로서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무대는 총 4개로, 각각 시작시간과 끝나는 시간, 프로그램의 성격이 다르다. 내가 발언한 곳은 제4스테이지, 가장 작은 방송차이다. 집회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곳이다. 오랫동안 핵발전소와 핵무기 반대 활동을 해왔던 단체와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의 활동가 발언이 이어졌다. 제1스테이지는 메인무대로, 조직적으로 참가하지 않은 일반시민들을 비롯하여 시민단체, NGO들이 자리잡았다. 사카모토 류이치나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유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발언은 모두 이곳에 배치되었다. 제2스테이지는 렌고가 속한 평화포럼과 전노협 등 조직 노동자들, 제3스테이지는 여타 단체와 시민들의 무대로 라이브공연과 발언이 번갈아 진행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인상에 남았던 장면 중 하나는 집회장에 흩날리는 일장기였다. 대중운동에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빠지기 어렵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장기가 오랫동안 천황제에 맞서고,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는 활동가들이 쏟아져 나온 집회에서 자랑스럽게 흩날리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다. 넘어야 할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또 하나는, 활동가들의 발언이 주로 작은 무대에 배치되어, 큰 무대에서는 오히려 오랫동안 반핵운동을 해왔던 여러 활동가들의 의견을 듣기 어렵게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의 반핵운동에 참가하는 대중들이 핵발전소 문제와 핵무장 문제를 연관 짓지 못하는 것은 일본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는데, 집회를 주최하는 측이 이런 부분을 돌파하는데 있어 매우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만 명이 참가한 집회는,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열기를 느끼게 했다. 발언은 힘이 넘치고 절절하고, 공연은 능숙하든 서툴든 진심이 담겨있다. 젊은 사람들도 많고 나이든 사람들도 많다. 각 조직들은 곳곳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일본 경찰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도로점거를 막기 위해 집회를 방해한다. 메인 무대의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이미 행진을 시작하기 위한 대열이 만들어졌다. 도저히 혼자서는 집회 전체 모습을 다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역동성이 느껴진다. 경찰의 지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인도로 가는 착한 시민들, 그 와중에 경찰과 싸워 1차선을 확보하는 어떤 활동가를 지켜보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향했다.

무수한 갈림길에서

오랜 기간 반핵운동을 해왔던 일본의 활동가들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을 경험하며 흥분과 걱정을 동시에 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이들이 반핵운동의 과제 전반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당혹스러움 등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 물론 가장 큰 감정은 기쁨과 희망이긴 하지만 말이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미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쟁점이 보인다. 집회에서 본 일장기는 많은 것을 상징할 것이다. 이미 3월에 있었던 1주기 집회 때도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집회주관자들은 추모와 부흥, 반핵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며, 집회기조를 설정했다. 하지만 동일본대지진과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추모는, 천황과 정부도 다 하고 있는 일이다. 집회기조가 추모와 부흥을 외치는 천황에 대한 비판 없이 세워졌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활동해 온 후쿠시마 현지의 반핵활동가들을 통해 제기되면서 집회 기조는 수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위 조직된 집회와 인터넷을 통해 모인 대중 집회에 대한 태도도 쟁점 중 하나이다. 실은 각각의 집회에 참가하는 대중들이 완전히 이분화된 것은 아님에도, 두 집회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어떤 이들은 대중 집회에서 조직의 깃발을 들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반면 10만 집회를 조직한 주최 측은 총리관저 앞의 집회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두 집회 모두 참여하고 있는 여러 활동가들은 어느 한 쪽이 좋고 나쁘다고 평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두 집회가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핵발전소에서 피폭당하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반핵운동이 어떻게 함께 쟁취해 나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핵발전소 사고에 의한 피폭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집회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핵발전소 하청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핵발전소가 가동중지 상태가 되더라도,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핵발전소에서 피폭을 무릅쓰고 일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현재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섣불리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일본의 한 활동가가 제기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수습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가능하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물론 당신들은 파업할 권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수습작업을 멈추면 당장 방사성 물질이 일본 전역으로 퍼질 것이라는 공포는 반핵운동의 커다란 동력이지만,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가로막는 주요 논리가 될 수 있다. 물론 핵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어려워, 이런 쟁점이 당장 불거지지는 않을 수 있다.
폭발적인 대중운동은 수많은 쟁점을 제기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하고 돌파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방향이 갈린다. 30년이 넘게 끈질기게 운동을 지속해 온 60-70년대 학생운동 세대 활동가들에게 이는 희망이자 또한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무수한 갈림길에서, 일본의 반핵운동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나에게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은, 무더운 여름날 집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유인물을 차곡차곡 모으던 허리 굽은 한 할아버지 활동가와, 바깥보다 훨씬 더워 땀을 뻘뻘 흘려야 했던 텐트 안에서 60대와 30대 여성이 세대를 넘어 토론하는 모습이다. 일본 본토가 방사성 물질로 오염된 초유의 재앙을 맞닥뜨린 후 사람들은 겨우 만나기 시작했고,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전세대의 신심과 현재의 창발성 모두를 힘으로 갖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바란다. 이들과 토론하며 동아시아의 반핵평화 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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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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