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THINK TANK를 분석한다[1]
THINK TANK?
1988년 11월 부시와 듀카키스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매우 특이한 양상이 포착된다. 레이건의 당선 이후, 정치적·이념적 지향의 차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연구소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특히, 브루킹스 연구소는 <1988년으로 가는 길>이라는 정책입안팀을 발족하여 듀카키스와 민주당을 노골적으로 지원하였고 "이번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의 사상이 아니라 정책이 이슈가 되어야 한다"는 모토를 앞세워 미국 국민들을 직접 설득하였다.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 돌풍의 주역이었던 헤리티지 연구소는 자신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응당 부시와 공화당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급진진보 세력의 듀카키스가 탈을 쓰고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고 화답하며 후보자의 사상이 쟁점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브루킹스와 헤리티지, 두 연구소의 대리전 양상은 아닌가하는 인상마저 드는 대목이다.
제4의 권력이니, 미국 민주주의의 혁명적인 변화라느니 따위의 언론 특유의 호들갑스런 반응은 차치하더라도, 이들 연구소들, 소위 싱크탱크(Think Tank)의 영향력에 대해 쉽게 간과할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미국의 정치·경제·군사 정책 입안과정 및 수행과 평가까지 이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근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하면서, 대선과정에 매우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워싱턴의 급격한 집세 폭등", "정당보다 싱크탱크를 거치는 것을 선호"한다는 수많은 화제거리를 남기며, 새 행정부에 대대적으로 등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Think Tank라는 말이 처음 통용되었던 시점은 1,2차대전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사전에나 등장하는 '특이한 사람의 두뇌' 혹은 '두뇌(brain)의 속어' 정도였는데, 이것이 1차대전 때에는 '주요 군사전략을 입안하거나 참모들이 이를 논의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의미한 군사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 때는 '군장교들이 전략을 짜고 토론을 하던 특별한 방'이라는 좀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케네디와 존슨대통령 시대에 들면서 이 말은 '최고 지성인들이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변해, 비로소 현대적인 의미의 싱크탱크 즉, "국가적 관심사인 공공정책에 대해 연구를 하는 비정부, 비영리 연구기관"을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싱크탱크 대부분은 워싱턴에 몰려 있으며, 연구원 개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특수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배포할 자료용 주제를 브리핑하기 위해, 혹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고객(정부를 포함)의 용역에 따라, 때로는 자신의 정책결정으로 상대(심지어는 정치정당까지)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위해 주제를 선정하고 연구를 한다. 이 연구의 성과들은 언론을 통해 여론화되며, 의회에서 가공되고 행정부에서 시행되는 등 미국특유의 정책입안의 전과정에 걸쳐 구체적으로 작동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나 의회에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공급할 수 있는 인재보급소 역할도 하고 있으며, 전직관리들이 퇴임후 일자리를 옮겨 계속 정책적 조언을 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이와 같다면, 이들 싱크탱크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개입하며 이들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위상이 가지는 정치적 혹은 계급적 의미는 무엇인가? 나아가 어떤 정치적 결론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 필자가 이에 명쾌한 대답을 내리기가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필자의 짧은 지력 탓이 크겠지만 어찌보면 필자의 형편만도 아닌 것이, 그들 자신도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언급을 스스로 회피하고 있으며, 아직 진보진영에서도 그들의 정치적 영향에 대한 계급적 혜안이 담긴 이야기들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지에서 일정한 지면을 할애해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그들의 영향력이 양적으로나마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 그들의 주장이 미국의 전세계를 대상으로 정치·경제·군사 전략과 일정한 범위 내에서 수렴되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누구 말대로, 정서적으로 불편하고,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헤게모니 국가(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들의 소리를 통해 미국의 세계전략을 엿들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할애된 지면의 최대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질문에 대한 독자 나름의 현명한 대답을 기대하며, 그들의 형성사를 경유하면서 미국의 Think Tank들을 필자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일단 미국의 Think Tank의 성립과정과 효시가 되었던 Think Tank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부족한 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미숙함이다.
지식인, 테크노라트(전문가) 그리고 브레인 트러스트
흔히 분류하기를 전형적인 싱크탱크의 최초설립시기를 2차대전 직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는 싱크탱크를 민간주도의 정부용역에 대한 연구와 이 권위에 대한 여론의 사회적인 인정 여부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만 확인할 경우 싱크탱크의 연구방향과 일반적 성격 그리고, 최근 급성장한 보수주의적 성향의 싱크탱크에 대해 그 맥락을 정확히 짚기가 어렵다. 당시 이 연구소가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주목할 만한 흐름이 있었는데, 이 흐름을 고찰함으로서 연구소 설립의 일반목적과 연구방향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을 짚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시점을 좀더 과거로 놓고 볼 필요가 있다.
1870년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경기 침체는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노정간의 대립은 더욱 격해졌다.(1877년 철도노동자 대파업, 1886년 헤이마켓 사건, 1886년 미국노동동맹 창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둘러싸고, 당시 미국사회의 지식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팽배해 있었다. 우선 각 기관의 효과적 운용을 돕고 국민 개개인의 필요를 더 합리적으로 측정하여 이념·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간에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이론-이념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또다른 하나가, 인간의 진보는 사회진화론자들이 말하는 맹목적이고 경쟁적인 투쟁이나 우연한 현상의 축적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과학의 급격한 진보가 가져온 결과를 찬미하면서, 이들의 방법(가설->검증)을 인문·사회과학에 적용할 것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는데, 이는 당시 형성되던 실용주의적인 사회철학과 정확히 일맥상통하고 있다.
한편, 이런 견해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혁신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19세기 자본주의의 지나친 점과 정치적 부패에 대응한 개혁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도 또한, 행정관료의 등용에 공평한 기준이 없고, 그렇게 등용된 행정관료들에게는 적절한 정책을 입안할 전문적인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패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정책입안 및 실행에 대한 전문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결국 정치적 중립성과 예방(의학의 비유), 능률(물리학의 비유)을 앞세운 이들 테크노라트(전문가)들의 경향은 윌슨대통령 이후 민주당의 혁신주의 운동과 맞닿게 된다.
정식등용의 길이 좁았던 이들은 일부나마 개인자문의 형태로 흡수되는데, 1911년 미국 최초의 행정교육기관인 '공무원 연수학교'와 몇 개의 국립연구소가 설립된 것도 저간의 사정에 기인한 바 크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하나가 1차 세계 대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바로 1920~1930년대 경제 대공황이라는 극단적인 경기 침체이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우회하면서, 전시경제체제(계획경제)의 경험을 가지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방정부의 행정체계 약점과 자국경제에 대한 지식이 지극히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곧바로 기업경영자들과 사회과학자들 즉, 테크노라트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고, 아울러 자국 경제정보에 대한 광범위한 수집과 함께 이에 기반한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의 경기 침체는 연방정부로 하여금 전시경제체제의 경험을 더욱 환기시켰다. 즉, 연방정부의 경제조정 경험, 기업가와 연방정부간의 자발적인 협력에 바탕을 두어 자유방임적인 경쟁만큼 무질서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도 아닌 미국만의 독특한 방식을 환기시킨 것이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가설(경제를 경제법칙의 작용에 맡겨두지 않고 필요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실험해 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토양을 제공한다. 특히, 1930년대의 경제대공황은 전문가들에게 여러 가지 해결책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전례없이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실험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위기의식과 극적으로 마주친다. 특히 '행동과 즉각적인 실행', '대담하고 지속적인 실험'이라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구호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바로 이 때, 이른바 브레인 트러스트가 형성된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루즈벨트는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을 약속하였는데, 이 안(案)은 당해 봄, 여름 학계의 여러 자문들과 토론하면서 기초되었다고 한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입각이후 백일의회라 불리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적극적인 불황대책을 정부 제안의 중요 법안으로 입법화하였고, 이 새로운 공공정책의 비교·검토에 당시의 정책 자문들이 대거참여하였다. 이것이 효시가 되면서, 루즈벨트는 이를 브레인 트러스트라 불렀다. 브레인 트러스트는 특정분야에 전문성을 가지면서, 공식적인 직책보다 개인적 친분으로 참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뉴딜정책에 대한 대 국민적 신뢰감은 후학자들이 뉴딜정당체계라 이름지울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회과학자들-전문가들이 연방정부에서 근무하였고, 이것이 뉴딜정책의 입안과 집행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전문가들이 정계나 행정부 내에서 더많은 자리를 차지한 만큼, 뉴딜정책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전문성이라는 이름하에 제출된 여러 정책들은 뉴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정치가들의 주요 공격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들이 의도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정치적 중립성을 포기해야 하는 시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이 상징 이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 데에는 매우 중요한 논점 하나가 숨어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뉴딜정책 20세기 초반의 혁신주의-이들에게 조정과 계획은 미덕이다-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에 별다른 이견은 없는 것 같다. 관건은 그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있다. 특히 리버럴리즘(루즈벨트 스스로를 가리키는)·보수주의(그 반대자들)라는 말이 이때 형성되었고, 이후 공화당의 정책 비판대상이 주되게 뉴딜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80년대 신보수주의의 출현과 그 성격에 대한 중요한 논점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함께 출현하게 되는 보수주의 성향의 연구소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도 마찬가지로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브레인트러스트를 위시하여, 루즈벨트 행정부 곳곳의 전문가들이 바로 오늘날 Think Tank의 기원이 되기 때문이다.
싱크탱크의 효시, RAND
세계 2차대전은 이들 지식인들에게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가 된다. 뉴딜정책의 정치적 시험대이자, 동시에 미국의 국운을 놓고 벌이는 위험한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학자, 지리학자, 언어학자, 인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할 것 없이 국무성, 전시 정보국, 전시 생산국, 전략 사업부, 해군 인력부, 육군 정보교육부를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들은 경제분석, 여론조사, 지능테스트, 전투에 따른 스트레스 조사, 집단심리학 등 직간접적으로 전장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면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들은 전시경제 속에서 생산의 우선순위를 조정했고, 가격 조절과 배급 활동에 관한 각종 정책들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이들의 공적은 그야말로 혁혁했는데, 이제 이들에게 남는 과제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전쟁에 동원된 숱한 노동력을 어떻게 다시 관리할 것인가? 전쟁 와중에 소비한 군사비의 연방지출이 급격하게 감소되면서 가져오게 될 충격은 어떻게 완화시킬 것인가? 그리고 여기에 조직된 과학기술(핵개발의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그들은 조직적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CED(The Committee For Economic Development)와 RAND(Research and Development)라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민간연구소를 설립하게 되는 주요 배경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바로 오늘날의 미국 Think Tank의 효시가 된다.
CED는 전후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기업가들에 의해 설립된 연구단체이다. '기업가들이 공공정책 논의에 있어 가능한 초기 단계에 개입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는 단체이다.
당시 군수업에 뛰어든 제조업자들에게, 전후의 경제질서문제는 그들의 업종전환 문제를 포함한 기업의 사활을 가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수많은 파병군인들이 돌아오게 될 상황에서 이들 노동력을 흡수하는 문제 역시, 예상되는 사회문제를 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주장은 불을 보듯 훤한, 파국에 대한 방임으로 비추어졌고,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가 경제주체로 나서야 돌아올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이들 연구소는 "기업가들도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고, 이들이 찾은 빛이 바로 케인즈 경제학이었다. 그들에겐 이 이론을 미국의 기업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고, 이들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많은 기업가들이 갖고 있던 자유 시장 원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어느 정도 수정했다. 그리고, 정부 지출을 줄일 것을 주장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정부의 지출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신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경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합의(케인즈주의에 수렴하는) 도출과정에서 이 연구소의 이름이 빠질 수 없는 것도 이같은 사정에 기인한다.
이같은 결과는 정부내에서의 전문가들의 위상을 다시한번 급격히 재고하게 하였다. 케인즈주의에 수렴하는 사회과학적 합의가 가져온 '고용법'에 의해 구성된 '경제합동위원회'는 입법분야에서조차 경제학자들의 위상을 제고시켰으며, 그 결과 전문지식이 제도화되게 된 것(대통령 상설자문기구의 성립)이다. 이같은 제도화는 전문가 뿐만 아니라 많은 재야 학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즉, 학문적 연구의 결과를 사회, 경제, 국제 문제 해결을 위한 직접적인 정치적 통로가 열린 것이다. 또한, 이런 사설 연구소들에 대한 위탁연구가 제도화되는데, 이 제도 덕분에 정부의 모든 기구가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
* RAND 연구소
한편, 전후 제3의 전쟁을 대비하는 (주되게는 소련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기술문제를 초과하는 과학적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는 군 전략이 단지 기술과학의 문제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기술이나 무기의 양에만 기초했을 때 취약성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이 취약성 개념은 당시의 미 군부에 대한 놀라운 도전이었고 이 도전을 감행한 연구소가 바로 RAND연구소이다.
이 연구소는 현대 연구소의 전형을 보이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띠게 되는데, 그 하나가 위탁연구의 전형을 보여주며, 연구모델의 전형을 개발한 것이다. 특히 이 연구소의 시스템이론과 게임이론은 상당히 오랫동안 연구방법의 전형이 되는데, 전자는 수학자 팩슨이 각종 상황변수에 대한 수학적 정량화를 시도함으로써 공학, 경제학, 수학을 넘나드는 분석에 대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거의 모든 연구소의 연구대상에 적용된 모델이 되었다.
한편, 후자의 게임이론은 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전략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는 방법인데, 이는 핵전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이들 연구소의 취약성개념에 기반한 이 도전은, 회오리바람으로 폭격기가 80여대가 부서지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인정받게 되고, 공군은 결국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 놀랄만한 실적과 성과로 미국의 Think Tank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정식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연구소는 현재 1천여명의 직원과 1억200만 달러 이상(1991년 기준)의 연간예산을 갖춘, 미국 최대의 정책연구기관으로서 오늘날까지도 Think Tank의 효시라는 명성에 걸맞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 연구프로젝트의 70% 이상이 방위산업 및 군사기술에 대한 것이다. 50% 이상이 국방부 극비정책이라 CIA본부보다 경비가 상엄하다는 평이 있을만큼, 아직도 전쟁, 안보와 관련해서는 막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는 Think Tank이다. 이 연구소는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한국전쟁 휴전회담 때 미국과 유엔군의 협상지침으로 이 연구소의 보고서가 사용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1993년 북한의 NPT탈퇴 등 핵개발로 인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미 국방부와 합동으로 북한과의 가상 핵전쟁(war game)을 실험하는 등, 시나리오를 통한 남북한 또는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의 전력을 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연구결과가 당시 한미양국의 대북정책 수행에 큰 지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연구소는 허드슨 연구소와 시스템개발 연구소라는 특정전문연구소를 설립, 독립연구소로 운영하면서 자매연구소처럼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시스템개발연구소 컴퓨터 소프트웨어 연구에 대한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연구는 공군작전체계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게 했고,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의 개념을 처음 고안해내어 근대적인 데이터베이스 개념을 세우는데 중요한 초석을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초창기 Think Tank들의 이 놀라운 실적과 성과로 이들에 대한 신뢰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으며, 이로 인해 Think Tank는 미국의 정치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자신의 입지를 대폭 강화하게 된다.
-다음 호에서 계속
1988년 11월 부시와 듀카키스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매우 특이한 양상이 포착된다. 레이건의 당선 이후, 정치적·이념적 지향의 차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연구소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특히, 브루킹스 연구소는 <1988년으로 가는 길>이라는 정책입안팀을 발족하여 듀카키스와 민주당을 노골적으로 지원하였고 "이번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의 사상이 아니라 정책이 이슈가 되어야 한다"는 모토를 앞세워 미국 국민들을 직접 설득하였다.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 돌풍의 주역이었던 헤리티지 연구소는 자신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응당 부시와 공화당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급진진보 세력의 듀카키스가 탈을 쓰고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고 화답하며 후보자의 사상이 쟁점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브루킹스와 헤리티지, 두 연구소의 대리전 양상은 아닌가하는 인상마저 드는 대목이다.
제4의 권력이니, 미국 민주주의의 혁명적인 변화라느니 따위의 언론 특유의 호들갑스런 반응은 차치하더라도, 이들 연구소들, 소위 싱크탱크(Think Tank)의 영향력에 대해 쉽게 간과할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미국의 정치·경제·군사 정책 입안과정 및 수행과 평가까지 이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근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하면서, 대선과정에 매우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워싱턴의 급격한 집세 폭등", "정당보다 싱크탱크를 거치는 것을 선호"한다는 수많은 화제거리를 남기며, 새 행정부에 대대적으로 등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Think Tank라는 말이 처음 통용되었던 시점은 1,2차대전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사전에나 등장하는 '특이한 사람의 두뇌' 혹은 '두뇌(brain)의 속어' 정도였는데, 이것이 1차대전 때에는 '주요 군사전략을 입안하거나 참모들이 이를 논의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의미한 군사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 때는 '군장교들이 전략을 짜고 토론을 하던 특별한 방'이라는 좀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케네디와 존슨대통령 시대에 들면서 이 말은 '최고 지성인들이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변해, 비로소 현대적인 의미의 싱크탱크 즉, "국가적 관심사인 공공정책에 대해 연구를 하는 비정부, 비영리 연구기관"을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싱크탱크 대부분은 워싱턴에 몰려 있으며, 연구원 개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특수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배포할 자료용 주제를 브리핑하기 위해, 혹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고객(정부를 포함)의 용역에 따라, 때로는 자신의 정책결정으로 상대(심지어는 정치정당까지)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위해 주제를 선정하고 연구를 한다. 이 연구의 성과들은 언론을 통해 여론화되며, 의회에서 가공되고 행정부에서 시행되는 등 미국특유의 정책입안의 전과정에 걸쳐 구체적으로 작동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나 의회에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공급할 수 있는 인재보급소 역할도 하고 있으며, 전직관리들이 퇴임후 일자리를 옮겨 계속 정책적 조언을 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이와 같다면, 이들 싱크탱크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개입하며 이들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위상이 가지는 정치적 혹은 계급적 의미는 무엇인가? 나아가 어떤 정치적 결론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 필자가 이에 명쾌한 대답을 내리기가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필자의 짧은 지력 탓이 크겠지만 어찌보면 필자의 형편만도 아닌 것이, 그들 자신도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언급을 스스로 회피하고 있으며, 아직 진보진영에서도 그들의 정치적 영향에 대한 계급적 혜안이 담긴 이야기들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지에서 일정한 지면을 할애해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그들의 영향력이 양적으로나마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한 범위 내에서 그들의 주장이 미국의 전세계를 대상으로 정치·경제·군사 전략과 일정한 범위 내에서 수렴되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누구 말대로, 정서적으로 불편하고,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헤게모니 국가(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분명한 방향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들의 소리를 통해 미국의 세계전략을 엿들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할애된 지면의 최대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질문에 대한 독자 나름의 현명한 대답을 기대하며, 그들의 형성사를 경유하면서 미국의 Think Tank들을 필자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일단 미국의 Think Tank의 성립과정과 효시가 되었던 Think Tank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부족한 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미숙함이다.
지식인, 테크노라트(전문가) 그리고 브레인 트러스트
흔히 분류하기를 전형적인 싱크탱크의 최초설립시기를 2차대전 직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는 싱크탱크를 민간주도의 정부용역에 대한 연구와 이 권위에 대한 여론의 사회적인 인정 여부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만 확인할 경우 싱크탱크의 연구방향과 일반적 성격 그리고, 최근 급성장한 보수주의적 성향의 싱크탱크에 대해 그 맥락을 정확히 짚기가 어렵다. 당시 이 연구소가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주목할 만한 흐름이 있었는데, 이 흐름을 고찰함으로서 연구소 설립의 일반목적과 연구방향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을 짚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시점을 좀더 과거로 놓고 볼 필요가 있다.
1870년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경기 침체는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노정간의 대립은 더욱 격해졌다.(1877년 철도노동자 대파업, 1886년 헤이마켓 사건, 1886년 미국노동동맹 창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둘러싸고, 당시 미국사회의 지식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팽배해 있었다. 우선 각 기관의 효과적 운용을 돕고 국민 개개인의 필요를 더 합리적으로 측정하여 이념·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간에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자연스럽게 추상적인 이론-이념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또다른 하나가, 인간의 진보는 사회진화론자들이 말하는 맹목적이고 경쟁적인 투쟁이나 우연한 현상의 축적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과학의 급격한 진보가 가져온 결과를 찬미하면서, 이들의 방법(가설->검증)을 인문·사회과학에 적용할 것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는데, 이는 당시 형성되던 실용주의적인 사회철학과 정확히 일맥상통하고 있다.
한편, 이런 견해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혁신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19세기 자본주의의 지나친 점과 정치적 부패에 대응한 개혁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도 또한, 행정관료의 등용에 공평한 기준이 없고, 그렇게 등용된 행정관료들에게는 적절한 정책을 입안할 전문적인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패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정책입안 및 실행에 대한 전문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결국 정치적 중립성과 예방(의학의 비유), 능률(물리학의 비유)을 앞세운 이들 테크노라트(전문가)들의 경향은 윌슨대통령 이후 민주당의 혁신주의 운동과 맞닿게 된다.
정식등용의 길이 좁았던 이들은 일부나마 개인자문의 형태로 흡수되는데, 1911년 미국 최초의 행정교육기관인 '공무원 연수학교'와 몇 개의 국립연구소가 설립된 것도 저간의 사정에 기인한 바 크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하나가 1차 세계 대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바로 1920~1930년대 경제 대공황이라는 극단적인 경기 침체이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우회하면서, 전시경제체제(계획경제)의 경험을 가지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방정부의 행정체계 약점과 자국경제에 대한 지식이 지극히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곧바로 기업경영자들과 사회과학자들 즉, 테크노라트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고, 아울러 자국 경제정보에 대한 광범위한 수집과 함께 이에 기반한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의 경기 침체는 연방정부로 하여금 전시경제체제의 경험을 더욱 환기시켰다. 즉, 연방정부의 경제조정 경험, 기업가와 연방정부간의 자발적인 협력에 바탕을 두어 자유방임적인 경쟁만큼 무질서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도 아닌 미국만의 독특한 방식을 환기시킨 것이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가설(경제를 경제법칙의 작용에 맡겨두지 않고 필요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실험해 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토양을 제공한다. 특히, 1930년대의 경제대공황은 전문가들에게 여러 가지 해결책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전례없이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실험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위기의식과 극적으로 마주친다. 특히 '행동과 즉각적인 실행', '대담하고 지속적인 실험'이라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구호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바로 이 때, 이른바 브레인 트러스트가 형성된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루즈벨트는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을 약속하였는데, 이 안(案)은 당해 봄, 여름 학계의 여러 자문들과 토론하면서 기초되었다고 한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입각이후 백일의회라 불리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적극적인 불황대책을 정부 제안의 중요 법안으로 입법화하였고, 이 새로운 공공정책의 비교·검토에 당시의 정책 자문들이 대거참여하였다. 이것이 효시가 되면서, 루즈벨트는 이를 브레인 트러스트라 불렀다. 브레인 트러스트는 특정분야에 전문성을 가지면서, 공식적인 직책보다 개인적 친분으로 참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뉴딜정책에 대한 대 국민적 신뢰감은 후학자들이 뉴딜정당체계라 이름지울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회과학자들-전문가들이 연방정부에서 근무하였고, 이것이 뉴딜정책의 입안과 집행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전문가들이 정계나 행정부 내에서 더많은 자리를 차지한 만큼, 뉴딜정책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전문성이라는 이름하에 제출된 여러 정책들은 뉴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정치가들의 주요 공격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들이 의도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정치적 중립성을 포기해야 하는 시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이 상징 이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 데에는 매우 중요한 논점 하나가 숨어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뉴딜정책 20세기 초반의 혁신주의-이들에게 조정과 계획은 미덕이다-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에 별다른 이견은 없는 것 같다. 관건은 그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있다. 특히 리버럴리즘(루즈벨트 스스로를 가리키는)·보수주의(그 반대자들)라는 말이 이때 형성되었고, 이후 공화당의 정책 비판대상이 주되게 뉴딜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1980년대 신보수주의의 출현과 그 성격에 대한 중요한 논점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함께 출현하게 되는 보수주의 성향의 연구소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도 마찬가지로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브레인트러스트를 위시하여, 루즈벨트 행정부 곳곳의 전문가들이 바로 오늘날 Think Tank의 기원이 되기 때문이다.
싱크탱크의 효시, RAND
세계 2차대전은 이들 지식인들에게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가 된다. 뉴딜정책의 정치적 시험대이자, 동시에 미국의 국운을 놓고 벌이는 위험한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학자, 지리학자, 언어학자, 인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할 것 없이 국무성, 전시 정보국, 전시 생산국, 전략 사업부, 해군 인력부, 육군 정보교육부를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들은 경제분석, 여론조사, 지능테스트, 전투에 따른 스트레스 조사, 집단심리학 등 직간접적으로 전장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면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들은 전시경제 속에서 생산의 우선순위를 조정했고, 가격 조절과 배급 활동에 관한 각종 정책들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이들의 공적은 그야말로 혁혁했는데, 이제 이들에게 남는 과제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전쟁에 동원된 숱한 노동력을 어떻게 다시 관리할 것인가? 전쟁 와중에 소비한 군사비의 연방지출이 급격하게 감소되면서 가져오게 될 충격은 어떻게 완화시킬 것인가? 그리고 여기에 조직된 과학기술(핵개발의 수준을 훨씬 초과하는)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그들은 조직적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CED(The Committee For Economic Development)와 RAND(Research and Development)라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민간연구소를 설립하게 되는 주요 배경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바로 오늘날의 미국 Think Tank의 효시가 된다.
CED는 전후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기업가들에 의해 설립된 연구단체이다. '기업가들이 공공정책 논의에 있어 가능한 초기 단계에 개입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는 단체이다.
당시 군수업에 뛰어든 제조업자들에게, 전후의 경제질서문제는 그들의 업종전환 문제를 포함한 기업의 사활을 가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수많은 파병군인들이 돌아오게 될 상황에서 이들 노동력을 흡수하는 문제 역시, 예상되는 사회문제를 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주장은 불을 보듯 훤한, 파국에 대한 방임으로 비추어졌고,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가 경제주체로 나서야 돌아올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이들 연구소는 "기업가들도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고, 이들이 찾은 빛이 바로 케인즈 경제학이었다. 그들에겐 이 이론을 미국의 기업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고, 이들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많은 기업가들이 갖고 있던 자유 시장 원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어느 정도 수정했다. 그리고, 정부 지출을 줄일 것을 주장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정부의 지출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신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경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합의(케인즈주의에 수렴하는) 도출과정에서 이 연구소의 이름이 빠질 수 없는 것도 이같은 사정에 기인한다.
이같은 결과는 정부내에서의 전문가들의 위상을 다시한번 급격히 재고하게 하였다. 케인즈주의에 수렴하는 사회과학적 합의가 가져온 '고용법'에 의해 구성된 '경제합동위원회'는 입법분야에서조차 경제학자들의 위상을 제고시켰으며, 그 결과 전문지식이 제도화되게 된 것(대통령 상설자문기구의 성립)이다. 이같은 제도화는 전문가 뿐만 아니라 많은 재야 학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즉, 학문적 연구의 결과를 사회, 경제, 국제 문제 해결을 위한 직접적인 정치적 통로가 열린 것이다. 또한, 이런 사설 연구소들에 대한 위탁연구가 제도화되는데, 이 제도 덕분에 정부의 모든 기구가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
* RAND 연구소
한편, 전후 제3의 전쟁을 대비하는 (주되게는 소련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기술문제를 초과하는 과학적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는 군 전략이 단지 기술과학의 문제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기술이나 무기의 양에만 기초했을 때 취약성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이 취약성 개념은 당시의 미 군부에 대한 놀라운 도전이었고 이 도전을 감행한 연구소가 바로 RAND연구소이다.
이 연구소는 현대 연구소의 전형을 보이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띠게 되는데, 그 하나가 위탁연구의 전형을 보여주며, 연구모델의 전형을 개발한 것이다. 특히 이 연구소의 시스템이론과 게임이론은 상당히 오랫동안 연구방법의 전형이 되는데, 전자는 수학자 팩슨이 각종 상황변수에 대한 수학적 정량화를 시도함으로써 공학, 경제학, 수학을 넘나드는 분석에 대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거의 모든 연구소의 연구대상에 적용된 모델이 되었다.
한편, 후자의 게임이론은 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전략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는 방법인데, 이는 핵전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이들 연구소의 취약성개념에 기반한 이 도전은, 회오리바람으로 폭격기가 80여대가 부서지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인정받게 되고, 공군은 결국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 놀랄만한 실적과 성과로 미국의 Think Tank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정식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연구소는 현재 1천여명의 직원과 1억200만 달러 이상(1991년 기준)의 연간예산을 갖춘, 미국 최대의 정책연구기관으로서 오늘날까지도 Think Tank의 효시라는 명성에 걸맞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 연구프로젝트의 70% 이상이 방위산업 및 군사기술에 대한 것이다. 50% 이상이 국방부 극비정책이라 CIA본부보다 경비가 상엄하다는 평이 있을만큼, 아직도 전쟁, 안보와 관련해서는 막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는 Think Tank이다. 이 연구소는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한국전쟁 휴전회담 때 미국과 유엔군의 협상지침으로 이 연구소의 보고서가 사용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1993년 북한의 NPT탈퇴 등 핵개발로 인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미 국방부와 합동으로 북한과의 가상 핵전쟁(war game)을 실험하는 등, 시나리오를 통한 남북한 또는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의 전력을 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연구결과가 당시 한미양국의 대북정책 수행에 큰 지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연구소는 허드슨 연구소와 시스템개발 연구소라는 특정전문연구소를 설립, 독립연구소로 운영하면서 자매연구소처럼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시스템개발연구소 컴퓨터 소프트웨어 연구에 대한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연구는 공군작전체계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게 했고,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의 개념을 처음 고안해내어 근대적인 데이터베이스 개념을 세우는데 중요한 초석을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초창기 Think Tank들의 이 놀라운 실적과 성과로 이들에 대한 신뢰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으며, 이로 인해 Think Tank는 미국의 정치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자신의 입지를 대폭 강화하게 된다.
-다음 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