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교사로 살기
너무나 외롭고 어려운 일
가끔은 목놓아 우는 날이 있다. 가끔은 그렇게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내 평생 할 일이 다른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특수교사의 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과 그 부모가 걸어가야 하는 길만 할까.
사람들
나의 직업이 특수교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의례 "힘드시겠어요. 그래도 마음이 천사와…"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던지곤 한다. 아마도 그 인사말에는, 장애 아동이라면 교사를 더욱 힘들게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 같다. 물론 힘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천사나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교사를 어렵게 하는 아이들은 흔치 않다. 오히려 천사나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를,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부모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특히 특수학급1)에 근무하고 있는 나는, 일반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일반 아이들이 장애 아동들에게 보여주는 몰이해와 부정적인 태도에 매일같이 속을 끓이곤 한다.
"도대체 저런 애가 왜 학교에 나오냐구. 다른 애들 공부 못하게 방해만 되잖아.",
"○○이는 우리 교실에선 아무 것도 안해요. 우리 반에 있으나마나라니까. 그냥 특수반에서 하루종일 공부하면 안되나요?",
"교장 선생님께 항의를 좀 해봐야겠어. 아니, 엄마도 양심이 없지. 특수학교를 보내든지. 어떻게 그냥 학교에 보낼 수가 있어?"
동료 교사들의 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가슴을 찌른다. 아무리 몇 번씩 설명을 해도, 한 명을 설득하고 또 한 명을 설득해도, 어김없이 또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이다.
자기네 반 아이들한테 맞았다거나 아이들이 안 놀아준다거나 하며 종종 눈물 범벅이 되어 오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장애인은 불쌍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읊어대면서도 자기네 반 우리 아이에게는 손가락질하고, 놀려대는 일반 아이들의 모습도 나의 가슴을 누른다. 그 뿐이랴. 그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예 자기 아이를 부정하고 마는 모진 부모들까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고 썩는 마음. 천사가 되지 못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말하는 '희생과 헌신'을 감당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
그러나 사람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속에는 사회가 있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합니다" 예전에 보았던 그 무시무시한 광고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경쟁에 경쟁을 거듭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도 1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줄 수 없다. 달리기에서 꼴등을 하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달리는 즐거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의 삶의 질과는 상관없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기업의 구미에 걸맞는 인력을 선발하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우리 사회. 이 곳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가 원하는 우수한 인력에는 못 미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 줄 마음의 여유가 있을 수 없다. 한 학급에 40명이 넘는 아이들을 몰아넣고,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을 양성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교사들 역시, 반에서 아무것도 못하거나 방해만 하는 것 같은 우리 아이들까지 돌볼 여유는 없어보인다. 착한 일은 대학에나 입학해야 할 수 있다고 믿는 부모들 역시,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사회 속에서 만나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남루하기 짝이 없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아예 길거리로 나오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애인들은 고작해야 지하철에서 부딪치는 앵벌이나 걸인들 뿐이다. 돈이 돈을 벌고, 일부집단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더욱 처절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현실에서,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그리고 특수교사로서 느껴야 하는 절망감은 아마도 우리 아이들이 미래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다
웃음을 선물하는 아이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자란다. 튼튼하게만 자라달라는 부모의 기대에 어긋남 없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비교적 장애가 심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지능이 좀 떨어지거나, 상황에 걸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무진장 노력해도 도저히 공부를 잘 하기 어려운 그런 아이들이다. 종종 특수교사들끼리는 아이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해프닝들을 꺼리삼아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뭐, 이를테면 누구 다리에 난 털을 보고 "선생님, 저거 다리에 난 수염이야?" 이렇게 묻는 깜찍한 상황도 이야기 거리가 되고, 쓰레기장에 내다버린 시계를 다시 주워와 씻어놓게 했더니, 나중에 비디오테이프를 박박 씻어서 가지고 오더라는 난감한 상황도 화제에 오르고, 근엄하신 교장 선생님을 보고 버젓이 손가락질하며 "선생님, 저거 뭐야?" 라고 묻더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즐겁다. 가끔은 이런 이야기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쯧쯧"하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날 때부터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니까.
특별한 기쁨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아이들이 그것을 해낼 때 느끼는 기쁨이 특수교사의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 싶다. 아기를 키워본 부모들이야 알겠지만, 아기가 첫옹알이를 시작할 때, 첫걸음마을 떼어놓을 때 느끼는 기쁨만큼 벅차고 기쁜 것이 또 있을까? 장애 아동을 가르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배운다. 그리고, 느리고 서툴지만 조금씩 변한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자연스레 배울 많은 것들을 우리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배운다. 옷 입기, 밥 먹기, 화장실 가기, 인사하기, 대화하기…. 얼마 전에 나는, 자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아이에게 자를 사용해서 선긋기를 가르쳤다. 자하고는 상관없이 엉뚱하게 선을 그어대던 아이가, 처음 자를 꽉 붙잡고 반듯하게 선을 그어냈을 때의 기쁨이란…. 모든 것이 풍족할 땐 기쁨도 없는 법이다.
우리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생각조차 못해봤을 많은 기쁨을 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감동
그 뿐이 아니다. 운동회 날, 다른 일반 아이들 틈에 끼여 서툴게 무용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찡한 감동을 준다. 잘 못한다고 가끔은 우리 아이들을 빼놓으려는 선생님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있는 우리 아이는 전혀 다르지 않게 여겨진다. 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아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선생님들의 모습이나, 반에서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우리 아이들을 챙겨 부르러 오는 정 많은 또래들 모습, 학급문집에 우리 아이의 특별코너가 생길 만큼 학급의 특별한 구성원으로 인정을 해주는 반 친구들의 모습, 우리 아이의 끝내주는 노래솜씨에 깜짝 놀라는 반 아이들의 모습은 항상 흐뭇함을 안겨주는 일상의 감동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고는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어떻게 살아갈까? 어렵고 복잡한 일은 못해도, 우리 아이들이 할 만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취업의 벽은 높기만 하다.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도 일자리가 없는 판에…"라며 우리 아이들이 일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일이라는 것이 단순히 돈벌이 수단만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으며 살 길은 아직 요원한 것 같다. 풀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얽혀진 실타래처럼.
돈이 많거나 적거나 얼굴이 잘났거나 못났거나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온다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귀하므로, 1등을 했거나 꼴등을 했거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온다면 좋겠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학 때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시던 한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20살 청년이 책 못 읽는 거랑 100살 노인이 책 못 읽는 거랑 비교해보라면서. 한 사람이 가진 차이나 손상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걸림이 되지 않는다면 그 차이나 손상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안경쓴 사람이 장애인이 아니듯이.
우리 아이들은 날 때부터 혹은 자라면서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여러 가지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것이 더 쉬운 길은 아닐까?
장애 아동이 교육을 받고 있는 환경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주종을 이루는 것이 장애 아동들이 모여 교육을 받는 특수학교와 비장애 아동이 다니는 일반 학교에 장애 아동을 위한 학급을 편성한 특수학급이다. 특수학급은 보통 시간제로 운영되며 필요한 교과 시간에만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반학급에서 수업을 받는다.
가끔은 목놓아 우는 날이 있다. 가끔은 그렇게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내 평생 할 일이 다른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특수교사의 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과 그 부모가 걸어가야 하는 길만 할까.
사람들
나의 직업이 특수교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의례 "힘드시겠어요. 그래도 마음이 천사와…"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던지곤 한다. 아마도 그 인사말에는, 장애 아동이라면 교사를 더욱 힘들게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 같다. 물론 힘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천사나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교사를 어렵게 하는 아이들은 흔치 않다. 오히려 천사나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를,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부모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특히 특수학급1)에 근무하고 있는 나는, 일반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일반 아이들이 장애 아동들에게 보여주는 몰이해와 부정적인 태도에 매일같이 속을 끓이곤 한다.
"도대체 저런 애가 왜 학교에 나오냐구. 다른 애들 공부 못하게 방해만 되잖아.",
"○○이는 우리 교실에선 아무 것도 안해요. 우리 반에 있으나마나라니까. 그냥 특수반에서 하루종일 공부하면 안되나요?",
"교장 선생님께 항의를 좀 해봐야겠어. 아니, 엄마도 양심이 없지. 특수학교를 보내든지. 어떻게 그냥 학교에 보낼 수가 있어?"
동료 교사들의 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가슴을 찌른다. 아무리 몇 번씩 설명을 해도, 한 명을 설득하고 또 한 명을 설득해도, 어김없이 또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이다.
자기네 반 아이들한테 맞았다거나 아이들이 안 놀아준다거나 하며 종종 눈물 범벅이 되어 오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장애인은 불쌍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읊어대면서도 자기네 반 우리 아이에게는 손가락질하고, 놀려대는 일반 아이들의 모습도 나의 가슴을 누른다. 그 뿐이랴. 그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예 자기 아이를 부정하고 마는 모진 부모들까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고 썩는 마음. 천사가 되지 못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말하는 '희생과 헌신'을 감당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
그러나 사람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속에는 사회가 있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합니다" 예전에 보았던 그 무시무시한 광고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경쟁에 경쟁을 거듭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도 1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줄 수 없다. 달리기에서 꼴등을 하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달리는 즐거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의 삶의 질과는 상관없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기업의 구미에 걸맞는 인력을 선발하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우리 사회. 이 곳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가 원하는 우수한 인력에는 못 미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 줄 마음의 여유가 있을 수 없다. 한 학급에 40명이 넘는 아이들을 몰아넣고,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을 양성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교사들 역시, 반에서 아무것도 못하거나 방해만 하는 것 같은 우리 아이들까지 돌볼 여유는 없어보인다. 착한 일은 대학에나 입학해야 할 수 있다고 믿는 부모들 역시,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사회 속에서 만나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남루하기 짝이 없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아예 길거리로 나오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애인들은 고작해야 지하철에서 부딪치는 앵벌이나 걸인들 뿐이다. 돈이 돈을 벌고, 일부집단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더욱 처절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현실에서,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그리고 특수교사로서 느껴야 하는 절망감은 아마도 우리 아이들이 미래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다
웃음을 선물하는 아이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자란다. 튼튼하게만 자라달라는 부모의 기대에 어긋남 없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비교적 장애가 심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지능이 좀 떨어지거나, 상황에 걸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무진장 노력해도 도저히 공부를 잘 하기 어려운 그런 아이들이다. 종종 특수교사들끼리는 아이들이 벌이는 기상천외한 해프닝들을 꺼리삼아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뭐, 이를테면 누구 다리에 난 털을 보고 "선생님, 저거 다리에 난 수염이야?" 이렇게 묻는 깜찍한 상황도 이야기 거리가 되고, 쓰레기장에 내다버린 시계를 다시 주워와 씻어놓게 했더니, 나중에 비디오테이프를 박박 씻어서 가지고 오더라는 난감한 상황도 화제에 오르고, 근엄하신 교장 선생님을 보고 버젓이 손가락질하며 "선생님, 저거 뭐야?" 라고 묻더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즐겁다. 가끔은 이런 이야기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쯧쯧"하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날 때부터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니까.
특별한 기쁨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아이들이 그것을 해낼 때 느끼는 기쁨이 특수교사의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 싶다. 아기를 키워본 부모들이야 알겠지만, 아기가 첫옹알이를 시작할 때, 첫걸음마을 떼어놓을 때 느끼는 기쁨만큼 벅차고 기쁜 것이 또 있을까? 장애 아동을 가르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배운다. 그리고, 느리고 서툴지만 조금씩 변한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자연스레 배울 많은 것들을 우리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배운다. 옷 입기, 밥 먹기, 화장실 가기, 인사하기, 대화하기…. 얼마 전에 나는, 자를 전혀 사용할 줄 모르는 아이에게 자를 사용해서 선긋기를 가르쳤다. 자하고는 상관없이 엉뚱하게 선을 그어대던 아이가, 처음 자를 꽉 붙잡고 반듯하게 선을 그어냈을 때의 기쁨이란…. 모든 것이 풍족할 땐 기쁨도 없는 법이다.
우리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생각조차 못해봤을 많은 기쁨을 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감동
그 뿐이 아니다. 운동회 날, 다른 일반 아이들 틈에 끼여 서툴게 무용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찡한 감동을 준다. 잘 못한다고 가끔은 우리 아이들을 빼놓으려는 선생님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있는 우리 아이는 전혀 다르지 않게 여겨진다. 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아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선생님들의 모습이나, 반에서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우리 아이들을 챙겨 부르러 오는 정 많은 또래들 모습, 학급문집에 우리 아이의 특별코너가 생길 만큼 학급의 특별한 구성원으로 인정을 해주는 반 친구들의 모습, 우리 아이의 끝내주는 노래솜씨에 깜짝 놀라는 반 아이들의 모습은 항상 흐뭇함을 안겨주는 일상의 감동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 그야말로 무럭무럭 자라고는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어떻게 살아갈까? 어렵고 복잡한 일은 못해도, 우리 아이들이 할 만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취업의 벽은 높기만 하다.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도 일자리가 없는 판에…"라며 우리 아이들이 일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일이라는 것이 단순히 돈벌이 수단만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으며 살 길은 아직 요원한 것 같다. 풀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얽혀진 실타래처럼.
돈이 많거나 적거나 얼굴이 잘났거나 못났거나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온다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귀하므로, 1등을 했거나 꼴등을 했거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온다면 좋겠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학 때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시던 한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20살 청년이 책 못 읽는 거랑 100살 노인이 책 못 읽는 거랑 비교해보라면서. 한 사람이 가진 차이나 손상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걸림이 되지 않는다면 그 차이나 손상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안경쓴 사람이 장애인이 아니듯이.
우리 아이들은 날 때부터 혹은 자라면서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여러 가지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것이 더 쉬운 길은 아닐까?
장애 아동이 교육을 받고 있는 환경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주종을 이루는 것이 장애 아동들이 모여 교육을 받는 특수학교와 비장애 아동이 다니는 일반 학교에 장애 아동을 위한 학급을 편성한 특수학급이다. 특수학급은 보통 시간제로 운영되며 필요한 교과 시간에만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반학급에서 수업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