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투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B>가혹하고 힘든 겨울을 맞으며</B>
이토록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을 오랜만에 맞는 듯하다. 그러나 하반기 투쟁을 끝내고 몸도 마음도 다소 지쳐있는 상황에서 몰아치고 있는 이 눈바람을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기뻐하기엔 힘에 겹다. 여전히 이 혹한 속에서도 어딘가 곳곳에서 농성을 벌여야 하는 노동자·민중들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투쟁의 여파가 남긴 가혹한 현장 탄압이 목안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이기에, 이 혹한 속에서도 우리의 가슴 한구석엔 용광로와 같은 불씨가 조심스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년여간 우리는 수많은 투쟁을 경험해왔고, 많은 패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2000년 하반기의 투쟁 역시 그 연장선에 존재한다. 그러나 대형노조들의 무더기 파업,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의 외로운 투쟁의 한해였다고 기억하고 넘어가기엔 아쉬운 무언가가 있다. 이 글은 전력·통신 등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시작해 금융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진 2000년 하반기 동투에 대해 간략히 평가하고자 한다. 분명히 우리에게 남겨진 교훈과 과제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2001년 투쟁으로, 구조조정의 완전한 저지 투쟁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철저히 남겨진 우리들의 과제이다.
<b>전력 노동자들의 불발된 파업, 그러나 투쟁의 의미</b>
전력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것이다?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전력노동자들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파업이 불발로 그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가 불발된 파업에 대해 냉철히 평가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파업이 철회된 그 순간까지도 전력노동자들의 다수는 파업을 열망했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그들이 보수적 노동자들의 온상인 전력노동자들이었다는 '전력'을 지울 수 없기에, 그리고 짙은 어용성으로 채색된 노동조합 지도부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투쟁 의지와 열망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어찌보면 전력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불발에 그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도부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공공부문 사유화와 매각 정책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가 존재했으며, 전력파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자간의 대립 양상에 대한 판단이 미비했기 때문에, 파업을 열망하는 가슴 한 구석에 '과연 가능할 것인가'하는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것이 직권조인한 지도부를 당장에 뒤엎고 새롭게 대오를 일궈가지 못한 결정적인 한계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금번의 투쟁이 생존권 투쟁과 철저히 맞물리지 못한 투쟁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상당히 모순적이며 독특한 상황이다. 즉, 전력산업 구조조정 저지, 사유화 저지 투쟁이 전력노동자 개개인의 생존권 투쟁과 사실상 맞물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연결고리가 다소 약한 고리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파업의 불발과 불발 이후의 패배감과 무력감의 실체이다.
전력노동자들의 투쟁은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 1999년 여름 어용노조 체계에서 구성된 비대위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특별법' 저지를 목표로 활동했다. 총선과 맞물려있던 1999년의 지형은 특별법 저지라는 대국회 투쟁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2000년 간선제 집행부에 맞선 투쟁을 통해 새로이 구성된 지도부는 전력노조 내의 상대적 민주파(?)였을지는 몰라도, 절대적 민주지도부는 결코 아니었다. 이렇듯 특별법 저지라는 대국회·대정부 청원식 투쟁방식에 의존했고, 불철저한 전력노조 집행부의 활동은 실질적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활동인 조합원 동력을 추동해내는 것에 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노동자들의 '예외적'인 투쟁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파업 1차 불발시점인 11월 23일, 중노위에서 일정한 명분을 갖춰주리라 기대했던 지도부는 파업을 장담했다. 파업의 공언에 힘입어 명분을 찾고자하는 전형적인 어용노조의 논리였으리라. 사실 공공연대나 양노총 연대의 일정이 전혀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서, 23일의 파업이 시기상조라는 우려도 상당했다. 더구나 중앙집결 명령도 아닌 분산투쟁을 명령한 시점에서 대오가 집결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전국 17개 지역에 속속들이 집결해, 대오는 밤 9시가 넘어가자 1만6천 여명에 달했다. 2만4천 조합원 중 나이트 교대 근무자들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대오가 집결한 것이다. 지도부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당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측과 정부의 단호한 의지에, 준비하지도 않은 파업대오의 열기에 오히려 당황해버린 지도부는 첫번째의 불발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29일, 투어파업 명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도 조합원의 열기는 한차례 꺾였을 열기로 치기에는 예외적이었다. 두번째의 불발, 이제 노동자들도 노동조합도 남은 길은 하나였다. 파업이냐, 아니냐! 12월 3일, 본사 집결 명령에 낮부터 속속히 모여든 대오가 강당을 채우고 복도를 채워나갔다. 대략 4-5천의 대오와 곳곳에서 투어파업을 준비하는 대오가 합쳐 1만 여에 달했다. 강당은 끊임없이 '파업! 파업!'을 외치는 함성으로 드높았다. 두 번 꺾인 열기로 치기엔 여전히 예외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결국, 그리고 역시 직권조인이라는 카드를 선택했다.
지금 현장은 짙은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더구나 전형적인 양상이라 볼 수 있는 부당노동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12월 26일 12명에 대한 난데없는 부당 전출이 자행되었다. '조합원의 이동에 대해 사전에 조합과 협의한다'는 단체협약 사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전혀 반발없는(?) 부당전출이 이루어졌으며, 해당 사업소는 '사업소 분위기 저해'라는 명쾌한(?) 이유서를 제출했다. 4월로 예고되어 있는 6개 발전소로의 분할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봉합된 채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과 현장에 대한 통제가 늘어가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나 이 패배감과 분노는 또 다른 투쟁의 기반이다. 2000년 전력 투쟁이 생존권 투쟁과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약한 고리 때문에 패배했다면, 이제 이 현장에 대한 탄압과 실질적 구조조정이 강한 고리로의 전화의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챙겨야 할 첫번째의 교훈이다.
<b>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파업과 뼈저린 한계</b>
한국통신노동조합은 12월 18일 09시 45분, 파업을 선언했다. 6천여명으로 시작했던 대오는 파업선언 시점부터 계속 늘어갔다. 18일 오후 쏟아지는 장대비속에서도 거의 1만5천여명의 대오가 명동성당을 가득 채워갔다. 명동성당은 가히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인산인해였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경축미사라는 대대적 '이벤트'와 크리스마스 특수가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사랑과 평화를 수호하는 명동성당의 탄압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을 방불케 했다. 추위를 막아줄 텐트는커녕 깔판마저도 반입이 금지된 상황! 오줌 줄 1시간, 똥 줄 서너 시간이라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파업의 대오는 줄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파업 2-3일이 지나가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무서운 적응력은 비닐 한 장으로 가히 훌륭한(?) 집을 짓고, 소굴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카메라와 기자들이 진을 치던 전력투쟁과는 달리, 언론은 이들의 투쟁을 철저히 외면했다. 시작도 하지 않은 금융노동자들의 파업 뒤에 슬그머니 '명동성당에서는 한통노동자들이'하는 멘트가 고작이었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력노동조합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는 노동조합을 싸안고 가야만 하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그리고 하나의 역사로 기록될만한 투쟁력을 보여줬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비닐을 그냥 덮어쓰고 눈과 비를 온몸으로 막아냈던 그들의 투쟁열기가 갖는 연원은 무엇이었던가?
한국통신 노조의 요구안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강제명예퇴직(인력감축)·일방적 구조조정 중단으로, 1) 명예퇴직 시행 일방공고 사과 및 시한연장 중지(단협 위반) 2) 퇴직위로 성금 모금 강요행위 중지(근로기준법 위반) 3) 전화가설, 고장접수 등 전화운용 도급화 반대 4) 콜센터, OMC, TMC, PMC, 집중화계획 반대이다.
둘째, 한국통신 완전민영화 반대로 1) '전기통신사업법' 개악 반대 2) 외국인 소유한도 49% 확대 반대 3) 가입자망 공동이용제도·번호이동성·사전선택제·전기통신설비의 제공·사업의 겸업금지조항 등 독소조항을 반대한다.
셋째, 2000년 단체 교섭시 '인위적 인력감축은 없다'고 밝혔던 노사합의 사항을 즉각 이행할 것 등이다. 한국통신의 경우, 3천여명이 넘는 명예퇴직 방침을 통해, 이미 1천1백여명이 강제 명퇴를 당해야 했고, 7천여명에 이르는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부부사원은 퇴직강요의 1순위였으며, 부당전직·대기발령 등 각종 불법이 횡행해왔다. 인력풀제라는 기상천외한 제도의 도입으로 3천명이 아닌 3만여 노동자들을 손쉽게 잘라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생존에 대한 위협은 상상을 불허할 것이다.
이미 지난 2-3년 동안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모범'이라는 치욕스런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한국통신 노동자들이 더 이상 밀려나갈 곳은 전무했다. 1만2천여명의 동지가 일터를 떠나가는 것을 목격했고, 분사와 아웃소싱이 이미 실질적으로 추진된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매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유연화 정책은 그칠 줄 모르고 밀어닥쳐 왔다. 이 열악한 상황에서 그들이 파업을 이끌어갔던 바로 생존권 투쟁과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강한 고리! 바로 이것이 이들의 '대단한' 파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력노동조합의 불발된 파업과 직권조인이 빚어낸 노동자들의 투쟁에 새로운 자신감을 주는 계기로 작동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전력의 투쟁은 언론과 자본의 포화가 집중됨으로써 전력의 투쟁이 가지는 파급력을 사전에 차단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산되는 출구를 봉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전력의 합의와 그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결단서'가 마치 노동자들의 '결단서'인 양 포장되고 호들갑 떠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출구의 봉쇄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출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두번째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한계와 답답함을 발견한다. 한국통신 투쟁의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는 너무나도 투명하게 드러나 버렸다. 12월 19일 저녁 7시, 민주노총 집회에 계약직 노동자 7백여명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함께 투쟁하기 위해 전국에서 상경했다. 그러나 한국통신 노조는 '조합원들의 정서' 운운하며 그들을 내몰았다. 그들을 내몰고 나서 몇 일, 몇 달 부지할 목숨을 지키기 위한 치졸한 정규직들의 바램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탓으로 돌리기엔 다소 위험한 바 없지 않다.
비정규직의 확대, 그리고 그들을 잘라내려는 자본의 공세가, 정규직을 분열하고 정규직을 잘라내기 위한 사전수순이라는 것. 그 사실을 깨닫기에 아직은 무리였던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다시금 벼려야 하는 세번째의 교훈이다. 여전히 한통계약직 노조는 한달여 넘게 파업을 전개하고 있다. 전화가설, ADSL가설, 100번, SLMOS, 115접수도급 철회 및 2000년 노사합의 이행을 촉구하는 투쟁을 힘겹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투쟁 당시 합의했던 사항들이 지켜지지도 않고 있으며, 합의사안에서 슬그머니 감춰지고 은폐된 사항에 대해 외로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b>금융노동자들의 도전, 그리고 파업</b>
2000년 6월 7일, 조흥은행·한빛은행·외환은행을 지주회사 아래로 묶고, 나머지 은행도 강제적으로 합병하겠다는 금융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되었다. 금융노련은 이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관치금융 청산을 위한 특별법 제정, 금융지주회사법 제정 유보, 금융시장 혼란을 초래한 경제관료 퇴진 및 처벌, 협동조합 신용부문 분리정책 철폐, 금융 구조조조정에 대한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면서 파업체제를 정비해나갔다. 7월 10일, 3만여에 이르는 금융노동자들이 연세대학교에 집결했다. 연세대 노천광장은 파업의 열기와 집결하는 대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자정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이탈해가는 대오가 속출해갔다. 그리고 예견되었듯이 파업은 불발에 그쳤다.
금융노련 투쟁은 고용안정보다 '관치금융 철폐'라는 대국민적 이슈에 치중한 총파업 전술의 정합성 문제라고 평가한 바 있다.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이라는 생존권 투쟁에 견고히 기반하지 못한 투쟁의 한계, 그러나 이러한 평가의 자체적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관치금융 철폐, 금융지주회사법 유보 등에서 보여주었던 전술 자체의 한계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평가는 금번 동투의 과정에서 고스란히 답습된 채 연결되고 있다.
7월 11일에 불발된 파업은 5개월이라는 시간 끝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7월 11일 노정 합의서는 관치금융을 철폐하고 투명한 자율경영을 보장하기 위해, 은행의 자율경영과 금융정책 결정집행을 확실하고 투명하게 보장해주겠다고 명시했다. 이를 위해 국무총리 훈령 또는 국무회의 결정사항으로 공표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2단계 금융개혁에는 강제합병과 인원감축 강제행위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고, 부실금융기관에 대해 후순위채 매입 등을 통한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 방식으로 추진하여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과 '약속'을 믿고, 금융노련은 금융지주회사제도를 수용했고 파업을 철회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5개월만에 1인당 영업이익을 부당하에 적용하여 과도한 인원감축을 강제하였고, 소매금융을 주축으로 하는, 그러기에 인원감축 이외에는 하등의 시너지 효과도 없는 주택·국민은행의 합병을 강제추진하였다. 그리고는, 자회사 방식을 통한 정상화가 아닌 P&A 방식의 금융지주회사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이것은 정부의 '선언'과 '약속'을 전면 폐기하는 행위였다. 이것이 우리가 얻는 네번째의 교훈이기도 하다. 노정합의, 노사합의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무용지물임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수도 없이 정부와 자본의 농간에 말리고, 휘둘리면서도 끊임없이 합의주의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마는 이 모순적 상황에서 과연 노동조합 운동은 어떻게 탈출해나갈 것인가?
12월 22일, 결국 금융노련은 파업에 돌입했다.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을 주축으로 시작된 파업 역시도 '과연 할까?'의 논란거리를 야기했다. 그러나 앞서 얻은 교훈의 진실을 증명해주듯이 생존권과 결합된 투쟁은 '예외'를 더 이상의 예외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미 이들, 금융노동자들은 11개 은행의 퇴출과 4만8천 여명의 퇴출을 목격했다. 거의 일주일여간 일산 연수원에 터를 잡은 파업대오는 공권력 투입의 불안감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강고한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사전제압을 목표로 전력노동자들을 공략했던 정부로서는, 통신노동자들에 대한 일단의 제스츄어 정도로 2000년 동투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생존권 사수에 대한 열기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공권력이 개입되었다.
2000년 막바지 노-자 대립을 강력한 구조조정 드라이브의 관철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헬기가 동원되어 텐트와 농성장을 날려버리는 멋진 쇼. 그리고 28일 금융노련의 연대파업은 불발되었다. 그러나 연대파업의 불발은 헬기가 내뿜은 위력적인 바람도, 공권력의 위협도 아니었다. 평화·광주·경남·제주 은행의 금융노련 탈퇴선언, 그리고 김영삼을 찾아가 구걸한 일부 지역 노동조합의 작태, 그것이 금융노련 불발 파업의 핵심이었다. 합의안이 폐기처분된 상황에서도 정치권과 정부에 구걸하고 매달리는 것에 여전히 기대하고 바라는 의식적 잔재가 남아있는 것, 그리고 여전히 미력한 노동자간 연대의식. 이것이 우리가 남길 다섯번째의 교훈이다.
결국 12월 28일 16시 20분을 기해 금융노련의 파업은 유보되었고, 현재 비대위를 중심으로 조직복원을 위해 애쓰고 있다. 국민·주택, 신한·제주·한빛·평화·광주·경남 등 합병과 지주회사로 묶이는 조직은 국민과 주택, 신한과 제주, 한빛과 평화, 광주 경남은행 지부 및 회원조합 별로 공조체제를 만들어나기로 한 상황이다.
<b>공공연대와 양노총 연대에 대한 약평</b>
이번 과정에서 우리는 정부와 자본의 구조조정 관철의 확고한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였다. 전력과 통신의 선례에서 보여지는 전술적 치밀함, 그리고 금융파업에 대해 공권력 투입으로 맞선 강력한 추진력(?)이 그것이다. 현재 경제위기 논쟁이 치열해지는 시점에서 이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전략은 더욱 정교하게 진행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정세적 상황이 예견되었기에, 공공연대와 양노총의 공조투쟁의 필요성 역시 제기되었고, 추진되었다. 2000년 하반기 동투는 전력을 필두로 한 공공부문의 연대, 그리고 금융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어떻게 연결해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양노총의 연대, 공공부문의 연대는 필연적인 화두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의 목표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연대할 것인가'가 불철저한 상황에서 양노총의 연대이건, 공공연대이건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미 정부와 자본은 '연대'의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 제반의 책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조조정 일정의 분산으로 국회 일정에 막연하게 따라가게 만들고, 각각의 투쟁을 분산하고 고립시켰다. 3번이나 불발로 그친 전력의 파업일정이나, 양노총의 12월 5일 연대투쟁, 8일의 총파업, 철도·통신·건설·금융 등의 총파업 결의에 대해 양노총과 공공연대의 경우 일정맞추기 이상의 고민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금융의 경우, 역시 6개사의 선도투쟁과 28일 금융노련의 총파업은 맞아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단지 일정을 잘 산수하고 꿰어맞추면 운이 좋아 총파업이 성사되는 그런 양상이 결코 아니다. 공공연대와 양노총은 구조조정 저지와 생존권 사수를 위한 '정치적 총파업'을 계획해야 했으며, 이는 일정맞추기 이상의 고민을 요구한다. 더욱이 대오의 동력으로 적당히 밀어붙여 대정부 발언력과 협상력을 얻고자 하는 천편일률적인 합의주의에 빠져있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전술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어느샌가 고착된 동투의 경우, 국회일정의 유동성에 대책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출발부터 불안정했던 하반기 공조체제는 '협상력 증대'를 전제로 시작된 연대체제였기에 더욱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노정하게 된다. 협상력을 증대하기 위해서라도 전재되어야 할 투쟁 목표의 수립, 정권과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판단은 상이했으며, 목표 역시도 불분명했다. 구조조정의 전면적 철회와 정권에 대한 명확한 반대라는 목표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투쟁의 연대고리를 형성하며, 시기와 일정맞추기가 아닌 정치적 총파업을 위한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오히려 구조조정에 대한 일정한 용인, 노사정 파트너쉽 형성을 통한 타협의 여지에 대한 기대만이 충만했을 뿐이다. 공공연대와 양노총은 선언식 총파업 선포, 총파업 일정을 조정하는 수준에서 머물렀으며, 이조차도 수행하지 못한 무능력자임을 증명해보였다. 이 속에서 우리는 양노총의 연대이건간에, 신자유주의와 정권에 대한 미흡한 판단을 전제로 한 양보와 타협 그리고 합의전술의 무효성에 대해 깨달은 바 없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동투 뿐만 아니라, 전반적 노동조합 운동의 전술적 경향으로 이미 고착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구조조정 저지와 정권반대 투쟁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히 한다면, 투쟁의 배치와 연대의 확장을 위한 전술적·전략적 고민은 시급한 과제이다.
<b>범대위, 대책기구 식의 활동의 한계와 과제</b>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민영화) 및 해외매각 저지 범대위'는 1999년의 전력범대위와 2000년의 전력노조의 재편 속에서, 전력과 통신을 중심으로 한 전력범대위의 확대·재편 논의를 통해 시작되었다. 전력·통신·철도·가스를 중심으로 한 범대위의 확대재편은 공공연대 출범과 더불어 '사유화'와 '해외매각'을 막아내기 위한 새로운 중심축을 형성하자는 논의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해당노조의 불철저함과 양노총 공조에 대한 불안감은 범대위 확대·재편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통신·철도·가스 등의 사유화와 해외매각에 대한 대중적 불만과 전선 자체의 중요성은, 국가기간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대중적 연대투쟁을 조직해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결국 11월 16일 양노총을 포함한 41개 노동·사회·시민단체로 범대위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공부문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철폐의 의지조차 가지지 못한 노동조합과 연대해야 했던 범대위가, 주체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지도력을 관철해나갈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공공연대의 경우, 전력파업 자체에만 기대를 걸고 전력파업 여부에 따라 투쟁의 수위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11월 30일 공공연대의 공동투쟁은 29일 전력파업의 유보로 무산되었으며, 이후 일정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12월 3일 전력지도부의 직권조인이라는 대형사고로 인해 12월 4일 가졌던 양노총의 산별대표자 모임은 그야말로 '선언'과 '거짓'의 장이 되어버렸다.
즉, 실질적 연대로 나아가지 못한 공공연대, 구조조정에 대한 판단 자체가 불분명했던 양노총의 선언식 투쟁방식은 범대위의 활동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기에 투쟁계획이 없었던 주체와 함께 하는 범대위는 여론형성이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의 신문광고과 기자회견 이상의 투쟁계획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몇 년간 남발되었던 범대위 식의 활동에 대해 명확한 자기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지지·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남발되었던 이 대책기구, 외곽의 지원부대가 어느 새 껍데기뿐인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다. 현재 민중대회위원회를 중심으로 상설공투체로의 위상전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더욱 적극적 논의로 전화되어야 한다. 이는 특히 노동조합 운동이 사회적·정치적으로 과도하게 지도력을 구사하고, 할 수밖에 없는 현 시점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오류가 전체 운동의 오류로 직결되는 상황이 발생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전민중의 투쟁으로 전화되어갈 수 있는 구체적 접점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더욱이 필요한 논의이다. 먼저 주체들의 내부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범대위의 주축을 이루는 노동·사회·시민단체들의 경우, 그 자체가 가지는 운동의 특수성과 전문성·부문성으로 인해 정세적으로 중요한 쟁점에 대해 공동활동을 벌여내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다. 또한 독자적 투쟁을 위한 물리력을 동원하는데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자회견이나 신문광고, 성명서 발표, 혹은 토론회 정도의 사업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범대위가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단순 지원체계가 아니라, 자기계획을 가진 투쟁의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정세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좀더 밀도있게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투쟁 계획을 수립하는데 있어 좀더 심도깊은 논의를 진행해나가야 한다. 바로 이러한 힘을 가졌을 때만이 노동조합의 잘못된 판단과 직권조인 사태 등을 사전에 예방하고, 구속할 수 있는 '당연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노동조합 운동 역시도 범대위 구성을 통해 소위 '뜬' 시민단체의 발언을 기대하는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전 과정에서, 소위 시민단체가 노동자·민중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에 대해 제대로 된 발언을 하며, 함께 투쟁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지난 몇 년의 짧은 역사가 증명해보인 바 있다. 오히려 정권의 2중대로써, 자신들의 명망성을 이용해 노동자들의 투쟁에 혼란을 가져왔을 뿐이며, 부적절한 중재역할만을 서슴없이 자행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조조정 저지와 신자유주의 반대의 목표를 분명히 한 사회단체들이 힘을 결집하고 주체적 역량 강화를 통해 이들 시민운동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견인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 민중대회위원회의 논의 속에서도 충분히 녹아내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마지막으로 범대위는 노동조합 등 민중들의 투쟁과 함께 하는 '주체'로서 결합해야 한다. 신문광고나 기자회견을 넘어서는 투쟁의 다양한 계획과 개입의 방식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정치적·대중적 여론 형성을 위한 활동을 벌여내야 하며, 실질적인 지원·연대의 세력으로 거듭나야만 할 것이다.
이토록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을 오랜만에 맞는 듯하다. 그러나 하반기 투쟁을 끝내고 몸도 마음도 다소 지쳐있는 상황에서 몰아치고 있는 이 눈바람을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기뻐하기엔 힘에 겹다. 여전히 이 혹한 속에서도 어딘가 곳곳에서 농성을 벌여야 하는 노동자·민중들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투쟁의 여파가 남긴 가혹한 현장 탄압이 목안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이기에, 이 혹한 속에서도 우리의 가슴 한구석엔 용광로와 같은 불씨가 조심스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년여간 우리는 수많은 투쟁을 경험해왔고, 많은 패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2000년 하반기의 투쟁 역시 그 연장선에 존재한다. 그러나 대형노조들의 무더기 파업,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의 외로운 투쟁의 한해였다고 기억하고 넘어가기엔 아쉬운 무언가가 있다. 이 글은 전력·통신 등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시작해 금융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진 2000년 하반기 동투에 대해 간략히 평가하고자 한다. 분명히 우리에게 남겨진 교훈과 과제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2001년 투쟁으로, 구조조정의 완전한 저지 투쟁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철저히 남겨진 우리들의 과제이다.
<b>전력 노동자들의 불발된 파업, 그러나 투쟁의 의미</b>
전력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것이다?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전력노동자들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파업이 불발로 그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가 불발된 파업에 대해 냉철히 평가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파업이 철회된 그 순간까지도 전력노동자들의 다수는 파업을 열망했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그들이 보수적 노동자들의 온상인 전력노동자들이었다는 '전력'을 지울 수 없기에, 그리고 짙은 어용성으로 채색된 노동조합 지도부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투쟁 의지와 열망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어찌보면 전력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불발에 그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도부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공공부문 사유화와 매각 정책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가 존재했으며, 전력파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자간의 대립 양상에 대한 판단이 미비했기 때문에, 파업을 열망하는 가슴 한 구석에 '과연 가능할 것인가'하는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것이 직권조인한 지도부를 당장에 뒤엎고 새롭게 대오를 일궈가지 못한 결정적인 한계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금번의 투쟁이 생존권 투쟁과 철저히 맞물리지 못한 투쟁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상당히 모순적이며 독특한 상황이다. 즉, 전력산업 구조조정 저지, 사유화 저지 투쟁이 전력노동자 개개인의 생존권 투쟁과 사실상 맞물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연결고리가 다소 약한 고리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파업의 불발과 불발 이후의 패배감과 무력감의 실체이다.
전력노동자들의 투쟁은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 1999년 여름 어용노조 체계에서 구성된 비대위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특별법' 저지를 목표로 활동했다. 총선과 맞물려있던 1999년의 지형은 특별법 저지라는 대국회 투쟁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2000년 간선제 집행부에 맞선 투쟁을 통해 새로이 구성된 지도부는 전력노조 내의 상대적 민주파(?)였을지는 몰라도, 절대적 민주지도부는 결코 아니었다. 이렇듯 특별법 저지라는 대국회·대정부 청원식 투쟁방식에 의존했고, 불철저한 전력노조 집행부의 활동은 실질적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활동인 조합원 동력을 추동해내는 것에 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노동자들의 '예외적'인 투쟁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파업 1차 불발시점인 11월 23일, 중노위에서 일정한 명분을 갖춰주리라 기대했던 지도부는 파업을 장담했다. 파업의 공언에 힘입어 명분을 찾고자하는 전형적인 어용노조의 논리였으리라. 사실 공공연대나 양노총 연대의 일정이 전혀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서, 23일의 파업이 시기상조라는 우려도 상당했다. 더구나 중앙집결 명령도 아닌 분산투쟁을 명령한 시점에서 대오가 집결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전국 17개 지역에 속속들이 집결해, 대오는 밤 9시가 넘어가자 1만6천 여명에 달했다. 2만4천 조합원 중 나이트 교대 근무자들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대오가 집결한 것이다. 지도부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당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측과 정부의 단호한 의지에, 준비하지도 않은 파업대오의 열기에 오히려 당황해버린 지도부는 첫번째의 불발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29일, 투어파업 명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도 조합원의 열기는 한차례 꺾였을 열기로 치기에는 예외적이었다. 두번째의 불발, 이제 노동자들도 노동조합도 남은 길은 하나였다. 파업이냐, 아니냐! 12월 3일, 본사 집결 명령에 낮부터 속속히 모여든 대오가 강당을 채우고 복도를 채워나갔다. 대략 4-5천의 대오와 곳곳에서 투어파업을 준비하는 대오가 합쳐 1만 여에 달했다. 강당은 끊임없이 '파업! 파업!'을 외치는 함성으로 드높았다. 두 번 꺾인 열기로 치기엔 여전히 예외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결국, 그리고 역시 직권조인이라는 카드를 선택했다.
지금 현장은 짙은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더구나 전형적인 양상이라 볼 수 있는 부당노동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12월 26일 12명에 대한 난데없는 부당 전출이 자행되었다. '조합원의 이동에 대해 사전에 조합과 협의한다'는 단체협약 사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전혀 반발없는(?) 부당전출이 이루어졌으며, 해당 사업소는 '사업소 분위기 저해'라는 명쾌한(?) 이유서를 제출했다. 4월로 예고되어 있는 6개 발전소로의 분할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봉합된 채 하루하루 생존의 위협과 현장에 대한 통제가 늘어가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나 이 패배감과 분노는 또 다른 투쟁의 기반이다. 2000년 전력 투쟁이 생존권 투쟁과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약한 고리 때문에 패배했다면, 이제 이 현장에 대한 탄압과 실질적 구조조정이 강한 고리로의 전화의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챙겨야 할 첫번째의 교훈이다.
<b>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파업과 뼈저린 한계</b>
한국통신노동조합은 12월 18일 09시 45분, 파업을 선언했다. 6천여명으로 시작했던 대오는 파업선언 시점부터 계속 늘어갔다. 18일 오후 쏟아지는 장대비속에서도 거의 1만5천여명의 대오가 명동성당을 가득 채워갔다. 명동성당은 가히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인산인해였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경축미사라는 대대적 '이벤트'와 크리스마스 특수가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사랑과 평화를 수호하는 명동성당의 탄압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을 방불케 했다. 추위를 막아줄 텐트는커녕 깔판마저도 반입이 금지된 상황! 오줌 줄 1시간, 똥 줄 서너 시간이라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파업의 대오는 줄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파업 2-3일이 지나가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무서운 적응력은 비닐 한 장으로 가히 훌륭한(?) 집을 짓고, 소굴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카메라와 기자들이 진을 치던 전력투쟁과는 달리, 언론은 이들의 투쟁을 철저히 외면했다. 시작도 하지 않은 금융노동자들의 파업 뒤에 슬그머니 '명동성당에서는 한통노동자들이'하는 멘트가 고작이었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력노동조합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는 노동조합을 싸안고 가야만 하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그리고 하나의 역사로 기록될만한 투쟁력을 보여줬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비닐을 그냥 덮어쓰고 눈과 비를 온몸으로 막아냈던 그들의 투쟁열기가 갖는 연원은 무엇이었던가?
한국통신 노조의 요구안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강제명예퇴직(인력감축)·일방적 구조조정 중단으로, 1) 명예퇴직 시행 일방공고 사과 및 시한연장 중지(단협 위반) 2) 퇴직위로 성금 모금 강요행위 중지(근로기준법 위반) 3) 전화가설, 고장접수 등 전화운용 도급화 반대 4) 콜센터, OMC, TMC, PMC, 집중화계획 반대이다.
둘째, 한국통신 완전민영화 반대로 1) '전기통신사업법' 개악 반대 2) 외국인 소유한도 49% 확대 반대 3) 가입자망 공동이용제도·번호이동성·사전선택제·전기통신설비의 제공·사업의 겸업금지조항 등 독소조항을 반대한다.
셋째, 2000년 단체 교섭시 '인위적 인력감축은 없다'고 밝혔던 노사합의 사항을 즉각 이행할 것 등이다. 한국통신의 경우, 3천여명이 넘는 명예퇴직 방침을 통해, 이미 1천1백여명이 강제 명퇴를 당해야 했고, 7천여명에 이르는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부부사원은 퇴직강요의 1순위였으며, 부당전직·대기발령 등 각종 불법이 횡행해왔다. 인력풀제라는 기상천외한 제도의 도입으로 3천명이 아닌 3만여 노동자들을 손쉽게 잘라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생존에 대한 위협은 상상을 불허할 것이다.
이미 지난 2-3년 동안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모범'이라는 치욕스런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한국통신 노동자들이 더 이상 밀려나갈 곳은 전무했다. 1만2천여명의 동지가 일터를 떠나가는 것을 목격했고, 분사와 아웃소싱이 이미 실질적으로 추진된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매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정리해고와 유연화 정책은 그칠 줄 모르고 밀어닥쳐 왔다. 이 열악한 상황에서 그들이 파업을 이끌어갔던 바로 생존권 투쟁과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강한 고리! 바로 이것이 이들의 '대단한' 파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력노동조합의 불발된 파업과 직권조인이 빚어낸 노동자들의 투쟁에 새로운 자신감을 주는 계기로 작동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전력의 투쟁은 언론과 자본의 포화가 집중됨으로써 전력의 투쟁이 가지는 파급력을 사전에 차단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산되는 출구를 봉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전력의 합의와 그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결단서'가 마치 노동자들의 '결단서'인 양 포장되고 호들갑 떠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출구의 봉쇄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출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두번째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한계와 답답함을 발견한다. 한국통신 투쟁의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는 너무나도 투명하게 드러나 버렸다. 12월 19일 저녁 7시, 민주노총 집회에 계약직 노동자 7백여명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함께 투쟁하기 위해 전국에서 상경했다. 그러나 한국통신 노조는 '조합원들의 정서' 운운하며 그들을 내몰았다. 그들을 내몰고 나서 몇 일, 몇 달 부지할 목숨을 지키기 위한 치졸한 정규직들의 바램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탓으로 돌리기엔 다소 위험한 바 없지 않다.
비정규직의 확대, 그리고 그들을 잘라내려는 자본의 공세가, 정규직을 분열하고 정규직을 잘라내기 위한 사전수순이라는 것. 그 사실을 깨닫기에 아직은 무리였던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다시금 벼려야 하는 세번째의 교훈이다. 여전히 한통계약직 노조는 한달여 넘게 파업을 전개하고 있다. 전화가설, ADSL가설, 100번, SLMOS, 115접수도급 철회 및 2000년 노사합의 이행을 촉구하는 투쟁을 힘겹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투쟁 당시 합의했던 사항들이 지켜지지도 않고 있으며, 합의사안에서 슬그머니 감춰지고 은폐된 사항에 대해 외로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b>금융노동자들의 도전, 그리고 파업</b>
2000년 6월 7일, 조흥은행·한빛은행·외환은행을 지주회사 아래로 묶고, 나머지 은행도 강제적으로 합병하겠다는 금융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되었다. 금융노련은 이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관치금융 청산을 위한 특별법 제정, 금융지주회사법 제정 유보, 금융시장 혼란을 초래한 경제관료 퇴진 및 처벌, 협동조합 신용부문 분리정책 철폐, 금융 구조조조정에 대한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면서 파업체제를 정비해나갔다. 7월 10일, 3만여에 이르는 금융노동자들이 연세대학교에 집결했다. 연세대 노천광장은 파업의 열기와 집결하는 대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자정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이탈해가는 대오가 속출해갔다. 그리고 예견되었듯이 파업은 불발에 그쳤다.
금융노련 투쟁은 고용안정보다 '관치금융 철폐'라는 대국민적 이슈에 치중한 총파업 전술의 정합성 문제라고 평가한 바 있다.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이라는 생존권 투쟁에 견고히 기반하지 못한 투쟁의 한계, 그러나 이러한 평가의 자체적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관치금융 철폐, 금융지주회사법 유보 등에서 보여주었던 전술 자체의 한계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평가는 금번 동투의 과정에서 고스란히 답습된 채 연결되고 있다.
7월 11일에 불발된 파업은 5개월이라는 시간 끝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7월 11일 노정 합의서는 관치금융을 철폐하고 투명한 자율경영을 보장하기 위해, 은행의 자율경영과 금융정책 결정집행을 확실하고 투명하게 보장해주겠다고 명시했다. 이를 위해 국무총리 훈령 또는 국무회의 결정사항으로 공표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2단계 금융개혁에는 강제합병과 인원감축 강제행위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고, 부실금융기관에 대해 후순위채 매입 등을 통한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 방식으로 추진하여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과 '약속'을 믿고, 금융노련은 금융지주회사제도를 수용했고 파업을 철회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5개월만에 1인당 영업이익을 부당하에 적용하여 과도한 인원감축을 강제하였고, 소매금융을 주축으로 하는, 그러기에 인원감축 이외에는 하등의 시너지 효과도 없는 주택·국민은행의 합병을 강제추진하였다. 그리고는, 자회사 방식을 통한 정상화가 아닌 P&A 방식의 금융지주회사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이것은 정부의 '선언'과 '약속'을 전면 폐기하는 행위였다. 이것이 우리가 얻는 네번째의 교훈이기도 하다. 노정합의, 노사합의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무용지물임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수도 없이 정부와 자본의 농간에 말리고, 휘둘리면서도 끊임없이 합의주의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마는 이 모순적 상황에서 과연 노동조합 운동은 어떻게 탈출해나갈 것인가?
12월 22일, 결국 금융노련은 파업에 돌입했다.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을 주축으로 시작된 파업 역시도 '과연 할까?'의 논란거리를 야기했다. 그러나 앞서 얻은 교훈의 진실을 증명해주듯이 생존권과 결합된 투쟁은 '예외'를 더 이상의 예외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미 이들, 금융노동자들은 11개 은행의 퇴출과 4만8천 여명의 퇴출을 목격했다. 거의 일주일여간 일산 연수원에 터를 잡은 파업대오는 공권력 투입의 불안감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강고한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사전제압을 목표로 전력노동자들을 공략했던 정부로서는, 통신노동자들에 대한 일단의 제스츄어 정도로 2000년 동투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생존권 사수에 대한 열기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공권력이 개입되었다.
2000년 막바지 노-자 대립을 강력한 구조조정 드라이브의 관철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헬기가 동원되어 텐트와 농성장을 날려버리는 멋진 쇼. 그리고 28일 금융노련의 연대파업은 불발되었다. 그러나 연대파업의 불발은 헬기가 내뿜은 위력적인 바람도, 공권력의 위협도 아니었다. 평화·광주·경남·제주 은행의 금융노련 탈퇴선언, 그리고 김영삼을 찾아가 구걸한 일부 지역 노동조합의 작태, 그것이 금융노련 불발 파업의 핵심이었다. 합의안이 폐기처분된 상황에서도 정치권과 정부에 구걸하고 매달리는 것에 여전히 기대하고 바라는 의식적 잔재가 남아있는 것, 그리고 여전히 미력한 노동자간 연대의식. 이것이 우리가 남길 다섯번째의 교훈이다.
결국 12월 28일 16시 20분을 기해 금융노련의 파업은 유보되었고, 현재 비대위를 중심으로 조직복원을 위해 애쓰고 있다. 국민·주택, 신한·제주·한빛·평화·광주·경남 등 합병과 지주회사로 묶이는 조직은 국민과 주택, 신한과 제주, 한빛과 평화, 광주 경남은행 지부 및 회원조합 별로 공조체제를 만들어나기로 한 상황이다.
<b>공공연대와 양노총 연대에 대한 약평</b>
이번 과정에서 우리는 정부와 자본의 구조조정 관철의 확고한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였다. 전력과 통신의 선례에서 보여지는 전술적 치밀함, 그리고 금융파업에 대해 공권력 투입으로 맞선 강력한 추진력(?)이 그것이다. 현재 경제위기 논쟁이 치열해지는 시점에서 이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전략은 더욱 정교하게 진행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정세적 상황이 예견되었기에, 공공연대와 양노총의 공조투쟁의 필요성 역시 제기되었고, 추진되었다. 2000년 하반기 동투는 전력을 필두로 한 공공부문의 연대, 그리고 금융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어떻게 연결해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양노총의 연대, 공공부문의 연대는 필연적인 화두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의 목표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연대할 것인가'가 불철저한 상황에서 양노총의 연대이건, 공공연대이건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미 정부와 자본은 '연대'의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 제반의 책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조조정 일정의 분산으로 국회 일정에 막연하게 따라가게 만들고, 각각의 투쟁을 분산하고 고립시켰다. 3번이나 불발로 그친 전력의 파업일정이나, 양노총의 12월 5일 연대투쟁, 8일의 총파업, 철도·통신·건설·금융 등의 총파업 결의에 대해 양노총과 공공연대의 경우 일정맞추기 이상의 고민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금융의 경우, 역시 6개사의 선도투쟁과 28일 금융노련의 총파업은 맞아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단지 일정을 잘 산수하고 꿰어맞추면 운이 좋아 총파업이 성사되는 그런 양상이 결코 아니다. 공공연대와 양노총은 구조조정 저지와 생존권 사수를 위한 '정치적 총파업'을 계획해야 했으며, 이는 일정맞추기 이상의 고민을 요구한다. 더욱이 대오의 동력으로 적당히 밀어붙여 대정부 발언력과 협상력을 얻고자 하는 천편일률적인 합의주의에 빠져있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전술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어느샌가 고착된 동투의 경우, 국회일정의 유동성에 대책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출발부터 불안정했던 하반기 공조체제는 '협상력 증대'를 전제로 시작된 연대체제였기에 더욱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노정하게 된다. 협상력을 증대하기 위해서라도 전재되어야 할 투쟁 목표의 수립, 정권과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판단은 상이했으며, 목표 역시도 불분명했다. 구조조정의 전면적 철회와 정권에 대한 명확한 반대라는 목표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투쟁의 연대고리를 형성하며, 시기와 일정맞추기가 아닌 정치적 총파업을 위한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오히려 구조조정에 대한 일정한 용인, 노사정 파트너쉽 형성을 통한 타협의 여지에 대한 기대만이 충만했을 뿐이다. 공공연대와 양노총은 선언식 총파업 선포, 총파업 일정을 조정하는 수준에서 머물렀으며, 이조차도 수행하지 못한 무능력자임을 증명해보였다. 이 속에서 우리는 양노총의 연대이건간에, 신자유주의와 정권에 대한 미흡한 판단을 전제로 한 양보와 타협 그리고 합의전술의 무효성에 대해 깨달은 바 없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동투 뿐만 아니라, 전반적 노동조합 운동의 전술적 경향으로 이미 고착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구조조정 저지와 정권반대 투쟁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히 한다면, 투쟁의 배치와 연대의 확장을 위한 전술적·전략적 고민은 시급한 과제이다.
<b>범대위, 대책기구 식의 활동의 한계와 과제</b>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민영화) 및 해외매각 저지 범대위'는 1999년의 전력범대위와 2000년의 전력노조의 재편 속에서, 전력과 통신을 중심으로 한 전력범대위의 확대·재편 논의를 통해 시작되었다. 전력·통신·철도·가스를 중심으로 한 범대위의 확대재편은 공공연대 출범과 더불어 '사유화'와 '해외매각'을 막아내기 위한 새로운 중심축을 형성하자는 논의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해당노조의 불철저함과 양노총 공조에 대한 불안감은 범대위 확대·재편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통신·철도·가스 등의 사유화와 해외매각에 대한 대중적 불만과 전선 자체의 중요성은, 국가기간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대중적 연대투쟁을 조직해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결국 11월 16일 양노총을 포함한 41개 노동·사회·시민단체로 범대위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공부문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철폐의 의지조차 가지지 못한 노동조합과 연대해야 했던 범대위가, 주체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지도력을 관철해나갈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공공연대의 경우, 전력파업 자체에만 기대를 걸고 전력파업 여부에 따라 투쟁의 수위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11월 30일 공공연대의 공동투쟁은 29일 전력파업의 유보로 무산되었으며, 이후 일정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12월 3일 전력지도부의 직권조인이라는 대형사고로 인해 12월 4일 가졌던 양노총의 산별대표자 모임은 그야말로 '선언'과 '거짓'의 장이 되어버렸다.
즉, 실질적 연대로 나아가지 못한 공공연대, 구조조정에 대한 판단 자체가 불분명했던 양노총의 선언식 투쟁방식은 범대위의 활동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기에 투쟁계획이 없었던 주체와 함께 하는 범대위는 여론형성이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의 신문광고과 기자회견 이상의 투쟁계획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몇 년간 남발되었던 범대위 식의 활동에 대해 명확한 자기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지지·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남발되었던 이 대책기구, 외곽의 지원부대가 어느 새 껍데기뿐인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다. 현재 민중대회위원회를 중심으로 상설공투체로의 위상전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더욱 적극적 논의로 전화되어야 한다. 이는 특히 노동조합 운동이 사회적·정치적으로 과도하게 지도력을 구사하고, 할 수밖에 없는 현 시점에서, 노동조합 운동의 오류가 전체 운동의 오류로 직결되는 상황이 발생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전민중의 투쟁으로 전화되어갈 수 있는 구체적 접점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더욱이 필요한 논의이다. 먼저 주체들의 내부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범대위의 주축을 이루는 노동·사회·시민단체들의 경우, 그 자체가 가지는 운동의 특수성과 전문성·부문성으로 인해 정세적으로 중요한 쟁점에 대해 공동활동을 벌여내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다. 또한 독자적 투쟁을 위한 물리력을 동원하는데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자회견이나 신문광고, 성명서 발표, 혹은 토론회 정도의 사업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범대위가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단순 지원체계가 아니라, 자기계획을 가진 투쟁의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정세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좀더 밀도있게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투쟁 계획을 수립하는데 있어 좀더 심도깊은 논의를 진행해나가야 한다. 바로 이러한 힘을 가졌을 때만이 노동조합의 잘못된 판단과 직권조인 사태 등을 사전에 예방하고, 구속할 수 있는 '당연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노동조합 운동 역시도 범대위 구성을 통해 소위 '뜬' 시민단체의 발언을 기대하는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전 과정에서, 소위 시민단체가 노동자·민중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에 대해 제대로 된 발언을 하며, 함께 투쟁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지난 몇 년의 짧은 역사가 증명해보인 바 있다. 오히려 정권의 2중대로써, 자신들의 명망성을 이용해 노동자들의 투쟁에 혼란을 가져왔을 뿐이며, 부적절한 중재역할만을 서슴없이 자행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조조정 저지와 신자유주의 반대의 목표를 분명히 한 사회단체들이 힘을 결집하고 주체적 역량 강화를 통해 이들 시민운동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견인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 민중대회위원회의 논의 속에서도 충분히 녹아내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마지막으로 범대위는 노동조합 등 민중들의 투쟁과 함께 하는 '주체'로서 결합해야 한다. 신문광고나 기자회견을 넘어서는 투쟁의 다양한 계획과 개입의 방식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정치적·대중적 여론 형성을 위한 활동을 벌여내야 하며, 실질적인 지원·연대의 세력으로 거듭나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