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의 역사와 진실
인류의 역사에서 다양한 인종이나 종족간의 수많은 쟁투가 있어왔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로마 제국의 팽창, 몽고의 세계 재패, 중국 제국의 주기적인 팽창,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 지속적으로 반복된 정착민족에 대한 유목민족의 침입 등은 특정한 이민족이나 국가에 의한 원주민의 약탈과 원주민들의 항쟁 및 동화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역사 모두를 '제국주의와 항쟁의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손쉽게 제국주의라 칭하는 '독일 제국주의', '일본 제국주의', '미국 제국주의'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들은 모두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국주의라 부르는 현상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맞선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의 목적은 역사적 분석을 통해 이러한 질문에 시론적으로 답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과 미국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지배되어온 우리의 근현대사를 제국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세계화'가 논의되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반제국주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b>세계사적 지평에서 본 제국주의의 역사</b>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호전적 특성이나, 특정한 민족이나 특정 집단의 사악한 음모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물론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양상들이 드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주의의 복합적 결과들 중 하나의 요인일 뿐 결코 그것의 원인이나 본질은 아니다. 이는 종종 저항세력이 사용하는 폭력이 저항의 본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근대 세계에서 제국주의는 로마 제국이나 중국 제국의 팽창과 분명히 구별된다. 과거의 제국은 황제의 위엄이나 영광을 알리고 제국의 위계적 질서 속에 군소 부족이나 국가를 통합시킴으로써 힘에 의한 평화의 보장을 확보하는 세계적 정치체제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체제에 '공납'과 무역의 경제적 교류가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단적인 예로 명나라 때 거대 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 나아가 인도양까지 진출했던 정화의 원정대는 거대한 선단의 위세를 과시한 후 원주민들에게 중국의 도자기와 문물을 전해주고 그 대가로 제국에 대한 충성과 공납을 약속 받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중국 제국의 활동을 오늘날의 제국주의와 혼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의미의 제국주의는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민족국가체제의 고유한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16세기이래 서구 자본주의는 점차적으로 세계적 팽창을 추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남미와 북미,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주의는 자본주의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식민주의―그것이 프랑스처럼 강력한 동화주의 형태를 취했건, 영국처럼 원주민과 이주민의 이중사회 형태를 취했건―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앞세운 잉여의 수탈과 (준)노예적 노동에 근거한 것이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식민주의는 유럽에서 근대 민족국가 체제의 수립과 궤를 함께 한 현상이었다. 오랫동안 범유럽을 가로지르는 왕조 혹은 가문들 사이의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협정을 기점으로 민족국가간 경쟁으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 영토간 경계가 분명해졌고 '국부(nation wealth)'라는 관념이 출현했다. 이제 가문의 영광을 위한 귀족들만의 신성한 전쟁은 국부의 증진을 위한 상업의 활성화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국가의 출현으로 인해 자본가 집단은 국내외 왕조의 수탈이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의 이해를 보호할 수 있었다. 게다가 1798년 프랑스 혁명은 이와 같은 민족의 구성원이 바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유럽에서는 민족에 근거한 국가가 출현했던 것이다.
사실 민족과 국가는 다르다. 인류 역사상 국가나 국가와 유사한 조직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영토적 경계와 공통의 기원에 대한 집단적 상상을 내포하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것은 분명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적인 민족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국가나 영토에 소속된 모든 개인들의 시민권에 근거를 둔다. 그런 면에서 민족주권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권리에 터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민족의 원리가 한편으로는 자본의 자유로운 축적을 위한 방어와 동원의 논리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팽창의 논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의 자본주의가 본 궤도에 진입하면서 이와 같은 종류의 식민주의는 세계체제의 중심적 동력이 아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대외팽창은 '자유무역'이라는 외피를 띠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었다면, 그 공장에 투입되는 원료는 어디에선가 수입되어야 하고 또 그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은 어디에선가 판매되어야 한다. 영국은 이러한 자본의 요구를 자유무역이라는 형태로 반영했다. 이제 식민지에서의 정복과 약탈은 자유무역의 이면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식민주의와 구별되는 자유무역은 제국주의가 아닐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영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은 그들의 주장과 달리 자본축적의 구조적 불균등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산의 기술적 격차 혹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는 무역이 진행되는 상품들 사이의 가치가 구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게다가 중심부 국가와 주변부 국가의 임금 차이에 따른 '부등가 교환'도 존재한다.
따라서 영토적 식민주의나 자유무역주의는 그 형태나 작동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제국주의의 역사적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적인 특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적 특성인 것이다. 그러나 민족국가 질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내적 특성은 중국이나 로마식의 제국적 형태를 띠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고대의 제국이 아닌 세계 헤게모니에 의해 유지된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영국은 바로 그러한 헤게모니의 역할을 수행했다. 세계 헤게모니는 세계 질서에 평화를 보증할 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안정적 축적 경로를 보증한다. 그것은 단순히 개별 국가의 군사력이란 영토적 크기로 설명될 수 없는 구조적 특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이 산업화를 통해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할 수 있게 만드는 축적체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계 헤게모니는 여타 중심부 국가들에게 지도력을 의미하며 대다수의 주변부, 반주변부 국가들에게 종속을 의미한다. 중심부 국가들은 헤게모니 국가가 수립한 세계 질서에 협력하며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헤게모니 국가를 하나의 모델로 해서 그것을 따라잡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며 그 과정에서 대체로 국가는 자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며 자국의 시장을 방어하고자 한다. 반면 이러한 중심부 국가들의 협력과 경쟁은 모두 주변부 국가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종속'을 낳는다. 그 결과 종속국 혹은 주변부 국가의 진보나 발전은 체계적으로 억압된다. 이러한 종속은 단순한 상호의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 각인된 것으로 개별 국가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객관적인 힘이다. 게다가 주변부라 불리는 다양한 지역의 국가들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든―그것이 영토적 식민지의 형태를 취하건 그렇지 않건― 모두 '종속'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 번에 걸친 세계전쟁을 낳은 '제국주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구조적 위기와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자본의 특수한 요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수많은 이론적, 정치적 문헌들은 바로 이 시기 제국주의의 특수한 양상을 분석한 것들이었다. 19세기말에 영국의 자본주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처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이윤율 저하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위기로 인해 영국의 자본은 생산에서 철수하여 런던에 거점을 두고 전세계적 차원에 금융투자와 거래를 통해 이득을 올리는 금융적 확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금융적 확장은 가치와 잉여가치가 확장되고 생산과 고용이 증가되는 물질적 성장이 아니라 제한된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허구적 축적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존 헤게모니의 침식과 새로운 헤게모니를 둘러싼 쟁투를 수반한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영국의 핵심적 도전자로 등장했다. 그들은 영국이 세계 헤게모니가 되었던 역사적 과정을 모방해서 국가주도의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국가의 보호 하에서 급속한 따라잡기 전략을 추구했던 독일에서는 금속, 석유, 엔지니어링 등과 같이 거대한 산업 설비를 특징으로 하는 생산재 부문이 집중적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산업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민족적 팽창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생산 설비는 국가와 은행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트러스트와 카르텔을 통한 독점적 지위를 요구했다.
게다가 이러한 산업 규모의 거대화는 더 큰 시장을 요구했고 그 결과 지속적인 팽창을 자극했다. 바로 이러한 자본의 요구로 인해 독일 민족은 유럽에서 가장 뒤늦게 영토팽창적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조차 독일의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와 산업 및 국가의 결합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의 패배와 경제의 붕괴는 이러한 자본과 국가의 결합 및 그것의 팽창을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몰고 갔을 뿐이다.
이상의 역사적 분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근대적인 현상으로서 제국주의를 추동하는 힘은 군사적 논리나 사악한 민족의 도발적 정신이 아니라 자본의 특수한 요구에 있다. 둘째,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 내적 논리 속에 주변부 국가들의 종속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종속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셋째, 제국주의의 구체적인 양상은 자본축적의 특수한 요구와 결합되어 나타나며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식민주의, 자유무역주의, 제국주의 전쟁 등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이러한 시각에서 금세기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분석하는 것이다.
<b>20세기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b>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두 번에 걸쳐 인류를 전쟁 속으로 몰아넣고 난 이후 유럽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새롭게 세계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미국이 군사적 강대국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미국이 법인자본이라는 새로운 자본형태와 케인즈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결합시킴으로서 과거 영국이 형성했던 것과 같은 대안적 축적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법인 자본이었다. 미국의 법인 자본은 19세기 말 노동자들의 지역적 저항에 대응하고 자본간 경쟁을 극복하기 위해 이질적 형태의 기업들이 대륙적 규모로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를 제한하는 반독점법은 역설적으로 생산의 전후방 부분을 인수 및 합병을 통해 결합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낳았다. 그 결과 출현한 법인 자본은 영국의 가족적 중소규모 기업이나 독일식의 독점자본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영국의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조직혁명을 통해 영국식의 시장이나 미국식의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 자원을 동원하고 기업 내부의 거래를 통해 시장과 국가의 비용과 비효율을 극복했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이후 실현된 케인즈주의 정책은 금융의 자유를 억압하고 법인 기업의 자유를 촉진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의 금융은 영국식의 금융화가 아니라 산업적 팽창으로 흘러들면서도 동시에 독일처럼 보호주의나 영토적 팽창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2차 세계전쟁 이후 이와 같은 법인 자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제국주의가 실행되었다. 그것의 핵심은 자유 기업의 해외직접 투자라는 기업활동에 있다. 이는 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나 독일의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법인 기업은 농산물이나 원료와 같은 1차 자원이 아니라 자동차나 전기·전자 등과 같은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해외직접투자를 진행하며, 기업의 내적 활동을 통해 전세계의 잉여가치를 전유한다. 게다가 이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기업 내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제도화된 노조와 고임금을 통해 체계적으로 흡수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유기업 제국주의가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세계질서가 안정화되고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세계적 승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적 승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과거 식민주의로부터 고통받았던 민중들의 권리를 형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즉 과거의 주변부 지역에게 형식적인 민족자결권을 승인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헤게모니를 승인받고, 또 동시에 미국 법인기업의 범세계적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계를 냉전체제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2차 세계 전쟁 이후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하나의 세계주의(One Worldism)라는 이상을 자유세계(Free Worldism) 구상이라는 현실주의로 전환시켰다. 1947년 부채위기를 경험한 영국이 그리스로부터 철군을 결정하는 것을 계기로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내세워 세계를 두 개로, 즉 전체주의세계와 자유세계로 분할했다. 그리고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반공주의를 정당화했다. 소련은 불과 2년 사이에 2차대전의 영웅적 동맹국에서 내생적으로 악(惡)인 적국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이러한 자유세계주의와 냉전의 발명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발전의 발명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49년 1월 20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Truman)의 취임연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자유주의 혹은 자유세계주의 속에서 "발전"이라는 개념이 부여받은 새로운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머지않아 우리의 안정이 명백해지고,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의 이익을 깨닫고 증대하는 풍요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지금 우리에게 반대하는 나라들도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세계의 자유 국가들과 연대하여 국제적 분쟁의 정당한 해결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범세계적 발전주의는 유럽 재건과정에서 대한 미국의 개입을 통해 물질화되었다. 미국은 유럽 지역에서 미국의 "자유기업 제국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고, 나아가 민족적 재건 프로그램에 공산당의 주도력을 공격하는 방편으로 마샬 플랜을 발주하게 된다.
결국 마샬 플랜의 목적은 대서양 경제에서 미국 자유기업의 활동을 보장하고 법인 자본주의가 일반화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에 있었다. 마샬 플랜은 유럽의 국가독점적 전통을 부분적으로 해체하면서, 유럽에서 미국의 법인기업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미국식 "자유 기업 제국주의"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 결과 재건된 유럽은 독특한 국가주의적 전통을 유지했지만, 미국 자유기업의 활동 권한은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 양상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마샬 플랜과 국내 메카시 선풍에 토대를 두고 AFL은 유럽에 반공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출하고, 나아가 미국식 비즈니스 노조주의를 전파했다.
동시에 발전은 이제 인류의 현실적 목표이자 정책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였고, 자유세계의 연대를 위한 구호가 되었다. 그 결과 미래에 풍요 사회를 향유할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세계 지도상에 '저발전 지역'이 창안되었고, 저발전에서 발전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가 선포되었다. 여기서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는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이와 같은 냉전과 발전의 체제 속에 결합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 초국적 기업과 지역의 매판 자본, 그리고 국가가 결합하여 수입대체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여기서는 초국적 기업의 생산적 투자와 국내 기업의 결합과 국가의 지원을 통해 적극적으로 민족적 자립경제를 구축한다는 전략이 추진되었다.
물론 이들의 노선은 1980년대 외채 위기를 통해 좌절되었고 이들 지역에서 미국식 발전주의의 환상은 자명해졌다. 그렇다면 이들과 다른 형태의 길을 걸었던 동아시아의 '발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것은 상당부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정치군사적 고려가 우위에 놓인 미국의 전략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b>냉전 체제와 동아시아의 발전</b>
동아시아 지역은 2차 세계전쟁 이후 고도 성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냉전 자유주의 전략과 체계적으로 결합되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지적될 수 있는 사실은, 미국의 냉전 전략이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최고사령관(SCAP)은 일본에 대한 개혁과 처벌의 전략을 추진했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자유화, 탈군사화, 민주화 등의 목표를 담고 있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범들의 석방과 언론 및 표현의 자유, 군국주의자들의 공직추방, 상징 천황제와 영구평화의 내용을 담은 신헌법 제정, 총선의 실시 등이 진행되었다. 경제적으로는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에 짜이바스(재벌) 해체를 위한 반-트러스트 프로그램과 토지개혁, 그리고 노사관계의 개혁 등과 같은 경제민주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47년 냉전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중국에서 혁명군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미 점령군의 목표들은 개혁과 처벌에서 복구와 복권으로 전환되었다. 1947년 말 이러한 전환을 담은 케난 복구안(Kennan Restoration)에 따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8-1950년 사이에 진행되는 일본의 부흥을 위하여, 미국은 일본이 지역적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원료와 노동력을 얻는 배후지를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즉, 애치슨 선언과 돗지 라인(Dodge line)을 계기로 동남아시아를 일본의 배후지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국내적으로, 반-트러스트 프로그램은 후퇴하여 짜이바스는 해체되기보다는 개선되어, 다소 집중이 완화된 형태였지만 1950년대 중반에는 다시 번창하였다. 또한 거대 은행의 역할 역시 증대되었고, 국가 부문은 전쟁 이전의 기간보다 더 큰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
다음으로 인류 최초의 세계적 이념전쟁의 양상을 띤 "한국 전쟁의 발발"은 미국의 냉전 정책 및 세계적인 군비팽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부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실 미국이 추진한 마샬 플랜은 유럽 재건기간 동안 유럽 국가의 달러부족이라는 문제에 지속적으로 부딪혀왔다. 유럽 통합과 세계 경제 팽창은 더 많은 통화의 순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안은 대규모 군비의 확장을 통한 세계 경제 통화순환의 창출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전쟁의 발발은 그 때까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미 의회를 설득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954년 애치슨은 "한국은 잘 헤쳐나갔으며, 우리를 구했다. 그리고 우리라는 말에는 일본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첫번째 '우리'는 미국, 더 정확하게는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이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지속적인 군비 팽창을 국내적으로 정당화해냈던 것이다. 그 결과 1950-58년까지 미국의 해외 지원과 군비확장은 지속되었고, 1964-73년의 해외지원과 직접적인 군사팽창은 전 세계에 확장에 필요한 풍부한 자금을 순환시켰다. 이른바 전세계적인 군사적 케인즈주의가 확립된 것이다.
또 한국전쟁은 두 번째 '우리' 즉, 일본을 구했다. 한국전쟁은 1980년대까지 태평양 자본주의의 북동쪽 경계를 구획했고, 동시에 '일본의 마샬 플랜' 역할을 했다. 한국 전쟁에 사용되는 전쟁물자조달은 일본이 세계를 제압하는 산업발달을 추진하도록 재촉했으며, 동시에 일본 내에서 경찰과 군대가 부활하고, 나아가 좌익들을 배제시키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일본에서 시작해서 한국, 대만 등으로 확장하면서, 반공과 발전이 상관적임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케이스"를 창조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 지역의 방위비를 미국이 부담하는 형식을 띤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한 자국 시장의 개방, 동아시아 국내 시장 개방의 유보, 적극적인 수출 주도 산업화의 유도 등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미국 정책의 효과는 가장 먼저 일본에 영향을 미쳤고, 일본은 "나르는 기러기"의 최선두가 되어서 동아시아 여타 국가들이 모방할 수 있는 모범들을 만들었다.
우선 방위비 지출 부담을 면하게 된 일본 정부는 국가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경제팽창에 집중시킴으로써 일본을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고 지구상의 가장 먼 지역까지 상거래를 확장시켰다. 미국 정부는 1964년에 일본에서만 해외조달과 여타의 군사비 지출로 720억 달러를 지출했다. 전체적으로 1950∼70년 사이의 20년간 미국의 대일본 원조액은 연평균 5억 달러에 달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미국의 비호 하에서 일본의 재벌들은 독특한 일본식 하청망을 한국과 여타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적 팽창의 논리로 획득하지 못했던 경제적 배후지를 "지역 냉전의 논리"를 통해서 무료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61년에 로스토우(Walt W. Rostow)가 케네디 행정부에 합류했을 때, 그의 첫번째 계획 가운데 하나는 한국과 대만이 수출지향적 정책을 취하게 해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일본 경제에 이들을 재통합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이 처음으로 무역적자에 직면하게 되자, 케네디 행정부는 아이젠하워 시대의 비용이 많이 들고 재정을 고갈시키는 안보 프로그램을 버리고, 지역적 경기부양책―공공투자에 의한―으로 선회하여 한국이나 대만 같은 우방국을 좀더 자립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맥락을 볼 때, 미국 원조관리들의 반대가 없었다면 이 지역에서 "수입대체 산업화"는 지속되었을 것이고 "아시아의 기적"을 낳은 "수출주도 공업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의 경제발전의 객관적 조건은 2차 세계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된 냉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동아시아 국가의 "수출주도 산업화"는 어떤 국내 분업 연관이나 장기적 산업발전 계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수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출이 가능하려면 누군가는 수입을 해주어야 하는데, 바로 미국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수출은 그 자체로 국내 잉여의 유출을 낳고, 동시에 일본 하청망으로의 포섭을 강화시켰으며, 해외 차관에 대한 의존도를 증가시켰다.
게다가 그것은 재벌체제를 낳은 핵심적 원인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재벌 체제는 종속의 심화를 그 내적 배경으로 했다.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투자를 특징으로 했고 그 결과 1970년대 말 한국자본주의는 이윤율의 급속한 저하로 인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야만 했다. 또한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이라는 외적 계기에서 재벌들은 이윤율의 저하를 이윤량의 증대로 상쇄하고자 했고 이는 자본의 과잉축적과 그에 따른 위기를 앞당겼다. 이렇게 볼 때, 냉전의 해체와 이에 따른 미국의 경제논리 전면화와 국내적 과잉축적이라는 현재의 조건은 더 이상 한국의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없는 내외적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이에 답하기에 앞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내적 모순을 세계적 차원에서 다시 한번 분석해보자.
<b>오늘날 제국주의와 그 내적 모순</b>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초국적 법인 자본의 금융화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 제국주의의 핵심적 위치에 존재했던 자유기업이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된 이후 그 자신의 내적 한계에 부딪혔고 그 결과 전세계적 차원에서 생산으로부터 금융의 공간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오늘날의 자본축적이 더 이상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축적의 필수적인 형태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 금융화를 추동하고 있는 초국적 자본들은 새로운 상품 시장으로 기능할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식민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다수 무역 거래는 몇몇 중심부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면 그런 면에서 그들 사이에는 경쟁과 협력이 공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모순은 제국주의 열강의 충돌이 아니라 기존의 민족국가간 체계와 그 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민족국가 양자를 해체시키는 격렬한 '포섭'과 '배제'의 모순이라는 형태를 띤다. 초국적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오늘날의 자본축적은 점점 더 민족국가의 틀을 뛰어넘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세계 경제의 중심은 특정한 민족국가―이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중심부 국가의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물질적 양보와 방어막을 제공해왔다―가 아니라 세계의 주요한 도시들, 즉 뉴욕, 런던, 동경 등의 세계도시(global city)의 금융 네트워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분석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들 도시에 상주하는 금융 자본가들은 이들 국가의 경찰에 의해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적 경비기관들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중심부 국가의 자본축적 전략은 수렴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과거와 같은 세계전쟁을 추동하는 중심부 국가간 갈등과 충돌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오늘날 자본은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나 특정한 지역을 배제해 버리며, 그 결과 세계 곳곳에서 버려진 땅이 출현하고 있다. 아프리카나 동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바로 이러한 운명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주변부 지역에서 중심부의 금융시장을 향한 국내 자본의 유출과 자본도피가 일상화된다. 최근 이들 지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인종적 분규들의 이면에 놓여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경향인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매우 역설적인 현상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의 저항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이 다른 지역을 배제하고 자본주의 세계질서, 예컨대 EU나 NAFTA와 같은 경제 블럭에 포섭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오늘날 한국을 지배하는 힘도 바로 이와 같은 경향이다.
해방 이후 최초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한국을 떠나 보다 안전하고 평온한 지역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모순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지역 경제의 붕괴라는 현상을 지역감정을 통해 해석하는 민족 해체적 경향 또한,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 제기되는 아시아 경제블록의 형성은 좀더 가난한 지역을 배제하고 EU에 참여하려는 동유럽 국가들의 충동에 유비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제국주의, 즉 금융세계화의 또 다른 면은 그것이 중심부 국가들 내에서 '성공한 자들의 이탈'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금융적 팽창은 그 필연적 동반자로 노동의 불안정화와 공공성의 해체를 수반한다. 자본은 자신들만의 '담장쳐진 도시'에서 허구적 축적과 귀족적 소비에 골몰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약속되었던 완전고용은 철회되고, 노동조건은 악화되며, 성적 인종적 배제와 초과 착취는 증가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종종 이들은 주식시장과 각종 펀드에 참여함으로써 금융적 이득의 극히 작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지만 그조차 모든 노동자들에게 평생동안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민중의 권리를 침식하고 그것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쇠퇴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동아시아 외환 및 금융 위기는 바로 이러한 모순의 필연적 귀결이다. 냉전이 해체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더 이상 동아시아가 예외적 성장의 지역으로 남을 수는 없다. 동아시아도 국제적인 금융 규범에 따라 구조조정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초국적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금융세계화에 포섭될 것인가 아니면 배제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선택의 답은 이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즉 동아시아의 자본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하위 파트너로 금융세계화에 동참할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의 구체적 형태가 어떤 것일지 확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직도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북한을 그러한 체제 속에 포섭시켜줄 것인지, 아니면 배제할 것인지, 미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 지배의 구체적 형태는 어떤 양상을 띨 것인지, 중국의 구조조정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등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객관적 경향이 오늘날 제국주의의 모순의 전개라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원인에서 파생하는 결과들은 비록 그 형태가 변화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b>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와 의미</b>
식민주의, 자유무역주의, 제국주의 전쟁, 나아가 자유기업주의, 금융세계화 모두가 제국주의의 역사적 형태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내적 모순을 가지는 것이었고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민중적 저항에 부딪혀왔다. 유럽에서 형성된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민족국가간 체계는 근본적으로 식민지 민중의 자주적 권리와 유럽 내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이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운동이 범세계적으로 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 운동들은 제국주의의 상대적 안정기였던 자유무역주의가 위기에 처하면서 범세계적 차원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종종 결합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역사적 조건 속에 이와 같은 저항을 주도했던 힘은 바로 '노동자 국제주의'였다. 그것의 핵심은 범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 민중의 주도하에 개별 민족국가를 변혁하고 대안적인 생산방식을 재조직하는 운동을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혁명적으로 전화시켜낸다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국제적 행동만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전세계 노동자들은 국경을 가로질러 봉기를 일으킬 수 있었고, 주변부의 수많은 민중들―한국인들을 포함하여―이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변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제국주의 전쟁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격적 민족주의와 부르주아적 평화주의에 포섭됨으로 인해 좌절을 맞게 된다. 그리고 전쟁 이후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들은 전쟁 참여에 대한 대가로 개별 민족국가 내에서 나름의 경제적·사회적 권리와 이득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 외부의 국가들은 윌슨의 형식적인 민족자결권 원리와 트루먼의 반공·발전주의에 부분적으로 포섭된다. 그러나 몇몇 제3세계의 민중들은 이와 같은 약속이 허구적이며 민족자결권이 결코 민중들의 자주적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가 처한 구조적 종속에 맞서고 미국이 제시한 발전이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가 결정하는, 더욱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발전의 대안을 실행하고자 했다.
오늘날 제국주의적 금융세계화는 중심부 노동의 사회경제적 이득과 주변부 민중들의 민주적 발전 양자 모두에 대한 구조적 제약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이는 종종 중심부 노동자들에게 격렬한 민족주의적 정서―이는 과거 자신들이 전쟁참여를 통해 사수했고 전후에 자신들에게 물질적 안정을 부분적으로 보장했던 민족국가적 정책들을 유지하려는 즉자적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이다―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적으로 덜 가난한 지역 노동자들에게 금융적 확장 질서에 포섭되기 위해 여타의 버려진 지역을 배제하도록 만드는 강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국제주의의 이념이 재창조될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에서도 사실이다. 아시아 지역의 민중적 연대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 지역의 독자적인 경제적 블록은 제2의 대동아 공영권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그것을 국제적 차원에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어떠한 민족적 경제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우차를 인수하고자 하는 초국적 자본은 과연 생산적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가 금융적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가, 현재의 주식시장은 과연 생산과 고용의 확장에 봉사하는가, 해외 '투자'형태를 띤 한국 자본의 해외 도피는 과연 민족 경제에 봉사하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 국제주의에 도달하는 '민족적' 길은 상이할 수 있다. 개별 국가의 민중적·민주적 재편 없는 국제주의는 공허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현재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종속을 심화시키고 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정권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넘어서는 국제적 시야와 연대의 전망이 없이, 그리고 보다 강화된 국제적 공동행동 없이 그러한 투쟁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 개별 민족의 이해를 뛰어넘어 범세계적인 민중적 쟁점을 제기하고 그것을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오늘날 금융의 세계화와 그에 따른 배제와 포섭은 바로 이러한 민중적 쟁점의 핵심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는 민족적 이해는 전세계 민중들 내부에서 더 큰 분열과 자기파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역사적 분석을 통해 이러한 질문에 시론적으로 답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과 미국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지배되어온 우리의 근현대사를 제국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세계화'가 논의되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반제국주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b>세계사적 지평에서 본 제국주의의 역사</b>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호전적 특성이나, 특정한 민족이나 특정 집단의 사악한 음모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물론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양상들이 드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주의의 복합적 결과들 중 하나의 요인일 뿐 결코 그것의 원인이나 본질은 아니다. 이는 종종 저항세력이 사용하는 폭력이 저항의 본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근대 세계에서 제국주의는 로마 제국이나 중국 제국의 팽창과 분명히 구별된다. 과거의 제국은 황제의 위엄이나 영광을 알리고 제국의 위계적 질서 속에 군소 부족이나 국가를 통합시킴으로써 힘에 의한 평화의 보장을 확보하는 세계적 정치체제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체제에 '공납'과 무역의 경제적 교류가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단적인 예로 명나라 때 거대 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 나아가 인도양까지 진출했던 정화의 원정대는 거대한 선단의 위세를 과시한 후 원주민들에게 중국의 도자기와 문물을 전해주고 그 대가로 제국에 대한 충성과 공납을 약속 받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중국 제국의 활동을 오늘날의 제국주의와 혼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의미의 제국주의는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민족국가체제의 고유한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16세기이래 서구 자본주의는 점차적으로 세계적 팽창을 추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남미와 북미,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주의는 자본주의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식민주의―그것이 프랑스처럼 강력한 동화주의 형태를 취했건, 영국처럼 원주민과 이주민의 이중사회 형태를 취했건―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앞세운 잉여의 수탈과 (준)노예적 노동에 근거한 것이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식민주의는 유럽에서 근대 민족국가 체제의 수립과 궤를 함께 한 현상이었다. 오랫동안 범유럽을 가로지르는 왕조 혹은 가문들 사이의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협정을 기점으로 민족국가간 경쟁으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 영토간 경계가 분명해졌고 '국부(nation wealth)'라는 관념이 출현했다. 이제 가문의 영광을 위한 귀족들만의 신성한 전쟁은 국부의 증진을 위한 상업의 활성화와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국가의 출현으로 인해 자본가 집단은 국내외 왕조의 수탈이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의 이해를 보호할 수 있었다. 게다가 1798년 프랑스 혁명은 이와 같은 민족의 구성원이 바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유럽에서는 민족에 근거한 국가가 출현했던 것이다.
사실 민족과 국가는 다르다. 인류 역사상 국가나 국가와 유사한 조직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영토적 경계와 공통의 기원에 대한 집단적 상상을 내포하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것은 분명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적인 민족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국가나 영토에 소속된 모든 개인들의 시민권에 근거를 둔다. 그런 면에서 민족주권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권리에 터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민족의 원리가 한편으로는 자본의 자유로운 축적을 위한 방어와 동원의 논리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 팽창의 논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의 자본주의가 본 궤도에 진입하면서 이와 같은 종류의 식민주의는 세계체제의 중심적 동력이 아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대외팽창은 '자유무역'이라는 외피를 띠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었다면, 그 공장에 투입되는 원료는 어디에선가 수입되어야 하고 또 그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은 어디에선가 판매되어야 한다. 영국은 이러한 자본의 요구를 자유무역이라는 형태로 반영했다. 이제 식민지에서의 정복과 약탈은 자유무역의 이면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식민주의와 구별되는 자유무역은 제국주의가 아닐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영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은 그들의 주장과 달리 자본축적의 구조적 불균등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산의 기술적 격차 혹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는 무역이 진행되는 상품들 사이의 가치가 구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게다가 중심부 국가와 주변부 국가의 임금 차이에 따른 '부등가 교환'도 존재한다.
따라서 영토적 식민주의나 자유무역주의는 그 형태나 작동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제국주의의 역사적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적인 특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적 특성인 것이다. 그러나 민족국가 질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내적 특성은 중국이나 로마식의 제국적 형태를 띠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고대의 제국이 아닌 세계 헤게모니에 의해 유지된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영국은 바로 그러한 헤게모니의 역할을 수행했다. 세계 헤게모니는 세계 질서에 평화를 보증할 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안정적 축적 경로를 보증한다. 그것은 단순히 개별 국가의 군사력이란 영토적 크기로 설명될 수 없는 구조적 특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이 산업화를 통해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할 수 있게 만드는 축적체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계 헤게모니는 여타 중심부 국가들에게 지도력을 의미하며 대다수의 주변부, 반주변부 국가들에게 종속을 의미한다. 중심부 국가들은 헤게모니 국가가 수립한 세계 질서에 협력하며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헤게모니 국가를 하나의 모델로 해서 그것을 따라잡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며 그 과정에서 대체로 국가는 자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며 자국의 시장을 방어하고자 한다. 반면 이러한 중심부 국가들의 협력과 경쟁은 모두 주변부 국가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종속'을 낳는다. 그 결과 종속국 혹은 주변부 국가의 진보나 발전은 체계적으로 억압된다. 이러한 종속은 단순한 상호의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 각인된 것으로 개별 국가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객관적인 힘이다. 게다가 주변부라 불리는 다양한 지역의 국가들은 그 형태가 어떠한 것이든―그것이 영토적 식민지의 형태를 취하건 그렇지 않건― 모두 '종속'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 번에 걸친 세계전쟁을 낳은 '제국주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구조적 위기와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자본의 특수한 요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수많은 이론적, 정치적 문헌들은 바로 이 시기 제국주의의 특수한 양상을 분석한 것들이었다. 19세기말에 영국의 자본주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처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이윤율 저하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위기로 인해 영국의 자본은 생산에서 철수하여 런던에 거점을 두고 전세계적 차원에 금융투자와 거래를 통해 이득을 올리는 금융적 확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금융적 확장은 가치와 잉여가치가 확장되고 생산과 고용이 증가되는 물질적 성장이 아니라 제한된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허구적 축적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존 헤게모니의 침식과 새로운 헤게모니를 둘러싼 쟁투를 수반한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영국의 핵심적 도전자로 등장했다. 그들은 영국이 세계 헤게모니가 되었던 역사적 과정을 모방해서 국가주도의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국가의 보호 하에서 급속한 따라잡기 전략을 추구했던 독일에서는 금속, 석유, 엔지니어링 등과 같이 거대한 산업 설비를 특징으로 하는 생산재 부문이 집중적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산업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민족적 팽창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생산 설비는 국가와 은행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트러스트와 카르텔을 통한 독점적 지위를 요구했다.
게다가 이러한 산업 규모의 거대화는 더 큰 시장을 요구했고 그 결과 지속적인 팽창을 자극했다. 바로 이러한 자본의 요구로 인해 독일 민족은 유럽에서 가장 뒤늦게 영토팽창적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조차 독일의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와 산업 및 국가의 결합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의 패배와 경제의 붕괴는 이러한 자본과 국가의 결합 및 그것의 팽창을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몰고 갔을 뿐이다.
이상의 역사적 분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근대적인 현상으로서 제국주의를 추동하는 힘은 군사적 논리나 사악한 민족의 도발적 정신이 아니라 자본의 특수한 요구에 있다. 둘째,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 내적 논리 속에 주변부 국가들의 종속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종속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셋째, 제국주의의 구체적인 양상은 자본축적의 특수한 요구와 결합되어 나타나며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식민주의, 자유무역주의, 제국주의 전쟁 등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문제는 이러한 시각에서 금세기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분석하는 것이다.
<b>20세기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b>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두 번에 걸쳐 인류를 전쟁 속으로 몰아넣고 난 이후 유럽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새롭게 세계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미국이 군사적 강대국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헤게모니에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미국이 법인자본이라는 새로운 자본형태와 케인즈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결합시킴으로서 과거 영국이 형성했던 것과 같은 대안적 축적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법인 자본이었다. 미국의 법인 자본은 19세기 말 노동자들의 지역적 저항에 대응하고 자본간 경쟁을 극복하기 위해 이질적 형태의 기업들이 대륙적 규모로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를 제한하는 반독점법은 역설적으로 생산의 전후방 부분을 인수 및 합병을 통해 결합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낳았다. 그 결과 출현한 법인 자본은 영국의 가족적 중소규모 기업이나 독일식의 독점자본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영국의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조직혁명을 통해 영국식의 시장이나 미국식의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 자원을 동원하고 기업 내부의 거래를 통해 시장과 국가의 비용과 비효율을 극복했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이후 실현된 케인즈주의 정책은 금융의 자유를 억압하고 법인 기업의 자유를 촉진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의 금융은 영국식의 금융화가 아니라 산업적 팽창으로 흘러들면서도 동시에 독일처럼 보호주의나 영토적 팽창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2차 세계전쟁 이후 이와 같은 법인 자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제국주의가 실행되었다. 그것의 핵심은 자유 기업의 해외직접 투자라는 기업활동에 있다. 이는 영국의 자유무역 제국주의나 독일의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법인 기업은 농산물이나 원료와 같은 1차 자원이 아니라 자동차나 전기·전자 등과 같은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해외직접투자를 진행하며, 기업의 내적 활동을 통해 전세계의 잉여가치를 전유한다. 게다가 이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기업 내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제도화된 노조와 고임금을 통해 체계적으로 흡수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유기업 제국주의가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세계질서가 안정화되고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세계적 승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적 승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과거 식민주의로부터 고통받았던 민중들의 권리를 형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즉 과거의 주변부 지역에게 형식적인 민족자결권을 승인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헤게모니를 승인받고, 또 동시에 미국 법인기업의 범세계적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계를 냉전체제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2차 세계 전쟁 이후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하나의 세계주의(One Worldism)라는 이상을 자유세계(Free Worldism) 구상이라는 현실주의로 전환시켰다. 1947년 부채위기를 경험한 영국이 그리스로부터 철군을 결정하는 것을 계기로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내세워 세계를 두 개로, 즉 전체주의세계와 자유세계로 분할했다. 그리고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반공주의를 정당화했다. 소련은 불과 2년 사이에 2차대전의 영웅적 동맹국에서 내생적으로 악(惡)인 적국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이러한 자유세계주의와 냉전의 발명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발전의 발명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49년 1월 20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Truman)의 취임연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자유주의 혹은 자유세계주의 속에서 "발전"이라는 개념이 부여받은 새로운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머지않아 우리의 안정이 명백해지고,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의 이익을 깨닫고 증대하는 풍요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지금 우리에게 반대하는 나라들도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세계의 자유 국가들과 연대하여 국제적 분쟁의 정당한 해결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범세계적 발전주의는 유럽 재건과정에서 대한 미국의 개입을 통해 물질화되었다. 미국은 유럽 지역에서 미국의 "자유기업 제국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고, 나아가 민족적 재건 프로그램에 공산당의 주도력을 공격하는 방편으로 마샬 플랜을 발주하게 된다.
결국 마샬 플랜의 목적은 대서양 경제에서 미국 자유기업의 활동을 보장하고 법인 자본주의가 일반화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에 있었다. 마샬 플랜은 유럽의 국가독점적 전통을 부분적으로 해체하면서, 유럽에서 미국의 법인기업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미국식 "자유 기업 제국주의"의 토대를 구축했다. 그 결과 재건된 유럽은 독특한 국가주의적 전통을 유지했지만, 미국 자유기업의 활동 권한은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 양상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마샬 플랜과 국내 메카시 선풍에 토대를 두고 AFL은 유럽에 반공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출하고, 나아가 미국식 비즈니스 노조주의를 전파했다.
동시에 발전은 이제 인류의 현실적 목표이자 정책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였고, 자유세계의 연대를 위한 구호가 되었다. 그 결과 미래에 풍요 사회를 향유할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세계 지도상에 '저발전 지역'이 창안되었고, 저발전에서 발전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발전의 시대'가 선포되었다. 여기서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는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이와 같은 냉전과 발전의 체제 속에 결합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 초국적 기업과 지역의 매판 자본, 그리고 국가가 결합하여 수입대체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여기서는 초국적 기업의 생산적 투자와 국내 기업의 결합과 국가의 지원을 통해 적극적으로 민족적 자립경제를 구축한다는 전략이 추진되었다.
물론 이들의 노선은 1980년대 외채 위기를 통해 좌절되었고 이들 지역에서 미국식 발전주의의 환상은 자명해졌다. 그렇다면 이들과 다른 형태의 길을 걸었던 동아시아의 '발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것은 상당부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정치군사적 고려가 우위에 놓인 미국의 전략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b>냉전 체제와 동아시아의 발전</b>
동아시아 지역은 2차 세계전쟁 이후 고도 성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냉전 자유주의 전략과 체계적으로 결합되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지적될 수 있는 사실은, 미국의 냉전 전략이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최고사령관(SCAP)은 일본에 대한 개혁과 처벌의 전략을 추진했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자유화, 탈군사화, 민주화 등의 목표를 담고 있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범들의 석방과 언론 및 표현의 자유, 군국주의자들의 공직추방, 상징 천황제와 영구평화의 내용을 담은 신헌법 제정, 총선의 실시 등이 진행되었다. 경제적으로는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에 짜이바스(재벌) 해체를 위한 반-트러스트 프로그램과 토지개혁, 그리고 노사관계의 개혁 등과 같은 경제민주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47년 냉전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중국에서 혁명군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미 점령군의 목표들은 개혁과 처벌에서 복구와 복권으로 전환되었다. 1947년 말 이러한 전환을 담은 케난 복구안(Kennan Restoration)에 따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8-1950년 사이에 진행되는 일본의 부흥을 위하여, 미국은 일본이 지역적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원료와 노동력을 얻는 배후지를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즉, 애치슨 선언과 돗지 라인(Dodge line)을 계기로 동남아시아를 일본의 배후지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국내적으로, 반-트러스트 프로그램은 후퇴하여 짜이바스는 해체되기보다는 개선되어, 다소 집중이 완화된 형태였지만 1950년대 중반에는 다시 번창하였다. 또한 거대 은행의 역할 역시 증대되었고, 국가 부문은 전쟁 이전의 기간보다 더 큰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
다음으로 인류 최초의 세계적 이념전쟁의 양상을 띤 "한국 전쟁의 발발"은 미국의 냉전 정책 및 세계적인 군비팽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부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실 미국이 추진한 마샬 플랜은 유럽 재건기간 동안 유럽 국가의 달러부족이라는 문제에 지속적으로 부딪혀왔다. 유럽 통합과 세계 경제 팽창은 더 많은 통화의 순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안은 대규모 군비의 확장을 통한 세계 경제 통화순환의 창출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전쟁의 발발은 그 때까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미 의회를 설득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954년 애치슨은 "한국은 잘 헤쳐나갔으며, 우리를 구했다. 그리고 우리라는 말에는 일본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첫번째 '우리'는 미국, 더 정확하게는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이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지속적인 군비 팽창을 국내적으로 정당화해냈던 것이다. 그 결과 1950-58년까지 미국의 해외 지원과 군비확장은 지속되었고, 1964-73년의 해외지원과 직접적인 군사팽창은 전 세계에 확장에 필요한 풍부한 자금을 순환시켰다. 이른바 전세계적인 군사적 케인즈주의가 확립된 것이다.
또 한국전쟁은 두 번째 '우리' 즉, 일본을 구했다. 한국전쟁은 1980년대까지 태평양 자본주의의 북동쪽 경계를 구획했고, 동시에 '일본의 마샬 플랜' 역할을 했다. 한국 전쟁에 사용되는 전쟁물자조달은 일본이 세계를 제압하는 산업발달을 추진하도록 재촉했으며, 동시에 일본 내에서 경찰과 군대가 부활하고, 나아가 좌익들을 배제시키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일본에서 시작해서 한국, 대만 등으로 확장하면서, 반공과 발전이 상관적임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케이스"를 창조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 지역의 방위비를 미국이 부담하는 형식을 띤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한 자국 시장의 개방, 동아시아 국내 시장 개방의 유보, 적극적인 수출 주도 산업화의 유도 등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미국 정책의 효과는 가장 먼저 일본에 영향을 미쳤고, 일본은 "나르는 기러기"의 최선두가 되어서 동아시아 여타 국가들이 모방할 수 있는 모범들을 만들었다.
우선 방위비 지출 부담을 면하게 된 일본 정부는 국가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경제팽창에 집중시킴으로써 일본을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고 지구상의 가장 먼 지역까지 상거래를 확장시켰다. 미국 정부는 1964년에 일본에서만 해외조달과 여타의 군사비 지출로 720억 달러를 지출했다. 전체적으로 1950∼70년 사이의 20년간 미국의 대일본 원조액은 연평균 5억 달러에 달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미국의 비호 하에서 일본의 재벌들은 독특한 일본식 하청망을 한국과 여타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적 팽창의 논리로 획득하지 못했던 경제적 배후지를 "지역 냉전의 논리"를 통해서 무료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61년에 로스토우(Walt W. Rostow)가 케네디 행정부에 합류했을 때, 그의 첫번째 계획 가운데 하나는 한국과 대만이 수출지향적 정책을 취하게 해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일본 경제에 이들을 재통합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이 처음으로 무역적자에 직면하게 되자, 케네디 행정부는 아이젠하워 시대의 비용이 많이 들고 재정을 고갈시키는 안보 프로그램을 버리고, 지역적 경기부양책―공공투자에 의한―으로 선회하여 한국이나 대만 같은 우방국을 좀더 자립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맥락을 볼 때, 미국 원조관리들의 반대가 없었다면 이 지역에서 "수입대체 산업화"는 지속되었을 것이고 "아시아의 기적"을 낳은 "수출주도 공업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의 경제발전의 객관적 조건은 2차 세계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된 냉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동아시아 국가의 "수출주도 산업화"는 어떤 국내 분업 연관이나 장기적 산업발전 계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수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출이 가능하려면 누군가는 수입을 해주어야 하는데, 바로 미국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수출은 그 자체로 국내 잉여의 유출을 낳고, 동시에 일본 하청망으로의 포섭을 강화시켰으며, 해외 차관에 대한 의존도를 증가시켰다.
게다가 그것은 재벌체제를 낳은 핵심적 원인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재벌 체제는 종속의 심화를 그 내적 배경으로 했다.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중복투자를 특징으로 했고 그 결과 1970년대 말 한국자본주의는 이윤율의 급속한 저하로 인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야만 했다. 또한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이라는 외적 계기에서 재벌들은 이윤율의 저하를 이윤량의 증대로 상쇄하고자 했고 이는 자본의 과잉축적과 그에 따른 위기를 앞당겼다. 이렇게 볼 때, 냉전의 해체와 이에 따른 미국의 경제논리 전면화와 국내적 과잉축적이라는 현재의 조건은 더 이상 한국의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없는 내외적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이에 답하기에 앞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내적 모순을 세계적 차원에서 다시 한번 분석해보자.
<b>오늘날 제국주의와 그 내적 모순</b>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초국적 법인 자본의 금융화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 제국주의의 핵심적 위치에 존재했던 자유기업이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된 이후 그 자신의 내적 한계에 부딪혔고 그 결과 전세계적 차원에서 생산으로부터 금융의 공간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오늘날의 자본축적이 더 이상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축적의 필수적인 형태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 금융화를 추동하고 있는 초국적 자본들은 새로운 상품 시장으로 기능할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식민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다수 무역 거래는 몇몇 중심부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면 그런 면에서 그들 사이에는 경쟁과 협력이 공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모순은 제국주의 열강의 충돌이 아니라 기존의 민족국가간 체계와 그 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민족국가 양자를 해체시키는 격렬한 '포섭'과 '배제'의 모순이라는 형태를 띤다. 초국적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오늘날의 자본축적은 점점 더 민족국가의 틀을 뛰어넘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세계 경제의 중심은 특정한 민족국가―이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중심부 국가의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물질적 양보와 방어막을 제공해왔다―가 아니라 세계의 주요한 도시들, 즉 뉴욕, 런던, 동경 등의 세계도시(global city)의 금융 네트워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분석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들 도시에 상주하는 금융 자본가들은 이들 국가의 경찰에 의해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적 경비기관들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중심부 국가의 자본축적 전략은 수렴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과거와 같은 세계전쟁을 추동하는 중심부 국가간 갈등과 충돌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오늘날 자본은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나 특정한 지역을 배제해 버리며, 그 결과 세계 곳곳에서 버려진 땅이 출현하고 있다. 아프리카나 동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바로 이러한 운명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주변부 지역에서 중심부의 금융시장을 향한 국내 자본의 유출과 자본도피가 일상화된다. 최근 이들 지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인종적 분규들의 이면에 놓여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경향인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매우 역설적인 현상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의 저항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이 다른 지역을 배제하고 자본주의 세계질서, 예컨대 EU나 NAFTA와 같은 경제 블럭에 포섭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오늘날 한국을 지배하는 힘도 바로 이와 같은 경향이다.
해방 이후 최초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한국을 떠나 보다 안전하고 평온한 지역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모순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지역 경제의 붕괴라는 현상을 지역감정을 통해 해석하는 민족 해체적 경향 또한,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 제기되는 아시아 경제블록의 형성은 좀더 가난한 지역을 배제하고 EU에 참여하려는 동유럽 국가들의 충동에 유비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제국주의, 즉 금융세계화의 또 다른 면은 그것이 중심부 국가들 내에서 '성공한 자들의 이탈'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금융적 팽창은 그 필연적 동반자로 노동의 불안정화와 공공성의 해체를 수반한다. 자본은 자신들만의 '담장쳐진 도시'에서 허구적 축적과 귀족적 소비에 골몰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약속되었던 완전고용은 철회되고, 노동조건은 악화되며, 성적 인종적 배제와 초과 착취는 증가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종종 이들은 주식시장과 각종 펀드에 참여함으로써 금융적 이득의 극히 작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지만 그조차 모든 노동자들에게 평생동안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민중의 권리를 침식하고 그것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를 쇠퇴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동아시아 외환 및 금융 위기는 바로 이러한 모순의 필연적 귀결이다. 냉전이 해체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더 이상 동아시아가 예외적 성장의 지역으로 남을 수는 없다. 동아시아도 국제적인 금융 규범에 따라 구조조정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초국적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금융세계화에 포섭될 것인가 아니면 배제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선택의 답은 이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즉 동아시아의 자본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하위 파트너로 금융세계화에 동참할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의 구체적 형태가 어떤 것일지 확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직도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북한을 그러한 체제 속에 포섭시켜줄 것인지, 아니면 배제할 것인지, 미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 지배의 구체적 형태는 어떤 양상을 띨 것인지, 중국의 구조조정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등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객관적 경향이 오늘날 제국주의의 모순의 전개라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원인에서 파생하는 결과들은 비록 그 형태가 변화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b>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와 의미</b>
식민주의, 자유무역주의, 제국주의 전쟁, 나아가 자유기업주의, 금융세계화 모두가 제국주의의 역사적 형태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내적 모순을 가지는 것이었고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민중적 저항에 부딪혀왔다. 유럽에서 형성된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민족국가간 체계는 근본적으로 식민지 민중의 자주적 권리와 유럽 내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이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운동이 범세계적으로 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 운동들은 제국주의의 상대적 안정기였던 자유무역주의가 위기에 처하면서 범세계적 차원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종종 결합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역사적 조건 속에 이와 같은 저항을 주도했던 힘은 바로 '노동자 국제주의'였다. 그것의 핵심은 범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 민중의 주도하에 개별 민족국가를 변혁하고 대안적인 생산방식을 재조직하는 운동을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혁명적으로 전화시켜낸다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국제적 행동만이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전세계 노동자들은 국경을 가로질러 봉기를 일으킬 수 있었고, 주변부의 수많은 민중들―한국인들을 포함하여―이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변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제국주의 전쟁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격적 민족주의와 부르주아적 평화주의에 포섭됨으로 인해 좌절을 맞게 된다. 그리고 전쟁 이후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들은 전쟁 참여에 대한 대가로 개별 민족국가 내에서 나름의 경제적·사회적 권리와 이득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 외부의 국가들은 윌슨의 형식적인 민족자결권 원리와 트루먼의 반공·발전주의에 부분적으로 포섭된다. 그러나 몇몇 제3세계의 민중들은 이와 같은 약속이 허구적이며 민족자결권이 결코 민중들의 자주적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가 처한 구조적 종속에 맞서고 미국이 제시한 발전이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가 결정하는, 더욱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발전의 대안을 실행하고자 했다.
오늘날 제국주의적 금융세계화는 중심부 노동의 사회경제적 이득과 주변부 민중들의 민주적 발전 양자 모두에 대한 구조적 제약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이는 종종 중심부 노동자들에게 격렬한 민족주의적 정서―이는 과거 자신들이 전쟁참여를 통해 사수했고 전후에 자신들에게 물질적 안정을 부분적으로 보장했던 민족국가적 정책들을 유지하려는 즉자적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이다―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적으로 덜 가난한 지역 노동자들에게 금융적 확장 질서에 포섭되기 위해 여타의 버려진 지역을 배제하도록 만드는 강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국제주의의 이념이 재창조될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에서도 사실이다. 아시아 지역의 민중적 연대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 지역의 독자적인 경제적 블록은 제2의 대동아 공영권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그것을 국제적 차원에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어떠한 민족적 경제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우차를 인수하고자 하는 초국적 자본은 과연 생산적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가 금융적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가, 현재의 주식시장은 과연 생산과 고용의 확장에 봉사하는가, 해외 '투자'형태를 띤 한국 자본의 해외 도피는 과연 민족 경제에 봉사하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 국제주의에 도달하는 '민족적' 길은 상이할 수 있다. 개별 국가의 민중적·민주적 재편 없는 국제주의는 공허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현재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종속을 심화시키고 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정권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넘어서는 국제적 시야와 연대의 전망이 없이, 그리고 보다 강화된 국제적 공동행동 없이 그러한 투쟁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 개별 민족의 이해를 뛰어넘어 범세계적인 민중적 쟁점을 제기하고 그것을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오늘날 금융의 세계화와 그에 따른 배제와 포섭은 바로 이러한 민중적 쟁점의 핵심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는 민족적 이해는 전세계 민중들 내부에서 더 큰 분열과 자기파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