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자조직, 1864-1997: 역사의 무게와 현재의 도전[2]
<b>냉전: 국가를 따르는 싸움</b>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노동 정치는 냉전체제의 형성과 짧은 기간의 노동 동원(경우에 따라 이들은 1930년 이후에 시작되기도 하였다) 후에 적용된 "전후 협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협약들은 자본에 유리한 측면이 많았으며 이들은 멕시코에서와 같은 국가권력으로의 노동조합 정식 편입에서부터, 미국에서와 같이 성장에 입각한 느슨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전후 재건기간은 곧 끝났고 산업적 평화도 그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 경제가 1차대전 이전과 같은 통합의 수준으로 돌아가고, 세계 경제의 미래가 미국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과 유럽의 사회 자본주의자들간의 경쟁으로 귀결될 것이 명백해졌다.
<b>세계 노동 조합 연맹(WFTU)</b>
전간기(interwar period)를 마감한 사건은 2차대전이 끝난 지 몇 년 후에 일어났다. 1930년대말에 시작된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간의 변덕스러웠던 화해는 2차대전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고, 이는 1945년 세계 노동조합 연맹(WFTU)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Lorwin 1953, Chs. 19-22; Windmuller 1954; and Schevenels 1956). WFTU는 AFL과 기독교 노동조합만을 제외하고 유럽내 노동조합의 절대 다수와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노동조합들도 함께 아우르고 있었다. 그들은 참관인 자격으로 유엔 경제사회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AFL과 함께), 국제노동기구(ILO)와 같은 특별 지위를 부여받는 데에는 실패했다.
AFL은 WFTU에게 처음부터 매우 적대적이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그들의 기나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CIO가 그 조직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AFL의 CIO 대항전략은 ILO에서 그들의 미국 대표권 독점과 사회경제이사회에서의 CIO의 참관인 자격 획득 방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WFTU는 또한 추가적인 내부적 제약들과도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 중 하나는 국제무역 사무국(ITS)을 자기 조직의 없어서는 안될 부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수의 ITS들로부터 반발을 일으켰는데 그 중 특히 국제 교통 연맹과 국제 금속 노동자 연맹이 그들의 반공산주의로 인해 더욱 더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어빙 브라운(AFL의 유럽 전략 총괄자)으로 하여금 AFL의 WFTU에 대한 전쟁을 지원한 건 그 조직에 대한 기사를 제공한 IMF였다(Macshane 1990 and 1992).
AFL과 영국의 TUC에 의한 저항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들 역시 자율적인 WFTU에 적대적인 것이었다. 연맹은 1949년 2개-자유무역을 위한 국제 연맹과 세계 노동조합 연맹-로 분리되면서 그 종말을 고한다. 누가 이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Niethammer 1978; Carew 1984; and Silverman 1993). ITS는 그들의 자율성을 지속시키고 있지만 ICFTU와의 관계를 정형화시켰다.
WFTU의 붕괴에서부터 1960년대까지의 기간은 국제노동 정치 내에서의 점차 심화되는 양극화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Kassalow 1963; Cox 1971; Busch 1983). 양대 조직들과 ICFTU와 관련된 ITS들은 미국과 소련 노동-국가간 동맹의 이익의 우선 순위를 위한 전송벨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로 마치 양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처럼 유럽 밖의 더 많은 나라들에서 국내 노동 정치가 국제 논쟁의 주제로 넘겨졌다. 이 기간 내내, 그리고 뒤이은 기간의 상당 부분 동안 이 팽창은 자율적인 노조의 생성을 위한 서로간의 원조라기보다는 서로를 분열시키는 개입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따라서 조직적인 측면에서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나 "노동 제국주의" 비평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이 존재한다. (Cox 1977; Spooner 1989)
<b>국경을 넘나드는 우파의 정치: AFL의 일관성</b>
AFL의 외교정책은 그 일관성 속에서 깊고 자율적인 사회의 힘이 세계 정치를 만들어 가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계 제1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과 전쟁 도중 AFL은 신중하게 유럽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사회주의적 노동조합과 黨(당)을 경계했다. AFL의 사민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긴 연사를 통해 지속되어 왔으며 그 시작은 곰퍼스(Gompers)의 라쌀레식 당-노동조합 관계 모델에 대한 통렬한 반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차대전 전에도 AFL은 무역 사무국에 대한 사민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미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기 위해 그들의 소속 조합들을 가입하도록 권유하였다(배경설명을 위해서는, Lorwin 1929, 4장을 참조).
1차 대전 이후의 AFL의 IFTU의 연맹으로의 창설에 대한 반대는 곧 조직에서의 신속한 탈퇴로 이어졌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의 유럽 노동 정치와의 만남을 통해 AFL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연방 권력에도 훨씬 못 미치는 조직이었던 ILO를 홍보하고 합법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AFL의 1차대전 전후(前後) 정책 중 하나로, 그리고 윌슨 행정부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곰퍼스는 전미(全美) 노동 연맹을 창설하지만, 1924년 그의 죽음 이후 이는 곧 소멸되고 만다(Snow 1964; Levenstein 1971). 이후에 따른 많은 시간 동안 AFL은 국내의 문제에만 치중했다. 하지만 이도 CIO의 등장과 국제 관계에 대한 CIO의 강조와 함께 모두 달라진다. 1930년대 말, 어느 정도 유럽의 나치즘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지만, AFL은 전적으로 CIO의 국제적 승인을 막기 위해 IFTU에 재가입한다(Lorwin 1953: 180-181; Windmuller 1954). 그들은 또한 루즈벨트에게 ILO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는데, 이는 자신들이 ILO에서 미국 대표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CIO의 라틴아메리카노동자연맹에 대한 구애(courting)에 대한 대응으로, AFL은 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그들의 세력(interests)을 갱신하였다(Levenstein 1971: Godio 1985).
AFL은 WFTU의 밖에 머물렀고 그 조직을 해체시키고자 자신의 에너지를 투여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구성원들을 ITS에 가입하도록 독려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더욱 좌익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의 상당한 지원을 받아서 그것을 수행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동안 AFL(이후에는 AFL-CIO)의 주요목표는 공산주의자들, 특히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공산주의자들과의 경쟁하고, 사민주의자들이 공산주의 노조들과 제휴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Godio 1985; Melgar Bao; Welch 1995; Splading 1992-1993). 이러한 노력은 국제자유노련(ICFTU)으로 결실을 맺었다.
1960년대말에 이르러, AFL-CIO는 ICFTU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AFL-CIO 내외적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외부적으로, 유럽의 재건은 유럽 노조주의의 재건, 특히 독일 노조의 재건을 낳았다(Cox 1971). 게다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이들 노조의 다수는 사회의 급진화와 증가된 노동자 동원에 직면했고, 따라서 그들 중 다수는 좌익화되었다. 유럽에서의 변화들과 함께, AFL-CIO의 미국 국가와의 관계 또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들의 해외투자가 증가함에 따라, AFL-CIO는 자유무역 지지자에서 공정무역 지지자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에 덧붙여, AFL-CIO는 전략에 대한 내부적 불일치를 해결해야만 했다. CIO와의 통합은 국제 노동정치에 대한 중요한 의견 불일치를 ICFTU 내부로 이전시켰다. 반면 국제경쟁에 제한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직능별 노조(craft union)들로 구성된 AFL은 반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해외정책을 명료하게 표현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CIO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국제자동차노동자연맹(UAW)은 자동차산업의 국제화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몇몇 사민주의적 유럽 노조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Debouzy 1990; Sagnes 1994, 21장).
이 결과로 AFL-CIO는 ITS들의 몇몇 뿐만 아니라 ICFTU를 통제하는 데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ICFTU는 점차 대륙노조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심지어 AFL-CIO는 ITS의 공산주의적 노조들을 포함하려는 노력들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갈등들이 심각해져감에 따라 AFL-CIO는 1969년에 ICFTU로부터 탈퇴하고, 1982년까지 돌아가지 않았다(이 기간에 대해서는 Busch 1983을 참조).
1960년대 초 AFL-CIO는 자신의 외교정책을 재조직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유럽 외부에서의, AFL-CIO의 외교정책은 쌍무협정 뿐만 아니라 AIFLD와 지역적 지부들을 통해 수행되어 왔다. 그것은 미국의 외교정책의 확장으로 인해, 맹목적인 반공산주의로 인해 그리고 '비지니스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가 고무되면서 비난받았다(Sims 1992; Cox 1977).
이상의 간략한 서술들은 미국 정부의 꼭두각시로서 WFTU이 잘못 묘사되어 왔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실, 그 자신의 대부분의 역사에서 '비지니스 조합주의'의 굳은 결의의(resolute) 정책을 추구해왔다. 게다가 이는 그들이 국제 노동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오랜 역사의 무게 아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경제주의적 노동조합이 되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며, 노동과 국제정치에 대한 선호되는 전망을 고무하기 위한 국제 노동정치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b>196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기회, 관성, 그리고 생디칼리즘의 유령</b>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노동자] 급진주의는 많은 산업국가들에서의 복지국가화를 심화하였다. 게다가, 유럽에서 사민주의적 정부들의 등장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최초의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초기의 노동자 급진주의는 결코 성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민주의적 대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 명확해졌다. 신자유주의적 동맹들의 지도력 하에서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사민주의적 정책에 엄청난 압력을 넣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 사이 노조들은 그들 자신의 정책을 형성하는데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내적 제도에 대한 공격과 함께, 국제 정책들 또한 갈림길에 놓였다. ILO는 한계에 부딪혔다. ILO는 그동안 국제 조약들의 주최자였고 [그러나] 그 실행은 일국 정치에 의존했다.
배태된 자유주의가 기반을 가지는 한, 국내 정치와 성장은 자본을 포함할 수 있었고 그 체계를 작동시켰다. 신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획득함에 따라, ILO의 약점은 보다 분명해졌다. 경제적 규칙들의 제정이 세계적 그리고 지역적 수준으로 옮겨감에 따라, ILO의 역할은 향상되지 못하였고, 또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정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통합을 조절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WTO와 다른 세계적 그리고 지역적 경제관리 기관들은 상대적 자율성을 얻게 되었고, 직접적으로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b>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 (ICFTU)</b>
1970년대와 1980년대에 ICFTU와 WFTU는 경쟁적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관계는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연출되었다. 1989년 이후의 변화들은 WFTU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많은 노조들은 탈퇴하여 ICFTU에 가입하였다. 1990년대 중반 WFTU는 자신의 기능을 중지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두 총연맹(ICFTU와 세계노동총연맹)은 세계의 상당부분을 포괄하였다. 1997년 8월 말, 137개국들에서 195개의 지부를 가졌다. 따라서, 실제로 ICFTU의 1국가 1노조의 원칙은 많은 예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각 사회들간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구성노조들은 일국적 국경 내에서 여전히 자신의 조합원들에 대한 접근의 매개가 되는 일국적 조직들이었다. 지리적으로 그들은 5개 대륙에 걸쳐 분포하고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노조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지도력이 갖는 무게가 여전히 중심부로부터 나오지만, 제3세계 노조들의 역할은 지난 몇 년간 괄목할 정도로 향상되었다. 상당히 발전한 사회적 노조주의 조직들―브라질 통합노동자본부(CUT)와 남아공의 COSATU와 같은―은 결합되었고 그러한 경향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CFTU는 제한적인 권력과 자원들을 가진 취약한 간사회적 연맹으로 남아있다. 냉전이 종식되고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등장함에 따라, 이들의 주변적 역할이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Waterman 1997, 5장).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ICFTU가 전개되고 있는 변화에 둔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ICFTU 1979). 1970년대 동안 다양한 국제 포럼들에서 초민족적 기업들과의 교섭에서의 규범들을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Enderwick 1985). 어떠한 구속력 있는 규범들도 승인되거나 비준되지 않았다. 보다 최근에는 경제적 협정들에서 사회적 조항들을 포함하는 국제 정책들을 명확히 하였다(ICFTU 1996a-d 참조). ICFTU는 또한 국제포럼에서 자신의 태도를 향상시켰다. 그러나 ILO의 특별한 지위와 비교해 보면, 이들은 다양한 NGO들 중 하나의 지위로 쇠퇴하고 있다(Waterman 1997, 5장). 점차 이들은 주요 세계기관들의 회의, 예컨대 G-7, WTO, 1995 사회 정상회담, 아메리카 대륙 정상회담 등에 조응하는 회의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러한 회의들은 여타 NGO들과 제휴를 추진할 기회들을 제공하지만, 아직은 어떤 실체를 가진 것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명백하게, ICFTU가 만약 극적인 방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입지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상징적인 행동을 넘어서기 위하여, 내부적으로 많은 중요한 문제들뿐만 아니라 특히 지역주의와 남북관계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ICFTU는 정치적 혹은 세대적 이유들로 인해 관료적 관성으로 빠져들어온 거대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약한 조직이다. 그러므로 변화로 가는 길은 조직 외부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b>국제무역사무국(ITS)</b>
노동 조직, 훈련 및 여타 협력활동들에 대한 개입은 ITS가 최고로 남아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이니셔티브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너무나 낙관적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을 정도이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자리를 잡은 집중화의 형식을 고수해 온 14개의 ITS가 남아있다(Windmuller 1995; ICEM 1996). ITS는 멤버쉽, 이데올로기, 지리적 분포 등에서 더욱 초당파적인 성격을 띠어왔고, 동시에 그들의 구성원도 조직적으로 증가해왔다.
1960년대 이전시대와 비교해볼 때, 보다 많은 ITS들이 정보수집이나 상징적 기능을 넘어서 왔다. 몇몇은 IGO에서 자신의 역할을 향상시켜 왔고 연대업무를 개선하였으며 간-국경 활동들을 통합하려 하였다(Levinson 1972; Neuhaus 1982; Bendiner 1987; Sagnes 1994, 506; Labor Research Review 1993 & 1995; 그리고 Windmuller 1995). 심지어 그들의 성공이 제한적이라 할 지라도 이러한 경향은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조합의 국제주의의 쇠퇴에 대한 공통의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멤버쉽이 주어지면, ITS는 보다 쉬운 초사회적인 협약을 허용해야 했다. 심지어 그럴 때조차, 자율적 수평적 협약들을 용이하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억압하였다. 따라서 간사회적 경향이 여전히 강력하며, 심지어 활동가들조차 ITS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조직적인 이유와 프로그램적인 이유에서, ITS는 국제 노동을 조직하는데 직접 관여하기에 더욱 적합하다. 그러나 세계기업회의(WCC)의 경험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WCC는 국제금속노동자총연맹(IMWF)내에서 UAW의 이니셔티브의 결과물로서 1960년대에 등장했다(Busch 1983: 192-202; Bendiner 1987). 연이어 이 전략은 국제화학일반노동자총연맹(ICF)에 의해 채택되었다(Levine 1972). 그들의 멤버쉽은 개별 다국적기업의 노동력 혹은 동일부문에서의 다국적기업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는 초민족적인 단체교섭이다. 이러한 혁신의 전망은 적어도 1970년대에 속속들이 등장한 결과들과 관련된 하나의 주요기업 연구였다(Northrup & Rowan 1979; Rowan, Northrup & O'Brien 1980; Rowan, Pitterle & Miscimarra).
결과적으로 WCC들을 가두어놓는 장벽들이 존재한다.
첫째, 그들이 ICFTU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에 WFTU 노조들을 멤버로 포괄하는 데 있어서(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들의 열의(enthusiasm)는 제한적이었다. WCC들에 영향을 준 것은 노동 정치 내에서의 연속적인 분할만은 아니었다. 다른 문제는, 노동조직에 대한 신-숙련주의적 접근의 가능성들이 등장함에 따라 그들이 '제도화된 노동자'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보여진다는 사실이다(비판으로는 Olle & Schoeller 1977을 참조). 게다가, 공통의 담론이나 정치를 공유하지 못하는 유럽과 미국 노조주의자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노조들과 ITS들의 시기하는 욕망은 WCC를 자율적인 수평적 연계로부터 차단했다. 보다 최근에 WCC 전략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존재했는데, IMF의 Bridgestone회의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소생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들의 확립과 지역 조직과 교섭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약 그러한 수평적 네트워크들이 자율성 내에서 성장하고 성취된다면, 우리는 내부로부터의 국제 노동과 관련한 논쟁을 예견할 수 있다.
<b>유럽노조연합(ETUC)</b>
ETUC의 형성은 국제 노동 정치 내에서의 기회들뿐만 아니라 분할을 강조하는 중요한 발전이다. 유럽노조연합은 1960년대말 1970년대초의 동원 경험과 유럽통합 프로젝트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유럽 노조들은 자신의 지역적 대표성을 형성하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였다(Barnouin 1986; Visser & Ebbinghaus 1992). 이 과정은 두가지 이유 때문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첫째는 참여 노조들 사이의 차이이며, 둘째는 1980년대까지의 초국가적 차원의 노동정책의 형성에 대한 EEC의 비우호적인 태도이다.
한편 ETUC의 형성은 ICFTU 및 ITS와 관련된 국제 노조 내부의 논쟁을 낳기도 했다(Kirchner 1980). 특히 ITS 내부에 남아있던 AFL-CIO와 관련하여, AFL-CIO는 ETUC를 국제 노동정치에서 유럽 노조의 헤게모니를 향한 시도로 보았다. 이러한 관계는 많은 유럽 노조들이 ETUC를 공산주의적 노조들에게 개방할 것을 계획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예를 들면, 연대를 지지함에 있어서 AFL-CIO의 강력한 역할은 반공산주의와 (동유럽에서도 활동하고 있던) 세계노동총연맹 뿐만 아니라 유럽 사민주의자들과의 경쟁관계의 맥락에서 보여질 수 있다.
현재에 이르러, ETUC는 프랑스 CGT를 포괄하는 모든 주요 유럽 노조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ETUC와 ICFTU 간의 관계는 쟁점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는 ICFTU의 1996년 회의에서 언급되었다(ICFTU 1996a). 지역조직들간의 관계들, 특히 ETUC와 같은 자율적인 것들과 세계적 노동조직들은 내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경쟁적 지역주의의 가능성들(민족주의와의 경쟁과 유사하게)은 불가능하지 않고, 특히 AFL-CIO와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의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불편한 관계를 고려할 때 그러하다. 이러한 격차를 채우는 것은 노동자들이 유럽직장평의회(EWC)가 제공하는 가능성을 실험하도록 만들 것이다. EWC의 다수는 비-유럽계 다국적기업에 존재한다. 사실, ETUC와 AFL-CIO는 긍정적 방법에 대한 의심 없이 협력의 단계에 들어섰다. 여기서 유럽, 일본, 미국의 노조들은 양자간 혹은 삼자간 협정을 통해 공동의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계를 겨냥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들은 북-남 분열이라는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것에 달려있다.
노동 지역주의는 만약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광범한 세계적 규칙들 내에서 배태되어야 한다. ITS 뿐만 아니라 ICFTU는 커뮤니케이션과 연합을 용이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남쪽의 선택된 국가들에 대한 투자의 방향전환은 그 국가들의 노조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북쪽의 노조들은 남쪽의 대화자(interlocutor)들이 고갈되기 전에 이러한 발전에 보다 잘 재치있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b>남과 북</b>
북미와 남미의 통합과정은 북남 문제를 극복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아우르는 노동조직은 AFL-CIO노조 정치의 도구가 되어왔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러한 조직을 소생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왔고 캐나다와 브라질의 노동조합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 결과로 미국수뇌급과 함께 수평회담을 개최해왔다. 회담에서 제기된 요구는 노동대표단을 경제통합과정에서 주변화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계속해서 어떤 무역협상에도 노동권조항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AFL-CIO노조의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ICFTU의 정책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벨로 호리존트(Bello Horizonte)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멕시코정부와 페루정부는 수평회담의 보고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The Morning NAFTA, Issue No9, June 1997, p.2). 멕시코노동자연맹조직과 멕시코 정부의 관계를 보았을 때 NAFTA의 노동법에 대한 반대는 물론이고 멕시코의 CTM노조는 자국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적 코포라티즘적 노조의 '민족주의적'저항은 발전주의적 제휴 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나라, 즉 멕시코, 중국, 말레이시아 등에서 채택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경제조약에서 노동과 환경기준들을 포함하는 몇 가지 동기들에 관한 남반구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의 관심들은 잘 해결되었다. 다시 말하면 많은 남반구의 노동조합들은 국내의 노동 대립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어떤 정책도 이겨낼 수 있는 '제3세계의' 수사학을 사용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그들은 많은 북반구의 노동조합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만약에 강고한 국제노동정책을 옹호하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주도적인 노동조합들이 정당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들 사이의 오해와 의견차이는 깊어지고 남을 희생시키는 노조주의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b>결론적 논평</b>
이러한 역사적 개요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한 가지 교훈은 우리가 내적인 요건과 외적인 요인 중 어느 하나를 선험적으로 강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조들은 소위 비즈니스노조들조차 매우 정치적이다(Logue 1980). 따라서 냉전의 종언과 지역적, 세계적 통합의 심화는 도전이자 기회일 수 있다. 무방비의 노동자, 사회정의, 지방적 관습, 그리고 북남 분할에 무감각한 상명하달식 노조주의는 자본과 신자유주의적 국가와 노동 안에서 새로운 분할을 야기하는 노동조합을 방치하는 분열된 쐐기를 제공한다.
두번째 교훈은 국제노동조직들이 단순히 잠자는 거인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약한 간사회적 연합체들이다.
따라서 활동적 노조들이 직면한 중심적 과제는 단순히 그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하게 그들은 내재하는 조직적, 정치적 취약성을 처리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의 정책을 결정하는 기업가는 만약에 그들이 중요한 노동조합의 지지를 한다면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변화는 존재하는 조직들의 본질을 경쟁시키기 위하여 국제정치를 향하여 활동가 노동조합의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것, 또는 필요하다면 새로운 노동조직들을 건설하는 것에서 나올 것이다. 노동활동가들은 따라서 국제적인 노동조직 내에서 기동전에 참여할 것을 상상하는 것 이전에 '진지전'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부가적인 논의는 Stevis와 Boswell 1977을 참조).
ICFU가 얼마나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로 그리고 타당한 한계점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취약한 연합체들로 구성된 민족적 단위들의 간사회적 조직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조직을 보다 연방적이게 만들고 더 많은 자원을 그것에 이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사라질 것을 바랄 수 없는 정말로 많은 차이점들이(국내법과 산업적 관계와, 이데올로기와 역사적인 유산에 기반을 둔 차이점들)세계의 노동조합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ICTFU와 지역조직들은 노동조합간의 분쟁의 예방과 해결, 회사의 delegitimation(사전에 안나왔음)과 다른 꼭두각시 노동조합들, 현정책에 관한 토론과 주장, 그리고 세계의 노동조합들이 일반적이고 보완적인 목적을 향한 그들의 태도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활동과 캠페인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특정한 기능에 관하여서는 상대적 자치를 획득함으로써 국제 노동정치에 좀더 공헌한다.
한편 국내정치와 관련하여 조직화와 공동대응은 친국제적인 노동정치를 위한 필수요소이다. ITS들은 이러한 활동을 위한 통로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종종 발탁된 것만도 아니다.) 첫째, 그들은 직접적으로 조직화에 참여하는 노동조직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 둘째, 기층 활동가들과 ICFU의 거리는 멀지만, 반면 그 사이에 ITS가 위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초사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호 견제하는 간사회적 조직인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국제 노동조직들은 일정한 통치력을 제공하고 잠재적인 지방분권적인 역학들을 약화시키는 것을 막아내는 것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이러한 조직들이 장애물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국제적 조직들을 필요로 하는가 아닌가에 있다. 내 생각에 다양한 조직들을 포괄하는 네트워크와 통치력의 다층적 체계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알뜰하지 않는 해결책같은 것을 옹호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의 이슈들을 언급하면서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신자유주의적 통합이 국제적 정치를 요구하지만, 국내적 정치가 무의미하다거나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명확하지 않은 세계주의강화를 옹호하면서 국내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다. 첫 번째는 그것은 국내정치는 해롭고 국제정치는 몇 가지 방식에서 해방적인 것이라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자본의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국내정치권력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동맹에 의한 결정은 특별한 우위를 나타내는 사회권력에 의한 결정이기 위해서는 국내 지지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아야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국제정치에도 적용된다. 자본주의적 통합이 통합을 촉진시키고 점차적으로 그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지역적이고 지구적인 힘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적 통합은 국가기구에 의해서 강화되고 촉진되고 적합하게 되는 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WTO나 G-7의 현관 앞에서 로비를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부적절하다. 반면에 정치적으로 그것은 좀더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견고히 한다.
국가는 그들의 직접적인 기관이나 실현이 아니다. 또한 국가를 구성하고 국가의 환경과 관계를 갖는 법도 아니다. 국가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따라서 단순한 도구적 협상을 넘어서 핵심적 규칙들에 도전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정치적, 조직적 전망이 없는 조직화는 위험한 만병통치약이다.
나는 초국적 조직화와 새로운 조직형태들, 특히 초사회주의와 연방적 혹은 단일한 조직을 결합시키는 조직형태들이 그 조직 스스로에게도, 나아가 기존 민족적, 국제적 노동조직의 변화를 자극하는 데에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혹은 새로운 조직들의 전주곡으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국내적, 지역적, 혹은 국제적 수준의 다양한 사회적 정치들도 동일하게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적 정치를 특권화하고 국가권력을 악마화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를 악마화하면서 국가주의를 특권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초국적이건 국내의 사회적 정치이건 순수하거나 균등하지 않다. 노동운동은 많은 외형을 가지고 있고 그들 중 몇몇은 다른 것보다 덜 해방적이다. 대부분이 국가한계선을 따라서 사회적 힘 사이의 영역을 위치하는 것에 의한 국내체계를 강화시키는 것에 명백히 관심이 있는 반면에 정치권력에 대한 질문에 흥미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요약하자면, 사회적 정치는 정치적이고 조직상의 선호와 전략의 관점에서 절개되고 분리되어야한다. 노동정치의 경쟁하는 본질의 증거는, 명확한 지구적 시민사회적 정치의 예로서 이러한 비판적 접근의 필요성을 지지해주기까지 먼 길을 가야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선호되는 운동은 타락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대면할 준비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들은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만든 환경아래서 역사를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쇠퇴와 상호화해는 노동이 대면하고 있는 기회들 중 또 하나의 요인이다. 점차적으로 노동조합들은 신자유주의적 통합에 대한 그들 자신의 대응 방안을 정식화하고 실행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들의 전통적 정당들은 우로 이동하거나 혹은 그들을 대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 가지 선택은 노조들이 그들 제휴세력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다른 선택은 노조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보다 자율적이게 되는 것은 보다 광범위한 제휴세력과 의제들의 정식화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이나 국가에 이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노조들은 약간의 생디칼리즘적 시대에 대한 필요에 직면할 것이다.
<font color="##003366">* 참고문헌은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http://pssp.jinbo.net)이나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의 홈페이지(http://csf.colorado.edu/jwsr/archive/vol4/v4n1a4.htm)를 참고 바랍니다.</font>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노동 정치는 냉전체제의 형성과 짧은 기간의 노동 동원(경우에 따라 이들은 1930년 이후에 시작되기도 하였다) 후에 적용된 "전후 협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협약들은 자본에 유리한 측면이 많았으며 이들은 멕시코에서와 같은 국가권력으로의 노동조합 정식 편입에서부터, 미국에서와 같이 성장에 입각한 느슨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전후 재건기간은 곧 끝났고 산업적 평화도 그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 경제가 1차대전 이전과 같은 통합의 수준으로 돌아가고, 세계 경제의 미래가 미국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과 유럽의 사회 자본주의자들간의 경쟁으로 귀결될 것이 명백해졌다.
<b>세계 노동 조합 연맹(WFTU)</b>
전간기(interwar period)를 마감한 사건은 2차대전이 끝난 지 몇 년 후에 일어났다. 1930년대말에 시작된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간의 변덕스러웠던 화해는 2차대전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고, 이는 1945년 세계 노동조합 연맹(WFTU)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Lorwin 1953, Chs. 19-22; Windmuller 1954; and Schevenels 1956). WFTU는 AFL과 기독교 노동조합만을 제외하고 유럽내 노동조합의 절대 다수와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노동조합들도 함께 아우르고 있었다. 그들은 참관인 자격으로 유엔 경제사회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AFL과 함께), 국제노동기구(ILO)와 같은 특별 지위를 부여받는 데에는 실패했다.
AFL은 WFTU에게 처음부터 매우 적대적이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그들의 기나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CIO가 그 조직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AFL의 CIO 대항전략은 ILO에서 그들의 미국 대표권 독점과 사회경제이사회에서의 CIO의 참관인 자격 획득 방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WFTU는 또한 추가적인 내부적 제약들과도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 중 하나는 국제무역 사무국(ITS)을 자기 조직의 없어서는 안될 부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수의 ITS들로부터 반발을 일으켰는데 그 중 특히 국제 교통 연맹과 국제 금속 노동자 연맹이 그들의 반공산주의로 인해 더욱 더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어빙 브라운(AFL의 유럽 전략 총괄자)으로 하여금 AFL의 WFTU에 대한 전쟁을 지원한 건 그 조직에 대한 기사를 제공한 IMF였다(Macshane 1990 and 1992).
AFL과 영국의 TUC에 의한 저항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들 역시 자율적인 WFTU에 적대적인 것이었다. 연맹은 1949년 2개-자유무역을 위한 국제 연맹과 세계 노동조합 연맹-로 분리되면서 그 종말을 고한다. 누가 이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Niethammer 1978; Carew 1984; and Silverman 1993). ITS는 그들의 자율성을 지속시키고 있지만 ICFTU와의 관계를 정형화시켰다.
WFTU의 붕괴에서부터 1960년대까지의 기간은 국제노동 정치 내에서의 점차 심화되는 양극화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Kassalow 1963; Cox 1971; Busch 1983). 양대 조직들과 ICFTU와 관련된 ITS들은 미국과 소련 노동-국가간 동맹의 이익의 우선 순위를 위한 전송벨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로 마치 양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처럼 유럽 밖의 더 많은 나라들에서 국내 노동 정치가 국제 논쟁의 주제로 넘겨졌다. 이 기간 내내, 그리고 뒤이은 기간의 상당 부분 동안 이 팽창은 자율적인 노조의 생성을 위한 서로간의 원조라기보다는 서로를 분열시키는 개입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따라서 조직적인 측면에서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나 "노동 제국주의" 비평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이 존재한다. (Cox 1977; Spooner 1989)
<b>국경을 넘나드는 우파의 정치: AFL의 일관성</b>
AFL의 외교정책은 그 일관성 속에서 깊고 자율적인 사회의 힘이 세계 정치를 만들어 가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계 제1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과 전쟁 도중 AFL은 신중하게 유럽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사회주의적 노동조합과 黨(당)을 경계했다. AFL의 사민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긴 연사를 통해 지속되어 왔으며 그 시작은 곰퍼스(Gompers)의 라쌀레식 당-노동조합 관계 모델에 대한 통렬한 반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차대전 전에도 AFL은 무역 사무국에 대한 사민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미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기 위해 그들의 소속 조합들을 가입하도록 권유하였다(배경설명을 위해서는, Lorwin 1929, 4장을 참조).
1차 대전 이후의 AFL의 IFTU의 연맹으로의 창설에 대한 반대는 곧 조직에서의 신속한 탈퇴로 이어졌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의 유럽 노동 정치와의 만남을 통해 AFL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연방 권력에도 훨씬 못 미치는 조직이었던 ILO를 홍보하고 합법화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AFL의 1차대전 전후(前後) 정책 중 하나로, 그리고 윌슨 행정부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곰퍼스는 전미(全美) 노동 연맹을 창설하지만, 1924년 그의 죽음 이후 이는 곧 소멸되고 만다(Snow 1964; Levenstein 1971). 이후에 따른 많은 시간 동안 AFL은 국내의 문제에만 치중했다. 하지만 이도 CIO의 등장과 국제 관계에 대한 CIO의 강조와 함께 모두 달라진다. 1930년대 말, 어느 정도 유럽의 나치즘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지만, AFL은 전적으로 CIO의 국제적 승인을 막기 위해 IFTU에 재가입한다(Lorwin 1953: 180-181; Windmuller 1954). 그들은 또한 루즈벨트에게 ILO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는데, 이는 자신들이 ILO에서 미국 대표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CIO의 라틴아메리카노동자연맹에 대한 구애(courting)에 대한 대응으로, AFL은 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그들의 세력(interests)을 갱신하였다(Levenstein 1971: Godio 1985).
AFL은 WFTU의 밖에 머물렀고 그 조직을 해체시키고자 자신의 에너지를 투여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구성원들을 ITS에 가입하도록 독려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더욱 좌익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의 상당한 지원을 받아서 그것을 수행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동안 AFL(이후에는 AFL-CIO)의 주요목표는 공산주의자들, 특히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공산주의자들과의 경쟁하고, 사민주의자들이 공산주의 노조들과 제휴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Godio 1985; Melgar Bao; Welch 1995; Splading 1992-1993). 이러한 노력은 국제자유노련(ICFTU)으로 결실을 맺었다.
1960년대말에 이르러, AFL-CIO는 ICFTU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AFL-CIO 내외적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외부적으로, 유럽의 재건은 유럽 노조주의의 재건, 특히 독일 노조의 재건을 낳았다(Cox 1971). 게다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이들 노조의 다수는 사회의 급진화와 증가된 노동자 동원에 직면했고, 따라서 그들 중 다수는 좌익화되었다. 유럽에서의 변화들과 함께, AFL-CIO의 미국 국가와의 관계 또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들의 해외투자가 증가함에 따라, AFL-CIO는 자유무역 지지자에서 공정무역 지지자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에 덧붙여, AFL-CIO는 전략에 대한 내부적 불일치를 해결해야만 했다. CIO와의 통합은 국제 노동정치에 대한 중요한 의견 불일치를 ICFTU 내부로 이전시켰다. 반면 국제경쟁에 제한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직능별 노조(craft union)들로 구성된 AFL은 반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해외정책을 명료하게 표현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CIO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국제자동차노동자연맹(UAW)은 자동차산업의 국제화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몇몇 사민주의적 유럽 노조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Debouzy 1990; Sagnes 1994, 21장).
이 결과로 AFL-CIO는 ITS들의 몇몇 뿐만 아니라 ICFTU를 통제하는 데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ICFTU는 점차 대륙노조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심지어 AFL-CIO는 ITS의 공산주의적 노조들을 포함하려는 노력들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갈등들이 심각해져감에 따라 AFL-CIO는 1969년에 ICFTU로부터 탈퇴하고, 1982년까지 돌아가지 않았다(이 기간에 대해서는 Busch 1983을 참조).
1960년대 초 AFL-CIO는 자신의 외교정책을 재조직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유럽 외부에서의, AFL-CIO의 외교정책은 쌍무협정 뿐만 아니라 AIFLD와 지역적 지부들을 통해 수행되어 왔다. 그것은 미국의 외교정책의 확장으로 인해, 맹목적인 반공산주의로 인해 그리고 '비지니스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가 고무되면서 비난받았다(Sims 1992; Cox 1977).
이상의 간략한 서술들은 미국 정부의 꼭두각시로서 WFTU이 잘못 묘사되어 왔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실, 그 자신의 대부분의 역사에서 '비지니스 조합주의'의 굳은 결의의(resolute) 정책을 추구해왔다. 게다가 이는 그들이 국제 노동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오랜 역사의 무게 아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경제주의적 노동조합이 되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며, 노동과 국제정치에 대한 선호되는 전망을 고무하기 위한 국제 노동정치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b>196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기회, 관성, 그리고 생디칼리즘의 유령</b>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노동자] 급진주의는 많은 산업국가들에서의 복지국가화를 심화하였다. 게다가, 유럽에서 사민주의적 정부들의 등장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최초의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초기의 노동자 급진주의는 결코 성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민주의적 대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 명확해졌다. 신자유주의적 동맹들의 지도력 하에서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사민주의적 정책에 엄청난 압력을 넣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 사이 노조들은 그들 자신의 정책을 형성하는데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내적 제도에 대한 공격과 함께, 국제 정책들 또한 갈림길에 놓였다. ILO는 한계에 부딪혔다. ILO는 그동안 국제 조약들의 주최자였고 [그러나] 그 실행은 일국 정치에 의존했다.
배태된 자유주의가 기반을 가지는 한, 국내 정치와 성장은 자본을 포함할 수 있었고 그 체계를 작동시켰다. 신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획득함에 따라, ILO의 약점은 보다 분명해졌다. 경제적 규칙들의 제정이 세계적 그리고 지역적 수준으로 옮겨감에 따라, ILO의 역할은 향상되지 못하였고, 또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정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통합을 조절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WTO와 다른 세계적 그리고 지역적 경제관리 기관들은 상대적 자율성을 얻게 되었고, 직접적으로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b>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 (ICFTU)</b>
1970년대와 1980년대에 ICFTU와 WFTU는 경쟁적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관계는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연출되었다. 1989년 이후의 변화들은 WFTU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많은 노조들은 탈퇴하여 ICFTU에 가입하였다. 1990년대 중반 WFTU는 자신의 기능을 중지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두 총연맹(ICFTU와 세계노동총연맹)은 세계의 상당부분을 포괄하였다. 1997년 8월 말, 137개국들에서 195개의 지부를 가졌다. 따라서, 실제로 ICFTU의 1국가 1노조의 원칙은 많은 예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각 사회들간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구성노조들은 일국적 국경 내에서 여전히 자신의 조합원들에 대한 접근의 매개가 되는 일국적 조직들이었다. 지리적으로 그들은 5개 대륙에 걸쳐 분포하고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노조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지도력이 갖는 무게가 여전히 중심부로부터 나오지만, 제3세계 노조들의 역할은 지난 몇 년간 괄목할 정도로 향상되었다. 상당히 발전한 사회적 노조주의 조직들―브라질 통합노동자본부(CUT)와 남아공의 COSATU와 같은―은 결합되었고 그러한 경향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CFTU는 제한적인 권력과 자원들을 가진 취약한 간사회적 연맹으로 남아있다. 냉전이 종식되고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등장함에 따라, 이들의 주변적 역할이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Waterman 1997, 5장).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ICFTU가 전개되고 있는 변화에 둔감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ICFTU 1979). 1970년대 동안 다양한 국제 포럼들에서 초민족적 기업들과의 교섭에서의 규범들을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Enderwick 1985). 어떠한 구속력 있는 규범들도 승인되거나 비준되지 않았다. 보다 최근에는 경제적 협정들에서 사회적 조항들을 포함하는 국제 정책들을 명확히 하였다(ICFTU 1996a-d 참조). ICFTU는 또한 국제포럼에서 자신의 태도를 향상시켰다. 그러나 ILO의 특별한 지위와 비교해 보면, 이들은 다양한 NGO들 중 하나의 지위로 쇠퇴하고 있다(Waterman 1997, 5장). 점차 이들은 주요 세계기관들의 회의, 예컨대 G-7, WTO, 1995 사회 정상회담, 아메리카 대륙 정상회담 등에 조응하는 회의들을 조직하고 있다. 이러한 회의들은 여타 NGO들과 제휴를 추진할 기회들을 제공하지만, 아직은 어떤 실체를 가진 것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명백하게, ICFTU가 만약 극적인 방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입지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상징적인 행동을 넘어서기 위하여, 내부적으로 많은 중요한 문제들뿐만 아니라 특히 지역주의와 남북관계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ICFTU는 정치적 혹은 세대적 이유들로 인해 관료적 관성으로 빠져들어온 거대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약한 조직이다. 그러므로 변화로 가는 길은 조직 외부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b>국제무역사무국(ITS)</b>
노동 조직, 훈련 및 여타 협력활동들에 대한 개입은 ITS가 최고로 남아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이니셔티브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너무나 낙관적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을 정도이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자리를 잡은 집중화의 형식을 고수해 온 14개의 ITS가 남아있다(Windmuller 1995; ICEM 1996). ITS는 멤버쉽, 이데올로기, 지리적 분포 등에서 더욱 초당파적인 성격을 띠어왔고, 동시에 그들의 구성원도 조직적으로 증가해왔다.
1960년대 이전시대와 비교해볼 때, 보다 많은 ITS들이 정보수집이나 상징적 기능을 넘어서 왔다. 몇몇은 IGO에서 자신의 역할을 향상시켜 왔고 연대업무를 개선하였으며 간-국경 활동들을 통합하려 하였다(Levinson 1972; Neuhaus 1982; Bendiner 1987; Sagnes 1994, 506; Labor Research Review 1993 & 1995; 그리고 Windmuller 1995). 심지어 그들의 성공이 제한적이라 할 지라도 이러한 경향은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조합의 국제주의의 쇠퇴에 대한 공통의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멤버쉽이 주어지면, ITS는 보다 쉬운 초사회적인 협약을 허용해야 했다. 심지어 그럴 때조차, 자율적 수평적 협약들을 용이하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억압하였다. 따라서 간사회적 경향이 여전히 강력하며, 심지어 활동가들조차 ITS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조직적인 이유와 프로그램적인 이유에서, ITS는 국제 노동을 조직하는데 직접 관여하기에 더욱 적합하다. 그러나 세계기업회의(WCC)의 경험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WCC는 국제금속노동자총연맹(IMWF)내에서 UAW의 이니셔티브의 결과물로서 1960년대에 등장했다(Busch 1983: 192-202; Bendiner 1987). 연이어 이 전략은 국제화학일반노동자총연맹(ICF)에 의해 채택되었다(Levine 1972). 그들의 멤버쉽은 개별 다국적기업의 노동력 혹은 동일부문에서의 다국적기업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는 초민족적인 단체교섭이다. 이러한 혁신의 전망은 적어도 1970년대에 속속들이 등장한 결과들과 관련된 하나의 주요기업 연구였다(Northrup & Rowan 1979; Rowan, Northrup & O'Brien 1980; Rowan, Pitterle & Miscimarra).
결과적으로 WCC들을 가두어놓는 장벽들이 존재한다.
첫째, 그들이 ICFTU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에 WFTU 노조들을 멤버로 포괄하는 데 있어서(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들의 열의(enthusiasm)는 제한적이었다. WCC들에 영향을 준 것은 노동 정치 내에서의 연속적인 분할만은 아니었다. 다른 문제는, 노동조직에 대한 신-숙련주의적 접근의 가능성들이 등장함에 따라 그들이 '제도화된 노동자'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보여진다는 사실이다(비판으로는 Olle & Schoeller 1977을 참조). 게다가, 공통의 담론이나 정치를 공유하지 못하는 유럽과 미국 노조주의자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노조들과 ITS들의 시기하는 욕망은 WCC를 자율적인 수평적 연계로부터 차단했다. 보다 최근에 WCC 전략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존재했는데, IMF의 Bridgestone회의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소생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들의 확립과 지역 조직과 교섭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약 그러한 수평적 네트워크들이 자율성 내에서 성장하고 성취된다면, 우리는 내부로부터의 국제 노동과 관련한 논쟁을 예견할 수 있다.
<b>유럽노조연합(ETUC)</b>
ETUC의 형성은 국제 노동 정치 내에서의 기회들뿐만 아니라 분할을 강조하는 중요한 발전이다. 유럽노조연합은 1960년대말 1970년대초의 동원 경험과 유럽통합 프로젝트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유럽 노조들은 자신의 지역적 대표성을 형성하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였다(Barnouin 1986; Visser & Ebbinghaus 1992). 이 과정은 두가지 이유 때문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첫째는 참여 노조들 사이의 차이이며, 둘째는 1980년대까지의 초국가적 차원의 노동정책의 형성에 대한 EEC의 비우호적인 태도이다.
한편 ETUC의 형성은 ICFTU 및 ITS와 관련된 국제 노조 내부의 논쟁을 낳기도 했다(Kirchner 1980). 특히 ITS 내부에 남아있던 AFL-CIO와 관련하여, AFL-CIO는 ETUC를 국제 노동정치에서 유럽 노조의 헤게모니를 향한 시도로 보았다. 이러한 관계는 많은 유럽 노조들이 ETUC를 공산주의적 노조들에게 개방할 것을 계획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예를 들면, 연대를 지지함에 있어서 AFL-CIO의 강력한 역할은 반공산주의와 (동유럽에서도 활동하고 있던) 세계노동총연맹 뿐만 아니라 유럽 사민주의자들과의 경쟁관계의 맥락에서 보여질 수 있다.
현재에 이르러, ETUC는 프랑스 CGT를 포괄하는 모든 주요 유럽 노조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ETUC와 ICFTU 간의 관계는 쟁점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는 ICFTU의 1996년 회의에서 언급되었다(ICFTU 1996a). 지역조직들간의 관계들, 특히 ETUC와 같은 자율적인 것들과 세계적 노동조직들은 내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경쟁적 지역주의의 가능성들(민족주의와의 경쟁과 유사하게)은 불가능하지 않고, 특히 AFL-CIO와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의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불편한 관계를 고려할 때 그러하다. 이러한 격차를 채우는 것은 노동자들이 유럽직장평의회(EWC)가 제공하는 가능성을 실험하도록 만들 것이다. EWC의 다수는 비-유럽계 다국적기업에 존재한다. 사실, ETUC와 AFL-CIO는 긍정적 방법에 대한 의심 없이 협력의 단계에 들어섰다. 여기서 유럽, 일본, 미국의 노조들은 양자간 혹은 삼자간 협정을 통해 공동의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계를 겨냥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들은 북-남 분열이라는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것에 달려있다.
노동 지역주의는 만약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광범한 세계적 규칙들 내에서 배태되어야 한다. ITS 뿐만 아니라 ICFTU는 커뮤니케이션과 연합을 용이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남쪽의 선택된 국가들에 대한 투자의 방향전환은 그 국가들의 노조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북쪽의 노조들은 남쪽의 대화자(interlocutor)들이 고갈되기 전에 이러한 발전에 보다 잘 재치있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b>남과 북</b>
북미와 남미의 통합과정은 북남 문제를 극복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아우르는 노동조직은 AFL-CIO노조 정치의 도구가 되어왔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러한 조직을 소생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왔고 캐나다와 브라질의 노동조합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 결과로 미국수뇌급과 함께 수평회담을 개최해왔다. 회담에서 제기된 요구는 노동대표단을 경제통합과정에서 주변화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계속해서 어떤 무역협상에도 노동권조항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AFL-CIO노조의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ICFTU의 정책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벨로 호리존트(Bello Horizonte)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멕시코정부와 페루정부는 수평회담의 보고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The Morning NAFTA, Issue No9, June 1997, p.2). 멕시코노동자연맹조직과 멕시코 정부의 관계를 보았을 때 NAFTA의 노동법에 대한 반대는 물론이고 멕시코의 CTM노조는 자국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적 코포라티즘적 노조의 '민족주의적'저항은 발전주의적 제휴 세력이 집권하고 있는 나라, 즉 멕시코, 중국, 말레이시아 등에서 채택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경제조약에서 노동과 환경기준들을 포함하는 몇 가지 동기들에 관한 남반구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의 관심들은 잘 해결되었다. 다시 말하면 많은 남반구의 노동조합들은 국내의 노동 대립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어떤 정책도 이겨낼 수 있는 '제3세계의' 수사학을 사용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그들은 많은 북반구의 노동조합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만약에 강고한 국제노동정책을 옹호하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주도적인 노동조합들이 정당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들 사이의 오해와 의견차이는 깊어지고 남을 희생시키는 노조주의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b>결론적 논평</b>
이러한 역사적 개요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한 가지 교훈은 우리가 내적인 요건과 외적인 요인 중 어느 하나를 선험적으로 강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조들은 소위 비즈니스노조들조차 매우 정치적이다(Logue 1980). 따라서 냉전의 종언과 지역적, 세계적 통합의 심화는 도전이자 기회일 수 있다. 무방비의 노동자, 사회정의, 지방적 관습, 그리고 북남 분할에 무감각한 상명하달식 노조주의는 자본과 신자유주의적 국가와 노동 안에서 새로운 분할을 야기하는 노동조합을 방치하는 분열된 쐐기를 제공한다.
두번째 교훈은 국제노동조직들이 단순히 잠자는 거인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약한 간사회적 연합체들이다.
따라서 활동적 노조들이 직면한 중심적 과제는 단순히 그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하게 그들은 내재하는 조직적, 정치적 취약성을 처리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의 정책을 결정하는 기업가는 만약에 그들이 중요한 노동조합의 지지를 한다면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변화는 존재하는 조직들의 본질을 경쟁시키기 위하여 국제정치를 향하여 활동가 노동조합의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것, 또는 필요하다면 새로운 노동조직들을 건설하는 것에서 나올 것이다. 노동활동가들은 따라서 국제적인 노동조직 내에서 기동전에 참여할 것을 상상하는 것 이전에 '진지전'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부가적인 논의는 Stevis와 Boswell 1977을 참조).
ICFU가 얼마나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로 그리고 타당한 한계점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취약한 연합체들로 구성된 민족적 단위들의 간사회적 조직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조직을 보다 연방적이게 만들고 더 많은 자원을 그것에 이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사라질 것을 바랄 수 없는 정말로 많은 차이점들이(국내법과 산업적 관계와, 이데올로기와 역사적인 유산에 기반을 둔 차이점들)세계의 노동조합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ICTFU와 지역조직들은 노동조합간의 분쟁의 예방과 해결, 회사의 delegitimation(사전에 안나왔음)과 다른 꼭두각시 노동조합들, 현정책에 관한 토론과 주장, 그리고 세계의 노동조합들이 일반적이고 보완적인 목적을 향한 그들의 태도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활동과 캠페인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특정한 기능에 관하여서는 상대적 자치를 획득함으로써 국제 노동정치에 좀더 공헌한다.
한편 국내정치와 관련하여 조직화와 공동대응은 친국제적인 노동정치를 위한 필수요소이다. ITS들은 이러한 활동을 위한 통로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종종 발탁된 것만도 아니다.) 첫째, 그들은 직접적으로 조직화에 참여하는 노동조직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 둘째, 기층 활동가들과 ICFU의 거리는 멀지만, 반면 그 사이에 ITS가 위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초사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호 견제하는 간사회적 조직인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국제 노동조직들은 일정한 통치력을 제공하고 잠재적인 지방분권적인 역학들을 약화시키는 것을 막아내는 것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이러한 조직들이 장애물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국제적 조직들을 필요로 하는가 아닌가에 있다. 내 생각에 다양한 조직들을 포괄하는 네트워크와 통치력의 다층적 체계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알뜰하지 않는 해결책같은 것을 옹호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의 이슈들을 언급하면서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신자유주의적 통합이 국제적 정치를 요구하지만, 국내적 정치가 무의미하다거나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명확하지 않은 세계주의강화를 옹호하면서 국내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다. 첫 번째는 그것은 국내정치는 해롭고 국제정치는 몇 가지 방식에서 해방적인 것이라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자본의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국내정치권력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동맹에 의한 결정은 특별한 우위를 나타내는 사회권력에 의한 결정이기 위해서는 국내 지지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아야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국제정치에도 적용된다. 자본주의적 통합이 통합을 촉진시키고 점차적으로 그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지역적이고 지구적인 힘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적 통합은 국가기구에 의해서 강화되고 촉진되고 적합하게 되는 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WTO나 G-7의 현관 앞에서 로비를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부적절하다. 반면에 정치적으로 그것은 좀더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견고히 한다.
국가는 그들의 직접적인 기관이나 실현이 아니다. 또한 국가를 구성하고 국가의 환경과 관계를 갖는 법도 아니다. 국가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따라서 단순한 도구적 협상을 넘어서 핵심적 규칙들에 도전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정치적, 조직적 전망이 없는 조직화는 위험한 만병통치약이다.
나는 초국적 조직화와 새로운 조직형태들, 특히 초사회주의와 연방적 혹은 단일한 조직을 결합시키는 조직형태들이 그 조직 스스로에게도, 나아가 기존 민족적, 국제적 노동조직의 변화를 자극하는 데에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혹은 새로운 조직들의 전주곡으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국내적, 지역적, 혹은 국제적 수준의 다양한 사회적 정치들도 동일하게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적 정치를 특권화하고 국가권력을 악마화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를 악마화하면서 국가주의를 특권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초국적이건 국내의 사회적 정치이건 순수하거나 균등하지 않다. 노동운동은 많은 외형을 가지고 있고 그들 중 몇몇은 다른 것보다 덜 해방적이다. 대부분이 국가한계선을 따라서 사회적 힘 사이의 영역을 위치하는 것에 의한 국내체계를 강화시키는 것에 명백히 관심이 있는 반면에 정치권력에 대한 질문에 흥미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요약하자면, 사회적 정치는 정치적이고 조직상의 선호와 전략의 관점에서 절개되고 분리되어야한다. 노동정치의 경쟁하는 본질의 증거는, 명확한 지구적 시민사회적 정치의 예로서 이러한 비판적 접근의 필요성을 지지해주기까지 먼 길을 가야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선호되는 운동은 타락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대면할 준비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들은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만든 환경아래서 역사를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쇠퇴와 상호화해는 노동이 대면하고 있는 기회들 중 또 하나의 요인이다. 점차적으로 노동조합들은 신자유주의적 통합에 대한 그들 자신의 대응 방안을 정식화하고 실행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들의 전통적 정당들은 우로 이동하거나 혹은 그들을 대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 가지 선택은 노조들이 그들 제휴세력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다른 선택은 노조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보다 자율적이게 되는 것은 보다 광범위한 제휴세력과 의제들의 정식화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이나 국가에 이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노조들은 약간의 생디칼리즘적 시대에 대한 필요에 직면할 것이다.
<font color="##003366">* 참고문헌은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http://pssp.jinbo.net)이나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의 홈페이지(http://csf.colorado.edu/jwsr/archive/vol4/v4n1a4.htm)를 참고 바랍니다.</f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