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와 권력재편
<b>다시 한번 권력재편의 시기가?</b>
대우 자동차 노동조합원들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적 폭력이 자행해되던 그 즈음, 정치권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DJP 공조를 넘어 민국당까지 포함한 정책연합이 개각으로 드러났고, '백전노장' JP는 다시 한번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민주당의 중진과 김윤환 민국당 대표 등과 자리를 갖고 "우리는 결코 죽지 않았고 앞으로는 놀랄 일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수십년 동안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큰 어르신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3공화국과 유신, 5공화국과 6공화국, 찬란한(?) 한국의 역사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거친 역전의 용사들이 결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낡은 정치인들의 재등장이 경찰의 곤봉과 무자비한 폭력의 재등장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큰 일"은 무엇일까? "불투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정치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JP의 말에 큰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호언장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한국의 정치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한국 보수주의의 적통을 자처하는 야당 지도자―그가 누구인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의 독주는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요즘같이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정치에 관심을 가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구시대 정치인들의 "힘 자랑"이 과거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의 행보는 과거와 달리 정권재창출을 주도하는 위치에서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분"―사실상 이는 급속하게 위협받아 왔다―을 유지하려는 성격이 강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문제는 이들 "노병"의 힘이 어디까지인가, 즉 이들이 한국의 미래에 정확히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된다.
최근 이들은 또 한 명의 "노병"인 YS와도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해도 누가 되지 못할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고 평소에 힘 자랑을 하던 YS도 최근 JP와 접촉을 시도하면서 "노병전우회"의 일원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과연 이들은 이념과 계파, 갈등의 역사를 초월하여 초당파적 "노병"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이웃나라 일본처럼―JP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대우받는 일본의 노정치인들을 입에 올린다― 막후 실세들로 늙은 정치인들의 온전한 위상이 보장되는 정치를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인가?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노병들의 주도하에 새로운 대통령 후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늙은 정치인들의 행보와 때를 맞추어 여당과 야당을 가지리 않고 "개헌론"이 터져나오고 있다. 구세대 정치인들의 회동과 마찬가지로 개헌론자들도 정당을 가로질러 자기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구세대 정치인들의 행보와 직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자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흐름은 모두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대응이기 때문이다.
우선 "개헌론" 그 자체의 쟁점이 대통령 선거제도를 둘러싼 것으로 이는 곧 대권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힘 자랑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즉 구세대 정치인들이 대선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3김 이후" 한국 정치를 이끌 정치인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헌론을 내세우고 있는 사람들이나 3김 정치 시대 노병들 모두가 현재의 정치적 흐름, 곧 너무나도 선명한 이회창의 독주를 본격적인 대선국면 이전에 견제하겠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모든 양상들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바야흐로 한국에 다시 한번 "권력 재편"의 시대―더 정확히 말하면 주기적인 권력재생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 배경과 그 속에서의 갈등 및 투쟁의 지점들을 보다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b>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누수?</b>
지배적 사회질서의 재생산은 언제나 정치권력의 재생산을 필요로 하며, 정치권력의 재생산에서 지배질서의 재생산은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배연합이 형성되어 지배계급의 상이한 이해들을 조정―이데올로기적으로, 정책적으로―하고, 국민적 통합과 동원(혹은 배제와 정치무관심)의 논리를 제시한다. 따라서 문제는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특수한 자본축적과 계급적 갈등국면에서 이러한 조정과 통합의 능력을 발휘해내는가 라는 것이 된다.
우리는 DJ정권이 사실상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IMF 관리체제의 관리자 역할을 해온 것을 알고 있다. 대선과정에서 IMF 구제금융 신청을 비판해온 DJ는 당선 직후 "금고가 텅 비었더라"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면서 국민적 동원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적 동원에 근거해서 구래의 지배정치연합을 공격하고, 민중운동 진영을 무력화시킨 후 IMF의 지시에 따라 각종 구조조정 정책을 추진했다. 이렇게 볼 때 DJ 정부는 긴급한 "위기"라는 상황을 활용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면서 보수주의자들 중 일부와 시민운동의 일부를 포괄―이들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재벌 해체라는 '진보적 과제'를 달성할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IMF를 환영했다―하는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지배연합 그 자체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구래의 보수주의 집단 중 일부―군부 혹은 폭력을 통해 권력을 손쉽게 재생산하는 데 익숙한 집단들―의 무력화, 동시에 민중운동 진영의 무력화에 의해서만 성립가능한 지배질서이다. 또한 그것은 이념과 노선보다는 기득권 수호에 여념이 없는 보수세력의 일부―이들은 여당이 아니면 절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명할 수 없는 부류들이다―를 견인하고, 동시에 사회적 갈등과 통치성 위기를 관리해낼 각종 시민운동 조직을 동원해낼 때에만 유지 가능한 지배질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위기 극복'이나 '남북정상회담 실현' 등과 같은 단기적인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일관되고 안정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수 없다. 즉, 현재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관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 스스로의 단결과 국민적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낡은 지배 이데올로기―예컨대 반공이나 발전 등―는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무엇이 출현하지 못한 상황이 도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끊임없는 절충과 타협, 미봉책만이 이들의 지배 연합을 유지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게다가 약속했던 경제위기 극복은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고, 그것은 4.13 총선 이후 정국 주도력의 부분적인 상실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 지배세력의 일부를 잘라내고도 독자회생에 성공하는 이회창 세력의 정치적 결단력과 권력자원이 한 몫을 했다. 게다가 그는 군부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보수주의자이다. 그의 주변에 모인 핵심적 권력자원은 한국의 보수적 테크노크라트 집단이다. 이들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군부와 더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한번도 스스로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했던 관료집단들―군부시대 넘버2로 살아온 자들―로서 지역주의로부터도 부분적으로 자유롭다. 그는 이러한 권력자원들에 기반해서 스스로를 반DJ의 대안으로 만들어내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국 주도권의 반전 이후 김대중 정권은 역사상 최초의 평양방문이나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노벨평화상의 수상 등과 같은 화려한 업적과 몇 차례에 걸친 "국민과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도를 회복하지 못했다. 동시에 민주당은 국회 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국회의원 대여"라는 한국 정치사 최고의 희극―박정희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을 연출하면서, 몰락하는 자민련을 견인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결국 집권 3년이 지난 지금, 현재 DJ 정권은 권력누수 방지와 정권재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최근의 정책연합과 개각은 이러한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노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두 마리 토끼"는 동시에 잡기 어려운 것을 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내년, 즉 2002년에는 대선 후보 선출 전당대회, 지자체 선거, 월드컵, 대통령 선거라는 굵직한 정치적 일정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치 일정은 모든 정치세력들에게 나름의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즉, 4.13 총선 이후 일관되게 지지율과 집권가능성 예측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물론 한국정치가 늘 그렇듯이 이는 국민전체의 의견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것이다― 이회창 진영을 제외하고 모든 이에게 "정국을 흔들" 필요성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b>이념과 정치철학은 어디 있는가?</b>
바로 이 지점에서 들쥐와 같은 정치감각으로 살아남아온 "3김 시대" 정치인들이 준동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기생세력이었던 이들이 이후의 정국을 주도할 수는 없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면서 정국의 무임승차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을 결합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응집력이 기나긴 군부독재 시절의 향수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보는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을 "오른쪽"으로 이끌거나 혹은 "오른쪽"에서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지점에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가장 모호한 세력이었던 "개혁" 세력의 몸부림이 놓여있다. 사실 이들은 당선을 위해서라면 어떤 정당도 선택할 수 있는 변신의 귀재들로서 어떤 응집력을 가진 세력이라 보기 어렵다. 한번 변절을 한 사람은 언제든 그럴 수 있는 법. 현재와 같은 이회창의 독주가 지속된다면 한나라당 내 소위 "비주류"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고, 따라서 이들은 또다시 편리한 "개혁"의 갑옷을 두를 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활발한 "개혁세력"의 거두는 민주당의 대권후보인 김근태다. 그는 최근 한 때 타도의 대상이었던 JP와 정치적 경쟁세력이었던 YS 등을 만나 자신의 운신 폭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정대철, 김원기 등의 민주당 최고위원과 한나라당의 이부영 부총재, 김덕룡, 손학규 의원, 나아가 몇몇 재야 "자유주의자"들을 견인하여 <포럼, 화합과 전진(가칭)>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의 슬로건은 그야말로 "최소강령적"인 것으로, 지역정치 탈피, 보스정치 혁파, 정치자금 투명화, 한반도 평화정착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덧붙여 이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념과 정치철학에 입각한 정치"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이 다양한 차원에서 균열을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균열의 최종적 목표점은 이회창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테크노크라트들의 정국 주도권을 역전시키고 대선가도의 관제고지를 점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역설적으로 이회창을 제외한 어떤 세력도, 정권창출의 능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또 한가지 역설은 이회창 세력이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일관된 자신의 대안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다만 DJ 정권의 "정책개혁"에 대해 흠집을 내는 데 급급할 뿐이다.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비판, 재벌정책에 대한 비판과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로서 시장의 강화에 대한 역설, "엄격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남북관계 정립" 등은 사실 DJ 정권의 구조조정 및 남북관계 전략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위 "개혁"세력처럼 자신의 정치적 실천이 구래의 정치와는 달리 "이념과 정치철학에 입각한 정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b>전망과 정책없이 표류해온 한국 정치</b>
이제 혼란스런 정국을 정리해보자. 애초에 내적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던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은 "3김 시대 정치인들"과 "개혁 세력"을 중심으로 균열을 보이고 있다. 물론 양자의 연합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그것은 이회창 세력에 대한 대안을 형성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개혁 세력이나 이회창 세력은 모두 과거와 다른 이념과 정치철학에 근거한 정치를 외치고 있지만, 양자 모두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타개할 이념이나 정치철학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주의 진영은 상황의 지대를 누리고 있다. 이것이 현 정국의 핵심적 동학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정국의 기본적인 조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형태의 정치도 물질적 축적조건이나 사회적 세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3김 시대"이후의 정치인들이 모두 한국 정치가 이념과 노선에 따라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결코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념과 정치철학! 사실 모든 부르조아 정치인들은 스스로의 이념과 정치철학을 원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는 그런 정치가 50년이 넘도록 불가능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역사적 조건만을 지적하자. 전성기의 영국이나 미국, 그리고 몇몇 서구국가들을 제외하고 이념과 정치철학을 가진 정당체제가 존재했던 나라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정치적 이념이건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물질적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조적인 경제위기의 국면에서 이념과 정치철학을 관철시켰던 어떤 부르조아 정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정당정치는 그 역사적, 물질적 조건에 있어 구조적 취약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도 "3김 시대"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은 정치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들 속에서 평생 동안 "정치에 종사"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정당정치가 이념과 정치철학에 따라 재편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건―보수주의적이건 자유주의적이건― 전국민들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전망과 정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한 번도 그런 조건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의 부재"는 한국 정치가 군부의 손에 놀아나도록 만든 주범이며, 동시에 지속적인 경제위기와 민생파탄이 일련의 보수화 물결과 결합되게 만드는 주범인 것이다.
<b>경제위기와 지속되는 민생파탄</b>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축적의 위기에 처해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한국에서도 고도성장과 발전의 시대가 끝났음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재벌체제로 표상되는 자본의 과잉축적은 필연적으로 자본의 이윤을 압박했고 외환위기의 국면에서 그것은 국내 금융의 위기로 귀결되었다. 이에 따라 과잉자본의 처리가 한국 자본주의의 주요 과제로 부과되었고, 이는 "구조조정"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다.
구조조정은 금융체제의 재편 속에서 전세계적인 금융화에 편승하고, 금융시장에 민감한 형태로 기업지배구조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융의 논리에 따라 작동하며, 전세계적인 금융화 속에서 국내경제를 끊임없는 불안정 속에 노출시킨다. 동시에 그것은 과잉자본의 처리를 동반한다는 면에서 생산설비와 고용의 지속적인 파괴를 동반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액주주이해"라는 명목으로 기관투자자들의 이해를 수용하면서 금융적 투기의 부산물을 몇몇 소수 금리생활자들에게 뱉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고전적인 의미의 경제성장은 사실상 소멸되고, 만성적인 불황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결국 DJ 집권 3년 동안에 국민 대다수에게 남은 것은 빚과 실업, 고용불안 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청년 무직자가 105만 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700명을 모집하는 '취업박람회'에 1만 명이 몰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속적인 경제위기는 부채에 허덕이는 가족의 위기를 낳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집과 비정규직 일자리 양자 모두에서 과잉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극소수 금융 투기꾼들의 과소비는 이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금융화과정의 부산물인 극소수의 기생적 계급들은 어떤 노동도, 어떤 생산도 행하지 않으면서 금융 투기를 통해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오직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보다 빠른 고급정보일 뿐이며, 그런 면에서 이들이 정치권과 긴밀하게 결합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또한 이들의 행태는 전사회적인 투기와 도박의 심성을 확산시키고 전국민을 허구적 투기거품에 놀아나도록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금융화된 축적체제 내에서 국내 자본은 고수익과 안정성을 이유로 끊임없이 해외로 도피하고 있다. 사실 가능하다면 뉴욕이라는 큰 물에서 노는 것이 더 안전하고 수익도 높지 않겠는가? 동시에 초국적 금융자본들은 손쉽게 한국이라는 "신흥 시장"에서 한국의 국부(國富)를 자신의 장사밑천으로 삼아 금융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로 인해 다양한 형태―그것이 M&A형태이건 이자소득이건 환차익이건―의 국부 유출이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융화에 따른 경제회복의 지역적 불균등성은 더욱 심화되어 서울과 수도권 일부의 고소득층―여기에는 일시적인 벤처거품의 수혜자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포진해 있다―을 제외하고 지역의 경제는 붕괴 일변도를 달리고 있다.
<b>구조조정 그리고 심화되는 지역주의</b>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이념이나 정치철학이 전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정부의 정책에는 이제 과거와 같은 이념적 전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혁,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시장경제 등의 미사여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도, 존재할 필요도 없다. 그냥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밖에. 정부는 공적자금을 더 투입하고, 증시부양 대책을 세우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지속적인 구조조정 정책을 추진하는 것 등의 입장을 밝힐 뿐이다. 물론 그것의 구체적 형태는 과거보다 더 파괴적 강도가 높다. 금년 중 최대 6조 8천억원 규모로 연기금 증시참여를 확대시키고, 정크본드(고수익-고위험 채권)을 육성하며, 부동산 구조조정회사를 설립하는 것 등의 한국 경제의 "금융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화의 이면에는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이라는 프로젝트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상시적 구조조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금융)시장의 평가에 따라 상시적으로 부실기업을 처리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지금까지 정권이 행해온 정치행태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정권이 현대계열사들을 금융시장의 요구에 따라 상시적 부도처리하고 퇴출시킬 수 있을까? 과연 부실덩어리인 대다수 한국 재벌계열사들을 부도처리하고 한국 경제, 더 정확히는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재벌계열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대화와 설득을 통해 관리해낼 수 있을까? 손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무리를 하지 않더라도 노동시장의 상시적 구조조정은 가능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일차적으로 노동시장 유연화는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조조정의 파괴적 결과가 한국 정치에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위기는 역설적으로 "3김 시대"의 인물들이 다시 한번 정치의 무대로 등장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권의 어떤 약속도 백지수표로 판명났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어두운 상황―단군이래 최초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한국을 떠나고 있는 상황은 현재의 위기와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에서 가장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반응은 "박정희 때가 더 좋았다"는 원색적인 선호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舊) 지배 세력 중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세력들―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에 근거를 둔 발전과 고도성장으로부터 수혜를 입은 세력들 중 발빠르게 변신하지 못한 자들, 그리고 과거 "인맥"으로 더 이상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된 자들―은 이러한 불만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반DJ 감정을 응집력으로 독자적 목소리를 내면서 이회창의 지지세력 중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회창의 지지기반은 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앞으로도 이대로만!"을 외치는 서울의 강남일대와 수도권의 신도시의 확고한 "안정 희구세력"들의 분명한 지지를 획득하고 있다. 그는 군부가 아닌 테크노크라트에 기반을 둔 보수주의 세력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무식하고 교양없는" 군부 보수주의 세력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적인 불균등 발전과 전국적인 사회적 통합력의 해체―이는 구조조정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고 지방의 더딘 경기회복은 과거보다 더 공격적인 지역감정을 형성시키는 구조적 요인이 되고 있다. 구조조정의 필연적 결과가 국민들에게 특정 지역의 인사권 독점의 결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위기가 동유럽에서 인종주의를 불어오는 것과 유사하게, 한국에서 기존 산업지역의 붕괴는 자기-파괴적인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b>분열과 연대 속에서 관철되는 계급 대립</b>
경제위기와 민생파탄, 보수주의 정서의 득세, 그리고 임박한 2002년 대권경쟁과 신자유주의적 지배연합의 균열 등이 현재의 정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제 이러한 요소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재의 계급적 대립 지점을 보다 분명하게 포착해보자.
우리의 출발점은 DJ 정권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정세를 사실상 규정하고 있는 구조적인 "경제위기"의 심화이다. DJ 정권은 위기에 대한 국민적 공포를 활용하고 어떤 대안도 갖지 못했던 보수주의 일 분파와 소위 "개혁주의" 일 분파를 견인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고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는 자본의 금융화와 노동의 불안정화, 여성의 빈곤화 등으로 나타났고, 기생적이고 투기적인 집단의 형성을 낳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경제의 안정적 회복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한편 그는 성공적 대북정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타개할 몇 가지 시도를 했으나 일시적인 정치적 성공 외에 장기적인 경제적 전망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부분적 실패(혹은 부분적 성공)―사실 구조조정의 추진이라는 면에서 볼 때 DJ 정권은 어떤 정권도 손쉽게 해내기 어려운 구조조정을 달성해냈다―는 국민적 불만을 증가시켰고, 그것은 권력누수와 이회창의 반사 이득으로 귀결되었다. DJ 정부는 이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개각을 단행했고,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은 다각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권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강력한 물리력을 통해 돌파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최근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격성과 폭력성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민중대회 이후 평화시위에 대한 폭력 침탈,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 고무총 도입, 시위현장에 대한 비디오 촬영, 화염병 전담반 구성 등은 그것의 산 증거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철학과 이념"을 중요시하는 분들은 침묵한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이야말로 한국에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사실 현재 전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실 이들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자유주의적 일반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이상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합의와 토론의 정치를 통해 구조조정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회창 세력의 득세 앞에 가장 필사적으로 정권재창출에 목을 매달고 있다는 면에서 남다른 공격성―그것은 종종 몇몇 NGO들의 공격적 운동으로 나타난다―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이 보수주의 세력, 그 중에서도 '낡은 보수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들이 정권의 언저리에 머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보수주의 세력의 헤게모니 속에서 재통합되는 길이다. 결국 이들에게 관건이 되는 문제는 이회창을 제외한 보수주의 세력―이들은 대체로 "3김 시대"인물이다―과 어떻게 제휴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근태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은 "정치선배인" JP와 YS 등의 "어르신들"을 찾아 뵙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자유주의 세력의 한계지점이다. 결코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자적 집권이 불가능하고, 동시에 '민중적 투쟁'으로 나설 수도 없다. 그들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한편 이회창 세력은 종종 DJ식 구조조정이 낳은 파괴적 결과를 "정책 실패"로 공격하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넓히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공격은 경제위기에 따른 국민적 보수화와 지역감정의 득세를 등에 엎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3김 시대" 어르신들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으며, 한나라당 내 영남권 인사들과 불편한 동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과연 그는 "어르신들"의 도움 없이, 나아가 "어르신들"의 연대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면서 집권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느 정도의 양보―특히 부산·경남의 터줏대감인 YS에게―을 감수할 것인가? 이는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b>구조조정 반대투쟁을 위한 운동진영의 해법</b>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위기와 그것의 필연적 결과인 사회적 갈등의 심화에 대한 그의 해법이다. 사실 이 지점에서 노동자 민중들이 그에게 기대할 것은 별로 없다. 게다가 DJ 정부에 대해 "정책실패"의 책임을 묻는 이들의 정치공세는 그 자체로 허구적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DJ 정부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특정 정부의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을 정책의 성공이라 칭한다면, DJ 정부의 어떤 정책도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개혁론"과 "정책실패론" 사이의 논쟁은 허구적이며, 중요한 것은 어떤 정책이건 그것의 "실행가능성"인 것이다. 사실 어떤 종류의 구조조정도―그것이 상시적 구조조정이건 비상시적 구조조정이건― 안정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결국 실업과 노동의 불안정화를 낳을 수밖에 없는 정책이 어떻게 "성공한 정책"이겠는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서건 국가가 개입을 하건 과잉축적의 위기를 극복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불황을 낳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는 정책적 해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구조조정의 수혜자들이 이회창을 매개로 아무런 미래의 희망도 없는 국민대중들을 동원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허구적 동원의 성공여부는 민중운동의 성공과 정확히 반비례한다. 민중운동 진영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현정권과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대한 정치적 반대로 전환되지 못하는 만큼, 보수주의 세력의 힘은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중운동 진영은 노동자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상승시켜낼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구조조정 반대"의 의미를 보다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구조조정이 "인력감축"으로만 귀결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즉 구조조정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구조조정은 곧 한국 사회의 금융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전사회적인 기생성과 투기성을 증가시키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에는 파괴적인 경제적 붕괴와 민생 파탄을 낳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것이며, 어떤 종류의 "정책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곧 정권도 자본도 노동자 민중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생산의 주체이자 견실한 시민의 일원으로서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의 권리와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이 선언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독자적인 정치적·조직적 행동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반대를 분명히 하는 독자적인 연대조직의 형성인 것이다.
<b>결론에 대신하여</b>
어떤 정치세력도 현재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음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자본은 물론이고 국가도 현재의 위기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들에게 생활의 안정을 제공해줄 수 없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안을 어떻게 조직하는가가 향후 권력재편의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속적인 "정책개혁"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정당질서의 공고화가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힘을 얻을지는 의문이지만, "어르신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과 "개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필사적으로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을 견인하려는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정책의 실패"에 대한 반복적 되뇌임과 반 DJ정서를 "정치적 흠집 없는" 보수주의와 결합시키려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명히 반대를 뛰어넘는 어떤 매혹적인(?) 자신의 "진-테제"를 제시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매우 궁금하지만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범세계적인 보수화의 물결과 민생파탄에 따른 국민적 절망감이 얼마나 왜곡된 형태를 띠게 될 것인가가 중요 변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조직적 무기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국민대중들의 불만과 다양한 저항들이 분출되고 있지만 지금처럼 전국적인 정치적 응집력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에서 분석한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이 현실화될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주도세력을 변화시킬 뿐 노동자 민중에 대한 어떤 양보도 동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조직적 무기력이 지속되는가? 그것에는 매우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전략적, 전술적, 이념적, 조직적 차원의 문제 등 매우 복잡한 상황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매듭을 끊는 데 있어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운동진영의 몇몇 부분이―그리고 다수 386세대들이― DJ에 대한 지지를 사실상 철회하지 못하고 있으며, 몇몇 개혁주의 세력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철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와 환상은 대선이 다가오면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 내의 다양한 "개혁세력"들의 행보가 가시화되면 더욱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희망사항이 현실을 대체하는 것이다. 현실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의 희망사항보다 냉혹하다. 현실이 너무나도 냉혹할 때 우리는 종종 환상적 희망 속으로 도피하지만, 그것의 역사적 결과는 언제나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정세를 전환시키면서 현실의 역사를 움직여 온 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었다. 각종 정치적 환상이 노동자 민중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지금 역사성, 그 어느 때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이 더욱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우 자동차 노동조합원들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적 폭력이 자행해되던 그 즈음, 정치권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DJP 공조를 넘어 민국당까지 포함한 정책연합이 개각으로 드러났고, '백전노장' JP는 다시 한번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민주당의 중진과 김윤환 민국당 대표 등과 자리를 갖고 "우리는 결코 죽지 않았고 앞으로는 놀랄 일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수십년 동안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큰 어르신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3공화국과 유신, 5공화국과 6공화국, 찬란한(?) 한국의 역사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거친 역전의 용사들이 결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낡은 정치인들의 재등장이 경찰의 곤봉과 무자비한 폭력의 재등장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큰 일"은 무엇일까? "불투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정치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JP의 말에 큰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호언장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한국의 정치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한국 보수주의의 적통을 자처하는 야당 지도자―그가 누구인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의 독주는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요즘같이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정치에 관심을 가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구시대 정치인들의 "힘 자랑"이 과거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의 행보는 과거와 달리 정권재창출을 주도하는 위치에서 정치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분"―사실상 이는 급속하게 위협받아 왔다―을 유지하려는 성격이 강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문제는 이들 "노병"의 힘이 어디까지인가, 즉 이들이 한국의 미래에 정확히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된다.
최근 이들은 또 한 명의 "노병"인 YS와도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해도 누가 되지 못할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고 평소에 힘 자랑을 하던 YS도 최근 JP와 접촉을 시도하면서 "노병전우회"의 일원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과연 이들은 이념과 계파, 갈등의 역사를 초월하여 초당파적 "노병"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이웃나라 일본처럼―JP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대우받는 일본의 노정치인들을 입에 올린다― 막후 실세들로 늙은 정치인들의 온전한 위상이 보장되는 정치를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인가?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노병들의 주도하에 새로운 대통령 후보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늙은 정치인들의 행보와 때를 맞추어 여당과 야당을 가지리 않고 "개헌론"이 터져나오고 있다. 구세대 정치인들의 회동과 마찬가지로 개헌론자들도 정당을 가로질러 자기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구세대 정치인들의 행보와 직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자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흐름은 모두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대응이기 때문이다.
우선 "개헌론" 그 자체의 쟁점이 대통령 선거제도를 둘러싼 것으로 이는 곧 대권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힘 자랑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즉 구세대 정치인들이 대선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3김 이후" 한국 정치를 이끌 정치인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헌론을 내세우고 있는 사람들이나 3김 정치 시대 노병들 모두가 현재의 정치적 흐름, 곧 너무나도 선명한 이회창의 독주를 본격적인 대선국면 이전에 견제하겠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모든 양상들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바야흐로 한국에 다시 한번 "권력 재편"의 시대―더 정확히 말하면 주기적인 권력재생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 배경과 그 속에서의 갈등 및 투쟁의 지점들을 보다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b>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누수?</b>
지배적 사회질서의 재생산은 언제나 정치권력의 재생산을 필요로 하며, 정치권력의 재생산에서 지배질서의 재생산은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배연합이 형성되어 지배계급의 상이한 이해들을 조정―이데올로기적으로, 정책적으로―하고, 국민적 통합과 동원(혹은 배제와 정치무관심)의 논리를 제시한다. 따라서 문제는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특수한 자본축적과 계급적 갈등국면에서 이러한 조정과 통합의 능력을 발휘해내는가 라는 것이 된다.
우리는 DJ정권이 사실상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IMF 관리체제의 관리자 역할을 해온 것을 알고 있다. 대선과정에서 IMF 구제금융 신청을 비판해온 DJ는 당선 직후 "금고가 텅 비었더라"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면서 국민적 동원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적 동원에 근거해서 구래의 지배정치연합을 공격하고, 민중운동 진영을 무력화시킨 후 IMF의 지시에 따라 각종 구조조정 정책을 추진했다. 이렇게 볼 때 DJ 정부는 긴급한 "위기"라는 상황을 활용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면서 보수주의자들 중 일부와 시민운동의 일부를 포괄―이들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재벌 해체라는 '진보적 과제'를 달성할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IMF를 환영했다―하는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지배연합 그 자체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구래의 보수주의 집단 중 일부―군부 혹은 폭력을 통해 권력을 손쉽게 재생산하는 데 익숙한 집단들―의 무력화, 동시에 민중운동 진영의 무력화에 의해서만 성립가능한 지배질서이다. 또한 그것은 이념과 노선보다는 기득권 수호에 여념이 없는 보수세력의 일부―이들은 여당이 아니면 절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명할 수 없는 부류들이다―를 견인하고, 동시에 사회적 갈등과 통치성 위기를 관리해낼 각종 시민운동 조직을 동원해낼 때에만 유지 가능한 지배질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위기 극복'이나 '남북정상회담 실현' 등과 같은 단기적인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일관되고 안정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수 없다. 즉, 현재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관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 스스로의 단결과 국민적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낡은 지배 이데올로기―예컨대 반공이나 발전 등―는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무엇이 출현하지 못한 상황이 도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끊임없는 절충과 타협, 미봉책만이 이들의 지배 연합을 유지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게다가 약속했던 경제위기 극복은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고, 그것은 4.13 총선 이후 정국 주도력의 부분적인 상실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 지배세력의 일부를 잘라내고도 독자회생에 성공하는 이회창 세력의 정치적 결단력과 권력자원이 한 몫을 했다. 게다가 그는 군부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보수주의자이다. 그의 주변에 모인 핵심적 권력자원은 한국의 보수적 테크노크라트 집단이다. 이들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군부와 더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한번도 스스로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했던 관료집단들―군부시대 넘버2로 살아온 자들―로서 지역주의로부터도 부분적으로 자유롭다. 그는 이러한 권력자원들에 기반해서 스스로를 반DJ의 대안으로 만들어내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국 주도권의 반전 이후 김대중 정권은 역사상 최초의 평양방문이나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노벨평화상의 수상 등과 같은 화려한 업적과 몇 차례에 걸친 "국민과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도를 회복하지 못했다. 동시에 민주당은 국회 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국회의원 대여"라는 한국 정치사 최고의 희극―박정희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을 연출하면서, 몰락하는 자민련을 견인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결국 집권 3년이 지난 지금, 현재 DJ 정권은 권력누수 방지와 정권재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최근의 정책연합과 개각은 이러한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노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두 마리 토끼"는 동시에 잡기 어려운 것을 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내년, 즉 2002년에는 대선 후보 선출 전당대회, 지자체 선거, 월드컵, 대통령 선거라는 굵직한 정치적 일정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치 일정은 모든 정치세력들에게 나름의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즉, 4.13 총선 이후 일관되게 지지율과 집권가능성 예측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물론 한국정치가 늘 그렇듯이 이는 국민전체의 의견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것이다― 이회창 진영을 제외하고 모든 이에게 "정국을 흔들" 필요성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b>이념과 정치철학은 어디 있는가?</b>
바로 이 지점에서 들쥐와 같은 정치감각으로 살아남아온 "3김 시대" 정치인들이 준동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기생세력이었던 이들이 이후의 정국을 주도할 수는 없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면서 정국의 무임승차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을 결합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응집력이 기나긴 군부독재 시절의 향수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보는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을 "오른쪽"으로 이끌거나 혹은 "오른쪽"에서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지점에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가장 모호한 세력이었던 "개혁" 세력의 몸부림이 놓여있다. 사실 이들은 당선을 위해서라면 어떤 정당도 선택할 수 있는 변신의 귀재들로서 어떤 응집력을 가진 세력이라 보기 어렵다. 한번 변절을 한 사람은 언제든 그럴 수 있는 법. 현재와 같은 이회창의 독주가 지속된다면 한나라당 내 소위 "비주류"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고, 따라서 이들은 또다시 편리한 "개혁"의 갑옷을 두를 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활발한 "개혁세력"의 거두는 민주당의 대권후보인 김근태다. 그는 최근 한 때 타도의 대상이었던 JP와 정치적 경쟁세력이었던 YS 등을 만나 자신의 운신 폭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정대철, 김원기 등의 민주당 최고위원과 한나라당의 이부영 부총재, 김덕룡, 손학규 의원, 나아가 몇몇 재야 "자유주의자"들을 견인하여 <포럼, 화합과 전진(가칭)>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의 슬로건은 그야말로 "최소강령적"인 것으로, 지역정치 탈피, 보스정치 혁파, 정치자금 투명화, 한반도 평화정착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덧붙여 이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념과 정치철학에 입각한 정치"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이 다양한 차원에서 균열을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균열의 최종적 목표점은 이회창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테크노크라트들의 정국 주도권을 역전시키고 대선가도의 관제고지를 점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역설적으로 이회창을 제외한 어떤 세력도, 정권창출의 능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또 한가지 역설은 이회창 세력이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일관된 자신의 대안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다만 DJ 정권의 "정책개혁"에 대해 흠집을 내는 데 급급할 뿐이다.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비판, 재벌정책에 대한 비판과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로서 시장의 강화에 대한 역설, "엄격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남북관계 정립" 등은 사실 DJ 정권의 구조조정 및 남북관계 전략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위 "개혁"세력처럼 자신의 정치적 실천이 구래의 정치와는 달리 "이념과 정치철학에 입각한 정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b>전망과 정책없이 표류해온 한국 정치</b>
이제 혼란스런 정국을 정리해보자. 애초에 내적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던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은 "3김 시대 정치인들"과 "개혁 세력"을 중심으로 균열을 보이고 있다. 물론 양자의 연합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그것은 이회창 세력에 대한 대안을 형성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개혁 세력이나 이회창 세력은 모두 과거와 다른 이념과 정치철학에 근거한 정치를 외치고 있지만, 양자 모두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타개할 이념이나 정치철학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주의 진영은 상황의 지대를 누리고 있다. 이것이 현 정국의 핵심적 동학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정국의 기본적인 조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형태의 정치도 물질적 축적조건이나 사회적 세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3김 시대"이후의 정치인들이 모두 한국 정치가 이념과 노선에 따라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결코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념과 정치철학! 사실 모든 부르조아 정치인들은 스스로의 이념과 정치철학을 원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는 그런 정치가 50년이 넘도록 불가능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역사적 조건만을 지적하자. 전성기의 영국이나 미국, 그리고 몇몇 서구국가들을 제외하고 이념과 정치철학을 가진 정당체제가 존재했던 나라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정치적 이념이건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물질적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조적인 경제위기의 국면에서 이념과 정치철학을 관철시켰던 어떤 부르조아 정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정당정치는 그 역사적, 물질적 조건에 있어 구조적 취약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도 "3김 시대"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은 정치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들 속에서 평생 동안 "정치에 종사"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정당정치가 이념과 정치철학에 따라 재편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건―보수주의적이건 자유주의적이건― 전국민들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전망과 정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한 번도 그런 조건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의 부재"는 한국 정치가 군부의 손에 놀아나도록 만든 주범이며, 동시에 지속적인 경제위기와 민생파탄이 일련의 보수화 물결과 결합되게 만드는 주범인 것이다.
<b>경제위기와 지속되는 민생파탄</b>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축적의 위기에 처해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한국에서도 고도성장과 발전의 시대가 끝났음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재벌체제로 표상되는 자본의 과잉축적은 필연적으로 자본의 이윤을 압박했고 외환위기의 국면에서 그것은 국내 금융의 위기로 귀결되었다. 이에 따라 과잉자본의 처리가 한국 자본주의의 주요 과제로 부과되었고, 이는 "구조조정"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다.
구조조정은 금융체제의 재편 속에서 전세계적인 금융화에 편승하고, 금융시장에 민감한 형태로 기업지배구조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융의 논리에 따라 작동하며, 전세계적인 금융화 속에서 국내경제를 끊임없는 불안정 속에 노출시킨다. 동시에 그것은 과잉자본의 처리를 동반한다는 면에서 생산설비와 고용의 지속적인 파괴를 동반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액주주이해"라는 명목으로 기관투자자들의 이해를 수용하면서 금융적 투기의 부산물을 몇몇 소수 금리생활자들에게 뱉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고전적인 의미의 경제성장은 사실상 소멸되고, 만성적인 불황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결국 DJ 집권 3년 동안에 국민 대다수에게 남은 것은 빚과 실업, 고용불안 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청년 무직자가 105만 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700명을 모집하는 '취업박람회'에 1만 명이 몰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속적인 경제위기는 부채에 허덕이는 가족의 위기를 낳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집과 비정규직 일자리 양자 모두에서 과잉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극소수 금융 투기꾼들의 과소비는 이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금융화과정의 부산물인 극소수의 기생적 계급들은 어떤 노동도, 어떤 생산도 행하지 않으면서 금융 투기를 통해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오직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보다 빠른 고급정보일 뿐이며, 그런 면에서 이들이 정치권과 긴밀하게 결합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또한 이들의 행태는 전사회적인 투기와 도박의 심성을 확산시키고 전국민을 허구적 투기거품에 놀아나도록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금융화된 축적체제 내에서 국내 자본은 고수익과 안정성을 이유로 끊임없이 해외로 도피하고 있다. 사실 가능하다면 뉴욕이라는 큰 물에서 노는 것이 더 안전하고 수익도 높지 않겠는가? 동시에 초국적 금융자본들은 손쉽게 한국이라는 "신흥 시장"에서 한국의 국부(國富)를 자신의 장사밑천으로 삼아 금융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로 인해 다양한 형태―그것이 M&A형태이건 이자소득이건 환차익이건―의 국부 유출이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융화에 따른 경제회복의 지역적 불균등성은 더욱 심화되어 서울과 수도권 일부의 고소득층―여기에는 일시적인 벤처거품의 수혜자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포진해 있다―을 제외하고 지역의 경제는 붕괴 일변도를 달리고 있다.
<b>구조조정 그리고 심화되는 지역주의</b>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이념이나 정치철학이 전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정부의 정책에는 이제 과거와 같은 이념적 전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혁,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시장경제 등의 미사여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도, 존재할 필요도 없다. 그냥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밖에. 정부는 공적자금을 더 투입하고, 증시부양 대책을 세우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지속적인 구조조정 정책을 추진하는 것 등의 입장을 밝힐 뿐이다. 물론 그것의 구체적 형태는 과거보다 더 파괴적 강도가 높다. 금년 중 최대 6조 8천억원 규모로 연기금 증시참여를 확대시키고, 정크본드(고수익-고위험 채권)을 육성하며, 부동산 구조조정회사를 설립하는 것 등의 한국 경제의 "금융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화의 이면에는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이라는 프로젝트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상시적 구조조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금융)시장의 평가에 따라 상시적으로 부실기업을 처리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지금까지 정권이 행해온 정치행태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정권이 현대계열사들을 금융시장의 요구에 따라 상시적 부도처리하고 퇴출시킬 수 있을까? 과연 부실덩어리인 대다수 한국 재벌계열사들을 부도처리하고 한국 경제, 더 정확히는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재벌계열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대화와 설득을 통해 관리해낼 수 있을까? 손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무리를 하지 않더라도 노동시장의 상시적 구조조정은 가능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일차적으로 노동시장 유연화는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조조정의 파괴적 결과가 한국 정치에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위기는 역설적으로 "3김 시대"의 인물들이 다시 한번 정치의 무대로 등장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권의 어떤 약속도 백지수표로 판명났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어두운 상황―단군이래 최초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한국을 떠나고 있는 상황은 현재의 위기와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준다―에서 가장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반응은 "박정희 때가 더 좋았다"는 원색적인 선호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舊) 지배 세력 중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세력들―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에 근거를 둔 발전과 고도성장으로부터 수혜를 입은 세력들 중 발빠르게 변신하지 못한 자들, 그리고 과거 "인맥"으로 더 이상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된 자들―은 이러한 불만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반DJ 감정을 응집력으로 독자적 목소리를 내면서 이회창의 지지세력 중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회창의 지지기반은 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앞으로도 이대로만!"을 외치는 서울의 강남일대와 수도권의 신도시의 확고한 "안정 희구세력"들의 분명한 지지를 획득하고 있다. 그는 군부가 아닌 테크노크라트에 기반을 둔 보수주의 세력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무식하고 교양없는" 군부 보수주의 세력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적인 불균등 발전과 전국적인 사회적 통합력의 해체―이는 구조조정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고 지방의 더딘 경기회복은 과거보다 더 공격적인 지역감정을 형성시키는 구조적 요인이 되고 있다. 구조조정의 필연적 결과가 국민들에게 특정 지역의 인사권 독점의 결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위기가 동유럽에서 인종주의를 불어오는 것과 유사하게, 한국에서 기존 산업지역의 붕괴는 자기-파괴적인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b>분열과 연대 속에서 관철되는 계급 대립</b>
경제위기와 민생파탄, 보수주의 정서의 득세, 그리고 임박한 2002년 대권경쟁과 신자유주의적 지배연합의 균열 등이 현재의 정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제 이러한 요소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재의 계급적 대립 지점을 보다 분명하게 포착해보자.
우리의 출발점은 DJ 정권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정세를 사실상 규정하고 있는 구조적인 "경제위기"의 심화이다. DJ 정권은 위기에 대한 국민적 공포를 활용하고 어떤 대안도 갖지 못했던 보수주의 일 분파와 소위 "개혁주의" 일 분파를 견인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고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는 자본의 금융화와 노동의 불안정화, 여성의 빈곤화 등으로 나타났고, 기생적이고 투기적인 집단의 형성을 낳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경제의 안정적 회복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한편 그는 성공적 대북정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타개할 몇 가지 시도를 했으나 일시적인 정치적 성공 외에 장기적인 경제적 전망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부분적 실패(혹은 부분적 성공)―사실 구조조정의 추진이라는 면에서 볼 때 DJ 정권은 어떤 정권도 손쉽게 해내기 어려운 구조조정을 달성해냈다―는 국민적 불만을 증가시켰고, 그것은 권력누수와 이회창의 반사 이득으로 귀결되었다. DJ 정부는 이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개각을 단행했고,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은 다각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권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강력한 물리력을 통해 돌파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최근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격성과 폭력성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민중대회 이후 평화시위에 대한 폭력 침탈,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 고무총 도입, 시위현장에 대한 비디오 촬영, 화염병 전담반 구성 등은 그것의 산 증거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철학과 이념"을 중요시하는 분들은 침묵한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이야말로 한국에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사실 현재 전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실 이들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자유주의적 일반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이상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합의와 토론의 정치를 통해 구조조정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회창 세력의 득세 앞에 가장 필사적으로 정권재창출에 목을 매달고 있다는 면에서 남다른 공격성―그것은 종종 몇몇 NGO들의 공격적 운동으로 나타난다―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이 보수주의 세력, 그 중에서도 '낡은 보수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들이 정권의 언저리에 머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보수주의 세력의 헤게모니 속에서 재통합되는 길이다. 결국 이들에게 관건이 되는 문제는 이회창을 제외한 보수주의 세력―이들은 대체로 "3김 시대"인물이다―과 어떻게 제휴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근태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은 "정치선배인" JP와 YS 등의 "어르신들"을 찾아 뵙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자유주의 세력의 한계지점이다. 결코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자적 집권이 불가능하고, 동시에 '민중적 투쟁'으로 나설 수도 없다. 그들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한편 이회창 세력은 종종 DJ식 구조조정이 낳은 파괴적 결과를 "정책 실패"로 공격하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넓히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공격은 경제위기에 따른 국민적 보수화와 지역감정의 득세를 등에 엎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3김 시대" 어르신들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으며, 한나라당 내 영남권 인사들과 불편한 동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과연 그는 "어르신들"의 도움 없이, 나아가 "어르신들"의 연대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면서 집권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느 정도의 양보―특히 부산·경남의 터줏대감인 YS에게―을 감수할 것인가? 이는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b>구조조정 반대투쟁을 위한 운동진영의 해법</b>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위기와 그것의 필연적 결과인 사회적 갈등의 심화에 대한 그의 해법이다. 사실 이 지점에서 노동자 민중들이 그에게 기대할 것은 별로 없다. 게다가 DJ 정부에 대해 "정책실패"의 책임을 묻는 이들의 정치공세는 그 자체로 허구적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DJ 정부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특정 정부의 정책이 전체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을 정책의 성공이라 칭한다면, DJ 정부의 어떤 정책도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개혁론"과 "정책실패론" 사이의 논쟁은 허구적이며, 중요한 것은 어떤 정책이건 그것의 "실행가능성"인 것이다. 사실 어떤 종류의 구조조정도―그것이 상시적 구조조정이건 비상시적 구조조정이건― 안정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결국 실업과 노동의 불안정화를 낳을 수밖에 없는 정책이 어떻게 "성공한 정책"이겠는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서건 국가가 개입을 하건 과잉축적의 위기를 극복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불황을 낳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는 정책적 해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구조조정의 수혜자들이 이회창을 매개로 아무런 미래의 희망도 없는 국민대중들을 동원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허구적 동원의 성공여부는 민중운동의 성공과 정확히 반비례한다. 민중운동 진영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현정권과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대한 정치적 반대로 전환되지 못하는 만큼, 보수주의 세력의 힘은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중운동 진영은 노동자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상승시켜낼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구조조정 반대"의 의미를 보다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구조조정이 "인력감축"으로만 귀결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즉 구조조정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구조조정은 곧 한국 사회의 금융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전사회적인 기생성과 투기성을 증가시키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에는 파괴적인 경제적 붕괴와 민생 파탄을 낳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것이며, 어떤 종류의 "정책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곧 정권도 자본도 노동자 민중의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생산의 주체이자 견실한 시민의 일원으로서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의 권리와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이 선언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독자적인 정치적·조직적 행동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반대를 분명히 하는 독자적인 연대조직의 형성인 것이다.
<b>결론에 대신하여</b>
어떤 정치세력도 현재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음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자본은 물론이고 국가도 현재의 위기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들에게 생활의 안정을 제공해줄 수 없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안을 어떻게 조직하는가가 향후 권력재편의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속적인 "정책개혁"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정당질서의 공고화가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힘을 얻을지는 의문이지만, "어르신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과 "개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필사적으로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을 견인하려는 노력은 지속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정책의 실패"에 대한 반복적 되뇌임과 반 DJ정서를 "정치적 흠집 없는" 보수주의와 결합시키려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명히 반대를 뛰어넘는 어떤 매혹적인(?) 자신의 "진-테제"를 제시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매우 궁금하지만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범세계적인 보수화의 물결과 민생파탄에 따른 국민적 절망감이 얼마나 왜곡된 형태를 띠게 될 것인가가 중요 변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조직적 무기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국민대중들의 불만과 다양한 저항들이 분출되고 있지만 지금처럼 전국적인 정치적 응집력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에서 분석한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이 현실화될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주도세력을 변화시킬 뿐 노동자 민중에 대한 어떤 양보도 동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조직적 무기력이 지속되는가? 그것에는 매우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전략적, 전술적, 이념적, 조직적 차원의 문제 등 매우 복잡한 상황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매듭을 끊는 데 있어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운동진영의 몇몇 부분이―그리고 다수 386세대들이― DJ에 대한 지지를 사실상 철회하지 못하고 있으며, 몇몇 개혁주의 세력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철회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와 환상은 대선이 다가오면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 내의 다양한 "개혁세력"들의 행보가 가시화되면 더욱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희망사항이 현실을 대체하는 것이다. 현실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의 희망사항보다 냉혹하다. 현실이 너무나도 냉혹할 때 우리는 종종 환상적 희망 속으로 도피하지만, 그것의 역사적 결과는 언제나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정세를 전환시키면서 현실의 역사를 움직여 온 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었다. 각종 정치적 환상이 노동자 민중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지금 역사성, 그 어느 때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이 더욱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