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교육권을 박탈하는 대학, 이제 참지 않겠다
<b>역사적으로 왕따당해온 장애인교육</b>
지난 3월 26일, 숭실대에 다니는 한 장애 여성이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소송을 낸 사람은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98학번 박지주씨.(1971년생, 휠체어장애인 장애등급 1급). 인권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다산인권센터의 김칠준 변호가 맡은 이번 고소에서, 그녀는 숭실대가 처음으로 실시한 1998년 장애인 특별전형을 통해 자신을 포함해 2명의 장애인 학우들이 입학했다고 전했다. 그 후 20여명의 장애인이 입학한 지금까지 학교당국은 장애인들의 인권과 안전 그리고 교육권에 대한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그녀는 소송이유를 밝혔다. 그녀의 이번 소송은 형식적으로는 조그마한 손해소송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녀의 실천에 대한 울림과 사회적 함의는 한마디로 역사적이다. 사실 그녀의 이번 소송이 '역사적'이라고 평가해줘야 할 만큼 장애인 교육문제는 왕따당해 왔다.
작년 입시철, 일부 대학의 장애인 거부라는 일상적 행정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여준 뜨거운 관심을 보이기 전까지는 그래왔다. 대학에서의 장애인 입학거부는 반세기동안 합법적이었고 사회적 합의를 이룬 행정조치였다.
이는 1980년대 초반 문교부가 시달한, 아예 대학에게 장애인을 거부하라는 행정지침에서 극명히 드러나고 있으며 장애인이 장애인 특별전형이란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대학에 들어온 1995년 이전, 매년 터진 입학거부에서 그것은 일부 대학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모든 대학의 일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입학거부 명분이 대학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보다 솔직하고 적나라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편의시설이 없어 위험하다'라는 도덕적 갑옷을 입고 사회의 비난을 피하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실재적 차별로 인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장애인 배려와 사랑', 되레 그것으로 도덕성과 권위를 강화한 우리 대학의 도덕마케팅의 성공사례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거부한 대학을 비난한 만큼 장애인을 배려하는 대학을 칭찬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b>장애인은 도덕적 상품이 아니다!</b>
대학이 이제 학부제나 광역화로, 자본주의의 세계화논리처럼 교육시장을 단일화하였고, 1990년대 중반이후 약화된 학과모집과 엘리트교육의 비경제성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장애인에 대한 대학 문호개방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 역시도 도덕마케팅이란 비판의 근거이다.
대학에서의 장애인 교육문제가 이런 자본주의의 장삿속에서 나왔다하더라도 대학을 통한 장애인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조금이라도 가능해졌다는 면에서, 장애인인 나로서는 선뜻 장애인 특별전형의 반대론자가 될 수 없다. 장애인에 대한 입학제도 존재 여부자체가 이미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소외를 인정하고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대학에 들어오는 장애인 스스로가 자의든 타의든 또는 의식적이든 의식하지 못하든지간에, 대학이 진행하는 도덕마케팅의 일개 상품이라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옥죄이고 있는 것이다.
비장애 학생들과 똑같은 대가를 학교측에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애인은 상응하는 교육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직무유기에 대해 구체적 책임을 논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학교당국은 거의 없다. 오히려 너희를 배려해주었으니 침묵하라고 은근히 강요하며, 어떤 경우에는 후배장애인에 대한 입학을 미끼로 또는 입학전 각서로- 이것은 자신의 입학을 미끼로 흥정하는 것이다- 장애학생을 공격한다. 장애인 학생들에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언론지상에 오르내리는 대부분의 학교에 대한 논조가, 당연한 책임론보다 특별한 제자사랑으로 귀결되고 있음은 이런 대학의 도덕마케팅에 또 다른 사회적 합의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b>연민과 동정 말고 책임과 이해, 의무를 말하라</b>
굳이 서유럽의 복지국가도 전체주의의 변종이라고 했던 쿤데라의 지적을 빌려와 지적 오류에 허우적거릴 필요까지는 없지만, 설사 서구유럽과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발달이 서로 극단적이라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국가에 의한, 정치에 의한 의도된 조작품이란 것은 동일하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그 출발은 유엔과 민간이라 하더라도, 그 날을 '장애인의 날'로 정한 것은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장애인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장애인에 대한 이런 전체주의적 억압이 장애인의 결사권과 투쟁성을 약화시킨 것은 아닐까?
2001년 장애인 특별전형 실시학교가 전국에 62개, 장애인 학생 수가 어림잡아 2,000여명이 넘는다. 이번에 소송당한 숭실대의 장애인 학생의 편의시설 정도는 열악하긴 하지만 최하위권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이긴 하지만 투쟁을 공개적으로 진행하며 사회 모두를 향해 그 깃발을 드높인 것은 왜 박지주씨 그녀 홀로 뿐일까? 소송을 내기전 그녀는 사회사업학과 교수와 상담을 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돈 몇푼 벌려고 학교명예를 실추시키지 마라."
이 한 줄의 발언은 참으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는 -장애인으로서- 대학의 수많은 장애인관련 봉사동아리와 사회복지학과와 특수교육학과가 오히려 장애인의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지주씨의 고민에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욕구를 가장 중요시하는 사회복지 또는 사회사업학과 교수의 발언과 이번 그녀의 소송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의 생각이 틀렸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스스로 사회사업학도로서, 장애여성으로서 자신이 도덕적 상품이 아님을, 더 나아가 장애인의 인간극복에 대한 강압적 신화를 깨뜨려 버렸다.
누군가는 말했다.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고 책임과 이해 그리고 의무를 말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 차이를 인정하는 방법이라고.
<b.장애인인권을 유린하는 대학과 사회에 맞장뜨기</b>
그녀는 이번 소송을 통해 차별의 벽을 깨고 차이를 선언하고 있다. 그녀의 현장과 진보의 학문으로서 사회사업학의 정체성 바로세우기 투쟁과 인간극복의 우리 사회의 전체주의적 파시즘의 파괴행위는 따라서 단지 장애인의 불쌍한 하소연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그녀에게 '학교를 소송하기 전에 자신이 열심히 공부했는지 반성해보라는 비난을 일삼는데서 이는 충분히 반증되고 있다. 그녀의 '홀로' 커밍아웃의 외로움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시혜의 지배이데올로기 파괴라는 믿음이 깔려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그녀가 사회사업학과라는 동지애를 접으면서까지 사랑과 시혜의 지배이데올로기 시녀라는 우리나라 사회사업학의 빈곤함을 부숴버리고 있음도 보아야 한다.
과거에도 입학과정에서 입학거부가 있었고 소송이 있었고 소송을 한 사람들은 '구제'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번 교육권 투쟁은 자신의 구제가 아니라 자신의 인권을 유린하는 대학과 우리 사회에 대한 '맞짱뜨기' 항거이다.
구제는 울림이 없지만 항거는 언제나 울림을 내포한다. 그녀는 침묵하고 있는 장애인학생들에게 항거와 투쟁의 울림을 공명케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학자 Meyerson은 "장애란 한 개인에게 객관적인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필요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장애란 다른 사람이 그 사람과 사실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가 있건 없건간에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에게 불리한 제재를 가하게 되는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이번 소송은 그 규정의 족쇄를 끊어내는 작업의 과정이다.
<b>화려하도록 처절한 울림의 시작</b>
재학생으로서 박지주씨의 소송이 나름대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면 작년에 서원대에서 입학거부를 당해 소송이 진행중인 서주현 투쟁이 단순 구제가 아니라 투쟁의 울려퍼지는 첫출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울림들은 처음에는 교육현장에서 일차적으로 장애인 배려라는 도덕적 배설물이 아니라, '필요'라는 책임과 이해관계의 폭을 확장시켜줄 것이고 나중에는 장애민중의 목소리내기로 확대될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혼자 시작했고 당분간은 꽤 오랫동안 그녀의 고독한 커밍아웃은 이어져 갈 것이기 때문에.
장애인의 날이 지나자마자 또다시 언론에서 장애인 관련기사를 찾아보기란 정말 어려워졌다. 그녀는 알고 있다. 울림이 공명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때려서 먼저 소리를 만들어 내야 함을 말이다. 단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투쟁한다는 말처럼, 장애인 대학생의 교육권 투쟁은 어찌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캠페인성 활동으로 진보진영에는 비춰질런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사자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숨을 걸고 꿈을 걸고 투쟁하지 않으면 희망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올해 특히 희망의 빛조차 보지 못하고 죽어간, 인권유린을 당한 장애여성들, 장애아동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박지주씨의 대학에서의 교육권 투쟁이 화려하도록 처절할지 모른다. 참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죽지도 않고 혼자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공명이 일어날까지.
지난 3월 26일, 숭실대에 다니는 한 장애 여성이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소송을 낸 사람은 숭실대 사회사업학과 98학번 박지주씨.(1971년생, 휠체어장애인 장애등급 1급). 인권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다산인권센터의 김칠준 변호가 맡은 이번 고소에서, 그녀는 숭실대가 처음으로 실시한 1998년 장애인 특별전형을 통해 자신을 포함해 2명의 장애인 학우들이 입학했다고 전했다. 그 후 20여명의 장애인이 입학한 지금까지 학교당국은 장애인들의 인권과 안전 그리고 교육권에 대한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그녀는 소송이유를 밝혔다. 그녀의 이번 소송은 형식적으로는 조그마한 손해소송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녀의 실천에 대한 울림과 사회적 함의는 한마디로 역사적이다. 사실 그녀의 이번 소송이 '역사적'이라고 평가해줘야 할 만큼 장애인 교육문제는 왕따당해 왔다.
작년 입시철, 일부 대학의 장애인 거부라는 일상적 행정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여준 뜨거운 관심을 보이기 전까지는 그래왔다. 대학에서의 장애인 입학거부는 반세기동안 합법적이었고 사회적 합의를 이룬 행정조치였다.
이는 1980년대 초반 문교부가 시달한, 아예 대학에게 장애인을 거부하라는 행정지침에서 극명히 드러나고 있으며 장애인이 장애인 특별전형이란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대학에 들어온 1995년 이전, 매년 터진 입학거부에서 그것은 일부 대학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모든 대학의 일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입학거부 명분이 대학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보다 솔직하고 적나라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편의시설이 없어 위험하다'라는 도덕적 갑옷을 입고 사회의 비난을 피하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실재적 차별로 인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장애인 배려와 사랑', 되레 그것으로 도덕성과 권위를 강화한 우리 대학의 도덕마케팅의 성공사례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거부한 대학을 비난한 만큼 장애인을 배려하는 대학을 칭찬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b>장애인은 도덕적 상품이 아니다!</b>
대학이 이제 학부제나 광역화로, 자본주의의 세계화논리처럼 교육시장을 단일화하였고, 1990년대 중반이후 약화된 학과모집과 엘리트교육의 비경제성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장애인에 대한 대학 문호개방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 역시도 도덕마케팅이란 비판의 근거이다.
대학에서의 장애인 교육문제가 이런 자본주의의 장삿속에서 나왔다하더라도 대학을 통한 장애인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조금이라도 가능해졌다는 면에서, 장애인인 나로서는 선뜻 장애인 특별전형의 반대론자가 될 수 없다. 장애인에 대한 입학제도 존재 여부자체가 이미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소외를 인정하고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대학에 들어오는 장애인 스스로가 자의든 타의든 또는 의식적이든 의식하지 못하든지간에, 대학이 진행하는 도덕마케팅의 일개 상품이라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옥죄이고 있는 것이다.
비장애 학생들과 똑같은 대가를 학교측에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애인은 상응하는 교육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직무유기에 대해 구체적 책임을 논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학교당국은 거의 없다. 오히려 너희를 배려해주었으니 침묵하라고 은근히 강요하며, 어떤 경우에는 후배장애인에 대한 입학을 미끼로 또는 입학전 각서로- 이것은 자신의 입학을 미끼로 흥정하는 것이다- 장애학생을 공격한다. 장애인 학생들에 대한 넘치는 사랑으로 언론지상에 오르내리는 대부분의 학교에 대한 논조가, 당연한 책임론보다 특별한 제자사랑으로 귀결되고 있음은 이런 대학의 도덕마케팅에 또 다른 사회적 합의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b>연민과 동정 말고 책임과 이해, 의무를 말하라</b>
굳이 서유럽의 복지국가도 전체주의의 변종이라고 했던 쿤데라의 지적을 빌려와 지적 오류에 허우적거릴 필요까지는 없지만, 설사 서구유럽과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발달이 서로 극단적이라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국가에 의한, 정치에 의한 의도된 조작품이란 것은 동일하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그 출발은 유엔과 민간이라 하더라도, 그 날을 '장애인의 날'로 정한 것은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장애인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장애인에 대한 이런 전체주의적 억압이 장애인의 결사권과 투쟁성을 약화시킨 것은 아닐까?
2001년 장애인 특별전형 실시학교가 전국에 62개, 장애인 학생 수가 어림잡아 2,000여명이 넘는다. 이번에 소송당한 숭실대의 장애인 학생의 편의시설 정도는 열악하긴 하지만 최하위권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이긴 하지만 투쟁을 공개적으로 진행하며 사회 모두를 향해 그 깃발을 드높인 것은 왜 박지주씨 그녀 홀로 뿐일까? 소송을 내기전 그녀는 사회사업학과 교수와 상담을 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돈 몇푼 벌려고 학교명예를 실추시키지 마라."
이 한 줄의 발언은 참으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는 -장애인으로서- 대학의 수많은 장애인관련 봉사동아리와 사회복지학과와 특수교육학과가 오히려 장애인의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지주씨의 고민에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욕구를 가장 중요시하는 사회복지 또는 사회사업학과 교수의 발언과 이번 그녀의 소송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의 생각이 틀렸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스스로 사회사업학도로서, 장애여성으로서 자신이 도덕적 상품이 아님을, 더 나아가 장애인의 인간극복에 대한 강압적 신화를 깨뜨려 버렸다.
누군가는 말했다.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고 책임과 이해 그리고 의무를 말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 차이를 인정하는 방법이라고.
<b.장애인인권을 유린하는 대학과 사회에 맞장뜨기</b>
그녀는 이번 소송을 통해 차별의 벽을 깨고 차이를 선언하고 있다. 그녀의 현장과 진보의 학문으로서 사회사업학의 정체성 바로세우기 투쟁과 인간극복의 우리 사회의 전체주의적 파시즘의 파괴행위는 따라서 단지 장애인의 불쌍한 하소연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그녀에게 '학교를 소송하기 전에 자신이 열심히 공부했는지 반성해보라는 비난을 일삼는데서 이는 충분히 반증되고 있다. 그녀의 '홀로' 커밍아웃의 외로움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시혜의 지배이데올로기 파괴라는 믿음이 깔려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그녀가 사회사업학과라는 동지애를 접으면서까지 사랑과 시혜의 지배이데올로기 시녀라는 우리나라 사회사업학의 빈곤함을 부숴버리고 있음도 보아야 한다.
과거에도 입학과정에서 입학거부가 있었고 소송이 있었고 소송을 한 사람들은 '구제'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번 교육권 투쟁은 자신의 구제가 아니라 자신의 인권을 유린하는 대학과 우리 사회에 대한 '맞짱뜨기' 항거이다.
구제는 울림이 없지만 항거는 언제나 울림을 내포한다. 그녀는 침묵하고 있는 장애인학생들에게 항거와 투쟁의 울림을 공명케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학자 Meyerson은 "장애란 한 개인에게 객관적인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필요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장애란 다른 사람이 그 사람과 사실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가 있건 없건간에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에게 불리한 제재를 가하게 되는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이번 소송은 그 규정의 족쇄를 끊어내는 작업의 과정이다.
<b>화려하도록 처절한 울림의 시작</b>
재학생으로서 박지주씨의 소송이 나름대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면 작년에 서원대에서 입학거부를 당해 소송이 진행중인 서주현 투쟁이 단순 구제가 아니라 투쟁의 울려퍼지는 첫출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울림들은 처음에는 교육현장에서 일차적으로 장애인 배려라는 도덕적 배설물이 아니라, '필요'라는 책임과 이해관계의 폭을 확장시켜줄 것이고 나중에는 장애민중의 목소리내기로 확대될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혼자 시작했고 당분간은 꽤 오랫동안 그녀의 고독한 커밍아웃은 이어져 갈 것이기 때문에.
장애인의 날이 지나자마자 또다시 언론에서 장애인 관련기사를 찾아보기란 정말 어려워졌다. 그녀는 알고 있다. 울림이 공명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때려서 먼저 소리를 만들어 내야 함을 말이다. 단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투쟁한다는 말처럼, 장애인 대학생의 교육권 투쟁은 어찌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캠페인성 활동으로 진보진영에는 비춰질런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사자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숨을 걸고 꿈을 걸고 투쟁하지 않으면 희망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올해 특히 희망의 빛조차 보지 못하고 죽어간, 인권유린을 당한 장애여성들, 장애아동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박지주씨의 대학에서의 교육권 투쟁이 화려하도록 처절할지 모른다. 참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죽지도 않고 혼자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공명이 일어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