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투쟁, 열사, 그리고 2001년
<b>2001년의 추모사업</b>
얼마 전 사회진보연대 편집부에서 1991년 당시 투쟁이 현재까지 지속되는 의미와 김대중 정권 하에서 열사 추모사업을 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글을 쓰면서 추모사업에 대한 나의 생각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정리는커녕 혼란스러움만 가중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 집중적으로 자료를 찾고, 자료를 정리했지만 왜 추모사업을 하는지에 대해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추모사업을 한다는 것을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배의 한을 풀어드리고, 그 분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고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한 일' 또는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추모사업운동론'까지 만들어나가며, 사업을 하자는 추모단체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추모사업은 우리가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신 후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일 지 모른다. 또한 마찬가지로 집안의 제사처럼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모여 술 한잔 할 수 있는 자리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옛 동료들을 한번 다시 모일 수 있게 하는 역할 이외에 중요한 이유는 또 무엇이 있을까? 나는 추모사업 운동론까지 생각하며 추모사업을 진행한 사람이 아니기에,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정리된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b>삼십이 넘어버린 지금 10년 전을 회상하며, 열사추모사<업을 생각한다</b>
얼마 전 김귀정 열사 공식사이트가 오픈하였다. 2년 전부터 김귀정 열사 공식사이트를 만들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내 친구와 선배가 제작하였다. 김귀정 추모사업회 회원 모두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이다. 1991년 5월 투쟁과 백병원투쟁(1991년 5월 투쟁에서 11명의 젊음이 희생되었다. 흔히 말하는 "91년 5월 투쟁"이 정리될 무렵, 전투경찰의 폭력 진압에 의해 김귀정 열사께서 돌아가셨다. 김귀정 열사의 시신이 있던 백병원에서 성균관대생들은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19일간 투쟁을 전개했고, 그 후 성균관대생은 이 투쟁을 백병원 투쟁이라 부르고 있다)을 경험했던 사람들과 비록 백병원 투쟁 이후에 입학했기 때문에 투쟁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선배들로부터 그 투쟁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투쟁의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김귀정 열사를 사랑하는 후배들이 계속 방문하고 있다.
이 사이트를 방문하게 되면 10년 전 5월의 거리에서 흘렸던 눈물, 1991년 5월의 생생함과 역동성이 느껴진다. 우리들에게 5월은 축제의 계절이라기보다 활동의 정점이었고, 등록금 투쟁이 마무리되고 각종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대응하느라 정신 없던 시기였다. 투쟁을 결의하며 붉은 플랭카드로 캠퍼스를 도배했고, 우리는 삼삼오오 가두로 나가 공권력에 저항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거리에 나가면 학생들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991년 그 때까지만 해도 많은 시민들은 음료수와 박수로 더욱 힘내어 투쟁하라고 격려했다.
삼십이 넘어 이미 영악해졌고 피할 것을 피할 줄 아는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도, 투쟁하던 거리를 지나게 되면 등이 오싹해오는 것을 느낀다. 옛 동료들을 만나면 아직 10년 전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하며, 우리들의 투쟁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무용담을 말할 때,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투쟁했던 분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은 혹시 잊어버린 것은 아닐지 돌이켜 봐야겠다.
<b>열사를 억울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b>
4월 25일 오마이뉴스에서, 의문사 이윤성 열사 아버지께서 생전에 아들의 죽음이 진상규명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아들있는 곳으로 가셨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윤성 열사는 성균관대 2학년이던 1982년 11월 학생의날기념 가두시위에서 연행돼 닷새만에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제징집 되었다가 1983년 5월 제대를 일주일 앞두고 시체로 발견됐다. 군 수사기관에서는 이윤성 열사가 월북혐의로 조사받은 후 자대로 돌아간 뒤 곧 자살했다고 하지만, 시신처리나 죽음에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일체 함구하였고 당시로서는 사실을 확인할 길조차 없었다. 또 강집된 동료 중 한 사람은 군 생활 중 같은 보안부대에 끌려갔을 때, 수사관으로부터 '이 곳이 윤성이가 죽은 방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이윤성 열사의 죽음은 의문사라는 딱지가 붙어다니며 사인이 규명되지 못한 상태다. 이윤성 열사의 죽음 이후 어머님은 청력을 상실하셨고, 아버지는 지난 18년간 억울하게 죽어간 아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해 화병으로 생의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자식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다 그 한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신 분이, 비단 이윤성 열사의 아버지 뿐만은 아니다. 화병으로 혹은 자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모님들도 적지 않다.
늦은 감이 있지만 유가협 부모님들의 2년간 국회 앞 천막투쟁으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및보상등에 관한 법률(이하 법)",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법)"과 각각의 "시행령"이 제정되었고, 정부에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및보상 심의위원회'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얼마 전 1987년 투쟁의 불씨가 되었던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되었고, 1988년 6월 숭실대 국문과 3년 재학 중 권위주의 통치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한 뒤 분신사망한 박래전 열사, 1986년 목포 사회운동청년연합 사무차장으로 활동 중 목포역 광장에서 민주화운동 탄압중지를 외치며 분신사망한 강상철 열사, 1991년 4월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재학 중 광주 5·18광장에서 `강경대 살인규탄 및 정권퇴진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가한 뒤 분신사망하신 박승희 열사가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이 되었다.
또한 열사들 이외에 살아있는 분들 중에서 명예회복이 되신 분들도 있다.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는 정치인이나 돈 몇 푼 생긴다는 얄팍한 생각에, 앞다투며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신청하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이들이 차가운 겨울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아들딸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하셨던 유가협 부모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생각하고 있었을까?
법 제정은 처음으로, 지난했던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과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피해입은 사람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과정에 대한 피해사례를 정리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등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나마 이러한 조치가 취해져 유가협 아버지어머니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개념 자체가 모호해 임단투와 같은 노동운동이나 대학내 학원개혁투쟁(학원자주화투쟁)을 하다가 구속되는 등 피해를 입은 사람은 이 법에 의해 명예회복될 수 없으며, 법 적용시기가 1969년 8월부터 현재 시점까지라고 한정시키고 있어 자칫 김대중 정권의 치적으로만 남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닌, 열사와 희생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금전적 보상을 염두하며 운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상은 명예회복의 내용 중 하나이지, 이것이 명예회복보상법의 요체는 아닌 것이다. 아직도 과거의 아픔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게 순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화 투쟁을 하다 고문으로 아직까지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으며,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b>추모사업은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b>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대우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테러 등의 사건을 보면서 아직까지 열사들이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추모사업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누구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 육체적, 정신적 피해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그 뜻을 전파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 청산을 위해,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의를 바로세우고 희망의 역사를 열어나가기 위해…. 하지만 그런 거창한 명분에 앞서 가장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는 자식 잃은 부모님들을 이제는 편히 쉬게 해드리고, 죄인 아닌 죄인으로 무덤에까지 그 한을 안고 가야 하는 부모님들이 더 이상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열사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은 우선 되어야 하며,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적어도 우리는 살아있지만 그 분들은 그렇지 못하며, 적어도 우리 부모님들은 나를 잃은 슬픔을 갖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자. 법은 제정되었지만 그 법이 모든 열사들과 그 가족의 한을 풀어주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지 않은가? 살아남은 자의 과제로서 우리는 이 제정된 법에 대한 개정투쟁을 함께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바로 세워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면 제정된 법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는 추모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얼마 전 사회진보연대 편집부에서 1991년 당시 투쟁이 현재까지 지속되는 의미와 김대중 정권 하에서 열사 추모사업을 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글을 쓰면서 추모사업에 대한 나의 생각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정리는커녕 혼란스러움만 가중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 집중적으로 자료를 찾고, 자료를 정리했지만 왜 추모사업을 하는지에 대해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추모사업을 한다는 것을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배의 한을 풀어드리고, 그 분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고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한 일' 또는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추모사업운동론'까지 만들어나가며, 사업을 하자는 추모단체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추모사업은 우리가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신 후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일 지 모른다. 또한 마찬가지로 집안의 제사처럼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모여 술 한잔 할 수 있는 자리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옛 동료들을 한번 다시 모일 수 있게 하는 역할 이외에 중요한 이유는 또 무엇이 있을까? 나는 추모사업 운동론까지 생각하며 추모사업을 진행한 사람이 아니기에,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정리된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b>삼십이 넘어버린 지금 10년 전을 회상하며, 열사추모사<업을 생각한다</b>
얼마 전 김귀정 열사 공식사이트가 오픈하였다. 2년 전부터 김귀정 열사 공식사이트를 만들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내 친구와 선배가 제작하였다. 김귀정 추모사업회 회원 모두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이다. 1991년 5월 투쟁과 백병원투쟁(1991년 5월 투쟁에서 11명의 젊음이 희생되었다. 흔히 말하는 "91년 5월 투쟁"이 정리될 무렵, 전투경찰의 폭력 진압에 의해 김귀정 열사께서 돌아가셨다. 김귀정 열사의 시신이 있던 백병원에서 성균관대생들은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19일간 투쟁을 전개했고, 그 후 성균관대생은 이 투쟁을 백병원 투쟁이라 부르고 있다)을 경험했던 사람들과 비록 백병원 투쟁 이후에 입학했기 때문에 투쟁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선배들로부터 그 투쟁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투쟁의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김귀정 열사를 사랑하는 후배들이 계속 방문하고 있다.
이 사이트를 방문하게 되면 10년 전 5월의 거리에서 흘렸던 눈물, 1991년 5월의 생생함과 역동성이 느껴진다. 우리들에게 5월은 축제의 계절이라기보다 활동의 정점이었고, 등록금 투쟁이 마무리되고 각종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대응하느라 정신 없던 시기였다. 투쟁을 결의하며 붉은 플랭카드로 캠퍼스를 도배했고, 우리는 삼삼오오 가두로 나가 공권력에 저항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거리에 나가면 학생들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991년 그 때까지만 해도 많은 시민들은 음료수와 박수로 더욱 힘내어 투쟁하라고 격려했다.
삼십이 넘어 이미 영악해졌고 피할 것을 피할 줄 아는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도, 투쟁하던 거리를 지나게 되면 등이 오싹해오는 것을 느낀다. 옛 동료들을 만나면 아직 10년 전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하며, 우리들의 투쟁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무용담을 말할 때,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투쟁했던 분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은 혹시 잊어버린 것은 아닐지 돌이켜 봐야겠다.
<b>열사를 억울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b>
4월 25일 오마이뉴스에서, 의문사 이윤성 열사 아버지께서 생전에 아들의 죽음이 진상규명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아들있는 곳으로 가셨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이윤성 열사는 성균관대 2학년이던 1982년 11월 학생의날기념 가두시위에서 연행돼 닷새만에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제징집 되었다가 1983년 5월 제대를 일주일 앞두고 시체로 발견됐다. 군 수사기관에서는 이윤성 열사가 월북혐의로 조사받은 후 자대로 돌아간 뒤 곧 자살했다고 하지만, 시신처리나 죽음에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일체 함구하였고 당시로서는 사실을 확인할 길조차 없었다. 또 강집된 동료 중 한 사람은 군 생활 중 같은 보안부대에 끌려갔을 때, 수사관으로부터 '이 곳이 윤성이가 죽은 방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이윤성 열사의 죽음은 의문사라는 딱지가 붙어다니며 사인이 규명되지 못한 상태다. 이윤성 열사의 죽음 이후 어머님은 청력을 상실하셨고, 아버지는 지난 18년간 억울하게 죽어간 아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해 화병으로 생의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자식의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다 그 한을 풀지 못한 채 돌아가신 분이, 비단 이윤성 열사의 아버지 뿐만은 아니다. 화병으로 혹은 자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모님들도 적지 않다.
늦은 감이 있지만 유가협 부모님들의 2년간 국회 앞 천막투쟁으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및보상등에 관한 법률(이하 법)",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법)"과 각각의 "시행령"이 제정되었고, 정부에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및보상 심의위원회'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얼마 전 1987년 투쟁의 불씨가 되었던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되었고, 1988년 6월 숭실대 국문과 3년 재학 중 권위주의 통치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한 뒤 분신사망한 박래전 열사, 1986년 목포 사회운동청년연합 사무차장으로 활동 중 목포역 광장에서 민주화운동 탄압중지를 외치며 분신사망한 강상철 열사, 1991년 4월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재학 중 광주 5·18광장에서 `강경대 살인규탄 및 정권퇴진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가한 뒤 분신사망하신 박승희 열사가 민주화 유공자로 선정이 되었다.
또한 열사들 이외에 살아있는 분들 중에서 명예회복이 되신 분들도 있다.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는 정치인이나 돈 몇 푼 생긴다는 얄팍한 생각에, 앞다투며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신청하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이들이 차가운 겨울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아들딸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하셨던 유가협 부모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생각하고 있었을까?
법 제정은 처음으로, 지난했던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과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피해입은 사람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과정에 대한 피해사례를 정리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등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나마 이러한 조치가 취해져 유가협 아버지어머니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개념 자체가 모호해 임단투와 같은 노동운동이나 대학내 학원개혁투쟁(학원자주화투쟁)을 하다가 구속되는 등 피해를 입은 사람은 이 법에 의해 명예회복될 수 없으며, 법 적용시기가 1969년 8월부터 현재 시점까지라고 한정시키고 있어 자칫 김대중 정권의 치적으로만 남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닌, 열사와 희생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금전적 보상을 염두하며 운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상은 명예회복의 내용 중 하나이지, 이것이 명예회복보상법의 요체는 아닌 것이다. 아직도 과거의 아픔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게 순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화 투쟁을 하다 고문으로 아직까지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으며,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b>추모사업은 역사를 바로세우는 작업</b>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대우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테러 등의 사건을 보면서 아직까지 열사들이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추모사업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누구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희생자와 그 가족에게 육체적, 정신적 피해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그 뜻을 전파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 청산을 위해,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의를 바로세우고 희망의 역사를 열어나가기 위해…. 하지만 그런 거창한 명분에 앞서 가장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는 자식 잃은 부모님들을 이제는 편히 쉬게 해드리고, 죄인 아닌 죄인으로 무덤에까지 그 한을 안고 가야 하는 부모님들이 더 이상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열사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은 우선 되어야 하며,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적어도 우리는 살아있지만 그 분들은 그렇지 못하며, 적어도 우리 부모님들은 나를 잃은 슬픔을 갖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자. 법은 제정되었지만 그 법이 모든 열사들과 그 가족의 한을 풀어주기에는 아직도 많은 한계가 있지 않은가? 살아남은 자의 과제로서 우리는 이 제정된 법에 대한 개정투쟁을 함께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바로 세워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면 제정된 법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는 추모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