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싱크탱크[4]자유주의 싱크탱크와 미국
<b>■ 부르킹스 연구소</b>
미국의 정치·지성사에 관심을 둔 사람라면 아니, 적어도 미국에서 정책이 입안되는 흐름이 어떤지 궁금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먼저 접하게 되었을 법한 연구소가 바로 부르킹스연구소이다. 최고(最古)이자 또, 최고(最高)의 연구소로서 부르킹스연구소를 손꼽는데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싱크탱크의 영고성쇠를 부르킹스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b>정책전문가, 이념적 중립성</b>
1913년 연방예산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를 주도했던 이들은, 당시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주된 관심을 가졌던 지식인들과는 달리, 현안문제였던 연방 정부의 예산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즉, 정부 경비를 절감하고 대통령을 도와 총괄적인 예산안을 작성, 의회에 제출할 예산국을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국가 운영을 정부 관리들에게만 맡겨도 괜찮은가?"라는 의문에 "안된다"고 대답하며 '정부연구소'라는 사설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앞서 싱크탱크의 역사를 정리(사회진보연대 2000.12. 통권 11호)할 때, 정치적 중립성과 예방(의학의 비유), 능률(물리학의 비유)을 앞세운 테크노라트(전문가)들을 소개한 바 있는데, 이 연구소가 이들 테크노라트들의 첫 결실이다.
그리고 워싱턴 최초의 감시단인 이 '정부연구소'가 바로 오늘날 부르킹스의 모태이다.
1927년 센트루이스 출신의 기업가 로버트 부르킹스가 관여해온 '경제학 연구소'와 로버트브루킹스 경제학 및 행정대학원'과 통합돼 오늘날의 부르킹스연구소가 된다. 경제정책에 대한 효율이라는 측면의 접근은 기술의 문제 이상의 것을 의미했고 또, 대학원생들이 "관료보다 교수에 더 관심이 많은 것"에 불만이었다는 부르킹스의 취지를 되돌이켜 보면, 이 연구소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보다 분명해진다.
한편, 정책 능률에 대한 이들의 주된 관심으로 인해 정치적 중립 혹은 이념적 중립(?)의 문제는 매우 사활적인 문제였다. 정치운동가들보다는 정치의 기술적인 면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이들을 등용한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즉, 이념보다는 정책에 더 관심이 많은 연구소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념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보다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주되게는 민주당)들과 친화성이 더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b>경제, 행정 모든 분야에 걸친 방대한 연구</b>
1960년 케네디 당선과 함께 그의 정권이양계획을 입안하면서, 케네디의 상임연구원이라고 묘사될 정도로 유명해진 브루킹스연구소는 경제·정부기관·외교정책·공공정책 등 4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아론(고어 후보진영의 경제자문팀)이 이끄는 경제학 분과는 브루킹스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수준 역시 가장 높다. 수십년 동안 경제성장 및 안정정책, 공단 조성, 재정 및 조세정책, 국제 경쟁 등의 문제를 연구하면서 자동 경제안정 장치, 정부의 투자, 개인 소득세, 통화 정책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케인즈학파 인물들이 유달리 관심을 가진 문제들이기도 하다.(이는 특히, 화폐주의 영향 이후 케인지안들의 변모-새케인지안-에 대해 실질적으로 엿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 만이 이끄는 행정학 분과는 정치기관 및 행정문제를 주로 검토해왔고, 공무원의 직분, 정치 지도자의 선발과정, 행정·입법·사법부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연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시/고어 대통령 선거 당시, 논란이 된 선거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져 브루킹스의 면모는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외교정책분과는 유엔, 세계의 경제성장 등을 주로 연구하였고, 케네디가 진보연맹을 창설한 후로는 미국 해외원조 프로그램, 특히 남미에 대한 원조를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미국 정부조직의 틀을 브루킹스가 다 잡았다고 평가해도 과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원래 연방정부의 각 기관을 좀 더 능률적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설립된 탓이겠지만, 여러해동안 예산 및 조세정책, 국제무역과 경제문제, 국제협력기구, 공무원 복지 등을 면밀히 관찰했고, 정부의 능률성과 경비절감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바로 이 연구결과에 기초해 정부 각 기관의 회계에서부터 인사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틀을 다 구상한 것이다.
<b>브루킹스와 미국 정치 전환기</b>
특히 브루킹스의 명성이 진가를 드러내는 데에는 미국 정치사에 있어서, 전환기 때마다 이 연구소의 이름이 빠짐없이 거명된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이미 연방예산국의 설립을 제창, 성사시켰음은 물론, 당시 복지법 제정의 주역이기도 하다. 2차대전 직후 서유럽 경제재건과 공산주의확대저지를 위한 마셜 플랜이 의회에서 논란되고 있을 때, 상원 외교위원회의 요청으로 이 플랜의 세부실행 건의서를 작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1948년에 양원에서 통과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수소폭탄 제조를 역설하는 한편, 1960년대에는 케네디 암살로 국론이 분열되자 일선 정치인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 정책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70년대 인플레, 고실업 등으로 표현되는 경제위기 당시 노인들의 30%이상이 빈곤층이라는 사실에 착안,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 오늘날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1980년대 미국의 재정적자에 대한 대안으로서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세입을 늘려 균형예산을 편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연구해 왔으며, 오늘날 클링턴 행정부가 재정적자를 재정흑자로 반전시키는데 토대가 된 것이 1984년 브루킹스의 앨리스 리블린 연구원이 내놓은 연구결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냉전이후 미국 대외안보 개념의 기본 축이 되는, 집단안보에서 협력안보로의 변화를 선도했던 것도 이 연구소의 <협력안보의 새로운 개념>이라는 보고서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미국 거시경제를 이끄는 재무부 내각관계자들이 이 곳 출신이 많거나 이후 이 곳에서 연구를 한다는 것(클링턴 정부의 재무부장관이자 IMF(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개혁 및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주장했던 최근 하버드대 교수가 된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부장관 역시 이 곳 연구원이다)은 매우 시사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b>■국제경제연구소(Institute for Internaional Economics)</b>
<b>미국의 유일한 국제경제전문 연구소</b>
1981년에 설립된 비교적 신생연구소인 국제경제연구소를 소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1980년대 가장 성공적인 연구소로 부상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미국에서 유일하게 국제경제문제만을 연구하는 연구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국제경제문제에 대해 시의적절하고 객관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국제경제문제에 관한 한, 어느 연구소보다도 명성과 신뢰도가 높다고 한다.
이 곳은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들과 카터 행정부의 국제국 재정차관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진 프레드 버그스텐에 의해 설립된 곳이다. 2백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규모의 재단후원금과 20%에 육박하는 외국에서의 수입액만 보아도 가히 이 연구소의 신뢰성을 짐작할 만하다.
14명의 상임직원과 30여명의 교환연구원으로 구성된 이 연구소는 주되게 연구하는 것이 무역, 통화와 금융, 부채와 경제발전, 에너지, 환경 등의 문제라고 한다. 특히 월리엄 클라인, 데슬러, 허프바우어, 스티븐 매리스, 존 윌리암스 등 전직 정부관료와 원로학자들을 초빙해서 개방화 시대 세계경제에 대해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은 매우 놀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b>존 윌리암스의 워싱턴 콘센서스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b>
이들의 연구 중에 특히 주목할 것이 존 윌리암스가 정리한 워싱턴 콘센서스이다. 1989년 IIE가 주최한 토론회의 발제자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남미가 별 다른 노력도 없이 외채 탕감만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던 워싱턴 사람들에게,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며 저금리와 주식시장부양을 핵심으로 하는 열 가지 정책목록을 정리하여 '워싱턴 콘센서스'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이후 1990년대 초 IMF와 세계은행, 미국내 정치경제학자들, 행정부 관료들의 논의를 거쳐서 '워싱턴 컨센서스' 가 정립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세계에 확산시키는 것이 주요한 목표인데, 외국에서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미국 자본과 기업의 활동무대가 국경을 넘어 확산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IMF가 외환위기 국가들에 대해 내리는 처방들이 대부분 이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b>결 : 싱크탱크와 미국의 정치·지성사</b>
이제 4회에 걸친 미국의 싱크탱크에 대한 기획연재를 마감하는 시점이 된 것 같다. 너무도 부족한 자료와 정보, 그리고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정리하는 것조차도 깔끔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싱크탱크 성립역사를 시작으로 보수주의 싱크탱크와 자유주의 싱크탱크로 구분, 소개하는 것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의도된 만큼이나 정리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제 나머지 판단과 과제는 이제 독자의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싱크탱크를 통한 저들에 대한 탐색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평균적인 정치·지성사에서 드러나는 싱크탱크는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위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과는 별개로, 이것만을 놓고라도 싱크탱크를 통해 미국 정치·지성사의 현주소를 엿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그만큼 싱크탱크의 성립과 활동방향이 미국 정치·지성사의 그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지성사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의 미국을 분명히 보는데 있어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지성사에 관심을 둔 사람라면 아니, 적어도 미국에서 정책이 입안되는 흐름이 어떤지 궁금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먼저 접하게 되었을 법한 연구소가 바로 부르킹스연구소이다. 최고(最古)이자 또, 최고(最高)의 연구소로서 부르킹스연구소를 손꼽는데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싱크탱크의 영고성쇠를 부르킹스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b>정책전문가, 이념적 중립성</b>
1913년 연방예산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를 주도했던 이들은, 당시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주된 관심을 가졌던 지식인들과는 달리, 현안문제였던 연방 정부의 예산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즉, 정부 경비를 절감하고 대통령을 도와 총괄적인 예산안을 작성, 의회에 제출할 예산국을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국가 운영을 정부 관리들에게만 맡겨도 괜찮은가?"라는 의문에 "안된다"고 대답하며 '정부연구소'라는 사설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앞서 싱크탱크의 역사를 정리(사회진보연대 2000.12. 통권 11호)할 때, 정치적 중립성과 예방(의학의 비유), 능률(물리학의 비유)을 앞세운 테크노라트(전문가)들을 소개한 바 있는데, 이 연구소가 이들 테크노라트들의 첫 결실이다.
그리고 워싱턴 최초의 감시단인 이 '정부연구소'가 바로 오늘날 부르킹스의 모태이다.
1927년 센트루이스 출신의 기업가 로버트 부르킹스가 관여해온 '경제학 연구소'와 로버트브루킹스 경제학 및 행정대학원'과 통합돼 오늘날의 부르킹스연구소가 된다. 경제정책에 대한 효율이라는 측면의 접근은 기술의 문제 이상의 것을 의미했고 또, 대학원생들이 "관료보다 교수에 더 관심이 많은 것"에 불만이었다는 부르킹스의 취지를 되돌이켜 보면, 이 연구소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보다 분명해진다.
한편, 정책 능률에 대한 이들의 주된 관심으로 인해 정치적 중립 혹은 이념적 중립(?)의 문제는 매우 사활적인 문제였다. 정치운동가들보다는 정치의 기술적인 면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이들을 등용한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즉, 이념보다는 정책에 더 관심이 많은 연구소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념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보다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주되게는 민주당)들과 친화성이 더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b>경제, 행정 모든 분야에 걸친 방대한 연구</b>
1960년 케네디 당선과 함께 그의 정권이양계획을 입안하면서, 케네디의 상임연구원이라고 묘사될 정도로 유명해진 브루킹스연구소는 경제·정부기관·외교정책·공공정책 등 4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아론(고어 후보진영의 경제자문팀)이 이끄는 경제학 분과는 브루킹스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수준 역시 가장 높다. 수십년 동안 경제성장 및 안정정책, 공단 조성, 재정 및 조세정책, 국제 경쟁 등의 문제를 연구하면서 자동 경제안정 장치, 정부의 투자, 개인 소득세, 통화 정책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케인즈학파 인물들이 유달리 관심을 가진 문제들이기도 하다.(이는 특히, 화폐주의 영향 이후 케인지안들의 변모-새케인지안-에 대해 실질적으로 엿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 만이 이끄는 행정학 분과는 정치기관 및 행정문제를 주로 검토해왔고, 공무원의 직분, 정치 지도자의 선발과정, 행정·입법·사법부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연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시/고어 대통령 선거 당시, 논란이 된 선거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져 브루킹스의 면모는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외교정책분과는 유엔, 세계의 경제성장 등을 주로 연구하였고, 케네디가 진보연맹을 창설한 후로는 미국 해외원조 프로그램, 특히 남미에 대한 원조를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미국 정부조직의 틀을 브루킹스가 다 잡았다고 평가해도 과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원래 연방정부의 각 기관을 좀 더 능률적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설립된 탓이겠지만, 여러해동안 예산 및 조세정책, 국제무역과 경제문제, 국제협력기구, 공무원 복지 등을 면밀히 관찰했고, 정부의 능률성과 경비절감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바로 이 연구결과에 기초해 정부 각 기관의 회계에서부터 인사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틀을 다 구상한 것이다.
<b>브루킹스와 미국 정치 전환기</b>
특히 브루킹스의 명성이 진가를 드러내는 데에는 미국 정치사에 있어서, 전환기 때마다 이 연구소의 이름이 빠짐없이 거명된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이미 연방예산국의 설립을 제창, 성사시켰음은 물론, 당시 복지법 제정의 주역이기도 하다. 2차대전 직후 서유럽 경제재건과 공산주의확대저지를 위한 마셜 플랜이 의회에서 논란되고 있을 때, 상원 외교위원회의 요청으로 이 플랜의 세부실행 건의서를 작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1948년에 양원에서 통과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수소폭탄 제조를 역설하는 한편, 1960년대에는 케네디 암살로 국론이 분열되자 일선 정치인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마련, 정책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70년대 인플레, 고실업 등으로 표현되는 경제위기 당시 노인들의 30%이상이 빈곤층이라는 사실에 착안,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 오늘날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1980년대 미국의 재정적자에 대한 대안으로서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세입을 늘려 균형예산을 편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연구해 왔으며, 오늘날 클링턴 행정부가 재정적자를 재정흑자로 반전시키는데 토대가 된 것이 1984년 브루킹스의 앨리스 리블린 연구원이 내놓은 연구결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냉전이후 미국 대외안보 개념의 기본 축이 되는, 집단안보에서 협력안보로의 변화를 선도했던 것도 이 연구소의 <협력안보의 새로운 개념>이라는 보고서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미국 거시경제를 이끄는 재무부 내각관계자들이 이 곳 출신이 많거나 이후 이 곳에서 연구를 한다는 것(클링턴 정부의 재무부장관이자 IMF(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개혁 및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주장했던 최근 하버드대 교수가 된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부장관 역시 이 곳 연구원이다)은 매우 시사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b>■국제경제연구소(Institute for Internaional Economics)</b>
<b>미국의 유일한 국제경제전문 연구소</b>
1981년에 설립된 비교적 신생연구소인 국제경제연구소를 소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1980년대 가장 성공적인 연구소로 부상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미국에서 유일하게 국제경제문제만을 연구하는 연구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국제경제문제에 대해 시의적절하고 객관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국제경제문제에 관한 한, 어느 연구소보다도 명성과 신뢰도가 높다고 한다.
이 곳은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들과 카터 행정부의 국제국 재정차관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진 프레드 버그스텐에 의해 설립된 곳이다. 2백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규모의 재단후원금과 20%에 육박하는 외국에서의 수입액만 보아도 가히 이 연구소의 신뢰성을 짐작할 만하다.
14명의 상임직원과 30여명의 교환연구원으로 구성된 이 연구소는 주되게 연구하는 것이 무역, 통화와 금융, 부채와 경제발전, 에너지, 환경 등의 문제라고 한다. 특히 월리엄 클라인, 데슬러, 허프바우어, 스티븐 매리스, 존 윌리암스 등 전직 정부관료와 원로학자들을 초빙해서 개방화 시대 세계경제에 대해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은 매우 놀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b>존 윌리암스의 워싱턴 콘센서스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b>
이들의 연구 중에 특히 주목할 것이 존 윌리암스가 정리한 워싱턴 콘센서스이다. 1989년 IIE가 주최한 토론회의 발제자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남미가 별 다른 노력도 없이 외채 탕감만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던 워싱턴 사람들에게,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며 저금리와 주식시장부양을 핵심으로 하는 열 가지 정책목록을 정리하여 '워싱턴 콘센서스'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이후 1990년대 초 IMF와 세계은행, 미국내 정치경제학자들, 행정부 관료들의 논의를 거쳐서 '워싱턴 컨센서스' 가 정립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세계에 확산시키는 것이 주요한 목표인데, 외국에서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미국 자본과 기업의 활동무대가 국경을 넘어 확산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IMF가 외환위기 국가들에 대해 내리는 처방들이 대부분 이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b>결 : 싱크탱크와 미국의 정치·지성사</b>
이제 4회에 걸친 미국의 싱크탱크에 대한 기획연재를 마감하는 시점이 된 것 같다. 너무도 부족한 자료와 정보, 그리고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정리하는 것조차도 깔끔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싱크탱크 성립역사를 시작으로 보수주의 싱크탱크와 자유주의 싱크탱크로 구분, 소개하는 것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의도된 만큼이나 정리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제 나머지 판단과 과제는 이제 독자의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싱크탱크를 통한 저들에 대한 탐색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평균적인 정치·지성사에서 드러나는 싱크탱크는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위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과는 별개로, 이것만을 놓고라도 싱크탱크를 통해 미국 정치·지성사의 현주소를 엿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그만큼 싱크탱크의 성립과 활동방향이 미국 정치·지성사의 그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지성사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의 미국을 분명히 보는데 있어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