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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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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속 논쟁 - 1986년 5. 3 인천항쟁 - 보수세력과 민중세력의 돌아올 수 없는 갈림길

장석준 | 편집위원, 민주노동당 교육부장
<b>다시 들추어보아야 할 역사의 한 장</b>

2001년 봄의 인천은 살벌하다. 부평의 한 광경을 찍은 비디오를 보고, 아이의 손목을 잡고 거닐던 어머니들은 아이의 눈을 가린다. 과거 우리는 그런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광주의 사진들을 바라보거나 혹은 피했었다. 그런데, 이런 '개같은' 현실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그 아가리를 내밀고 있다.
민주화가 진행됐다는, 그리고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인 '개혁', '개혁'의 선전이 계속됐던 지난 십수년 동안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이 십수년을 그저 공으로 탕진했단 말인가? 사람들은 부평의 노동자 학살미수 광경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투쟁의 전의를 살리기보다는 아예 '민주주의'도, '민주화 투쟁'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고 자조하는 것만 같다.

어디에서 일이 그르쳐졌던 것인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묻고 있다. 물론 '운동권'은 오래 전부터 이에 대해 열심히 말해왔다고 생각한다(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그 이유에 대해 열렬히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우리의 목소리는 그렇게 자신있지도, 패기 넘치지도 않다.
이 점에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서 보고, 널리 이야기해야 할 역사의 한 장이 있다. 바로 지금 폭력의 현장이 되어 있는 인천 바로 그 곳에서 15년 전에 있었던 항쟁, 1986년 5. 3 인천항쟁 말이다.


<b>혁명 전야(?)의 1986년 봄 </b>

19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이 '반쪽짜리' 혁명이었다면 1986년은 말하자면 혁명 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 한 해는 급박하게 시작되어 급박하게 움직였다. 전해의 동토 선거에서 놀라운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김영삼/ 김대중의 신민당은 1986년 초반부터 '직선제 개헌 1천만명 서명운동'으로 다시금 돌풍을 준비했다. 1985-86년의 신민당 바람은 바로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주체가 되는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한국 정치의 주인공으로 나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러한 신민당의 공세에 대해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은 처음에는 '1989년 개헌론'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는 신민당의 기세를 더욱 북돋고 이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높이는 결과만 낳았다. 민중들은 뭔가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어렴풋하나마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막 진행되던 필리핀의 민중혁명과 아르헨티나의 민주화 이행은 보수언론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이 땅의 민중들에게도 힘과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신민당 왼쪽에서는 또다른 민주화운동 주체가 전에 없는 힘과 꼴을 갖춰가고 있었다. 1985년에는, 그 동안 1970년대로부터 이어지는 재야운동을 반분하던 '민주통일국민회의'(의장 문익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공동대표 김승훈, 김동완, 이부영)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 의장 문익환, 부의장 계훈제, 김승훈)으로 통합됐다. 민통련을 구성한 주요단체들은 1980년대 초부터 반독재투쟁을 선도해온 구(舊) 민청학련 출신자들 중심의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활동가들의 모임인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약칭 노협), 그리고 노협과는 구분되는 선명한 정치투쟁을 전면에 내건 더 젊은 세대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조직인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 각 지역조직들, 종교운동단체들이었다.

민통련은 1970년대, 1980년대 초에 배출된 민중운동 역량을 하나로 모아 5공 독재정권과의 결전을 준비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근본과제를 분단모순·계급모순의 극복으로까지 넓혀 이해함으로써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결정적인 매듭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녔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민통련 구성단체 중에서도 서노련과 인노련이었다('인천지역노동운동연합'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이라는 지역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민통련에 가입돼 있었다). 김문수가 의장으로 있던 이 조직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경제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의 전위투사'로서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강조했다. 1980년대 초 현장에 진출한 학출 활동가들을 상당수 규합한 이 조직의 등장은 곧 한국전쟁 이후 역사의 장에서 잠시 사라졌던 노동계급운동·사상의 복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 1986년 1학기 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학생운동 내의 '민족해방(NL)'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잇단 분신투쟁과 반미구호로 세인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이들은 1986년 한 해 동안 서울의 주요대학 학생운동에 바람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우리 운동에서 잊혀져 있거나 부차화되어 있던 미 제국주의의 문제, 북한 '사회주의'의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대중운동 형태로 추진된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운동은, 의도하지 않게, 전혀 새로운 민주투쟁의 주체들에게 대중적 등장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물론 '직선제 개헌'이라는 요구에 포괄되기에는 민중운동 세력의 요구는 깊고도 넓었다. 이러한 차이를 민중운동 세력은 단순한 직선제 쟁취와는 구분되는 '민족·민중·민주(삼민) 헌법쟁취' 등으로 표출했다. 민중운동권 내에서도 보수야당의 개헌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극단적인 견해로는 보수야당 투항적인 '직선제 개헌 투쟁'론이나 대중들의 개헌욕구를 아예 무시한 극좌적인 '개헌투쟁 무용'론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개헌투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삼민이념의 변혁적 내용을 선전·선동한다는 '삼민 헌법쟁취'론이 지지를 얻는 분위기였고, 이는 서노련이 중심이 된 '전국노동자 민중·민주·민족 통일헌법쟁취위원회(약칭 전노삼민쟁)'라는 조직으로 모아졌다. 개헌투쟁에 대한 보다 치열하고 본격적인 논쟁은 5. 3 항쟁 이후 학생운동 내의 NL과 CA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실, 이러한 차이를 잘 알고 있는 신민당 측은 개헌운동을 시작하면서 신민당과 민통련을 포함하는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를 구성, 재야세력을 자신들의 통제권 안에 두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대중운동의 고삐가 풀리자 상황은 이들이 통제할 수 없게 전개되어 갔다.

첫 출발점이었던 3월 21일 부산대회 때만 해도 집회의 주인공은 여전히 신민당과 민추협, 즉 보수자유주의세력이었다. 그러나 신민당의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대구를 거쳐 개헌운동이 북상하는 가운데 집회는 점점 더 '불안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30만이 운집한 광주대회에서는 신민당 측의 자제요구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구호가 군중을 압도했다. 10만명이 모인 대구대회에서는 드디어 민통련의 독자적 플래카드들이 등장하고 신민당과는 별도의 군중대회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가의 반미 시위와 연결돼 이는 군부 파쇼집단의 전술적 호재로 활용됐다. 정권은 한편으로는 '좌경용공' 세력의 발호에 대해 호들갑을 떨면서 신민당과 이들 사이의 연계를 공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협박을 무기로 신민당과의 일정한 타협을 추구했다. 제한적인 내각제 개헌을 통해 군부 파쇼세력이 제 명줄을 이어간다는 이원집정부제 구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4월 29일 민국련은 학생·노동자의 분신투쟁과 반미 구호의 등장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30일 전두환과 이민우 신민당 총재의 청와대 회담내용은, 검열당한 신문의 행간을 읽을 줄 알게 된 영악한 국민들이 신민당 원내 지도부의 동요 조짐을 읽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보수대연합'이란 말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누구에 대한 '보수대연합'인가? 물론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 민중운동 세력들이다. 1986년의 봄과 함께, 역사가 어느 갈래로 흐를 지 알 수 없는 긴장된 1년이 시작됐다.


<b>역사의 최악의 가능성을 무력화시킨 '다섯 시간' </b>

필자는 지금도 5월 3일의 인천 시위가 벌어지자마자 TV에 연일 방영된 '폭력적' 시위 장면들을 잊지 못한다. 경찰차를 탈취하고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이 '빨갱이들의 폭동'이라는 식으로 보도됐었다. 사실 그 날의 시위는 '폭동'이란 말에 부족하지 않게 충분히 '극렬'하고 '폭력적'이었다.
오후 2시에 열릴 예정이었던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경인지부 결성대회에 상관없이 학생들로 구성된 1만 대오는 12시부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오후 1시부터는 본격적인 가두투쟁이 시작됐다. 오후 2시에는 시위대가 민정당 사무실에 화염병을 투척, 방화했고, 오후 4시경에는 주안 사거리에서 경찰차를 탈취해 경찰병력에 밀어붙이는 격렬한 시가전이 있었다. 시위는 밤 10시경까지 시내 곳곳에서 계속됐다.

이 날의 투쟁은 신민당 측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민당은 이를 다수 사복경찰의 악의적인 선동결과로 돌리기까지 했다. 당시 이야기로는 재야세력도 결코 하나의 대오로 움직인 것이 아니며 다수의 불순세력이 무계획적으로 참여한 결과라고 했다. 하지만, 야당 집회를 민중항쟁으로 의식적으로 발전시킨 지도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에 실린 조현연의 글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신민당 개헌현판식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정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불의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서울에서 합숙까지 한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의 7인의 '야사'(야전사령관)들은 시민회관 앞 도로에 나섰고, 순식간에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이들을 중심으로 대오를 형성했다. 5. 3 인천투쟁이 남긴 수많은 후일담 중에서 가장 오래 입에 오르내렸던 합판을 깐 방송리어카가 등장했다. 리어카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은 것은 인노련의 삼민투쟁위원장(전희식과 서기화)이었다. 이들은 전두환 군사독재가 자행한 범죄행위를 폭로하고 보수대연합으로 기울고 있는 신민당을 비판하며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의 건설과 삼민헌법의 쟁취를 소리높여 외쳤다. (중략) 인노련의 비공개 지도부, 이른바 '안개'의 일원이었던 박윤배(대우자동차 해고자 - 인용자주)는 하루종일 굶고 5시간 동안 여한 없이 싸워본 날로 이 날을 기억한다고 한다." (<진보정치> 40호 당원판)

다음날 해가 떠오른 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갔는가? 우선 정부와 여당은 이틀간 숙의를 거친 뒤에 전면적인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로 방향을 잡았다. 이들은 언론을 총동원해 '좌경용공' 세력의 전면 등장을 규탄하면서 이를 대대적인 검거선풍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신민당 내 동요세력을 더욱 압박했다. 원내 지도부뿐만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 역시도 일단 항쟁주체와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데 혈안이 됐다. 김대중의 저 유명한 '비반미, 비폭력, 비용공'이 등장한 것도 이 때였다.

신민당은 곧 장외집회 전술을 철회하고 개헌공방은 한 동안 장내에 머문다. 아니, 보수적 자유주의세력이 추진하던 직선제 개헌요구 자체가 이민우를 중심으로 한 신민당 비주류의 투항을 통해 내부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신민당 내 김영삼/ 김대중 세력은 1987년 초 통일민주당을 새로 만들 때까지 그들 자신 혼란과 침체에 빠지게 된다. 재야세력과 보수 자유주의세력의 공조는 1987년 4월 전두환 정권의 치명적 악수('호헌' 선언) 이후에야 비로소 복구된다.

한편, 전면 탄압공세 속에서 민통련과 서·인노련 등 민중운동의 반(半)합법조직들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문익환, 이부영, 장기표 등 민통련 핵심지도자들, 그리고 김문수 등 서노련 핵심지도자들이 다 구속되면서 노동자·민중운동은 한 동안 비합법상태에 몰리게 된다. 그나마 민중운동을 옹호한 유일한 세력은 남한 땅 전체에 진보적 종교인사들이 유일했다. 중도 자유주의 입장을 전제로 하면서, 혁명 세력보다는 그러한 혁명세력이 나타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지배세력이 문제라고 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가운 시절이었다.

한편, 노동자·민중운동 지도부의 타격 속에서 투쟁의 주도권은 더욱더 학생운동에게 집중되기 시작한다. 특히 삽시간에 학생운동의 주류로 등장한 NL파는 반제직접투쟁노선에 대한 일정한 자기반성을 직선제 개헌운동이라는 '우경화된' 노선으로 구부리면서 다음해 투쟁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NL파의 등장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던 MT그룹은 개헌투쟁에 대해 '제헌의회 소집'론을 제시하면서 제헌의회파(CA)로 재편성된다.
탄압의 시기였고, 침체의 시기였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러했다. 과도한 억압은 반격의 용수철을 더욱 짓눌렀다. 인천항쟁의 주동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고, 다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이어졌다. 1년 뒤, 사람들은 지난 봄의 투쟁이 전민중적 항쟁의 예행연습이었다고 느꼈다.


<b>계급과 이념의 정치의 출발점 </b>

5. 3 항쟁을 둘러싼 논란은 운동권 내부의 논쟁이기 이전에 전체 한국사회가 들썩거린 전사회적 논쟁이었다. 이 점에서 운동진영 내부의 이론적 논쟁들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이는 신민당 이외의 민주투쟁세력, 즉 민중운동세력의 존재를 민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좌경용공' 세력을 부각시키려던 정권과 언론의 대대적인 선전은 역설적으로 학원가나 일부 중소공장에 제한되어 있던 운동권의 존재를 전국민에게 알리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광주항쟁의 무력진압을 배후지원하고 민중의 자주화와 민주화 열망을 기만하면서 이 땅의 민중이 생산한 경제잉여를 수탈해가는데도 미국은 영원한 우리의 우방인가"(민청련 유인물)라는 질문, "필리핀에서 보여준 것처럼 미국은 첫째아들 민정당과 둘째아들 신민당의 개헌공방을 조작하여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을 호도하고 있다"(북부지역 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 명의의 유인물)는 주장이 비로소 한낮의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또한, 5. 3 항쟁은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주체와 보수 자유주의세력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데서 더 나아가, 둘 사이의 필연적인 대립을 '예시'해주었다. 항쟁 직후 보수야당 주도하의 민국련은 '과격 주장'들을 비난하며 보수야당과 민중운동 진영을 구분짓기 위해 광분했다. 이는 민국련의 소속조직인 민통련 내부에 파란을 일으켜, 탄압의 와중에서 지도부가 일괄사표를 제출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이민우 총재는 '좌경용공' 세력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는 것을 군부 독재세력과의 '대타협'의 명분으로 삼기까지 했다. 김영삼/ 김대중 분파 역시도 민중운동세력의 비타협적 투쟁이 직선제 개헌이라는 자신들의 권력야욕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만 민중운동 세력과의 동참을 용인했다. 5. 3항쟁 이후의 대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이 줄기차게 반파쇼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 분파는 타협파와 자신들을 구별하면서 6월 항쟁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또 '대타협'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으로 계속 준동했다.

어쩌면, 직선제 개헌이라는 요구 자체가 대타협을 위해 더할 수 없이 좋은 기반이었다는 게 진실일 것이다. 1986-87년의 정치과정은 오히려 군부 파쇼세력이 이를 '깨달아가는' 과정이었고 김영삼/ 김대중 세력은 대중들의 민주화 투쟁을 무기로 삼아 그러한 '깨달음'을 닥달했다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호헌'을 관철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투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직선제의 수용이야말로 파쇼세력과 보수 자유주의의 대타협을 가능하게 해주는 틀임을 그들은 '학습'해간 것이다. 그것이 6. 29이고, 6공-문민정부-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이 지루한 십수년의 시작이다.

바로 이 점에서 1986년 5월의 인천항쟁은 보수 자유주의세력, 즉 부르주아세력과 노동자·민중운동 세력이 갈린 출발점으로, 즉 우리가 보수 자유주의세력의 '파탄난 십수년' 뒤에 보다 본격적으로 대안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이 시점에서 명철히 되새겨야 할 일대 사건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1986년의 인천과 2001년의 인천은 '잃어버린 십수년'을 사이에 둔 채 같은 시간대 위에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세력과 노동자·민중세력의 분기(分岐)와 대결이라는 시간대 말이다.

※ 물론, 우리에게는 또 다른 쟁점이 있다. 당시만 해도 민중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였던 학생운동 세력이 1986년 투쟁에 대한 반성 속에서 '직선제 쟁취'를 자기요구로 수용하게 되는 과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6월 항쟁의 승리를 가능케 한 '유연한 대응', 즉 1986년 5월의 지나친 급진주의를 자기정정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6월 항쟁을 군부 파쇼세력과 보수야당의 대타협으로 왜곡시키는 데 일조한 기회주의, 즉 1986년 5월의 역사적 의미를 오히려 후퇴시킨 과오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이 쟁점에 대해서는 1986년에서 1987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에서 벌어진 논쟁들을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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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울산과학대 사회서비스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