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2]-공산당 재건을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b>12월 테제와 당 재건운동의 개시</b>
1930년대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은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승인 취소와 민족부르조아지, 민족개량주의와의 투쟁, 대중의 전취를 통한 공산당 재건을 골자로 한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곧 당 재건운동을 개시하였다. 당 재건운동은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병행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는 이미 조직되어 있는 노동조합, 농민조합들을 좌익적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용어로 적색노동·농민조합운동이라고 불린 이 운동은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선택한 당 조직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중조직의 좌익화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당 재건방침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시도되었던 것은 당 재건을 위한 중앙조직의 건설이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조급하게, 중앙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당 재건 중앙조직 건설운동을 가장 운동이 활발했던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일 먼저 당 재건운동을 개시한 것은 '12월 테제'의 의미를 제일 빨리 이해할 수 있었던 국외망명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오래된 파벌적 전통에 따라 서울상해파, 화요파, ML파 등으로 분열해 독자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조직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자파 중심'의 공산당 재건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대개 합법노동조합 내에 침투하여 좌익독서회를 조직한다거나, 좌익학생단체들을 새로 조직한다거나, 고려공산청년회와 같은 기존 조직의 이름을 건 후계조직을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최초 '코민테른의 직접지도' 하에서 수행되었다. 물론, 코민테른의 지도라는 것은 문건 형태로 발표되는 것이었으며 결국 중요한 것은 각 파벌별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코민테른의 지도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파벌의 이해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또 다른 변수가 된 것은 1931년 초 조선내 공산당 재건운동의 지도권이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으로 이양된 사실이었다. 이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는 코민테른과의 관계 외에 중국공산당과의 관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복잡하게 분열했으며, 서로 거의 영향을 주고받지 않은 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12월 테제'의 핵심내용이었던 대중조직의 건설을 통한 당 재건이라는 방침은 사실상 거의 유보되었으며, 오히려 운동은 중앙조직의 건설에 치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이러한 방식의 당 재건운동은 대략 만주국 건국 등 본격적인 일제의 대륙침략이 시작되던 1932년경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면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의 실질적인 운동형태는 어떠했는가를 잠시 살펴보자.
1933년 7월 박헌영은 상해의 거리에서 생애 세 번째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박헌영은 곧 서울로 압송되었다.
1928년 8월 망명에 성공한 후 5년 만에 수갑을 차고 귀향한 것이었다. 이 5년 동안 박헌영의 행적은 당 재건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방식의 한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서울을 탈출한 박헌영은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안정된 조건 속에서 이론적 전망을 확대하고 싶어했던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1929년 1월부터 1931년까지 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표에서 교관은 박헌영을 "확고하게 단련되어 있으며 언제나 훌륭한 동지"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그가 공부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9년 중반 박헌영은 이미 지부승인이 취소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지도기관이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앞서 말했던 당 재건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코민테른이란 바로 이 위원회를 뜻하는 것이다. 조선위원회는 당 재건의 지도기관으로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국내에 설립하였다. 그 실무를 맡은 것은 박헌영의 오랜 혁명동지 김단야였다.
이 시기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에 있던 김단야는 1929년 8월 서울로 잠입하여 앞서 언급한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서울을 빠져나와 이듬해 2월 모스크바로 귀환한 김단야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가 구축해 놓은 국내조직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위원회는 모스크바와 서울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연결지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32년 초 상해에 <코뮤니스트>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출판사가 설립하였다. 박헌영은 그 편집진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7월 결국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박헌영 덕분에 체포를 면한 김단야와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은 황급히 모스크바로 귀환하였다. 박헌영이 체포된 시점은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이 그 절정을 지나 하강하던 무렵이었으며 여러 가지 국내외적 변수들로 조선사회가 또 한번의 격동을 맞이하던 시기였다.
<b>1930년대 중반 당 재건운동의 '대중화'</b>
1932년은 그전 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도발을 시작한 일제가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시킨' 해이다. 만주국 건국은 조선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운동에 미친 가장 실질적인 영향으로서는 일제의 탄압정도가 가일층되었다는 점이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만주국 건국이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 창설이나 몇 차례의 군축회의를 통해 수립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즉, 독일의 헝가리 침공,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침공과 비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본국과 식민지를 막론하고 이른바 '사회불안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이른바 치안유지법의 예방구금제 등에 따라 일경은 사회주의자들을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구속할 수 있었으며, 실제 일제경찰통계에 의하면 1932~1933년경에 이르면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검거되었던 것이다.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전향'하였다. 이 시기에 오면 일제는 1920년대까지의 이른바 '엄벌주의'에서 벗어나 사상전향제도를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특히 일본에서 큰 효과를 보아, 일본공산당은 1933년 최고지도자이자 코민테른 집행위원을 역임한 佐野學(사노 마사부)의 옥중전향을 시작으로 급격하게 붕괴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회주의사상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만 실천의 영역에서 물러났다고 생각하였다. 일제 역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시류에 영합한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진정한 사상의 전향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전향을 하고 합법공간으로 이동하거나, 비전향의 경우는 옥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3년경부터는 새롭게 성장한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당 재건운동이 재개되었다. 이들은 파벌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각 그룹간에 훨씬 더 조직적 통일을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또한 대중조직의 건설이라는 부분도 실질적인 진척을 보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이른바 '국제파'그룹과 그렇지 않은 '국내파'그룹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꼭 협력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활동을 권영태그룹과 이재유그룹을 통해 살펴보자.
권영태는 구(舊) 화요파 출신으로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에 기반해 공산당을 재건하라는 지시를 받고 1933년 1월 서울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그 해 5월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여 9월에는 그 동안 획득한 동지들과 함께 '적색노동조합경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34년에 들어서서 권영태그룹은 용산, 영등포, 동대문 등지의 공장지대에서 좌익노동자들을 다수 포섭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여러 중등학교에서 좌익독서회를 결성하는 등 조직과 활동양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후일의 검거기록을 보면 권영태그룹의 성원들 중 약 40%정도는 공장노동자들이었다. 비로소 '12월 테제'의 현장중심주의는 실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권영태그룹과 대비되는 대표적인 국내파로서는 이재유그룹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일본에서 재인조선인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검거된 이재유는 옥중에서의 이론적, 실천적 단련을 통해 1930년대 초 동지들을 획득하고 당 재건운동을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재유그룹의 활동도 권영태그룹과 유사하게 영등포, 동대문 등지의 공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활동을 주로 맡았던 인물이 유명한 남부군의 지도자 이현상이다. 한편 이재유그룹은 서울 외곽의 경기도 양평, 여주 등지에서 적색농민조합의 결성도 시도하는 한편, 학생, 인텔리조직으로서 반제동맹 조직도 시도하였다. 이 두 그룹의 운동은 모두 노동자, 농민, 학생층 내부에 조직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당 재건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후일 '좌익전선운동'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물론 당 재건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겠다. 그렇지만 여하간 사적 이해관계와의 구분이 모호한 파벌성과의 절연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명목상의 중앙조직을 만드는데 급급했던 이전의 운동방식에 비해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또한 조직보위를 위해 비밀아지트를 구축하고 운동자금 확보를 위해 가공인물을 내세워 사업을 벌이기도 하는 등 운동의 기술면에서도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측면은 이들 그룹들이 권영태와 이재유 등 지도자들의 검거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복구를 시도하며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b>최후의 당 재건운동과 남아있는 문제들</b>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반파시즘인민전선 방침이 채택되어 파시즘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의 수립과 확대가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라고 선언되었다. 이는 제6회 대회에서 제시되었던 이른바 '계급 대 계급' 전설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은 식민지국가에서는 '12월 테제'의 폐기와 더불어 민족개량주의자들과의 협력을 통한 반제국주의인민전선의 결성이라는 방침으로 적용되었다. 조선에서도 한 동안 잊혀졌던 반제민족통일전선이라는 문제가 다시 대두한 것이었다. 이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에 맞서기 위한 국공합작의 성립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도 어떻게든 변화한 상황과 방침에 다시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의 결정은, 사실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소련을 보호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는 편의적 성격을 띤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하나의 모순일 수밖에 없었는데, 몇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고 소련이 서구국가들과 함께 이른바 '반파시즘진영'의 일원이 되면서 그 모순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예컨대 인민전선전술을 수용한 베트남공산당은 반파시즘국가 -특히나 독일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 프랑스에 대한 민족해방운동을 유보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의 상황은 이렇게까지 모순적인 필요는 없었다. 이유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다행스럽게(?) 일본이 파시즘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가? 이 점을 경성콤그룹의 활동을 통해 살펴보자.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당시 남아있던 주요한 사회주의운동가들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이승엽 등- 을 포괄하여 1939년경에 결성된 식민지기 최후의 당 재건운동조직이다. 경성콤그룹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우선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단지 '상황논리' 때문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던 중일전쟁기에 강한 활동력을 보인 사회주의조직이라는 점이다. 둘째, 식민지기 전기간에 걸쳐 사회주의자들의 아킬레스건이었던 파벌주의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벗어난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경성콤그룹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의 모체가 될 수 있었다. 경성콤그룹은 1935년 이후 코민테른의 방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행한 조직으로 이해된다. 그들에 대한 일경의 수사보고서를 보면 "의식적으로 대중을 민족주의적으로 교양"했다고 적혀있다.
즉 경성콤그룹은 일차적으로 "중일전쟁으로 인해 확산된 대중적 불만을 폭동화할 것을 당시 정세에서의 최종적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이 12월 테제에 입각한 지난 시기의 운동방침을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조선혁명의 핵심은 민족해방과 토지혁명이며, 이 과제에 대해 민족부르조아지는 배신자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을 전제한 인민전선전술의 수용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 앞서 언급했다시피 일본이 파시즘진영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 경중을 막론한 모든 '반일적 행동'은 사회혁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조선에 '연대냐 투쟁이냐'를 고민해야 할 만한 의미있는 세력으로서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점이 의미하는 것은 12월 테제에 입각한 운동시기에 민족혁명과 사회혁명 사이의 관계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그래서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은 채 지나쳤던 사회주의자들이 인민전선전술시기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고민할 계기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기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운명적으로 처해야 했던 불운 가운데 하나는, 과잉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의 과소',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감당해내야 할 정치세력이 언제나 과소했던 식민지 조선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과중한 '민족적 과제'마저 자신들의 어깨에 매어야 했으며, '민족과 계급' 혹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 사이의 관계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 점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과 사회주의운동의 전개에서도 여전히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였다. 그 밖에도 엄혹했던 1930년대말∼1940년대초 경성콤그룹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후일의 상황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쳤다.
우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대량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전향은 1930년대 초와는 달리 심각한 사상적 전환마저 포함한 것이었다. 물론 일본을 비롯한 파시즘진영의 승승장구가 전향의 일차적인 요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파시즘이 사상적으로 내세우는 바, '국가사회주의'라는 명목은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파시즘의 사상으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 근대 초극의 전망을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사회주의 조국보위를 내세워 태평양전쟁 말기까지도, 특히 일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도 전향을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해방은 이 모든 전향자들의 선택을 더 이상 말 할 필요조차 없는 배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비전향과 전향은 선과 악을 가르는 절대윤리화했으며 대부분 1945년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비전향으로 남아있었던 경성콤그룹은 삽시간에 사회주의운동의 우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윤리의 영역이 정치의 영역을 대체한 상황이었으며, 해방 후 조선공산당은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여타 정치세력에 대해서도 일제에 대한 협력여부에 기초한 윤리 문제를 자주 정치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역시 결국 기준은 '민족'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끝까지 민족의 편에 있었는가, 아니었는가?
해방 후 사회주의운동에 있어서 과중한 민족적 과제의 부담은 어쩌면 불운이었다기보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남한에서 패배했으며 북행을 택해야 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더욱 민족적인 세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0년대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은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승인 취소와 민족부르조아지, 민족개량주의와의 투쟁, 대중의 전취를 통한 공산당 재건을 골자로 한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곧 당 재건운동을 개시하였다. 당 재건운동은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병행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는 이미 조직되어 있는 노동조합, 농민조합들을 좌익적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용어로 적색노동·농민조합운동이라고 불린 이 운동은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선택한 당 조직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중조직의 좌익화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당 재건방침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시도되었던 것은 당 재건을 위한 중앙조직의 건설이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조급하게, 중앙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당 재건 중앙조직 건설운동을 가장 운동이 활발했던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일 먼저 당 재건운동을 개시한 것은 '12월 테제'의 의미를 제일 빨리 이해할 수 있었던 국외망명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오래된 파벌적 전통에 따라 서울상해파, 화요파, ML파 등으로 분열해 독자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조직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여 '자파 중심'의 공산당 재건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대개 합법노동조합 내에 침투하여 좌익독서회를 조직한다거나, 좌익학생단체들을 새로 조직한다거나, 고려공산청년회와 같은 기존 조직의 이름을 건 후계조직을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최초 '코민테른의 직접지도' 하에서 수행되었다. 물론, 코민테른의 지도라는 것은 문건 형태로 발표되는 것이었으며 결국 중요한 것은 각 파벌별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코민테른의 지도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파벌의 이해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또 다른 변수가 된 것은 1931년 초 조선내 공산당 재건운동의 지도권이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으로 이양된 사실이었다. 이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는 코민테른과의 관계 외에 중국공산당과의 관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복잡하게 분열했으며, 서로 거의 영향을 주고받지 않은 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12월 테제'의 핵심내용이었던 대중조직의 건설을 통한 당 재건이라는 방침은 사실상 거의 유보되었으며, 오히려 운동은 중앙조직의 건설에 치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이러한 방식의 당 재건운동은 대략 만주국 건국 등 본격적인 일제의 대륙침략이 시작되던 1932년경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면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의 실질적인 운동형태는 어떠했는가를 잠시 살펴보자.
1933년 7월 박헌영은 상해의 거리에서 생애 세 번째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박헌영은 곧 서울로 압송되었다.
1928년 8월 망명에 성공한 후 5년 만에 수갑을 차고 귀향한 것이었다. 이 5년 동안 박헌영의 행적은 당 재건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방식의 한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서울을 탈출한 박헌영은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안정된 조건 속에서 이론적 전망을 확대하고 싶어했던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1929년 1월부터 1931년까지 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표에서 교관은 박헌영을 "확고하게 단련되어 있으며 언제나 훌륭한 동지"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그가 공부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9년 중반 박헌영은 이미 지부승인이 취소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지도기관이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앞서 말했던 당 재건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코민테른이란 바로 이 위원회를 뜻하는 것이다. 조선위원회는 당 재건의 지도기관으로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국내에 설립하였다. 그 실무를 맡은 것은 박헌영의 오랜 혁명동지 김단야였다.
이 시기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에 있던 김단야는 1929년 8월 서울로 잠입하여 앞서 언급한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 서울을 빠져나와 이듬해 2월 모스크바로 귀환한 김단야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가 구축해 놓은 국내조직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위원회는 모스크바와 서울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연결지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32년 초 상해에 <코뮤니스트>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출판사가 설립하였다. 박헌영은 그 편집진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7월 결국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박헌영 덕분에 체포를 면한 김단야와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은 황급히 모스크바로 귀환하였다. 박헌영이 체포된 시점은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이 그 절정을 지나 하강하던 무렵이었으며 여러 가지 국내외적 변수들로 조선사회가 또 한번의 격동을 맞이하던 시기였다.
<b>1930년대 중반 당 재건운동의 '대중화'</b>
1932년은 그전 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도발을 시작한 일제가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시킨' 해이다. 만주국 건국은 조선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주의운동에 미친 가장 실질적인 영향으로서는 일제의 탄압정도가 가일층되었다는 점이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만주국 건국이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 창설이나 몇 차례의 군축회의를 통해 수립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즉, 독일의 헝가리 침공,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침공과 비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본국과 식민지를 막론하고 이른바 '사회불안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이른바 치안유지법의 예방구금제 등에 따라 일경은 사회주의자들을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구속할 수 있었으며, 실제 일제경찰통계에 의하면 1932~1933년경에 이르면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검거되었던 것이다.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전향'하였다. 이 시기에 오면 일제는 1920년대까지의 이른바 '엄벌주의'에서 벗어나 사상전향제도를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특히 일본에서 큰 효과를 보아, 일본공산당은 1933년 최고지도자이자 코민테른 집행위원을 역임한 佐野學(사노 마사부)의 옥중전향을 시작으로 급격하게 붕괴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회주의사상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만 실천의 영역에서 물러났다고 생각하였다. 일제 역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시류에 영합한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진정한 사상의 전향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전향을 하고 합법공간으로 이동하거나, 비전향의 경우는 옥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3년경부터는 새롭게 성장한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당 재건운동이 재개되었다. 이들은 파벌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각 그룹간에 훨씬 더 조직적 통일을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또한 대중조직의 건설이라는 부분도 실질적인 진척을 보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이른바 '국제파'그룹과 그렇지 않은 '국내파'그룹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꼭 협력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활동을 권영태그룹과 이재유그룹을 통해 살펴보자.
권영태는 구(舊) 화요파 출신으로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하다가 모스크바공산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에 기반해 공산당을 재건하라는 지시를 받고 1933년 1월 서울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그 해 5월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여 9월에는 그 동안 획득한 동지들과 함께 '적색노동조합경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34년에 들어서서 권영태그룹은 용산, 영등포, 동대문 등지의 공장지대에서 좌익노동자들을 다수 포섭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여러 중등학교에서 좌익독서회를 결성하는 등 조직과 활동양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후일의 검거기록을 보면 권영태그룹의 성원들 중 약 40%정도는 공장노동자들이었다. 비로소 '12월 테제'의 현장중심주의는 실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권영태그룹과 대비되는 대표적인 국내파로서는 이재유그룹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일본에서 재인조선인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검거된 이재유는 옥중에서의 이론적, 실천적 단련을 통해 1930년대 초 동지들을 획득하고 당 재건운동을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재유그룹의 활동도 권영태그룹과 유사하게 영등포, 동대문 등지의 공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활동을 주로 맡았던 인물이 유명한 남부군의 지도자 이현상이다. 한편 이재유그룹은 서울 외곽의 경기도 양평, 여주 등지에서 적색농민조합의 결성도 시도하는 한편, 학생, 인텔리조직으로서 반제동맹 조직도 시도하였다. 이 두 그룹의 운동은 모두 노동자, 농민, 학생층 내부에 조직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당 재건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후일 '좌익전선운동'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물론 당 재건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겠다. 그렇지만 여하간 사적 이해관계와의 구분이 모호한 파벌성과의 절연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명목상의 중앙조직을 만드는데 급급했던 이전의 운동방식에 비해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또한 조직보위를 위해 비밀아지트를 구축하고 운동자금 확보를 위해 가공인물을 내세워 사업을 벌이기도 하는 등 운동의 기술면에서도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측면은 이들 그룹들이 권영태와 이재유 등 지도자들의 검거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복구를 시도하며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
<b>최후의 당 재건운동과 남아있는 문제들</b>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반파시즘인민전선 방침이 채택되어 파시즘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의 수립과 확대가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라고 선언되었다. 이는 제6회 대회에서 제시되었던 이른바 '계급 대 계급' 전설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은 식민지국가에서는 '12월 테제'의 폐기와 더불어 민족개량주의자들과의 협력을 통한 반제국주의인민전선의 결성이라는 방침으로 적용되었다. 조선에서도 한 동안 잊혀졌던 반제민족통일전선이라는 문제가 다시 대두한 것이었다. 이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에 맞서기 위한 국공합작의 성립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도 어떻게든 변화한 상황과 방침에 다시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의 결정은, 사실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소련을 보호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는 편의적 성격을 띤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하나의 모순일 수밖에 없었는데, 몇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고 소련이 서구국가들과 함께 이른바 '반파시즘진영'의 일원이 되면서 그 모순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예컨대 인민전선전술을 수용한 베트남공산당은 반파시즘국가 -특히나 독일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 프랑스에 대한 민족해방운동을 유보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의 상황은 이렇게까지 모순적인 필요는 없었다. 이유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다행스럽게(?) 일본이 파시즘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가? 이 점을 경성콤그룹의 활동을 통해 살펴보자.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당시 남아있던 주요한 사회주의운동가들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이승엽 등- 을 포괄하여 1939년경에 결성된 식민지기 최후의 당 재건운동조직이다. 경성콤그룹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우선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단지 '상황논리' 때문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던 중일전쟁기에 강한 활동력을 보인 사회주의조직이라는 점이다. 둘째, 식민지기 전기간에 걸쳐 사회주의자들의 아킬레스건이었던 파벌주의로부터 거의 완전하게 벗어난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경성콤그룹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의 모체가 될 수 있었다. 경성콤그룹은 1935년 이후 코민테른의 방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행한 조직으로 이해된다. 그들에 대한 일경의 수사보고서를 보면 "의식적으로 대중을 민족주의적으로 교양"했다고 적혀있다.
즉 경성콤그룹은 일차적으로 "중일전쟁으로 인해 확산된 대중적 불만을 폭동화할 것을 당시 정세에서의 최종적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이 12월 테제에 입각한 지난 시기의 운동방침을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조선혁명의 핵심은 민족해방과 토지혁명이며, 이 과제에 대해 민족부르조아지는 배신자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을 전제한 인민전선전술의 수용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 앞서 언급했다시피 일본이 파시즘진영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 경중을 막론한 모든 '반일적 행동'은 사회혁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조선에 '연대냐 투쟁이냐'를 고민해야 할 만한 의미있는 세력으로서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점이 의미하는 것은 12월 테제에 입각한 운동시기에 민족혁명과 사회혁명 사이의 관계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그래서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은 채 지나쳤던 사회주의자들이 인민전선전술시기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고민할 계기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기실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운명적으로 처해야 했던 불운 가운데 하나는, 과잉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의 과소',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감당해내야 할 정치세력이 언제나 과소했던 식민지 조선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과중한 '민족적 과제'마저 자신들의 어깨에 매어야 했으며, '민족과 계급' 혹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 사이의 관계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 점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정과 사회주의운동의 전개에서도 여전히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였다. 그 밖에도 엄혹했던 1930년대말∼1940년대초 경성콤그룹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후일의 상황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쳤다.
우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대량으로 전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전향은 1930년대 초와는 달리 심각한 사상적 전환마저 포함한 것이었다. 물론 일본을 비롯한 파시즘진영의 승승장구가 전향의 일차적인 요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파시즘이 사상적으로 내세우는 바, '국가사회주의'라는 명목은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파시즘의 사상으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 근대 초극의 전망을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사회주의 조국보위를 내세워 태평양전쟁 말기까지도, 특히 일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도 전향을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해방은 이 모든 전향자들의 선택을 더 이상 말 할 필요조차 없는 배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비전향과 전향은 선과 악을 가르는 절대윤리화했으며 대부분 1945년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비전향으로 남아있었던 경성콤그룹은 삽시간에 사회주의운동의 우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윤리의 영역이 정치의 영역을 대체한 상황이었으며, 해방 후 조선공산당은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여타 정치세력에 대해서도 일제에 대한 협력여부에 기초한 윤리 문제를 자주 정치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역시 결국 기준은 '민족'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끝까지 민족의 편에 있었는가, 아니었는가?
해방 후 사회주의운동에 있어서 과중한 민족적 과제의 부담은 어쩌면 불운이었다기보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남한에서 패배했으며 북행을 택해야 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더욱 민족적인 세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