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의 지도력, 정치노선이 관건이다
<b>'이례성(?)'을 가장한 낯설지 않은 논쟁의 촉발</b>
지난 3월, 민주노총 2차 중앙위원회에서 2001년 중심 슬로건으로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을 결의하였다.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위해 대우자동차 투쟁을 중심으로 3월말 집중 상경투쟁, 임단투를 중심으로 한 5월말 총력투쟁, 그리고 12월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이례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정권 퇴진'이라는 슬로건은 우리 모두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오히려 익숙한 슬로건이다. 파쇼정권의 폭압적 탄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한국사회 운동의 전개과정을 돌아보면, 사실상 '퇴진'이라는 수동적 슬로건보다 '타도'와 '박살'이라는 적극적 슬로건이 오히려 적합했던 정세였다. 그러나 '이례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지난 수 년 동안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이 상당히 수세적 입지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위기 이데올로기보다 휠씬 먼저 시작된 운동의 '위기' 에 대한 논쟁은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조합 대중조직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다양한 입장의 분기와 노선의 차이를 낳아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 나아가 노동운동은 노-자간의 직접적 대립 투쟁에 주력하거나 계급 투쟁이라는 낡은 이분법에 강박당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와 고통분담을 통해 적극적으로 경제위기를 타파해나가는 주체여야 한다는 '적극적' 공세가 한편에서 자리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지난 민주노총 역사에서 '사회개혁 투쟁'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등의 이름으로 제기되었고 전개된 바 있다. 물론 민주노총의 역할을 둘러싼 이 논쟁은 단지 노동조합 대중조직의 위상과 역할을 둘러싼 논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운동의 정치적·지도적 구심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 '부재한' 정치적 구심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노총의 '특수한' 지형으로 인해 포괄적 수준의 논의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조건에서 민주노총의 정권퇴진 투쟁에 대한 대중적 결의는 상당한 논쟁을 촉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논쟁은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b>정권퇴진 슬로건을 둘러싼 문제제기</b>
"김대중 정권 퇴진으로 중간층 포섭이 가능할 것인가, 노동자·민중을 고립화시키고자 하는 권력의 구도를 볼 때 퇴진구호와 전술은 제 세력 결집에 유리한 것인가?" "김대중 정권의 정책실패는 계급 역관계를 변화시키고는 있고, 대중의 의식이 김대중 정권을 반대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지만, 정권 퇴진을 직접적인 목표와 요구로 행동하고 있지는 않다, 조직된 대중과 일반 대중과의 간극을 고려하자" "민주노총의 퇴진 투쟁은 현재로서는 전술적인 선전 구호일 뿐이다, 김대중 정권의 정책실패와 보수정치 심판이라는 기조가 적합하다" "민주노총이 결정한다고 전체 민중운동의 입장으로 정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조직적 상황에서 무리이며, 조건조차 성숙되어 있지 않다" 등…. 정권 퇴진 슬로건을 부정하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의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이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해볼 수 있겠다.
첫째, 각 조직이 처한 조건에 근거해 사실상 정권퇴진 슬로건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 둘째, 통일과 남북관계를 둘러싸고 형성된 정권의 입지 나아가 성격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퇴진투쟁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 등. 첫 번째 입장의 경우, 현재 투쟁이 개별사업장, 개별적 사안 수준에서 격화되고는 있으나 이를 퇴진 투쟁으로 모아나가자면 정세를 너무 과도하게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요구를 전체운동의 과제로 삼는 것은 무리이며 정권퇴진 투쟁을 선전·선동의 구호 정도로 수용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수성에 대한 일차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현 시기 남북관계가 진척되고, 통일 국면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민족민주전선의 강화, 자주화 전략을 위해서는 김대중 정권을 고립시키기보다 미국과 수구보수 세력을 고립시키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판단이다.
즉, 반미자주화와 통일 투쟁을 위해서는 정권 퇴진 투쟁보다는 정권의 통일 정책을 강제하는 투쟁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평가는 다른 글에서 수행하고 있으니 생략하는 것으로 한다.
<b>민주노총의 지도력과 투쟁노선을 둘러싼 제기</b>
결국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운동의 발전방향과 투쟁 노선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민주노총이 이 시점에서나마 결의하게 했고, 또한 결의를 주춤하게 하기도 했던, 상당히 '모순적인'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역할과 위상, 지도력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지난 논쟁은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운동의 발전방향을 둘러싼 전략적·노선적 차이로 발전해 왔다. 이 전략적·전술적 차이가 현실적 수준에서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등에 대한 기조와 방향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현상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경제위기기가 전면화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몰아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민중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투쟁력을 복원하고 새롭게 전선을 설치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특히 1999~ 2001년으로 이어져왔던 정세를 돌아보면, 적어도 개별 사업장·단위·부문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투쟁력이 복원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운동의 구심력과 지도력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이러한 대중적 발전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조합 대중조직이 한국사회 운동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과도한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사회 운동의 지형은 이러한 과도함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다. 그 조건하에서 민주노총은 개별 전선에 대한 외곽의, 그리고 사후적인 지지·엄호를 수행해내기에도 벅찼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발생하는 투쟁을 모두 계획하고 조직하고 지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도, 가능한 일도 아니다. 일정을 맞추기에 급급한 총파업, 동원령에 의존해야만 했던 투쟁, 소극적인 민중연대…. 정세적으로 과잉규정된 민주노총의 상황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민운동 세력에게 기대하고 연연하게 만들었으며,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담보로 거래를 일삼는 한국노총 식의 '거짓된' 실리주의에 대한 위험한 모방을 시도하게도 만들었다.
민주노총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지도력이라고 하는 것이 집행부 몇몇의 카리스마나 뛰어난 능력에 좌지우지되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지도력의 구축과 실행, 위력적인 투쟁과 전선 복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적 결의를 요구한다. 그러기에 지도력의 문제는 이 대중적 결의를 형성하고, 조직해내고, 확장시켜내는 과정에서 생성·발전되는 문제이며, 결국 정지적 노선의 문제인 것이다.
<b>사회적 합의주의의 대두와 이를 둘러싼 논쟁</b>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사회개혁 투쟁'에 대한 제기는 민주노총의 출범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전투주의' '노동자 계급주의'에 대한 일정한 회의를 동반한 노선 수정의 과정을 보여준다. 1996년 말, 총체적 수준에서 노동법을 전면적으로 개악하고자 시도했던 정권의 국회날치기 통과에 대응해, 노동운동 진영은 1996-1997년 총파업으로 강고하게 맞서 나갔다. 1997년을 경과하면서도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에 대해 "노사관계개혁위윈회"의 참여냐 아니냐의 논란을 잠시나마 전개했다.
본격적으로 노동운동 내부의 노선적 분화와 이를 둘러싼 논쟁이 촉발된 것은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발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 국면에서 급속하게 유포된 위기담론에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은 서서히 갇히게 된다. 실상 경제위기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임금인상 등의 투쟁은 목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으며, 사업장의 부도와 매각, 정리해고의 현실화에 직면하면서도 투쟁력의 복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위기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전면적으로 관철되기에 이른다. 노동자 계급은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지지 않아야 하는 아니 결코 책임질 수 없는 경제위기의 책임을 떠안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제기되었고 노사정위원회의 참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은, 그리고 전세계적·총체적 자본의 위기 상황에서 구사해야 하는 노동자 계급의 적확한 투쟁 전술은 혼란함을 거듭하게 된다. 자본주의 체계, 더욱이 위기에 처한 자본의 상황과 계급관계에서의 철저한 힘의 열세라는 조건에서 노-자간 합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동자·민중의 입장은 대중적 동력에 기반하지 않는 한, 자본과 권력의 대등한 대립물이 될 수 없으며 철저히 계급 관계를 반영하는 산물이다. 계급적 힘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합의'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한다 할지라도 이에 대응하는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단결과 능력 여하에 따라, 특수한 상황의 '합의'조차도 반민중적·반노동자적 결과로 귀결되게 된다. 그러기에 '사회적 합의주의'로 부상한 결과는 재벌개혁이라는 신자유주의 그 자체적 요구와 노동자 계급의 생존의 버팀목인 정리해고제를 맞바꾸게 하고 말았다.
즉, 위기 성격에 대한 상황인식의 부재, 그리고 위기적 국면에서 부상된 잘못된 운동노선이 1997년 11월 노사정위의 참여로, 1998년 2월 6일 정리해고제의 합의와 근로자파견제의 수용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이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직무대행을 사퇴시켰으며, 비상대책위원회의 가동을 통해 저항해나갔다. 그러나 결국 준비 부족과 국민여론을 근거로 파업투쟁은 철회되었고, 이후로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로의 복귀를 되풀이하기에 이른다.
1998년 3월 말,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이에 대한 대중적 평가에 근거해서 출발했다. 그러나 '투쟁으로 혁신'하는 지도력 복원을 위한 노력은 이미 노동자계급 투쟁 내부에 자리한 노선적 분화, 이것을 둘러싼 힘의 관계 속에서 노사정위에 대한 참여·탈퇴를 번복하다가 좌절하게 되었다. 이미 노동운동 내부적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노선이 발전해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2기 집행부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다시 '사회적 조합주의'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1999년 9월 보궐지도부 체계는 11월 민주노총의 합법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국고보조금을 둘러싼 논쟁이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 5월 총파업의 무력화, 롯데호텔 노동자들과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개된 하반기 투쟁의 국면에서, 민주노총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은 높아만 갔다.
또한, 민주노총의 투쟁방향이 노동시간단축과 사회개혁 투쟁 등 주로 제도개선 투쟁에 방향이 맞춰지면서 현장에서의 이반과 투쟁동력의 소진은 더욱 심화된다. 게다가 2000년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헌신적인 투쟁이 전개되지만 민주노총은 이들 투쟁에 대해서 적극 대응하지 못한다. 특히 10월 아셈 투쟁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과정에서 시민운동과의 연대, 한국노총과의 연대 문제를 둘러싸고 드러났던 민주노총의 다소 모호했던 태도는 사실상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원인이자,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난 민주노총 선거에서 세 후보가 출마·경합을 벌였던 것은 민주노총의 노선적 분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 3기 지도부가 출범했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선을 복구해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을 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짧지만 지난했던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노동운동의 성장은 노동운동 내부로부터의 노선적 분화의 과정을 거쳐오게 했으며, 이것은 경제위기·자본의 총체적 위기 상황, 이에 대응해나가야 하는 조건에서 분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 노선의 분화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판단 그리고 국가권력에 대한 판단에 기저하고 있으나, 한국노총과 시민운동 등에 대한 판단과 연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즉, 한국노총이라는 노-자간 계급관계를 왜곡하는 세력의 정치적 행보와 정치화의 과정이, 민주노총의 정치적 행보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시민운동의 경우 사회적 발언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이 시민운동 진영의 행보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고 그 경향이 민주노총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 경향은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투쟁에 발목을 잡거나 적확한 전술구사를 방해하는 조건으로 기능해왔다. 예를 들어 지난 아셈 투쟁의 경우, 시민운동과의 연대에 무게가 실리면서 투쟁의 내용, 목표, 전술, 수위를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었고 결국 자기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한 바 있다. 비정규직 문제도 여전히 보호냐 철폐냐는 식의 논쟁이 진행 중에 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연대에 대해 의심하고 조심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주장을 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과도하고 부담스러운 역할이지만, 한국사회 운동의 지도성을 발휘해야 하는 민주노총의 경우, 더욱 예각화된 전략과 전술에 대한 고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수한 쟁점에 대한 적확한 판단과 정세 인식, 운동의 지도부로서의 제대로 된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부침에 부침을 겪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며, 이것은 대중의 투쟁력의 약화와 불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 내부의 노선의 분화·객관화는 오히려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분화의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지도력과 투쟁력이 상당한 혼란을 겪어왔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 당면한 투쟁전술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이것이 발전적인 결론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닐 것인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b>다시 합의주의인가, '사회적 조합주의'의 대두</b>
최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기관지 <노동사회>에 계속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입장들은, 간략히 돌아본 지난 역사와 결부해서 바라볼 때 상당히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소 추상적·이론적 주장에서부터, 대우자동차 투쟁에 대해서 운동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평가들이 제출되고 있다. 게다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찬반 여부, 노동운동의 시민운동과의 강화에 대한 의견을 묻는 등 최근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의 의도에 대해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여기서 대우자동차 투쟁에 대한 비판은 다른 글에서 언급되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성동회대 김동춘 교수는 [노동운동, 사회운동성 회복해야]라는 노동사회 2001년 2월호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일부 운동 이론가들은 방어과정의 투쟁성을 계급투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장, 특히 대규모 사업장의 적대적인 노사관계는 계급투쟁으로만 볼 수 없으며, 크게 보아 노동이 배제된 정치경제질서에서 노동자들이 반사적이고 수동적으로 적응한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때문에 개별 전투는 치열했고 때로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도 했으나, 자본·노동의 역학에서 노동세력 일반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연대의 기반이 허물어질수록 개별 노동조합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기적 이익 혹은 경제적 보상밖에 없다. 그리하여 노동조합 운동은 정치연대를 포기한 대가로 물질적 보상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한번 길들여진 운동관성은 노동조합 지도부를 그 쪽으로 몰고 갔다.
그리하여 힘있는 대규모 사업장 노동조합의 경우 언제나 투쟁 구호는 요란하였으나, 결과는 조합원들의 임금과 복지 향상으로만 축적되었으며, 결국 한국 노동운동은 점차 노동조합 운동으로 왜소화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 사업장 개별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는 크게 향상되었으나, 그것은 다수의 주변노동자와 해고된 동료들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큰 틀에서 보면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자본의 운동체제에 흡수되어나가는 과정이었다"
"결국 필자는 노동운동이 90년대 초반 이후 '전투적 경제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사회운동적 조합주의'기조로 변화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바로 이익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조직으로서 거듭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익집단으로서 노조의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익에 대한 정의이다….
노동자의 현실을 개인과 가족 그리고 회사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혁명·개량의 낡은 이분법, 기업단위의 고립된 저항을 계급투쟁이라고 과대평가하는 시각과 결별해야 하고 노조를 사회조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경제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노조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개입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평가가 한국사회 노동조합 운동이 기업별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가지는 한계에 대한 지적, 그리고 노동조합의 '조합'주의적 운동 경향에 대한 지적이라면 일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노동의 유연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현실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노동운동이 사회적 운동의 주체로서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러나, 김동춘 교수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 전투적 조합주의를 수정한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는 그 맥락이 상당히 우편향을 그리며 주장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우선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기업별 체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년 개별 전선의 격화가 계급적 전선의 확대·강화로 발전해왔던 역사적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으며, 현재 노동자계급이 궁지에 몰리는 원인을 단지 노동조합 운동 자체의 한계로 돌리고 있다. 게다가 자본·노동의 역학에서 노동이 수세에 몰리는 원인을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찾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현재 노동자들의 투쟁을 계급 이기주의라고 몰아간다면, 과연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가지고 싸워나가야 하며,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 사수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당장의 임금과 고용조건에 대한 요구 투쟁은 결코 개별 노동자나 개별 사업장의 이해와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정세는 한 사업장에서 무너진 임투전선과 고용안정 투쟁이 다른 사업장을 발목잡고 후퇴시키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개별 사업장의 투쟁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투쟁은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조건의 향상이냐 후퇴냐, 쟁취냐 패배냐로 직결되는 정세라 할 것이다. 비록 안타까운 기억이지만 예를 들자면, 2000년 전력노동자들의 투쟁은 민영화 정책 자체의 관철이냐 아니냐를 내건 전선이었고, 이 과정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조건, 노동자계급의 연대에 비해 훨씬 우세했던 자본과 정권간의 투쟁 전선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의 이익이 다른 노동자의 이익과 충돌'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연대, 노동자·민중의 연대를 갈라놓고자 하는 자본의 공세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다른 노동자, 사회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으려면, 즉, '사회조직으로 거듭나야 하는 노동조합'은 계급 이기주의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며, 노동의 유연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특히 노동운동이 사회적 운동의 주체로 선다는 의미는 현재와 같은 구조조정 국면에서는 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사회적 연대의 확장과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기업단위의 개별적이고 고립된 저항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틀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타파하고 저지해낼 수 있는 동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이러한 주장의 결론이 현재 제출된 민주노총의 투쟁주의에 대한 화답으로써 '합의주의'와 '타협주의'를 내걸고자 하는 세련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지난해 7월 20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가 공동주최한 <노동운동, 시민운동, 진보정당의 발전전략 공동워크샵> 토론에서 주발제자인 김동춘 교수는 "노동+시민+정당이 국가보안법- 정치관계법 개폐운동을, 노동+시민이 우리사주 경영참가운동을, 노동+정당이 비정규직 보호와 조직화운동을, 시민+정당이 지자체 선거 공동대응"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를 통해서 김동춘 교수가 주장하는 윗 글에서 주장한 '사회운동적'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즉, 노동운동의 시민운동화 또는 시민운동 우위에서 노동운동의 재조직화라는 측면에서 그 사회운동적이라는 의미를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노동운동이 실패한 '정치연대'라는 것 역시 시민운동과의 연대 또는 개량화된 정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나아가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노동사회 2001년 3월호 [노동운동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라는 지면을 통해, "노동자의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계급은 제조업 중심의 생산직 노동자를 말합니다만, 이것은 정보화와 유연성이라는 특징을 갖는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협소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집착한다면 노동운동이 일하는 사람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식인이나 고기술자 같은 중산층들도 노동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내부구성이 크게 변하고 있고 그 외연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범위는 크게 넓어지고 있는데 반해, 이들을 사회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세력은 정당을 포함해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노동운동이 혁신과 전환을 통해 신자유주의로 고통받는 일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저항과 반대 중심의 전략전술을 고민하면서 낡은 이념적 편향을 버리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은 사회변화에 뒤쳐지고 뒷북만 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집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노동자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보화·유연화라는 노동 전반의 유연화 과정은 노동자 개념의 확장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계층을 급속히 확대시키고 있다. '이 개념에 집착한다면 노동운동이 일하는 사람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게 된다'는 주장은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투쟁이 더욱 필요하다는 현실을 외면한 주장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은 노동운동이 혁신하고 전환하는 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그 자체를 타파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저지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 저지의 핵심에는 주체로서의 '정권'에 대한 태도표명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저항과 반대 중심의 전략전술, 낡은 이념적 편향, 뒷북만 치는 노동운동!
저항과 반대가 아닌 정책과 대안이라고 했을 때, 이미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본에게 있어서도 위기 극복의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낡은 이념적 편향의 경우 노-자간 대립관계가 낡은 편향이라 한다면 노-자간 대립전선이 격화되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회변화에 뒤쳐지고 뒷북만 친다고 한다면, 이 시대가 너무나도 반인간적·반인륜적이라 '북'을 치기도 두려운 정세라고 한다면 과도할 것인가?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 교수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평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격분해마지 않았다.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라…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상급노조의 투쟁했다는 알리바이 만들기인가, 관성에 젖어서 과거 식의 노사갈등을 계속해선 해법이 나올 리 없다… 연봉 1달러로 크라이슬러 재건을 지휘한 아이아코카처럼 고통을 함께 하는 단합의 자세를 상기하라… 깨진 쪽박으로 동냥도 받을 수 없다… 찬밥 더운밥 지나치게 가리지 말자. 해외매각보다 독자 발전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리하게 뻗대다간 쪽박마저 놓친다."
참으로 끔찍한 논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로 이 사람은 얼마 전까지도, 아니 지금도 '시민운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이 주장에 대해 굳이 인용한 것은 바로 '구조조정 불가피론', 협조주의에 근거한 사회적 조합주의론 등이 갈 때까지 갔을 때의 결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 시기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결의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노동조합의 이념과 노선 문제를 포함한 이러한 언급들이 재차 거론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운동 발전에 있어 논쟁은 너무나도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이 논쟁이 정권의 탄압에 방치되어 있는 다수 노동자들의 혼란함을 부추기고, 이에 편승해 회복을 꾀하는 투쟁력과 지도력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다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우자동차 투쟁 관련한 평가에 대해 한 대우노동자의 말이 기억난다. "더 맞아도 좋다. 다시 병원에 실려가도 좋다. 복직만 된다면."
<b>김대중 정권에 대한 공분이 모아지고 있다</b>
대중조직·정치조직의 구체적 상황을 따져보고, 노동자·민중 개개인의 투쟁 결의와 의지를 따져본다면, 현재의 국면은 여전히 수세적이고 위태롭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불가항력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국내외 자본의 '무리한' 요구에 주눅들어 표출되기도 했던 순종성은 이제 그 짧았던 '순응'과 '복종'의 시간 자체도 무의미했음을 대중적으로 인식해나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공분이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결의할 수 있었던 가장 근저적이자 대중적 정세였던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최근 투쟁 양상에서 드러나는 특징에 대해 주목해봐야 한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전개되었던 집회나 각종 투쟁에서 외쳐졌던 구호는 "구조조정 저지·생존권 쟁취·고용안정 쟁취"였다. 물론 이 자체는 당시 정세를 대변하며 신자유주의라는 실체도 모를 것에 대한 대적 전선에서 '전(全)계급적' 슬로건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주 구체적이며, 민생파탄의 제 지점을 폭로해나가는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파탄·공교육의 말살, 전세값 폭등·물가폭등 책임지고, 정권은 퇴진하라!"
바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막연한 판단과 정권에 대한 기대가 철저히 파산나고 있다는 사실을 검증해주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구체적 불만과 저항으로 나아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대변자인 정권의 책임을 묻고 있으며, 정권과 자본의 동질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생존권 쟁취 투쟁이 삶 자체의 위기감에 대한 공유에 근거해 저항과 연대의 확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김대중 정권 퇴진은, 전술적 슬로건이냐 선언식·선전선동식 문구냐의 여부를 넘어서 노동자·민중의 생존의 권리를 찾기 위한 자발적 욕구의 '정치적' 표현임에 분명하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계급적 인식, 구조조정의 주체로서 정권의 성격에 대한 판단은 노-자간 계급대립 지점에 대한 인식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 파쇼정권 타도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결집되었던 대정부 직접 투쟁의 전선이 한국사회 정치·경제적 특수한 상황에 기반하여 민주-반민주의 대립전선을 형성해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권 퇴진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반민중적·친자본적 성격에 대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총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계급적' 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중적 의식이 계급적 의식으로 진전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전선의 성격이 노-자간의 대립으로 노동자·민중 대 정권과 총자본의 전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앞서 강조한 바 있듯이 민주노총의 지도력 형성 문제는 바로 올바른 정치노선의 정립이 관건이다.
이를 통해서 현장 투쟁력을 복원하고 정치적 지도력이 조직적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는 민주노총만으로 그리고 민주노총 내부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조건에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문제는 민주노총이 그동안 노동자 투쟁의 경험을 통해 인식한 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철폐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주체를 형성하고 그에 걸맞는 정치적 지도를 해 나갈 수 있는 지도력을 다시금 갖춰 나가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다시 발호하고 있는 '사회적 조합주의'의 경향과의 단절을 통해 현장에서부터 양보교섭과 협조주의적 경향을 일소하고 투쟁동력을 확장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김동춘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그동안 노동운동이 '전투적'이어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반대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진영이 협조주의와 양보교섭을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분할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았던 것에 기인한 바 크다. 또한, 지난 투쟁과정에서 노동진영의 정치적 동요가 현장의 동력마저 갉아먹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비록 그 동안은 일정을 잘 연결하고 맞추는 식의 파업이었다면 이제는 그야말로 현장의 이해에 기반한 사회적·정치적 사안을 통한 전선의 확장이 주요하게 사고된다. 소위 의료보험 인상반대, 공공의료 쟁취를 가지고 '총'파업에 돌입할 수도 있다. 2000년에 일정 정도 무너진 민영화 전선을 시급히 회복해서 민영화 정책 완전 철회와 전면백지화를 걸고 '총'파업할 수 있는 것이다.
할 일은 많아 보이고 상황은 혼란스럽다. 이런 때일수록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분류해내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난 3월, 민주노총 2차 중앙위원회에서 2001년 중심 슬로건으로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을 결의하였다.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위해 대우자동차 투쟁을 중심으로 3월말 집중 상경투쟁, 임단투를 중심으로 한 5월말 총력투쟁, 그리고 12월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이례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정권 퇴진'이라는 슬로건은 우리 모두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오히려 익숙한 슬로건이다. 파쇼정권의 폭압적 탄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한국사회 운동의 전개과정을 돌아보면, 사실상 '퇴진'이라는 수동적 슬로건보다 '타도'와 '박살'이라는 적극적 슬로건이 오히려 적합했던 정세였다. 그러나 '이례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지난 수 년 동안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이 상당히 수세적 입지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위기 이데올로기보다 휠씬 먼저 시작된 운동의 '위기' 에 대한 논쟁은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조합 대중조직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다양한 입장의 분기와 노선의 차이를 낳아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 나아가 노동운동은 노-자간의 직접적 대립 투쟁에 주력하거나 계급 투쟁이라는 낡은 이분법에 강박당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와 고통분담을 통해 적극적으로 경제위기를 타파해나가는 주체여야 한다는 '적극적' 공세가 한편에서 자리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지난 민주노총 역사에서 '사회개혁 투쟁'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등의 이름으로 제기되었고 전개된 바 있다. 물론 민주노총의 역할을 둘러싼 이 논쟁은 단지 노동조합 대중조직의 위상과 역할을 둘러싼 논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운동의 정치적·지도적 구심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 '부재한' 정치적 구심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노총의 '특수한' 지형으로 인해 포괄적 수준의 논의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조건에서 민주노총의 정권퇴진 투쟁에 대한 대중적 결의는 상당한 논쟁을 촉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논쟁은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b>정권퇴진 슬로건을 둘러싼 문제제기</b>
"김대중 정권 퇴진으로 중간층 포섭이 가능할 것인가, 노동자·민중을 고립화시키고자 하는 권력의 구도를 볼 때 퇴진구호와 전술은 제 세력 결집에 유리한 것인가?" "김대중 정권의 정책실패는 계급 역관계를 변화시키고는 있고, 대중의 의식이 김대중 정권을 반대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지만, 정권 퇴진을 직접적인 목표와 요구로 행동하고 있지는 않다, 조직된 대중과 일반 대중과의 간극을 고려하자" "민주노총의 퇴진 투쟁은 현재로서는 전술적인 선전 구호일 뿐이다, 김대중 정권의 정책실패와 보수정치 심판이라는 기조가 적합하다" "민주노총이 결정한다고 전체 민중운동의 입장으로 정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조직적 상황에서 무리이며, 조건조차 성숙되어 있지 않다" 등…. 정권 퇴진 슬로건을 부정하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의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이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해볼 수 있겠다.
첫째, 각 조직이 처한 조건에 근거해 사실상 정권퇴진 슬로건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 둘째, 통일과 남북관계를 둘러싸고 형성된 정권의 입지 나아가 성격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퇴진투쟁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 등. 첫 번째 입장의 경우, 현재 투쟁이 개별사업장, 개별적 사안 수준에서 격화되고는 있으나 이를 퇴진 투쟁으로 모아나가자면 정세를 너무 과도하게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요구를 전체운동의 과제로 삼는 것은 무리이며 정권퇴진 투쟁을 선전·선동의 구호 정도로 수용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수성에 대한 일차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현 시기 남북관계가 진척되고, 통일 국면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민족민주전선의 강화, 자주화 전략을 위해서는 김대중 정권을 고립시키기보다 미국과 수구보수 세력을 고립시키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판단이다.
즉, 반미자주화와 통일 투쟁을 위해서는 정권 퇴진 투쟁보다는 정권의 통일 정책을 강제하는 투쟁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평가는 다른 글에서 수행하고 있으니 생략하는 것으로 한다.
<b>민주노총의 지도력과 투쟁노선을 둘러싼 제기</b>
결국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운동의 발전방향과 투쟁 노선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민주노총이 이 시점에서나마 결의하게 했고, 또한 결의를 주춤하게 하기도 했던, 상당히 '모순적인'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역할과 위상, 지도력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지난 논쟁은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운동의 발전방향을 둘러싼 전략적·노선적 차이로 발전해 왔다. 이 전략적·전술적 차이가 현실적 수준에서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등에 대한 기조와 방향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현상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경제위기기가 전면화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몰아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민중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투쟁력을 복원하고 새롭게 전선을 설치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특히 1999~ 2001년으로 이어져왔던 정세를 돌아보면, 적어도 개별 사업장·단위·부문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투쟁력이 복원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운동의 구심력과 지도력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이러한 대중적 발전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조합 대중조직이 한국사회 운동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과도한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사회 운동의 지형은 이러한 과도함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다. 그 조건하에서 민주노총은 개별 전선에 대한 외곽의, 그리고 사후적인 지지·엄호를 수행해내기에도 벅찼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발생하는 투쟁을 모두 계획하고 조직하고 지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도, 가능한 일도 아니다. 일정을 맞추기에 급급한 총파업, 동원령에 의존해야만 했던 투쟁, 소극적인 민중연대…. 정세적으로 과잉규정된 민주노총의 상황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민운동 세력에게 기대하고 연연하게 만들었으며,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담보로 거래를 일삼는 한국노총 식의 '거짓된' 실리주의에 대한 위험한 모방을 시도하게도 만들었다.
민주노총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지도력이라고 하는 것이 집행부 몇몇의 카리스마나 뛰어난 능력에 좌지우지되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지도력의 구축과 실행, 위력적인 투쟁과 전선 복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적 결의를 요구한다. 그러기에 지도력의 문제는 이 대중적 결의를 형성하고, 조직해내고, 확장시켜내는 과정에서 생성·발전되는 문제이며, 결국 정지적 노선의 문제인 것이다.
<b>사회적 합의주의의 대두와 이를 둘러싼 논쟁</b>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사회개혁 투쟁'에 대한 제기는 민주노총의 출범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전투주의' '노동자 계급주의'에 대한 일정한 회의를 동반한 노선 수정의 과정을 보여준다. 1996년 말, 총체적 수준에서 노동법을 전면적으로 개악하고자 시도했던 정권의 국회날치기 통과에 대응해, 노동운동 진영은 1996-1997년 총파업으로 강고하게 맞서 나갔다. 1997년을 경과하면서도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에 대해 "노사관계개혁위윈회"의 참여냐 아니냐의 논란을 잠시나마 전개했다.
본격적으로 노동운동 내부의 노선적 분화와 이를 둘러싼 논쟁이 촉발된 것은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발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 국면에서 급속하게 유포된 위기담론에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은 서서히 갇히게 된다. 실상 경제위기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임금인상 등의 투쟁은 목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으며, 사업장의 부도와 매각, 정리해고의 현실화에 직면하면서도 투쟁력의 복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위기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전면적으로 관철되기에 이른다. 노동자 계급은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지지 않아야 하는 아니 결코 책임질 수 없는 경제위기의 책임을 떠안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제기되었고 노사정위원회의 참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은, 그리고 전세계적·총체적 자본의 위기 상황에서 구사해야 하는 노동자 계급의 적확한 투쟁 전술은 혼란함을 거듭하게 된다. 자본주의 체계, 더욱이 위기에 처한 자본의 상황과 계급관계에서의 철저한 힘의 열세라는 조건에서 노-자간 합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동자·민중의 입장은 대중적 동력에 기반하지 않는 한, 자본과 권력의 대등한 대립물이 될 수 없으며 철저히 계급 관계를 반영하는 산물이다. 계급적 힘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합의'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한다 할지라도 이에 대응하는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단결과 능력 여하에 따라, 특수한 상황의 '합의'조차도 반민중적·반노동자적 결과로 귀결되게 된다. 그러기에 '사회적 합의주의'로 부상한 결과는 재벌개혁이라는 신자유주의 그 자체적 요구와 노동자 계급의 생존의 버팀목인 정리해고제를 맞바꾸게 하고 말았다.
즉, 위기 성격에 대한 상황인식의 부재, 그리고 위기적 국면에서 부상된 잘못된 운동노선이 1997년 11월 노사정위의 참여로, 1998년 2월 6일 정리해고제의 합의와 근로자파견제의 수용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이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직무대행을 사퇴시켰으며, 비상대책위원회의 가동을 통해 저항해나갔다. 그러나 결국 준비 부족과 국민여론을 근거로 파업투쟁은 철회되었고, 이후로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로의 복귀를 되풀이하기에 이른다.
1998년 3월 말,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이에 대한 대중적 평가에 근거해서 출발했다. 그러나 '투쟁으로 혁신'하는 지도력 복원을 위한 노력은 이미 노동자계급 투쟁 내부에 자리한 노선적 분화, 이것을 둘러싼 힘의 관계 속에서 노사정위에 대한 참여·탈퇴를 번복하다가 좌절하게 되었다. 이미 노동운동 내부적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노선이 발전해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2기 집행부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다시 '사회적 조합주의'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1999년 9월 보궐지도부 체계는 11월 민주노총의 합법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국고보조금을 둘러싼 논쟁이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 5월 총파업의 무력화, 롯데호텔 노동자들과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개된 하반기 투쟁의 국면에서, 민주노총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은 높아만 갔다.
또한, 민주노총의 투쟁방향이 노동시간단축과 사회개혁 투쟁 등 주로 제도개선 투쟁에 방향이 맞춰지면서 현장에서의 이반과 투쟁동력의 소진은 더욱 심화된다. 게다가 2000년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헌신적인 투쟁이 전개되지만 민주노총은 이들 투쟁에 대해서 적극 대응하지 못한다. 특히 10월 아셈 투쟁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과정에서 시민운동과의 연대, 한국노총과의 연대 문제를 둘러싸고 드러났던 민주노총의 다소 모호했던 태도는 사실상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원인이자,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난 민주노총 선거에서 세 후보가 출마·경합을 벌였던 것은 민주노총의 노선적 분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 3기 지도부가 출범했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선을 복구해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을 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짧지만 지난했던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노동운동의 성장은 노동운동 내부로부터의 노선적 분화의 과정을 거쳐오게 했으며, 이것은 경제위기·자본의 총체적 위기 상황, 이에 대응해나가야 하는 조건에서 분화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 노선의 분화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판단 그리고 국가권력에 대한 판단에 기저하고 있으나, 한국노총과 시민운동 등에 대한 판단과 연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즉, 한국노총이라는 노-자간 계급관계를 왜곡하는 세력의 정치적 행보와 정치화의 과정이, 민주노총의 정치적 행보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시민운동의 경우 사회적 발언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이 시민운동 진영의 행보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고 그 경향이 민주노총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 경향은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정당한 투쟁에 발목을 잡거나 적확한 전술구사를 방해하는 조건으로 기능해왔다. 예를 들어 지난 아셈 투쟁의 경우, 시민운동과의 연대에 무게가 실리면서 투쟁의 내용, 목표, 전술, 수위를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었고 결국 자기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한 바 있다. 비정규직 문제도 여전히 보호냐 철폐냐는 식의 논쟁이 진행 중에 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연대에 대해 의심하고 조심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주장을 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과도하고 부담스러운 역할이지만, 한국사회 운동의 지도성을 발휘해야 하는 민주노총의 경우, 더욱 예각화된 전략과 전술에 대한 고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수한 쟁점에 대한 적확한 판단과 정세 인식, 운동의 지도부로서의 제대로 된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부침에 부침을 겪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며, 이것은 대중의 투쟁력의 약화와 불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 내부의 노선의 분화·객관화는 오히려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분화의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지도력과 투쟁력이 상당한 혼란을 겪어왔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 당면한 투쟁전술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이것이 발전적인 결론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닐 것인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b>다시 합의주의인가, '사회적 조합주의'의 대두</b>
최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기관지 <노동사회>에 계속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입장들은, 간략히 돌아본 지난 역사와 결부해서 바라볼 때 상당히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소 추상적·이론적 주장에서부터, 대우자동차 투쟁에 대해서 운동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평가들이 제출되고 있다. 게다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찬반 여부, 노동운동의 시민운동과의 강화에 대한 의견을 묻는 등 최근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의 의도에 대해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여기서 대우자동차 투쟁에 대한 비판은 다른 글에서 언급되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성동회대 김동춘 교수는 [노동운동, 사회운동성 회복해야]라는 노동사회 2001년 2월호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일부 운동 이론가들은 방어과정의 투쟁성을 계급투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장, 특히 대규모 사업장의 적대적인 노사관계는 계급투쟁으로만 볼 수 없으며, 크게 보아 노동이 배제된 정치경제질서에서 노동자들이 반사적이고 수동적으로 적응한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때문에 개별 전투는 치열했고 때로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도 했으나, 자본·노동의 역학에서 노동세력 일반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연대의 기반이 허물어질수록 개별 노동조합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기적 이익 혹은 경제적 보상밖에 없다. 그리하여 노동조합 운동은 정치연대를 포기한 대가로 물질적 보상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한번 길들여진 운동관성은 노동조합 지도부를 그 쪽으로 몰고 갔다.
그리하여 힘있는 대규모 사업장 노동조합의 경우 언제나 투쟁 구호는 요란하였으나, 결과는 조합원들의 임금과 복지 향상으로만 축적되었으며, 결국 한국 노동운동은 점차 노동조합 운동으로 왜소화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 사업장 개별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는 크게 향상되었으나, 그것은 다수의 주변노동자와 해고된 동료들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큰 틀에서 보면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자본의 운동체제에 흡수되어나가는 과정이었다"
"결국 필자는 노동운동이 90년대 초반 이후 '전투적 경제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사회운동적 조합주의'기조로 변화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바로 이익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조직으로서 거듭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익집단으로서 노조의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익에 대한 정의이다….
노동자의 현실을 개인과 가족 그리고 회사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혁명·개량의 낡은 이분법, 기업단위의 고립된 저항을 계급투쟁이라고 과대평가하는 시각과 결별해야 하고 노조를 사회조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경제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노조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개입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평가가 한국사회 노동조합 운동이 기업별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가지는 한계에 대한 지적, 그리고 노동조합의 '조합'주의적 운동 경향에 대한 지적이라면 일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노동의 유연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현실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노동운동이 사회적 운동의 주체로서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러나, 김동춘 교수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 전투적 조합주의를 수정한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는 그 맥락이 상당히 우편향을 그리며 주장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우선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기업별 체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년 개별 전선의 격화가 계급적 전선의 확대·강화로 발전해왔던 역사적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으며, 현재 노동자계급이 궁지에 몰리는 원인을 단지 노동조합 운동 자체의 한계로 돌리고 있다. 게다가 자본·노동의 역학에서 노동이 수세에 몰리는 원인을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찾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현재 노동자들의 투쟁을 계급 이기주의라고 몰아간다면, 과연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가지고 싸워나가야 하며,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 사수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당장의 임금과 고용조건에 대한 요구 투쟁은 결코 개별 노동자나 개별 사업장의 이해와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정세는 한 사업장에서 무너진 임투전선과 고용안정 투쟁이 다른 사업장을 발목잡고 후퇴시키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개별 사업장의 투쟁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투쟁은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조건의 향상이냐 후퇴냐, 쟁취냐 패배냐로 직결되는 정세라 할 것이다. 비록 안타까운 기억이지만 예를 들자면, 2000년 전력노동자들의 투쟁은 민영화 정책 자체의 관철이냐 아니냐를 내건 전선이었고, 이 과정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조건, 노동자계급의 연대에 비해 훨씬 우세했던 자본과 정권간의 투쟁 전선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의 이익이 다른 노동자의 이익과 충돌'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연대, 노동자·민중의 연대를 갈라놓고자 하는 자본의 공세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다른 노동자, 사회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으려면, 즉, '사회조직으로 거듭나야 하는 노동조합'은 계급 이기주의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며, 노동의 유연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여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특히 노동운동이 사회적 운동의 주체로 선다는 의미는 현재와 같은 구조조정 국면에서는 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사회적 연대의 확장과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기업단위의 개별적이고 고립된 저항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틀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타파하고 저지해낼 수 있는 동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이러한 주장의 결론이 현재 제출된 민주노총의 투쟁주의에 대한 화답으로써 '합의주의'와 '타협주의'를 내걸고자 하는 세련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지난해 7월 20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가 공동주최한 <노동운동, 시민운동, 진보정당의 발전전략 공동워크샵> 토론에서 주발제자인 김동춘 교수는 "노동+시민+정당이 국가보안법- 정치관계법 개폐운동을, 노동+시민이 우리사주 경영참가운동을, 노동+정당이 비정규직 보호와 조직화운동을, 시민+정당이 지자체 선거 공동대응"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를 통해서 김동춘 교수가 주장하는 윗 글에서 주장한 '사회운동적'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즉, 노동운동의 시민운동화 또는 시민운동 우위에서 노동운동의 재조직화라는 측면에서 그 사회운동적이라는 의미를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노동운동이 실패한 '정치연대'라는 것 역시 시민운동과의 연대 또는 개량화된 정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나아가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노동사회 2001년 3월호 [노동운동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라는 지면을 통해, "노동자의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계급은 제조업 중심의 생산직 노동자를 말합니다만, 이것은 정보화와 유연성이라는 특징을 갖는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협소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집착한다면 노동운동이 일하는 사람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식인이나 고기술자 같은 중산층들도 노동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내부구성이 크게 변하고 있고 그 외연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범위는 크게 넓어지고 있는데 반해, 이들을 사회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세력은 정당을 포함해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노동운동이 혁신과 전환을 통해 신자유주의로 고통받는 일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저항과 반대 중심의 전략전술을 고민하면서 낡은 이념적 편향을 버리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은 사회변화에 뒤쳐지고 뒷북만 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집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노동자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보화·유연화라는 노동 전반의 유연화 과정은 노동자 개념의 확장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계층을 급속히 확대시키고 있다. '이 개념에 집착한다면 노동운동이 일하는 사람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게 된다'는 주장은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투쟁이 더욱 필요하다는 현실을 외면한 주장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은 노동운동이 혁신하고 전환하는 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그 자체를 타파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저지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 저지의 핵심에는 주체로서의 '정권'에 대한 태도표명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저항과 반대 중심의 전략전술, 낡은 이념적 편향, 뒷북만 치는 노동운동!
저항과 반대가 아닌 정책과 대안이라고 했을 때, 이미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본에게 있어서도 위기 극복의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낡은 이념적 편향의 경우 노-자간 대립관계가 낡은 편향이라 한다면 노-자간 대립전선이 격화되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회변화에 뒤쳐지고 뒷북만 친다고 한다면, 이 시대가 너무나도 반인간적·반인륜적이라 '북'을 치기도 두려운 정세라고 한다면 과도할 것인가?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 교수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평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격분해마지 않았다.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라…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상급노조의 투쟁했다는 알리바이 만들기인가, 관성에 젖어서 과거 식의 노사갈등을 계속해선 해법이 나올 리 없다… 연봉 1달러로 크라이슬러 재건을 지휘한 아이아코카처럼 고통을 함께 하는 단합의 자세를 상기하라… 깨진 쪽박으로 동냥도 받을 수 없다… 찬밥 더운밥 지나치게 가리지 말자. 해외매각보다 독자 발전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리하게 뻗대다간 쪽박마저 놓친다."
참으로 끔찍한 논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로 이 사람은 얼마 전까지도, 아니 지금도 '시민운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이 주장에 대해 굳이 인용한 것은 바로 '구조조정 불가피론', 협조주의에 근거한 사회적 조합주의론 등이 갈 때까지 갔을 때의 결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 시기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결의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노동조합의 이념과 노선 문제를 포함한 이러한 언급들이 재차 거론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운동 발전에 있어 논쟁은 너무나도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이 논쟁이 정권의 탄압에 방치되어 있는 다수 노동자들의 혼란함을 부추기고, 이에 편승해 회복을 꾀하는 투쟁력과 지도력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다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우자동차 투쟁 관련한 평가에 대해 한 대우노동자의 말이 기억난다. "더 맞아도 좋다. 다시 병원에 실려가도 좋다. 복직만 된다면."
<b>김대중 정권에 대한 공분이 모아지고 있다</b>
대중조직·정치조직의 구체적 상황을 따져보고, 노동자·민중 개개인의 투쟁 결의와 의지를 따져본다면, 현재의 국면은 여전히 수세적이고 위태롭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불가항력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국내외 자본의 '무리한' 요구에 주눅들어 표출되기도 했던 순종성은 이제 그 짧았던 '순응'과 '복종'의 시간 자체도 무의미했음을 대중적으로 인식해나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공분이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결의할 수 있었던 가장 근저적이자 대중적 정세였던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최근 투쟁 양상에서 드러나는 특징에 대해 주목해봐야 한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전개되었던 집회나 각종 투쟁에서 외쳐졌던 구호는 "구조조정 저지·생존권 쟁취·고용안정 쟁취"였다. 물론 이 자체는 당시 정세를 대변하며 신자유주의라는 실체도 모를 것에 대한 대적 전선에서 '전(全)계급적' 슬로건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주 구체적이며, 민생파탄의 제 지점을 폭로해나가는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파탄·공교육의 말살, 전세값 폭등·물가폭등 책임지고, 정권은 퇴진하라!"
바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막연한 판단과 정권에 대한 기대가 철저히 파산나고 있다는 사실을 검증해주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구체적 불만과 저항으로 나아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대변자인 정권의 책임을 묻고 있으며, 정권과 자본의 동질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생존권 쟁취 투쟁이 삶 자체의 위기감에 대한 공유에 근거해 저항과 연대의 확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김대중 정권 퇴진은, 전술적 슬로건이냐 선언식·선전선동식 문구냐의 여부를 넘어서 노동자·민중의 생존의 권리를 찾기 위한 자발적 욕구의 '정치적' 표현임에 분명하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계급적 인식, 구조조정의 주체로서 정권의 성격에 대한 판단은 노-자간 계급대립 지점에 대한 인식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 파쇼정권 타도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결집되었던 대정부 직접 투쟁의 전선이 한국사회 정치·경제적 특수한 상황에 기반하여 민주-반민주의 대립전선을 형성해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권 퇴진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반민중적·친자본적 성격에 대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총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계급적' 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중적 의식이 계급적 의식으로 진전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전선의 성격이 노-자간의 대립으로 노동자·민중 대 정권과 총자본의 전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앞서 강조한 바 있듯이 민주노총의 지도력 형성 문제는 바로 올바른 정치노선의 정립이 관건이다.
이를 통해서 현장 투쟁력을 복원하고 정치적 지도력이 조직적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는 민주노총만으로 그리고 민주노총 내부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조건에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문제는 민주노총이 그동안 노동자 투쟁의 경험을 통해 인식한 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철폐와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의 주체를 형성하고 그에 걸맞는 정치적 지도를 해 나갈 수 있는 지도력을 다시금 갖춰 나가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다시 발호하고 있는 '사회적 조합주의'의 경향과의 단절을 통해 현장에서부터 양보교섭과 협조주의적 경향을 일소하고 투쟁동력을 확장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김동춘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그동안 노동운동이 '전투적'이어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반대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진영이 협조주의와 양보교섭을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분할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았던 것에 기인한 바 크다. 또한, 지난 투쟁과정에서 노동진영의 정치적 동요가 현장의 동력마저 갉아먹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비록 그 동안은 일정을 잘 연결하고 맞추는 식의 파업이었다면 이제는 그야말로 현장의 이해에 기반한 사회적·정치적 사안을 통한 전선의 확장이 주요하게 사고된다. 소위 의료보험 인상반대, 공공의료 쟁취를 가지고 '총'파업에 돌입할 수도 있다. 2000년에 일정 정도 무너진 민영화 전선을 시급히 회복해서 민영화 정책 완전 철회와 전면백지화를 걸고 '총'파업할 수 있는 것이다.
할 일은 많아 보이고 상황은 혼란스럽다. 이런 때일수록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분류해내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