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최종견해와 사회권 쟁취투쟁의 의의
지난 5월 11일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사회권위원회)는 우리의 사회권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최종견해를 발표했다. "유엔, 한국에 노조 시위 공권력 자제 촉구", "한국 사교육비 과중. 유엔, 공교육 강화 권고" 언론은 꽤 큰 글씨로 최종견해의 일부를 소개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보더라도, 우리 정부에 대한 권고가 상당히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국내 인권·사회단체들의 활동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한국정부 보고서 심사에 대응하기 위해 인권·사회단체들이 처음 모인 것은 지난 해 초였다. "한국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그 덕에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국제사회의 주류적인 평가가 인권 특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장에서 마저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반박보고서 활동의 가장 초보적인 동기였다. 한 걸음 나아가 대량해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 소득격차의 심화, 교육·보건의료·주거에 대한 과중한 개인 부담의 문제가 곧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가속화한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중요하게 부각하자는 데 동의가 이뤄졌다.
이것이 단지 우리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고통받는 다른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도 던지는 함의가 있을 거라는 점이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문제로서 우리 앞에 놓인 현실들을 재해석해내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이 없다는 것, 병원비로 가산을 탕진하는 것, 안정된 생활이 어려운 저임금 따위가 '인권침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란 용어 자체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사회권규약과 사회권 위원회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가 국제인권조약으로서 규범화된 것은 1966년의 일이다. 그렇다고, 그 때 갑자기 이러한 권리들이 '인권'이란 이름을 부여받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 접어들면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통한 착취, 실업, 빈궁한 생활, 하층민으로의 전락이 가속화되자 민중들의 저항은 거세졌다. 자연스레 '인간다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삶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당연히 '인간의 권리'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경제활동의 자유와 재산권에 대한 제한은 불가피한 것이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민중들에게 가장 절실한 인권 문제임에도 경시되고, 인권으로서의 지위를 자꾸 부정당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22조부터 27조까지의 조항들은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노동권,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교육권, 문화생활을 향유할 권리 등을 규정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17조에서 재산을 소유할 권리와 재산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유엔의 논의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들이 소홀히 다뤄진 반면, 재산권이 인권의 일부로 명기되어 있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이후 세계인권선언의 내용들을 보다 구속력있는 조약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들을 둘러싼 논란은 반복되었다. 18년의 시간을 소요한 후인 1966년 채택된 두 개의 조약, 즉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그 논란의 결과다.
애초엔 시민·정치·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조약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시민·정치적 권리는 즉각적인 보장이 가능하며 보다 인권으로서의 지위가 확고하지만,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그렇지 않다며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이 서구 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강하게 제기되면서 결과적으로 두 개의 조약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두 개의 조약으로 나눌 경우, 인권 내부의 서열화 문제를 낳을 것이라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장이 수적으로 밀린 것이다.
1966년 채택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은 1966년 12월 유엔에서 채택돼 1976년 1월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사회권 규약은 노동의 권리, 공정하고도 유리한 노동조건을 향유할 권리, 노동기본권, 사회보장권, 여성/아동의 보호, 인간다운 생활권(식량에 대한 권리, 주거권), 건강권(환경권 포함), 교육권, 문화적 생활을 향유할 권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권 규약에 따라 규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매 5년마다 규약의 권리들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규약의 심의 기구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보고서의 심의 후 해당 국가에 주요 문제사항과 그 개선 방향을 권고한다. 위원회의 권고가 강제적 집행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원회는 사회권 규약의 해석과 실시를 감독하는 최고의 권위를 갖기 때문에, 각국 정부는 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때문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인권적 지위를 부여하기를 꺼려하는 미국은 아직껏 규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한국은 1990년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더불어 동시에 비준했고, 사회권 규약에 따른 1차 이행 보고서는 1995년에 심사를 받았고, 이번이 두 번째 심사였다.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위원회]는 어차피 국가들의 연합인 유엔의 기구라는 성격 상 기본적으로 외교적/타협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또 앞서 이야기했듯이, 위원회의 권고를 가입국이 이행하지 않는다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이 실제 생존권/생활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할 때 규약과 위원회의 권위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부인할 순 없다. 이를테면,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는 선주민, 빈농들이 처한 비참한 삶을 인권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를 포함한 유엔의 인권기구들을 그들의 전술의 일부분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가 유엔 기구 내에서도 IMF, 세계은행, WTO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다.
위원회는 일찍이 IMF나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적절한 보호를 수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었다. 현재 진행 중인 세계화에 대해서도 성명을 통해, 인권 보장을 후퇴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무역·금융·투자 부문이 인권 원칙과 무관한 성역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99년 겨울 시애틀에서 열린 WTO 제3차각료회의 때도 위원회는 성명을 발표해 "이제까지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가 인권과 환경에 미친 영향이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평가·검토되어야 한다"며 투자와 무역의 자유화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 올해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주거·식량·건강·교육 등 기본적인 권리들이 구조조정 정책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국제인권조약에 대한 의무로서 권고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국제금융기구들이 요구하고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구조조정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등 국제인권조약을 무기로 자본의 세계화를 통제하고 민중들의 인권을 지켜내는 전략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힘은 아직 미약하다. 국제인권규범을 존중하라는 인권기구들의 요구에 IMF는 자신의 헌장 외에 다른 규범을 이행할 의무가 없다고 강짜를 부린다. 결국 전혀 동요치 않는 국제금융기구와 상대해야 하는 가난한 나라들의 어깨만 무거워질 수도 있다. 물론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선 우리나라 정부는 얘기가 다르다.
정부보고서에 대한 반박보고서
민변, 민주노총, 사회진보연대, 보건의료단체대표자회의, 민교협, 여성단체연합, 전교조, 인권운동사랑방 등 17개 단체들은 지난해 6월부터 모여 기본 대응방향을 공유하고 정부 보고서에 대한 반박보고서를 준비했다. 우리 정부 보고서의 심사에 맞춰 4월 위원회에 제출한 인권·사회단체들의 반박보고서는 △정부보고서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 △사회권 이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와 장애들 △사회권규약의 국내법적 지위 △난민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동권 및 노동조건 △산업보건 △노동기본권 △비정규노동자의 권리 △사회보장권 △여성 △아동 △주거권 △건강권 △교육권 △문화적 생활을 향유할 권리 등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거의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반박 보고서의 기본방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 한국 민중들의 사회권도 심각하게 후퇴했음을 밝히는 것이었고, 이는 '사회권 이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와 장애들'에 총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화의 영향은 경쟁과 자율을 강조하면서 효율을 위해 약자 보호에 대한 우선순위를 낮추거나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고, 특히 1995년 3월 29일 한국이 OECD 회원국이 됨으로써 WTO체제의 다자간 규율과 OECD에 제출한 시장개방계획을 준수해야 하게 되면서 그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세계화는 곧 국가 경쟁력 제고와 동일시되었고, 그것은 정책의 우선 순위를 사회보장보다는 경제발전에 두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노동권 등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규제를 가하거나 사회보장예산을 확충하여 정부의 역할을 늘리는 것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
외환·금융위기에 대해 대안으로 제시된 IMF·IBRD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시장주의 패러다임 하에서 금융·기업·공공부문·노동 등 4개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빈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국가적 위기상황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으며, 복지·교육·환경을 위한 정책들은 위기 타개를 위한 경제회생 정책들로 대체되었다. … IMF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은 노동의 유연화를 증대시키는 것과 동일시되어 실업과 비정규 고용이 증가하였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간극은 소득 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참여에 있어서도 심하게 벌어졌다. 소득 상위자 10%의 소득은 IMF이전에 비해 4% 증가한데 비해 하위 20%는 -17.2%로, 아래로 내려갈 수록 감소폭이 증가하였다. 또한 정부가 구조조정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전력·통신·의료 등 공공 부문의 사유화(privatization)는 공공서비스의 가격 상승과 더불어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는데 있어서도 부익부빈익빈이 발생할 우려를 안고 있다.
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동시에 오염물질 배출·자원파괴에 대해서 사회적 통제가 약화되면서 환경파괴 가속화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보건의료부문의 정부지출 축소와 수입의약품 가격의 상승, 사용자 비용부담의 원칙에 따라 보건·위생·의료서비스의 공공성이 약화되었다."
물론 각 권리와 연관된 상황을 기술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투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위원들에게 전달된 보고서는 한국 정부 보고서의 심사가 진행된 4월 30일과 5월 1일, 여러 차례 위원들에게 그 내용이 인용됨으로써 진가를 발휘했다. 최종견해를 보더라도, 17개 인권·사회단체들의 보고서가 위원회의 한국정부 보고서 심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권위원회의 최종견해
이번 최종견해는, 95년 1차 보고서에 대한 심사 이후 현재까지 한국정부가 사회권을 어떻게 보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종합적인 평가서라 할 수 있다. 최종견해는 긍정적인 측면, 사회권 실현의 장애요소, 주요 우려사항, 제안과 권고로 구성되어 있다. 위원회는 우리 정부가 경제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사회권의 보장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고 질책했다. 구체적으로 "한국정부가 외환위기 극복과 경제구조조정을 위해 국제금융기구와 협상을 할 때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규약)의 권리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우려 사항의 첫째로 꼽았고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과잉의존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향유에 심각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대량정리해고·고용 악화·소득격차 심화·가정파탄 증가·많은 사람들의 주변화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위원회는 국가보안법을 통해 강제되는 '요새 심리(fortress mentality)'의 만연을 지적하면서, 사회권 보장을 위한 예산은 적은데 반해 방위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해 위원회는 우리 정부에 13개 항의 제안 및 권고를 제시했는데, 1995년도 당시 1차 보고서 심사 후에 채택한 최종견해에 비춰볼 때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내용을 살펴보자.
위원회는 사회·경제·문화적 권리 보장의 관점에서 통계를 수집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는 심사과정에서 실업률, 비정규직의 비율, 빈곤율, 사교육비, 강제철거 현황 등 주요한 내용에 대해 정부가 제시한 자료가 불충분하거나 혹은 민간단체나 유엔 기구들의 자료와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정부에 유리한 방향으로 통계를 조작하는 관행에 일침을 놓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명기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를 재고(再考)하라고 권고한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정규직의 비율이 매우 높고, 노동유연성의 제고라는 슬로건 하에 더욱 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소득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인권·사회단체들의 설명이 위원들에게 주효했던 것 같다. 노동기본권에 대한 위원들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심사 과정에서 정부 대표가 "교원과 공무원은 전통적으로 높은 지위로 인정받기 때문에, 노동기본권, 특히 파업권까지를 보장한다는 것을 국민들이 정서 상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답하자, 위원들은 "어떻게 6년 전인 1차 보고서 심사 때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나? 그렇다면 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해야 할 의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가?"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이는 최종견해에 그대로 반영돼 "정부가 기본권의 실현을 방해하는 전통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위원회는 정부의 태도를 질책하고 있다. 그리고 권고사항으로서 규약 8조의 내용, 즉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참여할 권리, 자신들의 경제적 , 사회적 이해를 증진하고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 단체교섭을 행할 권리, 뿐만 아니라 파업권을 행사할 권리의 보장을 촉구했다. 심사과정에서, 파업권의 적법성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대해 위원들은 궁금해 했는데 이에 대해 정부는 "법에 규정되어 있다"고 내용 없는 답변을 해 황당함을 불러일으켰다.
위원들은 만약 정부가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파업이나,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는 파업을 불법시한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최종견해 20항에서 "파업행위를 범죄시하는 정부의 접근방식은 '전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고 39항에서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형사소추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 것은 위의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다. 주거권에 대한 권고도 매우 주목할 만 하다. 심사 과정에서 정부 대표는 강제철거의 현황이 어떠한지를 묻는 위원의 질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거 대책 없는 강제철거란 있을 수 없다"며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민간개발사업의 경우, 세입자들에 대해 법적으로 보장하는 주거대책이 없다는 점을 사회단체들의 보고서를 통해 다시 확인한 위원회는 최종견해 41항에서 민간개발사업에 의한 강제철거의 피해자들에게도 보상과 임시주거시설 등의 보호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노숙자나, 비닐하우스와 같이 기준 이하의 조건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원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육권에 이르면, 정부가 이행해야 할 의무는 보다 명확해진다. 위원들은 교육에 대한 개인 부담이 지나치게 높다는 데 매우 놀랐고, 그것이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이것이 최종견해 42항의 공교육시스템을 강화할 계획을 수립하라는 권고의 배경이다. 나아가 위원회는 정부는 공교육시스템을 강화할 계획을 세울 때 △중등교육을 무상의무화하기 위한 구체적 활동의 기한 설정 △공교육을 강화하고 사교육이 부과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공교육 시스템의 기능과 질에 대한 재검토 △고등교육을 비롯해 모든 단계의 교육에 대한 접근성 연구와 접근권을 동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 마련 △인권 존중을 증진하기 위한 모든 교육단계 교과내용의 재평가가 포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으례 국제기구의 권고란 매우 추상적이기 마련인데 반해, 구체성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이밖에 위원회는 민간의료기관이 전체 보건의료기관의 90% 이상으로, 보건의료에 대한 민간의존도가 높은 데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위원회의 주요 우려사항과 제안 및 권고
주요 우려 사항(Principal subjects of concern)
·국제금융기구와 경제구조조정에 대한 협상 시 사회권규약 하의 의무 고려하지 않은 점,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사회권 부문에 초래한 부정적 영향
·경제회생과 시장경쟁력을 위해 희생되는 집단의 권리
·정부가 제시한 통계의 신빙성
·규약의 국내법 상 지위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아들 선호, 호주제도, 높은 비율의 가정폭력 발생건수, 비교적 낮은 고등교육 접근, 직장 내 여성 차별 및 성희롱, 여성과 남성 간 큰 임금 차)
·비정규노동자(높은 비율, 고용 불안, 임금/사회보장 차별)
·증가하는 산업재해율(산업안전규제완화와 근로감독관의 수 부족이 그 원인인 듯)
·교원의 단체교섭권과 파업권
·파업을 범죄시하는 문제, 대량해고로 유발된 노동자 시위에 과도한 경찰력 사용
·아동에 대한 성적착취, 아동노동, 아동학대
·개발의 집중에 따른 도/농 간 인구 불균등 문제
·국민기초생활제도의 엄격한 수급기준과 생계급여액의 적절성, 국민연금의 실질적인 적용 범위
·장애인 2% 고용의무가 지켜지지 않는 문제
·강제철거에 대한 정보 결여, 민간개발 시 강제철거민에 대한 주거대책 결여, 저소득층의 주거빈곤
·낮은 보건의료예산, 압도적인 수의 민간의료기관, 취약계층의 보건의료 이용 문제
·열악한 공교육, 사교육비
·압도적인 수의 사립대학, 저소득층에 부정적 영향
·초등교육만 무상의무교육인 문제
·지나치게 엄격한 난민 심사 기준
·인권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교육 결여 문제
·국가보안법이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활동 제약
제안과 권고(Suggestions and Recommendations)
·최초 보고서 심의(1995년) 후 최종견해에 담겼던 위원회의 제안과 권고를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
·규약의 관점에서 통계 수집할 수 있는 방안 검토
·국가인권위 : 파리원칙 부합, 일반논평 10
·규약이 국내법 체제 안에서 근거로 직접 원용될 수 있는 법적 지위 부여
·여성부에 적절한 예산 배정
·비정규 노동자의 상황 재검토, 규약 상의 제 권리 보장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형사소추 중지, 공권력 사용 자제, 교원 및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완전 보장
·아동 성 매매와 아동 노동 피해자들의 보호와 원상회복을 위한 계획 확대
·주거권에 관해 정부 내 전담 부서 설치, 민간개발에 의한 강제철거민들에게 보상과 임시주거시설 등 보호 제공, 취약집단의 적절한 주거 이용 보장
·공교육 강화 계획 수립(중등교육의 무상의무화를 위한 기한 설정, 공교육의 기능과 질 재검토, 고등교육을 포함 모든 단계 교육에 대한 접근성 연구, 인권교육과 연관 모든 교육단계 교과내용 재평가)
·차별적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대중 캠페인 수행
·인권 관련 국가행동계획 준비
·3차 보고서에 농촌 부문의 조건과 농업 및 식량생산 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 담을 것
나가며…
최종견해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위원회의 논의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다. 그것은 미등록 노동자의 자녀들의 교육권에 대한 위원들의 태도였다. 정부대표는 이주노동자와 관련해, "인도적 차원에서 불법체류노동자의 자녀도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자랑스레 답변했는데, 이에 대해 위원회는 "그것은 '인도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아동이 교육을 받는 것은 부모의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인권의 일부로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부의 잘못된 시각을 꼬집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시사하는 바는 단지 미등록 노동자의 자녀들의 교육권에, 또 정부의 태도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삶과 머리 속에 고착되어 버린 거대한 편견을 깨도록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것도 돈을 주지 않고는 구할 수 없는 사회에 살면서, 식량·노동·집·교육·건강·사회보장·문화적 생활 등이 기본적 인권이고, 그것은 국가에 제도적으로 등록된 국민/시민 혹은 특정 계급/인종/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기란 쉽지 않다.
이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최종견해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한다. 사회권이 보다 보편화하도록 투쟁해야 할 과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다. 위원회의 '최종견해'가 그냥 몇 장의 문서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민중들의 사회권 쟁취의 근거가 될 것인가. 투쟁 없이, 인권의 쟁취와 확대란 없다는 명제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기에는 국내 인권·사회단체들의 활동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한국정부 보고서 심사에 대응하기 위해 인권·사회단체들이 처음 모인 것은 지난 해 초였다. "한국은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그 덕에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국제사회의 주류적인 평가가 인권 특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장에서 마저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반박보고서 활동의 가장 초보적인 동기였다. 한 걸음 나아가 대량해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 소득격차의 심화, 교육·보건의료·주거에 대한 과중한 개인 부담의 문제가 곧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가속화한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중요하게 부각하자는 데 동의가 이뤄졌다.
이것이 단지 우리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고통받는 다른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도 던지는 함의가 있을 거라는 점이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문제로서 우리 앞에 놓인 현실들을 재해석해내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이 없다는 것, 병원비로 가산을 탕진하는 것, 안정된 생활이 어려운 저임금 따위가 '인권침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란 용어 자체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사회권규약과 사회권 위원회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가 국제인권조약으로서 규범화된 것은 1966년의 일이다. 그렇다고, 그 때 갑자기 이러한 권리들이 '인권'이란 이름을 부여받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 접어들면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통한 착취, 실업, 빈궁한 생활, 하층민으로의 전락이 가속화되자 민중들의 저항은 거세졌다. 자연스레 '인간다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삶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당연히 '인간의 권리'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경제활동의 자유와 재산권에 대한 제한은 불가피한 것이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민중들에게 가장 절실한 인권 문제임에도 경시되고, 인권으로서의 지위를 자꾸 부정당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22조부터 27조까지의 조항들은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노동권,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교육권, 문화생활을 향유할 권리 등을 규정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17조에서 재산을 소유할 권리와 재산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유엔의 논의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들이 소홀히 다뤄진 반면, 재산권이 인권의 일부로 명기되어 있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 이후 세계인권선언의 내용들을 보다 구속력있는 조약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들을 둘러싼 논란은 반복되었다. 18년의 시간을 소요한 후인 1966년 채택된 두 개의 조약, 즉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그 논란의 결과다.
애초엔 시민·정치·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조약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시민·정치적 권리는 즉각적인 보장이 가능하며 보다 인권으로서의 지위가 확고하지만,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그렇지 않다며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이 서구 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강하게 제기되면서 결과적으로 두 개의 조약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두 개의 조약으로 나눌 경우, 인권 내부의 서열화 문제를 낳을 것이라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장이 수적으로 밀린 것이다.
1966년 채택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은 1966년 12월 유엔에서 채택돼 1976년 1월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사회권 규약은 노동의 권리, 공정하고도 유리한 노동조건을 향유할 권리, 노동기본권, 사회보장권, 여성/아동의 보호, 인간다운 생활권(식량에 대한 권리, 주거권), 건강권(환경권 포함), 교육권, 문화적 생활을 향유할 권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권 규약에 따라 규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매 5년마다 규약의 권리들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규약의 심의 기구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보고서의 심의 후 해당 국가에 주요 문제사항과 그 개선 방향을 권고한다. 위원회의 권고가 강제적 집행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원회는 사회권 규약의 해석과 실시를 감독하는 최고의 권위를 갖기 때문에, 각국 정부는 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때문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인권적 지위를 부여하기를 꺼려하는 미국은 아직껏 규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한국은 1990년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더불어 동시에 비준했고, 사회권 규약에 따른 1차 이행 보고서는 1995년에 심사를 받았고, 이번이 두 번째 심사였다.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위원회]는 어차피 국가들의 연합인 유엔의 기구라는 성격 상 기본적으로 외교적/타협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또 앞서 이야기했듯이, 위원회의 권고를 가입국이 이행하지 않는다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이 실제 생존권/생활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할 때 규약과 위원회의 권위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부인할 순 없다. 이를테면,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는 선주민, 빈농들이 처한 비참한 삶을 인권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를 포함한 유엔의 인권기구들을 그들의 전술의 일부분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가 유엔 기구 내에서도 IMF, 세계은행, WTO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다.
위원회는 일찍이 IMF나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적절한 보호를 수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었다. 현재 진행 중인 세계화에 대해서도 성명을 통해, 인권 보장을 후퇴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무역·금융·투자 부문이 인권 원칙과 무관한 성역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99년 겨울 시애틀에서 열린 WTO 제3차각료회의 때도 위원회는 성명을 발표해 "이제까지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가 인권과 환경에 미친 영향이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평가·검토되어야 한다"며 투자와 무역의 자유화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 올해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주거·식량·건강·교육 등 기본적인 권리들이 구조조정 정책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국제인권조약에 대한 의무로서 권고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국제금융기구들이 요구하고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구조조정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등 국제인권조약을 무기로 자본의 세계화를 통제하고 민중들의 인권을 지켜내는 전략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힘은 아직 미약하다. 국제인권규범을 존중하라는 인권기구들의 요구에 IMF는 자신의 헌장 외에 다른 규범을 이행할 의무가 없다고 강짜를 부린다. 결국 전혀 동요치 않는 국제금융기구와 상대해야 하는 가난한 나라들의 어깨만 무거워질 수도 있다. 물론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선 우리나라 정부는 얘기가 다르다.
정부보고서에 대한 반박보고서
민변, 민주노총, 사회진보연대, 보건의료단체대표자회의, 민교협, 여성단체연합, 전교조, 인권운동사랑방 등 17개 단체들은 지난해 6월부터 모여 기본 대응방향을 공유하고 정부 보고서에 대한 반박보고서를 준비했다. 우리 정부 보고서의 심사에 맞춰 4월 위원회에 제출한 인권·사회단체들의 반박보고서는 △정부보고서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 △사회권 이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와 장애들 △사회권규약의 국내법적 지위 △난민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동권 및 노동조건 △산업보건 △노동기본권 △비정규노동자의 권리 △사회보장권 △여성 △아동 △주거권 △건강권 △교육권 △문화적 생활을 향유할 권리 등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거의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반박 보고서의 기본방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 한국 민중들의 사회권도 심각하게 후퇴했음을 밝히는 것이었고, 이는 '사회권 이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와 장애들'에 총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화의 영향은 경쟁과 자율을 강조하면서 효율을 위해 약자 보호에 대한 우선순위를 낮추거나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고, 특히 1995년 3월 29일 한국이 OECD 회원국이 됨으로써 WTO체제의 다자간 규율과 OECD에 제출한 시장개방계획을 준수해야 하게 되면서 그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세계화는 곧 국가 경쟁력 제고와 동일시되었고, 그것은 정책의 우선 순위를 사회보장보다는 경제발전에 두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노동권 등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규제를 가하거나 사회보장예산을 확충하여 정부의 역할을 늘리는 것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
외환·금융위기에 대해 대안으로 제시된 IMF·IBRD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시장주의 패러다임 하에서 금융·기업·공공부문·노동 등 4개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빈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 요구가 국가적 위기상황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으며, 복지·교육·환경을 위한 정책들은 위기 타개를 위한 경제회생 정책들로 대체되었다. … IMF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은 노동의 유연화를 증대시키는 것과 동일시되어 실업과 비정규 고용이 증가하였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간극은 소득 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참여에 있어서도 심하게 벌어졌다. 소득 상위자 10%의 소득은 IMF이전에 비해 4% 증가한데 비해 하위 20%는 -17.2%로, 아래로 내려갈 수록 감소폭이 증가하였다. 또한 정부가 구조조정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전력·통신·의료 등 공공 부문의 사유화(privatization)는 공공서비스의 가격 상승과 더불어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는데 있어서도 부익부빈익빈이 발생할 우려를 안고 있다.
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동시에 오염물질 배출·자원파괴에 대해서 사회적 통제가 약화되면서 환경파괴 가속화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보건의료부문의 정부지출 축소와 수입의약품 가격의 상승, 사용자 비용부담의 원칙에 따라 보건·위생·의료서비스의 공공성이 약화되었다."
물론 각 권리와 연관된 상황을 기술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투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위원들에게 전달된 보고서는 한국 정부 보고서의 심사가 진행된 4월 30일과 5월 1일, 여러 차례 위원들에게 그 내용이 인용됨으로써 진가를 발휘했다. 최종견해를 보더라도, 17개 인권·사회단체들의 보고서가 위원회의 한국정부 보고서 심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권위원회의 최종견해
이번 최종견해는, 95년 1차 보고서에 대한 심사 이후 현재까지 한국정부가 사회권을 어떻게 보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종합적인 평가서라 할 수 있다. 최종견해는 긍정적인 측면, 사회권 실현의 장애요소, 주요 우려사항, 제안과 권고로 구성되어 있다. 위원회는 우리 정부가 경제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사회권의 보장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고 질책했다. 구체적으로 "한국정부가 외환위기 극복과 경제구조조정을 위해 국제금융기구와 협상을 할 때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규약)의 권리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우려 사항의 첫째로 꼽았고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과잉의존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향유에 심각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대량정리해고·고용 악화·소득격차 심화·가정파탄 증가·많은 사람들의 주변화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위원회는 국가보안법을 통해 강제되는 '요새 심리(fortress mentality)'의 만연을 지적하면서, 사회권 보장을 위한 예산은 적은데 반해 방위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해 위원회는 우리 정부에 13개 항의 제안 및 권고를 제시했는데, 1995년도 당시 1차 보고서 심사 후에 채택한 최종견해에 비춰볼 때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내용을 살펴보자.
위원회는 사회·경제·문화적 권리 보장의 관점에서 통계를 수집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는 심사과정에서 실업률, 비정규직의 비율, 빈곤율, 사교육비, 강제철거 현황 등 주요한 내용에 대해 정부가 제시한 자료가 불충분하거나 혹은 민간단체나 유엔 기구들의 자료와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정부에 유리한 방향으로 통계를 조작하는 관행에 일침을 놓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명기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를 재고(再考)하라고 권고한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정규직의 비율이 매우 높고, 노동유연성의 제고라는 슬로건 하에 더욱 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소득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인권·사회단체들의 설명이 위원들에게 주효했던 것 같다. 노동기본권에 대한 위원들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심사 과정에서 정부 대표가 "교원과 공무원은 전통적으로 높은 지위로 인정받기 때문에, 노동기본권, 특히 파업권까지를 보장한다는 것을 국민들이 정서 상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답하자, 위원들은 "어떻게 6년 전인 1차 보고서 심사 때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나? 그렇다면 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해야 할 의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가?"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이는 최종견해에 그대로 반영돼 "정부가 기본권의 실현을 방해하는 전통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위원회는 정부의 태도를 질책하고 있다. 그리고 권고사항으로서 규약 8조의 내용, 즉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참여할 권리, 자신들의 경제적 , 사회적 이해를 증진하고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 단체교섭을 행할 권리, 뿐만 아니라 파업권을 행사할 권리의 보장을 촉구했다. 심사과정에서, 파업권의 적법성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대해 위원들은 궁금해 했는데 이에 대해 정부는 "법에 규정되어 있다"고 내용 없는 답변을 해 황당함을 불러일으켰다.
위원들은 만약 정부가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파업이나,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는 파업을 불법시한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최종견해 20항에서 "파업행위를 범죄시하는 정부의 접근방식은 '전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고 39항에서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형사소추를 중지할 것"을 촉구한 것은 위의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다. 주거권에 대한 권고도 매우 주목할 만 하다. 심사 과정에서 정부 대표는 강제철거의 현황이 어떠한지를 묻는 위원의 질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거 대책 없는 강제철거란 있을 수 없다"며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민간개발사업의 경우, 세입자들에 대해 법적으로 보장하는 주거대책이 없다는 점을 사회단체들의 보고서를 통해 다시 확인한 위원회는 최종견해 41항에서 민간개발사업에 의한 강제철거의 피해자들에게도 보상과 임시주거시설 등의 보호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노숙자나, 비닐하우스와 같이 기준 이하의 조건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원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육권에 이르면, 정부가 이행해야 할 의무는 보다 명확해진다. 위원들은 교육에 대한 개인 부담이 지나치게 높다는 데 매우 놀랐고, 그것이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이것이 최종견해 42항의 공교육시스템을 강화할 계획을 수립하라는 권고의 배경이다. 나아가 위원회는 정부는 공교육시스템을 강화할 계획을 세울 때 △중등교육을 무상의무화하기 위한 구체적 활동의 기한 설정 △공교육을 강화하고 사교육이 부과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공교육 시스템의 기능과 질에 대한 재검토 △고등교육을 비롯해 모든 단계의 교육에 대한 접근성 연구와 접근권을 동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 마련 △인권 존중을 증진하기 위한 모든 교육단계 교과내용의 재평가가 포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으례 국제기구의 권고란 매우 추상적이기 마련인데 반해, 구체성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이밖에 위원회는 민간의료기관이 전체 보건의료기관의 90% 이상으로, 보건의료에 대한 민간의존도가 높은 데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위원회의 주요 우려사항과 제안 및 권고
주요 우려 사항(Principal subjects of concern)
·국제금융기구와 경제구조조정에 대한 협상 시 사회권규약 하의 의무 고려하지 않은 점,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사회권 부문에 초래한 부정적 영향
·경제회생과 시장경쟁력을 위해 희생되는 집단의 권리
·정부가 제시한 통계의 신빙성
·규약의 국내법 상 지위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아들 선호, 호주제도, 높은 비율의 가정폭력 발생건수, 비교적 낮은 고등교육 접근, 직장 내 여성 차별 및 성희롱, 여성과 남성 간 큰 임금 차)
·비정규노동자(높은 비율, 고용 불안, 임금/사회보장 차별)
·증가하는 산업재해율(산업안전규제완화와 근로감독관의 수 부족이 그 원인인 듯)
·교원의 단체교섭권과 파업권
·파업을 범죄시하는 문제, 대량해고로 유발된 노동자 시위에 과도한 경찰력 사용
·아동에 대한 성적착취, 아동노동, 아동학대
·개발의 집중에 따른 도/농 간 인구 불균등 문제
·국민기초생활제도의 엄격한 수급기준과 생계급여액의 적절성, 국민연금의 실질적인 적용 범위
·장애인 2% 고용의무가 지켜지지 않는 문제
·강제철거에 대한 정보 결여, 민간개발 시 강제철거민에 대한 주거대책 결여, 저소득층의 주거빈곤
·낮은 보건의료예산, 압도적인 수의 민간의료기관, 취약계층의 보건의료 이용 문제
·열악한 공교육, 사교육비
·압도적인 수의 사립대학, 저소득층에 부정적 영향
·초등교육만 무상의무교육인 문제
·지나치게 엄격한 난민 심사 기준
·인권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교육 결여 문제
·국가보안법이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활동 제약
제안과 권고(Suggestions and Recommendations)
·최초 보고서 심의(1995년) 후 최종견해에 담겼던 위원회의 제안과 권고를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
·규약의 관점에서 통계 수집할 수 있는 방안 검토
·국가인권위 : 파리원칙 부합, 일반논평 10
·규약이 국내법 체제 안에서 근거로 직접 원용될 수 있는 법적 지위 부여
·여성부에 적절한 예산 배정
·비정규 노동자의 상황 재검토, 규약 상의 제 권리 보장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형사소추 중지, 공권력 사용 자제, 교원 및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완전 보장
·아동 성 매매와 아동 노동 피해자들의 보호와 원상회복을 위한 계획 확대
·주거권에 관해 정부 내 전담 부서 설치, 민간개발에 의한 강제철거민들에게 보상과 임시주거시설 등 보호 제공, 취약집단의 적절한 주거 이용 보장
·공교육 강화 계획 수립(중등교육의 무상의무화를 위한 기한 설정, 공교육의 기능과 질 재검토, 고등교육을 포함 모든 단계 교육에 대한 접근성 연구, 인권교육과 연관 모든 교육단계 교과내용 재평가)
·차별적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대중 캠페인 수행
·인권 관련 국가행동계획 준비
·3차 보고서에 농촌 부문의 조건과 농업 및 식량생산 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 담을 것
나가며…
최종견해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위원회의 논의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다. 그것은 미등록 노동자의 자녀들의 교육권에 대한 위원들의 태도였다. 정부대표는 이주노동자와 관련해, "인도적 차원에서 불법체류노동자의 자녀도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자랑스레 답변했는데, 이에 대해 위원회는 "그것은 '인도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아동이 교육을 받는 것은 부모의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인권의 일부로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부의 잘못된 시각을 꼬집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시사하는 바는 단지 미등록 노동자의 자녀들의 교육권에, 또 정부의 태도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삶과 머리 속에 고착되어 버린 거대한 편견을 깨도록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것도 돈을 주지 않고는 구할 수 없는 사회에 살면서, 식량·노동·집·교육·건강·사회보장·문화적 생활 등이 기본적 인권이고, 그것은 국가에 제도적으로 등록된 국민/시민 혹은 특정 계급/인종/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기란 쉽지 않다.
이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최종견해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한다. 사회권이 보다 보편화하도록 투쟁해야 할 과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다. 위원회의 '최종견해'가 그냥 몇 장의 문서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민중들의 사회권 쟁취의 근거가 될 것인가. 투쟁 없이, 인권의 쟁취와 확대란 없다는 명제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