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7-8.17호
첨부파일
Kumkangsan.hwp

통일토론회를 위해 다시 찾은 금강산

홍근수 | 운영위원, 자통협 상임공동대표
***
"남북공동선언의 충실한 이행을 거듭 다짐해 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올해 안에 실천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6월 16일 '제주도 평화포럼' 개막연설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희망의 피력이나 예언이 아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지연되고 있는 데 대한, 일종의 압력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민족통일과 평화문제에 대하여 큰 열의를 가지고 있는 북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갖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선언의 한 당사자인 남측이 어떤 구걸이나 압력 등이 아니라, 남측이 진정으로 6.15 선언을 찬성하고 이를 실천하는 의지를 보일 때에 비로소 실현되리라고 생각한다.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위력을 떨치고 있는 현실, 아직도 국회에서 국방장관이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고 증언하는 현실, 식량난을 겪는 북한을 돕는 게 북에게 그냥 (양식을)퍼주기라며 반대하는 현실 등이 이 땅에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결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북의 생각에는 아직 때가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남의 '위선적인 이중성'일 것이다. 그것이 이번 '6.15기념 1돌 금강산민족통일 대토론회'에서도 잘 나타났던 것 같다. 남측에서는 민화협·7대종단·통일연대 등 대표들이 모두 431명이 초청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이 모두 금강산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6명이 그 자리에서 불허되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6.15 정신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반복되고 원천적으로 그치지 않는 한 6.15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본다.


***
남쪽에서 6.15 통일토론회 참석자들은 토론회장인 금강산에 가기 위해, 6월 14일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항구인 속초로 떠났다. 속초항에서 승선할 시간에 5명이 행정상 착오로 승선증이 나오지 못하였고, 노수희 대표(전국연합 공동대표) 외 5명은 아예 불허통보를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이 문제로 일부 통일연대 사람들이 승선하지 않은 채 밖에서 회의를 하며 계획에 없던 집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행정착오로 발급이 안 된 사람들의 승선증은 곧 발급되었으나, 불허된 6명에 대하여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대승적 차원에서 금강산을 가기로 결정한 집행위원들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항의집회를 한 후 승선하였다. 배의 이름은 '설봉호'라고 하였는데 '금강호' '봉래호' 등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작았다. 작년에는 강릉 아래쪽에 위치하는 동해항에서 떠났지만, 이번에는 미시령 고개로 넘어가는 속초항에서 떠났다. 결국 6명의 동지들을 뒤에 남긴 채 우리는 속초항을 떠나 북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이 금강산 방문이 처음이 아닌 나에게, 이번 방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작년 이 맘 때 내가 속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에서 통일염원을 위한 기도회를 겸한 금강산 관광에 참가하여 처음 이 곳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번은 좀 달랐다. 우선 규모에 있어 숫자는 그 때에 비해 절반보다 적은 숫자밖에 안 되었지만, 일개 교단의 범위를 넘어선 한국의 7대 종단을 포함하였으며 또 단순히 종교단체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 민(全 民)이 함께 하였다.

또 처음 방문시에는 배 안에서 진행된 통일염원 기도회였지만, 이번에는 금강산 호텔에서 치러진 <6.15 1주년기념 금강산 통일토론회>였으며, 그 때는 북측에서 어떤 분도 함께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230여명이 함께 하였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
이번 6.15 금강산 통일토론회는 분단 이래 남북 최대 규모의 대표들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는 데에 우선 첫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측에서는 민화협, 7대 종교, 통일연대 등이 함께 425명이 참가했고, 북측에서는 220여명이 참석하였다. 이 행사를 취재하기 위하여 남에서는 <민족21>기자들과 MBC-TV 방송카메라와 기자들이 동행하였다.
남에서 간 사람들은 상투 틀고 갓 쓰고 한복을 입은 노인들도 눈에 띄었다. 천도교, 민족종교 등의 사람들이었던 모양이었다. 남측 참가단에는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이북5도청 사람들도, 당국에서 이적단체라고 홀대해 왔던 한총련, 범민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참가가 성과라면 성과라 할 수 있을지….

쾌속정으로 약 2시간 정도가 경과했을까? 장전항-일명 고성항-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아 환하였다. 금강산이 온통 흰구름으로 덮여져 있어 산의 전체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 산이 더욱 신비롭게 보였는지 모른다. 잔잔한 고성항에 들어갔을 때, 맞은 편 산중턱에 있는 큰 바위에 "위대한 선군 정치 만세!"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전에 보지 못했는지 새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형 유람선이 아니어서 그렇겠지만, 우리가 타고간 설봉호는 400여명이 넘는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없어 약 200여명은 환상적인 해상여관인 7층짜리 '호텔 해금강'으로 숙소가 배정되었다. 그 호텔은 전에 없던 것으로 작년 11월부터 열었다고 했다. 역시 현대의 사업체인 이 수상호텔은 관광객의 급격한 감소로 수지가 맞지 않아 우리 일행이 떠나면 곧장 남쪽의 영종도로 예인해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이 환상의 수상호텔인 해금강 4층에 천영세 대표와 함께 배치되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고영대, 박기학, 김영재 국장 등은 숙소가 설봉호여서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해 아쉬웠다.

첫날 밤은 온정각에 가서 늦은 저녁을 먹고 고영대, 박기학, 천영세 동지 등과 만나 그동안 발전된 상황과 우리의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가단 중 6명에 대한 금강산행 불허 문제만 없으면 한가했을 첫날 밤, 온정리에서 우리는 바빴다. 늦게야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민주노동당 이성헌 동지와 함께 온정각에서 구입한 이북 술을 마시며 이북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
다음날 아침, 전날 저녁을 배불리 먹은 탓도 있었지만 다시 배로 건너가서 먹는 번거로움과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우리는 아침을 생략하였다. 통일 토론회장인 금강산 여관으로 가기 위해 모두들 버스에 올라 기다리는 데 출발이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밖에 나와보니 속초에서 6명이 이곳으로 오지 못한 데 대하여 가만있을 리 없었던 북측에서도, 우리 일행 중 6명을 데리고 가지 않겠노라고 우기고 있어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실랑이 후에 토론회장을 향해 다시 떠났다. 북측이 남측 정부쪽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매듭지었는지….

드디어 금강산 여관으로 가서 하차하였다. 온정각에서 가까웠다. 우리 일행 중 속초에서 못 온 동지들 문제 등으로, 예정보다 두어시간 늦은 오전 11시가 가까워서야 토론회 장소에는 도착했다. 예고한 대로 북측 동포들이 금강산 여관 입구, 길 양쪽에 서서 우리를 환영하였다. 작년에 평양에 갔을 때 만났던 김운봉 목사와 리춘근 목사 등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독일에서, 일본 등지에서 온 낯익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회 상임본부장은 남측의 신창균 선생이 맡았고 준비위원장으로는 북 민화협 회장인 김영대, 남 민화협 상임의장인 이돈명이 각각 맡았다. 남쪽 7대 종단의 대표 김종수(신부)와 북의 민화협 부회장 허학필 두 사람이 함께 사회를 맡았다. 남의 강만길(상지대 총장, 민화협 상임고문) 교수 등과 북의 안경호 조평통부위원장 등이 이 대회를 대표하는 얼굴들로서 주석단 앞줄에 앉았다. 그리고 뒷줄에는 한상열 목사, 박순경 교수, 임기란 회장 등이 자리를 하였다.
토론회장은 금강산 여관 앞마당이었다. '주석단'이라고 하여 준비위원 등 인사들이 호텔의 현관 그늘진 곳에 자리하였고 참석자들은 마당에 놓인 접는의자에 그대로 앉아 여러 시간을 강한 햇볕에 노출된 채로 보내야 했다. 바람이 좀 불기는 했으나 뜨거워서 얼굴이 익고 탔다.


***
모두가 자리를 하였을 때 토론회는 시작되었다. 6.15 한돌 금강산 통일대토론회는 아리랑이 연주되는 가운데 단일기가 게양되었고, 이어 양측 대표들의 간단한 인사말이 있었다. 먼저 북측 준비위원장인 김영대 민화협 회장은 "이번 토론회가 민족통일 위업을 펼쳐나가는 일대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를 표명하였고 이돈명 변호사는 "8.15 광복 기념일을 맞아서는 더 거족적인 통일맞이 대축전을 전개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남측에서 5명, 북측에서 5명, 해외에서 2명, 모두 12명이 준비된 발표문을 그대로 읽었다. 남측의 천영세 의장은 본래 <6.15 선언과 민족자주>란 주제에 대하여 발표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오늘 아침에 보니 <6.15 선언과 민족대단결>로 바뀌어져 있던 경위를 물었다. 전화상으로 받은 메시지여서 통신상 잘못이었다는 대답이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둘러댄 변명이라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 의장은 남북 실무자들이 사전에 토씨까지 다 검토하여 더 이상 바꾸거나 다른 부분을 추가할 수 없다던 것을 민족자주 부분을 더 첨가하여 발표하였다. 북쪽 사람들은 그의 발표에 매우 만족한 표정을 나타냈다.

12시가 넘어서도 발표들이 모두 끝나지 않아 10분간 휴식 시간을 가진 후에 나머지 발표를 모두 마친 후 '공동보도문'이란 것을 읽음으로서 끝냈다. 2시경이었던 것 같다.
이번 금강산 통일토론회는 어떤 주어진 주제를 갖고 발표자들이 발표하고, 또 논찬자가 그 발표들에 대하여 비평하고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토론에 참가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지정된 사람들의 발표만 있었고 참여자들은 전혀 참가할 기회가 없는 그런 토론회였다. '공동보도문' 역시 미리 작성된 것으로 공동성명 같은 것에 해당하였다. 사실은 '결의대회' 같은 것이었고 토론회라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물론 남쪽 준비위에서는 순서 등을 배부했으나 공동준비위에서 자료집이나 안내문 등을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배부하지는 않았다. 남쪽에서의 오랜 관행에 젖어서인지 자료집이 없어 아주 불편하였다.

토론회 후에는 금강산 호텔 2층에서 대연회가 벌어졌다. 호화로운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고 지정된 자리가 있어 거기에 앉아 연회가 벌어졌다. 먼저 인사말과 건배 후, 여러 코스의 음식들이 풍부하게 나와 음식을 즐겼다. 먹기가 거의 끝났을 때 젊은이들이 앉은 식탁에서 유흥순서가 시작되었다. 물론 계획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연회 후에 아래 토론회 장소에 다시 모여 남측 변진홍 교수의 사회로 문화행사가 열렸다. 북쪽에서 연예인들이 주로 노래를 불렀다. 이어서 남측에서도 준비한 가수들의 노래가 있었으나 시간관계로 줄이자는 북쪽의 요구로 두 사람의 노래만을 듣고 마쳤다.


***
이어서 온정각 휴게소로 와서 평양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작년에 본 것과 비슷한 것을 다시 관람하는 것이었으나 볼 때마다 역시 손에 땀을 쥐게하고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옆에서 함께 앉아 관람한 곽태영 선생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 감탄하였다.
저녁시간에 약 1/4 정도의 대표들이 부문별로 각기 남북인사들이 함께 하는 자리를 가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개 온천을 즐기거나 그냥 산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통일부문 모임에 참석하였다. 거기에는 민화협 서기국장, 부소장 등과 젊은 실무자들이 동석하였다. 남쪽에서 간 대한적십자사 간부 등이 참석하였고 민화협 상임의장이라는 배제대 총장이 사회를 자청하여 맡았다. 이들은 전에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00놈이 먹는다고 했던가?

먼저 북측 서기국장이 말문을 열면서 북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6명이 불허되어 오지 못한 데 대하여 강도높게 비판하였다. 나는 통일의 길은 아직 요원하다는 것을 다시 절감하였다. 미국이란 깡패국가의 방해 말고도 오히려 우리 민족내부의 문제도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겉으로는 모두들 6.15 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한다며 6.15 남북공동선언 1돌을 기념하기까지 하고 있으나, 정말은 6.15 선언의 정신과 다른 취지를 가지면서 실상 6.15 정신을 거스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다. 이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진실은 아름다운 미사여구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정직한 실천에 있을 것이다.


***
준비위원장 김영대 씨는 "국가보안법을 근거로 이들을 이적단체로 몰아 남쪽에서 누구는 가고 누구는 못 간다고 하며, 선별적으로 보내는 행위가 과연 공동선언 정신에 맞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공동선언 이행이 가능하겠는가?"(한겨레, 2001. 6.18)라며 강한 불만과 의문을 나타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안경호 북측 조평통 부위원장 역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선 민족대단결에 기초를 두고 자유총연맹과 재향군인회도 다 오게 했다, 조선일보도 받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이번 초청자 중 6명이 불허로 금강산에 못 오게 한 남쪽 당국의 처사에 대하여 강도높은 비판을 하면서 이는 "화합의 정치에 맞지 않는다(한겨레, 2001.6.18)"고 했다.

마지막 날인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금강산 탐색을 나섰다. 구룡폭포 쪽 산행 한 코스뿐이었다. 나는 작년에 가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산에 오르지는 않았고 모란 주차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자연 감상이나 운동보다 민족과 역사의 문제였던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시간, 김정숙 휴양관 앞 운동장에서 간단한, 그러나 감동적인 송별의식이 있었다. 양측 대표들의 간단한 인사말이 있었는데, 이돈명 남측 대표는 8.15 때 북쪽 동포들을 남쪽으로 초청할 것을 제안했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박수를 해달라는 이 대표의 돌출적인 말에 다들 열렬히 화답하였다. 이후, 다 함께 손잡고 흔들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손 흔들어 인사하는 북녘 동포들을 뒤로 한 채 우리가 탄 버스는 떠나왔다.


***
우리는 속초로 돌아오는 설봉호에, 예정시간보다 늦게 모두 승선하였다. 배가 항구를 떠나면서 고성항과 금강산이 멀어져 갔다. 나는 이내 골치아픈 세상 시름과 민족문제를 잠시 잊고 민주노총 친구들과 갑판에 올라가서 주로 이북 술을 마시며 떠드는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이내 나는 곯아떨어져 1층 객실에서 잠들었다.
잠을 깨니 속초항이었다. 밤중에 하선, 서울에 돌아오니 새벽 1시반이 넘고 있었다. 중앙청 앞에 내렸을 때 도착시간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통협 식구들 10여명이 모두 마중을 나왔다. 나는 그들의 자동차를 타고 구기동 집으로 돌아와 2박 3일간의 금강산 통일토론회 여행을 모두 끝마친 셈이었다.
주제어
평화
태그
이라크 미군 아프가니스탄 대테러전쟁 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