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복지와 우리 운동의 그늘
무엇을 위한 생산적 복지인가?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함께 '생산적 복지'를 국정운영기조로 각종 정책을 시행해온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법과 제도적 틀을 갖추었다'고 자평한지 얼마 안되어 별 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함을, 지난 7월 19일 '중산층 육성 및 서민생활 안정대책'이라는 새로울 것이 별로 없는 대책을 또 다시 내놓음으로써 자인하고 있다. 그 대책의 골간내용은 '일자리 및 고용안정창출 대책' '사회보장체계 강화' '주거생활안정 및 삶의 질 향상' '세부담의 형평성 제고 및 재산형성' 등이 그것이다. 이는 거꾸로 뒤집으면 3년 반 동안의 '국민의 정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부'의 집권기간 동안 일자리 및 고용안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실업 및 고용불안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으며, 사회보장체계는 제자리 걸음이며, 주거생활은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삶의 질은 향상되기는커녕 악화되어 왔으며, 각종 조세정책에도 불구하고 세부담은 여전히 불평등하다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상황을 보면서, 원인을 우리 사회에서 사회복지 정책을 펼만한 인프라가 덜 형성되었다거나 아니면 사회복지에 대한 확고한 정책의지가 없어서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 일면적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부의 '생산적 복지'라는 정책 그 자체에 있다. 일례로 제정 당시 '사회복지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라는 찬사까지 받았고 저소득층에게 일종의 '복음'이 될 것이라는 기대까지 받았던 '국민기초생활법'의 현실은 자뭇 비참하다. 실제 수급권자는 이전의 '생활보호법'하의 대상자 154만명보다 151만명으로 3만명이 줄었고,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 세대 등 경제위기 이후 한시적 보호를 받았던 계층들이 그 대상에서 탈락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법 제정 당시부터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법은 그 기본원칙을 '수급자가 자신의 생활의 유지·향상을 위하여 그 소득·재산·근로능력 등을 활용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것을 전제로 이를 보충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급권자 선정기준'을 정하고 이를 그대로 적용함에 따라, 법의 이름과는 다르게 '기초생활보장'은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건강보험재정파탄을 본인부담금 인상 등 노동자·민중의 부담 증가와 장기적으로는 민간의료보험 도입이라는 시장질서를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그렇다. 연금수급자의 연령을 높이고, 연금보험료를 올리면서 그것의 주식투자비율을 확대하는 조치도 그렇고, '경기가 살아나고 구조조정이 잘 이루어져야 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과 정책도 모두 정책실현과정의 잘못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결과가 아니라 애초 정책이 그걸 내포하고 있고, 애초에 그걸 지향하고 있다. 앞서 얘기했던 '중산층 육성 및 서민생활안정대책'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한 일간신문이 '중산·서민층의 생활이 안정돼야만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다. 정부는 외환위기 후 생산적 복지정책을 꾸준히 펴왔으나 경기의 장기 침체화로 소득분배구조 개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은 정확하게 현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가 '구조조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아울러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복지전략의 본질
사실 앞에서 언급한 김대중 정부의 최근 대책은 어떤 면에서 보면 '과거회귀적'이다. 그런 한에서 실패 또한 예견되어 있다. IMF를 졸업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한국경제는 여전히 침체와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 및 유럽 등 세계경제위기의 경향에 따라 좌우되긴 하겠지만, 올 하반기와 내년 초에 또 다시 1997년의 위기를 재현하리란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의 얕은 지식에서 언급하면 이처럼 경제위기가 예견되고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유효수요창출대책'과 '경기부양책'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며, 위의 대책은 그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는 1920-30년대에 경제공황을 탈출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시되었던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과 유사한 것이며, 그것이 이후 사회전반으로까지 확대되어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이들 자본축적위기에 직면하여 '복지국가모델'에 대한 공격으로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인데, 그 전략과 정책시행의 결과가 또 다시 '위기'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위기의 극복을 자신 스스로 공격했던 '전략과 정책'(과거의 것)으로 돌파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김대중 정부가 생산적 복지정책의 일환이라 하지만 그 본질은 '케인즈주의적 복지정책'에 불과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생산적 복지'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유효할 수 있다.
서구 유럽에서는 기존 제도와 법적인 장치, 프로그램이 후퇴하거나 해체되는 것을 골자로 사회적 영역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를 '복지국가의 위기'라 칭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복지)전략은 노동시장 유연화, 국가(공공)부문의 축소 기제하에서 노동시장을 새롭게 재편하고자 하는 '노동력 관리전략'이자, 사회적 영역에서 시장메카니즘과 '개인의 자유'(결국은 가진자들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시장확대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workfare'는 이를 이데올로기·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개념이다.
정부 또는 정부관련단체가 정한 근로관련 의무사항에 동의할 때에만 국가로부터 소득이전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생산적 복지이다. 이러한 생산적 복지는 한편으로 노동시장에 보다 적합한 노동시장의 풀(pool)형성을 위해 사회복지를 매개하는 것이다.(계급적대와 사회복지. 사회복지와 노동 2호. p24)
이에 입각하여 생산성 향상에 의한 이윤율 증대를 위해, 노동자들이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노사타협주의에 입각한 노사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엄격한 자격요건에 의해 대상을 선정하는 선별주의적인 국민최저선 개념에 의존하여 사회복지 지출을 감소시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서구 복지국가가 기존 프로그램(법·제도)이 해체되거나 약화되는 경험을 겪는 것과는 달리, '현대적 사회보장체계'(복지국가의 법·제도적 프로그램)가 갖추어지지 않는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사회전략이 전개되고 있다. 즉, 봉건적·전근대적 요소가 잔존하는 가운데, 이를 '효율화·합리화'라는 명목하에 '근대적 제도화'의 외양을 띠고 있다. 건강보험의 출범, 의약분업 실시, 국민연금의 확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실시 등의 조치가 그것이다. 정책 형식은 '근대화와 개혁'의 너울을 쓰고 있으나 그 내용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성격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모델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전의 잔여적 복지모델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한데, 1970년대 이후 독점자본의 기본적 축적양식은 총자본의 안정적 착취구조를 가능케 할 복지프로그램의 제도화를 요구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노동력 재생산을 가능케 할 사회적 조치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왔고 1987년 이후 대중적으로 성장한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은 이를 강제하는 또 다른 힘이었다. 1980년대부터 진행되어왔던 의료보험통합일원화를 통한 보험급여 확대운동은 대표적인 것이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중반의 보건의료와 사회복지 관련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투쟁이자 자신의 사회적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우선 넘어야 할 산
그러면 지금같은 시기와 정세에서 노동자·민중의 복지와 생활권, 교육·의료 등 사회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어떠한 전망을 가져야 하는가? 노동조합과 당의 결합으로 자본과의 타협적 모델인 복지국가’를 형성했던 유럽은 이미 오래 전에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상황을 겪고 있다. 그리고 자본은 이윤축적의 지속적 확장을 방해하는 일차적 원인을 노동조합운동과 복지국가에 두고, 이에 대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감행하고 있다. 이에 유럽노동운동과 사회민주당 등은 ‘복지국가의 유효성’을 내세우며 이를 ‘수호’하려고 하지만, 힘겨운 방어에 그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본을 위한 ‘노동시장정책’의 영역으로 사회복지를 편입시켜가고 있다. 현 시기 '노동시간 단축'은 바로 이러한 지형 위에 놓여있다.‘시장의 힘’을 내세운 자본의 공격에 ‘다시 (복지)국가로’라는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비록 우리사회의 상황에서 서구 유럽의 '복지체제'가 부러운 것이 현실인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김대중 정부가 구조조정이나 '유효수효창출대책'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헛된 희망과 꿈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현실가능한 경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95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영역에서 펼쳐졌던 사회복지·교육·의료 영역에서는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나고 있는 전략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그림자를 벗겨내는 것, 그것이 노동자·민중의 삶과 생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우리 운동이 맞닥뜨린, 우선 넘어야 할 산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것은 이미 낡았는데, 이를 대체할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언명은 지금 우리운동의 진전을 가로막거나, 내딛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유효적절한 문구이다.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함께 '생산적 복지'를 국정운영기조로 각종 정책을 시행해온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법과 제도적 틀을 갖추었다'고 자평한지 얼마 안되어 별 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함을, 지난 7월 19일 '중산층 육성 및 서민생활 안정대책'이라는 새로울 것이 별로 없는 대책을 또 다시 내놓음으로써 자인하고 있다. 그 대책의 골간내용은 '일자리 및 고용안정창출 대책' '사회보장체계 강화' '주거생활안정 및 삶의 질 향상' '세부담의 형평성 제고 및 재산형성' 등이 그것이다. 이는 거꾸로 뒤집으면 3년 반 동안의 '국민의 정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부'의 집권기간 동안 일자리 및 고용안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실업 및 고용불안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으며, 사회보장체계는 제자리 걸음이며, 주거생활은 지속적으로 불안정하고 삶의 질은 향상되기는커녕 악화되어 왔으며, 각종 조세정책에도 불구하고 세부담은 여전히 불평등하다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상황을 보면서, 원인을 우리 사회에서 사회복지 정책을 펼만한 인프라가 덜 형성되었다거나 아니면 사회복지에 대한 확고한 정책의지가 없어서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 일면적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부의 '생산적 복지'라는 정책 그 자체에 있다. 일례로 제정 당시 '사회복지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라는 찬사까지 받았고 저소득층에게 일종의 '복음'이 될 것이라는 기대까지 받았던 '국민기초생활법'의 현실은 자뭇 비참하다. 실제 수급권자는 이전의 '생활보호법'하의 대상자 154만명보다 151만명으로 3만명이 줄었고,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 세대 등 경제위기 이후 한시적 보호를 받았던 계층들이 그 대상에서 탈락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법 제정 당시부터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법은 그 기본원칙을 '수급자가 자신의 생활의 유지·향상을 위하여 그 소득·재산·근로능력 등을 활용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것을 전제로 이를 보충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급권자 선정기준'을 정하고 이를 그대로 적용함에 따라, 법의 이름과는 다르게 '기초생활보장'은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건강보험재정파탄을 본인부담금 인상 등 노동자·민중의 부담 증가와 장기적으로는 민간의료보험 도입이라는 시장질서를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그렇다. 연금수급자의 연령을 높이고, 연금보험료를 올리면서 그것의 주식투자비율을 확대하는 조치도 그렇고, '경기가 살아나고 구조조정이 잘 이루어져야 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과 정책도 모두 정책실현과정의 잘못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결과가 아니라 애초 정책이 그걸 내포하고 있고, 애초에 그걸 지향하고 있다. 앞서 얘기했던 '중산층 육성 및 서민생활안정대책'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한 일간신문이 '중산·서민층의 생활이 안정돼야만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다. 정부는 외환위기 후 생산적 복지정책을 꾸준히 펴왔으나 경기의 장기 침체화로 소득분배구조 개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은 정확하게 현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가 '구조조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아울러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복지전략의 본질
사실 앞에서 언급한 김대중 정부의 최근 대책은 어떤 면에서 보면 '과거회귀적'이다. 그런 한에서 실패 또한 예견되어 있다. IMF를 졸업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한국경제는 여전히 침체와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 및 유럽 등 세계경제위기의 경향에 따라 좌우되긴 하겠지만, 올 하반기와 내년 초에 또 다시 1997년의 위기를 재현하리란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의 얕은 지식에서 언급하면 이처럼 경제위기가 예견되고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유효수요창출대책'과 '경기부양책'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며, 위의 대책은 그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는 1920-30년대에 경제공황을 탈출하기 위한 대책으로 제시되었던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과 유사한 것이며, 그것이 이후 사회전반으로까지 확대되어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이들 자본축적위기에 직면하여 '복지국가모델'에 대한 공격으로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인데, 그 전략과 정책시행의 결과가 또 다시 '위기'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 위기의 극복을 자신 스스로 공격했던 '전략과 정책'(과거의 것)으로 돌파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김대중 정부가 생산적 복지정책의 일환이라 하지만 그 본질은 '케인즈주의적 복지정책'에 불과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생산적 복지'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유효할 수 있다.
서구 유럽에서는 기존 제도와 법적인 장치, 프로그램이 후퇴하거나 해체되는 것을 골자로 사회적 영역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를 '복지국가의 위기'라 칭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복지)전략은 노동시장 유연화, 국가(공공)부문의 축소 기제하에서 노동시장을 새롭게 재편하고자 하는 '노동력 관리전략'이자, 사회적 영역에서 시장메카니즘과 '개인의 자유'(결국은 가진자들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시장확대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workfare'는 이를 이데올로기·정치적으로 대표하는 개념이다.
정부 또는 정부관련단체가 정한 근로관련 의무사항에 동의할 때에만 국가로부터 소득이전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생산적 복지이다. 이러한 생산적 복지는 한편으로 노동시장에 보다 적합한 노동시장의 풀(pool)형성을 위해 사회복지를 매개하는 것이다.(계급적대와 사회복지. 사회복지와 노동 2호. p24)
이에 입각하여 생산성 향상에 의한 이윤율 증대를 위해, 노동자들이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노사타협주의에 입각한 노사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엄격한 자격요건에 의해 대상을 선정하는 선별주의적인 국민최저선 개념에 의존하여 사회복지 지출을 감소시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서구 복지국가가 기존 프로그램(법·제도)이 해체되거나 약화되는 경험을 겪는 것과는 달리, '현대적 사회보장체계'(복지국가의 법·제도적 프로그램)가 갖추어지지 않는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사회전략이 전개되고 있다. 즉, 봉건적·전근대적 요소가 잔존하는 가운데, 이를 '효율화·합리화'라는 명목하에 '근대적 제도화'의 외양을 띠고 있다. 건강보험의 출범, 의약분업 실시, 국민연금의 확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실시 등의 조치가 그것이다. 정책 형식은 '근대화와 개혁'의 너울을 쓰고 있으나 그 내용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성격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모델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전의 잔여적 복지모델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한데, 1970년대 이후 독점자본의 기본적 축적양식은 총자본의 안정적 착취구조를 가능케 할 복지프로그램의 제도화를 요구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노동력 재생산을 가능케 할 사회적 조치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왔고 1987년 이후 대중적으로 성장한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은 이를 강제하는 또 다른 힘이었다. 1980년대부터 진행되어왔던 의료보험통합일원화를 통한 보험급여 확대운동은 대표적인 것이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중반의 보건의료와 사회복지 관련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투쟁이자 자신의 사회적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우선 넘어야 할 산
그러면 지금같은 시기와 정세에서 노동자·민중의 복지와 생활권, 교육·의료 등 사회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어떠한 전망을 가져야 하는가? 노동조합과 당의 결합으로 자본과의 타협적 모델인 복지국가’를 형성했던 유럽은 이미 오래 전에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상황을 겪고 있다. 그리고 자본은 이윤축적의 지속적 확장을 방해하는 일차적 원인을 노동조합운동과 복지국가에 두고, 이에 대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감행하고 있다. 이에 유럽노동운동과 사회민주당 등은 ‘복지국가의 유효성’을 내세우며 이를 ‘수호’하려고 하지만, 힘겨운 방어에 그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본을 위한 ‘노동시장정책’의 영역으로 사회복지를 편입시켜가고 있다. 현 시기 '노동시간 단축'은 바로 이러한 지형 위에 놓여있다.‘시장의 힘’을 내세운 자본의 공격에 ‘다시 (복지)국가로’라는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비록 우리사회의 상황에서 서구 유럽의 '복지체제'가 부러운 것이 현실인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김대중 정부가 구조조정이나 '유효수효창출대책'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헛된 희망과 꿈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현실가능한 경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95년 이후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영역에서 펼쳐졌던 사회복지·교육·의료 영역에서는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나고 있는 전략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그림자를 벗겨내는 것, 그것이 노동자·민중의 삶과 생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우리 운동이 맞닥뜨린, 우선 넘어야 할 산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것은 이미 낡았는데, 이를 대체할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언명은 지금 우리운동의 진전을 가로막거나, 내딛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유효적절한 문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