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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9.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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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100%, 무노조 음모에 맞서 끝까지 싸워 이길 것이다!

임은옥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시그네틱스지회
폭력 앞에 두려움없이 분노하고 저항하는 조합원들

"새카맣게 밀려들어왔어요. 요즘은 길 가다가도 까만옷 입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져요."라고 말하는 조합원도 있다. 수백명의 용역깡패들이 새카맣게 밀려들어왔다. 참혹한 8월 9일, 천막에서 아이와 같이자던 엄마도 끌려나왔다. 아이의 손을 놓친 채.
우린 밤에 길 가다가 조금만 험상궂은 남자들 몇 명만 마주쳐도 불안하고 겁나는 여성들이다. 그러나, 나와 내 동료, 그리고 내 일터를 유린하는 용역깡패들 앞에서는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가 앞섰다. 너나 없이 가녀린 몸 가리지 않고,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앞을 가로막은 용역깡패들에게 부딪쳤다. 화장실로 끌고가서 바닥에 눕힌 채 옷을 벗기고 숨긴 카메라를 빼앗는 용역깡패에게 "난 너의 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라고 외치던 조합원은 지금도 그때 생각을 돌이키는 것만으로 몸서리치면서도 반드시 그 놈들을 찾아서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물만 마셔가며 싸웠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를 일으키면서. 그리고 다음날, 서로가 놀라워하고 반가워했듯이, 아픈 몸을 이끌고 빠짐없이 다시 모였다.


열심히 일해서 소박하게 사는 게 이토록 힘겨운가

우리의 요구는 정말 소박했다. 영풍그룹이 헐값에 회사를 사고, 투자계획도 없이 우리를 짜르려는 안산으로 내몰고 있기에, 우리의 요구도 당연했다. "안산으로 못 간다, 우리 피땀으로 세우고 살려낸 파주공장에 가서 일하겠다!"
"공장이전 자체를 반대하고 싸웠어야지. 서울공장 못 판다, 우린 못나간다 하면서"라고 말하는 동지들도 많았다. "어차피 빼앗길 장비, 고이 내버려두지 말걸" 하는 억울함도 들었다. 그러나, 우린 너무 미련하게 착했던 것일까?
"서울공장 팔아 회사 빚 갚고 살아나면, 파주까지 불편해도 통근버스 타고다니면서 계속 일해야지." "그래도 어떻게 장비에 흠집을 낼 수 있어. 나와 함께 청춘을 보낸 분신같은 것인데…." 이런 생각에 100일 가까운 철야농성 기간 동안 생산라인은 고이 보살폈다. 그러나, 그 용역깡패와 폭력경찰들은 이 모든 소박한 바램과 여린 마음을 무참히 짓밟았다.


하청 100%, 무노조 기업을 위한 음모!

10년 넘게 일한 노동자에게 70여만원 쥐여주고 10년, 20년 된 장비로 세계 반도체 조립업계에서 품질 1등을 다툴 정도로 일 잘하던 노동자들을 이렇게 배은망덕하게 내쫓은 영풍자본가의 의도는 분명했다. "서울공장의 노동조합을 없애고, 정리해고하겠다! 그래서 생산직 100%가 하청인 파주공장만 노조 없이 운영하겠다!"
노동조합에 입수된 회사측 문건은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이미 계획된 치밀한 작전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1996년 파주공장을 세우면서, 파주공장의 생산직은 100% 하청용역으로 만들었다. 서울공장에서 노조탄압에 앞장서던 관리자를 하청사장으로 앉혀서.
"미친 개"라고 불리는 하청 사장놈은 20~21살짜리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애들 다루듯 취급하면서 일 시키고, 아무 때나 뽑고, 또 괴롭혀서 내보내는 일들을 되풀이했다. 그들이 꾸민 작전이, 회사 팔아 빚 갚는다는 핑계로 원래 약속인 파주이전을 뒤엎고 빈껍데기 안산공장을 만든 것이다.


물러설 곳 없는 싸움, 우린 하루하루 강해졌다!!

발각된 회사측 정리해고 시나리오문건으로 우리의 의심이 더욱 확실해졌는데,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싸움에 지면 돌아갈 곳이 없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다! 조합원들은 예전 패배의 상처로 조금은 머뭇거리다가 하루하루 강해졌다.
5월 11일 단체교섭을 하던 날, 그 시간에 라인에서 장비를 빼내려했고, 우린 그 날부터 장비를 지키기 위해 교대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밤 10시에 근무가 끝나면 간단히 요기하고, 손전등 들고 공장을 순찰하고, 생산라인의 문을 점검했다. 아침에 일찍 집으로 가면 밥하고 아이들 학교나 유치원 보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출근해 일하고….
6월 25일 월급날, 91명이나 되는 조합원이 임금을 가압류당해 30여만원을 받았다. 회사는 불안하고 두려워서 포기할 줄 알았겠지만, 우린 오히려 분노해서 싸웠다.
7월 2일 일방적인 전면휴업에 맞서 전조합원이 함께 철야농성에 돌입하고, 공장을 지켜냈다. 무더위와 모기와 싸웠다. 때로는 폭우 때문에 농성천막이 무너지고 농성하던 그 날, 집은 물바다가 되어 동료들이 가서 물 퍼내고 이불 빨아주면서 그렇게 견뎌왔다.
아니,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들 걱정에 애태운 것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어린 아이들 키우는 엄마들은 "아이들 걱정만 아니면 이 싸움, 1년이고 10년이고 하겠어"라며 늘 마음아파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이 싸움을 이해해주지 않아서, 어린 아이들을 시골에 맡기고 조합원 편지쓰는 시간에 아이 생각하다 엉엉 울어버린 조합원도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사고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 조합원은, 전화 너머에서 울면서 엄마찾는 아이를 달래며 혼자 눈물짓기도 했다. 남편이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 어린 딸아이들만 재우면서 마음졸인 엄마도 있다. 남편들이 조금씩 농성장을 찾고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드디어 아이를 데려와서 밤에 데리고 자기도 했다. 낮에는 아이들끼리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노는 모습을 보면서 조합원들은 힘을 얻었다. 7월 23일 일방적인 안산발령에도 전면파업으로 맞서 흔들림 없이 싸웠다. 7월 말 법원에서 회사 바램대로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판결이 떨어지고, 용역깡패와 공권력 투입이 임박하면서 긴장은 더해갔다. 그러나, "꼭 막아내고 버티겠다. 생존권이니까"하고 각오했다. 남편들이 함께 철야농성하려고 가져온 텐트가 하나둘 공장 안에 늘어갔다.


"아내의 신념과 동료들을 지켜내기 위해 함께 싸운다"

텐트치고 철야농성을 함께 하던 남편들은 폭력침탈의 그 날도 무참히 끌려나왔고 하루종일 같이 싸웠다. 8월 20일 영풍그룹 본사 앞 전면투쟁 선포식에서 한 남편이 나와서 말했다.
"처음에는 말렸다. 그러다가 다칠까봐 걱정했다. 지금은 아내의 신념과 자존심, 그리고 내 아내가 소중히 하는 아내의 동료들을 지켜주기 위해 함께 싸운다. 내 아내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과 나 자신까지 무시하는 것이다. 내 소중한 이웃까지 무시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다. 이미 시작한 싸움, 이길 때까지 도와주고 함께 할 거다!"
이제 가족들도 조합원 못지않은 의지와 행동을 보여준다. 그것은 동료애이자, 내 아이들은 이런 억울한 일 겪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부모의 참사랑이기도 하다.


연대의 소중함과 위력

조합원들은 상급단체를 민주노총으로 바꾸고, 금속노조 가입도 결의했다. 농성 이후 여러 동지들의 지지방문과 연대투쟁을 경험하면서 연대의 힘을 깨달아갔다. 특히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 린나이 비정규직노조 동지들과 연대하면서 반갑고도 비극적인 현실을 절감했다. 한쪽은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딛고 정규직화 쟁취를 위해 싸우고, 한쪽은 정규직을 없애고 전원 비정규직으로 만들려는 음모에 맞서 싸우고…. 어찌 함께 싸우지 않고 이겨낼 수 있겠는가! 노동자를 적으로 여기는 김대중 정권에게 함께 맞서 싸우겠노라 다짐해갔다.


민주노조 사수, 파주일터 쟁취!
대학생까지 용역깡패 동원해 폭력만행을 지시한 영풍회장을 끌어내고, 끝까지 싸워갈 것이다. 조합원들은 짧게 끝날 수 없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영풍이 이미 노조 몇 개는 깨먹은 놈들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 아니다. 포기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오늘도 산업은행으로 간다. 안산공장에 가서 불안에 떠는 비겁한 자들과 달리 당당하게 투쟁한다.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고 함께 사는 길, 그 길로 거침없이 간다. 동지들의 연대와 격려 하나하나를 투쟁의 힘으로 꼭 받아안고 갈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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