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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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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모순의 결정판, 한국일보에 맞서

이정호 | 전국언론노조 정책부장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 진영의 투쟁을 담는 사회진보연대에서, 한국일보 노조의 투쟁에 대한 청탁을 받고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였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반대투쟁, 2000년 신선대·우암지부 투쟁, 동광주병원 투쟁, 2001년 한통계약직 투쟁 등 많은 싸움을 글로 옮겨봤지만 언론사 노조의 투쟁을 글로 옮기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좀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기업경영의 시각으로 본 한국일보

지난 7월14일 한국일보사의 2000년 회계감사보고서가 발표됐다. 한국일보사의 의뢰를 받은 신한회계법인은 이 보고서에서 현재 한국일보의 경영상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IMF 금융위기에 따른 이자비용의 증가와 영업부진 등으로 계속기업으로서의 존속능력에 중대한 의문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있다." 기업으로부터 돈 받고 회계보고서를 작성해주는 회계법인의 총평치고는 살벌하다.
대우그룹의 경영이 곤두박질치던 지난 1998년 대우와 계약을 맺은 삼일회계법인은 회계감사보고서를 엉터리로 제시해 큰 돈을 챙겼다가 들통나 곤혹을 치렀다. 우리나라에서 기업회계를 해주고 돈을 받는 회계업인들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큰 부실은 축소하고 큰 경영실책도 경기여파 때문이라며, 변명해주기 급급하다. 한국일보의 감사보고서를 낸 신한회계법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 회계법인이 활자로 된 공식총평에서 "계속기업으로서의 존속능력에 중대한 의문"이라는 심각한 표현을 쓸 정도라면 한국일보사의 경영상태는 안 봐도 뻔하다.
최근 한국일보가 노조의 한달 넘는 총파업과 중앙언론사 초유의 직장폐쇄에 이어, 노조가 언론사 최초로 사주일가를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고발한 침각한 내용을 지켜보면서 언론계 내부에는 이런 말이 유행하고 있다. "한국일보가 망하지 않는 건 한국사회 최대의 불가사의다"


한국사회 모순의 전형

자본주의 첨병인 기업회계를 기준으로 한국일보사 노동조합의 투쟁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노조 투쟁의 기초가 된 2000년 말 한국일보사의 경영상태는 대체로 이렇다. 총자본금 150억원에 자산총계 3,691억원, 부채는 4,984억원으로 1,293억원의 자본잠식 상태다. 자본금 대비 부채비율은 3,333%다. 쉽게 말해 150억 갖고 신문사 만들어 현재는 초기 자본금 다 까먹고 빚이 5,000억원이란 소리다. 일반기업에서 '부실과 견실'을 나누는 기준이 부채율 400%선이다. 김대중 정권은 한때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을 보고 400% 이내로 부채율을 끌어내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안 그러면 정리하겠다고 엄포했다.
그런데 한국일보는 부채율 1천%가 넘는 상태로 내내 기업을 경영해왔고 그 상태에서도 은행에서 새로 빚을 내는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김대중식 언론개혁의 한계와 속셈은 여기에 있다. 1997년 이후 한국일보는 이미 파산상태였다. 5천억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도 하루 1억원 이상 적자가 나는 회사에 계속 대출이 이뤄지는,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계속돼왔다. 정권의 비호 없인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일보는 총부채 4,984억원 중 4,323억원이 유동부채이며 이 중 3,271억원이 단기간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이다. 한해 매출액이 2,652억원인 회사가 단기차입금만 3,271억원이라면 어떤 CEO에게 물어도 이 회사는 이미 무너진 회사라는 답변이다. 그런데도 지난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한국일보사는 부도의 위기를 금융권에서 추가대출로 메웠다.


자본주의적 모순의 결정판

한국일보사는 1954년 창간이후 한번도 4대 중앙일간지에서 이탈해 본적이 없다. 1988∼95년간의 주요 일간지 재무제표를 분석해보면 한국일보는 매출액 등 여러 지표에서 전국일간지 중 부동의 4위를 지켰다. 1990년엔 동아일보보다 매출액이 많아 한때 3위를 넘보기도 했다. 5∼6위인 서울과 경향신문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4위 자리를 지켰다. 그런 한국일보가 지금 노조가 나서서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극한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처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일보 경영진들은 창간이후 47년 동안 자본주의 팽창모순을 확대재생산해 결국 자연 붕괴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일보는 언론통폐합의 암흑기가 가고 언론시장에 본격경쟁이 도입된 1988년 자율화를 계기로 무한증면 경쟁에 불을 붙였다. 시장 분석과 검토 없이 진행된 무리한 출혈경쟁이 오늘날 한국일보의 몰락을 가져왔다.
한국일보는 1987년까지 하루 12면이면 충분했던 일간지 지면을 1989년 최초 휴일판을 발행하는 등, 증면을 선도해 1990년 7월에 24면으로 정확히 두 배로 늘린 장본인이다. 신문의 질이나 광고시장 확대추이에 대한 분석, 정보량 증가에 대한 어떠한 데이터도 없이 마구잡이식 확장에 눈이 멀어 본사 외에 서울 평창동과 경기 성남시, 경남 창원시에 윤전공장을 신설해 1991년 8월엔 일간지 사상 최초로 전국동시 인쇄를 단행했고 그 해 12월 역시 최초로 조·석간 동시 신문을 발행했다. 시장분석 없이 진행한 팽창은 광고수주율 증가세를 휠씬 능가했으며 결국 빚을 내, 설비를 확장한 효과도 없이 부채부담만 안게됐다. 1980년대까지 견실하게 운영돼온 한 신문사가 무능한 경영진의 판단착오로 현재 빚더미 위에 앉았다. 그러나 당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했던 실무진들은 현재 사내의 중책이 됐고, 정책 추진의 정점에는 현 한국일보사 장재국 회장이 있다.


한국일보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이 아니다

한국일보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있는 기업이 아니다. 한국일보는 중세 봉건영주의 지배하에 있는 장원경제의 전형이다. 한국일보의 주식 100%는 장재국회장을 비롯, 그의 가족 26명이 전유하고 있다. 주주 중엔 10살짜리 초등학생도 있고 죽은 주주가 낳은 서자와 둘째 부인도 포함돼 있다. 한국일보의 관계사 중엔 27살짜리 대표이사가 있고 20살짜리 현직 공익근무요원이 사장인 곳도 있다. 물론 한국일보사엔 채용된 전문경영인이 있다. 그 대표격인 한국일보사 대표이사 장명수 사장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여성사장이란 명예도 지녔다. 그러나 장 사장은 노조 파업이 진행된 지난 7∼8월 동안 '사원들에게 알리는 글' '직장폐쇄 공고' 등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본인의 이름으로 했다. 그러나 교섭 석상에서 장 사장은 이들 공고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명의를 붙인 채 나붙었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한국일보 사내 모든 의사결정은 봉건영주에 다름아닌 장씨 일가가 독점하고 있다. 주주들은 225억원의 돈을 단기대여금이란 형태로 회사에 빌려가 갚지 않고 있다.
이 돈이면 지난해 한국일보사의 영업손실을 모두 갚을 수 있다. 주주들은 빌려간 돈을 갚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에서 빌린 돈으로 다시 회사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소유지분을 늘리기도 했다. 또 빌려간 돈의 이자를 갚지 않으려고 회사 설비투자비를 실제보다 높게 책정해 17억원이란 돈을 갚은 것처럼 속이기도 했다.
1997년엔 회사에 근무하지도 않은 주주 일가의 친인척들을 직원으로 일한 것으로 위장해, 회사에서 버젓이 4∼5억원의 월급까지 타내 해외체류비에 쓰기도 했다. 이중엔 최대 주주의 76살 할머니의 해외체류비를 타내기 위해 그 할머니를 국제부 기자로 근무한 것처럼 속였다. 또 주주 일가의 해외여행 경비 4억원도 회사 직원들이 해외출장비를 받아간 것으로 속였다.
같은기간 회사직원들은 IMF 때문에 상여금 삭감 등으로 월급봉투가 쪼그라든 것은 물론이고 3백명 넘는 직원이 구조조정 당해 실업자가 됐다. 이같은 시기에 회계장부의 변칙처리를 이 정도로 하는 회사라면 한국사회에서 한국일보는 자본주의 꽃이라는 주식회사라기보다는 구멍가게에 가깝다.

1996년 이후 경쟁언론사와 한국일보

전국 주요 신문사들은 1996년 이후 매우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한화그룹에서 독립한 경향은 1997년까지 최악의 재무구조였던 것을 일거에 해소하고 1999년엔 65억의 흑자를 기록했다. 문화일보도 현대에서 독립해 경향과 같은 전철을 착실히 밟고 있다. 조선일보는 기간 중 단 한번도 적자가 없었고 IMF한파가 몰아친 1997∼98년에도 10억 가까운 흑자를 내, 경영 측면에서 볼 때 최정상의 신문기업을 일궈냈다. 중앙일보는 1998년 IMF한파 속에 대규모 시설투자를 단행해 적자를 봤지만 바로 다음해에 이를 대부분 만회했다. 동아일보도 1996∼2000년 내내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대한매일신보도 정부 소유라는 한계 때문에 1999년까지 방만하게 운영해 왔으나 2000년 들어 1백억원대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일보는 1996∼99년까지 매년 적자였고 그 액수도 1997년 1백80억원, 5백억원, 3백60억원 등 천문학적인 적자를 냈다. 아래 표처럼 1999년부터는 부채 때문에 증면경쟁에서도 조선, 중앙, 동아에 밀리기 시작했다. 반면 무리한 부풀리기보다는 견실 경영쪽을 택한 경향, 문화, 한겨레 등은 「조·중·동」과는 달리 오히려 4∼12면이 적은 지면으로 광고단가를 현실화하고 신문의 질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결국 한국일보는 「조·중·동」처럼 확장경영을 할 수도 없고 나머지 주요일간지처럼 견실경영쪽으로 선회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꼴이 됐다.
시장 점유율이 1% 미만인 국민일보와 세계일보를 제외하고, 주요일간지 중 부채비율이 높아 자본잠식 상태인 회사는 한국과 경향 뿐이다. 그나마 경향은 부채총액이 1천억원대인데 반해 한국일보의 부채총액은 5천억원대에 이른다.


독자 31만2천명, 인쇄는 100만부

해마다 주요일간지의 시장점유율에 대한 각종 조사가 행해진다. 그러나 조사기관마다 편차가 많아 객관적 진실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한국광고주협회가 실시하는 「인쇄매체 수용자조사」는 신문시장에서 가장 공신력을 인정받는 국내 최대규모의 신문 및 잡지구독자 조사다.
이번 조사는 한국광고주협회가 지난해 12월부터 지난 2월 3일까지 테일러넬슨소프레스에 의뢰해 전국 1만가구를 대상으로 확률비례추출법(PPS)을 이용한 직접면접조사를 통해 이뤄졌다. 5백샘플 정도인 정치여론조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표본 수다. 조사대상자 연령은 만 18세 이상부터 70세 미만이며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구간에 ±1.0%다.
한국일보의 경영 현주소를 알아보기 위해 이 조사를 인용해 보면, 우선 가장 중요한 「가구구독률 순위」는 ①조선일보 1,369(13.7%) ②중앙일보 1,320(13.2%) ③동아일보 1,009(10.1%) ④한국일보 237(2.4%) ⑤경향신문 196(2.0%) ⑥매일경제 177(1.8%) ⑦한겨레신문 157(1.6%) ⑧국민일보 146(1.5%) 순으로 나타났다.
조사결과 전국 1500만 가구 중, 신문을 구독하는 집은 769만5천가구(51.3%)다. 이 중 한국일보의 구독율은 2.4%로 약 31만2천가구가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그러나 인쇄부수는 1일 100만부에 달해 투입지와 판촉지를 빼고도 불필요한 무가지는 약 50만부에 달한다. 50만부를 감축발행할 경우, 연간 제조원가를 950여억원 정도 절약할 수 있다. 1998년 문화일보의 경우, 100만부를 인쇄하다 재정압박을 이기지 못해 30만부로 대폭 인쇄부수를 줄여 적자를 만회했다. 한국일보가 100만부를 인쇄한다고 광고주가 100만부에 해당하는 광고를 주는 게 아니다.

노조 투쟁의 목표는 한국일보 정상화

한국일보 노조는 지난 1996년부터 꾸준히 회사 경영을 감시하고 견제해왔다. 한국일보가 방만하고 무능한 경영의 결과로 언론 본연의 기능을 잃은 채 표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책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노조의 이같은 우려와 문제제기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급기야 1999년 500억원의 적자와 4300억원의 부채 앞에 사실상 정상경영을 포기해야 했다. 그동안 거액의 해외도박설, 미스코리아 대회 관련비리, 27살짜리 최대주주 장본인의 병역비리 등으로 무능부실경영의 표본을 보여온 한국일보사 경영진은 이제 한국일보 정상화를 위한 어떠한 정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노조가 나선 것이다. 노조는 지난해 5월 회사의 분리공작에 휘말려 250여명에 이르는 편집국 기자 대부분이 회사의 연봉제 시행에 동의하고, 임금 50%를 인상받은 채 노조를 탈퇴하는 아픔을 겪었다. 노조는 표면적으로는 2001년 임단협 투쟁을 내걸었지만 투쟁을 통해 부실경영의 전적인 책임자인 장재국 회장 등 장씨일가의 경영퇴진을 통한 한국일보 새 판짜기가 전략적 목표였다. 그래서 주요요구사항 중에 '주주들이 빌려간 단기대여금 내역공개 및 조속한 상환'이란 카드를 내걸었다.
노조는 지난 7월 6일 12시간 시한부파업, 11일 24시간 시한부파업에 이어 20일부터 무기한 전면파업에 돌입해 지난 20일까지 31일동안 전면파업을 벌였다. 이는 한국에 근대언론이 도입된 지난 1895년 독립신문 창간이후 최초의 윤전기를 멈추는 파업이었다. 1974년 동아투위, 1980년 언론통폐합 등의 시련기에도 한 번도 감행하지 못한 강력한 투쟁이다. 한국일보는 지난 1992년 일주일간의 파업을 벌였으나 신문은 정상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편집국 기자 모두가 정상근무에 임한, 이번 한국일보 파업은 제작국 중심의 노조가 4개 윤전공장에서 모두 철수해 성남공장 하나만 비조합원과 대체근로로 가동하는 바람에 하루 40면에서 32면으로 감면제작, 판갈이 회수 축소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에서 결배 사태가 속출했다. 한국일보 조합원들이 인쇄해온 관계사인 일간스포츠의 경우 10만부 이상 판매망이 붕괴됐다.
노조는 지난 20일 직장폐쇄 철회와 조합원 신분보장(징계, 해고 없음)을 약속받고, 파업을 풀고 매일 교섭을 벌이고 있다. 파업에 따른 한국일보 및 관계사들의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2주간의 휴전 이후 교섭이 완료되지 않으면 다시 파업에 들어간다.
언론사 내부에서 경영부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적은 많다. 그러나 대부분 문제를 제기한 세력이 회사에서 쫓겨나거나 겨우 몇몇 회사에서 막후교섭을 통해 자체 해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국일보처럼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나서, 파업이란 대중적인 원칙적인 투쟁을 통해 문제를 제기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러기에 한국일보 노조의 이번 투쟁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 투쟁은 한국일보의 존폐를 가름할 뿐 아니라 한국언론 전체의 反노동자성을 붕괴시킬 유일한 교두보다. PSSP
주제어
노동 민중생존권
태그
노동법 노동권 전임자 복수노조 개정 교섭창구 단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