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에서 조선노동당까지[5]-북한의 권력구조 형성과 유일체제의 확립
김일성의 입국과 북한의 정치지형
1945년 9월, 김일성은 그의 동지들과 함께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일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김일성의 존재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그의 화려한 항일유격투쟁 경력과 탈분파적인 깨끗한 이미지는 국내 운동세력들에게 원형적인 콤플렉스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더불어 단 한 번도 직접 국내에서 일제와 맞서본 적이 없었다는 점은 그의 태생적인 한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일성은 '소련이 가장 신뢰하는 장래의 북한 지도자 후보'였다. 따라서 소련군의 진주와 더불어 김일성의 입국은 북한에서의 정치지형 재편과 본격적인 권력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해방 후 북한 정치세력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민족해방운동,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각자의 활동을 기반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통칭 '국내파' 라고 부르는 이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김일성 지도자 옹립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오기섭, 정달헌, 이주하, 최용달 등 함남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서울 중앙 지지'를 공식화하고, 북한에서 박헌영을 대신하여 김일성과 대결하였다.
한편 일제시기 기독교세력과 자본가세력이 강했던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북한의 대표적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민주당은 한 때 30만 당원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입국 이후 김일성에게 부과된 정치적 과제는 이상의 세력들과 일면 대립, 일면 협력하면서 북한사회의 개혁을 이끌어내고 종국에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물론 문제는 북한만이 아니었다. 全한반도를 시야에 넣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 '서울 중앙'에서 시선을 뗄 수도 없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결성 - '평양중심주의'의 기원
1945년 10월 13일, 북한지역의 공산주의자 70여명은 서북5도당원 및 열성자연합대회를 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하 '북분국')의 결성을 결정하였다. 서울 중앙과 별개의 독자적인 당 기구로서 북분국의 결성과정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예비회의에서 김일성그룹과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그 결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반면, 이주하 등 함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은 서울 중앙의 존재를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남북간 지역적 특수성이라는 명분을 내건 결성론자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물론 그 기저에서는 북한에 하루 빨리 당 기구를 설치하고 싶어했던 소련의 의도도 작용하였다. 서울 중앙은 북분국 결성 열흘 후인 10월 23일 박헌영의 명의로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사후승인이란 형식적 조치만으로는 당 중앙의 권위를 세울 수는 없었으며, 북분국의 결성은 당 중앙의 승인 없이 이루어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최초의 정치적 행동이 된 셈이었다. 북분국의 결성 자체는 당 중앙의 권위를 '무시'한 일이었지만, 분국 내의 사정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김일성그룹은 소수파에 불과했으며, 다수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을 그들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었다. 이 점은 분국 결성대회에서 "박헌영 동지 만세"가 제일 먼저 외쳐진 일, 북분국이 당 중앙의 직영기관임을 명시한 결정서가 채택된 일 등으로 반영되었다.
북분국은 결성과 더불어 이른바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의 강화, 소작료 3·7제 투쟁을 통한 농민 각성과 지주 고립화 등을 추진하였다. 이와 동시에 청년, 농민, 노동, 여성 등 제분야의 외곽조직들을 결성하여 공산당의 '대중적 강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1945년 말에 이르러서는 특히 통일전선 분야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었다. 이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조선민주당은 일부 지도자들이 월남했으며, 당수 조만식은 소련군과의 갈등으로 연금조치에 들어갔다.
북분국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12월 17일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마침내 분분국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북한에는 연안독립동맹 계열의 지도자들과 허가이 등 주요한 소련계 한인들도 입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의 책임비서 취임은 더욱 복잡해진 북한의 정치지형 내에서 그의 우위를 확고하게 해주는 조치였다. 이와 더불어 1946년 초 김일성은 자신의 최측근인, 조만식의 오산학교 시절 제자 최용건을 조선민주당 당수로 이적시켜 민주당 하부조직의 우경화 방지 및 그 당원들의 공산당 흡수를 추진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임시 '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결성을 주도하는 한편 3월부터는 마침내 토지개혁의 실시에 돌입하였다.
이렇듯 이른바 북한의 '민주개혁'과 김일성의 권력장악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1946년 4월 북분국 선전국장 김창만의 보고에서 보이는 "김일성, 박헌영, 무정 동지 만세"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박헌영의 지위는 부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공식문서에서 북분국 대신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쓰이는 등, 서울 중앙과의 형식적 관계도 단절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45년 12월 귀국한 연안독립동맹의 지도자들은 독립동맹의 틀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른바 '진보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대중단체로서의 독립동맹의 성격상 그 성원들 모두가 공산당으로 흡수되기 힘들었고, 이미 김일성의 지위가 확고해진 북분국 내에서 그들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처지를 반영한 조치였다.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지지, 대기업 국유화, 토지개혁 등 북분국과 보조를 같이 하는 정책들을 추진하던 독립동맹은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으로 개칭하였다.
독립동맹의 조선신민당으로의 개편은 북한 정치지형 내에서 독자적인 지분 확보가 필요했던 독립동맹측과 북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중간파 지식인, 중농, 소자산가 등 중간세력을 좌파의 틀 속에 묶어두고자 했던 공산당 및 소련군의 이해관계가 합치한 결과였다. 특히 1945년말 이후 공산당과 조선민주당의 통일전선이 불가능해진 것은 조선신민당의 결성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북조선노동당의 결성과 박헌영·남로당의 입북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은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하 '북로당')을 결성하였다. 이미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었던 양당의 합당은 남한에서 미소공위의 휴회, 좌우합작운동의 전개, 조공 탄압 등 공산주의운동의 수세적 전환이 시작된 1946년 중반 본격적인 정치일정에 돌입하였다. 이는 먼저 그 동안 미소를 묶어두고 있었던 '반파시즘연합'의 와해가 가시화되면서, 북한 좌파진영의 공고한 단결이 더욱 필요해졌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북로당 결성을 전후해 있었던 일련의 일들은 남북한 공산주의세력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우선 북조선공산당은 서울 중앙의 방침과 전혀 관계없이 합당을 결행하여 대중정당화함으로써, 서울 중앙과의 공식·비공식적인 관계를 절연하였다.
이 무렵 '신전술' 채택을 논의하기 위해 북행했던 박헌영은 사실상 김일성의 '내락'을 얻어 그 실행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북로당 결성에 따라 3당합당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따랐다는 것은 그 것을 보고 배웠다는 뜻과 더불어 북로당에 '맞서기' 위한 남한 좌파통일정당의 필요성이 대두했다는 이중적인 의미이다. 3당합당이 최종적으로 실현된 것은 북로당 결성 석달 뒤, 박헌영일행의 북행 한달여 뒤인 46년 11월이었다.
}} 이 시점에서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은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로당의 결성을 전후한 시기에 김일성의 당내 기반은 아직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양당합당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북로당의 모든 간부들은 양당 출신이 반분했다. 공산당의 경우 이미 김일성그룹 외에 '국내파', '소련파'들이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지분은 그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외양에 불과한 것이었다. 김일성의 동지들은 대부분 당 대신 군사·보안기관에 진출하여 김일성 옹립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김일성 자신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모든 '민주개혁'을 주도하면서 '대중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렇게 김일성을 향한 구심력의 작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심지어 북로당 결성대회장에서 당 위원장으로 선임된 김두봉마저 "우리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다는 것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북로당의 결성 직후 1946년 10월 박헌영 일행이 입북하였다. 박헌영의 입북과 더불어 남로당도 결성되었다. 이제 다시 북한에는 형식상 두 개의 당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로당의 입지는 매우 좁은 것이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나가는 북한의 정권수립과정에 대해 남로당이 관여할 수 있는 바는 거의 없었다. 북한에서 남로당에게 허락된 분야, 아니 그들이 북한에서 생존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대남혁명사업 뿐이었다. 이를 위해 남로당은 1947년 1월 해주에 대남연락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 좌파정치가 불가능한 이상, 북한에서 지도하는 대남사업의 유의미성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47년 3월 미 국무부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했으며, 1947년 7월에는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었다. 공위 결렬 직후 발생한 여운형 피살사건은 공산당 뿐만 아니라 남한의 범좌파세력에 대한 공개적인 위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로당 지도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해주 연락소와 그 산하 게릴라양성학교인 강동 정치학원에서 보내면서 대남사업에 몰두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문제아'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들러리'일 수밖에 없었던 남로당의 숙명이었다.
1948년 3월, 북로당은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UN조선임시위원단이 남한 단독총선거 결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연석회의 개최 제의 등이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북한으로서도 그 동안 추진해오던 '민주개혁'의 성과를 토대로 정부수립을 구상해야 할 시점이었다. 당대회에서는 향후 권력구조의 변화를 시사하는 중요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 주제는 그 동안의 당사업에서의 오류에 대한 비판과 종파문제였다.
비판의 표적은 함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과거 북분국 결성에 대한 반대와 친일파를 비롯한 잘못된 인물의 기용에 집중되었다. 물론 이들에 대한 비판 중 일부는 근거있는 것이었다. 일제시기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이들은 해외 출신들과는 달리 자기지역에 일정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세상이 바뀐 후" 그만큼 "챙겨주어야 할" 지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 점은 앞서 지적한 잘못된 인사기용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 '북분국 결성반대=종파주의'라는 결론으로 치달으면서 종국에는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로당에 대한 간접공격이 되었다는 점이다. "(종파주의자들은) 북조선노동당에도 신용을 얻어야 하지만 남조선노동당에도 한몫 있으니까, 충실한 체하고 남북노동당간에 이간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김일성의 진술은 1948년 3월 당대회에서의 종파주의 비판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일성으로서는 1948년 3월의 시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남·북로당간의 합당에 대비하여 남로당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남·북로당의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으며, 박헌영과 남로당이 김일성 중심의 권력 형성에 도전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였다. 그러나 남로당을 넘어 민족해방운동·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박헌영의 권위는 여전히 일정 정도 유지되고 있었고, 남로당 산하의 강동정치학원은 김일성그룹이 장악한 정규군 외에 북한 내의 유일한 군사조직으로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존재였다.
}}
조선노동당의 결성과 '49년 6월 질서'의 형성
1948년 9월 9일, 남한에 이어 북한에도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내각구성 역시 외형적으로는 정치연합의 성격을 띠어 각 정치세력들이 비교적 고르게 안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김일성의 측근인 김책, 최용건, 정준택이 각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상, 국가계획위원장에 포진되었다. 이에 비해 남로당은 박헌영이 부수상 겸 외무상에 임명된 것을 제외하면, 2인자인 이승엽조차 한직에 그치는 등 명백하게 내각에서 소외되었다. 더불어 소련계 한인들은 한 명도 포함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내각 구성은 김일성그룹의 확고한 정치적 우위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뒤따른 당 개편이나 남·북로당의 합당에서 소련파나 남로당의 목소리가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먼저 이러한 현상은 1948년 9월 북로당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 반영되었다. 이 회의에서 소련파 중에서는 당무를 전담하는 중앙위 부위원장에 허가이가 임명되고 각 도당 위원장의 다수를 차지하는 등 북로당을 장악하였다. 이는 상대적으로 김일성의 측근들이 내각으로 빠져나갔다는 점, 남·북로당 합당에 대비하여 박헌영계열을 견제하기 위한 김일성그룹의 사전포석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소련파의 당 장악은 후일 통합 조선노동당의 결성과정에서 김일성의 당내 위상을 약화시키고, 그 만큼 각 정치세력들이 '파벌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북로당의 개편과 더불어 남·북로당의 합당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일단 형식논리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전국적 정부'가 수립된 이상, 지역적 분리를 전제로 한 남·북로당의 분리정립은 명분을 잃은 것이었다. 남·북로당은 해를 넘겨 1949년 6월 공식적으로 합당하였다. 그 형식은 당對당 통합이었지만, 내용은 북로당에 의한 남로당의 흡수였다. 1949년 시점에서 북한의 남로당 지도부는 그저 몇명, 몇십명에 불과했으며 이주하, 김삼룡이 지도하던 남한의 조직은 거의 궤멸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 조선노동당의 지도부 인선은 북로당 절대우위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당 위원장이 된 김일성을 제외하고 당 지도부를 구성한 당 부위원장, 비서, 정치위원, 조직위원 등 총 20여명 가운데 김일성의 확실한 동료는 정치위원 김책 뿐이었다. 반면 두 명의 당 부위원장에는 박헌영과 허가이가, 세 명의 당비서에는 허가이, 이승엽, 김삼룡 등이 임명되는 등 소련파의 지위 유지와 남로당 계열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는 내각에서 소외된 남로당 계열의 지분 요구에 따른 현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북로당 시기보다 김일성의 당내 위상은 오히려 약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구심화되었던 당내 정치를 원심화시킬 가능성을 높여놓았다. 결국 김일성은 자신의 헤게모니가 확실하게 관철되는 군이나 내각과는 달리 당내에서는 경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김일성의 당내 위상 약화, 소련파와 남로당계열의 부상으로 요약되는 '1949년 6월 질서'는 조선노동당 내의 권력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과 '반종파투쟁' - '김일성유일체제'로의 길
1950년 6월, 북한은 무력통일을 목적으로 한 한국전쟁을 발발시켰다. 전쟁은 통일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패전으로 인한 당과 국가의 붕괴라는 위기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모험이었다. 특히 전쟁 전반을 통해 '기회'의 상실 속에서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에 전쟁을 주도한 김일성으로서는, 한국전쟁이 해방후 수년간의 혁명과 권력투쟁을 통해 올라선 지위를 하루아침에 잃을 지도 모르는 크나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 시련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유일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전쟁중 세 차례에 걸쳐 자신과 권력을 분점하고 있던 경쟁자들을 숙청함으로써 가능하였다.
한국전쟁 초기 잠깐 동안 우위를 점했던 북한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패배국면에 접어들었다. 연합군의 반격 북진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부대들은 속속 낙오하였다. 이러한 패배국면은 10월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진정국면에 들어설 수 있었다. 더불어 중공당 중앙의 지시에 의해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가 작전권을 행사하는 조중연합사의 설치가 논의되었다. 작전권 이양은 중대한 문제였지만 김일성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12월 21일 그 동안의 전쟁과정을 총화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 중앙위 제3차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전쟁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당 간부나 군 지휘관들을 비판하고 책벌을 가하였다. 특히 비판의 표적은 전쟁 발발 당시 제2군단장이었던 무정이었다. 무정은 이미 퇴각을 조직화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철직당한 상태였지만, 김일성은 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는 조중연합사령관으로 내정된 팽덕회와 무정의 특별한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중국혁명 당시의 전우로서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 따라서 김일성으로서는 독립동맹 출신으로 군내에서 김일성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무정을 작전권을 이양하기 전에 재기불능의 상태로 내몰고자 했던 것이다.
중공군에 작전권을 이양한 김일성은 1951년 초부터는 자연스럽게 그 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당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 동안 당무를 전담해온 허가이와의 갈등을 낳았다. 갈등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중 당증을 버린 당원들에 대한 처리문제에서 폭발하였다. 실무적이고 소련식의 엄격한 당규율을 중시한 허가이는 당증을 버린 당원들에 대해 예외없는 책벌을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수십만의 당원들이 출당되는 등, 문제점이 노출되자 김일성은 1951년 11월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허가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결국 허가이는 당 제1비서에서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좌천되었다. 물론 이는 완전한 숙청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소련의 후원에 힘입어 조선노동당을 장악해온 허가이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그는 1953년 7월 자살하였다. 자살후 허가이는 "반당종파분자, 변절자, 혁명의 배신자"로 사후 공개비판을 받았다. 특히 허가이의 숙청은 당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소련파의 몰락을 예고한 것으로 조선노동당 내의 파벌균형, '49년 6월 질서' 해체의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의 당내 정치를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남로당 계열이었다. 남로당 계열에 대한 공격은 다른 파벌에 대한 공격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실제 김일성과 박헌영은 한국전쟁 발발의 두 주역이었다. 전쟁을 통한 全한반도에서의 공산주의국가 건설이 북한 정부의 책임자인 김일성의 당연한 목표라고 한다면 '남조선해방'의 꿈은 북한에서 남로당계열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꿈은 사라지고 남로당계열의 몰락은 필연적인 수순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마지막 시한폭탄으로 남은 것은 실질적인 패전으로 귀결된 전쟁의 책임문제였다. 과연 누가 전쟁 발발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단순한 전쟁 수행의 오류 추궁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답은 뻔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에 얼마나 가까운가의 여부를 떠나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당내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12월 개최된 당 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암시되었다. 김일성은 명백히 남로당계열을 겨냥하여 "당내의 자유주의적 경향들과 종파주의 잔재들과의 투쟁문제"를 거론하였다. 김일성의 경고는 곧 현실화되었다. 1953년 초 이승엽, 조일명, 임화, 이강국 등 남로당계열의 핵심인물 12명이 반국가, 반혁명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곧이어 박헌영도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1953년 8월 북한 최고재판소 특별군사법정은 이승엽 등 10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소련의 태도를 감안하여 한참 뒤로 미루어져 1955년 12월에 가서야 열렸다. 결과는 물론 사형이었다.
박헌영에 대한 사형집행은 1956년 7월에 가서 이루어졌다. 1950년 3월 서울에서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된 이주하, 김삼룡이 전쟁 발발과 더불어 즉결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이 낳은 남로당 계열의 비극적 운명은 이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주하, 김삼룡의 죽음은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영광스러운 것일 터이다. 그러나 박헌영과 그의 북한의 동료들은 공산주의자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죄목으로 그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의 측근들 중 이승엽의 경우는 끈질기게 실제 간첩혐의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박헌영을 비롯한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재판에서 구체적인 행위에 관한 단 한 건의 물증도 제시되지 않은 채 '정치적인 살인'을 당하였다.
남로당계열에 대한 숙청을 통해 김일성그룹은 이른바 '반종파투쟁'을 완성하고, 전쟁책임문제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다년간 진행되어온 북한 권력구조의 형성을 마무리지었다. '김일성유일체제'가 마침내 수립된 것이었다.
에필로그
김일성 유일체제의 수립과정은 일면 남한에서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이 전쟁 기간을 통해 지배블록을 공고히 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정권이나 권력집단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한국전쟁을 통해 비로소 남과 북은 비로소 두 개의 서로 다른 '민족국가'가 되었으며, 남과 북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국민'과 '공산주의 인민'으로 거듭 탄생하였다. 이 과정은 하나의 희생제의를 필요로 하였다. 국제적으로 틀지워진 분단 한반도의 진로, 그것을 거부한 남로당은 제의에 동원된 희생양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전개된 공산주의운동이 분단국가, 분단민족 형성이라는 역사적 국면에서 맞이한 최후의 운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불우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알고 있다. 착취의 폐절,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는 당이 국가권력으로 전화되었을 때 행한 야만과 폭력, 역사적 공산주의운동이 남겨놓은 이 엄청난 딜레마와 역사적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PSSP
1945년 9월, 김일성은 그의 동지들과 함께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일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김일성의 존재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그의 화려한 항일유격투쟁 경력과 탈분파적인 깨끗한 이미지는 국내 운동세력들에게 원형적인 콤플렉스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더불어 단 한 번도 직접 국내에서 일제와 맞서본 적이 없었다는 점은 그의 태생적인 한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일성은 '소련이 가장 신뢰하는 장래의 북한 지도자 후보'였다. 따라서 소련군의 진주와 더불어 김일성의 입국은 북한에서의 정치지형 재편과 본격적인 권력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해방 후 북한 정치세력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민족해방운동,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각자의 활동을 기반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통칭 '국내파' 라고 부르는 이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김일성 지도자 옹립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오기섭, 정달헌, 이주하, 최용달 등 함남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서울 중앙 지지'를 공식화하고, 북한에서 박헌영을 대신하여 김일성과 대결하였다.
한편 일제시기 기독교세력과 자본가세력이 강했던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북한의 대표적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민주당은 한 때 30만 당원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입국 이후 김일성에게 부과된 정치적 과제는 이상의 세력들과 일면 대립, 일면 협력하면서 북한사회의 개혁을 이끌어내고 종국에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물론 문제는 북한만이 아니었다. 全한반도를 시야에 넣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 '서울 중앙'에서 시선을 뗄 수도 없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결성 - '평양중심주의'의 기원
1945년 10월 13일, 북한지역의 공산주의자 70여명은 서북5도당원 및 열성자연합대회를 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하 '북분국')의 결성을 결정하였다. 서울 중앙과 별개의 독자적인 당 기구로서 북분국의 결성과정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예비회의에서 김일성그룹과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그 결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반면, 이주하 등 함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은 서울 중앙의 존재를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남북간 지역적 특수성이라는 명분을 내건 결성론자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물론 그 기저에서는 북한에 하루 빨리 당 기구를 설치하고 싶어했던 소련의 의도도 작용하였다. 서울 중앙은 북분국 결성 열흘 후인 10월 23일 박헌영의 명의로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사후승인이란 형식적 조치만으로는 당 중앙의 권위를 세울 수는 없었으며, 북분국의 결성은 당 중앙의 승인 없이 이루어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최초의 정치적 행동이 된 셈이었다. 북분국의 결성 자체는 당 중앙의 권위를 '무시'한 일이었지만, 분국 내의 사정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김일성그룹은 소수파에 불과했으며, 다수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박헌영을 그들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었다. 이 점은 분국 결성대회에서 "박헌영 동지 만세"가 제일 먼저 외쳐진 일, 북분국이 당 중앙의 직영기관임을 명시한 결정서가 채택된 일 등으로 반영되었다.
북분국은 결성과 더불어 이른바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을 위한 통일전선의 강화, 소작료 3·7제 투쟁을 통한 농민 각성과 지주 고립화 등을 추진하였다. 이와 동시에 청년, 농민, 노동, 여성 등 제분야의 외곽조직들을 결성하여 공산당의 '대중적 강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1945년 말에 이르러서는 특히 통일전선 분야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었다. 이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조선민주당은 일부 지도자들이 월남했으며, 당수 조만식은 소련군과의 갈등으로 연금조치에 들어갔다.
북분국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12월 17일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마침내 분분국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북한에는 연안독립동맹 계열의 지도자들과 허가이 등 주요한 소련계 한인들도 입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의 책임비서 취임은 더욱 복잡해진 북한의 정치지형 내에서 그의 우위를 확고하게 해주는 조치였다. 이와 더불어 1946년 초 김일성은 자신의 최측근인, 조만식의 오산학교 시절 제자 최용건을 조선민주당 당수로 이적시켜 민주당 하부조직의 우경화 방지 및 그 당원들의 공산당 흡수를 추진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임시 '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결성을 주도하는 한편 3월부터는 마침내 토지개혁의 실시에 돌입하였다.
이렇듯 이른바 북한의 '민주개혁'과 김일성의 권력장악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1946년 4월 북분국 선전국장 김창만의 보고에서 보이는 "김일성, 박헌영, 무정 동지 만세"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박헌영의 지위는 부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공식문서에서 북분국 대신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쓰이는 등, 서울 중앙과의 형식적 관계도 단절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45년 12월 귀국한 연안독립동맹의 지도자들은 독립동맹의 틀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른바 '진보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대중단체로서의 독립동맹의 성격상 그 성원들 모두가 공산당으로 흡수되기 힘들었고, 이미 김일성의 지위가 확고해진 북분국 내에서 그들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처지를 반영한 조치였다.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지지, 대기업 국유화, 토지개혁 등 북분국과 보조를 같이 하는 정책들을 추진하던 독립동맹은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으로 개칭하였다.
독립동맹의 조선신민당으로의 개편은 북한 정치지형 내에서 독자적인 지분 확보가 필요했던 독립동맹측과 북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중간파 지식인, 중농, 소자산가 등 중간세력을 좌파의 틀 속에 묶어두고자 했던 공산당 및 소련군의 이해관계가 합치한 결과였다. 특히 1945년말 이후 공산당과 조선민주당의 통일전선이 불가능해진 것은 조선신민당의 결성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북조선노동당의 결성과 박헌영·남로당의 입북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은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하 '북로당')을 결성하였다. 이미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었던 양당의 합당은 남한에서 미소공위의 휴회, 좌우합작운동의 전개, 조공 탄압 등 공산주의운동의 수세적 전환이 시작된 1946년 중반 본격적인 정치일정에 돌입하였다. 이는 먼저 그 동안 미소를 묶어두고 있었던 '반파시즘연합'의 와해가 가시화되면서, 북한 좌파진영의 공고한 단결이 더욱 필요해졌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북로당 결성을 전후해 있었던 일련의 일들은 남북한 공산주의세력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우선 북조선공산당은 서울 중앙의 방침과 전혀 관계없이 합당을 결행하여 대중정당화함으로써, 서울 중앙과의 공식·비공식적인 관계를 절연하였다.
이 무렵 '신전술' 채택을 논의하기 위해 북행했던 박헌영은 사실상 김일성의 '내락'을 얻어 그 실행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북로당 결성에 따라 3당합당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따랐다는 것은 그 것을 보고 배웠다는 뜻과 더불어 북로당에 '맞서기' 위한 남한 좌파통일정당의 필요성이 대두했다는 이중적인 의미이다. 3당합당이 최종적으로 실현된 것은 북로당 결성 석달 뒤, 박헌영일행의 북행 한달여 뒤인 46년 11월이었다.
}} 이 시점에서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은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로당의 결성을 전후한 시기에 김일성의 당내 기반은 아직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양당합당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북로당의 모든 간부들은 양당 출신이 반분했다. 공산당의 경우 이미 김일성그룹 외에 '국내파', '소련파'들이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지분은 그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외양에 불과한 것이었다. 김일성의 동지들은 대부분 당 대신 군사·보안기관에 진출하여 김일성 옹립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김일성 자신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모든 '민주개혁'을 주도하면서 '대중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렇게 김일성을 향한 구심력의 작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심지어 북로당 결성대회장에서 당 위원장으로 선임된 김두봉마저 "우리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다는 것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북로당의 결성 직후 1946년 10월 박헌영 일행이 입북하였다. 박헌영의 입북과 더불어 남로당도 결성되었다. 이제 다시 북한에는 형식상 두 개의 당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로당의 입지는 매우 좁은 것이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나가는 북한의 정권수립과정에 대해 남로당이 관여할 수 있는 바는 거의 없었다. 북한에서 남로당에게 허락된 분야, 아니 그들이 북한에서 생존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대남혁명사업 뿐이었다. 이를 위해 남로당은 1947년 1월 해주에 대남연락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 좌파정치가 불가능한 이상, 북한에서 지도하는 대남사업의 유의미성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47년 3월 미 국무부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했으며, 1947년 7월에는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었다. 공위 결렬 직후 발생한 여운형 피살사건은 공산당 뿐만 아니라 남한의 범좌파세력에 대한 공개적인 위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로당 지도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해주 연락소와 그 산하 게릴라양성학교인 강동 정치학원에서 보내면서 대남사업에 몰두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문제아'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들러리'일 수밖에 없었던 남로당의 숙명이었다.
1948년 3월, 북로당은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UN조선임시위원단이 남한 단독총선거 결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연석회의 개최 제의 등이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북한으로서도 그 동안 추진해오던 '민주개혁'의 성과를 토대로 정부수립을 구상해야 할 시점이었다. 당대회에서는 향후 권력구조의 변화를 시사하는 중요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 주제는 그 동안의 당사업에서의 오류에 대한 비판과 종파문제였다.
비판의 표적은 함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과거 북분국 결성에 대한 반대와 친일파를 비롯한 잘못된 인물의 기용에 집중되었다. 물론 이들에 대한 비판 중 일부는 근거있는 것이었다. 일제시기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이들은 해외 출신들과는 달리 자기지역에 일정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세상이 바뀐 후" 그만큼 "챙겨주어야 할" 지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 점은 앞서 지적한 잘못된 인사기용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 '북분국 결성반대=종파주의'라는 결론으로 치달으면서 종국에는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로당에 대한 간접공격이 되었다는 점이다. "(종파주의자들은) 북조선노동당에도 신용을 얻어야 하지만 남조선노동당에도 한몫 있으니까, 충실한 체하고 남북노동당간에 이간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김일성의 진술은 1948년 3월 당대회에서의 종파주의 비판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일성으로서는 1948년 3월의 시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남·북로당간의 합당에 대비하여 남로당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남·북로당의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으며, 박헌영과 남로당이 김일성 중심의 권력 형성에 도전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였다. 그러나 남로당을 넘어 민족해방운동·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박헌영의 권위는 여전히 일정 정도 유지되고 있었고, 남로당 산하의 강동정치학원은 김일성그룹이 장악한 정규군 외에 북한 내의 유일한 군사조직으로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존재였다.
}}
조선노동당의 결성과 '49년 6월 질서'의 형성
1948년 9월 9일, 남한에 이어 북한에도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내각구성 역시 외형적으로는 정치연합의 성격을 띠어 각 정치세력들이 비교적 고르게 안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김일성의 측근인 김책, 최용건, 정준택이 각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상, 국가계획위원장에 포진되었다. 이에 비해 남로당은 박헌영이 부수상 겸 외무상에 임명된 것을 제외하면, 2인자인 이승엽조차 한직에 그치는 등 명백하게 내각에서 소외되었다. 더불어 소련계 한인들은 한 명도 포함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내각 구성은 김일성그룹의 확고한 정치적 우위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뒤따른 당 개편이나 남·북로당의 합당에서 소련파나 남로당의 목소리가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먼저 이러한 현상은 1948년 9월 북로당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 반영되었다. 이 회의에서 소련파 중에서는 당무를 전담하는 중앙위 부위원장에 허가이가 임명되고 각 도당 위원장의 다수를 차지하는 등 북로당을 장악하였다. 이는 상대적으로 김일성의 측근들이 내각으로 빠져나갔다는 점, 남·북로당 합당에 대비하여 박헌영계열을 견제하기 위한 김일성그룹의 사전포석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소련파의 당 장악은 후일 통합 조선노동당의 결성과정에서 김일성의 당내 위상을 약화시키고, 그 만큼 각 정치세력들이 '파벌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북로당의 개편과 더불어 남·북로당의 합당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일단 형식논리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전국적 정부'가 수립된 이상, 지역적 분리를 전제로 한 남·북로당의 분리정립은 명분을 잃은 것이었다. 남·북로당은 해를 넘겨 1949년 6월 공식적으로 합당하였다. 그 형식은 당對당 통합이었지만, 내용은 북로당에 의한 남로당의 흡수였다. 1949년 시점에서 북한의 남로당 지도부는 그저 몇명, 몇십명에 불과했으며 이주하, 김삼룡이 지도하던 남한의 조직은 거의 궤멸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 조선노동당의 지도부 인선은 북로당 절대우위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당 위원장이 된 김일성을 제외하고 당 지도부를 구성한 당 부위원장, 비서, 정치위원, 조직위원 등 총 20여명 가운데 김일성의 확실한 동료는 정치위원 김책 뿐이었다. 반면 두 명의 당 부위원장에는 박헌영과 허가이가, 세 명의 당비서에는 허가이, 이승엽, 김삼룡 등이 임명되는 등 소련파의 지위 유지와 남로당 계열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는 내각에서 소외된 남로당 계열의 지분 요구에 따른 현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북로당 시기보다 김일성의 당내 위상은 오히려 약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구심화되었던 당내 정치를 원심화시킬 가능성을 높여놓았다. 결국 김일성은 자신의 헤게모니가 확실하게 관철되는 군이나 내각과는 달리 당내에서는 경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김일성의 당내 위상 약화, 소련파와 남로당계열의 부상으로 요약되는 '1949년 6월 질서'는 조선노동당 내의 권력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과 '반종파투쟁' - '김일성유일체제'로의 길
1950년 6월, 북한은 무력통일을 목적으로 한 한국전쟁을 발발시켰다. 전쟁은 통일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패전으로 인한 당과 국가의 붕괴라는 위기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모험이었다. 특히 전쟁 전반을 통해 '기회'의 상실 속에서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에 전쟁을 주도한 김일성으로서는, 한국전쟁이 해방후 수년간의 혁명과 권력투쟁을 통해 올라선 지위를 하루아침에 잃을 지도 모르는 크나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 시련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유일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전쟁중 세 차례에 걸쳐 자신과 권력을 분점하고 있던 경쟁자들을 숙청함으로써 가능하였다.
한국전쟁 초기 잠깐 동안 우위를 점했던 북한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패배국면에 접어들었다. 연합군의 반격 북진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부대들은 속속 낙오하였다. 이러한 패배국면은 10월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진정국면에 들어설 수 있었다. 더불어 중공당 중앙의 지시에 의해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가 작전권을 행사하는 조중연합사의 설치가 논의되었다. 작전권 이양은 중대한 문제였지만 김일성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12월 21일 그 동안의 전쟁과정을 총화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 중앙위 제3차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전쟁과정에서 오류를 범한 당 간부나 군 지휘관들을 비판하고 책벌을 가하였다. 특히 비판의 표적은 전쟁 발발 당시 제2군단장이었던 무정이었다. 무정은 이미 퇴각을 조직화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철직당한 상태였지만, 김일성은 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는 조중연합사령관으로 내정된 팽덕회와 무정의 특별한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중국혁명 당시의 전우로서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 따라서 김일성으로서는 독립동맹 출신으로 군내에서 김일성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무정을 작전권을 이양하기 전에 재기불능의 상태로 내몰고자 했던 것이다.
중공군에 작전권을 이양한 김일성은 1951년 초부터는 자연스럽게 그 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당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 동안 당무를 전담해온 허가이와의 갈등을 낳았다. 갈등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중 당증을 버린 당원들에 대한 처리문제에서 폭발하였다. 실무적이고 소련식의 엄격한 당규율을 중시한 허가이는 당증을 버린 당원들에 대해 예외없는 책벌을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수십만의 당원들이 출당되는 등, 문제점이 노출되자 김일성은 1951년 11월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허가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결국 허가이는 당 제1비서에서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좌천되었다. 물론 이는 완전한 숙청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소련의 후원에 힘입어 조선노동당을 장악해온 허가이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그는 1953년 7월 자살하였다. 자살후 허가이는 "반당종파분자, 변절자, 혁명의 배신자"로 사후 공개비판을 받았다. 특히 허가이의 숙청은 당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소련파의 몰락을 예고한 것으로 조선노동당 내의 파벌균형, '49년 6월 질서' 해체의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의 당내 정치를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남로당 계열이었다. 남로당 계열에 대한 공격은 다른 파벌에 대한 공격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실제 김일성과 박헌영은 한국전쟁 발발의 두 주역이었다. 전쟁을 통한 全한반도에서의 공산주의국가 건설이 북한 정부의 책임자인 김일성의 당연한 목표라고 한다면 '남조선해방'의 꿈은 북한에서 남로당계열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꿈은 사라지고 남로당계열의 몰락은 필연적인 수순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마지막 시한폭탄으로 남은 것은 실질적인 패전으로 귀결된 전쟁의 책임문제였다. 과연 누가 전쟁 발발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단순한 전쟁 수행의 오류 추궁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답은 뻔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에 얼마나 가까운가의 여부를 떠나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당내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12월 개최된 당 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암시되었다. 김일성은 명백히 남로당계열을 겨냥하여 "당내의 자유주의적 경향들과 종파주의 잔재들과의 투쟁문제"를 거론하였다. 김일성의 경고는 곧 현실화되었다. 1953년 초 이승엽, 조일명, 임화, 이강국 등 남로당계열의 핵심인물 12명이 반국가, 반혁명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곧이어 박헌영도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1953년 8월 북한 최고재판소 특별군사법정은 이승엽 등 10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소련의 태도를 감안하여 한참 뒤로 미루어져 1955년 12월에 가서야 열렸다. 결과는 물론 사형이었다.
박헌영에 대한 사형집행은 1956년 7월에 가서 이루어졌다. 1950년 3월 서울에서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된 이주하, 김삼룡이 전쟁 발발과 더불어 즉결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이 낳은 남로당 계열의 비극적 운명은 이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주하, 김삼룡의 죽음은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영광스러운 것일 터이다. 그러나 박헌영과 그의 북한의 동료들은 공산주의자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죄목으로 그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의 측근들 중 이승엽의 경우는 끈질기게 실제 간첩혐의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박헌영을 비롯한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재판에서 구체적인 행위에 관한 단 한 건의 물증도 제시되지 않은 채 '정치적인 살인'을 당하였다.
남로당계열에 대한 숙청을 통해 김일성그룹은 이른바 '반종파투쟁'을 완성하고, 전쟁책임문제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다년간 진행되어온 북한 권력구조의 형성을 마무리지었다. '김일성유일체제'가 마침내 수립된 것이었다.
에필로그
김일성 유일체제의 수립과정은 일면 남한에서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이 전쟁 기간을 통해 지배블록을 공고히 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정권이나 권력집단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한국전쟁을 통해 비로소 남과 북은 비로소 두 개의 서로 다른 '민족국가'가 되었으며, 남과 북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국민'과 '공산주의 인민'으로 거듭 탄생하였다. 이 과정은 하나의 희생제의를 필요로 하였다. 국제적으로 틀지워진 분단 한반도의 진로, 그것을 거부한 남로당은 제의에 동원된 희생양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전개된 공산주의운동이 분단국가, 분단민족 형성이라는 역사적 국면에서 맞이한 최후의 운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불우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알고 있다. 착취의 폐절,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는 당이 국가권력으로 전화되었을 때 행한 야만과 폭력, 역사적 공산주의운동이 남겨놓은 이 엄청난 딜레마와 역사적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