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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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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자본주의 모국과의 첫만남: 낙관의 이면에 존재하는 우울한 현실

김철식 | 회원, 불안정노동연구팀
행운의 영국여행길

2주간 영국에 놀러(?)갔다온 죄로 글을 쓰려고 보니 부끄러움이 앞서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그 곳에 장기체류하면서 영국사회를 깊이있게 보아온 사람들도 많고, 이미 국내에도 상당한 영국 전문가들이 있는 상황에서 내가 무얼 쓸 수 있을까? 또한 짧은 2주간의 기간동안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얼마나 사실에 접근한 것이었을까? 그것도 영어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래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보고 듣고 이해한 만큼만 그리고 내가 느낀 만큼 쓰기로. 물론 여기에다 그전에 출판물 등을 통해 접해왔던 영국에 대해 쬐끔 덧붙여서. 따라서 독자 여러분에게 죄송하게도 이 글은 그다지 깊이있는 글이 아니다. 다만 그냥 재미삼아 읽어줬으면 고맙겠다.
또 하나, 영국에 가게 된 것은 몇 분의 교수님들이 영국 노사관계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를 떠나게 되면서이다.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하고있다는 이유로 어떻게 나도 슬쩍 끼여들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랄까? 따라서 이 글은 주로 영국의 노사관계, 특히 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노동운동, 노동조합의 당면위기에 대한 대응전략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영국 현지에서 만나보았던 영국노총(TUC) 및 산하노조 관료들, 영국 사용자연맹(CBI) 및 제조업체 경영진, 그리고 노사관계와 관련한 정부기관 담당자들과의 인터뷰를 주요 근거로 해서.

사유재산 개념에 근거한 개인의 자유

한여름의 영국은 여행에는 더없이 좋다. 변함없이 내리쬐는 햇살과 밤 10시가 되어도 어둡지 않은 거리, 아무리 덥다고 해봐야 한국의 초여름 날씨에 불과한 기온. 거기에다 어디서나 아무렇게 길을 건널 수 있고,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고, 아무데나 버릴 수 있는 거리의 분위기. 인상적인 것은 모든 도로가 철저하게 보행자중심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횡단보도에는 보행자 도로의 블록이 깔려 있다. 적색신호가 켜져 있어도 사람들이 다 길을 건넌다. 그러면 오던 차들도 사람들이 모두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나간다.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차량, 주차되어 있던 차량도 보행자가 지나간 후에야 도로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철저한 보행자 우선문화의 기저에는, 차량 따위에 의해서는 침해받을 수 없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놓여있는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의 행동에 대한 개인의 책임이 엄격하게 전제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존중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철저한 개인주의 철학에 입각한 상호 불가침의 사고가 사회전반에 일상화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엄격성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적어도 보행자 중심 문화는, 차가 먼저 지나가기를 두려움 속에서 기다린 후에야 보행자가 지나가는 모습에 익숙한 나에게는, 참으로 특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의 핵심에는 사유재산이 놓여있다. 자본주의 모국답게 영국에서 사유재산은 결코 침해될 수 없는 핵심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는 영국 사회에서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귀족계급의 모습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은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계급 특유의 문화가 존재하고, 심지어는 계급에 따라 억양이나 말투가 다르기도 하다. 먼저, 왕가를 비롯한 각종 귀족가문들이 여전히 건재한다. 이들은 대체로 지금도 부자이고, 고귀한 말투와 억양을 쓰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대중적 관심사가 된다. 이들이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사유재산, 특히 사유지 때문인 것 같다. 땅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런던의 한가운데에도 광대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림 같은 저택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은 사유지로서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다. 소유주는 대부분 왕족이라든지 무슨무슨 가문의 귀족들이다. 한편, 이것은 귀족계급과는 별로 관계가 없겠지만, 영국의 시골길을 가다보면 철조망이 쳐져있고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곳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그 곳은 사유지로서, 지나갈 수가 없다. 그 내부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져 있고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그 광대함에 감탄하기도 전에 통행을 가로막는 철조망에 짜증이 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묘사한 엔클로저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노동계급의 문화와 전통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의 고유한 전통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한 계급전통을 자신의 아이덴터티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때의 노동계급 아이덴터티는 반드시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러한 아이덴터티가 어떤 혁명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가 노동계급이었고, 그래서 여전히 노동계급에서 자신의 아이덴터티를 찾고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 출신이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계급의 고유한 말투와 억양을 숨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표밭이 되는 노동계급을 겨냥한 것이지, 더 이상 자신이 노동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계급의 전통과 오늘날의 노동자 집단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오늘날 노동자의 상당수는 이상과 같은 전통적인 노동계급 아이덴터티를 갖지 못한 집단들인 것 같다. 그 중에서 중요한 집단으로 이주노동자들을 들 수 있다. 런던의 경우, 전통적인 영국인들이 시내에 거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런던의 매연과 높은 물가 등으로 인해 교외로 빠져나간 상태다.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아랍이나 아시아 등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이들은 런던에 거주하면서 각종 서비스 직종에 종사한다. 서비스 직종이라고 하면 뭔가 세련되고 전문적인 일을 연상할 지도 모르겠지만, 실제 이들은 주로 식당이나 가게 등에서 자신의 감정을 팔고 있는 점원들이다. 이주민들은 때때로 런던 내에 집단 거주지를 이루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내 중심부의 중국인 촌, 패딩턴 역 주변의 아랍인 주거지역 등. 이런 곳은 화려한 런던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저분하고, 밤에 함부로 나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음침함이 존재하며, 죽어가는 듯한 인상을 보인다.

일상이 되어버린 불편

영국의 사람들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참으로 여유있는 것 같다. 시간에 쫓겨 아둥바둥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기차가 연착해도 무덤덤, 전철이 가다가 멈춰도 무덤덤, 갑작스런 정전사태에도 무덤덤, 어떻게 보면 무척 짜증날 것 같은데 별로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영국인들의 생활상의 여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상이 되어버린 불편에 무던해져버린 현실을 반영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민영화의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대처정부 이후 가장 급속하고 철저하게 민영화를 달성한 국가이다. 전기, 가스, 수도, 철강, 철도 등 중요한 공공재는 이미 거의 다 민영화되었고 이제 런던의 지하철과 국민건강서비스(NHS)의 민영화가 신노동당 정부에 의하여 심각하게 고려되고 있는 중이다. 수도산업의 민영화에 참여한 바 있는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그레이(Grey)씨는, 민영화 이후 이 부문에서의 영국의 경쟁력은 급격히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공의 결과를 반영하듯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영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덧붙인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력 향상이 어느 집단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민영화의 효과는 의문투성이다. 민영화는 전력, 철강, 통신, 가스산업 등에 종사한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실업자로 내몰았다. 국민들은 높아진 전기, 가스요금 등에 힘들어하고 있다.
특히 철도는 사람을 무지 짜증나게 한다. 열차 안이나 플랫폼, 그리고 역은 쓰레기로 산을 이루고 있다. 일년 중에 에어콘을 쓸만한 날이 얼마 안되어서 그런지 에어콘을 갖춘 열차는 없으며, 그래서 한여름의 열차는 매우 덥다. 또한 기차의 연착은 기본이다. 본인의 영국 여행은 주로 기차를 통한 것이었는데, 당역에서 출발하는 것 이외에는 제시간에 오는 열차를 본 적이 없다. 또한 아무런 안내 없이 가다서다를 반복하기가 일쑤이고, 예정에도 없던 역을 본궤도를 이탈하면서까지 들르기도 한다. 중간역에 멈춰서는 더 이상 안간다고 다음열차 타라고 내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한번은 런던 근교의 윈저 성에 가기 위해 중간에 열차를 갈아타려고 내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 윈저로 가는 기차는 모두 취소되었으니 그 곳에 가려면 버스타고 가라는 문구만 모니터에 덜렁 씌어있었다. 이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요금은 한국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 물론 이것이 민영화 이후에 나타난 현상인 것 같지는 않다.(이는 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런던 지하철을 보면 알 수 있다. 런던의 지하철 역시 철도와 비슷하다.)

민영화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그러나 민영화의 중요한 장점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서비스의 질 향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민영화로 인해 서비스의 질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의 정책적 개입수단은 막혀버렸다. 이제 단지 민영기업이 제공해주는 서비스에 불만을 던지면서도, 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이 남아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민영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집단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 내의 일부 조합원들인 것 같다. 전기전자노조(AEEU)의 전임자인 캐리건(Carrighan)씨는 처음 민영화 일정이 발표되었을 때, 노조는 강력한 파업에 돌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파업은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따라서 노조는 실용적인 노선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즉 민영화를 받아들이는 대신 노조는 조합원들이 막대한 물질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다. 노조는 민영화된 기업에서의 노조 승인과 연금수혜자격 유지, 노동관행의 급격한 조정과 정리해고 금지, 매수기업은 주식무료배당, 할인배당, 우선주 할당을 시행할 것을 정부로부터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영화의 과정에서 노조의 조직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노조의 영향력 상실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현재의 영국 노동조합들의 주요한 전략인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대처 보수당 정부의 등장 이후 영국의 노동조합은 조직률의 급격한 저하와 영향력 쇠퇴를 경험하여 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정부와 사용자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왔다. 1990년대 말 블레어 신노동당 정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세는 지속되었다. 심지어 1990년대 이후 영국 경제가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노조의 쇠퇴가 놓여있다는 담론이 여전히 설득력있게 먹혀들고 있다. 실제로 경제성장과 노조의 쇠퇴간에는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이, 많은 경험적 연구들을 통해 증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노동조합운동의 쇠퇴, 돌파구는 어디에

예를 들어 우리가 인터뷰한 캠브리지 대학의 윌킨슨(Wilkinson) 교수는 최근의 경제회복세는 노조의 쇠퇴보다는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먼저 1970, 80년대의 경제사정은 최악이어서 그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다. 둘째, 최근의 경제성장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가로 인한 것이다. 셋째, 세계화 추세 속에서 외국의 저렴한 상품이 국내시장에 유입됨으로써 임노동자의 실질소득 증대에 도움을 주었다. 넷째,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노동조합운동의 쇠퇴에 대해서 노동조합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개별 노조들이 처한 상황이나 이념적 성향 등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크게는 두가지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그 첫번째는 전문직 노조인 MSF(Manufacturign, Science and Finance)의 지역 상근간부인 수라니(Sourani)씨와의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그는, 노동조합은 개혁적(변혁적?) 활동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해야 하며, 세계화 시대에 노조에게 부과된 기대와 의무는 더욱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사회적 공익을 위한 유일한 조직이며, 따라서 정치적, 이념적 투쟁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노동조합 활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사회개혁(변혁?)에 놓여있기 때문에 노조의 (정치적) 참여를 활성화하는 것이 쇠퇴를 극복하는 탈출구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조의 (정치적) 참여란 어떠한 것인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노총(TUC)으로 가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좀 더 명확하지만 변형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TUC의 상근간부인 리드(Reed)씨는 노조의 쇠퇴에 대응하는 두가지 전략 중의 하나로 이와 유사한 전략을 제시한다. 즉 와해된 조합주의적 기제를 복원시켜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가 국가와 자본의 정책파트너로 거듭남으로써 사회적 파트너쉽을 확고히 하고, 이를 통해 상호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과거의 조합주의적 협약의 틀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파트너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정부·사용자 등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고 실제로 협조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상황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불리하게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허약한 방식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러한 협조를 확보하기 위해 유연화와 작업조직 재편, 집단행동 자제 등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 양보가 교환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활동으로는 노동의 집합성에 기반한 권력과 활동력을 증대시키는 성과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즉 하부로부터의 집단적 힘을 조직화, 확장함으로써 노동조합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트너쉽 확보를 통해 상층부 차원에서의 타협과 법률개정 등을 통해 실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그 효과 또한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실용주의적 노선으로의 전환

노동조합운동의 쇠퇴에 대한 노조의 평가의 두번째는 운송일반노조(TGWU)의 상근간부인 발리(Barley)씨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쇠퇴는 노조가 작업현장에서 조합원을 돕고 보호하는 업무보다는 다른 일에 정신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TGWU의 경우 조합원이 1970년대 80만명에서 현재 40만명 수준으로 하락했는데, 이는 제조업체 전반의 몰락과 금융, 서비스산업의 부상이라는 산업구조의 변화에 일차적 원인이 있지만, 이와 더불어 노조가 조합원의 공장생활과 직무관련 지원업무를 무시하고 정치적 쟁점에만 몰두했던 과거의 관행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 노조의 전반적 쇠퇴는 작업현장에서 느끼는 조합원들의 고충과 일상생활의 고난을 도외시한 대가이며, 따라서 조합원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이 노조의 쇠퇴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TUC의 조직화 전략에도 반영되어 있다. 산업구조의 변화와 불안정노동의 증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신세대 노동자의 등장으로 인해 조직률의 심각한 하락을 경험한 TUC는, 조직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공격적인 조직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미국노총(AFL-CIO)의 조직화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리드(Reed)씨는 말한다. 그런 만큼 여기에는 비즈니스 노조주의(business unionism)의 전형적인 특징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 전략에 의하면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신세대 노동자들이나 증가하고 있는 파트타임 노동자들, 그리고 떨어져나가고 있는 기존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무언가 실제 혜택을 주는 실용주의적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앞선 전기전자노조(AEEU)의 민영화에 대한 실용적인 대응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전략에서 핵심은 조합원들에게 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이의 혜택을 보고 들어오는 조합원들을 확보하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조합의 주된 목적이 조합원들에 대한 서비스 제공에 있다는 사고가 놓여있는 듯하다. 물론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오로지 서비스를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상정하는 것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서비스 자체는 노동조합의 지도부 차원에서 조합원들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를 상층부 차원의 협약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나면서 노동조합의 관료화, 수동적 조합원의 양산, 상층관료와 하층 평조합원의 거리 확대와 같은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층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노조가 이들을 조직화하려고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노조활동의 의사결정과 기타 제반 이해관계를 주체적으로 제기, 확보해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기존 노조, 노조관료에 의해 서비스를 수혜받는 수동적 집단에 머문다. 즉 이러한 상황에서 조직되는 조합원들이란 노조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보고 들어오는 수동적인 조합원, 그것도 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쉽게 떠나는 일시적인 조합원만을 양산하는 것에 그칠 뿐인 것이다.

불안정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이상과 같은 실용적인 전략 속에는 중요한 질문이 빠져있다. 즉 현재 가장 중요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불안정노동의 확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영국 사회에서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업문제와 관련하여, 정부 노동복지부서의 관련자는 인터뷰에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성과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창출된 일자리가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가운데 영국에서 파트타임 노동자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에 놓여있으며, 이미 그 비중이 전체 노동자의 20%를 넘어섰다.
그러나 노조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파트타임으로 대표되는 불안정노동의 증가에 대해서 노조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이것이 가져오는 노조 조직률의 하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앞에서 언급한 서비스 제공을 통한 조직률 제공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정부, 사용자와의 파트너쉽 확보를 위해서 오히려 유연성의 증대, 불안정화의 확산을 거의 용인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 불안정 노동은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어느 누구에게도 찾을 수가 없다.

근거없는 희망과 대안없는 낙관

버밍엄의 컨벤션센터 앞 광장에는 약간은 그로테스크한 조각이 놓여있다. 조각의 뒷부분에는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굴뚝이 놓여있으며, 여기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꾸역꾸역 밖으로 나오고 있다. 수만의 인파 속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들도 있고, 고된 노동에 지친 듯한 아낙도 보인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다지 표정이 밝지 못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각의 앞부분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진다. 이들에게서 고된 노동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이들의 표정에는 점차로 밝아지는 사회에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낙관적 희망이 선연히 새겨져있다. 버밍엄은 제임스 와트로 상징되듯이 산업화 초기, 대표적인 공업도시였다. 그러나 이제 제조업이 거의 사라진 영국에서 이 도시는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더 이상 공업도시의 매연과 지저분함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앞의 조각상은 이러한 산업화 이후 버밍엄의 발전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려는 듯하다. 그러나 본인의 눈에는 그것이 실제 이 도시의 발전궤적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미래에 대한 이들의 희망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인다. 이제 버밍엄에서도 굴뚝없는 공장, 정보화된 사무실에 대한 열망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본인의 눈에는 이들이 가진 희망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같지 않다는 부정적인 인상이 오히려 강하게 남는다.
TUC와의 인터뷰에서 느낀 한가지는 이들이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근거에서 기인한 낙관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현재 영국의 경제가 잘 나아가고 있고, 노조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조직화 전략의 결과, 실제 노조의 조직률도 약간씩 상승하고 있는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면적인 성장과정에서 노동시장 유연성은 증가하고 있으며, 공기업들은 민영화되고 있다. 기업이나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성이 경쟁력 향상에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를 지속시키려 하고 있다. 불안정 고용의 증가는 일자리의 창출이라는 미명하에 적극 조장되고 있다. 민영화는 그동안 안이하게 운영되던 공기업에 시장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경쟁력을 제고하고, 영국 경제의 성장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선전된다. 그러나 노조는 불안정노동의 확산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다. 다만 전통적 제조업의 쇠퇴와 새로운 유형의 신세대 노동자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에게 적합한 서비스는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다. 또한 유연성을, 민영화를 인정하는 대가로 정부와 사용자로부터 당당한 파트너로 인식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 와중에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있으며, 민영화 이후 급상승한 공공재 요금과 개선되지 않는 서비스의 질 속에서 국민들의 불만은 심화되고 있다. 그 가운데 국민들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신노동당에 무미건조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들어 다시 영국 경제의 성장에 좋지 못한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관의 근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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