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죽음 - 의문사 진상규명 : 고 김준배 열사 사건의 진실과 교훈
추락과 경찰 구타에 의한 죽음
2001년 9월 3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고 김준배 열사에 대한 진상규명의 중간 발표를 진행했다. 고 김준배 열사는 97년 제5기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하다가 97년 9월 16일 새벽, 광주의 한 고층아파트에서 경찰의 검거를 피해 달아나다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검거과정과 사망하기까지의 과정, 검찰의 은폐, 축소 혐의 등 많은 의혹만을 남기고 사건 이틀만에 종결되고 말았다. 김준배 열사의 죽음에 이러한 의혹을 가지고 있었던 유족과 관련단체의 진정에 의해 그간 진상규명위의 조사가 진행되었고, 이날 중간발표를 진행한 것이다.
"김준배씨는 추락과 구타가 복합하여 사망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내린 중간 발표의 내용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검거과정에서 경찰의 프락치 공작, 미란다원칙 미고지 등의 불법적인 행위가 드러났고, 추락이후 경찰의 구타가 있어 사망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후 검찰의 졸속적인 수사로 인해 사건이 은폐, 조작되는 과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의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의 검거에 있어서는 최대한의 안전대책을 세운 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거늘,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무수한 불법행위를 저질러가면서까지 고 김준배씨를 검거하려 했고, 마침내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김영삼 정권의 공안탄압의 필연적 결과
군사독재정권과의 야합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을 이어가던 김영삼이 집권한 문민정권 5년. 단 한자락의 정책도 없고 줏대도 없었던 김영삼 정권 5년. 4천만 민중에겐 김영삼 정권의 집권 5년이 피를 말리는 5년으로 점철되었다. 대안 없는 경제정책은 경제파탄, 물가폭등의 고통으로 다가왔고 줏대 없는 통일정책은 남북한 전쟁분위기만 고조시켰으며 역사의 정도를 걷고자 했던 민족민주운동세력에겐 죽음보다 잔혹한 침묵을 강요했던 시기였다.
돌아보면 김영삼 정권은 집권 5년 동안 4천만 민중과 7천만 겨레에게 오로지 불행과 고통밖에 남겨준 것이 없다. 그 출발부터가 학살자의 피묻은 돈을 뿌리며 금권, 타락선거로 시작되었던 김영삼 정권은 한보특혜비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부패 정권이며 특등 비리 정권이었다. 쌀시장을 비롯해 자동차, 금융, 통신 등 어느 것 하나 없이 외세에 내주고 일본이 추방한 미국의 열화우라늄탄마저 끌어안는 사대정권이며 탈냉전의 세계적 조류에 역류하며 전쟁연습과 무기수입으로 남북관계를 군사독재 시절보다 단절시켜 버린 분열정권이었다.
또한 갖가지 사회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서해 훼리호 침몰, 비행기 추락, 기차 전복,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대형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고, 국민의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 챈 세무공무원들의 비리가 드러났다.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 정권은 오히려 95년 지자체 선거 참패라는 민중의 심판을 외면하고, 과거회귀로 보수세력과의 연합으로 위기 상황을 모면하고 통치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한국통신 노조파업과 연세대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등 노동, 학생 세력들에 대한 과거 군사 정권 시절과 다름없는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고,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 등으로 보수회귀를 뚜렷이 함으로 통치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특히,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의 양상은 극에 달했다. 권총을 들고 학생회관을 침탈해 수배자를 연행하고(동신대), 권총을 사격하여 허벅지가 관통하였으며(천안 단국대), 수배학생을 잡기 위해 새벽에 학생회실을 침탈해 다리와 팔이 부러지도록 구타를 하고 팬티차림으로 개끌고 가듯 끌려가고(조대 법대), 시험보고 있는 교수 연구실의 문을 따고 연행(전남대)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김준배 열사의 죽음은 김영삼 정권의 살인적 공안탄압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민병일, 이종호, 이덕인, 장현구, 한상근, 권희정, 류재을, 박순덕......70여명이 넘는 사람들의 피가 김영삼 정권시절 민주의 재단에 바쳐졌다.
김준배 열사의 삶과 죽음
김준배 열사는 후배와 선배들로부터 많은 귀감을 샀던 사람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깊이 있게 느끼며 투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하였기에 정권은 6년 넘는 수배 생활을 강요하였고 연행과 구속, 추적의 시간 시간에도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갔고, 민중의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던 청년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1997년 9월 16일 추석날 밤이었다. 당시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1계급 특진과 현상금이 걸려있던 그를 검거하기 위하여 광주지역의 경찰들은 혈안이 되어있었다. 당시 보안수사대 대원들의 학내 사찰, 도경찰청 산하의 의경들과 기무사 요원들까지 동원되어 김준배 열사를 잡기 위한 검거망을 좁혀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도경 형사기동대의 도철호 형사는 김준배 열사의 선후배를 돈으로 매수해 프락치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번에 양심 선언한 김준배 열사의 후배 증언에 의하면 당시 3,500만원을 주겠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후 계속 도철호 형사와 자신들이 만나는 과정에 약 500-1,000만원 가량의 향응 접대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돈의 유혹에 그 후배는 김준배 열사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려 노력했었고, 추석 전 김준배 열사를 자기 집에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후 다시 김준배 열사와 함께 지내며, 검거시 문을 열어주었고, 김준배 열사는 13층 높이에서 케이블 선을 타고 내려오다 3층과 4층사이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경찰관의 구타가 겹쳐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경찰의 인륜관계마저 무시한 프락치 활용, 미란다원칙 미고지, 13층의 고층에서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대상자의 안전은 전혀 무시하고 안전장치를 미설치한 점등 관행적으로 자행되었던 경찰의 불법행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 진상규명위원회의 중간 발표에서 드러났다. 또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한 상태에서 경찰관 1명이 김준배 열사를 발과 몽둥이를 이용해 구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상처를 입었다면, 마땅히 구호를 해야 할 경찰에 의해 오히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또한 사건 이틀만에 수사는 종결되었다. 당시 광주지검 정윤기 검사는 추석이후 학생시위가 격렬해질 것을 우려해 수사를 조기 종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위원회 중간 발표에서 드러나듯, 검찰의 수사는 추락 높이가 실제는 3-4층 사이임에도 6-9층사이로 판단을 하였고, 유가족과 관련단체가 구타의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실제로 상의에 운동화자국을 제시했으나 이를 무시했고. 또한 목격자가 있음에도 이에 대한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검찰 수사보고서 역시 중요사실, 문건이 누락되어있고, 결제마저 되어있지 않는 등 졸속수사였음이 드러났고, 이것이 사실은 은폐, 조작하기 위함이었지 않나 하는 의혹이 제기되는 마당이었다.
중간발표이후의 진상규명 투쟁
9월 3일 중간 발표이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와 김준배 열사 추모사업회등 각 사회단체들은 커져만 가는 의혹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대검찰청, 경찰청 항의방문을 진행하였고, 집회투쟁을 진행하였다. 민변과 민교협, 범민족연합남측본부, 사랑방, 천주교인권위, 한총련등 각 사회단체들의 성명서가 줄을 이었고, 한 청년의 죽음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라는 민중들의 요구는 거세어 갔다. 그러나 아직까지 당시 담당검사였던 정윤기 검사는 위원회의 출두요구에 전혀 응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계승연대와 추모사업회는 정윤기 검사가 재직중인 강원도 영월로 달려가 소환에 응하라는 요구를 가지고 3일 동안의 투쟁을 진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검사는 전경의 벽을 주위를 쳐놓고 질의서를 가지고 들어간 대표단마저 폭력적으로 끌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윤기 검사는 이후 '첫째로, 김준배씨는 김영삼 정권시절에 데모를 했는데, 그 시절은 권위주의적 통치 시절이 아니므로 현재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에서 규정하는 민주화운동이 아니기에 의문사진상규명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둘째로, 자신은 최대한 공정히 수사를 했기 때문에 조사에 응할 수 없고, 마지막으로 검사로서 했던 사건의 수사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되면 이후 검찰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고 밝히면서 위원회의 출두거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이번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조준희 위원장이 밝혔듯이 어떤 정권의 유형에 대한 판단은 명예회복위원회와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할 일이지, 이 판단을 검찰이나 검사 개인이 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분명 월권행위이다.
또한 자신이 맡아 책임졌던 사건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고, 문제가 발생한다면 담당검사로서 이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지, 이에 대해 어떤 사족을 달면서 회피하려고 하는 정윤기 검사의 모습은 더욱 은폐, 조작의 의혹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또한 당시는 대선이 임박한 시기로 김영삼 정권의 정권재창출에 영향을 끼칠 이 사건을 조기에 덮어두려 했던 검찰의 권력의 시녀로서의 과잉충성이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는 하루 속히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정윤기 검사의 출두와 조사를 계속 요구하는 투쟁을 계속 진행할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한계
이번 김준배 열사 진상규명 중간 발표를 보면 김준배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데 있어 사건의 어려운 점말고도 위원회의 근본적인 한계들도 역시 드러났다. 검사 소환에 있어, 위원회는 강제구인권이 없음으로 인해, 출두를 거부한다해도 과태료 처분만이 처벌의 끝이다. 그리고, 프락치 활동과 관련하여 경찰과 프락치 사이에 돈이 오고 가는 지를 알아낼 수 있는 계좌추척권이 없음으로 인해 그 진실을 알 수 없는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사권한이 없다는 것이 진실을 알아내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또한 이번 김준배 열사의 의문사 사건은 아직 공소시효가 진행중이지만, 과거 박영두 사건이라든지, 현재 많은 의문사 사건의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버려 가해자와 책임자들을 처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을 밝히더라도 그 사실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지지 않고, 오로지 피해당사자와 유족들만이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승연대는 이러한 중요사항들을 가지고 2차 법개정을 진행할 예정이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재발 방지 대책과 김영삼의 처벌
아무튼 김준배 열사의 진상규명에 있어 중요한 것은 추락사냐, 아니면 구타에 의한 사망이냐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찰의 무리한 공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한 청년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프락치 활동, 미란다원칙 미고지, 안전장치 미설치 등의 경찰에 의해 관행적으로 저질러지는 불법행위들을 근절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과 검찰이 권력의 시녀의 역할을 벗어나 민중을 위하는 검찰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권재창출의 과욕으로 김준배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간 김영삼의 진정한 역사 앞에 사죄와 그에 대한 처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2001년 9월 3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고 김준배 열사에 대한 진상규명의 중간 발표를 진행했다. 고 김준배 열사는 97년 제5기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하다가 97년 9월 16일 새벽, 광주의 한 고층아파트에서 경찰의 검거를 피해 달아나다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검거과정과 사망하기까지의 과정, 검찰의 은폐, 축소 혐의 등 많은 의혹만을 남기고 사건 이틀만에 종결되고 말았다. 김준배 열사의 죽음에 이러한 의혹을 가지고 있었던 유족과 관련단체의 진정에 의해 그간 진상규명위의 조사가 진행되었고, 이날 중간발표를 진행한 것이다.
"김준배씨는 추락과 구타가 복합하여 사망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내린 중간 발표의 내용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검거과정에서 경찰의 프락치 공작, 미란다원칙 미고지 등의 불법적인 행위가 드러났고, 추락이후 경찰의 구타가 있어 사망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후 검찰의 졸속적인 수사로 인해 사건이 은폐, 조작되는 과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의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의 검거에 있어서는 최대한의 안전대책을 세운 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거늘,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무수한 불법행위를 저질러가면서까지 고 김준배씨를 검거하려 했고, 마침내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김영삼 정권의 공안탄압의 필연적 결과
군사독재정권과의 야합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을 이어가던 김영삼이 집권한 문민정권 5년. 단 한자락의 정책도 없고 줏대도 없었던 김영삼 정권 5년. 4천만 민중에겐 김영삼 정권의 집권 5년이 피를 말리는 5년으로 점철되었다. 대안 없는 경제정책은 경제파탄, 물가폭등의 고통으로 다가왔고 줏대 없는 통일정책은 남북한 전쟁분위기만 고조시켰으며 역사의 정도를 걷고자 했던 민족민주운동세력에겐 죽음보다 잔혹한 침묵을 강요했던 시기였다.
돌아보면 김영삼 정권은 집권 5년 동안 4천만 민중과 7천만 겨레에게 오로지 불행과 고통밖에 남겨준 것이 없다. 그 출발부터가 학살자의 피묻은 돈을 뿌리며 금권, 타락선거로 시작되었던 김영삼 정권은 한보특혜비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부패 정권이며 특등 비리 정권이었다. 쌀시장을 비롯해 자동차, 금융, 통신 등 어느 것 하나 없이 외세에 내주고 일본이 추방한 미국의 열화우라늄탄마저 끌어안는 사대정권이며 탈냉전의 세계적 조류에 역류하며 전쟁연습과 무기수입으로 남북관계를 군사독재 시절보다 단절시켜 버린 분열정권이었다.
또한 갖가지 사회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서해 훼리호 침몰, 비행기 추락, 기차 전복,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대형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고, 국민의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 챈 세무공무원들의 비리가 드러났다.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 정권은 오히려 95년 지자체 선거 참패라는 민중의 심판을 외면하고, 과거회귀로 보수세력과의 연합으로 위기 상황을 모면하고 통치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한국통신 노조파업과 연세대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등 노동, 학생 세력들에 대한 과거 군사 정권 시절과 다름없는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였고,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 등으로 보수회귀를 뚜렷이 함으로 통치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특히,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의 양상은 극에 달했다. 권총을 들고 학생회관을 침탈해 수배자를 연행하고(동신대), 권총을 사격하여 허벅지가 관통하였으며(천안 단국대), 수배학생을 잡기 위해 새벽에 학생회실을 침탈해 다리와 팔이 부러지도록 구타를 하고 팬티차림으로 개끌고 가듯 끌려가고(조대 법대), 시험보고 있는 교수 연구실의 문을 따고 연행(전남대)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김준배 열사의 죽음은 김영삼 정권의 살인적 공안탄압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민병일, 이종호, 이덕인, 장현구, 한상근, 권희정, 류재을, 박순덕......70여명이 넘는 사람들의 피가 김영삼 정권시절 민주의 재단에 바쳐졌다.
김준배 열사의 삶과 죽음
김준배 열사는 후배와 선배들로부터 많은 귀감을 샀던 사람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깊이 있게 느끼며 투쟁하던 사람이었다. 그러하였기에 정권은 6년 넘는 수배 생활을 강요하였고 연행과 구속, 추적의 시간 시간에도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갔고, 민중의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던 청년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1997년 9월 16일 추석날 밤이었다. 당시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1계급 특진과 현상금이 걸려있던 그를 검거하기 위하여 광주지역의 경찰들은 혈안이 되어있었다. 당시 보안수사대 대원들의 학내 사찰, 도경찰청 산하의 의경들과 기무사 요원들까지 동원되어 김준배 열사를 잡기 위한 검거망을 좁혀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도경 형사기동대의 도철호 형사는 김준배 열사의 선후배를 돈으로 매수해 프락치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번에 양심 선언한 김준배 열사의 후배 증언에 의하면 당시 3,500만원을 주겠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후 계속 도철호 형사와 자신들이 만나는 과정에 약 500-1,000만원 가량의 향응 접대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돈의 유혹에 그 후배는 김준배 열사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려 노력했었고, 추석 전 김준배 열사를 자기 집에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후 다시 김준배 열사와 함께 지내며, 검거시 문을 열어주었고, 김준배 열사는 13층 높이에서 케이블 선을 타고 내려오다 3층과 4층사이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경찰관의 구타가 겹쳐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경찰의 인륜관계마저 무시한 프락치 활용, 미란다원칙 미고지, 13층의 고층에서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대상자의 안전은 전혀 무시하고 안전장치를 미설치한 점등 관행적으로 자행되었던 경찰의 불법행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 진상규명위원회의 중간 발표에서 드러났다. 또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한 상태에서 경찰관 1명이 김준배 열사를 발과 몽둥이를 이용해 구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상처를 입었다면, 마땅히 구호를 해야 할 경찰에 의해 오히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또한 사건 이틀만에 수사는 종결되었다. 당시 광주지검 정윤기 검사는 추석이후 학생시위가 격렬해질 것을 우려해 수사를 조기 종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위원회 중간 발표에서 드러나듯, 검찰의 수사는 추락 높이가 실제는 3-4층 사이임에도 6-9층사이로 판단을 하였고, 유가족과 관련단체가 구타의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실제로 상의에 운동화자국을 제시했으나 이를 무시했고. 또한 목격자가 있음에도 이에 대한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검찰 수사보고서 역시 중요사실, 문건이 누락되어있고, 결제마저 되어있지 않는 등 졸속수사였음이 드러났고, 이것이 사실은 은폐, 조작하기 위함이었지 않나 하는 의혹이 제기되는 마당이었다.
중간발표이후의 진상규명 투쟁
9월 3일 중간 발표이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와 김준배 열사 추모사업회등 각 사회단체들은 커져만 가는 의혹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대검찰청, 경찰청 항의방문을 진행하였고, 집회투쟁을 진행하였다. 민변과 민교협, 범민족연합남측본부, 사랑방, 천주교인권위, 한총련등 각 사회단체들의 성명서가 줄을 이었고, 한 청년의 죽음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라는 민중들의 요구는 거세어 갔다. 그러나 아직까지 당시 담당검사였던 정윤기 검사는 위원회의 출두요구에 전혀 응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계승연대와 추모사업회는 정윤기 검사가 재직중인 강원도 영월로 달려가 소환에 응하라는 요구를 가지고 3일 동안의 투쟁을 진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검사는 전경의 벽을 주위를 쳐놓고 질의서를 가지고 들어간 대표단마저 폭력적으로 끌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윤기 검사는 이후 '첫째로, 김준배씨는 김영삼 정권시절에 데모를 했는데, 그 시절은 권위주의적 통치 시절이 아니므로 현재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에서 규정하는 민주화운동이 아니기에 의문사진상규명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둘째로, 자신은 최대한 공정히 수사를 했기 때문에 조사에 응할 수 없고, 마지막으로 검사로서 했던 사건의 수사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되면 이후 검찰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고 밝히면서 위원회의 출두거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이번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조준희 위원장이 밝혔듯이 어떤 정권의 유형에 대한 판단은 명예회복위원회와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할 일이지, 이 판단을 검찰이나 검사 개인이 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분명 월권행위이다.
또한 자신이 맡아 책임졌던 사건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고, 문제가 발생한다면 담당검사로서 이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지, 이에 대해 어떤 사족을 달면서 회피하려고 하는 정윤기 검사의 모습은 더욱 은폐, 조작의 의혹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또한 당시는 대선이 임박한 시기로 김영삼 정권의 정권재창출에 영향을 끼칠 이 사건을 조기에 덮어두려 했던 검찰의 권력의 시녀로서의 과잉충성이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는 하루 속히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정윤기 검사의 출두와 조사를 계속 요구하는 투쟁을 계속 진행할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한계
이번 김준배 열사 진상규명 중간 발표를 보면 김준배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데 있어 사건의 어려운 점말고도 위원회의 근본적인 한계들도 역시 드러났다. 검사 소환에 있어, 위원회는 강제구인권이 없음으로 인해, 출두를 거부한다해도 과태료 처분만이 처벌의 끝이다. 그리고, 프락치 활동과 관련하여 경찰과 프락치 사이에 돈이 오고 가는 지를 알아낼 수 있는 계좌추척권이 없음으로 인해 그 진실을 알 수 없는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사권한이 없다는 것이 진실을 알아내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또한 이번 김준배 열사의 의문사 사건은 아직 공소시효가 진행중이지만, 과거 박영두 사건이라든지, 현재 많은 의문사 사건의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버려 가해자와 책임자들을 처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을 밝히더라도 그 사실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지지 않고, 오로지 피해당사자와 유족들만이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승연대는 이러한 중요사항들을 가지고 2차 법개정을 진행할 예정이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재발 방지 대책과 김영삼의 처벌
아무튼 김준배 열사의 진상규명에 있어 중요한 것은 추락사냐, 아니면 구타에 의한 사망이냐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찰의 무리한 공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한 청년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프락치 활동, 미란다원칙 미고지, 안전장치 미설치 등의 경찰에 의해 관행적으로 저질러지는 불법행위들을 근절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과 검찰이 권력의 시녀의 역할을 벗어나 민중을 위하는 검찰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권재창출의 과욕으로 김준배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간 김영삼의 진정한 역사 앞에 사죄와 그에 대한 처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