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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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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 미술에 대한 조곡(弔哭) (4) 예술과 외설의 경계

구정화 | 회원
지난 여름 미술판에는 몇 차례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으니 김인규 이애숙 부부의 나체사진 게재사건과 작가 최경태씨의 여고생 성기 노출 그림사건이다. 이름만 들어도 자극적인 이 사건들은 미술계의 해묵은 논쟁들을 생각나게 하였다.
우선 필자는 미술교사가 자신의 성기가 노출된 사진을 개인홈페이지에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구속영장이 신청되고 교사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21세기의 첨단 대한민국이 진저리치게 싫었다. 미술계 인사들이 발빠르게 대응한 김인규 사건은 그나마 현재 어느 정도 여론을 등에 업고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작가 최경태의 경우, 작품 자진철거 이후 벌금 200만원이 선고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미술계에서는 별다른 대응이 없는 상태이다. 미성년자의 성기를 그려 공공장소에 개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윤리 또는 성의 식을 의심하게 되는 사회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 두 가지 사건만 보더라도 우리사회의 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김인규의 나체사진이나 최경태의 작품을 예술과 외설 중 그 무엇으로 규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술 작품이 여성의 성역할을 고정시키고 억압한 예도 부지기수이며 외설과 예술이라는 그 경계조차 요즘에는 흐릿하다는 개인적인 느낌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언제부터 예술과 외설의 규정에 국가가 개입하게 되었는지 그 연원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대회 수상작은 누드화
20세기 초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문명개화를 통해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그리고 이들은 동아시아에서 서구화에 제일 먼저 성공한 일본을 모델로 하여 문명개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의 개화론자들에게는 황제의 권위보다 서구의 기술을 빌려 부국강병의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 좀더 시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개화론자들에게 일본은 서구화의 훌륭한 모범이었으며 일본을 통한 문명개화는 사회전반에 걸쳐 추구하던 하나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조선의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종이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에게는 일본의 미술학교에 유학하여 배운 캔버스에 오일로 그린 그림은 그 자체가 문명의 세례를 받은 상징으로 읽혀졌을 것이다. 1916년 신문지상을 통해 등장한 유화가 김관호의 일본 문전 (일본의 문부성전람회) 특선소식은 이러한 점에서 보수적인 조선화단에 서구화의 물결을 일으키는 일대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유명한 비엔날레에서 특상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당대의 문인이자 논객인 이광수가 그렇게 흥분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유화라는 신문명을 사용하여 문전에서 당당하게 영예의 특선에 오른 김관호의 <해질녁>이 누드화였다는 사실을 당시 일반 대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문명개화론자였던 당대의 유명인사 이광수가 그렇게도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여성누드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문부성전람회에서 조선인이 특선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듯 하다. 왜냐하면 이광수는 김관호의 작품이 풍속상의 이유로 신문에 게재되지 못한 것에 대해 어떠한 반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
한편 화가 김관호는 어떠했을까. 풍속상의 이유로 작품사진이 신문에 게재되지 못한 이후 김관호는 조선미전에 다시 <호수>라는 여성누드화를 출품하였지만 이 작품 역시 촬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뚜렷한 활동을 남기지 못하고 화업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의 절필은 근대화단에서 유화가가 겪어야 할 고난을 예고하는 듯 하다.

나체화논쟁
이처럼 근대화단에서 풍속상의 이유로 나체화의 공개가 제재를 받은 예는 많았다. 당시 발간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주로 나화(羅畵)라는 이유를 들어 촬영금지 처분을 받거나, 심지어 전시되고 있는 작품의 철회라는 극단적인 제재까지 내려졌다. 이러한 제재는 상업광고에도 종종 누드화가 게재될 만큼 여성의 나체화가 보편화되었던 1930년대 초기까지도 계속되었다.
근대기에 화가들이 제작한 나체화는 일본미술학교에서 신문명의 한 조류로 받아들인 서구유화수업의 일환에서 제작된 것이다.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르느와르의 누드화나 프랑스 신고전파들의 단정한 여성누드화들은 수업 교본으로 사용된 것으로 학생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수업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화가들에게 누드화가 서양의 고전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던 것과는 달리 근대국가로의 체제정비를 하던 일본 정부에게는 단속의 대상이었다. 서구화를 지향하고 있는 일본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유화 역시 보급의 대상에 속하였지만 그것을 단속하는 데 있어서는 좀더 복잡한 기준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나체화 논쟁의 시작은 일본 근대유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로다 세이키의 <아침화장>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여성의 전신누드화인데 그 예술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일본정부는 누드화를 풍속의 범주에서 취급하여 현재의 경범죄에 해당하는 항목에 적용시켰던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 20년대부터 시작한 나체화 논쟁은 서구를 모델로 한 국민국가를 지향하고 있던 메이지 정부가 나체화를 미개한 풍속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외설로 판단하면서 발생한 문제였다. 서구에서 나체가 사람 눈에 띄는 것을 경계하던 분위기와 달리 고온다습한 일본의 날씨에서 나체는 보편적인 풍속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나체=미개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공공장소에서의 나체를 금지하였다. 이는 서구인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1872년 "위식계위조례(違式階違條例)"가 생기고 메이지 정부는 외설적인 그림과 물품의 판매, 문신, 공중목욕탕에서의 남녀혼욕, 외설적인 구경거리에 대한 금지 등 이전의 풍속을 단속하였다. 이는 미술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895년 4회 내국권업박람회에 출품되어 물의를 일으킨 구로다 세이키의 <아침화장>에 대한 단속을 보더라도 미술전람회에서의 누드화 게재나 일반거리에서의 나체는 정부에게 공공장소에서의 나체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서양의 이미지에 기초한 문명개화의 논리였다.
그러나 당시 관객들은 단속을 하는 정부를 이해하지 못한 듯 하다. 현재 한 장의 삽화가 전하는 <아침화장> 철수 사건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은 무척 흥미 있다. 작품을 철수하는 경찰을 둘러싸고 있는 일반인 중 한 여성이 치마를 걷어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풍속이 그다지 근엄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나체가 아주 일반적이었던 일본의 풍속에서 누드화는 그리 파격적인(!) 볼거리가 아니었다는 얘기인데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정부의 단속으로 인해 예술작품과 포르노를 분간 못하는 근대일본인을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국가, 예술작품을 볼 권리를 빼앗다
누드화 그 중에서도 국부의 노출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벗은 여성의 뒷모습이 많이 그려졌다. 벗은 여성의 뒷모습은 여성의 정면상보다는 신비감을 주고 국부의 노출과 같은 적나라한 노출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많이 애용되었다. 외설과 예술의 기로에서 고민했던 화가들에게 뒤돌아선 누드는 바로 모범답안이었던 것이다. 1920년대 이후 대중매체를 통해 게재되었던 여성 누드화가 주로 벗은 여성의 뒷모습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화단의 상황과도 일치한다.2)
1901년 구로다 세이키가 6회 백마회전에 출품한 나체부인상의 경우 나부(裸婦)의 하반신이 경찰의 명령에 의해 천으로 가려진 채 전시되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국부의 노출 유무는 풍속을 단속하던 경찰에게나 전시를 하고자 하는 화가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한편 조선미전에 출품되었던 누드작품들은 당시 제작된 도록(圖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3) 수많은 화가의 습작들이 일반인들에게 보여지지 못하고 수십년이 지나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대다수의 누드화들은 국부가 노출되지 않은 포즈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천으로 가려진 상태로 표현된 것으로 여성의 나체에서 특별한 부위의 공개를 금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여성의 누드를 풍속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던 당국이 예술과 외설의 기준을 이처럼 특정부위의 노출 유무로 정한 것은 예술표현의 기준을 공공의 토론에 맡기기보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는 개인의 성의식이나 성표현과 같은 사적인 부분을 국가가 직접관리,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누드화를 보게 하는 것조차 금지했던 당시의 금욕적인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당시 신문기사에는 춘화나 지금으로 말하면 포르노 등이 극성을 부려 경찰이 대대적인 단속을 했다는 기사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일반인들에게 누드화가 외설로 읽힐 일은 아주 드물었던 셈이다. 오히려 당국의 조치는 일반대중들에게 포르노와 예술작품을 구분할 수 있는 자율권을 애당초 빼앗은 결과를 낳았으며 더군다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권리마저 박탈한 셈이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예술작품을 볼 권리와 그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판단할 권리는 경찰이나 공윤이라고 불리는 공권력을 통해 해결하고 있으니 문명개화와 근대화의 논리로 우리가 빼앗긴 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다.


1) '여인이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매일신보』(1916.10.20)
2) 한 미술사학자는 이처럼 뒤돌아선 누드가 일본화가인 구로다 세이키나 오카다 사부로우스케 등 초기 유화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이며 그 연원은 ?비 드 샤반느나 고갱, 드가 등의 작품에서 찾고 있다. 특히 이러한 구도는 지나친 노출을 자연스럽게 가리고 동양적 신비감을 살리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전통회화에서 생소한 누드를 받아들이는데 적절한 구도라고 지적하였다. 김영나, 「한국 근대회화에서의 누드」,『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5집(서양미술사학회, 1993), p.38-40.
3) 김관호의 해질녘은 대표적인 누드화라고 할 수 있으며 안석주가 제작한 표지화 역시 대중매체를 통해 보급되었던 여성의 벗은 뒷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이론
태그
여성 저출산 고령화 육아 유연근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