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언론', 평화를 테러하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해 보인다. 미국은 전시내각을 구성했으며, 항공모함은 중동을 향하고 있다. 해병대 병력을 태운 수송선단도 버지니아 노포크항에서 중동지역으로 출발했다. 영국 특공대가 카불시에서 탈레반군과 총격전을 벌였고, 파키스탄은 9월 19일 전쟁협조를 공식 발표했다. WTC 자살테러 이후 단 이주일여 만의 일이다. '제국의 십자군'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1801년 트리폴리에서 시작된 미국의 전쟁역사는 이제 140번째 침략으로 치닫고 있다. 21세기 최초의 전쟁, 아메리칸 지하드(聖戰)가 코앞이다.
언론사들 역시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우리나라 중앙언론사들은 신문 14명, 방송 29명 등 총 43명에 이르는 취재진을 파키스탄에 급파했다. CNN도 '4천명 기자 보유'에 걸맞는 대규모 인력을 파키스탄·아프간 지역에 파견했다.
일일 평균 20여 프로그램 이상의 전쟁 관련 보도를 내보내며, 이번 테러와 전쟁보도에서도 최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는 CNN. 이들은 9월 11일 오전 8시 45분 첫 번째 비행기가 WTC 중 하나에 부딪쳐 화염에 휩싸여 있는 것을 정확히 4분 뒤 생방송으로 전세계에 타전했다. CNN의 보도는 부시의 전쟁준비만큼이나 신속했고 비행기 테러만큼이나 치밀했다.
그러나 CNN 보도가 주는 - 마치 한편의 영화같은 - 흥분과 긴박감 뒤에는 세계제국 미국의 자존심이, 그리고 이 자존심이 강요하는 허위와 과장 섞인 야만의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테러참사를 보도한 우리나라 중앙일간지들은 사건 발생 다음날인 12일자 조간부터 약 4일간 연속으로 통단제목(신문 가로 전체를 차지하는 긴 제목)을 사용하는 등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파격적인 편집을 보여줬다. 외국신문과 달리 제목의 공간에 인색한 우리나라 신문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지면의 할애도 놀라웠다. 일간지들은 사건 초기 평균 12∼20면을 테러보도에 사용했다. 전면광고와 주식시세표 등 비보도면을 뺀다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수치다. 특히 12일자 신문에서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은 1면 하단 광고까지 포기했다.
이 광활한 지면을 도대체 다 무엇으로 채웠을까. 급작스레 터져 나온 사건에 자사의 기자들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던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외신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AP통신과 CNN,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 등 기존에 뉴스공급계약을 맺고 있던 회사들 또는 세계적 규모의 유수 언론들이다. 일차적인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사태의 당사자인 CNN 등 '미국언론'의 초기보도는 내부의 우려를 자아낼 만큼 흥분되고 과장돼 있었다. 지면이 미국의 아픔과 슬픔의 언어로, 응징의 의지로 가득 찼다. 오보도 많았다. 피해자 숫자 보도는 5천에서 2만명을 오갔다. 피츠버그에 추락한 항공기를 '미 공군이 격추'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까지 등장했다. 마치 게임을 중계하듯, '미국을 포함한 우리'와 '미국이 선발한 적'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규정한 채 기사가 작성됐다. 적어도 우리와 미국 신문 지면에서 미국은 '선'의 대명사가, 이슬람은 '악'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워싱턴 포스트 미디어비평 담당자인 조엘 아헨바하는 이렇게 권고한다. "미국 언론이 정확한 정보 없이 오보를 남발하고 있다…이럴 때 독자와 시청자가 따라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언론보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사건 발생 초기 3일간 언론은 미국을 전쟁으로 몰아넣는데 여념이 없었다. 부시 대통령과 행정각료, 군 수뇌부의 강경발언을 연일 대서특필하며 전쟁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언이 다시 관성을 얻어 그들 스스로를 전장으로 떠밀게끔 유도해 갔다. 주말을 넘기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일부 언론에서는 '신중론'과 '미국책임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도 여전히 미국 언론의 주류적 입장은 '전쟁불사, 임전무퇴'에 머물러 있다.
미 언론들에게 이번 테러는 그야말로 '당사자의 문제'였다. 뉴욕와 워싱턴은 그 누구도 침공할 수 없으리라 학습되고 이해됐던 '미 본토', 그 중에서도 핵심 도시였다.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졌고, 그 자존심을 재생산하던 언론의 사회적 역할은 의심받았다. 특히나 CNN은 지난 91년 걸프전 생중계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며 오늘의 지위를 얻은 역사적 경험도 갖고 있다. 놓치기 쉽지 않은 호재가 그들 앞에 놓여졌다. 그들은 전쟁을 선택했고, CNN 스페셜 리포트의 제목은 <America Under Attack>에서 <America New War>로 교체됐다.
미 언론의 이러한 경향은 행정부의 발표와 정부 각료의 코멘트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데 에서부터 시작됐다. 연일 '놀란 토끼 얼굴을 한' 부시 대통령의 초강경발언과 콜린 파월 장관·키신저 전 장관 등의 여론몰이가 지면과 화면을 탔다. 테러의 배후 내지는 주범과 관련한 수사상황 역시 정부의 발표에 의지할 뿐이었다.
일방적 정보전달과 취재원의 협소함은 결국 오보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CNN이 테러 직후 '각국 반응'을 통해 내보낸 팔레스타인들의 환호는 조작의혹을 사고 있으며, 정부가 발표한 테러범 리스트를 그대로 발표한 덕분에 사우디에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수모도 겪었다. 문제의 빈 라덴이 AFP에 '테러는 나와 관련 없다'는 인터뷰는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테러범으로 '지목된' 한 사람이 라덴의 '열렬한 추종자'이기 때문에, 라덴이 얼마전 강력한 대미 테러를 경고했기 때문에, 라덴이 평소 남다른(?) 반미감정을 표출해 왔기 때문에, 라덴이 엄청난 자금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라는 식의 추정에 의해 미국 정부로부터 주범으로 '선출된' 사실만이 중요했다. 최소한 라덴을 상대로 한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거쳤어야 할 실체적 진실 규명에 그들은 너무 게을렀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다만 '워 게임'처럼 화려한 그래픽과 시각화된 공격예상경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최첨단 신병기의 화염이 가득한 화면 속에 전세계인들의 흥미와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아랍과 이슬람은 덕분에 '세계의 공적'이 되어버렸다.
'한 이슬람 반미주의자가 이번 테러에 주범일지도 모른다'는 일방적 가설 속에 아프간 인민들과 전세계 아랍인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미국 아니면 테러범, 세계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부시의 오만한 강요 속에 그들은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거부할 때 고립과 위협은 강화된다.
91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전쟁선언 5개월만에 걸프만에서 폭격을 시작하며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했을 때, 미국 언론은 수많은 이라크 인민들의 무고한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화려한 군장비와 폭격장면을 즐기듯이 생중계하며 이라크가 '석기시대의 수준으로 퇴보되는 것'을 즐기고 환호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전쟁의 의미도 모른 채 죽어간 수많은 이라크 인민들은 미 정부와 언론에 의해 '악'에 편재됐다.
이번 역시 상황은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보복 군사공격에 대한 우려로 아프간에서 국제구호단체들이 전격 철수함에 따라 올 겨울 아프간 주민 5백만명이 기아상태에 처할 것이라고 세계식량계획(WFP)은 밝혔다. 이 숫자는 전체 아프간 주민의 1/5에 달하는 수치다. 이미 아프간 경제는 파산 직전에 놓여있으며, 전체 국민의 70%는 영양실조 상태를 보이고 있다. '테러 용의자' 1명을 검거하기 위해 2천5백만에 이르는 아프간 국민들은 미국의 공격을 감수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확한 증거가 제출되면 라덴을 인도하겠다', '제3국에서 재판받도록 하면 라덴을 인도하겠다'는 탈레반 정권의 제안은 즉시 거절당했다. 믿기조차 어려운, 21세기 첫 전쟁답지 않은 야만과 폭력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매체도 이러한 심각한 인권유린의 상황에 대해 강력히 발언하지 않고 있다.
전쟁과 같은 국가적 사업을 앞두고 언론과 정부가 맺어온 밀월관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대표적 미언론들은 미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배껴내기에 바빴다. 나아가 전쟁을 선동하기도 했다.
1964년 8월 5일, 미 언론들은 같은 내용의 기사를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베트남 통킹만에서 3일에 걸쳐 2차례 북베트남군이 미 해군을 이유 없이 공격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러나 미 언론의 보도는 오보였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공격한 것이 아니었으며, 두 번째 공격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미 해군의 도발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었을 뿐이었다.
보도 후 이틀이 지난 뒤, 미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으로 전쟁 발발을 결의했다. 통킹만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 때문이었다. 정부는 언론을 전쟁발발에 이용했고, 언론은 그들에 충실히 협조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체의 역할은 전시 상황에 걸맞는 '국가비상사태'를 선동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베트남 담당 기자였던 말더 씨는 "내가 담당 기자로서 판단하기 전에 회사는 통킹만 기사에 대한 결심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 포스트 기자는 또 "만일 언론이 제역할을 하고, 의회가 제역할을 했다면 베트남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7월, CNN의 애이프릴 올리버 기자와 잭 스미스 기자는 '미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였던 70년 라오스에서 사린 신경 가스를 불법으로 사용했다'는 기획취재물을 내놓았다. 이 기사는 한달에 걸친 취재와 인터뷰에 근거한 것으로, 수많은 증언과 전언 등을 담고 있다.
기사가 방송된 뒤, CNN은 거대한 압력 앞에 직면해야 했다. 헨리 키신저와 콜린 파월, 전 CIA 국장인 리차드 헬름스 등이 압력의 주체였다. CNN은 결국 이 두 기자를 해임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CNN 사장이었던 릭 카플란은 "(언론사의) 비평은 저널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PR의 문제"라는 말로 올리버 기자의 해임을 정당화했다. 두 기자는 언론상업주의의 희생물이 됐다.
사태를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미국 언론만이 아니었다. 한국 언론의 호들갑은 미국의 그것을 능가했고, 위기와 불안은 더욱 가속화된 모습으로 지면과 화면에 드러났다. 미국의 아픔은 곧바로 우리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미 언론이 신중론을 조금씩 제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우리 언론 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다수의 강경 시각 속에 주목받기 어려웠다.
테러가 일어난 다음날인 12일, 조선일보는 <미국이 공격당했다>를, 중앙일보는 <미국이 테러당했다>를 1면 제목으로 뽑았다. 같은날 동아일보는 <미 동시다발 테러 대참사>를 선택했다.
조선과 중앙의 제목은 주관적 판단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 이들의 제목은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복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미국적 시각에서 바라본 결과 나오게 된 대표적인 편집 사례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 통신사의 보도를 번역해 보도할 수밖에 없는 취재시스템의 한계를 일정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칼럼과 사설 등도 이러한 방향으로 뒤따른 것은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테러 상황에 대한 신속한 보도와 상황 전달은 충실한 반면,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는데는 소극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중심 시각의 일방적 원인분석은 결국 편협한 대안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는 15일자 이규태 코너 <아랍인의 의식구조>에서 '그들은 말끝마다 ‘인샬라―’, 곧 알라신이 원하신다면― 알라신이 정해주신 숙명이라면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건 펜타곤이 폭삭하건 국제 경제가 뒤죽박죽이 되건 미사일이 날아오건 아랑곳없다'고 규정하면서 일부 테러주의자가 마치 모든 아랍인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규태 씨의 이 칼럼은 테러주의자들은 철저히 보복해 없애야 하며, 아랍인들은 모두 테러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전쟁으로 생겨날 아랍인들의 피해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단순한 3단 논법을 숨기고 있다.
동아일보 홍호표 부장도 그의 칼럼 <상징과 심장에 대한 테러>에서 보복전쟁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의 일부 마이너리티가 테러를 정당화하고 피해자를 비웃는 가치관의 전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테러의 원인을 미국의 일방적인 힘의 외교정책 등에서 찾는 사람들을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으로 매도했다. 더 나아가 '즉각 행동하지 않고 상당기간 말로 대응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의아함'도 제기했다. '즉각적이고 강력한 응징', 즉 강력한 전쟁주문이다. 이밖에 다른 대부분의 신문들도 '전쟁수준 보복선언' '모든 수단 동원 응징' 등을 머리기사로 선택하며 전쟁을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몰아가 왔다.
반면 무력적 대응을 자제하는 목소리(포르투갈 엑스프레소)나 일반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력은 테러주의자에 대한 패배(영국 인디펜던트)라는 경고, 섣불리 테러 책임자를 지목했다가 더 큰 부정의를 초래 할 수 있다(스페인 엘패)는 충고는 지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거나, 강경한 목소리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전쟁보도로 세계적 명성을 한몸에 얻은 테드 터너의 CNN. 그들은 전쟁을 피와 죽음, 삶의 파괴가 난무하는 전장의 모습이 아닌 온갖 첨단무기가 등장하는 한편의 게임으로 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CNN의 놀라운 성공 이후 미국인들에게 전쟁은 기계들이 치루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지만, 이라크인들에게 전쟁은 폭격보다 더 무서운 '외면'까지 감당해야 하는 악몽이 되어버렸다.
걸프전을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한 미군들이 뉴욕에 개선하던 날, 미국의 언론들은 거리에 나와 종이꽃을 뿌리며 환호하는 모습을 전세계에 내보냈다. 낡은 미군복을 입은 노인은 작은 성조기를 흔들며 'USA'를 연호했고, 아이를 안고 나온 어머니들은 목소리를 모아 미국 국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제국의 평화를 수호한 그들은 국민적 영웅이었으며, 미국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낸 일등공신들이었다. 정부와 언론은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비췄다. 모든 미국민의 행동과 시선은 언론의 의도대로 움직여 줬다.
그러나 같은 시간, 연일 계속된 폭격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이라크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는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장과 발전소, 정수시설과 도로는 물론, 병원과 학교까지 잔해만 남은 그곳에서 어린이들은 국가를 소리 높여 부를 만한 힘도 없었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들은 폐허가 된 집 앞에서 당장 내일 먹을 음식을 걱정하며 암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찾아야 했다. 언론은 반성하지 않았고, 어느덧 전쟁의 수혜자가 되어있었다. '전쟁을 중계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변명은 많았지만, '전쟁을 상업화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외면했다'는 지적에 대한 대답은 많지 않았다.
다시 오늘, 하루하루 신문을 보기가 겁날 정도로 아메리칸 지하드는 임박해 있다.
사태를 여기까지 몰고 오는데 일조 했던 미국 언론들은, 이제 과거와 같이 피침략국 인민들의 죽음과 파괴된 삶을 외면한 채 '제국의 승리'를 연일 노래할 것인가. 미사일을 손에 든 경찰국가 미국의 시각을 통해 그들의 슬픔을 우리의 슬픔으로 당연시한 한국의 언론은,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질 '보복전쟁'을 기쁘게 온몸으로 맞이할 것인가.
언론사들 역시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우리나라 중앙언론사들은 신문 14명, 방송 29명 등 총 43명에 이르는 취재진을 파키스탄에 급파했다. CNN도 '4천명 기자 보유'에 걸맞는 대규모 인력을 파키스탄·아프간 지역에 파견했다.
일일 평균 20여 프로그램 이상의 전쟁 관련 보도를 내보내며, 이번 테러와 전쟁보도에서도 최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는 CNN. 이들은 9월 11일 오전 8시 45분 첫 번째 비행기가 WTC 중 하나에 부딪쳐 화염에 휩싸여 있는 것을 정확히 4분 뒤 생방송으로 전세계에 타전했다. CNN의 보도는 부시의 전쟁준비만큼이나 신속했고 비행기 테러만큼이나 치밀했다.
그러나 CNN 보도가 주는 - 마치 한편의 영화같은 - 흥분과 긴박감 뒤에는 세계제국 미국의 자존심이, 그리고 이 자존심이 강요하는 허위와 과장 섞인 야만의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테러참사를 보도한 우리나라 중앙일간지들은 사건 발생 다음날인 12일자 조간부터 약 4일간 연속으로 통단제목(신문 가로 전체를 차지하는 긴 제목)을 사용하는 등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파격적인 편집을 보여줬다. 외국신문과 달리 제목의 공간에 인색한 우리나라 신문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지면의 할애도 놀라웠다. 일간지들은 사건 초기 평균 12∼20면을 테러보도에 사용했다. 전면광고와 주식시세표 등 비보도면을 뺀다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수치다. 특히 12일자 신문에서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은 1면 하단 광고까지 포기했다.
이 광활한 지면을 도대체 다 무엇으로 채웠을까. 급작스레 터져 나온 사건에 자사의 기자들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던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외신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AP통신과 CNN,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 등 기존에 뉴스공급계약을 맺고 있던 회사들 또는 세계적 규모의 유수 언론들이다. 일차적인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사태의 당사자인 CNN 등 '미국언론'의 초기보도는 내부의 우려를 자아낼 만큼 흥분되고 과장돼 있었다. 지면이 미국의 아픔과 슬픔의 언어로, 응징의 의지로 가득 찼다. 오보도 많았다. 피해자 숫자 보도는 5천에서 2만명을 오갔다. 피츠버그에 추락한 항공기를 '미 공군이 격추'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까지 등장했다. 마치 게임을 중계하듯, '미국을 포함한 우리'와 '미국이 선발한 적'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규정한 채 기사가 작성됐다. 적어도 우리와 미국 신문 지면에서 미국은 '선'의 대명사가, 이슬람은 '악'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워싱턴 포스트 미디어비평 담당자인 조엘 아헨바하는 이렇게 권고한다. "미국 언론이 정확한 정보 없이 오보를 남발하고 있다…이럴 때 독자와 시청자가 따라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언론보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사건 발생 초기 3일간 언론은 미국을 전쟁으로 몰아넣는데 여념이 없었다. 부시 대통령과 행정각료, 군 수뇌부의 강경발언을 연일 대서특필하며 전쟁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언이 다시 관성을 얻어 그들 스스로를 전장으로 떠밀게끔 유도해 갔다. 주말을 넘기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일부 언론에서는 '신중론'과 '미국책임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도 여전히 미국 언론의 주류적 입장은 '전쟁불사, 임전무퇴'에 머물러 있다.
미 언론들에게 이번 테러는 그야말로 '당사자의 문제'였다. 뉴욕와 워싱턴은 그 누구도 침공할 수 없으리라 학습되고 이해됐던 '미 본토', 그 중에서도 핵심 도시였다.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졌고, 그 자존심을 재생산하던 언론의 사회적 역할은 의심받았다. 특히나 CNN은 지난 91년 걸프전 생중계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며 오늘의 지위를 얻은 역사적 경험도 갖고 있다. 놓치기 쉽지 않은 호재가 그들 앞에 놓여졌다. 그들은 전쟁을 선택했고, CNN 스페셜 리포트의 제목은 <America Under Attack>에서 <America New War>로 교체됐다.
미 언론의 이러한 경향은 행정부의 발표와 정부 각료의 코멘트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데 에서부터 시작됐다. 연일 '놀란 토끼 얼굴을 한' 부시 대통령의 초강경발언과 콜린 파월 장관·키신저 전 장관 등의 여론몰이가 지면과 화면을 탔다. 테러의 배후 내지는 주범과 관련한 수사상황 역시 정부의 발표에 의지할 뿐이었다.
일방적 정보전달과 취재원의 협소함은 결국 오보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CNN이 테러 직후 '각국 반응'을 통해 내보낸 팔레스타인들의 환호는 조작의혹을 사고 있으며, 정부가 발표한 테러범 리스트를 그대로 발표한 덕분에 사우디에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수모도 겪었다. 문제의 빈 라덴이 AFP에 '테러는 나와 관련 없다'는 인터뷰는 그들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테러범으로 '지목된' 한 사람이 라덴의 '열렬한 추종자'이기 때문에, 라덴이 얼마전 강력한 대미 테러를 경고했기 때문에, 라덴이 평소 남다른(?) 반미감정을 표출해 왔기 때문에, 라덴이 엄청난 자금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라는 식의 추정에 의해 미국 정부로부터 주범으로 '선출된' 사실만이 중요했다. 최소한 라덴을 상대로 한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거쳤어야 할 실체적 진실 규명에 그들은 너무 게을렀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다만 '워 게임'처럼 화려한 그래픽과 시각화된 공격예상경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최첨단 신병기의 화염이 가득한 화면 속에 전세계인들의 흥미와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아랍과 이슬람은 덕분에 '세계의 공적'이 되어버렸다.
'한 이슬람 반미주의자가 이번 테러에 주범일지도 모른다'는 일방적 가설 속에 아프간 인민들과 전세계 아랍인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미국 아니면 테러범, 세계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부시의 오만한 강요 속에 그들은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거부할 때 고립과 위협은 강화된다.
91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전쟁선언 5개월만에 걸프만에서 폭격을 시작하며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했을 때, 미국 언론은 수많은 이라크 인민들의 무고한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화려한 군장비와 폭격장면을 즐기듯이 생중계하며 이라크가 '석기시대의 수준으로 퇴보되는 것'을 즐기고 환호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전쟁의 의미도 모른 채 죽어간 수많은 이라크 인민들은 미 정부와 언론에 의해 '악'에 편재됐다.
이번 역시 상황은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보복 군사공격에 대한 우려로 아프간에서 국제구호단체들이 전격 철수함에 따라 올 겨울 아프간 주민 5백만명이 기아상태에 처할 것이라고 세계식량계획(WFP)은 밝혔다. 이 숫자는 전체 아프간 주민의 1/5에 달하는 수치다. 이미 아프간 경제는 파산 직전에 놓여있으며, 전체 국민의 70%는 영양실조 상태를 보이고 있다. '테러 용의자' 1명을 검거하기 위해 2천5백만에 이르는 아프간 국민들은 미국의 공격을 감수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확한 증거가 제출되면 라덴을 인도하겠다', '제3국에서 재판받도록 하면 라덴을 인도하겠다'는 탈레반 정권의 제안은 즉시 거절당했다. 믿기조차 어려운, 21세기 첫 전쟁답지 않은 야만과 폭력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매체도 이러한 심각한 인권유린의 상황에 대해 강력히 발언하지 않고 있다.
전쟁과 같은 국가적 사업을 앞두고 언론과 정부가 맺어온 밀월관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대표적 미언론들은 미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배껴내기에 바빴다. 나아가 전쟁을 선동하기도 했다.
1964년 8월 5일, 미 언론들은 같은 내용의 기사를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베트남 통킹만에서 3일에 걸쳐 2차례 북베트남군이 미 해군을 이유 없이 공격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러나 미 언론의 보도는 오보였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공격한 것이 아니었으며, 두 번째 공격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미 해군의 도발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었을 뿐이었다.
보도 후 이틀이 지난 뒤, 미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으로 전쟁 발발을 결의했다. 통킹만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 때문이었다. 정부는 언론을 전쟁발발에 이용했고, 언론은 그들에 충실히 협조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체의 역할은 전시 상황에 걸맞는 '국가비상사태'를 선동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베트남 담당 기자였던 말더 씨는 "내가 담당 기자로서 판단하기 전에 회사는 통킹만 기사에 대한 결심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 포스트 기자는 또 "만일 언론이 제역할을 하고, 의회가 제역할을 했다면 베트남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7월, CNN의 애이프릴 올리버 기자와 잭 스미스 기자는 '미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였던 70년 라오스에서 사린 신경 가스를 불법으로 사용했다'는 기획취재물을 내놓았다. 이 기사는 한달에 걸친 취재와 인터뷰에 근거한 것으로, 수많은 증언과 전언 등을 담고 있다.
기사가 방송된 뒤, CNN은 거대한 압력 앞에 직면해야 했다. 헨리 키신저와 콜린 파월, 전 CIA 국장인 리차드 헬름스 등이 압력의 주체였다. CNN은 결국 이 두 기자를 해임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CNN 사장이었던 릭 카플란은 "(언론사의) 비평은 저널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PR의 문제"라는 말로 올리버 기자의 해임을 정당화했다. 두 기자는 언론상업주의의 희생물이 됐다.
사태를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미국 언론만이 아니었다. 한국 언론의 호들갑은 미국의 그것을 능가했고, 위기와 불안은 더욱 가속화된 모습으로 지면과 화면에 드러났다. 미국의 아픔은 곧바로 우리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미 언론이 신중론을 조금씩 제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우리 언론 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다수의 강경 시각 속에 주목받기 어려웠다.
테러가 일어난 다음날인 12일, 조선일보는 <미국이 공격당했다>를, 중앙일보는 <미국이 테러당했다>를 1면 제목으로 뽑았다. 같은날 동아일보는 <미 동시다발 테러 대참사>를 선택했다.
조선과 중앙의 제목은 주관적 판단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 이들의 제목은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복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미국적 시각에서 바라본 결과 나오게 된 대표적인 편집 사례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 통신사의 보도를 번역해 보도할 수밖에 없는 취재시스템의 한계를 일정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칼럼과 사설 등도 이러한 방향으로 뒤따른 것은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테러 상황에 대한 신속한 보도와 상황 전달은 충실한 반면,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는데는 소극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중심 시각의 일방적 원인분석은 결국 편협한 대안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는 15일자 이규태 코너 <아랍인의 의식구조>에서 '그들은 말끝마다 ‘인샬라―’, 곧 알라신이 원하신다면― 알라신이 정해주신 숙명이라면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건 펜타곤이 폭삭하건 국제 경제가 뒤죽박죽이 되건 미사일이 날아오건 아랑곳없다'고 규정하면서 일부 테러주의자가 마치 모든 아랍인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규태 씨의 이 칼럼은 테러주의자들은 철저히 보복해 없애야 하며, 아랍인들은 모두 테러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전쟁으로 생겨날 아랍인들의 피해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단순한 3단 논법을 숨기고 있다.
동아일보 홍호표 부장도 그의 칼럼 <상징과 심장에 대한 테러>에서 보복전쟁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의 일부 마이너리티가 테러를 정당화하고 피해자를 비웃는 가치관의 전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테러의 원인을 미국의 일방적인 힘의 외교정책 등에서 찾는 사람들을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으로 매도했다. 더 나아가 '즉각 행동하지 않고 상당기간 말로 대응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의아함'도 제기했다. '즉각적이고 강력한 응징', 즉 강력한 전쟁주문이다. 이밖에 다른 대부분의 신문들도 '전쟁수준 보복선언' '모든 수단 동원 응징' 등을 머리기사로 선택하며 전쟁을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몰아가 왔다.
반면 무력적 대응을 자제하는 목소리(포르투갈 엑스프레소)나 일반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력은 테러주의자에 대한 패배(영국 인디펜던트)라는 경고, 섣불리 테러 책임자를 지목했다가 더 큰 부정의를 초래 할 수 있다(스페인 엘패)는 충고는 지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거나, 강경한 목소리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전쟁보도로 세계적 명성을 한몸에 얻은 테드 터너의 CNN. 그들은 전쟁을 피와 죽음, 삶의 파괴가 난무하는 전장의 모습이 아닌 온갖 첨단무기가 등장하는 한편의 게임으로 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CNN의 놀라운 성공 이후 미국인들에게 전쟁은 기계들이 치루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지만, 이라크인들에게 전쟁은 폭격보다 더 무서운 '외면'까지 감당해야 하는 악몽이 되어버렸다.
걸프전을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한 미군들이 뉴욕에 개선하던 날, 미국의 언론들은 거리에 나와 종이꽃을 뿌리며 환호하는 모습을 전세계에 내보냈다. 낡은 미군복을 입은 노인은 작은 성조기를 흔들며 'USA'를 연호했고, 아이를 안고 나온 어머니들은 목소리를 모아 미국 국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제국의 평화를 수호한 그들은 국민적 영웅이었으며, 미국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낸 일등공신들이었다. 정부와 언론은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비췄다. 모든 미국민의 행동과 시선은 언론의 의도대로 움직여 줬다.
그러나 같은 시간, 연일 계속된 폭격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이라크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는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장과 발전소, 정수시설과 도로는 물론, 병원과 학교까지 잔해만 남은 그곳에서 어린이들은 국가를 소리 높여 부를 만한 힘도 없었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들은 폐허가 된 집 앞에서 당장 내일 먹을 음식을 걱정하며 암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찾아야 했다. 언론은 반성하지 않았고, 어느덧 전쟁의 수혜자가 되어있었다. '전쟁을 중계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변명은 많았지만, '전쟁을 상업화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외면했다'는 지적에 대한 대답은 많지 않았다.
다시 오늘, 하루하루 신문을 보기가 겁날 정도로 아메리칸 지하드는 임박해 있다.
사태를 여기까지 몰고 오는데 일조 했던 미국 언론들은, 이제 과거와 같이 피침략국 인민들의 죽음과 파괴된 삶을 외면한 채 '제국의 승리'를 연일 노래할 것인가. 미사일을 손에 든 경찰국가 미국의 시각을 통해 그들의 슬픔을 우리의 슬픔으로 당연시한 한국의 언론은,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질 '보복전쟁'을 기쁘게 온몸으로 맞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