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동정책의 역사적 배경와 전망
미국의 아프간 침공이 현재 시간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현재, 어쩌면 우문이 될 질문이 암암리에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즉, 중동지역이 미국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지속적으로 중동지역에 개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갖고 있는 국가이익에 대한 분석이 우선적으로 이루어 질 필요가 있다. 냉전 기간 중에 드러난 미국의 중동정책은 세가지의 주요한 전략적인 목표, 즉 소련에 대한 봉쇄, 석유의 확보 그리고 이스라엘의 안보에 대한 보장이라는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한편 탈냉전 시대의 도래는 냉전시대와는 달리 소련에 대한 봉쇄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했지만 중동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은 이념적인 측면이 아니라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석유 및 이스라엘의 문제는 냉전 이후에도 여전히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동지역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전략적인 목표는 탈냉전 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해결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라는 것이다.
미국의 대중동정책 형성의 배경: 석유와 냉전
미국의 중동정책의 중심점은 중동지역이 석유에 대한 통제력과 결정권과 관련되었다. 당연하게도 소련이 중동지역을 장악한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유에 대한 통제력, 즉 석유의 가격과 공급량 등에 대한 결정권이 소련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 지역에 있는 개별 중동국가들이 석유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도 여전히 미국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다. 중동지역 내에서 석유를 무기화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및 친미적인 아랍국가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중동지역이 반미적인 아랍국가들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반드시 회피되어야 할 상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900년대 들어서면서 중동지역의 석유가 가지는 군사적 및 경제적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적극적인 중동정책을 추진한 영국과 달리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야 비로소 석유가 가지고 있는 전략적이며 안보적인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치루기 위해서, 그리고 전후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석유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였지만 석유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에 석유는 미국의 안보정책에 있어 그 중요도가 높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석유의 총 사용량 중에서 반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그 수입의 반 이상이 중동지역으로부터 제공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중동지역에 대한 관심의 수준을 증대시켰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석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몇몇 산유국들의 국내적 요인으로 인하여 석유가격은 1970년대 후반 1배럴당 35달러 정도로 폭등하게 되었다.1) 이러한 석유가격의 상승은 1973년에 발발한 아랍 이스라엘 전쟁이 아랍국가들을 단합시키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아랍국가들이 미국 등 서방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석유를 무기화했던 결과였던 것이며, 더불어 1979년에 발생한 이란의 혁명은 석유가격을 다시금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중동정책은 중동지역의 석유가격의 무기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 요인인 소련 및 내부적 요인인 이란이 중동지역의 패권국가로서 재등장하는 것을 막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2) 결국 석유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미국은 중동지역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관점은 중동지역이 반미 세력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미국의 정책에 주요한 동기를 부여했다.
소련의 봉쇄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졌다. 즉, 미국은 유럽에서 구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이 중동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구를 창설하여 소련의 팽창에 대항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국가들은 중동지역의 안보에 있어 주요한 위협으로서 소련보다는 이스라엘을 고려하고 있었고, 따라서 1950년대 미국이 주도한 중동방위기구와 같은 조직은 중동지역내에 있는 가맹국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만한 동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소련이 중동지역에 만연한 이러한 반이스라엘 분위기를 이용하여 그 영향력을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은 이스라엘과 아랍분쟁을 매개로 지역적 냉전체제의 틀을 견고하게 다지면서 대립하였다. 이스라엘의 의견을 대변하는 대부로서 미국의 역할과 아랍측의 의견을 대변하는 소련의 역할은 중동의 지역분쟁을 축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확대시켰던 것이다. 특히 미국은 앞서 지적했듯이 석유자원 때문에 걸프지역에서는 친사우디아라비아 정책을 펴면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 이집트와 시리아 및 이라크의 정치후견자의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지만, 이란의 팔레비정권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친미성향에 종종 가로막혔다. 또한 소련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과 팔레스타인에 무기지원을, 미국은 이스라엘에 경제지원과 무기공급을 하면서 마치 각자의 대리전을 치루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이스라엘 편향'
중동의 석유자원에 대한 안정적 확보와 소련의 남하정책의 봉쇄라는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두 축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지라는 점에서 결합되고 두드러지게 된다. 미국은 1940년대 중반 이스라엘의 국가승인을 앞두고 심각한 논란에 빠졌다. 미국내의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의 지지를 주장한 반면 국무성과 국방성 등 관료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할 경우 미국의 국익에 초래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아랍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중동지역의 긴장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아랍국가들간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명백할 뿐만 아니라 소련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중동지역의 석유가 갖는 중요성은 미약했으며 소련이 중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전세계적인 냉전이 심화되면서 중동지역은 동서간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중심적인 지역으로 등장함에 따라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중요성은 새롭게 인식되었다. 특히 소련이 1955년에 이집트에 무기를 공급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사실이든 아니었든 간에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로서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우려는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소련이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 비군사적인 수단, 특히 외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중동지역의 주요한 세력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으며,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 반면 영국은 페르시아만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지역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력은 1956년의 수에즈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 약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마침내 1967년에 아랍과 이스라엘간에 벌어진 '6일 전쟁'(수에즈전쟁)은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간에 그동안 형성되었던 역학관계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6일 전쟁' 이후 존슨 대통령은 이집트가 주도하는 친소 아랍동맹국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과 전략적인 동맹관계를 맺었다. 반면 소련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비난하면서 아랍국들에게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
한편 1967년의 6일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이 획득한 영토의 반환과 관련한 문제는 미국내에서 다시금 논쟁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6일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는 이스라엘의 안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반환될 수 없다는 주장을 이스라엘이 피력했기 때문에 아랍국들은 상실한 영토의 회복을 위하여 또다른 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그 영토는 중동지역의 불안정성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요인으로서 등장했다. 따라서 미국측은 중동지역의 평화와 영토를 상호 교환해야 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으며, 이러한 주장은 이스라엘의 불만을 야기시킴으로써 미국 이스라엘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서 작용했다.
사실상 1973년에 발발한 아랍 이스라엘의 '10월 전쟁'은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목적으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발발된 것으로서 이 전쟁은 당시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랍국들의 자존심 회복을 위하여 정치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 따라서 1973년의 10월 전쟁은 잃어버린 영토의 회복에 대하여 아랍국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은 지대했다는 점, 그리고 아랍 이스라엘의 갈등에 있어 한 측의 일방적인 우위는 다른 측의 열세를 가져옴으로써 중동지역의 전반적인 안정에는 오히려 역작용을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중동지역을 둘러싼 아랍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이스라엘의 안보가 강화되면 될수록 아랍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 악화되는 악순환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원보다는 아랍 이스라엘의 관계개선을 주선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안보를 확보하고 아울러 중동지역의 긴장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중동정책을 수정하게 되었다. 1973년의 10월전쟁 이후 닉슨 대통령이 미국 이집트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이집트 이스라엘간의 화해를 위한 기반을 조성한 것, 그리고 1970년대 후반 카터 대통령이 이집트 이스라엘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체결을 주선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협정을 통해서 이집트는 미국의 경제적 원조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1967년의 6일전쟁에서 상실했던 영토인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는 이득을 얻은 반면 반미 아랍국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음으로써 아랍권의 지도자 위치를 상실하는 손실을 입게되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안보에 대한 위협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얻는 외에 중동지역의 패권국으로서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받은 외에 아랍권의 단결을 부분적으로 와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서 소련의 역할을 주변화시키는 효과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아랍 이스라엘의 갈등은 부분적인 해결에 그쳤으며 더우기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됨으로써 중동지역의 불안정성은 냉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과 냉전을 구별하지 않았다. 즉 이스라엘과 서방국들에 대한 아랍국들의 증오심을 중동지역에 내재하는 요인들의 산물로서 이해하지 않고 소련이 사주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과 전쟁에 대한 해결책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 지를 묵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는 탈냉전의 시대인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전환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1990년대, 탈냉전 시기의 미국의 대중동정책
걸프전과 냉전의 종식으로 중동지역에서 미국은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중동지역의 국가들이 가까운 시일내에 미국의 이익에 대항할 만한 세력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은 그동안 유지해왔던 정책을 고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중동지역의 질서가 외부 세력에 의해 통제되던 냉전 시대의 상황과는 달리 탈냉전 시대의 중동질서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특징지워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경우 중동지역에 있어 미국의 영향력이 냉전 시대와 비교하여 볼 때 반드시 커졌다고 단언하기가 곤란한 점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신 중동정책은 미국의 군사력에 기반을 두고 국제적으로는 외교적 및 경제적 제재를 통해 이라크와 이란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중동지역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전략적 동반자로서 역할을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봉쇄" 원칙은 과거와는 달리 미국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중동지역의 위협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은 인정하지만 지역적으로 군사적 및 외교적 연합에 의해 접근하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냉전 기간 중에는 중동지역과 관련한 원칙의 선언이 의회연설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 진 반면 클린턴 행정부의 중동정책은 비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는 점은 중동지역의 문제는 미국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즉, 클린턴 행정부의 "이중적 봉쇄" 원칙은 미국의 외교적 및 군사적 자원을 최소한으로 투자하면서 중동지역에서 유일한 패권국가로서 이스라엘 및 친미 아랍국들의 안보를 굳건히 보호할 수 있는 "저비용"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라크에 대하여 이따금씩 군사적 및 외교적 시위를 시도하고 경제적 봉쇄를 통한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함으로써, 그리고 이란에 대하여 통상금지를 통한 고립화를 강요함으로써 미국은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그 세력이 위축된 양국에 그 회복의 속도를 더디게 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비용" 전략은 그 효과를 거두기 위한 환경이 걸프전과 냉전의 종식으로 중동지역에서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냉전 시대가 미국과 소련간의 군사력에 의한 대결로 압축되었다면 탈냉전 시대는 무역 블록간의 경제적인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더구나 냉전시대의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에 위협을 주었던 경제적 세력으로서의 아랍국들이 탈냉전 시대에는 미국의 세력에 의지해야만 하는 군사적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변화의 추세속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외교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했으며 그 결과 중동지역은 미국의 관심을 끄는 급박한 지역으로부터 벗어났던 것이다.
단지 이 시기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란과 이라크가 중동지역의 패권국으로서 재등장하는 것을 막고 아랍 이스라엘간의 잠재적인 긴장 상황이 평화정착의 과정으로 순조롭게 이행되는 것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군사적 및 외교적 지원을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중동지역의 문제가 세계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역적인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것, 즉 미국외교정책에 있어 통상적인 관심 사안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냉전 이후 중동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소멸되었고 아랍권 내부가 분열되었으며 세계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이 가졌던 전략적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이로써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이 재연되더라도 강대국간의 확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석유의 무기화 조치가 재연될 가능성도 약화되었으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서 부각될 가능성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미국은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영토를 둘러싼 갈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더불어 중동지역의 문제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는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이 갖는 지역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중동지역의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며, 또한 현실이 그러했다.3) 물론 중동지역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중동지역의 이러한 현상유지가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 세칭 강경파인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현재, 이들의 중동정책이 다시금 강경노선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이번 본토에 대한 직접테러와 보복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 앞으로의 미국의 중동정책을 예상한다는 것은 더욱 난망한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미국의 중동정책이 중동질서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반영할 수 밖에 없다는 맥락에서 미국은 세가지 선택―개입의 포기, 적극적인 개입, 그리고 실용적인 접근―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중동문제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는 방안은 중동지역의 특성상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이 오히려 미국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관점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석유, 이스라엘 등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중요한 이해관계를 고려해 볼 때, 그 실현가능성은 희박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적극적인 개입 정책은 중동지역에서 냉전 이후 조성된 미국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강압적인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방안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미국이 아랍 이스라엘간에 조성된 본질적인 갈등과 관련하여 일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미국의 국익에 위협이 되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게 경고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인 개입 정책은 중동지역의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인데, 즉 중동지역의 갈등은 그 원인이 만성적이며 깊숙히 숨어있으며, 그리고 외부세력의 지시에 의해 신속히 해결되지 않는 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의 능력과 의지로서 해결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은 본질적인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실용적인 접근 방안은 개입의 포기 및 적극적인 개입의 방안이 중동지역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가정하에 제시되는 중도적인 방안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방안은 신속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접근방법과는 달리 포괄적인 해결보다는 사안별로 접근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높이며, 그리고 중동지역의 안정성 유지는 현상유지의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보다는 이 지역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를 적절히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것이 되었든 미국의 대중동정책이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현재의 역설적 상황은 앞으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어떤 똑부러지는 해결책이란 존재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한 세력들은 탈냉전 시대의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에 대한 강력하고도 새로운 위협 요인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이번 세계무역센터 테러는 자신들의 위협의 '크기'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동안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 해결을 목표로 하느냐 현상유지냐의 사이에서 일관성없는 (한편 '이스라엘 편향'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일관적이었던) 미국의 중동정책은 미국이 중동지역에 관여한 목표들간의 상충성, 즉 석유와 이스라엘의 안보는 양립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유의 가격과 공급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산유국인 아랍국들에 대하여 제공되는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위협을 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제공하는 경제적 및 군사적 지원은 아랍국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의 중동정책은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특징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의 중동정책이 상충되는 목표를 추구하는 한 미국에게 중동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문제, 즉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은 탈냉전 시대에도 여전히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남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현재 처한 상황은 '자기 덫에 걸린 사냥꾼'의 모양이라는 것이다. 즉 해결을 미명으로한 미국의 중동개입은 끝없는 모순과 만성적인 갈등만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란을 잡기 위해 지원한 이라크가 결국 91년에 미국의 뒤통수를 쳤듯이, 반소련/친미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은 아랍세계 내에 뿌리깊은 고통과 불만,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서 통제불가능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을 양산했고, 이번 미국 본토에 대한 직접 테러는 그러한 폭력의 직접적 표현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미국이 이것을 해결하는 길이 과연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아프간에 대한 보복공격과 빈 라덴의 제거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1) 1970년대 초반까지의 석유가격은 고작 1배럴당 2달러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2) 미국이 1980년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한 이유는 중동지역에서의 이란 패권 방지라는 미국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1990년의 걸프전쟁은 결국 미국이 '호랑이의 자식'을 키운 결과라는 역설적 상황의 표출이었다. 즉, 미국의 이란 패권저지정책은 거꾸로 이라크 패권을 용인하는 것이었고, 걸프전쟁은 이라크의 패권확장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3) 90년대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PLO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상의 일단에 대해서는 본지 4월호를 참고.
미국의 대중동정책 형성의 배경: 석유와 냉전
미국의 중동정책의 중심점은 중동지역이 석유에 대한 통제력과 결정권과 관련되었다. 당연하게도 소련이 중동지역을 장악한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유에 대한 통제력, 즉 석유의 가격과 공급량 등에 대한 결정권이 소련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 지역에 있는 개별 중동국가들이 석유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도 여전히 미국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다. 중동지역 내에서 석유를 무기화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및 친미적인 아랍국가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중동지역이 반미적인 아랍국가들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반드시 회피되어야 할 상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900년대 들어서면서 중동지역의 석유가 가지는 군사적 및 경제적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적극적인 중동정책을 추진한 영국과 달리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야 비로소 석유가 가지고 있는 전략적이며 안보적인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치루기 위해서, 그리고 전후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석유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였지만 석유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에 석유는 미국의 안보정책에 있어 그 중요도가 높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석유의 총 사용량 중에서 반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그 수입의 반 이상이 중동지역으로부터 제공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중동지역에 대한 관심의 수준을 증대시켰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석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몇몇 산유국들의 국내적 요인으로 인하여 석유가격은 1970년대 후반 1배럴당 35달러 정도로 폭등하게 되었다.1) 이러한 석유가격의 상승은 1973년에 발발한 아랍 이스라엘 전쟁이 아랍국가들을 단합시키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아랍국가들이 미국 등 서방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석유를 무기화했던 결과였던 것이며, 더불어 1979년에 발생한 이란의 혁명은 석유가격을 다시금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중동정책은 중동지역의 석유가격의 무기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 요인인 소련 및 내부적 요인인 이란이 중동지역의 패권국가로서 재등장하는 것을 막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2) 결국 석유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미국은 중동지역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관점은 중동지역이 반미 세력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미국의 정책에 주요한 동기를 부여했다.
소련의 봉쇄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졌다. 즉, 미국은 유럽에서 구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이 중동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구를 창설하여 소련의 팽창에 대항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국가들은 중동지역의 안보에 있어 주요한 위협으로서 소련보다는 이스라엘을 고려하고 있었고, 따라서 1950년대 미국이 주도한 중동방위기구와 같은 조직은 중동지역내에 있는 가맹국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만한 동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소련이 중동지역에 만연한 이러한 반이스라엘 분위기를 이용하여 그 영향력을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은 이스라엘과 아랍분쟁을 매개로 지역적 냉전체제의 틀을 견고하게 다지면서 대립하였다. 이스라엘의 의견을 대변하는 대부로서 미국의 역할과 아랍측의 의견을 대변하는 소련의 역할은 중동의 지역분쟁을 축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확대시켰던 것이다. 특히 미국은 앞서 지적했듯이 석유자원 때문에 걸프지역에서는 친사우디아라비아 정책을 펴면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 이집트와 시리아 및 이라크의 정치후견자의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갔지만, 이란의 팔레비정권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친미성향에 종종 가로막혔다. 또한 소련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과 팔레스타인에 무기지원을, 미국은 이스라엘에 경제지원과 무기공급을 하면서 마치 각자의 대리전을 치루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이스라엘 편향'
중동의 석유자원에 대한 안정적 확보와 소련의 남하정책의 봉쇄라는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두 축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지라는 점에서 결합되고 두드러지게 된다. 미국은 1940년대 중반 이스라엘의 국가승인을 앞두고 심각한 논란에 빠졌다. 미국내의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의 지지를 주장한 반면 국무성과 국방성 등 관료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할 경우 미국의 국익에 초래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아랍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중동지역의 긴장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아랍국가들간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명백할 뿐만 아니라 소련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중동지역의 석유가 갖는 중요성은 미약했으며 소련이 중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전세계적인 냉전이 심화되면서 중동지역은 동서간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중심적인 지역으로 등장함에 따라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중요성은 새롭게 인식되었다. 특히 소련이 1955년에 이집트에 무기를 공급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사실이든 아니었든 간에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사회주의자로서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우려는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소련이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 비군사적인 수단, 특히 외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중동지역의 주요한 세력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으며,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 반면 영국은 페르시아만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지역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력은 1956년의 수에즈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 약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마침내 1967년에 아랍과 이스라엘간에 벌어진 '6일 전쟁'(수에즈전쟁)은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간에 그동안 형성되었던 역학관계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6일 전쟁' 이후 존슨 대통령은 이집트가 주도하는 친소 아랍동맹국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과 전략적인 동맹관계를 맺었다. 반면 소련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비난하면서 아랍국들에게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
한편 1967년의 6일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이 획득한 영토의 반환과 관련한 문제는 미국내에서 다시금 논쟁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6일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는 이스라엘의 안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반환될 수 없다는 주장을 이스라엘이 피력했기 때문에 아랍국들은 상실한 영토의 회복을 위하여 또다른 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점에서 그 영토는 중동지역의 불안정성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요인으로서 등장했다. 따라서 미국측은 중동지역의 평화와 영토를 상호 교환해야 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으며, 이러한 주장은 이스라엘의 불만을 야기시킴으로써 미국 이스라엘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서 작용했다.
사실상 1973년에 발발한 아랍 이스라엘의 '10월 전쟁'은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목적으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발발된 것으로서 이 전쟁은 당시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랍국들의 자존심 회복을 위하여 정치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 따라서 1973년의 10월 전쟁은 잃어버린 영토의 회복에 대하여 아랍국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은 지대했다는 점, 그리고 아랍 이스라엘의 갈등에 있어 한 측의 일방적인 우위는 다른 측의 열세를 가져옴으로써 중동지역의 전반적인 안정에는 오히려 역작용을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중동지역을 둘러싼 아랍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이스라엘의 안보가 강화되면 될수록 아랍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 악화되는 악순환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원보다는 아랍 이스라엘의 관계개선을 주선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안보를 확보하고 아울러 중동지역의 긴장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중동정책을 수정하게 되었다. 1973년의 10월전쟁 이후 닉슨 대통령이 미국 이집트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이집트 이스라엘간의 화해를 위한 기반을 조성한 것, 그리고 1970년대 후반 카터 대통령이 이집트 이스라엘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체결을 주선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협정을 통해서 이집트는 미국의 경제적 원조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1967년의 6일전쟁에서 상실했던 영토인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는 이득을 얻은 반면 반미 아랍국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음으로써 아랍권의 지도자 위치를 상실하는 손실을 입게되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안보에 대한 위협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얻는 외에 중동지역의 패권국으로서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받은 외에 아랍권의 단결을 부분적으로 와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서 소련의 역할을 주변화시키는 효과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아랍 이스라엘의 갈등은 부분적인 해결에 그쳤으며 더우기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됨으로써 중동지역의 불안정성은 냉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과 냉전을 구별하지 않았다. 즉 이스라엘과 서방국들에 대한 아랍국들의 증오심을 중동지역에 내재하는 요인들의 산물로서 이해하지 않고 소련이 사주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과 전쟁에 대한 해결책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 지를 묵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는 탈냉전의 시대인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전환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1990년대, 탈냉전 시기의 미국의 대중동정책
걸프전과 냉전의 종식으로 중동지역에서 미국은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중동지역의 국가들이 가까운 시일내에 미국의 이익에 대항할 만한 세력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은 그동안 유지해왔던 정책을 고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중동지역의 질서가 외부 세력에 의해 통제되던 냉전 시대의 상황과는 달리 탈냉전 시대의 중동질서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특징지워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경우 중동지역에 있어 미국의 영향력이 냉전 시대와 비교하여 볼 때 반드시 커졌다고 단언하기가 곤란한 점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신 중동정책은 미국의 군사력에 기반을 두고 국제적으로는 외교적 및 경제적 제재를 통해 이라크와 이란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중동지역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전략적 동반자로서 역할을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봉쇄" 원칙은 과거와는 달리 미국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중동지역의 위협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은 인정하지만 지역적으로 군사적 및 외교적 연합에 의해 접근하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냉전 기간 중에는 중동지역과 관련한 원칙의 선언이 의회연설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 진 반면 클린턴 행정부의 중동정책은 비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는 점은 중동지역의 문제는 미국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즉, 클린턴 행정부의 "이중적 봉쇄" 원칙은 미국의 외교적 및 군사적 자원을 최소한으로 투자하면서 중동지역에서 유일한 패권국가로서 이스라엘 및 친미 아랍국들의 안보를 굳건히 보호할 수 있는 "저비용"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라크에 대하여 이따금씩 군사적 및 외교적 시위를 시도하고 경제적 봉쇄를 통한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함으로써, 그리고 이란에 대하여 통상금지를 통한 고립화를 강요함으로써 미국은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미 그 세력이 위축된 양국에 그 회복의 속도를 더디게 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비용" 전략은 그 효과를 거두기 위한 환경이 걸프전과 냉전의 종식으로 중동지역에서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냉전 시대가 미국과 소련간의 군사력에 의한 대결로 압축되었다면 탈냉전 시대는 무역 블록간의 경제적인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더구나 냉전시대의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에 위협을 주었던 경제적 세력으로서의 아랍국들이 탈냉전 시대에는 미국의 세력에 의지해야만 하는 군사적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변화의 추세속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외교정책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했으며 그 결과 중동지역은 미국의 관심을 끄는 급박한 지역으로부터 벗어났던 것이다.
단지 이 시기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란과 이라크가 중동지역의 패권국으로서 재등장하는 것을 막고 아랍 이스라엘간의 잠재적인 긴장 상황이 평화정착의 과정으로 순조롭게 이행되는 것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군사적 및 외교적 지원을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중동지역의 문제가 세계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역적인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것, 즉 미국외교정책에 있어 통상적인 관심 사안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냉전 이후 중동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소멸되었고 아랍권 내부가 분열되었으며 세계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이 가졌던 전략적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이로써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이 재연되더라도 강대국간의 확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석유의 무기화 조치가 재연될 가능성도 약화되었으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서 부각될 가능성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미국은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영토를 둘러싼 갈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더불어 중동지역의 문제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는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이 갖는 지역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중동지역의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며, 또한 현실이 그러했다.3) 물론 중동지역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중동지역의 이러한 현상유지가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 세칭 강경파인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현재, 이들의 중동정책이 다시금 강경노선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이번 본토에 대한 직접테러와 보복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 앞으로의 미국의 중동정책을 예상한다는 것은 더욱 난망한 상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미국의 중동정책이 중동질서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반영할 수 밖에 없다는 맥락에서 미국은 세가지 선택―개입의 포기, 적극적인 개입, 그리고 실용적인 접근―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중동문제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는 방안은 중동지역의 특성상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이 오히려 미국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관점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석유, 이스라엘 등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중요한 이해관계를 고려해 볼 때, 그 실현가능성은 희박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적극적인 개입 정책은 중동지역에서 냉전 이후 조성된 미국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강압적인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방안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미국이 아랍 이스라엘간에 조성된 본질적인 갈등과 관련하여 일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미국의 국익에 위협이 되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게 경고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인 개입 정책은 중동지역의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인데, 즉 중동지역의 갈등은 그 원인이 만성적이며 깊숙히 숨어있으며, 그리고 외부세력의 지시에 의해 신속히 해결되지 않는 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의 능력과 의지로서 해결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은 본질적인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실용적인 접근 방안은 개입의 포기 및 적극적인 개입의 방안이 중동지역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가정하에 제시되는 중도적인 방안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방안은 신속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접근방법과는 달리 포괄적인 해결보다는 사안별로 접근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높이며, 그리고 중동지역의 안정성 유지는 현상유지의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보다는 이 지역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를 적절히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것이 되었든 미국의 대중동정책이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현재의 역설적 상황은 앞으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어떤 똑부러지는 해결책이란 존재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한 세력들은 탈냉전 시대의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에 대한 강력하고도 새로운 위협 요인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이번 세계무역센터 테러는 자신들의 위협의 '크기'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동안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 해결을 목표로 하느냐 현상유지냐의 사이에서 일관성없는 (한편 '이스라엘 편향'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일관적이었던) 미국의 중동정책은 미국이 중동지역에 관여한 목표들간의 상충성, 즉 석유와 이스라엘의 안보는 양립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유의 가격과 공급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산유국인 아랍국들에 대하여 제공되는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위협을 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제공하는 경제적 및 군사적 지원은 아랍국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의 중동정책은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특징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의 중동정책이 상충되는 목표를 추구하는 한 미국에게 중동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문제, 즉 아랍 이스라엘의 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은 탈냉전 시대에도 여전히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남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현재 처한 상황은 '자기 덫에 걸린 사냥꾼'의 모양이라는 것이다. 즉 해결을 미명으로한 미국의 중동개입은 끝없는 모순과 만성적인 갈등만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란을 잡기 위해 지원한 이라크가 결국 91년에 미국의 뒤통수를 쳤듯이, 반소련/친미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은 아랍세계 내에 뿌리깊은 고통과 불만,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서 통제불가능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을 양산했고, 이번 미국 본토에 대한 직접 테러는 그러한 폭력의 직접적 표현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미국이 이것을 해결하는 길이 과연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아프간에 대한 보복공격과 빈 라덴의 제거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1) 1970년대 초반까지의 석유가격은 고작 1배럴당 2달러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2) 미국이 1980년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한 이유는 중동지역에서의 이란 패권 방지라는 미국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1990년의 걸프전쟁은 결국 미국이 '호랑이의 자식'을 키운 결과라는 역설적 상황의 표출이었다. 즉, 미국의 이란 패권저지정책은 거꾸로 이라크 패권을 용인하는 것이었고, 걸프전쟁은 이라크의 패권확장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3) 90년대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PLO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상의 일단에 대해서는 본지 4월호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