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1.20호
첨부파일
-부흥.HWP

이슬람의 봉기(1) Islamic Revolt*

Ankie Hoogvelt |
번역: 한반도위원회(김용현, 임필수)

[역주] 호오펠트는 아랍 내부의 갈등에 대해 주목하면서, 이를 이 지역의 역사적이며 정치경제적인 상황 속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호오펠트에 따르면, 페르시아만 주변의 부유한 6개 국가(모두 합쳐 약 1천만명의 인구)만이 석유수출로 인한 막대한 부의 ‘떡고물’을 향유할 뿐이며, 이슬람 세계에 속한 대부분의 인민들은 새로운 세계적 체계, 즉 현재의 금융세계화 질서에 통합(포섭)될 전망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아랍의 분노를 가져온 것은, 예컨대 서방의 석유 지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탈식민지 이후 시기 동안의 민족적 발전전략의 실패와 파탄, 그리고 현재의 금융세계화에 ‘의한’ 배제에 있는 것이다. 호오펠트는 아랍의 부흥, 그리고 이슬람의 부흥에 대한 아랍 민중의 요구와 그를 위한 봉기는 서양의 ‘배제’, 세계화의 ‘배제’에 대한 이슬람-아랍이라는 '정체성(동일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는 아랍 민족주의의 전성기 당시와 같은 ’종속적 통합‘(식민지화)에 대한 이탈전략은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동시에 ― 예컨대 아랍 사회주의의 반제국주의-사회주의-아랍통합과 같은― 통일된 전략 프로그램을 제시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의 취약성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호오펠트는 상당히 정확한 이슬람과 중동질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현재 중동지역(혹은 아랍)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우리가 ‘상식의 수준’에서 알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지식의 오류를 정정하고, 이른바 ‘아랍의 진실’에 접근하는데 매우 유용한 글이 될 듯하다. 지면관계상 2회에 걸쳐 연재하게 되었고, 완역이 아닌 발췌․번역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원문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 역자

* * *

오늘날 무슬림(이슬람교도-역주)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는 28개이고, 여기에는 8.36억 명의 인구가 존재한다.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도 상당수의 무슬림들이 존재하고 있다. 세계 무슬림 인구는 약 12억명, 즉 세계 인구의 1/4에 달하고, 유럽에서도 이민과 개종으로 인하여, 이슬람은 2번째의 종교가 되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발생한 전 세계적인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서양의 논평가들은 전투적인 이슬람의 부활이라고 하였다. 그 특징적 순간은 당연히 [우선] 이란의 1979년 친 서방 왕조 샤(Shah)의 전복과, 근대 세계에서의 최초의 신정(神政) 이슬람 공화국(theocratic Islamic Republic)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레바논에서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s)의 후원을 받는 하마스(Hamas) 운동은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내부의 강경 분파를 강화하였다. 수단의 이슬람주의자(Islamist)들은 군사 쿠데타 이후 세워진 임시정부가 비-이슬람교도인 남부와 타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전을 지속하였다. 알제리에선,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들의 당인 FIS가 1990년 선거에서, 계엄령 하에 탈취된 투표함에서만 자신들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내전이 발생하였다. 이집트의 경우, 원리주의자들의 공격에 의해 관광산업이 큰 영향을 받게 되자, 무바라크 정권은 수천 명의 원리주의자들을 재판 없이 투옥하는 등 대규모의 위험천만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한편, 인도에선, 수면 아래에서 들끓고 있던 무슬림과 힌두교도 사이의 항상적인 긴장은 카슈미르(Kashmir)에서의 무슬림 봉기와, 힌두교도들에 의한 아요디아(Ayodhya)에서의 모스크(이슬람사원-역주)의 파괴 이후 폭발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상쟁하는 이슬람 그룹들간의 내전이 지속되었던 반면, 터키에서는 최근 선거 결과, 이슬람 정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소비에트 제국의 해체 이후, 이슬람에서 [자신의] 정체성[동일성](identity)을 찾는 새로운 국가들이 출현하였다.
1993년 <Foreign Affairs>지의 한 도발적인 논문에서,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예언했다. 그가 말한 바에 따르면, 국제관계의 1차적 단위로서 민족-국가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고, 앞으로 세계 인민들간의 갈등과 경쟁은 다른 수준(level), 즉 주로 문화 혹은 문명이라고 알려진 거대 단위들 사이에서 작동할 것이다. 그는 모두 8개의 문명 중 세 개의 주요 문명, 즉 서방(유럽-아메리카 문화), 동방(유교 문화), 이슬람을 꼽았다. 그리고 헌팅턴은 “인류에 존재하는 거대한 분할과 갈등의 지배적인 원천은 문화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헌팅턴은 경제적 근대화와 사회적 변화로 인하여, 인민들이 장기적인 지역적 정체성[동일성](identity)으로부터 분리되며, 또한 정체성[동일성](identity)의 원천이었던 민족국가는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가 민족[-국가]가 남긴 이러한 공백을 메우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인민들의 국경-교차적(cross-border)인 사회적 상호관계의 증가는 인민들이 ‘타자’(the other)에 대해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원천으로서 포함되는 거대한 사회적․문화적․종족적 집단의 역설적 효과를 갖는다.
헌팅턴은 이슬람과 서방간의 분노에서 오는 문명간의 충돌이 가장 긴급한 문제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헌팅턴 역시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슬람과 서방의 충돌이 석유와 빈곤간의 강력한 모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페르시아만 주변의 부유한 6개 국가―모두 합쳐 약 1000만 명의 인구―를 제외하고, 무슬림의 다수는 석유자원이 매우 적거나 아예 없는 국가에 살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전 세계에서 최빈국, 혹은 중간소득 국가에 속한다.
내가 보기에, 현이슬람 봉기의 뿌리를 올바르게 분석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다. 이슬람 세계에 속한 대부분의 인민들은 새로운 세계 체계에 통합될 전망이 전혀 없고, 이와 유사하게 선진국의 이슬람 소수민족(minority)들 역시 자신들이 세계적 체계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슬람의 봉기를 몰고 있는 것은, 서방의 석유 지배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식민지(neo-colonial) 시기 동안의 민족 발전 전략의 실패, 그리고 현재의 세계화라는 에피소드에 있다. 이슬람의 소생(resurgengence)은 ‘배제’(exclusion)에 대한 '정체성[동일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랍 민족주의의 전성기 당시와 같은 ’종속적 통합‘에 대한 대응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체성[동일성]의 정치’는 새로운 사회 모델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으며, 지리 전략적(geostrategic) 요소가 될 조직적 프로그램의 통일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나는 이러한 나의 분석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슬람의 반역에 관한 담론들 중에서 우세한 것으로 보이는 두 주제들에 대해 평가할 것이다;

1. 이슬람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영적 부흥의 연속성,
2. 서방과의 역사적 대치 상황이 가져온 문화적 영향.

영적 부흥 Spiritual Renewal

이슬람은 종교 이상의 것이며, 완전한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신과 그의 인민과의 관계를 다룰 뿐만 아니라, 법제도, 계약제도, 사회기관 및 정치기관, 경제적 부와 경제 활동 문제 등과 같은 인민들간의 사회적 관계들을 지시한다. 또한 이슬람은 특히 가족, 결혼, 이혼, 상속 등에 대해 세부적으로 다루며, 의복과 예절, 음식과 위생 등을 다룬다. 이슬람[법]의 두 가지 주요 원천은 다음과 같다;

1. 꾸란(Qu'ran): 천사장 가브리엘을 통해 신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직접 내린 계시,
2. 순나(Sunna): 무함마드의 말과 그의 공식 전기를 편집하여 성전으로 만든 것. 이슬람의 법체계는 크게 5가지의 근본을 갖는다. 즉, 꾸란(Qu‘ran), 하디스(Hadith, 혹은 순나(Sunna)), 이즈마(Isma, 이슬람 공동체의 합의), 끼야스(Qiyas, 유추에 의한 해석), 이즈티하드(Ijtihad, 법학자(울라마)에 의한 독자적 해석)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어디까지를 그 근본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이슬람 법학자 및 학파들간의 분화가 발생하게 된다. - 역자


기원후 632년(이슬람력 10년) 무하마드의 죽음 이후, 완전한 형태의 성전이 편찬되었다. 이에 대한 해석과 반대해석을 놓고 법학파들 사이에 혼란이 있었고, 기원 후 900년쯤에야 학자들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이즈티하드[법해석] 방법‘(Gate of ijtihad)이 폐지되었다(이즈티하드(ijtihad)는 이슬람법에 관한 신학자의 독자적인 판결을 의미한다). 이는 꾸란과 순나에 대한 논쟁이 더 이상 지지를 얻을 수 없으며, 오직 과거의 전례만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꾸란과 순나에 대한] 종교적 권위는 이슬람교도의 거대 다수파인 순니(Sunni)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상당한 규모를 갖는 소수파[순니에 비해]인 쉬아(Shi'ites)는 종교적 권위를 이맘(Iman)이라고 불리는 영적인 인간에게 집중한다. 쉬아는 이슬람 초기부터 분리된 분파로서 스스로를 구성했으며, 무하마드의 사촌이며 사위였던 알리(Ali, 제4대 칼리파 혹은 이맘-역자)의 직접적인 계승으로부터 종교적 영감의 권위를 찾고 있다. 12번째이자 마지막 이맘이었던 무하마드 알-마디(Muhammad al-Mahdi)가 878년 사라졌지만, 그 사실이 어떤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숨은 존재’(Hidden One)가 되었고, 그에게 선택된 대행자들이 그 권위에 의거하여 샤리아(sharia, 아랍어로 ‘길’이라는 뜻, 무슬림들이 따라야 할 종교법을 가리킴 -역자)에 관한 의견을 선고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페르시아에서, 쉬아파는 페르시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였고, 이 당시 순수 페르시아 인에 의한 지배로 아랍의 지배를 대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쉬아는 페르시아(이후 이란)의 민족적 종교가 되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는 샤 왕조를 전복하는 혁명에 성공하였고, 자신이 12대 이맘의 화신(incarnation)임을 주장하였다.
순니와 쉬아간에 대별되는 (그리고 상호간의 적의로 귀결되는) [종교적] 권위의 체계에도 불구하고, 양 체계는 서로를 강력한 종교적 경쟁자로 만드는 특징을 갖는다. 쉬아파의 경우, ‘숨은 존재’로서 이맘의 연속적인 현존은, 메시아의 귀환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기적으로 고조시킬 수 있다. 즉, 정통파에 대항하여 사회적 반역을 주도하는 새로운 이맘으로서,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에 대한 희망 말이다. 순니파의 경우, 이즈티하드의 교리에 따라, 사회적 저항은 성전에 입각한 논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이 방식으로 현존 권력에 대한 도전이 이루어진다.
겔너(E. Gellner)에 따르면, 이즈티하드의 사회학적 의미는 이중적이며, 이슬람의 핵심에 매우 변증법적인 무언가를 불어넣는다. 먼저, 이즈티하드는 [이슬람의] 학자/법학자(scholar/jurist)인 울라마(ulema)에게 권력의 기초를 제공한다. 그들은 유추(類推, analogous reasoning)의 기초 위에서 성직자의 역할을 하며, 어떤 행위나 사건이 이슬람법과 일치하는지를 결정한다. 이는 그들에게 세속적 권위에 대해 독립적인 권력의 기초를 제공하며, 따라서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는 항상 제도적으로 분리된다. 다른 한편, 정치적 권위가 종교적 권위에 종속된다. 겔너에 따르면,

사회적, 정치적으로 초월적인 판단 기준이 존재하므로, 종교적 권위는 정치적 권위가 행사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 넘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들이 죄를 범할 경우 쉽게 비난할 수 있다.

따라서, 제도적으로는 양자가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이슬람은 정교분리적(secular) 문명이 아니다. 예수는 신과 로마황제간의 분리를 수용하고, “가이사[로마의 황제]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라”라고 말했지만, 무하마드와 이슬람은 이러한 분리를 결코 인정한 바 없다. 게다가, 신법(神法)의 조작불가능성(non-manipulabilty)은 정치적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의 합법성을 보증하는 원천이 되었다. 이 때마다, 억압된 대중들은 그들의 불만을 성전에 의거한 담론으로 변형하였다. 이하에서 보다 분명히 하겠지만, 현재의 이슬람의 봉기의 대부분은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영적 부흥’(spiritual renewal)은 문화적 신앙의 체계로서 이슬람교에 내재적이었다. 그러나, 고유한 물질적 상황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 역시 ‘영적 부흥’의 원천이다. 이슬람 문명은 자신의 역사 진행과정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 위에 서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생태 및 경제에 기반 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토만 제국이 5세기가량 지배하여 강화시킨 술탄국(Sultanates)의 도시 사회이다. 이는 국가공무원, 군인, 이슬람 (법)학자(ulema)들의 사회이다. 이들 모두는 상인들과의 암묵적 협력 하에서, 상업과 금융의 질서와 네트워크를 유지하였고, 주변 농민들로부터 공물을 거두었다. 다른 하나는, 도시적인 사회구성체의 범위 밖에서, 중앙 통제 외부에 남아 있는 부족 세력들이 존재하였다. 브롬리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속국(tributary state)들은 시골지방들을 통제할 수 없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유목생활(pastoral nomadism)의 대단히 큰 비중 때문이었다. 유목생활은 이동성을 갖는 생산수단과 무장한 인구를 갖고 있었으며, 도시와 같은 성장이 부재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는, 겔너가 확신하였듯,

이슬람의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특징, 즉 이슬람의 학자들의 상위 이슬람(High Islam)과 인민들의 하위 이슬람(Low Islam)으로의 내부적 분할을 발생시켰다.

상위 이슬람은 금욕적이었고, 성서중심이었고, 신과 인간을 중개하라는 요구를 금지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반면, 하위 이슬람(또는 folk Islam)은 단순하고, 융통성이 있고, 유연하였으며, 성스러운 신비한 영웅들(수피주의자(sufis)[이슬람 신비주의자들-역자])에게 영감을 받았고, 일반대중들(grassroots)에 기초한 노선(다리까(tarikas)[아랍어로 ‘길’(road)이라는 뜻-역자], 무슬림형제단)에 집중하였다. 상위 이슬람의 학자들이 이슬람사회 전체에 대해 ‘내부정화운동'을 시작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두 개의 종교적 유형은 충돌하였다.

서방과 이슬람의 대치 The West Confront Islam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이슬람 세계는 서양에 의해 문화적인 적(adversary)―즉, 문화적 '타자'(cultural 'other')―으로 간주된다. 당연하게도 양자는 초월적 신의 유일성에 대한 배타적 주장, 聖地의 공유, 지리적 근접성을 두고 상쟁하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 시기 동안 양측에 공포감이 새겨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슬람과의 대치 속에서, 즉,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그 이후에 걸쳐 서방은 스스로 그들을 정의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방의 문화적 산물이다.
막심 로댕송(Maxine Rodinson)은 이슬람에 대한 서양 이미지의 역사에 대한 개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슬람의 이미지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천천히 용접되어온 것으로서 최근의 기독교 세계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적들의 특징들에 대한 분명한 관점과 십자군전쟁을 향한 노력으로 나아갔다.

십자군전쟁이 심화되면서, 적들의 이미지는 더욱 단순화되고 상투화되었다. 이에 따라, 상투적인 이슬람은 이미 체계적인 문명적 통일체로 간주되었다(그러나 당시 실제 이슬람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후 중세시대에 라틴유럽이 내부적 투쟁에 몰두하면서, 이슬람과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부차화되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내부적인 이데올로기 싸움은 신앙의 상대성이라는 씨앗을 뿌렸고, 이는 기독교 학자들이 이슬람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열었다. 이로부터 이슬람은 호기심과 이국적 취미의 주제가 되었고, 특히 철학, 예술, 종교의 영역에서 아라비아 학문이 융성하게 되었다.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뒤따르는 과학의 탄생과 함께, 이슬람은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계획에 있어서, 서방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한 동반자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아라비아와 이슬람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오리엔탈리즘’, 즉 동방에 대한 연구에 관한 전문적 학문분과로 바뀌었다. 이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봉사하게 되었다. 유럽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면서, 무슬림들을 경멸의 제물로 만들었다. 이는 아랍 사회, 즉 언어, 의복, 종교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가장 천박하고 기계론적인 형태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이론화의 절정은 지속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동방과 서방에 대한 전형화이다. 그리하여 오리엔탈[동방]은 오직 옥시덴탈[서방]의 거울상으로 전형화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베버의 연구는 서방과 동방의 경제적 (및 종교적) ‘심성’(mentalities) 사이에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는 19세기 사상가들의 관념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는 정체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이기적인 대비를 이론화하였다. 즉, 서방은 보편적, 이성적, 다원적, 세속적(secular)이므로 경제적으로 동태적(dynamic)인데 반해, 동방은 특수적(particularist), 전통적, 전제적이며 종교적 몽매주의에 대한 탐닉 때문에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종료는 오토만 제국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유럽국가들간의 파괴적인 경쟁의 배경에는, 중동 및 거대한 석유자원에 대한 유럽 민족들 사이의 쟁탈전의 시작이다. 유럽인들은 두가지 새로운 원칙으로 국경의 동결 및 왕조의 동결을 세웠다. 모래 위에 제멋대로 그은 선은 항구적인 국경선이 되었지만, 사실 이는 과거에는 없거나 계속 변화했던 것이고, 식민지 권력은 풍부한 석유와 적은 인구를 갖는 국가와 석유가 거의 없고 인구가 많은 국가를 나누는 식으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는 서방과 이슬람간의 문화적 정치적 관계를 다시금 변화시켰다. 이 시기 동안 ‘지역 인민들에게 책임을 강제하는 적극적인 조류‘가 특징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동방의 수동성이 전투적인 근대적 생활(militant modern life)로 바뀌었다. 아랍의 보호국, 위임통치국 및 공공연한 식민지의 영토가 창조되면서, 강제적으로 정치적 국가형성을 위한 과정도 시작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으로 성장하였고, 전간기(戰間期) 및 전후 시기 동안 헌법상의 주권이 보증되었다.
이 시기 인위적인 민족국가의 강제는 감당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얀센(Jansen)에 따르면, 1500년 이후로 이슬람 지역은 거의 항상 서방으로부터의 침략 상태에 있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폭동과 내부의 무장봉기는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이슬람의 방어이자 모국(heart and home)의 방어였다. 이러한 폭동과 무장봉기는 대부분 지역 수준에서 발발하였고, ‘상위 이슬람’, 즉 도시 학자의 수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위 이슬람’, 즉 일반대중이라는 인민 수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데, 종종 유럽의 침략은 기독교 선교를 지원하는 과격한 정책을 동반하였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지하로 숨어서 ‘비밀’ 사회를 형성하였다.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은 무슬림 대중 한복판의 엔클레이브(enclave)로서 식민주의 권력에 의해 육성되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이슬람의 전사들을 낳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PSSP


다음호에 실릴 내용:
- 교육과 동양화 Education and Orientalisation
- 종속적 발전의 실패 The Failure of Dependent Development
- 이슬람의 새로운 지식인의 등장과 반(反)발전주의 정치학 The Rise of Islamist New Intellectuals and the Politics of Anti-developmentalism
주제어
평화 국제 이론
태그
교섭 민주노조 현장 복수노조 노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