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21호
노동자행진곡 (노동자노래단 3집)
"그들"에서 "우리" 그러나....
‘노동자노래단’ 3집 앨범은 사회과학 서점, 노동조합, 현장조직이라는 불법테이프 시장에서 혁명과도 같았다. 앨범 완성도가 과거와 현저하게 달랐던 것이다. 가수들의 가창력(특히, 노래해석)과 합창실력, 연주실력이 두드러지게 좋아졌다. 더구나 녹음은 모 레코드사 스튜디오에서 몰래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만큼 동시대 어떤 것하고도 달랐다. 어쩌면 자기도 있을지 모른다며, 지금 옛 서랍을 더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많이 팔렸고, 여기에 수록된 대부분의 노래는 1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콧노래로 흥얼거릴 만큼 많이 불렸다. 이 앨범은 다행히도 복원되어 있다. 노동의 소리(www.nodong.com) 홈페이지에는 이것말고 1집, 2집, 4집도 복원되어 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노동자 행진곡), “나를 따르라, 노동형제여, 우리는 선봉대”(전노협 선봉대), “우리 변치 말고 투쟁하자고”(참사랑), “우리네 노동자가 국회에 들어가 정치를 합시다”(1노2김가), “하루하루 지쳐진 내 몸”(짤린 손가락), “내 청춘 다 바쳐서 목숨걸고 싸웠다”(영원하라 현중노조), “이렇게 우리는 간다. 붉은 해 치솟는 저 바다, 노동해방 넘실대는 저기 저 바다, 계급도 착취도 없는 저기 저 우리의 바다, 간다 기필코 간다. 강이 되어 간다.”(강이 되어 간다) A면 곡 중 한 곡만 빼면, 모두 “우리”라는 노랫말이 들어간다. 당시만 해도 민중가요에서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민중가요 대부분이 대학 혹은 그 연배인 ‘새벽’에서 나왔고,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노래는 박노해의 시에 의지하거나, 관조적이었다. “우리-노동자”가 부르는 노래, 그것도 투쟁의 현장, 노동 현장의 정서가 짙게 녹아 난 곡을 만든 것이다. 당시 이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사람 밖에 없었다. 노동자노래단의 김호철. 요즘 집회현장에서 부르는 투쟁가 대부분도 그의 곡이다. “파업가”, “단결 투쟁가”, “민중의 노래”, “딸들아 일어나라”, 등등...
노동자노래단 3집에는 이른바 ‘전술가요’와 ‘일상가요’의 대표곡들이 실려있다. “영원하라 현중노조”, “1노 2김가”, “무노동 무임금은 자본가에게” 등이 전자의 예라면, “해방술잔”, “생일노래”, “참사랑” 등은 후자의 예이다. 특히 "무노동 무임금은 자본가에게“가 두드러진다. 90년 노태우 정권이 무노동 무임금으로 파업투쟁을 응징하려 했을 때, 이 곡은 수세에 몰린 노동자 대중을 다시 뭉치게 했다. “무노동 무임금의 억지를 부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 무노동 무임금 노동자 탄압, 총파업으로 맞서리라” 노래가 정세에 개입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발언을 선도한 것이다. 참사랑(결혼식), 생일노래(생일), 해방술잔(술자리) 등의 노래는 당시만 해도, 지배계급에 포섭된 일상을 뒤집는 무기였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 모두가 환영받은 건 아니다. 투쟁가를 브라스(신디)와 스네어(드럼)로 편곡해, 군가처럼 만든 것이나, “포장마차”, “진짜노동자 3” 과 같이 대중가요를 차용한 것은 충분히 ‘시비’가 될 문제였다. 이 문제는 예술 창작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대중화의 문제로 이해되었고, 예술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 즉, 노동자 취향(트로트, 김호철)과 지식인 취향(포크, 새벽)으로 전이되었다. 그 빈자리에는 비판적 계승의 문제만이 남게 된다.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변증법(비판적 계승=변증법?)은 이같은 문제의 세련된 변명이었을지 모른다. 91년 계급투쟁의 패배를 전후한, 대중문화의 무차별적인 침투에 민중가요는 너무도 무기력했고, 결국 민중가요(포크? 찬송가?)의 해체와 비판적으로 계승된 대중가요(락?)로 정리된다. 80년대 민중문화는 해체되고, 그 자리에 옥슨80과 조용필이 복원된다.
이런 상황에 대해, 김호철의 음악이 책임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다만, 오늘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여전히 그만큼 투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악보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노래단-김호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것이 그나마 다행인지, 비극의 시작인지 역시 아무도 알 수 없다.
‘노동자노래단’ 3집 앨범은 사회과학 서점, 노동조합, 현장조직이라는 불법테이프 시장에서 혁명과도 같았다. 앨범 완성도가 과거와 현저하게 달랐던 것이다. 가수들의 가창력(특히, 노래해석)과 합창실력, 연주실력이 두드러지게 좋아졌다. 더구나 녹음은 모 레코드사 스튜디오에서 몰래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만큼 동시대 어떤 것하고도 달랐다. 어쩌면 자기도 있을지 모른다며, 지금 옛 서랍을 더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많이 팔렸고, 여기에 수록된 대부분의 노래는 1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콧노래로 흥얼거릴 만큼 많이 불렸다. 이 앨범은 다행히도 복원되어 있다. 노동의 소리(www.nodong.com) 홈페이지에는 이것말고 1집, 2집, 4집도 복원되어 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노동자 행진곡), “나를 따르라, 노동형제여, 우리는 선봉대”(전노협 선봉대), “우리 변치 말고 투쟁하자고”(참사랑), “우리네 노동자가 국회에 들어가 정치를 합시다”(1노2김가), “하루하루 지쳐진 내 몸”(짤린 손가락), “내 청춘 다 바쳐서 목숨걸고 싸웠다”(영원하라 현중노조), “이렇게 우리는 간다. 붉은 해 치솟는 저 바다, 노동해방 넘실대는 저기 저 바다, 계급도 착취도 없는 저기 저 우리의 바다, 간다 기필코 간다. 강이 되어 간다.”(강이 되어 간다) A면 곡 중 한 곡만 빼면, 모두 “우리”라는 노랫말이 들어간다. 당시만 해도 민중가요에서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민중가요 대부분이 대학 혹은 그 연배인 ‘새벽’에서 나왔고,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노래는 박노해의 시에 의지하거나, 관조적이었다. “우리-노동자”가 부르는 노래, 그것도 투쟁의 현장, 노동 현장의 정서가 짙게 녹아 난 곡을 만든 것이다. 당시 이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사람 밖에 없었다. 노동자노래단의 김호철. 요즘 집회현장에서 부르는 투쟁가 대부분도 그의 곡이다. “파업가”, “단결 투쟁가”, “민중의 노래”, “딸들아 일어나라”, 등등...
노동자노래단 3집에는 이른바 ‘전술가요’와 ‘일상가요’의 대표곡들이 실려있다. “영원하라 현중노조”, “1노 2김가”, “무노동 무임금은 자본가에게” 등이 전자의 예라면, “해방술잔”, “생일노래”, “참사랑” 등은 후자의 예이다. 특히 "무노동 무임금은 자본가에게“가 두드러진다. 90년 노태우 정권이 무노동 무임금으로 파업투쟁을 응징하려 했을 때, 이 곡은 수세에 몰린 노동자 대중을 다시 뭉치게 했다. “무노동 무임금의 억지를 부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 무노동 무임금 노동자 탄압, 총파업으로 맞서리라” 노래가 정세에 개입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발언을 선도한 것이다. 참사랑(결혼식), 생일노래(생일), 해방술잔(술자리) 등의 노래는 당시만 해도, 지배계급에 포섭된 일상을 뒤집는 무기였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 모두가 환영받은 건 아니다. 투쟁가를 브라스(신디)와 스네어(드럼)로 편곡해, 군가처럼 만든 것이나, “포장마차”, “진짜노동자 3” 과 같이 대중가요를 차용한 것은 충분히 ‘시비’가 될 문제였다. 이 문제는 예술 창작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대중화의 문제로 이해되었고, 예술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 즉, 노동자 취향(트로트, 김호철)과 지식인 취향(포크, 새벽)으로 전이되었다. 그 빈자리에는 비판적 계승의 문제만이 남게 된다.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변증법(비판적 계승=변증법?)은 이같은 문제의 세련된 변명이었을지 모른다. 91년 계급투쟁의 패배를 전후한, 대중문화의 무차별적인 침투에 민중가요는 너무도 무기력했고, 결국 민중가요(포크? 찬송가?)의 해체와 비판적으로 계승된 대중가요(락?)로 정리된다. 80년대 민중문화는 해체되고, 그 자리에 옥슨80과 조용필이 복원된다.
이런 상황에 대해, 김호철의 음악이 책임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다만, 오늘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여전히 그만큼 투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악보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노래단-김호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것이 그나마 다행인지, 비극의 시작인지 역시 아무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