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개발의제(Doha Development Agenda) 협상의 출범과 반세계화 투쟁의 새로운 대응방향
WTO 4차 각료회의의 결과
지난 11월 9~14일에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4차 WTO 각료회의는 뉴라운드의 출범을 합의하며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도하개발의제(Doha Development Agenda)’라는 이름의, 우루과이라운드를 잇는 새로운 무역협상이 2001년 1월 1일에 개시되어 2005년 1월 1일까지 마무리된다. 미국은 이번 회의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 주도면밀한 노력을 전개해왔다. G8 정상회담, 미주지역 정상회의, APEC 정상회의 등의 계기마다 각 나라와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여,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큰 목표에 대한 합의를 확인해 왔다. 그런가 하면, 각종 WTO 비공식회의를 통해 시애틀 3차 각료회의 때부터 제기된 협상방식과 의제에 관한 이견을 조율하는 데 힘을 다했고, 제 3세계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별도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주요 국가를 순방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선언문 초안을 최대한 간결하고 추상적으로 작성하여 의견 대립의 소지를 줄이는 세심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3차 각료회의 선언문 초안이 34페이지에 걸쳐 402개 미해결문안을 담은 데 반해, 4차 각료회의 선언문 초안은 20페이지 속에 13개 미해결 문안만을 남기는 것으로 압축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미국은 새로운 무역협상의 범위와 방식에 대한 합의를 담은 선언문을 채택하는 데 성공하였다.
가장 많은 이견이 표출된 부분은 ‘농업협정(AoA)’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호주, 아르헨티나 등으로 구성된 농산물 수출국 모임인 ‘케언즈그룹’의 입장은 농산물 관세를 공산품과 같은 수준으로 인하하자는 것과 농산물 교역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보조금을 철폐하자는 것이었다. 반면 유럽연합, 일본, 한국 등이 속해있는 수입국 모임인 ‘NTC(Non-Trade Concerns)그룹’은 농업의 비교역적 관심사항을 강조하며 농업부문의 개방을 점진적으로 이루자고 주장했다. 한편, 남반구 국가는 ‘농업분야에서의 개발보조금 조항 신설’, ‘농산물 덤핑 수출 금지’등, 남반구 국가에 대한 차등 우대 조치를 요구하였다. ‘수출보조금’ 문제를 둘러싸고 유럽연합 마지막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회의는 케언즈그룹의 입장을 대폭 반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진행되는 농업협상은 ‘시장접근의 실질적 개선 이는 관세 감축의 비율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것을 의미한다.
’, ‘수출보조금의 단계적 폐지를 목표로 한 감축’, ‘국내보조 추곡수매제와 같은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보조를 의미한다.
의 실질적 감축’을 협상의 3대 목표로 하게 된다. 5차 각료회의까지 양허안(이행계획서)을 제시하고, 2005년까지 협상을 종결시킨다는 것이 선언문에 명시된 계획이다. 이렇게 합의를 이루는 데에는 ‘협상의 결과를 예단하지 않고’, ‘비교역적 관심사항이 협상의 고려사항임을 확인’하는 등의 문구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유럽연합과 타협하였다.
농업협정과 마찬가지로 기설정의제(Built-in Agenda)인 서비스협정(GATS)은 2000년 2월부터 후속협상이 시작되어, 2001년 3월로 이미 1차 협상이 끝난 상태이다. 협상의 범위와 방식, 일정에 대한 가이드라인 작성, 협상준비작업을 중심으로 논의된 1차 협상의 결과로, 서비스 협상에서 어떤 분야도 사전에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합의되었다. 이번 각료회의에서 각 국은 별다른 이견이 없이 1차 협상의 내용에 만족을 표명했고, 2002년 6월 30일까지 서비스분야 개방 요구사항을 제출하고, 2003년 3월 31일까지 양허안을 마련하는 협상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새로운 의제로 포함되어, 미국이 자신의 기술을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게 한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은 남반구 국가가 대폭적인 개정을 요구했던 분야다. 95년 이후 부여된 특허의 97%가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에서 이루어졌고, 이중 90%는 초국적기업에 부여된 것 World Trade: Who needs a new round, C.P Chandrasekhar & Jayati Ghost (Http://www.macroscan.com)
이다. 이렇게 TRIPs는 초국적 자본이 기술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갖도록 하여 중심부의 기술이 남반구로 이전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이에 대해 남반구 국가는 기술접근에 대한 억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TRIPs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원주민사회의 전통지식 소유권이 초국적기업으로 이전되는 것을 보호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생물종다양성협약(CBD)과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규정된 농민의 권리 보호와 AIDS, 결핵, 말라리아 등 전염병에 대한 의약품 접근성을 가로막지 않도록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TRIPs와 생물종다양성협약과의 관계, 전통지식보호, 비위반제소, 신기술발전을 수용하는 문제를 TRIPs 이사회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다룰 것에 동의한다는 ‘선언적 문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답했다. 또한, 아프리카 그룹의 제기에 따라 ‘TRIPs 협정과 공중의 건강에 대한 도하 각료선언문’이 별도로 채택되었다. 특별선언문의 주된 내용은 ‘TRIPs가 공공보건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막지 않으며 아프리카 그룹은 ‘현재 TRIPs 협정이 의약품접근성을 막고 있으며 앞으로는 막아서는 안된다’라는 의미를 담아 …shall not…이라고 표현할 것을 요구했으나, 선언문에는 이러한 의미가 희석되어 ‘현재 막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도 막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의미로 …does not and should not…이라고 표현했다.
’, ‘회원국이 공공보건을 보호하는 것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고 이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협정문에 명시된 ‘의약품 특허에 대한 각 국의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권리 선언문에는 강제실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a) 회원국은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권리를 가지고,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조건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 (b)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수 있는 조건의 하나인 국가의 비상사태나 극도의 위기상황이 HIV/AIDS, 결핵 말라리아와 같은 유행병에 적용된다. (c) 일정한 조건하에서 지적재산권의 소진문제 (병행수입 문제)를 각국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를 강조하였다. 아프리카 그룹은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권’이 가능하도록 선언문에 밝힐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 부분은 선언문에서 바로 해결하지 않고, 일반이사회(general council)에서 내년 말까지 해결책을 찾도록 미루어 졌다. 강제실시는 협정이 규정하는 특정한 경우에 한하여 ‘특허’에 상관없이 국가가 의약품의 생산 및 배포를 관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의약품 특허에 대해 강제실시권을 발동하더라도 의약품을 직접 생산할 능력이 없는 많은 국가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별 의미가 없다. 현재 TRIPs 협정은 ‘강제실시권은 국내수요를 주목적으로 발동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범분야에서는, ‘반덤핑조치’, ‘수산보조금의 철폐’ 등이 협상 의제로 새롭게 채택되었다. 반덤핑조치는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미국이 남반구로부터 값싼 공산품의 대량 수입으로 인한 자국의 시장붕괴를 막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일종의 ‘보호무역’을 위한 조치이다. 남반구 국가에서는 미국이 반덤핑 제소를 남발하여 막대한 무역손실을 입는 일이 잦았다. 한국과 남반구 국가는 반덤핑 제소의 성립 요건을 엄격히 하자는 내용을 협상 의제로 올릴 것을 요구하였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선언문에 ‘기본개념, 원칙, 유효성과 그 수단 및 목적을 유지하고’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이후 진행될 협상에서 반덤핑 조치의 실효성이 줄어들 여지를 최소화했다.
이행 문제도 큰 쟁점사항 중 하나였다. 제 3세계 국가는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약속한 개도국 우대를 위해 특별조치를 이행하는 것이 뉴라운드 출범의 조건이라며,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룰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핵심적인 사안은 '섬유․의류쿼터의 단계적 조기폐지'였다. 섬유와 의류는 GATT가 아닌 별도의 협정(Multi-Fibre Agreement)에서 다루었는데, 여기에는 수입에 대한 할당량을 두고 있었다. 때문에, 제3세계의 주요 수출 품목인 섬유․의류가 미국 시장으로 자유롭게 진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이를 GATT내에서 다루도록 하여, 2005년까지 쿼터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도록 규정했으나, 현재까지 전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행문제 역시 TRIPs의 의약품접근성에 관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특별선언문을 통하여 다루었으나, 제3세계가 제기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미국이 입을 손실을 막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밖에 유럽연합은 새로운 의제로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 ‘투자․경쟁․정부조달투명성․무역원활화 등의 이슈(이른바, 싱가포르 이슈)’를 뉴라운드 협상 범위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제 3세계 국가는 이행문제 해결을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 특히,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에 대해 미국․유럽을 비롯한 중심부국가들조차 이 기준을 못 지킨다는 이유로, 자국 시장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여지가 크다며 협상 의제에 포함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는 원래 농업협정에서 미국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수단으로 유럽연합이 제기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미국이 농업협상에서 유럽연합의 저항을 무마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결국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는 협상의제로 채택되었고, 나머지 싱가포르 의제에 대해서는 5차 각료회의에서 결정되는 협상 방식에 따라 그 이후에 협상을 개시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이 의제에 관해서는 WTO라는 다자간 협상보다 필요에 따라 양자간 혹은 지역협정을 활용하여 충분히 협상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또한,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에 따라 회원국은 내년 1월부터 WTO의 자유무역규범과 다자간환경협약(MEA)의 무역규제조치의 상호관계에 대해 실무협상을 개시하게 되고, 환경오염방지시설과 같은 환경상품의 확장과 환경영향평가와 같은 환경서비스의 관세 및 비관세장벽 제거에 대해서도 협상에 들어가게 된다.
도하 개발의제 협상 출범이 의미하는 것
이번 4차 WTO 각료회의에 대하여 미국으로서는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운신의 폭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미국은 한 축으로는 EU와 일본, 그리고 값싼 노동력으로 경쟁력을 지닌 남반구로부터 이미 잠재력이 소진된 전통적인 산업분야에 대해 자국의 시장을 보호해야 했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농업과 금융적 팽창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금융․통신을 비롯한 서비스 분야에서 유럽․일본의 무역장벽을 거두어 내야 했다. 미국은 이미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값싼 철강, 자동차등의 공산품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반덤핑법, 제3세계의 주요 수출 품목인 섬유․의류에 대한 수입할당제 유지 등 자국시장을 보호할 수 있는 여지를 상당수 확보하였다. 그런가 하면 GATT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농업과 서비스 분야를 무역자유화의 대상으로 편입시켰고, TRIPs 협정을 통하여 IT산업 등 첨단 산업의 핵심 요소인 기술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미국은 우루과이라운드의 성과를 그대로 유지하고 농업, 서비스분야의 개방 폭을 확대하기 위한 추가적인 협상을 진척시키면 그만이었다.
한편, 미국은 유럽․일본과 신흥시장 등 자신의 무역 파트너들로 하여금 세계 자유무역시스템의 건전성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성장에 대한 기대를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다. 더불어 현재의 무역시스템 하에서 주도력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3차 시애틀 각료회의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라운드를 출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서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하에서 추진되었던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를 이번 라운드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했다. 최근 경제 불안정성이 확산되는 가운데 더욱 증대된 고용불안, (특히 저 숙련 노동에 대한)임금 압박에 직면하여, 민주당과 AFL-CIO(미국 노총)는 자국의 노동기준을 전 세계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뉴라운드 출범의 조건이라는 입장을 공유했다. 시애틀 3차 각료회의에서 클린턴 행정부와 AFL-CIO는 이러한 입장을 회의장 안팎에서 제기하였고, 남반구를 비롯한 다수의 국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뉴라운드 출범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3차 각료회의 이후에도 ‘노동기준과 환경기준을 포함할 때라야만 협상이 가능하다’는 민주당의 입장은 미국의 무역협상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필요한 내적인 합의를 모으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911 사건을 전후하여 무역이 위축되자, 이러한 지형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무역파트너들에게 자신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 질서에 접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판단이 우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4차 각료회의의 결과는 미국의 의도가 대체로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농업과 서비스 시장의 개방 폭을 넓히는 데 성공하였고, 반덤핑법과 섬유․의류 수입쿼터,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를 우루과이라운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해 낸 것이다. 반면, 남반구의 여러 국가는 개도국에 대한 특별 차등대우를 중심적인 쟁점으로 제기하여 공산품의 미국 시장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나, 선언문 서문에서 ‘자유무역의 혜택이 개도국과 최빈국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선언적인 문구를 명시하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협상 결과가 한국에 미칠 영향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농업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한국은 2004년까지 10년 간 관세를 24% 인하하고, 국내 보조금을 13.3% 축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산물 수입이 개방된 이후 농림축산물의 수입이 대폭 증가하여, 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에서 식량자급률은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곡물재배면적도 줄어들고 있다. 또한 국내농업에 대한 보조금, 특히 쌀 수매가격과 수매량 인하는 올해와 같은 쌀값 폭락을 가져왔다. 이와 더불어 농가의 주요 소득원인 쌀 등의 대표적 농산물의 판매가격은 95년 이래로 계속 하락하였다. 게다가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이후 곡물가격의 변동폭이 커져 국제 곡물시장의 불안정성이 증대하였다. 이에 따라, 식량확보를 위한 재정부담은 증가하였고, 수급예측이 어려워 식량 수급안정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도하개발의제에 따른 협상에서는 관세 감축의 비율과 폭, 국내보조의 감축비율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에 더하여, 양허안을 2003년 말에 열릴 5차 각료회의 제출해야 하는 계획에 따라, 2004년 쌀 재협상에서 한국의 입장은 더욱 불리해졌다. 더군다나 다음 협상에서는 한국의 ‘개도국’ 지위가 인정되지 않을 전망이어서 이러한 영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미 대부분의 농가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농민이 줄을 이을 정도로 한국의 농업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대책은 쌀 시장 개방에 대한 대비책으로 쌀 증산 억제를 추진하고, 추곡수매제를 농업협정이 금지하는 국내보조금에 포함되지 않는-생산과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직접지불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농업을 포기하는 정책에 다름 아니다.
또한, 서비스 협정에 따르면 공공부문에 대한 개방의 폭이 더욱 확대된다. 서비스 협정의 12개 개방요구분야에는 금융, 통신, 시청각, 법률, 교육, 의료, 에너지 등이 포함된다. IMF 구제금융 이후 서비스분야를 이미 대폭 개방 한 상태여서, 당장 내년부터 진행되는 협상에서는 개방화조치가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국내법 개정’이 협상테이블에 오르게 될 것이다. 금융 분야는 현재 개방에서 제외되어 있는 은행업 중 예금, 대출업무와 생명보험, 손해사정, 보험계리, 보험중개, 보험대리업 등 ‘자본거래’가 따르는 국경간 공급이나 해외소비 분야가 협상테이블에 오를 것이다. 또한 이 협상으로 외국계 은행에 대한 지점 설립 인허가 요건 등 간접 제한 조치가 폐지될 가능성이 높다. 통신 분야에서는 외국인 지분 제한을 확대하는 문제가 쟁점으로 예상된다. 한국통신의 예를 보면, 현재 외국인 지분 제한이 49%로 되어 있는데, 만약 50%가 넘게 되면 외국인이 이사, 감사를 선임하는 등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영상․음향․시청각 서비스 분야에서도 종합유선방송과 위성방송사업, 전송망 사업 등이 개방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고, 스크린쿼터 제도 또한 맹공격을 받을 것이다. 교육분야에서는 학교설립 제한에 대한 완화 압력이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현재에도 외국인이 국내에서 대학을 설립하지 못한다는 명문화된 규정은 없으나, 학교를 설립하더라도 그 수익금을 해외로 송금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립학교법’으로 인해 사실상 학교를 설립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될 서비스 협상에서는 국내 학교에서 발생한 수익을 국외로 내보낼 수 있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또한, 해외의 거대 의료자본이 국내에 실질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국내 의료법과 각종 법적 규제 완화 역시 협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앞으로 서비스협상은 IMF를 대신하여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는 금융․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는 데 제 몫을 톡톡히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이번 선언문을 통해 ‘다자무역체제와 함께 지역무역협정이 전세계 무역자유화의 토대로서 중요하다’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자간 혹은 지역무역협정 체결에 속도를 더 할 전망이다. 현재 김대중정부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하여 협상 3단계인 ‘정부간 협상’을 진행중이고, 한․일 투자협정을 조속히 체결한 후 이를 한․일 자유무역협정으로 확대한다는 계획 하에, 협상 2단계인 ‘비즈니스 포럼’을 진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국, 뉴질랜드와 각각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 1단계인 국책연구기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밖에도 한․중․일 간의 자유무역지대 설립을 위한 공동연구가 개시되었으며, 11월 초 ASEAN+3(한․중․일) 정상회의에서는 동아시아지역 13개국을 한데 묶는 자유무역지대(EAFTA) 설립을 검토키로 하였다.
김대중정부는 뉴라운드 출범이 합의되자마자, 각 부처를 망라한 협상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있다. 뉴라운드 출범에 따라 요구되는 시장 개방 압력은 어쩔 수 없는 대세이며, 이의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련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구조조정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농업을 포기하는 대가로 경쟁력 있는 국내산업의 해외시장을 개척하여 혜택을 가져오겠다는 계획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농업파탄에 뒤이을 농민 생존권의 파괴, 농촌사회의 붕괴, 생태계의 파괴 등은 그 손실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이 땅 민중은 먹고사는 문제 전반을 초국적 곡물기업의 이윤 놀음에 내맡기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초국적자본의 금융적 팽창을 위해 전 민중의 삶을 공격하고, 한국 경제의 불안정성을 더더욱 증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WTO 반대투쟁 과정의 문제와 새로운 대응방향
WTO 반대 투쟁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3차 각료회의가 열리던 당시 시애틀에서 대규모 결집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 4차 각료회담이 열렸던 카타르에서는 WTO가 초청한 NGO 대표 100여명이 행사장 내에서 시위를 벌였을 뿐이다. 그 대신 각 국의 민중은 회의 개막 시점에 맞추어 세계 곳곳에서 WTO 뉴라운드의 출범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각각의 투쟁에서는 ‘WTO 질서 내에 존재하는 불투명성과 비민주성’, ‘WTO 라운드에 새로운 의제 포함 반대’, ‘기설정의제에 대한 평가’, ‘지적재산권 협정 반대’ 등 실로 다양한 쟁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WTO 질서 내에서 자국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AFL-CIO(미국노총)는 시애틀에서부터 주장해왔던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가 뉴라운드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특히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하여, ‘초국적 자본이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이동하는 동안 미국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이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제기하였다. 그런가 하면 Afro-Asia NGO Coalition(아프리카 아시아 NGO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빈곤을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로 안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서는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문제에 앞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당면한 문제이므로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며 노동기준의 문제가 WTO 내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남반구와 북반구 민중의 연대 가능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은 전자의 입장과, 자국의 발전에 대한 환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노동 착취와 불안정화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은 후자의 입장은, 모두 WTO 질서 내에서 자국의 생존전략을 중심으로 한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WTO 반대투쟁에서 노동조건의 악화, 고용불안, 임금하락 문제의 원흉으로 ‘자유무역’을 지목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의 전략은 WTO를 통한 자유무역 확대에 있기보다는, 세계적인 무역질서 내에서 경쟁력이 취약한 자국 산업을 적절히 보호할 여지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금융 팽창의 호조건을 창출하는 것임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각 국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자원을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즉 ‘문자 그대로의’ 자유무역의 확산은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화의 본질은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민중의 제 권리-를 철폐’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유무역' 반대에 초점을 둔 투쟁은, 전세계적인 노동 불안정화와 실업, 빈곤 등 민중의 삶이 피폐해진 원인이 바로, 금융세계화라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금융세계화를 위해 제국주의 진영이 전세계 민중의 제반 권리를 해체시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이처럼 ‘자유무역’반대라는 논리 속에는 그렇다면 ‘보호무역’은 찬성하는가 하는 쟁점이 숨어 있으며, 현 상황에서 ‘보호무역주의’, ‘자국이기주의’와 반세계화 운동과의 불안한 동거를 더 이상 지속해서는 안된다. 자국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에 갇히면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결과적으로 수용한 오늘날의 ‘자유무역’ 반대 투쟁은, 국제적인 민중 권리의 보편성 속에서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삐 풀린 투기자본의 활동무대를 극대화하는 금융세계화가 전세계 민중의 권리를 파괴했음을 폭로하고,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WTO 협상을 통하여 ‘한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WTO가 보장하는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공격하는 전세계 민중의 제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운동진영의 몫임을 확인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대대적인 농산물 수입개방을 가져왔던 우루과이라운드의 국회비준을 거부하는 농민의 투쟁으로 WTO 반대투쟁이 촉발되었다. 우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농산물 수입개방과 그에 따른 정부의 쌀증산포기정책에 대항하는 농민의 투쟁이 더욱 확대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이 한국의 농산물 시장을 배타적으로 지켜내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전세계 민중의 식량에 대한 권리를 지켜내는 투쟁, 초국적 곡물기업이 임의로 경작지를 재편하는데 따른 생태파괴에 맞서는 투쟁, 토지와 종자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과 연계망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이번 WTO 각료회의를 계기로 대두된, 남반구 민중의 생명과 직결된 의약품접근성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쟁점이, WTO 질서를 전제로 한 ‘내부의 발언’으로 국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전세계 노동자 민중이 금융세계화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여성화에 맞서는 투쟁과 연대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난 11월 9~14일에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4차 WTO 각료회의는 뉴라운드의 출범을 합의하며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도하개발의제(Doha Development Agenda)’라는 이름의, 우루과이라운드를 잇는 새로운 무역협상이 2001년 1월 1일에 개시되어 2005년 1월 1일까지 마무리된다. 미국은 이번 회의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 주도면밀한 노력을 전개해왔다. G8 정상회담, 미주지역 정상회의, APEC 정상회의 등의 계기마다 각 나라와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여,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큰 목표에 대한 합의를 확인해 왔다. 그런가 하면, 각종 WTO 비공식회의를 통해 시애틀 3차 각료회의 때부터 제기된 협상방식과 의제에 관한 이견을 조율하는 데 힘을 다했고, 제 3세계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별도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주요 국가를 순방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선언문 초안을 최대한 간결하고 추상적으로 작성하여 의견 대립의 소지를 줄이는 세심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3차 각료회의 선언문 초안이 34페이지에 걸쳐 402개 미해결문안을 담은 데 반해, 4차 각료회의 선언문 초안은 20페이지 속에 13개 미해결 문안만을 남기는 것으로 압축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미국은 새로운 무역협상의 범위와 방식에 대한 합의를 담은 선언문을 채택하는 데 성공하였다.
가장 많은 이견이 표출된 부분은 ‘농업협정(AoA)’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호주, 아르헨티나 등으로 구성된 농산물 수출국 모임인 ‘케언즈그룹’의 입장은 농산물 관세를 공산품과 같은 수준으로 인하하자는 것과 농산물 교역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보조금을 철폐하자는 것이었다. 반면 유럽연합, 일본, 한국 등이 속해있는 수입국 모임인 ‘NTC(Non-Trade Concerns)그룹’은 농업의 비교역적 관심사항을 강조하며 농업부문의 개방을 점진적으로 이루자고 주장했다. 한편, 남반구 국가는 ‘농업분야에서의 개발보조금 조항 신설’, ‘농산물 덤핑 수출 금지’등, 남반구 국가에 대한 차등 우대 조치를 요구하였다. ‘수출보조금’ 문제를 둘러싸고 유럽연합 마지막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회의는 케언즈그룹의 입장을 대폭 반영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진행되는 농업협상은 ‘시장접근의 실질적 개선 이는 관세 감축의 비율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것을 의미한다.
’, ‘수출보조금의 단계적 폐지를 목표로 한 감축’, ‘국내보조 추곡수매제와 같은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보조를 의미한다.
의 실질적 감축’을 협상의 3대 목표로 하게 된다. 5차 각료회의까지 양허안(이행계획서)을 제시하고, 2005년까지 협상을 종결시킨다는 것이 선언문에 명시된 계획이다. 이렇게 합의를 이루는 데에는 ‘협상의 결과를 예단하지 않고’, ‘비교역적 관심사항이 협상의 고려사항임을 확인’하는 등의 문구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유럽연합과 타협하였다.
농업협정과 마찬가지로 기설정의제(Built-in Agenda)인 서비스협정(GATS)은 2000년 2월부터 후속협상이 시작되어, 2001년 3월로 이미 1차 협상이 끝난 상태이다. 협상의 범위와 방식, 일정에 대한 가이드라인 작성, 협상준비작업을 중심으로 논의된 1차 협상의 결과로, 서비스 협상에서 어떤 분야도 사전에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합의되었다. 이번 각료회의에서 각 국은 별다른 이견이 없이 1차 협상의 내용에 만족을 표명했고, 2002년 6월 30일까지 서비스분야 개방 요구사항을 제출하고, 2003년 3월 31일까지 양허안을 마련하는 협상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새로운 의제로 포함되어, 미국이 자신의 기술을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게 한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은 남반구 국가가 대폭적인 개정을 요구했던 분야다. 95년 이후 부여된 특허의 97%가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에서 이루어졌고, 이중 90%는 초국적기업에 부여된 것 World Trade: Who needs a new round, C.P Chandrasekhar & Jayati Ghost (Http://www.macroscan.com)
이다. 이렇게 TRIPs는 초국적 자본이 기술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갖도록 하여 중심부의 기술이 남반구로 이전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이에 대해 남반구 국가는 기술접근에 대한 억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TRIPs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원주민사회의 전통지식 소유권이 초국적기업으로 이전되는 것을 보호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생물종다양성협약(CBD)과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규정된 농민의 권리 보호와 AIDS, 결핵, 말라리아 등 전염병에 대한 의약품 접근성을 가로막지 않도록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TRIPs와 생물종다양성협약과의 관계, 전통지식보호, 비위반제소, 신기술발전을 수용하는 문제를 TRIPs 이사회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다룰 것에 동의한다는 ‘선언적 문구’를 삽입하는 것으로 답했다. 또한, 아프리카 그룹의 제기에 따라 ‘TRIPs 협정과 공중의 건강에 대한 도하 각료선언문’이 별도로 채택되었다. 특별선언문의 주된 내용은 ‘TRIPs가 공공보건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막지 않으며 아프리카 그룹은 ‘현재 TRIPs 협정이 의약품접근성을 막고 있으며 앞으로는 막아서는 안된다’라는 의미를 담아 …shall not…이라고 표현할 것을 요구했으나, 선언문에는 이러한 의미가 희석되어 ‘현재 막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도 막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의미로 …does not and should not…이라고 표현했다.
’, ‘회원국이 공공보건을 보호하는 것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고 이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협정문에 명시된 ‘의약품 특허에 대한 각 국의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권리 선언문에는 강제실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a) 회원국은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권리를 가지고,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조건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 (b)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수 있는 조건의 하나인 국가의 비상사태나 극도의 위기상황이 HIV/AIDS, 결핵 말라리아와 같은 유행병에 적용된다. (c) 일정한 조건하에서 지적재산권의 소진문제 (병행수입 문제)를 각국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를 강조하였다. 아프리카 그룹은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권’이 가능하도록 선언문에 밝힐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 부분은 선언문에서 바로 해결하지 않고, 일반이사회(general council)에서 내년 말까지 해결책을 찾도록 미루어 졌다. 강제실시는 협정이 규정하는 특정한 경우에 한하여 ‘특허’에 상관없이 국가가 의약품의 생산 및 배포를 관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의약품 특허에 대해 강제실시권을 발동하더라도 의약품을 직접 생산할 능력이 없는 많은 국가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별 의미가 없다. 현재 TRIPs 협정은 ‘강제실시권은 국내수요를 주목적으로 발동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범분야에서는, ‘반덤핑조치’, ‘수산보조금의 철폐’ 등이 협상 의제로 새롭게 채택되었다. 반덤핑조치는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미국이 남반구로부터 값싼 공산품의 대량 수입으로 인한 자국의 시장붕괴를 막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일종의 ‘보호무역’을 위한 조치이다. 남반구 국가에서는 미국이 반덤핑 제소를 남발하여 막대한 무역손실을 입는 일이 잦았다. 한국과 남반구 국가는 반덤핑 제소의 성립 요건을 엄격히 하자는 내용을 협상 의제로 올릴 것을 요구하였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선언문에 ‘기본개념, 원칙, 유효성과 그 수단 및 목적을 유지하고’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이후 진행될 협상에서 반덤핑 조치의 실효성이 줄어들 여지를 최소화했다.
이행 문제도 큰 쟁점사항 중 하나였다. 제 3세계 국가는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약속한 개도국 우대를 위해 특별조치를 이행하는 것이 뉴라운드 출범의 조건이라며,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룰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핵심적인 사안은 '섬유․의류쿼터의 단계적 조기폐지'였다. 섬유와 의류는 GATT가 아닌 별도의 협정(Multi-Fibre Agreement)에서 다루었는데, 여기에는 수입에 대한 할당량을 두고 있었다. 때문에, 제3세계의 주요 수출 품목인 섬유․의류가 미국 시장으로 자유롭게 진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이를 GATT내에서 다루도록 하여, 2005년까지 쿼터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도록 규정했으나, 현재까지 전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행문제 역시 TRIPs의 의약품접근성에 관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특별선언문을 통하여 다루었으나, 제3세계가 제기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미국이 입을 손실을 막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밖에 유럽연합은 새로운 의제로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 ‘투자․경쟁․정부조달투명성․무역원활화 등의 이슈(이른바, 싱가포르 이슈)’를 뉴라운드 협상 범위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제 3세계 국가는 이행문제 해결을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 특히,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에 대해 미국․유럽을 비롯한 중심부국가들조차 이 기준을 못 지킨다는 이유로, 자국 시장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여지가 크다며 협상 의제에 포함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는 원래 농업협정에서 미국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수단으로 유럽연합이 제기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미국이 농업협상에서 유럽연합의 저항을 무마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결국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는 협상의제로 채택되었고, 나머지 싱가포르 의제에 대해서는 5차 각료회의에서 결정되는 협상 방식에 따라 그 이후에 협상을 개시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이 의제에 관해서는 WTO라는 다자간 협상보다 필요에 따라 양자간 혹은 지역협정을 활용하여 충분히 협상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또한, ‘무역과 환경기준 연계’에 따라 회원국은 내년 1월부터 WTO의 자유무역규범과 다자간환경협약(MEA)의 무역규제조치의 상호관계에 대해 실무협상을 개시하게 되고, 환경오염방지시설과 같은 환경상품의 확장과 환경영향평가와 같은 환경서비스의 관세 및 비관세장벽 제거에 대해서도 협상에 들어가게 된다.
도하 개발의제 협상 출범이 의미하는 것
이번 4차 WTO 각료회의에 대하여 미국으로서는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운신의 폭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미국은 한 축으로는 EU와 일본, 그리고 값싼 노동력으로 경쟁력을 지닌 남반구로부터 이미 잠재력이 소진된 전통적인 산업분야에 대해 자국의 시장을 보호해야 했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농업과 금융적 팽창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금융․통신을 비롯한 서비스 분야에서 유럽․일본의 무역장벽을 거두어 내야 했다. 미국은 이미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값싼 철강, 자동차등의 공산품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반덤핑법, 제3세계의 주요 수출 품목인 섬유․의류에 대한 수입할당제 유지 등 자국시장을 보호할 수 있는 여지를 상당수 확보하였다. 그런가 하면 GATT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농업과 서비스 분야를 무역자유화의 대상으로 편입시켰고, TRIPs 협정을 통하여 IT산업 등 첨단 산업의 핵심 요소인 기술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미국은 우루과이라운드의 성과를 그대로 유지하고 농업, 서비스분야의 개방 폭을 확대하기 위한 추가적인 협상을 진척시키면 그만이었다.
한편, 미국은 유럽․일본과 신흥시장 등 자신의 무역 파트너들로 하여금 세계 자유무역시스템의 건전성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성장에 대한 기대를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다. 더불어 현재의 무역시스템 하에서 주도력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3차 시애틀 각료회의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라운드를 출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서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하에서 추진되었던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를 이번 라운드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했다. 최근 경제 불안정성이 확산되는 가운데 더욱 증대된 고용불안, (특히 저 숙련 노동에 대한)임금 압박에 직면하여, 민주당과 AFL-CIO(미국 노총)는 자국의 노동기준을 전 세계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뉴라운드 출범의 조건이라는 입장을 공유했다. 시애틀 3차 각료회의에서 클린턴 행정부와 AFL-CIO는 이러한 입장을 회의장 안팎에서 제기하였고, 남반구를 비롯한 다수의 국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뉴라운드 출범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3차 각료회의 이후에도 ‘노동기준과 환경기준을 포함할 때라야만 협상이 가능하다’는 민주당의 입장은 미국의 무역협상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 필요한 내적인 합의를 모으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911 사건을 전후하여 무역이 위축되자, 이러한 지형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무역파트너들에게 자신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 질서에 접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판단이 우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4차 각료회의의 결과는 미국의 의도가 대체로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농업과 서비스 시장의 개방 폭을 넓히는 데 성공하였고, 반덤핑법과 섬유․의류 수입쿼터,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를 우루과이라운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해 낸 것이다. 반면, 남반구의 여러 국가는 개도국에 대한 특별 차등대우를 중심적인 쟁점으로 제기하여 공산품의 미국 시장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나, 선언문 서문에서 ‘자유무역의 혜택이 개도국과 최빈국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선언적인 문구를 명시하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협상 결과가 한국에 미칠 영향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농업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한국은 2004년까지 10년 간 관세를 24% 인하하고, 국내 보조금을 13.3% 축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산물 수입이 개방된 이후 농림축산물의 수입이 대폭 증가하여, 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에서 식량자급률은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곡물재배면적도 줄어들고 있다. 또한 국내농업에 대한 보조금, 특히 쌀 수매가격과 수매량 인하는 올해와 같은 쌀값 폭락을 가져왔다. 이와 더불어 농가의 주요 소득원인 쌀 등의 대표적 농산물의 판매가격은 95년 이래로 계속 하락하였다. 게다가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이후 곡물가격의 변동폭이 커져 국제 곡물시장의 불안정성이 증대하였다. 이에 따라, 식량확보를 위한 재정부담은 증가하였고, 수급예측이 어려워 식량 수급안정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도하개발의제에 따른 협상에서는 관세 감축의 비율과 폭, 국내보조의 감축비율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에 더하여, 양허안을 2003년 말에 열릴 5차 각료회의 제출해야 하는 계획에 따라, 2004년 쌀 재협상에서 한국의 입장은 더욱 불리해졌다. 더군다나 다음 협상에서는 한국의 ‘개도국’ 지위가 인정되지 않을 전망이어서 이러한 영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미 대부분의 농가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농민이 줄을 이을 정도로 한국의 농업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대책은 쌀 시장 개방에 대한 대비책으로 쌀 증산 억제를 추진하고, 추곡수매제를 농업협정이 금지하는 국내보조금에 포함되지 않는-생산과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직접지불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농업을 포기하는 정책에 다름 아니다.
또한, 서비스 협정에 따르면 공공부문에 대한 개방의 폭이 더욱 확대된다. 서비스 협정의 12개 개방요구분야에는 금융, 통신, 시청각, 법률, 교육, 의료, 에너지 등이 포함된다. IMF 구제금융 이후 서비스분야를 이미 대폭 개방 한 상태여서, 당장 내년부터 진행되는 협상에서는 개방화조치가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국내법 개정’이 협상테이블에 오르게 될 것이다. 금융 분야는 현재 개방에서 제외되어 있는 은행업 중 예금, 대출업무와 생명보험, 손해사정, 보험계리, 보험중개, 보험대리업 등 ‘자본거래’가 따르는 국경간 공급이나 해외소비 분야가 협상테이블에 오를 것이다. 또한 이 협상으로 외국계 은행에 대한 지점 설립 인허가 요건 등 간접 제한 조치가 폐지될 가능성이 높다. 통신 분야에서는 외국인 지분 제한을 확대하는 문제가 쟁점으로 예상된다. 한국통신의 예를 보면, 현재 외국인 지분 제한이 49%로 되어 있는데, 만약 50%가 넘게 되면 외국인이 이사, 감사를 선임하는 등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영상․음향․시청각 서비스 분야에서도 종합유선방송과 위성방송사업, 전송망 사업 등이 개방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고, 스크린쿼터 제도 또한 맹공격을 받을 것이다. 교육분야에서는 학교설립 제한에 대한 완화 압력이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현재에도 외국인이 국내에서 대학을 설립하지 못한다는 명문화된 규정은 없으나, 학교를 설립하더라도 그 수익금을 해외로 송금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립학교법’으로 인해 사실상 학교를 설립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진행될 서비스 협상에서는 국내 학교에서 발생한 수익을 국외로 내보낼 수 있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또한, 해외의 거대 의료자본이 국내에 실질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국내 의료법과 각종 법적 규제 완화 역시 협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앞으로 서비스협상은 IMF를 대신하여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는 금융․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는 데 제 몫을 톡톡히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이번 선언문을 통해 ‘다자무역체제와 함께 지역무역협정이 전세계 무역자유화의 토대로서 중요하다’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자간 혹은 지역무역협정 체결에 속도를 더 할 전망이다. 현재 김대중정부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하여 협상 3단계인 ‘정부간 협상’을 진행중이고, 한․일 투자협정을 조속히 체결한 후 이를 한․일 자유무역협정으로 확대한다는 계획 하에, 협상 2단계인 ‘비즈니스 포럼’을 진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국, 뉴질랜드와 각각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 1단계인 국책연구기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밖에도 한․중․일 간의 자유무역지대 설립을 위한 공동연구가 개시되었으며, 11월 초 ASEAN+3(한․중․일) 정상회의에서는 동아시아지역 13개국을 한데 묶는 자유무역지대(EAFTA) 설립을 검토키로 하였다.
김대중정부는 뉴라운드 출범이 합의되자마자, 각 부처를 망라한 협상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있다. 뉴라운드 출범에 따라 요구되는 시장 개방 압력은 어쩔 수 없는 대세이며, 이의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련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구조조정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농업을 포기하는 대가로 경쟁력 있는 국내산업의 해외시장을 개척하여 혜택을 가져오겠다는 계획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농업파탄에 뒤이을 농민 생존권의 파괴, 농촌사회의 붕괴, 생태계의 파괴 등은 그 손실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이 땅 민중은 먹고사는 문제 전반을 초국적 곡물기업의 이윤 놀음에 내맡기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초국적자본의 금융적 팽창을 위해 전 민중의 삶을 공격하고, 한국 경제의 불안정성을 더더욱 증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WTO 반대투쟁 과정의 문제와 새로운 대응방향
WTO 반대 투쟁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3차 각료회의가 열리던 당시 시애틀에서 대규모 결집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 4차 각료회담이 열렸던 카타르에서는 WTO가 초청한 NGO 대표 100여명이 행사장 내에서 시위를 벌였을 뿐이다. 그 대신 각 국의 민중은 회의 개막 시점에 맞추어 세계 곳곳에서 WTO 뉴라운드의 출범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각각의 투쟁에서는 ‘WTO 질서 내에 존재하는 불투명성과 비민주성’, ‘WTO 라운드에 새로운 의제 포함 반대’, ‘기설정의제에 대한 평가’, ‘지적재산권 협정 반대’ 등 실로 다양한 쟁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WTO 질서 내에서 자국의 이익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AFL-CIO(미국노총)는 시애틀에서부터 주장해왔던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가 뉴라운드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특히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하여, ‘초국적 자본이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이동하는 동안 미국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이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제기하였다. 그런가 하면 Afro-Asia NGO Coalition(아프리카 아시아 NGO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빈곤을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로 안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서는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문제에 앞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당면한 문제이므로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며 노동기준의 문제가 WTO 내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남반구와 북반구 민중의 연대 가능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은 전자의 입장과, 자국의 발전에 대한 환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노동 착취와 불안정화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은 후자의 입장은, 모두 WTO 질서 내에서 자국의 생존전략을 중심으로 한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WTO 반대투쟁에서 노동조건의 악화, 고용불안, 임금하락 문제의 원흉으로 ‘자유무역’을 지목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의 전략은 WTO를 통한 자유무역 확대에 있기보다는, 세계적인 무역질서 내에서 경쟁력이 취약한 자국 산업을 적절히 보호할 여지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금융 팽창의 호조건을 창출하는 것임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각 국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자원을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즉 ‘문자 그대로의’ 자유무역의 확산은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화의 본질은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민중의 제 권리-를 철폐’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유무역' 반대에 초점을 둔 투쟁은, 전세계적인 노동 불안정화와 실업, 빈곤 등 민중의 삶이 피폐해진 원인이 바로, 금융세계화라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금융세계화를 위해 제국주의 진영이 전세계 민중의 제반 권리를 해체시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이처럼 ‘자유무역’반대라는 논리 속에는 그렇다면 ‘보호무역’은 찬성하는가 하는 쟁점이 숨어 있으며, 현 상황에서 ‘보호무역주의’, ‘자국이기주의’와 반세계화 운동과의 불안한 동거를 더 이상 지속해서는 안된다. 자국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에 갇히면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결과적으로 수용한 오늘날의 ‘자유무역’ 반대 투쟁은, 국제적인 민중 권리의 보편성 속에서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삐 풀린 투기자본의 활동무대를 극대화하는 금융세계화가 전세계 민중의 권리를 파괴했음을 폭로하고,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WTO 협상을 통하여 ‘한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WTO가 보장하는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공격하는 전세계 민중의 제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운동진영의 몫임을 확인해야 한다.
국내에서는 대대적인 농산물 수입개방을 가져왔던 우루과이라운드의 국회비준을 거부하는 농민의 투쟁으로 WTO 반대투쟁이 촉발되었다. 우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농산물 수입개방과 그에 따른 정부의 쌀증산포기정책에 대항하는 농민의 투쟁이 더욱 확대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이 한국의 농산물 시장을 배타적으로 지켜내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전세계 민중의 식량에 대한 권리를 지켜내는 투쟁, 초국적 곡물기업이 임의로 경작지를 재편하는데 따른 생태파괴에 맞서는 투쟁, 토지와 종자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과 연계망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이번 WTO 각료회의를 계기로 대두된, 남반구 민중의 생명과 직결된 의약품접근성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쟁점이, WTO 질서를 전제로 한 ‘내부의 발언’으로 국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전세계 노동자 민중이 금융세계화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여성화에 맞서는 투쟁과 연대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