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위한 예술, 사회변혁을 위한 예술 - 프로미술에 대한 짧은 노트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현재 가장 많은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면 본 글에서 다루게 될 프로미술일 것이다. 최근 학술논문에 한해서 중국을 통해 북한의 자료들이 입수되면서 미술계에도 과거 월북작가의 소식이나 자료들이 입수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제시대 프로미술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우선은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고 실제로 활동했던 작가 중 대부분이 월북작가이거나 사망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프로미술의 특성상 주로 포스터나 만화 삽화 등에 주력하여 캔버스화 처럼 보관이 쉽지 않아 원작이 대체로 유실되었다는 여건도 연구를 어렵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본 글에서는 이번 연재 글의 마지막으로 1920년대-1930년대까지의 프로미술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염군사, 파스큐라의 통합체-카프
한국 근대기의 프로미술운동은 가장 정치, 선전적이며 특정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 위해 복무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운동이었다. 전통시대의 미술이 사대부의 유흥과 여가생활에서 창작되었거나 또는 정부나 관에서 필요로 하는 미술작품을 집단 창작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에서 근대기의 미술 상황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오늘 다루게 될 프로미술과 같은 정치선전 미술을 탄생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이하 카프)이라는 프로예술가들의 조직은 염군사와 파스큐라라는 문학인과 미술인, 연극인 등 여러 예술장르의 작가가 모여 만든 동인이 발전적으로 합쳐져 탄생한 것이다. 특히 파스큐라에는 김복진과 안석주라는 걸출한 미술작가가 가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배격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한 인생을 위한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예술의 체제 순응성’을 배격하고 당면 현실의 불합리한 점-경제조직, 현존사회제도 등-을 타파해나가는 것을 인생을 위한 예술이라고 하였다. 즉, 아카데미즘 안에 갇힌 예술을 배격하고 사회현실과 좀더 가까이 있는 예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카프는 최초의 정치적인 목적을 띈 예술가단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들의 단체결성은 가깝게는 일본의 전위예술 운동 단체인 ‘마보’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마보는 1920년대 일본 신흥예술운동의 대명사이자 일본 다다이즘의 대명사로서 조선의 프로예술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 예술단체의 초기 모임이었던 파스큐라에서는 강연회, 극운동, 잡지의 발행, 포스터 제작, 쇼윈도우(간판), 각종 장식 등 이른바 기존의 사회변혁을 위한 전반적인 문예활동을 막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미술인 외에 문학인과 연극인 등 예술 일반의 작가들이 모두 통합되어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미술인이던 김복진과 안석주는 생활과 접맥된 미술로서 경성의 간판 및 쇼윈도우 등에 관심을 갖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디자인 분야에 해당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들은 fine art라고 불렸던 순수미술의 영역과는 거리가 있는 분야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복진이나 안석주는 순수미술의 전당인 조선미전에도 출품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과연 이들이 순수와 참여의 구분을 얼마만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하였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어찌되었든 파스큐라는 1925년에 염군사와 통합,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카프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문학이 중심이 된 카프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예술가 단체로 예술이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인적 성찰이 배어 있는 하나의 결과물로 평가할 수 있다. 1935년 스스로 해산하기까지 예술의 역할을 대자적 역사관으로 접근한 이 조직 활동은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의 선구적 정치선전 미술의 시작으로 자리 매김 되고 있다.
카프 초창기에는 조직 내에서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함께 활동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기관지 『문예운동』을 통해 볼 때, 예술작품의 형식 역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성주의 계열의 공산주의자와 다다이즘이나 표현주의 계열의 무정부주의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재는 1차 방향전환을 통해 무정부주의자가 대거 탈퇴하고 공산주의자가 조직을 장악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는 미술이라는 무기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 현실의 불합리와 모순을 자각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식적 예술론은 예술이 단지 이데올로기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고유하고 독자적인 영역을 갖는다고 생각한 무정부주의자와 충돌하면서 이들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논쟁의 결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거 탈퇴하게 되면서 카프내부는 공산주의 계열이 장악하고 정치, 경제 투쟁과 같은 문화투쟁의 일환으로 미술운동 개념이 성립되었다. 탈퇴자였던 박영희가 카프 탈퇴와 더불어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남겼듯 무정부주의자의 대거 탈퇴로 목적의식적 예술론으로 카프의 이념을 단일화 한다.
한편 탈퇴한 무정부주의자들은 이후 다양하게 이합집산 하였는데, 이들은 예술의 본질과 예술의 태도에 대해 깊이 논의하면서 순수주의 문예이론의 정초를 마련하였다. 1차 방향전환을 거치며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논쟁은 말하자면 우리나라 근대문예이론의 가장 큰 논쟁인 순수, 참여 논쟁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30년 2차 방향전환을 통해 카프계열의 작가는 작품제작에 많은 규제를 받는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목표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다루어야 했으며 혁명적이고 선동적인 내용을 현실성을 고려해 간결하게 표현해야 했던 것이다.
카프미술가들이 제작한 미술작품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젤화가 아닌 포스터, 삽화, 신문만화 등의 대중매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석영의 <포스터-문맹퇴치>(조선일보 1929.1.1)과 이갑기의 <파업>(1932년 원작소재불명), 이상춘의 <질소비료공장>(조선일보, 1932.5.29), 이상춘의 <질소비료공장2>(조선일보 1932.5.31)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노동자 농민을 영웅적으로 그려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즉, 당시 세계사적으로 공산주의 미술운동과 연관성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류의 파괴적인 양식보다는 러시아 미래파의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조류와 맥이 닿아 있다.
당시 조선미전이라는 강고한 아카데미즘의 전당이 조직과 권력을 통해 근대적 미술을 뿌리내리고 있었다면 반대급부로 프로미술가들의 활동은 안티 테제로서의 또다른 근대적 미술 운동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연재를 마치면서
글을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조금은 아쉽고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편집장의 간단한 제안에 욕심을 부린 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글을 써 가면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더 많다. 물론 필자의 이런 생각과 달리 독자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달리 해명할 여지가 없으니 이는 차후 다른 지면을 통해 빚을 갚고자 한다.
처음 조곡이라는 형식을 택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이 조금 들었던 것은 여전히 그렇지 않은 미술의 가능성과 유의미성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박한 맑스주의자로서 정치선전예술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대학시절의 필자에게 미술사 공부는 시각물에 대한 풍부한 사유를 제공하였으며, 천박하기는 하나 맑스주의자로서 경험한 예술이라는 얄팍한 허위의식에 갇힐 뻔한 위기에서 필자를 구출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앞으로 어떻게 분출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때마다 예술은 자본가의 것도, 지식인의 것도, 예술가의 것도 아닌 대중의 것이라는 문구를 늘 간직하고자 한다.
염군사, 파스큐라의 통합체-카프
한국 근대기의 프로미술운동은 가장 정치, 선전적이며 특정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 위해 복무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운동이었다. 전통시대의 미술이 사대부의 유흥과 여가생활에서 창작되었거나 또는 정부나 관에서 필요로 하는 미술작품을 집단 창작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에서 근대기의 미술 상황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오늘 다루게 될 프로미술과 같은 정치선전 미술을 탄생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이하 카프)이라는 프로예술가들의 조직은 염군사와 파스큐라라는 문학인과 미술인, 연극인 등 여러 예술장르의 작가가 모여 만든 동인이 발전적으로 합쳐져 탄생한 것이다. 특히 파스큐라에는 김복진과 안석주라는 걸출한 미술작가가 가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배격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한 인생을 위한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예술의 체제 순응성’을 배격하고 당면 현실의 불합리한 점-경제조직, 현존사회제도 등-을 타파해나가는 것을 인생을 위한 예술이라고 하였다. 즉, 아카데미즘 안에 갇힌 예술을 배격하고 사회현실과 좀더 가까이 있는 예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카프는 최초의 정치적인 목적을 띈 예술가단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들의 단체결성은 가깝게는 일본의 전위예술 운동 단체인 ‘마보’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마보는 1920년대 일본 신흥예술운동의 대명사이자 일본 다다이즘의 대명사로서 조선의 프로예술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 예술단체의 초기 모임이었던 파스큐라에서는 강연회, 극운동, 잡지의 발행, 포스터 제작, 쇼윈도우(간판), 각종 장식 등 이른바 기존의 사회변혁을 위한 전반적인 문예활동을 막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미술인 외에 문학인과 연극인 등 예술 일반의 작가들이 모두 통합되어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미술인이던 김복진과 안석주는 생활과 접맥된 미술로서 경성의 간판 및 쇼윈도우 등에 관심을 갖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디자인 분야에 해당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들은 fine art라고 불렸던 순수미술의 영역과는 거리가 있는 분야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복진이나 안석주는 순수미술의 전당인 조선미전에도 출품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과연 이들이 순수와 참여의 구분을 얼마만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하였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어찌되었든 파스큐라는 1925년에 염군사와 통합,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카프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문학이 중심이 된 카프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예술가 단체로 예술이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인적 성찰이 배어 있는 하나의 결과물로 평가할 수 있다. 1935년 스스로 해산하기까지 예술의 역할을 대자적 역사관으로 접근한 이 조직 활동은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의 선구적 정치선전 미술의 시작으로 자리 매김 되고 있다.
카프 초창기에는 조직 내에서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함께 활동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기관지 『문예운동』을 통해 볼 때, 예술작품의 형식 역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성주의 계열의 공산주의자와 다다이즘이나 표현주의 계열의 무정부주의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재는 1차 방향전환을 통해 무정부주의자가 대거 탈퇴하고 공산주의자가 조직을 장악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는 미술이라는 무기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 현실의 불합리와 모순을 자각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식적 예술론은 예술이 단지 이데올로기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고유하고 독자적인 영역을 갖는다고 생각한 무정부주의자와 충돌하면서 이들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논쟁의 결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거 탈퇴하게 되면서 카프내부는 공산주의 계열이 장악하고 정치, 경제 투쟁과 같은 문화투쟁의 일환으로 미술운동 개념이 성립되었다. 탈퇴자였던 박영희가 카프 탈퇴와 더불어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남겼듯 무정부주의자의 대거 탈퇴로 목적의식적 예술론으로 카프의 이념을 단일화 한다.
한편 탈퇴한 무정부주의자들은 이후 다양하게 이합집산 하였는데, 이들은 예술의 본질과 예술의 태도에 대해 깊이 논의하면서 순수주의 문예이론의 정초를 마련하였다. 1차 방향전환을 거치며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논쟁은 말하자면 우리나라 근대문예이론의 가장 큰 논쟁인 순수, 참여 논쟁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30년 2차 방향전환을 통해 카프계열의 작가는 작품제작에 많은 규제를 받는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목표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다루어야 했으며 혁명적이고 선동적인 내용을 현실성을 고려해 간결하게 표현해야 했던 것이다.
카프미술가들이 제작한 미술작품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젤화가 아닌 포스터, 삽화, 신문만화 등의 대중매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석영의 <포스터-문맹퇴치>(조선일보 1929.1.1)과 이갑기의 <파업>(1932년 원작소재불명), 이상춘의 <질소비료공장>(조선일보, 1932.5.29), 이상춘의 <질소비료공장2>(조선일보 1932.5.31)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노동자 농민을 영웅적으로 그려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즉, 당시 세계사적으로 공산주의 미술운동과 연관성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류의 파괴적인 양식보다는 러시아 미래파의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조류와 맥이 닿아 있다.
당시 조선미전이라는 강고한 아카데미즘의 전당이 조직과 권력을 통해 근대적 미술을 뿌리내리고 있었다면 반대급부로 프로미술가들의 활동은 안티 테제로서의 또다른 근대적 미술 운동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연재를 마치면서
글을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조금은 아쉽고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편집장의 간단한 제안에 욕심을 부린 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글을 써 가면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더 많다. 물론 필자의 이런 생각과 달리 독자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달리 해명할 여지가 없으니 이는 차후 다른 지면을 통해 빚을 갚고자 한다.
처음 조곡이라는 형식을 택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이 조금 들었던 것은 여전히 그렇지 않은 미술의 가능성과 유의미성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박한 맑스주의자로서 정치선전예술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대학시절의 필자에게 미술사 공부는 시각물에 대한 풍부한 사유를 제공하였으며, 천박하기는 하나 맑스주의자로서 경험한 예술이라는 얄팍한 허위의식에 갇힐 뻔한 위기에서 필자를 구출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앞으로 어떻게 분출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때마다 예술은 자본가의 것도, 지식인의 것도, 예술가의 것도 아닌 대중의 것이라는 문구를 늘 간직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