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정세, 그리고 전선재편 : 문제의 개요
1. 현 정세
김대중 정부의 집권 말기에 이르러,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더욱 고도화, 다면화하고 있다. 상품시장, M&A시장, 금융시장을 통해 기업경영을 규율하고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을 완비한다는 구상으로 한국경제의 금융화는 한단계 심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자 대중은 이미 장기적 불안정화로 진입하였으며,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금융화에 편승하는 재벌에게 막대한 부가 집중되고 있다. 구조조정 정책과 금융투기에 따라 일시적으로 신자유주의 지배분파를 지지했던 중상층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실리주의적 지지를 급격히 철회하였다. 이후 이는 보수적인 국민정당화를 지향하는 한나라당의 반사이득으로 귀결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확전과 북미관계의 냉각상태는 정치적 불안정성을 고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심화를 중단시키고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단결을 이루기 위한 명확한 정치 슬로건과 전국적 투쟁의 조직화가 어느 때보다 시급하며, 동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세계적 차원의 군사적 긴장을 막기 위한 민중운동의 공동투쟁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책개혁과 구조조정의 계급적 본질
198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계의 (반)주변부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외채·외환위기에 직면하여 미국 정부와 국제 금융기관은 위기관리 정책을 완성해왔다. 미국 재무부의 지도로 IMF는 구제금융-원리금탕감의 조건으로 경제개혁을 요구했다. 일차적으로는 채권자 즉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채권 회수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외채위기의 재발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강력한 경제구조조정과 정책개혁 프로그램을 강제하였다. (물론 한국 외환위기 시기에 채무이행 조정과정에서 가산금리가 추가되고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야만 했듯이, 채권은행들은 손실을 본 게 아니라 오히려 득을 얻었다.)
그러나 국제금융체계의 불안정과 (반)주변부 국가들의 거시경제적 불균형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대안적 발전모델을 애당초 제시할 수 없었으며, 경제의 금융화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미봉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 얼개는 외채조정 방식을 '부채-주식 전환' 중심으로 하며, 고금리에서 저금리로 정책기조를 전환하여 주식시장을 육성하고, 외환 및 자본거래를 자유화하고, 목표 환율대를 폐기하며, 금융산업 및 기업의 구조조정을 시도하여, 궁극적으로 해외로 도피한 자본을 다시 유인한다는 것이었다. 즉 '신흥공업국'을 '신흥시장'(주식시장)으로 전환하여 외채위기를 탈출하자는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1997∼98년 시점에서 남한에서의 구조조정의 핵심으로 부각된 것은, 자본시장 개방, 기업 지배구조 및 금융시스템 개혁,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이는 기존의 IMF의 정책 프로그램을 초과하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집단소송제 도입 등 김영삼 정부가 IMF와 맺은 협약에는 없었던 내용을 추가적으로 승인하였다. 결국 남한에서의 구조조정은 금융개방을 정점으로, 재벌 및 금융산업, 노동시장을 국제금융시스템에 적합하도록 개조하는 것이었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미국과 IMF가 제시했던 정책개혁 프로그램을 수용한다면 경제 '회복'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사실로 드러났다(구조조정에 따른 국제신인도 회복과 주가상승). 하지만 이는 남한 경제가 금융적 축적체제에 통합됨으로써 나타나는 극히 불안정한 효과일 따름이다. 경제회복의 수혜자는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이에 편승한 일부 재벌일 뿐이며, 노동자 대중은 이중삼중의 착취를 감수해야만 했다. 정부가 해외 채권단으로부터 추가적인 자금지원을 얻기 위한 지불해야 했던 가산금리라든가, 부실기업 처리를 위해 투입된 막대한 공적자금은 고스란히 금융자본의 몫으로 돌아갔다. 외채상환을 위한 긴축재정, 기업가치상승(주가상승)을 위한 노동 유연화 등 일련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노동자 대중의 고혈을 짜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지지연합의 구축
따라서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7년 대통령선거 시기 불어닥친 외환·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필연적인 계기를 형성하였지만, 그 정치적 실행가능성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이른바 '反패권 지역주의'('지역등권론', 호남+충청+수도권)와 보수-개혁 정치연합(DJP연합+舊재야+NGO's+386세대)을 통해 새로운 지지연합을 창출함으로써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연히 구조조정은 자본측에게도 고통스러운 과정인 바, 오랜 군사독재 기간 동안 형성된 재벌-정부관료-정치가 등 기득권으로 뭉친 보수적 결합체의 조직된 저항을 정권교체를 통해 분쇄하는 것은 정책개혁의 사활적 과제였다. 또한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으로 포장된 민간민선정부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세력을 분할·관리 체계로 포섭하는 데에도 유능할 수 있었다. 나아가 새로운 지배분파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에 조응하여, 동아시아 경제통합과 분쟁관리에 봉사하는 데에도 적합했다. 즉 기존의 (김영삼정권 시기까지 정치적 수사로 남아있던) '반공발전주의'를 탈피하여, 한-미-일 삼각동맹 속에서 북한 관리정책을 구사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미국 정부와 IMF의 강력한 지원 하에서,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기 강력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IMF 구제금융협약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집행하는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대통령 취임 이전에 이미 정권인수위-비상경제대책위는 의회기능을 무력화한 가운데 초법적인 권력행사를 개시했다. 재벌 총수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여 기업구조조정에 관한 명문화된 합의를 이끌어 내고,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운동의 예봉을 분쇄한 것은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 금융, 기업, 공공, 노동부문 등에 대한 단계적인 구조조정은 노동운동을 분할 관리하는 주요한 방식이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사회운동 중 일부 세력을 정책개혁의 파트너로 수용하였고, 사회운동도 이에 호응하여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비정부기구'(NGO)라고 자임하기 시작했다. 정경분리에 입각한 햇볕정책도 "정권이 바뀌었다"는 선전 효과를 거두기에 충분했고, 북한 관리정책의 성공 가능성을 대중적으로 선전했다. 이처럼 새로운 지배분파의 생존은 새로운 지지연합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고, 재벌을 정점으로 한 보수적 부르주아 세력의 정치적 반격을 제어하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세력의 일부를 분할·관리 체계로 포섭하는 한에서만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지배분파는 의회 내 소수파라는 한계 때문에 신보수주의적 타협(DJP연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회를 무력화해야 했고, 따라서 반DJ 보수세력(한나라당)과의 정치적 충돌을 반복해서 유도해야만 했다. 금융화 추세에 호응했던 부르주아는 일단 정책개혁을 분명히 지지했으나, 김대중 정부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언제라도 철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지도력을 근저에서 잠식한 것은 금융화 추세에 동반된 대중의 궁핍화(노동의 불안정화)였다.
·정책개혁과 진보주의
이 가운데 미국과 IMF의 구상에 가장 충실한 입장이 '진보주의'라는 이름으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개혁을 적극적으로 보족했다. DJ 집권초기, 일부 시민운동은 김대중 정부의 재벌압박(재벌책임론/재벌총수 사재출자)에 조응하여 재벌개혁에 모든 운동의 초점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는 금융개방을 수용하는 가운데, 남한의 재벌과 금융산업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게 재편한다는 미국과 IMF의 구상을 가장 선진적으로 대변하는 것에 불과했다. 예컨대 참여연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금융의 원리를 통해 기업지배구조를 미국화해서 재벌해체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경제민주화운동', '소액주주운동'(주주행동주의)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민중운동 진영이 재벌개혁-해체 논점에 휘말리는 사이, 한국경제는 금융적 축적체제에 편입하기 위한 구조조정의 급한 물살을 탔다.
또한 정책개혁 초기, 이들 세력은 민중운동의 투쟁방향을 크게 교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IMF 구제금융협약은 눈앞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거부하기 힘든 조치이며, 다만 그 파괴적 효과를 최소화하자는 논리로 무장했다. 이는 'IMF 재협상'을 주장하는 입장부터 사회안전망 구축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흐름 내부의 견해차에 불과했다. IMF의 고금리 긴축정책의 문제는 단지 경기부양책으로의 선회 타이밍을 둘러싼 부차적 쟁점이었고, 사회안전망은 노동유연화로 진입하기 위한 단계일 뿐이었다.
이제 집권 후반기에 이르러, 시민운동의 주도세력은 '개혁후퇴 저지'를 내걸며 김대중 정부의 개혁프로그램을 일단락 하려는 구상을 펼치고 있다. 물론 그 초점은 주주 즉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이해보호에 맞춰있다. 한편으로는 '집단소송제 도입'과 같은 기업지배구조 개혁을 마무리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부패방지위원회 건설이다. (OECD '반뇌물협약'에 가입한 34개 서명국이 세계전체의 해외직접투자의 99%를 차지한다.) 특히 反부패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처럼, 모든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하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쟁점들을 압도하는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결국 이들의 조직적 움직임은 남한 사회의 정치지형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이 자장 내에서 정책 방향을 수립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급격한 몰락
이처럼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주도권은 강고한 듯이 보였으나, 2000년 총선을 계기로 점차 위기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총선에서 민주당은 '젊은 피 수혈론'을 앞세우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지지기반을 다지고, 영남권에서 당선자를 배출함으로써 전국정당화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의회 일당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57%의 낮은 투표율 속에서 민주당은 국회의석을 대폭 확대하는데 실패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따른 지역적 불균형이 '지역주의'를 지탱했다. 금융화의 수혜를 얻은 지역과 산업기반이 붕괴된 지역이 확연히 구분되었고, 김대중 정권의 찬반을 가르는 경계선은 공고화되었다. 한나라당은 국가채무 규모를 둘러싼 논란이나 대우차 해외매각 반대 등을 통해 대중심리를 자극했다. 이처럼 2000년 총선결과는 보수적인 부르주아 세력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김대중 정부에 '피해의식'을 갖는 대중이 별다른 정치비전 조차 제시하지 못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양상이 점차 공고화되었다. 현재의 상황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실리주의적 기대가 급격하게 붕괴하면서 정치적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주식투기-벤쳐 열풍의 붕괴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주요 수혜자였던 중산층의 절대적 지지가 쇠퇴한 계기가 되었으며, 경제위기 극복의 '견인차'로 지목된 수출산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은 만성적 불황에 대한 사회적 위기감을 전반적으로 확대했다. (이는 구조조정의 결과 그 이득의 절대적인 몫은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금융화에 편승한 재벌의 편으로 돌아갈 뿐이며, 남한 중간층의 수혜는 잠정적·일시적이라는 점을 반증한다.)
·신자유주의 지지 세력의 양가성
따라서 여기서 DJ세력에 대한 압도적 지지에서 급격한 환멸로 전환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핵심적 지지세력의 양가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성장기 동안 상대적인 생활조건의 개선을 경험한 화이트칼라, 386세대, 노동자 대중의 상층부로 점진적 발전과 진보로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 게다가 이들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계기로 나름의 자생적 반공주의를 생산해왔다. 그 결과 이들은 한국사회는 점차 진보하고 민주화하였다고 생각했으며,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고착화된 '자기 중심적 실리주의' 혹은 '성공주의'와 '보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의 투쟁은 행동에서는 전투적일 수 있지만, 이념에서는 보수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생존권 투쟁의 경우도 연대 지향적인 틀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자연스럽게 NGO와 참여적 노사관계라는 새롭게 구축된 통치 기제 속으로 포섭되었다. 과거 학생운동의 네트워크는 사업적-정치적 네트워크로 전환했다. 일종의 보신주의가 '개혁'의 외피를 둘러쓰고 작동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구조적 위기 혹은 만성적 불황으로 인해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분파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지지를 급격히 철회하는 과정에서 "개혁의 불가능성"을 승인하는 데까지 이를 가능성도 엿보인다. 경제적 위기의 지속과 정치적 비리의 반복 속에서, 김대중 정부를 지지했던 세력들의 일부가 공공연하게 신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로 기울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사회문제의 핵심을 '도덕적 해이'에서 찾으며, 그 대안으로 권위주의를 공공연하게 지지한다. 그리고 불안정노동-실업층을 도덕적 타락집단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사회복지가 오히려 해악이라고 규정한다.) 즉 신자유주의 지지연합의 핵심세력이 신보수주의의 정치적 지향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보수주의 분파의 정치적 상징조작
이 가운데 DJ 지배분파의 위기 속에서 반사이득을 공고화하려는 반DJ 보수세력(한나라당)의 집요한 공세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언론-검찰-안기부 등 선거시기 핵심적 권력기관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공세와 비리-폭로전을 유도하였다. 의료보험 재정통합 1년 6개월 유예, 남북관계 관련 3법 개정 등으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개혁 중 일부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또한 교원정년 1년 연장, 법인세 1% 인하 등 (실질적인 정책효과보다는) 보수세력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을 펼치고 있다. 즉 기존의 정책기조 전반을 역전하기보다는, 몇가지 주요 쟁점들을 중심으로 김대중 정부와 대립점을 대중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협약/구조조정 프로그램 이후 잠정적으로 형성된 신자유주의 지배분파를 대체하려는 반DJ 보수세력의 정치적 성격은 여전히 모호하다. 한나라당은 2002년 선거국면에서 국민정당화를 최대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즉 반공발전주의 '이념정당'을 탈피하여, 신한국당과 (꼬마)민주당의 통합 이후 '개혁과 보수'의 공존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정책정당'화를 꾀하는 것이다. 이는 DJ식의 신자유주의 지배분파를 대체하기 위한 불가피한 구상으로 '중도우파 국민정당'을 정착하겠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지배분파가 구축된다면 노동운동 상층부에 대한 타협적 태도는 어느 정도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불안정 노동층-여성에 대해서는 보다 완고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예컨대 미국 민주당/공화당 정책의 핵심적 차이는 '여성' 및 '흑인' 문제이며, 이 역시도 사회복지의 삭감 문제에 앞서, 이데올로기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2002년 대선의 정치적 의미
부르주아에게 이번 선거의 의미는 포스트-삼김 시대의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창출하여, 현재의 만성적 불황 속에서 위기관리라는 역사적 책무를 수행할 지배분파의 형성에 있다. 즉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 위기를 완충하기 위해 지배분파를 새롭게 교체해야만 하는 시점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 '위기관리 국가의 위기' 속에서 선거를 가장 강력한 위기 관리 기제로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원적인 장애가 존재한다. 현재 계급적 세력관계는 부르주아 계급의 압도적 우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1980년대 말 3저 호황 때와 같은 물질적 뒷받침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며, 부르주아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방편 격으로 '정치개혁/정당개혁'의 불가피성이 대두되는 한편, 부르주아 권력체계를 안정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개헌 논의도 공론화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집권 여당이 제기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획기적이라 할만한 정당개혁이 이루어지고, 반부패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인입이 취약하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정치적 제스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부르주아의 정치적 우위는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정치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거와 같은 방식의 반공·반북주의가 그대로 반복될 수는 없겠지만,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파괴적인 효과 속에서 퇴행적인 지역주의와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즉 지역주의-신보수주의와 정치개혁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양립이 가능하며 2002년 양대 선거 시기를 관통할 수 있다. 오히려 정당-NGO 운동은 정치개혁을 중심으로 깊이 인입될 것이며, 이러한 실천은 새로운 지배분파의 창출과정을 안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의 확전과 북미관계의 불안
부르주아 내부의 정치적 주도권이 매우 불안정한 가운데, 미국의 대북 정책 방향선회는 한반도에 매우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 세력은 빈 라덴의 '사우디 커넥션'(차기 왕권을 둘러싼 반미성향 분파와의 연계고리)을 유포하며, '테러와의 전쟁'의 초점을 범아랍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나 반미 블록의 형성을 완전히 봉쇄하는데 맞추고 있다. 사우디는 미국의 중동지배의 가장 중요한 안전판이며, 사우디 내부의 세력관계가 미국에게 불리하게 변화한다면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야만 한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적으로 사우디에 개입하는 방안은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사우디 주변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며(소말리아 군사개입의 재개), 향후 사우디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위험 정권을 붕괴시키는 방향을 검토,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이라크 전쟁의 종결). 또한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중동지배의 불안 요소들을 제거하는(PLO 압박) 방안도 모색 중에 있다.
미국의 확전 구상은 북미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클린턴 정부 후반부에 북미간의 미사일협상이 최종적으로 무산되고,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협상 안을 고수하면서 북미대화는 다시 중단되었다. 부시 정부는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의 대북 경제지원(전력지원)의 실질적 중단을 요구하였고, 경제지원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햇볕정책은 무효화될 위기에 처했다. 9·11 테러 이후 북한은 테러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북미관계가 경직되는 것을 막으려고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으나, 협상 재개 시점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군다나 미국이 생물학무기-화학무기 문제를 협상 의제로 추가하고자 한다면, 미국은 페리 보고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협상 틀을 구성해야 할 것이며, 이는 북미대화의 교착상태가 장기간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1년과 같이 북미대화가 중단된 상태로 유지된다면, 2003년 제네바합의 이행의 문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 (경수로 핵심부품이 북한에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북한의 과거핵 규명을 시도한다면 제네바합의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2. 민중운동의 과제
·사회운동의 양적 성장의 이면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및 시민운동은 이른바 '사회세력화'를 이루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사정위원회도 상설기구로 법제화됨에 따라, 이제 노동현안을 놓고 정부기구와 정책적 협의 틀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또한 각종 사회현안에 관한 정책방향을 두고 시민운동단체가 참여할 공간도 확대되었다. 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은 스스로를 비정부기구(NGO)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정부기구와의 상호협력 활동을 모색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하에서 사회운동은 양적으로 확대했고, 사회적 위상도 안정화된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실질적인 민주화의 길로 진입하였으며, 사회운동은 그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외형적 성장의 저변에 깔려있는 사회운동의 구조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노동운동의 대중적 토대가 양극화하는 경향이 심화하였고, 이는 남한의 노동조합운동이 자연사적으로 발전하리라 기대를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렸다. 김대중 정부 집권 초기, 노사정위원회 합의가 노동조합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크게 확대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였기에 장기적인 시각에서 볼 때 노동운동 발전에 유리하다는 논리가 크게 세를 떨쳤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운동 '발전' 논리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영합하거나 아니면 철저히 무지한 주장일 따름이었다. 역으로 노동운동의 공동투쟁 전선이 초기에 무너지면서 노동조합 활동 폭은 크게 제약을 당했고, 노동조합은 개개 사업장 별로 조직보존 논리의 축을 따라 협소한 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대중의 요구를 공동으로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투쟁은 희미해졌으며, 노동자 대중은 장기적인 불안정화의 국면에 진입하였다. 민주노조운동이 지금까지의 활동을 관성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졌으나, 또한 새로운 운동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가운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조응하여 시민운동이 제시하는 운동 프로그램이 사회운동의 활동방향을 선도하는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정책개혁의 정치적 실행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NGO의 역할에 주목하였고, 이는 기업구조조정(재벌 해체, 기업지배구조 개혁), 부패감시와 정치개혁, 협력적 노사관계와 '생산적 복지'의 수립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 프로그램에 호응하는 일부 시민운동단체의 성공 신화는 전체 사회운동의 활동방식이 이를 모방하는 축으로 변화하도록 이끌었다. 김대중 정부 집권 상반기, 사회운동의 쟁점을 선도세력이 급격히 교체되는 양상이 뚜렷하였고,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개혁 하에서 그 주도세력이 변화하고 있는 와중이며, 또한 민주노조운동을 비롯한 계급대중운동의 기층 토대는 급격한 변화에 휩쓸리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지지하는 시민운동과 경제위기 속에서 오히려 두드러진 '실리주의-조합주의' 노선 양자의 흐름이 조우하여 운동 흐름을 크게 잠식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여 운동노선을 둘러싼 노동운동 내부의 갈등도 첨예해지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남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주장은 김대중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 하에 성장해온 이들 세력의 아전인수격 해석일 따름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 말기에 이르러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이니셔티브가 약화하면서 이들 세력은 민주당 내의 다른 부르주아 분파들을 모방하여 김대중과 거리를 두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거나 어색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 속에서, 정책개혁의 파괴적 효과는 이미 사회경제 모든 분야에 걸쳐 다면적으로 드러났다.
·왜 '전선재편'인가?
2001년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조기졸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선언이 이제 남한 경제에서 IMF의 영향력을 배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남한의 사회·경제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금융적 축적체제에 깊게 통합되었고, 오히려 미국과 IMF가 지시한 방향을 향해 더욱 빨리 돌진하고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 집권 초기, 민중운동이 제시했던 'IMF 거부, 구조조정 중단'이라는 슬로건은 김영삼-김대중 정부에게 촉구하는 어떤 '요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김대중 정부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명확한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구제금융 협약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전면 수용하여 관철하려는 정권의 성격을 '폭로'하며, 대중적 투쟁을 촉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물론 정책개혁은 구조조정을 통해 증시부양이라는 경제 '회복'의 신기루를 끌어낼 수 있지만, 이는 극히 일시적 현상일 따름이며, 금융화와 노동유연화를 통해 노동자 대중을 이중삼중으로 착취하는 경제 메커니즘의 작동을 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IMF협약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거부하려는 민중운동의 초기의 시도는 분명히 실패했다. 강력한 형태의 대중투쟁이 촉발되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위기라는 결정적 국면에서 실리주의-조합주의가 민중운동의 운명을 결정했다. 특히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 정책에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던 노동운동의 경우,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파견법을 주요골자로 하는 노사정합의를 전격 수용함으로써, 초기에 그 운명이 판가름났다. IMF 초기국면에서의 노동운동의 핵심적 투쟁고리를 모두 포기한 이후 노동운동의 공동투쟁전선의 폭은 매우 협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정치전선을 형성을 통해 각각의 투쟁을 엄호하려는 움직임도 미약했다. 김대중 정권은 기업-금융-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순차적으로 강행했고, 각 부문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각개격파 당하는 궁지에 처하였다. 더군다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급격하게 증가한 불안정노동층(半실업, 비정규직, 도시빈민 등)은 저항을 표출할 정치적·조직적 토대마저 매우 취약했다.
이처럼 민중운동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대중투쟁을 실현할 수 없었다. 특히 노동자 대중의 압도적 다수가 불안정화의 국면에 진입한 상태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옛날의 활동방식으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노동조합운동은 기존의 이념과 조직, 기본적인 활동방식을 전변하기 위해 목적 의식적인 투쟁과 결합할 때에만 운동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주도하는 쟁점들의 본질을 효과적으로 폭로하며 명확한 투쟁 슬로건을 정식화하여 정치전선을 형성하는 데에도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1990년대 고착화한 대중조직의 활동방식에 기대어 단편적인 계획들을 제출할 수 있었을 뿐, 중기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운동은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즉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이끌어온 구조조정과 금융화에 대항하는 정치전선의 형성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계급대중운동의 재편을 전선운동의 전망 속에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과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현재의 정세는 양면적이다. 국가와 지배세력의 본질적·구조적 무능력 역시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며, 부르주아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운동의 정치투쟁은 정체상태에 빠져 있고, 정치전선은 이완되어 있다. 대중운동은 정권의 '관리주의'에 노출되어 있고, 노선의 분화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현재 어떤 지배세력도 민중 생존의 근본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민중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 의식적인 활동이 전제되어야 하다. 그렇다면 민중운동의 긴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먼저, 금융화 공세에 대한 정치적 대응력을 강화하여, 신자유주의 지배분파에 맞서는 정치전선의 형성에 복무해야 한다. 금융화의 추세는 대형 금융비리를 반드시 동반하며, 정권 말기 불거진 금융비리는 금융화의 결과 수혜를 얻은 소수의 집단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한미-한일투자협정, 금융개방과 공공부문 사유화, 기업연금제와 우리사주제도 등 금융화를 심화하는 계기들 속에서 그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화한다. 그리고 계급대중운동과 결합된 대중적 정치전선 형성을 위해 주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여성, 이주, 실업, 장애, 여성 등을 포함한 불안정노동층의 노동권, 생활권 쟁취 투쟁에 적극 결합하여 대중적 투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노동법 개악 저지를 매개로 노동자대중의 연대투쟁을 실현해야 한다. 북한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군사적 도발을 가하고 있는 부시정권의 대북 정책에 맞서며, 미국의 전쟁확대, MD 도입 반대 투쟁을 매개로 이를 대정권 정치투쟁의 주요한 계기로 형성한다.
또한 전선운동의 재편과 강화를 위해 공동투쟁을 강화해야 한다. 각각의 연대운동체들은 계급대중운동을 강력히 엄호할 수 있도록 명백한 투쟁요구를 정식화하고 정치적 기조를 강화하며, 전선운동의 정착을 향해 대중적 토대의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국민중연대(준)은 명실상부한 '상설공투체'로서 일상적 투쟁을 조직하며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정치적 기조를 전국적으로 공고화하여, 정치적 민중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전국민중연대(준)은 2002년 하반기 본조직 건설을 목표로, 대중운동/대중조직과 지역운동/지역조직이 자신의 투쟁계획 속에서 본조직 출범에 적극 참여하도록 추동하며, 주요 투쟁단위의 조직적 결합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투자협정·WTO반대국민행동(KoPA)을 비롯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투쟁을 능동적으로 기획하여, 전선 재편의 정치적 방향성을 선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코포라티즘을 거부하는 국제적인 사회운동 세력의 연대의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남한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도록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불안정노동층의 투쟁요구를 공동으로 실현하기 위한 투쟁단위를 형성하거나 적극 결합하여, 노동운동의 계급적 강화를 위한 물적 토대의 창출하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통일성을 제고해야 한다. 이는 기존 대중운동이 포괄하지 못하는 노동자, 민중운동의 좌익적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며(이 차원에서 그 운동은 하나의 선도적 집단이 될 수 있다), 전선 운동의 강화와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 말기에 이르러,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더욱 고도화, 다면화하고 있다. 상품시장, M&A시장, 금융시장을 통해 기업경영을 규율하고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을 완비한다는 구상으로 한국경제의 금융화는 한단계 심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자 대중은 이미 장기적 불안정화로 진입하였으며,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금융화에 편승하는 재벌에게 막대한 부가 집중되고 있다. 구조조정 정책과 금융투기에 따라 일시적으로 신자유주의 지배분파를 지지했던 중상층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실리주의적 지지를 급격히 철회하였다. 이후 이는 보수적인 국민정당화를 지향하는 한나라당의 반사이득으로 귀결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확전과 북미관계의 냉각상태는 정치적 불안정성을 고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심화를 중단시키고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단결을 이루기 위한 명확한 정치 슬로건과 전국적 투쟁의 조직화가 어느 때보다 시급하며, 동아시아 지역을 비롯해 세계적 차원의 군사적 긴장을 막기 위한 민중운동의 공동투쟁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책개혁과 구조조정의 계급적 본질
198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계의 (반)주변부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외채·외환위기에 직면하여 미국 정부와 국제 금융기관은 위기관리 정책을 완성해왔다. 미국 재무부의 지도로 IMF는 구제금융-원리금탕감의 조건으로 경제개혁을 요구했다. 일차적으로는 채권자 즉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채권 회수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외채위기의 재발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강력한 경제구조조정과 정책개혁 프로그램을 강제하였다. (물론 한국 외환위기 시기에 채무이행 조정과정에서 가산금리가 추가되고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야만 했듯이, 채권은행들은 손실을 본 게 아니라 오히려 득을 얻었다.)
그러나 국제금융체계의 불안정과 (반)주변부 국가들의 거시경제적 불균형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대안적 발전모델을 애당초 제시할 수 없었으며, 경제의 금융화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미봉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 얼개는 외채조정 방식을 '부채-주식 전환' 중심으로 하며, 고금리에서 저금리로 정책기조를 전환하여 주식시장을 육성하고, 외환 및 자본거래를 자유화하고, 목표 환율대를 폐기하며, 금융산업 및 기업의 구조조정을 시도하여, 궁극적으로 해외로 도피한 자본을 다시 유인한다는 것이었다. 즉 '신흥공업국'을 '신흥시장'(주식시장)으로 전환하여 외채위기를 탈출하자는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1997∼98년 시점에서 남한에서의 구조조정의 핵심으로 부각된 것은, 자본시장 개방, 기업 지배구조 및 금융시스템 개혁,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이는 기존의 IMF의 정책 프로그램을 초과하는 내용을 포함하였다.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집단소송제 도입 등 김영삼 정부가 IMF와 맺은 협약에는 없었던 내용을 추가적으로 승인하였다. 결국 남한에서의 구조조정은 금융개방을 정점으로, 재벌 및 금융산업, 노동시장을 국제금융시스템에 적합하도록 개조하는 것이었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미국과 IMF가 제시했던 정책개혁 프로그램을 수용한다면 경제 '회복'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사실로 드러났다(구조조정에 따른 국제신인도 회복과 주가상승). 하지만 이는 남한 경제가 금융적 축적체제에 통합됨으로써 나타나는 극히 불안정한 효과일 따름이다. 경제회복의 수혜자는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이에 편승한 일부 재벌일 뿐이며, 노동자 대중은 이중삼중의 착취를 감수해야만 했다. 정부가 해외 채권단으로부터 추가적인 자금지원을 얻기 위한 지불해야 했던 가산금리라든가, 부실기업 처리를 위해 투입된 막대한 공적자금은 고스란히 금융자본의 몫으로 돌아갔다. 외채상환을 위한 긴축재정, 기업가치상승(주가상승)을 위한 노동 유연화 등 일련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노동자 대중의 고혈을 짜내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지지연합의 구축
따라서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7년 대통령선거 시기 불어닥친 외환·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필연적인 계기를 형성하였지만, 그 정치적 실행가능성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이른바 '反패권 지역주의'('지역등권론', 호남+충청+수도권)와 보수-개혁 정치연합(DJP연합+舊재야+NGO's+386세대)을 통해 새로운 지지연합을 창출함으로써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연히 구조조정은 자본측에게도 고통스러운 과정인 바, 오랜 군사독재 기간 동안 형성된 재벌-정부관료-정치가 등 기득권으로 뭉친 보수적 결합체의 조직된 저항을 정권교체를 통해 분쇄하는 것은 정책개혁의 사활적 과제였다. 또한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으로 포장된 민간민선정부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세력을 분할·관리 체계로 포섭하는 데에도 유능할 수 있었다. 나아가 새로운 지배분파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에 조응하여, 동아시아 경제통합과 분쟁관리에 봉사하는 데에도 적합했다. 즉 기존의 (김영삼정권 시기까지 정치적 수사로 남아있던) '반공발전주의'를 탈피하여, 한-미-일 삼각동맹 속에서 북한 관리정책을 구사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미국 정부와 IMF의 강력한 지원 하에서,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기 강력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IMF 구제금융협약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집행하는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대통령 취임 이전에 이미 정권인수위-비상경제대책위는 의회기능을 무력화한 가운데 초법적인 권력행사를 개시했다. 재벌 총수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여 기업구조조정에 관한 명문화된 합의를 이끌어 내고,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운동의 예봉을 분쇄한 것은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 금융, 기업, 공공, 노동부문 등에 대한 단계적인 구조조정은 노동운동을 분할 관리하는 주요한 방식이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사회운동 중 일부 세력을 정책개혁의 파트너로 수용하였고, 사회운동도 이에 호응하여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비정부기구'(NGO)라고 자임하기 시작했다. 정경분리에 입각한 햇볕정책도 "정권이 바뀌었다"는 선전 효과를 거두기에 충분했고, 북한 관리정책의 성공 가능성을 대중적으로 선전했다. 이처럼 새로운 지배분파의 생존은 새로운 지지연합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고, 재벌을 정점으로 한 보수적 부르주아 세력의 정치적 반격을 제어하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세력의 일부를 분할·관리 체계로 포섭하는 한에서만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지배분파는 의회 내 소수파라는 한계 때문에 신보수주의적 타협(DJP연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회를 무력화해야 했고, 따라서 반DJ 보수세력(한나라당)과의 정치적 충돌을 반복해서 유도해야만 했다. 금융화 추세에 호응했던 부르주아는 일단 정책개혁을 분명히 지지했으나, 김대중 정부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언제라도 철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지도력을 근저에서 잠식한 것은 금융화 추세에 동반된 대중의 궁핍화(노동의 불안정화)였다.
·정책개혁과 진보주의
이 가운데 미국과 IMF의 구상에 가장 충실한 입장이 '진보주의'라는 이름으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개혁을 적극적으로 보족했다. DJ 집권초기, 일부 시민운동은 김대중 정부의 재벌압박(재벌책임론/재벌총수 사재출자)에 조응하여 재벌개혁에 모든 운동의 초점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는 금융개방을 수용하는 가운데, 남한의 재벌과 금융산업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게 재편한다는 미국과 IMF의 구상을 가장 선진적으로 대변하는 것에 불과했다. 예컨대 참여연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금융의 원리를 통해 기업지배구조를 미국화해서 재벌해체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경제민주화운동', '소액주주운동'(주주행동주의)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민중운동 진영이 재벌개혁-해체 논점에 휘말리는 사이, 한국경제는 금융적 축적체제에 편입하기 위한 구조조정의 급한 물살을 탔다.
또한 정책개혁 초기, 이들 세력은 민중운동의 투쟁방향을 크게 교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IMF 구제금융협약은 눈앞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거부하기 힘든 조치이며, 다만 그 파괴적 효과를 최소화하자는 논리로 무장했다. 이는 'IMF 재협상'을 주장하는 입장부터 사회안전망 구축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흐름 내부의 견해차에 불과했다. IMF의 고금리 긴축정책의 문제는 단지 경기부양책으로의 선회 타이밍을 둘러싼 부차적 쟁점이었고, 사회안전망은 노동유연화로 진입하기 위한 단계일 뿐이었다.
이제 집권 후반기에 이르러, 시민운동의 주도세력은 '개혁후퇴 저지'를 내걸며 김대중 정부의 개혁프로그램을 일단락 하려는 구상을 펼치고 있다. 물론 그 초점은 주주 즉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이해보호에 맞춰있다. 한편으로는 '집단소송제 도입'과 같은 기업지배구조 개혁을 마무리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부패방지위원회 건설이다. (OECD '반뇌물협약'에 가입한 34개 서명국이 세계전체의 해외직접투자의 99%를 차지한다.) 특히 反부패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처럼, 모든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하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쟁점들을 압도하는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결국 이들의 조직적 움직임은 남한 사회의 정치지형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이 자장 내에서 정책 방향을 수립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급격한 몰락
이처럼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주도권은 강고한 듯이 보였으나, 2000년 총선을 계기로 점차 위기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총선에서 민주당은 '젊은 피 수혈론'을 앞세우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지지기반을 다지고, 영남권에서 당선자를 배출함으로써 전국정당화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의회 일당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57%의 낮은 투표율 속에서 민주당은 국회의석을 대폭 확대하는데 실패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따른 지역적 불균형이 '지역주의'를 지탱했다. 금융화의 수혜를 얻은 지역과 산업기반이 붕괴된 지역이 확연히 구분되었고, 김대중 정권의 찬반을 가르는 경계선은 공고화되었다. 한나라당은 국가채무 규모를 둘러싼 논란이나 대우차 해외매각 반대 등을 통해 대중심리를 자극했다. 이처럼 2000년 총선결과는 보수적인 부르주아 세력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김대중 정부에 '피해의식'을 갖는 대중이 별다른 정치비전 조차 제시하지 못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양상이 점차 공고화되었다. 현재의 상황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실리주의적 기대가 급격하게 붕괴하면서 정치적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주식투기-벤쳐 열풍의 붕괴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주요 수혜자였던 중산층의 절대적 지지가 쇠퇴한 계기가 되었으며, 경제위기 극복의 '견인차'로 지목된 수출산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은 만성적 불황에 대한 사회적 위기감을 전반적으로 확대했다. (이는 구조조정의 결과 그 이득의 절대적인 몫은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금융화에 편승한 재벌의 편으로 돌아갈 뿐이며, 남한 중간층의 수혜는 잠정적·일시적이라는 점을 반증한다.)
·신자유주의 지지 세력의 양가성
따라서 여기서 DJ세력에 대한 압도적 지지에서 급격한 환멸로 전환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핵심적 지지세력의 양가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성장기 동안 상대적인 생활조건의 개선을 경험한 화이트칼라, 386세대, 노동자 대중의 상층부로 점진적 발전과 진보로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 게다가 이들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계기로 나름의 자생적 반공주의를 생산해왔다. 그 결과 이들은 한국사회는 점차 진보하고 민주화하였다고 생각했으며,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고착화된 '자기 중심적 실리주의' 혹은 '성공주의'와 '보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의 투쟁은 행동에서는 전투적일 수 있지만, 이념에서는 보수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생존권 투쟁의 경우도 연대 지향적인 틀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자연스럽게 NGO와 참여적 노사관계라는 새롭게 구축된 통치 기제 속으로 포섭되었다. 과거 학생운동의 네트워크는 사업적-정치적 네트워크로 전환했다. 일종의 보신주의가 '개혁'의 외피를 둘러쓰고 작동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구조적 위기 혹은 만성적 불황으로 인해 현재의 신자유주의 지배분파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지지를 급격히 철회하는 과정에서 "개혁의 불가능성"을 승인하는 데까지 이를 가능성도 엿보인다. 경제적 위기의 지속과 정치적 비리의 반복 속에서, 김대중 정부를 지지했던 세력들의 일부가 공공연하게 신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로 기울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사회문제의 핵심을 '도덕적 해이'에서 찾으며, 그 대안으로 권위주의를 공공연하게 지지한다. 그리고 불안정노동-실업층을 도덕적 타락집단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사회복지가 오히려 해악이라고 규정한다.) 즉 신자유주의 지지연합의 핵심세력이 신보수주의의 정치적 지향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보수주의 분파의 정치적 상징조작
이 가운데 DJ 지배분파의 위기 속에서 반사이득을 공고화하려는 반DJ 보수세력(한나라당)의 집요한 공세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언론-검찰-안기부 등 선거시기 핵심적 권력기관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공세와 비리-폭로전을 유도하였다. 의료보험 재정통합 1년 6개월 유예, 남북관계 관련 3법 개정 등으로 김대중 정부의 정책개혁 중 일부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또한 교원정년 1년 연장, 법인세 1% 인하 등 (실질적인 정책효과보다는) 보수세력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을 펼치고 있다. 즉 기존의 정책기조 전반을 역전하기보다는, 몇가지 주요 쟁점들을 중심으로 김대중 정부와 대립점을 대중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협약/구조조정 프로그램 이후 잠정적으로 형성된 신자유주의 지배분파를 대체하려는 반DJ 보수세력의 정치적 성격은 여전히 모호하다. 한나라당은 2002년 선거국면에서 국민정당화를 최대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즉 반공발전주의 '이념정당'을 탈피하여, 신한국당과 (꼬마)민주당의 통합 이후 '개혁과 보수'의 공존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정책정당'화를 꾀하는 것이다. 이는 DJ식의 신자유주의 지배분파를 대체하기 위한 불가피한 구상으로 '중도우파 국민정당'을 정착하겠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지배분파가 구축된다면 노동운동 상층부에 대한 타협적 태도는 어느 정도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불안정 노동층-여성에 대해서는 보다 완고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예컨대 미국 민주당/공화당 정책의 핵심적 차이는 '여성' 및 '흑인' 문제이며, 이 역시도 사회복지의 삭감 문제에 앞서, 이데올로기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2002년 대선의 정치적 의미
부르주아에게 이번 선거의 의미는 포스트-삼김 시대의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창출하여, 현재의 만성적 불황 속에서 위기관리라는 역사적 책무를 수행할 지배분파의 형성에 있다. 즉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 위기를 완충하기 위해 지배분파를 새롭게 교체해야만 하는 시점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 '위기관리 국가의 위기' 속에서 선거를 가장 강력한 위기 관리 기제로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원적인 장애가 존재한다. 현재 계급적 세력관계는 부르주아 계급의 압도적 우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1980년대 말 3저 호황 때와 같은 물질적 뒷받침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며, 부르주아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방편 격으로 '정치개혁/정당개혁'의 불가피성이 대두되는 한편, 부르주아 권력체계를 안정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개헌 논의도 공론화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집권 여당이 제기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획기적이라 할만한 정당개혁이 이루어지고, 반부패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인입이 취약하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정치적 제스처 수준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부르주아의 정치적 우위는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정치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거와 같은 방식의 반공·반북주의가 그대로 반복될 수는 없겠지만,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파괴적인 효과 속에서 퇴행적인 지역주의와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즉 지역주의-신보수주의와 정치개혁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양립이 가능하며 2002년 양대 선거 시기를 관통할 수 있다. 오히려 정당-NGO 운동은 정치개혁을 중심으로 깊이 인입될 것이며, 이러한 실천은 새로운 지배분파의 창출과정을 안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의 확전과 북미관계의 불안
부르주아 내부의 정치적 주도권이 매우 불안정한 가운데, 미국의 대북 정책 방향선회는 한반도에 매우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 세력은 빈 라덴의 '사우디 커넥션'(차기 왕권을 둘러싼 반미성향 분파와의 연계고리)을 유포하며, '테러와의 전쟁'의 초점을 범아랍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나 반미 블록의 형성을 완전히 봉쇄하는데 맞추고 있다. 사우디는 미국의 중동지배의 가장 중요한 안전판이며, 사우디 내부의 세력관계가 미국에게 불리하게 변화한다면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야만 한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적으로 사우디에 개입하는 방안은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사우디 주변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며(소말리아 군사개입의 재개), 향후 사우디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위험 정권을 붕괴시키는 방향을 검토,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이라크 전쟁의 종결). 또한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중동지배의 불안 요소들을 제거하는(PLO 압박) 방안도 모색 중에 있다.
미국의 확전 구상은 북미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클린턴 정부 후반부에 북미간의 미사일협상이 최종적으로 무산되고,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협상 안을 고수하면서 북미대화는 다시 중단되었다. 부시 정부는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의 대북 경제지원(전력지원)의 실질적 중단을 요구하였고, 경제지원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햇볕정책은 무효화될 위기에 처했다. 9·11 테러 이후 북한은 테러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북미관계가 경직되는 것을 막으려고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으나, 협상 재개 시점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군다나 미국이 생물학무기-화학무기 문제를 협상 의제로 추가하고자 한다면, 미국은 페리 보고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협상 틀을 구성해야 할 것이며, 이는 북미대화의 교착상태가 장기간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1년과 같이 북미대화가 중단된 상태로 유지된다면, 2003년 제네바합의 이행의 문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 (경수로 핵심부품이 북한에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북한의 과거핵 규명을 시도한다면 제네바합의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2. 민중운동의 과제
·사회운동의 양적 성장의 이면
김대중 정부의 출범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및 시민운동은 이른바 '사회세력화'를 이루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사정위원회도 상설기구로 법제화됨에 따라, 이제 노동현안을 놓고 정부기구와 정책적 협의 틀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또한 각종 사회현안에 관한 정책방향을 두고 시민운동단체가 참여할 공간도 확대되었다. 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은 스스로를 비정부기구(NGO)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정부기구와의 상호협력 활동을 모색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하에서 사회운동은 양적으로 확대했고, 사회적 위상도 안정화된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실질적인 민주화의 길로 진입하였으며, 사회운동은 그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외형적 성장의 저변에 깔려있는 사회운동의 구조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노동운동의 대중적 토대가 양극화하는 경향이 심화하였고, 이는 남한의 노동조합운동이 자연사적으로 발전하리라 기대를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렸다. 김대중 정부 집권 초기, 노사정위원회 합의가 노동조합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크게 확대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였기에 장기적인 시각에서 볼 때 노동운동 발전에 유리하다는 논리가 크게 세를 떨쳤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운동 '발전' 논리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영합하거나 아니면 철저히 무지한 주장일 따름이었다. 역으로 노동운동의 공동투쟁 전선이 초기에 무너지면서 노동조합 활동 폭은 크게 제약을 당했고, 노동조합은 개개 사업장 별로 조직보존 논리의 축을 따라 협소한 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대중의 요구를 공동으로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투쟁은 희미해졌으며, 노동자 대중은 장기적인 불안정화의 국면에 진입하였다. 민주노조운동이 지금까지의 활동을 관성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졌으나, 또한 새로운 운동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가운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조응하여 시민운동이 제시하는 운동 프로그램이 사회운동의 활동방향을 선도하는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정책개혁의 정치적 실행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NGO의 역할에 주목하였고, 이는 기업구조조정(재벌 해체, 기업지배구조 개혁), 부패감시와 정치개혁, 협력적 노사관계와 '생산적 복지'의 수립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 프로그램에 호응하는 일부 시민운동단체의 성공 신화는 전체 사회운동의 활동방식이 이를 모방하는 축으로 변화하도록 이끌었다. 김대중 정부 집권 상반기, 사회운동의 쟁점을 선도세력이 급격히 교체되는 양상이 뚜렷하였고,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개혁 하에서 그 주도세력이 변화하고 있는 와중이며, 또한 민주노조운동을 비롯한 계급대중운동의 기층 토대는 급격한 변화에 휩쓸리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지지하는 시민운동과 경제위기 속에서 오히려 두드러진 '실리주의-조합주의' 노선 양자의 흐름이 조우하여 운동 흐름을 크게 잠식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여 운동노선을 둘러싼 노동운동 내부의 갈등도 첨예해지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남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주장은 김대중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 하에 성장해온 이들 세력의 아전인수격 해석일 따름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 말기에 이르러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이니셔티브가 약화하면서 이들 세력은 민주당 내의 다른 부르주아 분파들을 모방하여 김대중과 거리를 두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거나 어색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 속에서, 정책개혁의 파괴적 효과는 이미 사회경제 모든 분야에 걸쳐 다면적으로 드러났다.
·왜 '전선재편'인가?
2001년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조기졸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선언이 이제 남한 경제에서 IMF의 영향력을 배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남한의 사회·경제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금융적 축적체제에 깊게 통합되었고, 오히려 미국과 IMF가 지시한 방향을 향해 더욱 빨리 돌진하고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 집권 초기, 민중운동이 제시했던 'IMF 거부, 구조조정 중단'이라는 슬로건은 김영삼-김대중 정부에게 촉구하는 어떤 '요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김대중 정부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명확한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구제금융 협약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전면 수용하여 관철하려는 정권의 성격을 '폭로'하며, 대중적 투쟁을 촉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물론 정책개혁은 구조조정을 통해 증시부양이라는 경제 '회복'의 신기루를 끌어낼 수 있지만, 이는 극히 일시적 현상일 따름이며, 금융화와 노동유연화를 통해 노동자 대중을 이중삼중으로 착취하는 경제 메커니즘의 작동을 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IMF협약과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거부하려는 민중운동의 초기의 시도는 분명히 실패했다. 강력한 형태의 대중투쟁이 촉발되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위기라는 결정적 국면에서 실리주의-조합주의가 민중운동의 운명을 결정했다. 특히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 정책에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던 노동운동의 경우,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파견법을 주요골자로 하는 노사정합의를 전격 수용함으로써, 초기에 그 운명이 판가름났다. IMF 초기국면에서의 노동운동의 핵심적 투쟁고리를 모두 포기한 이후 노동운동의 공동투쟁전선의 폭은 매우 협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정치전선을 형성을 통해 각각의 투쟁을 엄호하려는 움직임도 미약했다. 김대중 정권은 기업-금융-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순차적으로 강행했고, 각 부문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각개격파 당하는 궁지에 처하였다. 더군다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급격하게 증가한 불안정노동층(半실업, 비정규직, 도시빈민 등)은 저항을 표출할 정치적·조직적 토대마저 매우 취약했다.
이처럼 민중운동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대중투쟁을 실현할 수 없었다. 특히 노동자 대중의 압도적 다수가 불안정화의 국면에 진입한 상태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옛날의 활동방식으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노동조합운동은 기존의 이념과 조직, 기본적인 활동방식을 전변하기 위해 목적 의식적인 투쟁과 결합할 때에만 운동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주도하는 쟁점들의 본질을 효과적으로 폭로하며 명확한 투쟁 슬로건을 정식화하여 정치전선을 형성하는 데에도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1990년대 고착화한 대중조직의 활동방식에 기대어 단편적인 계획들을 제출할 수 있었을 뿐, 중기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운동은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즉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이끌어온 구조조정과 금융화에 대항하는 정치전선의 형성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계급대중운동의 재편을 전선운동의 전망 속에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과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현재의 정세는 양면적이다. 국가와 지배세력의 본질적·구조적 무능력 역시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며, 부르주아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운동의 정치투쟁은 정체상태에 빠져 있고, 정치전선은 이완되어 있다. 대중운동은 정권의 '관리주의'에 노출되어 있고, 노선의 분화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현재 어떤 지배세력도 민중 생존의 근본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민중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 의식적인 활동이 전제되어야 하다. 그렇다면 민중운동의 긴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먼저, 금융화 공세에 대한 정치적 대응력을 강화하여, 신자유주의 지배분파에 맞서는 정치전선의 형성에 복무해야 한다. 금융화의 추세는 대형 금융비리를 반드시 동반하며, 정권 말기 불거진 금융비리는 금융화의 결과 수혜를 얻은 소수의 집단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한미-한일투자협정, 금융개방과 공공부문 사유화, 기업연금제와 우리사주제도 등 금융화를 심화하는 계기들 속에서 그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화한다. 그리고 계급대중운동과 결합된 대중적 정치전선 형성을 위해 주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여성, 이주, 실업, 장애, 여성 등을 포함한 불안정노동층의 노동권, 생활권 쟁취 투쟁에 적극 결합하여 대중적 투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노동법 개악 저지를 매개로 노동자대중의 연대투쟁을 실현해야 한다. 북한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군사적 도발을 가하고 있는 부시정권의 대북 정책에 맞서며, 미국의 전쟁확대, MD 도입 반대 투쟁을 매개로 이를 대정권 정치투쟁의 주요한 계기로 형성한다.
또한 전선운동의 재편과 강화를 위해 공동투쟁을 강화해야 한다. 각각의 연대운동체들은 계급대중운동을 강력히 엄호할 수 있도록 명백한 투쟁요구를 정식화하고 정치적 기조를 강화하며, 전선운동의 정착을 향해 대중적 토대의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국민중연대(준)은 명실상부한 '상설공투체'로서 일상적 투쟁을 조직하며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정치적 기조를 전국적으로 공고화하여, 정치적 민중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전국민중연대(준)은 2002년 하반기 본조직 건설을 목표로, 대중운동/대중조직과 지역운동/지역조직이 자신의 투쟁계획 속에서 본조직 출범에 적극 참여하도록 추동하며, 주요 투쟁단위의 조직적 결합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투자협정·WTO반대국민행동(KoPA)을 비롯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투쟁을 능동적으로 기획하여, 전선 재편의 정치적 방향성을 선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코포라티즘을 거부하는 국제적인 사회운동 세력의 연대의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남한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도록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불안정노동층의 투쟁요구를 공동으로 실현하기 위한 투쟁단위를 형성하거나 적극 결합하여, 노동운동의 계급적 강화를 위한 물적 토대의 창출하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통일성을 제고해야 한다. 이는 기존 대중운동이 포괄하지 못하는 노동자, 민중운동의 좌익적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며(이 차원에서 그 운동은 하나의 선도적 집단이 될 수 있다), 전선 운동의 강화와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