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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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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 중국(2) - 외부의 자극으로 내부의 구조조정을 : WTO가입과 중국의 미래

백승욱 | 편집자문위원
1. WTO 가입의 과정

중국은 2001년 11월 10일 142번째로 WTO에 가입하였다. 이는 1986년 GATT 가입을 신청한 이래 15년만의 일이다. 중국 방송에서는 WTO 가입이 중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중국의 대외수출을 촉진할 것이며, 중국의 경제구조를 세계적 기준에 더욱 가깝게 만들 것이라는 낙관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WTO 가입이 가져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적지 않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깊어진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드러날 것이라는 지적도 일어나고 있다.
GATT 가입을 신청한 뒤로 중국의 가입 요구가 바로 수용되지 못한 것은 가입조건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핵심산업의 통제와 외국인 소유제한, 정보통신과 금융업에 외국인 진입 제한을 주장해왔지만, 미국을 비롯한 세계무역의 주도국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가입협상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개혁개방 뒤로 중국의 대서방 수출이 봉쇄된 적은 없었고, 중국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에서 WTO 가입국가에 비해 큰 차별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이는 중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인 미국과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매년 미국 의회에서 최혜국대우 연장 비준을 얻어야 했고, 이것이 항상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압력의 빌미가 되기는 했지만, 중국이나 미국 어느 쪽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 조치가 중단될 것이라고 예상한 적은 없었다.
중국 지도부는 GATT, 그리고 1995년 이후에는 WTO 가입이 중국의 세계시장 편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중국 내의 경제적 구조조정과 사회적 재편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늘려 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란칭 부총리를 중심으로 이 국제기구의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그렇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WTO 가입보다는 국내의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이 더 시급한 과제로 상정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1998년쯤부터 빠르게 바뀌었다. 1998년과 1999년에 중국은 WTO 가입을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배경에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중국의 수출도 둔화되기 시작했고, 국유기업의 구조조정 속도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국내적 반발이 적지 않음에 따라 새로운 충격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총리에 임명된 주룽지는 국유기업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지만, 이 작업이 예상과 달리 빠른 속도로 나아가지 않음에 따라 WTO 가입을 국유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로 판단하고, 1998년 뒤로 WTO 가입을 위한 협상안 마련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98년 6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그동안 정체상태에 있던 중국의 WTO 가입 협상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은 이듬해 봄, 예정된 주룽지 총리의 미국 방문일정에 맞추어 중-미간의 WTO 가입 협상을 위한 물밑 접촉에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 1999년 초에는 중국의 WTO 가입을 독려하는 클린턴의 친서가 세 차례나 중국에 전달되었고, 이를 미국의 적극적 자세로 해석한 중국은 1999년 4월 주룽지 총리의 미국 방문 시 광범한 양보조항이 담겨있는 협상안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막상 워싱턴에 도착한 주룽지 총리가 협상의 조건을 제시하자 클린턴의 측근 정책결정자 사이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미국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처럼 미국이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것은 이미 상당한 양보를 담고 있는 중국의 제안에 대해 미국이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된 데다,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에서 중국의 WTO 가입 협상안을 비준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내에서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를 비롯해 안보보좌관과 무역대표는 중국의 제안을 수용해 협상을 타결하자는 쪽이었고, 재무장과 루빈을 비롯해 국가경제회의 의장과 국내정치 보좌관은 노조를 설득하고 경쟁산업에 대한 보호조치가 없으면 의회 동의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협상을 당장 타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행정부 내의 이견이 조정되지 못함에 따라, 잔뜩 기대하고 워싱턴을 찾은 주룽지 총리는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한 채 남은 방문일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협상이 중단된 상태에서 미국 무역대표부는 중국의 양보안에 대한 미국 내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중국 쪽 제안을 무역대표부 홈페이지에 게시하였는데, 이일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중국 쪽 양보안이 중국 국내에 즉각 알려지게 되면서,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들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 내에서조차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주룽지 총리는 더 이상의 협상을 진행할 수 없었고, 주룽지가 귀국하기 직전 클린턴은 중국의 협상안을 수용할 의사를 비쳤지만 이미 상황은 협상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달 1999년 5월에는 코소보 전쟁 중에 나토의 전폭기가 유고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하는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중국 내에서 반미의 분위기가 높아졌고, 대미 양보안의 책임을 물어 주룽지에 대한 정치적 공격 또한 점점 더 늘어났다. 정부 내에서는 개방의 영향을 심하게 받게될 중공업, 서비스업, 농업, 정보통신, 금융부문과 지방정부가 반대의 의사를 적극 표명하고 나섰고, 반발이 거세지자 WTO 가입을 주도해 온 대외경제무역합작부조차 WTO 가입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반전되어 6월 이후 빠르게 다시 미국과의 WTO 가입 협상을 재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이 전면에 나서 반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잠재우고, 국유기업 구조조정 일정을 늦추는 양보안을 제시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WTO 가입만이 중국이 살 길 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도 정부와 재계가 의회에 로비를 적극 벌이게 되어, 결국 1999년 11월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무역대표 바쉐프스키와 중국 대표 사이에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한 중-미 협상이 타결되었다.

2. 중국의 WTO 가입 조건

중국과 미국간 타결된 협상안은 이듬해인 2000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미국은 중국에 대해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부여하였다. 중국은 이어서 EU와의 협상도 타결하였다. 2001년 중국이 정식으로 WTO에 가입하면서 수용한 조건은 이 두 협상에서 타결된 내용을 기본틀로 삼고 있다. 중국이 WTO 가입을 위해 수용한 조건은 발전도상국 지위보다는 선진국에 조금 더 가까운 선진발전도상국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의 WTO 가입 조건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공산품과 농산품의 관세인하와 서비스 시장의 개방으로 요약된다.
농업 영역에서 중국은 농산물 수입관세를 현행 22%에서 15%로 낮추기로 하였고, 농업보조금을 국내 농업 생산의 8.5%로 제한하였다. 공산품 관세율은 1997년의 24.6%에서 2005년까지는 평균 8.9% 수준으로 인하하기로 하였다. 특히 공업부문 중 그동안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아온 자동차 산업에서는 관세율이 현행 80∼100%에서 2006년까지 25%로 인하되며, 정보통신 산업 분야에서도 통신부품, 컴퓨터,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제품의 관세가 2005년까지 폐지된다. 자동차와 정보통신 부문의 서비스 시장도 개방되는데, 자동차 산업에서는 외국기업의 독자적 영업 및 서비스 망이 허용되고 자동차 구매자에 대한 개인신용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동통신 서비스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한도를 3년 뒤에 49%까지 높이고, 인터넷이나 무선호출, 기타 부가 통신 서비스의 외국인 지분을 2년 후까지 50%로 늘리도록 하였다. 유통과 서비스업에서도 3년 내에 진입 제한이 철폐되고, 대형 백화점과 체인점에 대한 합작 제한도 철폐된다.
지금까지 외국자본의 진출이 상당히 제한된 금융부문도 개방되어, 은행업, 보험업, 증권거래업에 외국자본이 합자형태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금까지 외환업무만 취급할 수 있던 외국계 은행은 2년 뒤에는 기업을 대상으로, 5년 뒤에는 개인을 대상으로 인민폐 거래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증권업 영역에서는 펀드매니지먼트 합자회사의 투자가 허용되어, 3년 후에는 49%까지의 지분을 가질 수 있고 보험업에서도 50%까지의 지분을 허용하는 합자형태의 진출이 허용된다.
이상이 주로 중국이 미국과 유럽에 제시한 양보안이라면, 그 대가로 중국이 받게된 가시적 혜택은 섬유산업에서 중국산 제품의 수입쿼터제가 2005년 폐지되고, 다섬유협정 폐지 혜택을 중국이 받게된 것이다. 그러나 세이프가드제나 반덤핑 규제수단이 앞으로 상당기간 존속되기 때문에, 이 영역에서 중국이 얻게될 실이득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3. 1990년대 말 중국의 위기 구조

1990년대 말 중국이 WTO 가입을 서두르게 된데는 국유기업의 위기가 배경에 깔려있었으며, 중국정부는 외부의 자극으로 국내 구조조정을 가속화하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과 비교해보면 1990년대 말 중국 국유기업의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10년 사이에 국유기업의 이윤액은 64% 하락하였고, 적자액은 10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적자기업의 비율이 350% 증가하였다. 그동안 '점진적 이행'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국유기업 처리의 문제는 1990년대 들어 중국의 신자유주의의 진행과 더불어 점점 더 핵심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대체로 1992년 이후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진압 뒤 가라앉은 투자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1992년 떵샤오핑은 선전 경제특구를 출발점으로 중국 남부의 경제발전 지역을 순시하는 '남순'(南巡) 행사를 벌인바 있는데, 이를 계기로 중국의 경제는 대외개방을 더욱 촉진하고 자본주의 지향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조응하는 '궤도진입'(接軌)을 중요한 목표로 삼게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해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는 중국의 발전노선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 정립하여, 과거의 계획경제의 요소를 상당부분 제거하고, 중앙정부는 거시적 경제조정을 중심으로 방향전환을 모색하였으며, 기업은 주식회사제도를 모델로 하는 구조전환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빠르게 높아지게 되었고, 초국적 기업의 중국진출도 대대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사회적 양극화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1992년의 계기 이전에 1980년대 중국의 성장모델은 국유기업 문제를 유보해 둔 채 그 외곽을 확장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농촌의 인민공사체제가 해체되고 대신에 가족 중심의 농업 체제가 수립되었으며, 농촌 소재 기업인 향진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농촌주민의 비농업 소득이 증가해 전반적인 농촌 주민의 소득수준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였다. 도시에서는 국유기업에 대한 청부경영제도가 실시되면서 경영자의 권한이 확대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기업파산이나 고용의 불안정화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전이어서, 자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늘어난 유보자금을 그동안 억제되어온 임금인상에 배분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도시 노동자의 소득과 소비수준도 다소 향상되었다. 대외개방의 면에서 살펴보면 1980년대 중국에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는 홍콩을 중심으로 하는 화교자본이었는데, 이들 자본은 기존의 공업지대가 아닌 남부 연해지역의 노동집약적 공업에 투자되면서 기존의 국유기업과 경쟁을 피해 새로운 고용을 빠르게 창출해갔다. 이처럼 국유기업에 대해서는 파산을 억제하는 국가의 정책이 시행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소득수준이 상승하면서 '소비열'이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중소규모의 투자가 지방정부의 지원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과잉 중복투자 문제는 결국 1988년의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내구성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된 뒤로, 1989년 정부가 긴축정책을 펴게되자 국유기업 사이에 채무관계가 물리는 '삼각채' 현상이라는 위기로 표출되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는 외양상 사회 전반적으로 소득과 소비수준이 향상되는 윈-윈 게임처럼 보이던 상황은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제로섬 게임'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떵샤오핑의 남순 뒤로 투자가 대대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토지와 부동산에 투자가 몰리는 거품현상이 나타났고, 중복투자는 오히려 심해져서, 가동이 중단되거나 설비가 유휴상태에 빠지고 적자가 커지는 기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업의 파산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1990년대 들어서 고용계약제를 전체 노동자에게 확대하는 전원노동계약제가 실시되면서, 적자 국유기업 노동자의 실업문제가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정식 실업 외에 기업에 이름만 걸어둔 실업자인 '면직'(下崗)이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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