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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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2.4.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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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닭 한 마리, 캔 맥주 하나

이규철 | 기자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다" -로자 룩셈부르크

어느 사무실 안 널찍하게 만들어진 방에 한 무리의 노동자들과 내가 앉아 있다. 우리 앞에는 다 식어버린 통닭과 캔 맥주가 놓여 있다. 방안은 어느새 담배연기로 자욱하고 저쪽에서는 두 노동자가 뭔가를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노동자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 XXX입니다' 라고 인사한다. 그러자 그 노동자가 내게 대뜸 묻는다. '진보가 뭡니까?'

맥주 한 잔 - 진보가 뭡니까?

내가 만난 발전 노동자는 내게 진보가 뭐냐는 질문을 던졌다. 파업투쟁 시작하고서 여기저기서 진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솔직히 진보는 뭔가 특별한 이들, 운동권이나 하는 소린 줄 알고 있었는데 자꾸 그런 소리를 들으니 헷갈리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내가 사회진보연대라고 소개하니 물어보고 싶었단다.
진보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히 막막했다(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어를 질문하면 제대로 대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술자리에서 이론을 떠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솔직히 아는 것도 별로 없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파업 투쟁이 진보"라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간 이야기를 하면서 난 그 동지가 이미 파업투쟁을 통해 진보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파업투쟁을 하면서 보았던 '거짓말쟁이' 언론이 진보의 적임을 느꼈고 함께 투쟁하는 모든 이들이 진보를 만들어 가는 동지임을 그는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맥주 두 잔 - 오경호란 사람

오경호를 아는가? 2000년 한국전력 파업투쟁을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이자 당시 한국전력 노조위원장이었던 그는 지금 발전 파업의 중요한 동인 중 하나다. 서울대에서 가스노조 동지들이 파업을 정리하고 나갈 때 발전 노동자들은 분노하기보다는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2년 전 자신의 모습을 가스 동지들의 뒷모습에서 발견했기 때문일까? 2년 전 명동성당에서 뒤돌아 설 때 그들이 느꼈던 패배감은 그 뒤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는 한전의 분사화와 구조조정으로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그 패배감은 새로운 투쟁의 씨앗이기도 했다. 비록 회사는 다섯 개로 쪼개졌지만 노동자들은 하나로 뭉쳤고 오늘의 파업을 위한 준비를 지금껏 해왔던 것이다. "질긴 놈이 이긴다." 이번 파업으로 유명해진 구호다. 아마도 발전노조 조합원들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이 구호가 아닐까한다. 결코 2년 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 결코 먼저 무너지지 않겠다는 단호한 마음이 이 구호에 담겨있다. 그 날의 술자리에서도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이 구호는 빠지지 않고 나왔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질겨야 이기지. 암, 흐물흐물해선 절대 못 이기지. 멋지다.'
"이번만큼은 절대 안 당한다." 내 앞에 있던 발전 동지가 내게 했던 말이다.

화장실에서Ⅰ - 신화

어떤 이는 발전 노조 동지들의 파업을 두고 '한국 노동운동의 신화'라고 한다. 그렇다. 역사상 단 한번도 제대로 파업을 했던 적이 없는 노동자들이 한달 가까이, 무더기 이탈도 없이, 그것도 산개 파업을 했다는 것은 분명 '신화'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화'란 우리의 지식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에 붙이는 이름일 것이다. 때문에 난 발전 노조의 파업에 '신화'란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다. 발전노조의 파업은 '황당한 신화'가 아닌 '살아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2년 전의 패배와 그 뒤 조합원들과 지도부 모두의 뼈를 깎는 투쟁이 지금의 파업투쟁을 '충분히 가능한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했다. 비록 장기파업을 해본 경험은 한번도 없어도, 생활비가 없어 적금을 깨야 하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도 조합원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이번에 밀리면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발전 파업을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맥주 세 잔 - 어용이란 사람들

한 동지와 계속 술잔을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커졌다. 누군가 옆에 있던 동지에게 전화를 했나보다. "당신, 앞으로 나한테 선배대접 받을 생각 말아." 그 동지는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다. 발전 조합원들 사이에는 과거 어용노조의 간부들에 대한 깊은 반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 파업을 하면서 과거 어용 간부였던 사람들은 거의 참가를 안 했다고 한다. 참가했던 이들도 얼마 안가 대부분 복귀를 했단다. 화날 만도 하다. 어용이라고는 해도 지부장이네, 간부네 하면서 믿어라 했던 사람들이 정작 파업할 때는 모두 도망가버렸으니. 이어지는 것은 현 민주집행부에 대한 자랑이었다. 이호동 위원장을 비롯, 지부장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는 매우 깊은 것이었다. '이호동은 배신 안할거다. 우리 무시하고 물러나진 않을거다.' 조합원들의 지도부에 대한 신뢰는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파업투쟁을 승리로 마치고 싶다는 조합원들의 간절한 염원이지 않을까?

화장실에서Ⅱ - 부끄러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난 스스로가 매우 부끄럽고 발전노조 동지들에게 너무나 죄송하다. 처음 서울대에서 동지들이 파업을 시작할 때만해도 난 이틀 이상 가기 힘들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리고 발전동지들의 산개투쟁을 보면서 파업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을 하기도 했다. 몇 년의 알량한 운동경험을 가지고 별다른 근거 없이 오만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난 한달 전의 내 모습에서 관료화된 운동권의 모습을 보며 몸서리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소한의 삶의 권리, 노동의 권리를 위한 절박한 싸움을 알량한 근거로 재단하고 무시하는 관료주의. 우리 운동에서 반드시, 그리고 시급하게 근절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관료주의라 생각한다. 바로 나부터.

맥주 네 잔 - 궁금한 것

내가 본 발전 노동자들은 참으로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도대체 노동자들이 파업하는데 도와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동안 믿고 봐왔던 신문과 방송들은 왜 저렇게 거짓말만 늘어놓고 정부 편만 드는지, 정치하는 놈들이란 왜 그렇게 하나같이 썩을 놈들인지...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 보시 길래 열심히 대답을 해드리다, 어느 순간 내가 바보짓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설명하기 전에 그 동지는 이미 자신의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달 여간 파업투쟁을 통해 그는 수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의문에 대해 역시나 투쟁을 통해 해답을 얻어나가고 있었다. 언론은 하나같이 믿을 거 못되며-한겨레는 그나마 좀 낫다고 하셨다-정치하는 놈들, 정부에 있는 놈들, 그리고 김대중까지 싹 다 갈아야 이 나라가 사람 사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한달 여간 파업투쟁을 통해 얻은 것이기에 그들의 결론은 참으로 값진 것이다.

만취상태(실은 이후에 꽤 많이 마셨음) - 정권 말기다...

바야흐로 정권 말기다. 요즘 우리는 여기저기서 정권말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군부독재가 그랬듯이, 김영삼이 그랬듯이, 김대중정권도 지금 무너져 가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대학이 연달아 전경들의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고, 공무원 노조는 탄압으로 시작된 노조의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김대중정권이 그만큼 다급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이 자신을 철저히 지지한다고 생각했을 때 김대중정권은 평화라는 이름아래 여유를 부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시각에서 이는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 봉기는 항상 권력자들의 실정과 억압, 그리고 그에 따른 민중의 분노에서 시작한다. 기회를 놓치지 말자. 제 놈들이 아무리 탄압해봐야 다시 일어서서 싸우면 그만이다. 어차피 우리의 투쟁이란 짧고 굵은 한판이 아니라 가늘지만 긴, 결국은 폭발하는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민중의 분노를 똑똑히 느낄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투쟁을 날줄, 씨줄 잘 엮어서 조직된 하나의 투쟁, 하나의 전선으로 모아내는 것이다. 2002년 거대한 민중투쟁의 한발을 발전노조 파업투쟁에서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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