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밖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지도자들
송기도 외 엮음/ 인물과 사상사
제3세계의 정치 지도자들
'성공한' 제3세계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니, 이 책을 읽으면 오히려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상까지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제목에 걸맞게 제3세계 정치 지도자들을 소개하는 이 책은, 왜 '성공한' 지도자가 존재하기 힘든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요컨대 제3세계 국가에서 일반화된 '정치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런 정치의 위기를 겪는 장소로서 한반도를 이 책에서 비추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들이 소개하는 지도자는 이렇다. 넬슨 만델라(남아프리카공화국), 세바르드나제(그루지아), 무바라크(이집트), 톨레도(페루), 보 응우엔 지압(베트남), 아둔라야뎃(태국), 밀로세비치(세르비아)이다. 누구나 한번쯤 국제면에서 이름을 보았을 만한 정치 지도자들이다. 그들 중 몇몇은 개별 사례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전형'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형을 한반도에 비추어보자.
남한의 지도자, 만델라에서 톨레도로?
김대중 정권의 등장 후 남한 정치의 전개를 보면, 거칠게 말해서 "만델라 유형에서 톨레도 유형으로" 전개되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97년 대선 직후, 김대중은 만델라와 많이 비교되었다. 김대중 본인 스스로가 조장한 측면이 강하기도 할 것인데, 이런 이미지는 노벨 평화상의 수상으로 극에 달했다. 김대중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국민의 정부'로 자신을 표상하려 하였다. 그 점에서 남아프리카의 ANC 정권과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의미를 갖기에는 이미 10년의 세월이 더 흘러버렸다.
어쨌든 김대중 정권이 확보하려 했던 것은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동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집권 직후의 IMF 구제금융 협약을 시작으로 정리해고 도입, 2002년에 들어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대응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국민의 정부'일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집권 말기에 드러나는 각종 권력형비리는 김대중 정권이 가진 대중적 지지가 철회되도록 하고 있다. 그러한 권력형비리는 한국 정치의 위기와 연결된 정권 자체의 취약성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의 위기에 있어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권의 실패는 국민적 지지를 업고 출범하고, 역대 정권보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라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수행할 역할을 떠맡은 한, 대중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김대중이 유사해 보이려고 했던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정권(현재는 음베키가 대통령이고 ANC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역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수행하면서 노동운동 진영과 정치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위기의 와중에 남한 정치에 등장한 인물이 노무현이다. 민주당의 '국민경선제'라는 정치적 쇼를 통해서 "폭풍"을 불러오고 있는 노무현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노무현은 '서민적 이미지'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면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던 민주당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일명 '노풍'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씻어내고 남한 정치에 새로운 신뢰를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은 그 자체가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 위기 관리 국가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톨레도(페루)의 경우다. 페루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인 톨레도는 후지모리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실패와 부패로 인한 정치의 위기 상황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톨레도는 빈곤한 인디오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 과정을 보면, 그가 인디오의 정치적 이해를 보장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는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스탠포드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세계은행, OECD, ILO, 미주 개발기구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그는 단지 출신 성분이 인디오라는 이유로 빈곤한 인디오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권을 한 톨레도 정권의 구성에 주목할 부분은 역시 경제팀이다. 노골적인 친미 성향의 각료들이 포진해있고,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총리는 워싱턴에서 변호사를 하던 '다니노'라는 자로 미주개발은행 소속의 '미주투자회사'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하다. 재무장관 쿠진스키는 미국 은행의 재정전문가로 근무했던 자이며, 무역, 공업담당의 제1부통령 깐세꼬는 피자헛과 KFC 페루지사를 설립한 사업가이다. (한편, 톨레도의 부인은 페루 출신이 아니면서도 페루 원주민 언어에 능통한, 스탠포드를 나온 유대인 여성이다.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노무현을 다시 상기해볼 수 있다. 상고출신으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입지전적 인물이며, '서민의 대변자'라는 이미지로 포퓰리즘적 정치를 추구한다. 이를 통해서 이회창을 '귀족'으로 몰아 부치면서 귀족-서민의 쟁점을 형성한다. 이렇게 '서민'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원활히 수행하는 데 앞장서 왔다. 98년엔 현대자동차 파업 투쟁을 '중재'하여 정리해고를 강요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대우자동차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려다가 노동자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제시하는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다만 그것이 취하는 형태가 참여연대가 제시하는 집중투표제, 집단소송제 도입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급진성'을 띄고 있을 뿐이다.
페루에서 톨레도의 급부상은, 제3세계 국가에서 일반화된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국가가 대중의 삶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의 위기는 일반화된다.(신자유주의 하에서 정치의 위기에 관련된 내용은 월간 사회진보연대 3월호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정치의 위기를 봉합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피상적인 이미지 조작을 통한 대중동원이다. 작금의 노무현 돌풍은 남한에서도 페루와 같은 방식의 위기관리가 지배계급에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미봉책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행하는 국가가 대중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쇼가 효력을 소진할 때 다시 정치 위기는 도래한다. 톨레도에 대한 지지율은 당선 6개월만에 30%대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는 중이다. 쇼는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은 남한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지도자, 무바라크 혹은 밀로세비치?
그렇다면 북한의 미래는 어떨까?
북한 역시 동북아시아 정세의 변화 속에서 몇 가지 열린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예를 들자면 베트남식의 자본주의 수용, 혹은 비동맹 노선을 버리고 친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있는 무바라크 정권의 길을 가는 가능성이 하나가 있다. 또 하나는, 이를 거부하다가 밀로세비치 정권과 같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북한은 제3의 길을 찾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지켜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새로운 길을 성공적으로 찾는다면 그것은 북한은 물론 다른 제3세계에도 매우 행운일 것이다.
북한이 처한 위기는 물론 신자유주의 하의 정치 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미국의 국제전략과 이에 대한 대응 속에서 규정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확산과정과 전적으로 무관하지 만은 않은 지정학적 전략을 구상할 것이다.
이 점은 밀로세비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밀로세비치가 국제 사회의 갖은 훼방에도 1990년대 혼란기에 세르비아 민족의 통합을 위해 애쓴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가능성도 열려있음을 지적한다.
밀로세비치의 처리 과정의 진실이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의 처단'이라는, 잘 알려진 이야기와는 상당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코소보 전쟁의 진실에 대해서는 별도의 자료(<전쟁이 끝난 후>, PICIS 편역, 이후 펴냄)를 참고할 필요가 있겠지만, 일단 아래 인용문을 보자.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IMF 간부회의가 막후 밀실에서 열렸다. 두 명의 주요 '민주파' 대표가 이른바 '의향서' 즉, 유고슬라비아에 가혹한 경제 조치를 취할 계획서를 IMF와 세계은행 지도자들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10월 4일, '남동유럽 안전보장회의'가 이른바 '타이틀 Ⅲ'라는 명칭 아래 열렸는데 이곳에서 '안보상의 문제들'이 논의됐다. 유고슬라비아의 선거와 '전환'이 화두였다. 이 모든 회의가 불가리아에서 열렸다. 언론은 두 명의 민주파 대표가 그 모든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 「유고사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미셀 초스도프스키 외
밀로세비치를 전범 재판에 인도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공공기금', 프리덤 하우스, USIA, CIA, 소로스 기금 등 미국의 자금이 행한 역할, 그리고 그것이 의도하고자한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사실, 밀로세비치를 제거하는 과정은 미국이 아프칸 전쟁을 도발하거나 이라크에 전쟁을 도발하려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밀로세비치의 경우는 오마르나 후세인처럼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제3세계 정치 지도자에게 어떤 일이 닥칠 수 있는 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북한에게 미국은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제3세계 정치에 난 좁은 길
책에 등장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경우는 제3세계 정치의 일반적 위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제3세계의 정치가 안정적인 '민주적' 과정을 거쳐 재생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부분 제3세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상식적인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집권하지 못했을 뿐더러 권력을 유지함에 있어서도 항상 위기를 겪거나 위기를 폭력적으로 돌파하고자한다. (이 점에서 이 책에 소개된 사례 중 남아프리카는 예외이다.)
남북한의 정치도 이들의 나라처럼 '미국 밖'에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점에서 정치의 일반적 위기의 예외일 수 없다. 남북한에서 정치의 위기는 다른 성격으로 또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지만 상호 작용할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일지까지는 이 책의 '전형'들에서 아직 예측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거리에서도 입당을 할 수 있을 때여서, 보증인이나 추천자도 필요없었고, 새 동지에게 꽃다발 하나도 안겨주지 않았다." - 슈테판 헤름린
<박스나 각주처리>
「미국 밖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지도자들」은 [인물과 사상사]의 '시사인물사전' 시리즈로 나온 책이다. [인물과 사상사]는 전투적인 민주당 지지자인 강준만 교수가 주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각각의 정치인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분석, 그리고 그러한 정치인들이 처한 국내외적 정세와 조건들에 대한 해설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해당 조건을 분석하는 정치적 입장이 자유주의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제3세계 정치의 일반적 난점들을 한 권 안에 다양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이 쓴 것보다 독자들이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제3세계의 정치 지도자들
'성공한' 제3세계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니, 이 책을 읽으면 오히려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상까지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제목에 걸맞게 제3세계 정치 지도자들을 소개하는 이 책은, 왜 '성공한' 지도자가 존재하기 힘든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요컨대 제3세계 국가에서 일반화된 '정치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런 정치의 위기를 겪는 장소로서 한반도를 이 책에서 비추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들이 소개하는 지도자는 이렇다. 넬슨 만델라(남아프리카공화국), 세바르드나제(그루지아), 무바라크(이집트), 톨레도(페루), 보 응우엔 지압(베트남), 아둔라야뎃(태국), 밀로세비치(세르비아)이다. 누구나 한번쯤 국제면에서 이름을 보았을 만한 정치 지도자들이다. 그들 중 몇몇은 개별 사례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전형'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전형을 한반도에 비추어보자.
남한의 지도자, 만델라에서 톨레도로?
김대중 정권의 등장 후 남한 정치의 전개를 보면, 거칠게 말해서 "만델라 유형에서 톨레도 유형으로" 전개되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97년 대선 직후, 김대중은 만델라와 많이 비교되었다. 김대중 본인 스스로가 조장한 측면이 강하기도 할 것인데, 이런 이미지는 노벨 평화상의 수상으로 극에 달했다. 김대중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국민의 정부'로 자신을 표상하려 하였다. 그 점에서 남아프리카의 ANC 정권과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의미를 갖기에는 이미 10년의 세월이 더 흘러버렸다.
어쨌든 김대중 정권이 확보하려 했던 것은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동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집권 직후의 IMF 구제금융 협약을 시작으로 정리해고 도입, 2002년에 들어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대응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국민의 정부'일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집권 말기에 드러나는 각종 권력형비리는 김대중 정권이 가진 대중적 지지가 철회되도록 하고 있다. 그러한 권력형비리는 한국 정치의 위기와 연결된 정권 자체의 취약성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의 위기에 있어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권의 실패는 국민적 지지를 업고 출범하고, 역대 정권보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라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수행할 역할을 떠맡은 한, 대중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김대중이 유사해 보이려고 했던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정권(현재는 음베키가 대통령이고 ANC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역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수행하면서 노동운동 진영과 정치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위기의 와중에 남한 정치에 등장한 인물이 노무현이다. 민주당의 '국민경선제'라는 정치적 쇼를 통해서 "폭풍"을 불러오고 있는 노무현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노무현은 '서민적 이미지'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면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던 민주당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일명 '노풍'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씻어내고 남한 정치에 새로운 신뢰를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은 그 자체가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 위기 관리 국가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톨레도(페루)의 경우다. 페루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인 톨레도는 후지모리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실패와 부패로 인한 정치의 위기 상황에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톨레도는 빈곤한 인디오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 과정을 보면, 그가 인디오의 정치적 이해를 보장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는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스탠포드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세계은행, OECD, ILO, 미주 개발기구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그는 단지 출신 성분이 인디오라는 이유로 빈곤한 인디오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권을 한 톨레도 정권의 구성에 주목할 부분은 역시 경제팀이다. 노골적인 친미 성향의 각료들이 포진해있고,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총리는 워싱턴에서 변호사를 하던 '다니노'라는 자로 미주개발은행 소속의 '미주투자회사'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하다. 재무장관 쿠진스키는 미국 은행의 재정전문가로 근무했던 자이며, 무역, 공업담당의 제1부통령 깐세꼬는 피자헛과 KFC 페루지사를 설립한 사업가이다. (한편, 톨레도의 부인은 페루 출신이 아니면서도 페루 원주민 언어에 능통한, 스탠포드를 나온 유대인 여성이다.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노무현을 다시 상기해볼 수 있다. 상고출신으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입지전적 인물이며, '서민의 대변자'라는 이미지로 포퓰리즘적 정치를 추구한다. 이를 통해서 이회창을 '귀족'으로 몰아 부치면서 귀족-서민의 쟁점을 형성한다. 이렇게 '서민'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원활히 수행하는 데 앞장서 왔다. 98년엔 현대자동차 파업 투쟁을 '중재'하여 정리해고를 강요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대우자동차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려다가 노동자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제시하는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다만 그것이 취하는 형태가 참여연대가 제시하는 집중투표제, 집단소송제 도입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급진성'을 띄고 있을 뿐이다.
페루에서 톨레도의 급부상은, 제3세계 국가에서 일반화된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국가가 대중의 삶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의 위기는 일반화된다.(신자유주의 하에서 정치의 위기에 관련된 내용은 월간 사회진보연대 3월호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정치의 위기를 봉합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피상적인 이미지 조작을 통한 대중동원이다. 작금의 노무현 돌풍은 남한에서도 페루와 같은 방식의 위기관리가 지배계급에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미봉책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행하는 국가가 대중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쇼가 효력을 소진할 때 다시 정치 위기는 도래한다. 톨레도에 대한 지지율은 당선 6개월만에 30%대 수준으로 하락하고 있는 중이다. 쇼는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은 남한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의 지도자, 무바라크 혹은 밀로세비치?
그렇다면 북한의 미래는 어떨까?
북한 역시 동북아시아 정세의 변화 속에서 몇 가지 열린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예를 들자면 베트남식의 자본주의 수용, 혹은 비동맹 노선을 버리고 친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있는 무바라크 정권의 길을 가는 가능성이 하나가 있다. 또 하나는, 이를 거부하다가 밀로세비치 정권과 같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북한은 제3의 길을 찾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지켜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새로운 길을 성공적으로 찾는다면 그것은 북한은 물론 다른 제3세계에도 매우 행운일 것이다.
북한이 처한 위기는 물론 신자유주의 하의 정치 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미국의 국제전략과 이에 대한 대응 속에서 규정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확산과정과 전적으로 무관하지 만은 않은 지정학적 전략을 구상할 것이다.
이 점은 밀로세비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밀로세비치가 국제 사회의 갖은 훼방에도 1990년대 혼란기에 세르비아 민족의 통합을 위해 애쓴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가능성도 열려있음을 지적한다.
밀로세비치의 처리 과정의 진실이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의 처단'이라는, 잘 알려진 이야기와는 상당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코소보 전쟁의 진실에 대해서는 별도의 자료(<전쟁이 끝난 후>, PICIS 편역, 이후 펴냄)를 참고할 필요가 있겠지만, 일단 아래 인용문을 보자.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IMF 간부회의가 막후 밀실에서 열렸다. 두 명의 주요 '민주파' 대표가 이른바 '의향서' 즉, 유고슬라비아에 가혹한 경제 조치를 취할 계획서를 IMF와 세계은행 지도자들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10월 4일, '남동유럽 안전보장회의'가 이른바 '타이틀 Ⅲ'라는 명칭 아래 열렸는데 이곳에서 '안보상의 문제들'이 논의됐다. 유고슬라비아의 선거와 '전환'이 화두였다. 이 모든 회의가 불가리아에서 열렸다. 언론은 두 명의 민주파 대표가 그 모든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 「유고사태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미셀 초스도프스키 외
밀로세비치를 전범 재판에 인도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공공기금', 프리덤 하우스, USIA, CIA, 소로스 기금 등 미국의 자금이 행한 역할, 그리고 그것이 의도하고자한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사실, 밀로세비치를 제거하는 과정은 미국이 아프칸 전쟁을 도발하거나 이라크에 전쟁을 도발하려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밀로세비치의 경우는 오마르나 후세인처럼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제3세계 정치 지도자에게 어떤 일이 닥칠 수 있는 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북한에게 미국은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제3세계 정치에 난 좁은 길
책에 등장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경우는 제3세계 정치의 일반적 위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제3세계의 정치가 안정적인 '민주적' 과정을 거쳐 재생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부분 제3세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상식적인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집권하지 못했을 뿐더러 권력을 유지함에 있어서도 항상 위기를 겪거나 위기를 폭력적으로 돌파하고자한다. (이 점에서 이 책에 소개된 사례 중 남아프리카는 예외이다.)
남북한의 정치도 이들의 나라처럼 '미국 밖'에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점에서 정치의 일반적 위기의 예외일 수 없다. 남북한에서 정치의 위기는 다른 성격으로 또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지만 상호 작용할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일지까지는 이 책의 '전형'들에서 아직 예측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거리에서도 입당을 할 수 있을 때여서, 보증인이나 추천자도 필요없었고, 새 동지에게 꽃다발 하나도 안겨주지 않았다." - 슈테판 헤름린
<박스나 각주처리>
「미국 밖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지도자들」은 [인물과 사상사]의 '시사인물사전' 시리즈로 나온 책이다. [인물과 사상사]는 전투적인 민주당 지지자인 강준만 교수가 주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각각의 정치인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분석, 그리고 그러한 정치인들이 처한 국내외적 정세와 조건들에 대한 해설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해당 조건을 분석하는 정치적 입장이 자유주의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제3세계 정치의 일반적 난점들을 한 권 안에 다양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이 쓴 것보다 독자들이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