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준화 박살내기 + 보충수업 화려하게 컴백시키기 + ... = 공교육 말아먹기 + 민중교육권 거덜내기
씁쓸, 허탈, 분노를 자아내는 단상들 : 지리멸렬과 의기양양
대규모 성과급반납투쟁으로 불붙기 시작한 작년 전교조 하반기 총력투쟁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사람들을 놀래켰다. '히야! 주는 돈도 반납하고 이렇게 많이 모여서 파업에 준하는 투쟁을 하다니! 뭔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놀람과 기대. 한껏 고무된 기세는 누가 홀딱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지, 어처구니없는 단협안 체결로 <지리멸렬>하게 일단락 나버렸다는데 대한 놀라움과 허탈감...
교육시장화 반대 진영이 허우적대고 있는 사이, 이 틈을 놓칠 새라 신자유주의자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의기양양>하게 포문을 연다.
작년 말, 교육부는 올해부터 실시될 선택중심교육과정을 염두에 둔 수능개편안을 확정·발표했다.
한편, KDI가 「비전 2011」을 발표한 후 평준화 정책을 두고 논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평준화 시행 첫해인 수도권 평준화 지역에서는 올해 신입생에 대한 재배정 사태가 발생, 학부모의 가열찬 항의 농성이 벌어졌고 교육감 퇴진으로 이어졌다. 인사비리에 연루되고서도 X팔린 줄 모르고 질기게 버티던 철면피마저 물러나게 한 사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듯 연달아 '안성맞춤'으로 벌어진 사건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길은 서울까지 번진다. 서울시교육청은 전학을 원하는 고교신입생(7차선택형-2005수능 첫세대) 학부모들의 밤샘 줄서기로 연일 언론과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다. 전학 신청자 가운데 상당수가 소위 '강남 명문 입성'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전학하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공공연히 드러났다. 반면, 경기도 어떤 학교는 이번 사태 속에서 완전 '따' 돼버렸다.
경기도 사태로부터 연상되는 사슬
: 비평준화 → 평준화 → 배정오류사태 → 평준화 비난 → 평준화 해체 주장
경기도 재배정 사태는 평준화 논쟁 지형에서 평준화 해체 진영 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心證에 불과하지만, 어떤 이는 '의도된 사태' 아니겠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경기도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서울에서 '강남으로'의 전학행렬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란 상상도 해본다. 경기도 사태를 본 학부모들. 깨달은 바도 있었을 테고 당장 행동으로 옮길 용기도 얻었을 터. "아,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다른 정책의 여파도 있었다. "올해 전학신청자가 예년보다 많이 몰린 것은 어려워진 수능시험의 여파에다 대학 수시모집 확대, 학급당 인원수를 35명으로 줄이는 '7.20교육여건 개선사업' 등으로 이른바 '선호학교'로 자녀를 전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이 늘었기 때문. 게다가 최근 수도권 평준화 지역의 고교 재배정 사태까지 겹치면서 성남, 고양, 수원 등의 지역에서 '비선호학교'에 배정받은 학부모들이 '서울로, 강남으로'를 외치며 전학신청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은 충분히 타당하다.
수도권 비평준화 지역의 교육운동주체들이 평준화로의 선회를 어렵사리 이끌어 냈건만, 어이없는 사태로 보람도 없이 평준화에 대한 공격을 부추기는데 일조한 격이 되고 말았다. 경기도의 평준화 실시 결정은 사실,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 흐름에 대해선 '역류'를 만드는 '짓'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경기도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까지 평준화를 도입하려 애를 썼는가? 그리고 왜 많은 학부모들이 여기에 호응을 보인 걸까? 대답은 간단하다. 비평준화 속에 있었던 당사자들은 '서열화된 체계'가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머리로가 아니라 몸(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고등학교 체제에서는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되어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입시경쟁에 매달려야 한다. 중학생들의 입시부담 해소는 과거 평준화 도입 때의 근거이기도 했다.
<학교격차>가 원래 존재해서 서열화체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서열화 체제가 인위적으로 도입되는 순간, 학교격차는 <만들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는 인위적인 서열화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학교의 교육의 질이 문제로 보이게 된다. 서열화된 체계에서 개별학교의 등급은 사실상 운영자의 교육활동에 대한 의지나 교사의 자질 따위보다는 학생구성비(어떤 학생들로 구성되었는가. 다른 말로 학생의 가정배경이 어떠한가)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 학교등급은 곧 학생 자신의 등급이다. 서열화 구조에서 일류학교는 다수일 수가 없다. 일류에 다니지 못하는 대다수는 부정적인 자기인식을 갖게 마련이다. 게다가 교육의 질에 대한 책임은 개인과 학교에게로 떠넘겨진다. "그래, 내가 공부 못해서 그렇지 뭐..", "저 학교에 가면 끝이야." 등등. 이 마당에 경기도에서 행복한 사람이 많았을까, 불행한 사람이 많았을까?
경기도 지역 주민들의 80% 정도는 이런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 평준화를 이끌어낸 힘이었다. 물론, 난맥상 속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일류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내 아이가 난데없는 평준화 때문에 집 가까이의 '(비평준화 시절의)똥통 학교'에 배정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불만은 아마 꽤 퍼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평준화 시기의) 명문에 배정받기 위해 주소를 옮기는 등 수선을 피웠을 거다. 명분이 없어 잠자코 있던 이들이 때마침 재배정 사태가 터지자 이때다 하고 마구 불만들을 쏟아낸 것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평준화 도입을 이뤄낸 사람들이 지금 모욕당하고 있다.
우리네 평준화는 사실 '절름발이'다. 형태상으로는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시행되었을 뿐이며, 내용적으로는 온전한 의미의 '질적 평준화'를 기하려는 노력도 수준 미달이었다. 서울지역만을 놓고 본다면, 그래도 평준화는 대학교육기회를 지역별로 균등하게 분배하는데 나름대로 기여를 하였다. 쉬운 말로, 강남과 강북의 차이가 지금처럼 '하늘과 땅'은 아니었다. 교육기회 균등배분에서 평준화가 했던 이런 '소극적' 기여는 혼자서가 아니라 입시형태에 힘입은 바가 있었다. '내신'에서의 불리함을 의식하여 지금처럼 '(자식 교육을 위해)서울로, 강남으로!'의 분위기는 형성되기가 만만치 않았다. 몇 년 전 일었던 과학고의 자퇴 바람이 이를 일러준다. 심층적으로는 지역별 경제격차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고, 사교육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일련의 신자유주의 교육개혁 분위기가 일고, 사교육이 엄청나게 팽창하고, 입시형태가 조금씩 바뀌는 와중에 사람들은 간파했다. 무엇이 유리한 '선택'인지를. 물론, 유리한 조건을 찾아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어정쩡한 평준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90년대 중반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입시제도의 변화("다양한" 전형)는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쳐도 대학교육기회의 (지역별) 균등배분 효과에 평준화가 기여한 바를 저하시켜왔다. 다시 말해, 본래적 의미의 교육 평준화 정착을 가로막는 외적 요인으로서 입시제도의 변동이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 '교육적'이라고 치부되는 '다양한 전형'은 평준화를 흔드는 위험한 요소이다. 사실상, 현재의 입시변화는 갈수록 특정 지역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안전하지가 않은 것이다. 최근 3년간 추세를 살핀 결과를 보면, 다양한 입시의 약발(=기득권층의 입시경쟁력을 높이고 사수하기)도 차츰 약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수능 땅값'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울 강남구, 서초구 지역 수험생들은 올해도 대학입시에서 타 지역에 비해 높은 합격률을 기록했다. 이 지역 수험생은 지난해 전체 수험생의 약 3%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요 사립대 합격자중 6∼12%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지역 수험생들이 전체 합격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예년에 비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겨레, 2002년 1월 26일)
지금 정도로도 부족한 양, 더 강력한 처방을 들이미는 격이다. 여기에서 평준화 해체 주장의 의도가 들통나버린다. 현재의 "평준화+다양한 입시체제"만으로는 입시에서의 기득권층 우위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준화 틀은 기득권층의 입장에서는 깨야 마땅할 뿐이다. 겉으로는 '국가경쟁력'이니, '학력저하'니, '평균인재만 양성해대는 비효율 교육'이니, '복제인간만 만드는 획일적 교육이니'니, '선택권 침해'니 온갖 말을 갖다붙여 평준화의 '교육적 허점'을 일면 그럴 듯하게 '폭로'하지만, 사실상은 기득권 보호가 중요한 의도로 자리하고 있다. 한 언론에서도 이를 지적한다. 국가경쟁력 제고를 전면에 내걸면서 고교평준화제도를 해체하자고 주장(=차별화된 교육시스템 구축)하는 목소리들에는 다수 국가구성원들에 대한 소수 기득권 층의 '국내 경쟁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바야흐로 지금은 마녀사냥 중
: 평준화가 온갖 교육문제의 주범이다?
KDI가 먼저 총대를 매고 '용감하게' 평준화 사냥에 나선다. KDI는 이미 작년 4월, 「교육의 형평성과 과외에 관한 실증 연구」라는 보고서를 펴냈고, 여기에서 평준화가 교육불평등의 주범이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KDI가 교육평준화 해체의 선봉에 설 것이라는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그때에 이어 지난 2월, 「2011비전과 과제」보고서를 내놓았다. KDI는 이 보고서에서 교육시장화의 구체적 방안을 늘어놓았다.
"우리나라의 초·중등 공교육비 총액이 1998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3.9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8%)을 조금 웃도는 수준인데도 사교육비가 3%에 육박하고 있다"며 "사교육비가 90년대 이후 급증추세를 보이는 것은 중·고교 공교육의 부실화 때문"이며, (특히) "평준화 제도아래서 경제능력 있는 학부모들은 공교육을 외면하고 고액과외를 통해 자녀들을 명문대학에 진학시켜 교육불평등 문제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라고 했다. 이러한 '독특한' 해석에 뒤이어,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으로 "학교간 차이 인정, 교육청의 학교통제 기능 철폐,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 허용 등을 통해 평준화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추리면, 여러 가지 언사를 동원하여 현재의 모든 교육제도를 '시장원리'에 따라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교 평준화에 대해서는 '보완'이라는 다소 중립적 언어도 곁들이긴 하지만, 사실상은 폐지 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고, 심지어 고교등급제 인정(즉, 교육의 질과 성과는 학교마다 다르므로 등급을 매겨 입시에서의 혜택 내지 핸디캡을 학생 개인에게 부과해야 한다.)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이뿐이 아니다. 사립학교와 입시학원을 통합함으로써 학교 역시 입시학원이나 다름없는 기능을 수행하고 그 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더 살펴보면 입만 벌어지고 열받으니 여기서 멈춘다. 한 마디로 '공'은 무조건 '악'이요, '사'는 무조건 '선'이므로, '공' 역시 '사'와 마찬가지의 질서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어, 진념은 '식민지교육'에 대한 향수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며 평준화 해체가 경제부처의 뜻이기도 함을 비췄다.
진념 경제부총리는 지난달 31일 (…) 강연을 통해 "우리 교육의 문제는 지역별 학교별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고 평준화 일변도로 이끌어 온데 있다"면서 "고교 평준화 정책 폐지 내용을 담은 건의서를 곧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진부총리는 또 "일제 때는 경성대 의대와 세브란스 의전 등은 서울에, 전북대·경북대 의대 등은 지방에 있었고 사범대는 공주사범이, 상업학교는 목포상고·선린상고·군산상고가 유명했다”면서 "그런 측면에선 차라리 일제 강점기의 교육정책이 지금보다 더 나았다"고 지적했다. (문화일보, 2002년 2월2일)
힘 보태려다 욕만 잔뜩 먹고 크게 분노를 샀지만, 이를 계기로 경제관료들의 교육에 대한 식견이 어느 정도인지 만천하에 드러났고, 교육인적자원부는 재경부에 대해 "눈치 보기 바쁘거나 혹은 어쩌다 벌어지는 힘겨루기에서 밀리거나"의 양태이다.
'덩달이 언론'도 이에 질새라, 고교 평준화 정책 깎아 내리기에 열을 올린다. 그 중 하나만 골라 일일이 살핀다. 먼저 평준화=학력의 하향평준화라고 주장한다.
평준화는 곧 학력의 하향 평준화 과정이었다. (…) 학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다. 평준화 교육정책의 소산이다.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수업시간에 비슷비슷한 교사에게 공부한 '복제학생'이 넘쳐나고 있다. 학교도 똑같고 커리큘럼도 똑같은데, 학력상승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하향평준화 주장은 강력한 평준화 깎아내리기 논지이면서도 실증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오히려 평준화 쪽이 비평준화보다 학력상승 효과가 더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작년에 나왔다. 이어 비평준화=고품질 교육을 가능케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노골적으로 교육에도 세계 각국의 '교육차별화 정책'을 뼛속깊이 베껴야 한다며 역시 입증된 바 없는 사실에 대해 변을 늘어놓는다.
지금 세계 각국의 교육방향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비평준화의 고품질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가까운 중국도 위기감을 느끼고 탈바꿈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도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능력위주의 시스템으로 나가고 있다. 일본도 능력별 인재 양성이라는 고교교육의 대변혁을 기획하고 있다. 구미 교육선진국들은 교육차별화 정책을 실행한지 오래다.
그러고 나서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어설픈'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다 대고 지독하게 편향된 교육정책이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짚어도 한참 잘못 짚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사회주의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지금 정도로는 안 된다는 뜻이겠다. 더 철저히, 교육도 '경쟁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밖에는 안 읽힌다. "교육평등주의자"들에게 색깔논쟁이라도 걸어볼 속셈인지, 사회주의 어쩌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식의 '평균인재' 육성에 매달리고 있다. 자립형 사립고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형편이다. 아예 비평준화의 싹을 잘라 버리겠다는 심산이다. 세계시장에서 '왕따'되기 딱 좋은, 지독하게 편향된 교육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학부모들이 돈이 남아돌아 너도나도 조기유학을 보내는 줄 아는가. 모두를 부모의 허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색깔 없는 복제학생을 만들 수 없다는 수요자들의 욕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평준화정책을 깨고 교육다원화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 자율적으로 학교를 선택하고 능력별 수업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
이쯤에서 반발에 대비한 방어선을 아주 살짝 친다.
물론 국민의 교육열을 고려할 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준화 해체 소신을 굽힐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숙고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세계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엘리트를 길러내야 한다. 생각도 수준도 똑같은 '복제인간'의 양산으로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과열경쟁이니, 계층 간의 위화감이니 하는 구태의연한 소리는 이제 접어야 한다. 교육평준화 개선은 범정부 차원의 과제다. 우선 교육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교육단체의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할 일이 아니다. '무경쟁의 교육낙원'은 공교육을 더욱 피폐시킬 뿐이다.(2002년 3월9일, 문화일보)
일개 논설위원의 용감한 헛소리 쯤으로 욕하고 넘어가기엔 평준화 해체론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기에 자못 심각하게 읽힌다. "평준화는 위헌소지가 있다"는 일각(보수를 자처하는 단체라거나, 중산층 이상으로 똘똘 뭉친 학부모 이익집단이거나, 개량주의자거나 그렇다)의 주장은 평준화 일파만파 중 단연 백미이다.
이석연(전 경실련 사무총장이자 변호사)은 이상의 주장에 찬동하며 "능력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라는 헌법 정신을 무시한 고교평준화등 현 교육정책은 공교육을 황폐화하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위헌적 제도"라는 주장을 폈다. 평준화 정책에 대해 '소비자 선택권 및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근본적으로 제약'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했다. 그는 변호사라는 전문적 지위를 악용하여 '헌법'을 들먹여 가면서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학교선택권 보장'을 옹호했다. 이는 부르주아들의 논리가 투영된 헌법의 논리를 앞세워 '평등'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우리에게 주입하려든다. 교육평준화 정책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택함으로써 평준화 정책을 근본부터 의심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려 한다. 이 대목에서 과외 위헌 판결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또 하나의 목소리
: 평준화는 없는 자들의 기회를 박탈한다. 그러므로 민중의 입장에서도 깨는 게 차라리 낫다?
이로써 저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살폈다. 평준화에 대한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엇일까? 평준화는 민중교육권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가로막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유심히 살피면 KDI와 비슷한 주장임을 알게 된다. 가장 진보적 언어 가운데 하나인 "평등"을 평준화 비난의 도구로 삼는다.
90년대 중반 이후 시장화 정책이 추진되고 계층간 경제 격차의 골이 빠른 속도로 깊어 가는 가운데, 고교평준화는 애물단지마냥 취급받았다. 계층간 경제 격차는 지역간 격차로 곧바로 연결되는 구조 때문에 "가난해도 똑똑한 아이들에게 더 나은 기회가 부여될 가능성을 평준화가 박탈한다"는 미묘한 논리가 성립하게 되었다. 한 쪽에서 강한 유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런 상황을 한번 꾸며본다.
"이봐! 지금처럼 뺑뺑이 돌리면 이 지역 애들은 싸그리 똥통학교 가게 되어 있어. 지역간 경제수준 차이가 워낙 심해서인 줄 왜 모르겠나. 그게 어디 당장에 해결될 일인가? 지금 같은 평준화는 안 되지 않겠어? 이 지역 애들 오도가도 못하게 묶어두는 것 밖에 안 되잖아. 강남 애들 지들끼리 모여서 혜택 다 보는데, 여기 애들이라고 거기 못 가란 법 있어? 열심히 공부시켜서 그런 학교 보내자구. 지금은 이사갈 능력이라도 되야 기회가 있지 않냐 말야. 그저 평준화만 고집해서 될 게 아니라고 봐. 뺑뺑이 없애고 가난한 지역 애들도 좋은 학교 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진보적'이지 않겠어?"
위험천만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들마냥 '공교육을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공적영역의 일'로 보지 않기 때문이며, 또, 은근히 '능력에 따라 기회를 획득하게 하는 개인간 경쟁'에 공교육을 내맡기자는 발상을 깔고 있어서이다. 하나 더 있다. 공교육을 인간의 성장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기획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계층상승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원인은 훨씬 근본적인 곳에서 발생하며, 아주 작은 개인적 성공의 가능성에 묶여 공교육의 의미를 입신출세에 붙박아둔 채 '민중 교육권 운운'하며 갈라치기 교육, 서열화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런 목소리를 내려면, 평준화 해체론자들이 어떤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며, 그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러는 지를 먼저 살핀 연후여야 한다.
설사 선심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선택'을 강조하는 재구조화의 혜택이 민중에게 돌아간 예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미국에서 바우처 제도는 오히려 가진 자들의 권리를 더욱 굳게 지키는 구실을 했을 뿐이었다.
학교의 입시학원화를 합법적으로 강제하는 보충수업 재개 선언
- 교육인적자원부의 "공교육 진단 및 내실화 대책", 과연 '대책'인가?
한편, 교육인적자원부는 평준화에 대해서 선뜻 '해체' 쪽으로 선회하지 않았다. 신임 이상주 교육부총리는 같은 날 평준화 문제를 놓고 진념 경제 부총리와 상반된 견해를 표명했다. 거칠게 질문을 던져보자. 교육인적자원부는 '평등주의'로 기울어져 있는 걸까? 답부터 내리면, 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는 한 마디로 '교육평등'을 지키기 위해 함께 할 대상이 못된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어느 정도 맛이 간 지경인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는 최근 발표한 공교육 내실화 대책을 보면 이내 드러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보충수업 허용'쪽으로 사태해결의 가닥을 잡으면서 상황을 더욱 혼란지경으로 몰아 가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식민지 교육에 향수를 품고 있는 진념 류의 경제 관료들에게 끌려다녔다.(이건 너무 너그러운 표현인가?) 교육인적자원부는 KDI보고서 중 '사립학교와 민간학원에 통합'이라는 막 가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랬으면서도, 교육인적자원부는 사실상 학교의 입시학원화를 합법적으로 부추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내실화 대책" 중 가장 문제삼아야 할 부분이기도 한, 보충수업 허용이 그것이다. 자가당착에 빠졌다고도 볼 수 있고, 교육인적자원부나 재경부나 "그 놈이 그 놈"이라는 해석도 떠오른다.
교사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간단하다. '학교운영위원회'(학부모들은 다른 학교와의 경쟁에서 지는 것이 싫고 불안하기 때문에 아마 경쟁적으로 보충수업은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교사들을 입시준비 교육에 동원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소비자의 이기적 동기'에 따라 '공공성에 준해 행동해야 할 교사'를 동원하고 노동과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도와 다를 것이 없겠다. 교사들에게만 보충수업을 받게 한다고 발표했으면 이 정도로 긴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들이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막아내기가 한결 수월하다. 외부 강사 초빙을 허용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교사들은 기가 막혀버린다. 입시위주로 확실히 유지될 (그리고 거의 우열반 편성으로 운영할) 보충수업에 몰두할까 아니면 입시를 위해서는 시간이 아까울 지도 모를 정규수업에 순진하게 열중할까? 답은 뻔하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지경에 몰려 있는, 7차 교육과정으로 거의 파탄날 지경인 정규교육과정(교과수업)의 의미는 이 대목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교사들은 학교 안에서 사교육시장 강사들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아마 이것이 교육인적자원부의 진짜 의도였겠지. 학교교육의 존재의미가 과연 입시에 있는 것인지, 아니 입시에 있어야만 하는지, 학교가 입시에서 성공하도록만 하면 끝인지, 교육인적자원부는 정말 교육에 관심이 있기는 한 건지, 혹시 바보들은 아닌지... 묵은 질문들이 새삼스럽게 꼬리를 문다. 80년대처럼 입시위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보다라는 생각마저 교사들은 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은 온통 쑥대밭이다. 한 동료교사는 "그럼 교사는 잡무나 하고 애들 뒤치닥꺼리나 하고, 공부는 학원선생 초빙해서 보충수업으로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리고, 학부모도 학부모 나름이어서, 보충수업에 대해선 계층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를 게 뻔하다. 교육부는 대책이랍시고 10시 이후 학원 수강 금지도 곁들여 발표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한 동료교사 왈, "아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과목에 50만원 하는 개인과외 시킬 능력은 없는데, 다짜고짜 학원도 못 보내게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그렇다고 안 보낼 수도 없고... 어떤 학원은 이제 0교시 없어진다면서 새벽반 만든다던데 거기라도 보내야 하는 건지..."라며 걱정을 늘어놨다. 그는 교사이기 이전에 한 학생의 어머니였다. 어떻게 해서든 당장 입시에서 아이를 성공시켜야 하는. 이미 학원수강 금지 덕에 '개인교습' 형태가 성행하게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고, 사교육 시장은 발빠르게 새벽반 편성 등으로 틈새를 찾고 있다. 어떻게 이들을 '10시'라는 틀로 묶어둘 수 있을까.
이렇듯 보충수업문제는 원칙(학교의 입시학원화)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간단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 교육문제는 이미 '일괄타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문제 저문제가 하도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단편적인 해법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별 기대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해결은커녕 번번이 일을 꼬이게 만든다. 예컨대, 교사 가운데서도 사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라도 보충수업은 필요한 거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여럿 있다. 그나마 학교에서라도 '붙들고 있어줘야'한다는 주장이다. 온정적 발상이다. '참'스승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민중의 편에 정말로 선 진정한 교육노동자는 아니겠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런 주장 역시 고등학교에서 훌륭한 교사의 역할은 입시에서의 성공이며, 입시의 규정력이 큰 현실에 대해 너무 끌려가고만 있는 처지를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그럴 수 있다 치자. 문제는 교육인적자원부의 대책 아닌 대책의 발표이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이율배반적인 대처를 함으로써 문제는 한결 복잡해져 버렸다. 한 손으로는 여론에 편승하여 0교시를 폐지(입시위주 교육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애처로움...)시키는데 도장 찍고, 다른 손으로는 보충수업 받기 위해 학교에 늦게까지 남겨두라(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입시준비기관이다...)고 '권장'하는 서류에 서명을 한다. 그러면 사교육 수요가 학교로 흡수된다나 어쩐다나. 장담하건데, 이번 조치로 사교육비 부담은 줄어들지 않는다. 몰래몰래, 소수정예로 비싸게 운영되는 학원, 고액 개인과외, 새벽반... 사교육 시장 움직임에 사교육 없이는 불안해 못 견디게 되어버린 우리네 '소비자'들은 미친놈 장단에 맞춰 춤추게 되어있다. 가격이 차별화되면서 과외비 지출 격차도 덩달아 더 벌어진다.
이렇게 보충수업 문제는 단순히 보충수업의 차원에 멈춰 있지 않다. 고등학교 교육이 입시와의 강한 연관 속에서 규정되고, 사람들이 그런 틀로 사고하는 한 보충수업의 부활이냐 폐지냐는 딱 갈라 말하기 어려운 주제가 된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진 필자마저 현실의 여러 면에 눈길을 주다 보면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학교 끝나고 나서 컴퓨터에만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어른거리고, 원치도 않는데 학원에서 새벽까지 있어야 하는 학생도 어른거린다. 이미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사교육 시장과 이에 대한 비정상적 의존 구조의 문제, 그 뒤의 무한경쟁 제조기인 입시체제(대학서열화 구조), 나아가 분단된 노동시장의 문제까지... 겉으로는 보충수업 하나지만 사실상은 보이지 않는 부분과도 얽혀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부와 교육인적자원부는 학교를 피폐한 곳으로 만들고 가진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무한경쟁 입시구조의 폐해와 차별적 노동시장 구조의 불온함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앵무새처럼, 재경부가 알려준 대로 '인적자원개발'만 반복적으로 되뇌이며 사람들에게 주입하려 든다.
원칙을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번 '대책'은 공교육 기관인 학교를 부실화시켜 민중의 교육권을 침해함은 물론, 교육 평등화에 역행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교육부 대책에 대한 진보교육연구소의 '성명서'를 참조하자.
"교육인적자원부는 교육 문제에 관한 한, 기여입학제 반대 및 고교 평준화 틀 유지 등 정부 내 경제부처의 주장과는 다른 입장을 견지해왔다. (…) 그러나 이번 대책은 '교육' 문제와 '경제' 문제를 '경쟁'과 '효율'이라는 동일한 논리로 진단, 처방하고 있음에 깊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결국 교육인적자원부'가 스스로 그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금번 대책에 포함된 자립형 사립고 요건 완화, 학생을 위한 별도 프로그램의 학교장 자율 실시, 시도교육청 연합 전국단위 모의고사 실시 등의 대책은 학교 내외의 경쟁을 활성화시켜 그 효율을 올리겠다는 경제 논리와 똑같이 닮아 있는 것이다. (…) 이번 대책이 몰고 올 파장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선 학교에서는 벌써 학교 내 보충수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요 과목의 외부 강사를 초빙하기 위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학원 강사들의 몸값은 더욱 치솟고, 학교 교사들의 자괴감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미 학원의 입시 준비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학교에서조차 다시 한번 입시 위주의 교육에 시달려야 한다. 학부모들은 학원과 과외에 들어가는 비용에 더해, 이젠 학교에도 과외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교육의 폐해를 막기 위해, 교육인적자원부가 구실로 내건 '학생/학부모의 과외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 공교육이 사교육과 경쟁을 하겠다고 하는 이번 발상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교육의 파행은 더욱 더 깊어질 것이다. 이번 대책은 이번 기회에 아예 학교를 '학원화'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2002년 3월 20일 진보교육연구소)
평준화 문제든, 보충수업 문제든 주제는 달라도 결국은 같은 곳에 이어진다. 공교육 파탄이라는. 형태가 '무화'되는 의미에서의 파탄은 아니다. 형태는 남아있으나 그 형태가 매우 '공'적이지 못한 비정상적 상태를 염두에 둔 말이다.
"저들은 한껏 고무돼 있다. 대다수 학생들이 학원 문 앞을 열심히 들락날락거리는 현실 하나만 놓고 보아도 학교는 도무지 할 말이 없을 테니 국으로 처박혀 있으라는 뜻이다. 이미 학원과의 경쟁에서 학교는 패배했다!(→이 말이 과연 논리적으로 성립하는지, 나 같았으면 이 말도 쏘아 붙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최고 화두는 '학교의 경쟁력 높이기'가 되어야 한다, 괴발개발 지지배배...."(정은교, 『진보교육』12호, 교육시평)
'상징폭력'을 가하고 있는 자, 진정 누구인가?
- "선택"이라는 외피를 둘러쓴 경쟁과 효율의 이데올로기 공세
얼마전 작고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그의 책 『재생산』에서 매우 정교한 개념체계를 선보였다. 마치, 수학 이론을 연상시키듯 일련의 명제들로 촘촘히 엮여진 그의 재생산 논의. 입이 떡 벌어진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교육행위는 "상징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상징폭력을 자행한 주범 공교육을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건가? 암울하다.
생각을 가다듬는다. 지금 민중에게 도발적 언사를 퍼붓고 있는 이데올로그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조선일보, 우천식과 이주호로 대표되는 KDI, 진념 류의 경제관료! 윤정일 따위의 보수 관변학자! 지새끼 밖에 챙길 줄 모르는 가진 넘들!
민중들은 가랑이가 찢어진다. 뱁새 마냥 그들을 따라가려다가..
값싼 학원마저도 보낼 여유가 없을 뿐더러 자식교육에 관심을 가질 틈조차 없이 먹고살기 급급한 진짜 '프롤레타리아의 자식들'은 교육은커녕, 방치된 채 '소비자 천국' 거리를 헤맨다... 그들을 반겨주는 곳은 PC방, 노래방, 방, 방, 방...... 싸이버 세계와 방에 틀어 박혀 '위로'받는 우리 아이들...
이제 지배계급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상징폭력'에만 기대지 않는 모양이다. 교묘하게 '은폐'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말한다. 그래도 조금은 쑥스러운지 우리 상징체계에서 '좋은 단어'로 기억되어 있는 '선택'의 외피를 적절히 씌워가면서(특히, 여론을 호도해야 할 때) '경쟁'과 '효율'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 한다.
"너희들은 '개발'되어 마땅한 '인적자원'이다. 선택하라! 경쟁하라! 바야흐로 넓디넓은 교육시장의 시대가 활짝 열렸으니, 알아서 살아 남으라! 도태되어도 그건 자기 책임일 뿐.'
교육은 추상적인 상태에 있으면서 의인화되어 상징폭력을 가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교육을 주무르고 있는 지배적 집단- 그 집단의 자의적 상징체계가 마치 정당하기라도 한듯 따라야 하면서도 유리한 쪽으로 제 갈 길 개척해 갈 줄 아는 중산층 학부모들- 그 뒤를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가거나 아예 포기하는 사람들. 이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오늘의 교육현실이다. 전자의 사람들이 상징폭력의 주체가 아닐까. 만일 교육의 주도권을 다른 집단이 가져온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공교육의 해체를 잠깐 말하였다. 평준화가 해체되면 공교육 체제 내부는 중심과 주변으로 양분되어버린다. 일부 중심부 학교만이 학생선발의 자유-즉, 가려뽑기- 열망을 충족시킬 뿐 나머지는 학생부족으로 허덕이는 상황으로 번져갈 공산이 크다. 고등학교는 오로지 입시만으로 평가되고 입시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지금보다 몇 배 심하게. 이렇게 옮아가는 흐름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건 바로 '상층계급의 분리욕구'이다. 현재 평준화 해체 이데올로그들의 공세는 이러한 욕구에 편승하는 걸로 모자라 기름을 부어대고 있다.
'온전한, 혹은 더 나은' 선택으로 단장하고 나타나는 학교 선택권 주장은 이질적 집단구성의 '비효율성'에 대한 직접적 공격에서 시작하여, 학교 내 과목선택 차원이 아닌, 학교에 대한 선택논의로 급격히 이동해가고 있다. 평준화 해체 주장이 전에 없이 뻔뻔스럽게 나오는 것은 입시를 의식한 대중의 행위 선택 경향이 '학교 선택'의 수용으로도 이어질 것이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 보아도 좋다. 그렇다면 나머지 계층은? 벌써 그렇듯이, 이들 중 상당 부분은 굉장히 많은 출혈을 감수하면서 '이사를 감행하거나' '위장전입을 하거나' 하다가, 평준화가 해체되면, '사교육에 의존하여' 새로운 형태의 학교(자립형사립고, 공립자율학교)에 가려고 애쓰게 되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부류는 거의 교육포기 상태로 방치되어 버린다. 지켜만 보다간 민중의 교육권이 설 자리는 바늘 끝 만큼이나 좁아져 버린다.
민중의 입장에서 평준화를 사고하는 틀은 단 하나이다. 민중교육권을 위해 어떤 교육체제가 더 나은가? 지금까지의 평준화가 파쇼정권의 산물이었고, '절름발이'였음을 인정한다 치자. 그러나, "평준화 -> 뺑뺑이 -> 학교에 대한 선택권 박탈" 식으로 연상이 일어나는 단계를 이제는 넘어설 때도 되었다. 아니 지금은 이런 따위의 연상을 할 때가 아니다. 평준화를 지금 버리자고 하는 건 공교육을 말아먹자는 얘기이고 민중교육권을 거덜내는 데 동참하겠다는 의미이다. '평준화'를 놓고 벌이는 싸움을 '선택'이냐 '뺑뺑이'냐의 사소한 문제로 생각해버리면 큰일이다. 조만간 한판 붙게 될, 평준화를 놓고 벌어질 싸움엔 교육을 건 '계급 투쟁'의 의미가 분명히 있음을 인지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평준화'의 의미를 더 멀리 밀어붙이는 것. 지역 불평등 구조를 손보는 것. 입시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교육을 펼치는 구조를 생각하는 것... 더 자세한 답은 독자 여러분의 머릿 속에 이미 들어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대규모 성과급반납투쟁으로 불붙기 시작한 작년 전교조 하반기 총력투쟁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사람들을 놀래켰다. '히야! 주는 돈도 반납하고 이렇게 많이 모여서 파업에 준하는 투쟁을 하다니! 뭔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놀람과 기대. 한껏 고무된 기세는 누가 홀딱 가져가 버리기라도 했는지, 어처구니없는 단협안 체결로 <지리멸렬>하게 일단락 나버렸다는데 대한 놀라움과 허탈감...
교육시장화 반대 진영이 허우적대고 있는 사이, 이 틈을 놓칠 새라 신자유주의자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의기양양>하게 포문을 연다.
작년 말, 교육부는 올해부터 실시될 선택중심교육과정을 염두에 둔 수능개편안을 확정·발표했다.
한편, KDI가 「비전 2011」을 발표한 후 평준화 정책을 두고 논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평준화 시행 첫해인 수도권 평준화 지역에서는 올해 신입생에 대한 재배정 사태가 발생, 학부모의 가열찬 항의 농성이 벌어졌고 교육감 퇴진으로 이어졌다. 인사비리에 연루되고서도 X팔린 줄 모르고 질기게 버티던 철면피마저 물러나게 한 사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듯 연달아 '안성맞춤'으로 벌어진 사건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길은 서울까지 번진다. 서울시교육청은 전학을 원하는 고교신입생(7차선택형-2005수능 첫세대) 학부모들의 밤샘 줄서기로 연일 언론과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다. 전학 신청자 가운데 상당수가 소위 '강남 명문 입성'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전학하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공공연히 드러났다. 반면, 경기도 어떤 학교는 이번 사태 속에서 완전 '따' 돼버렸다.
경기도 사태로부터 연상되는 사슬
: 비평준화 → 평준화 → 배정오류사태 → 평준화 비난 → 평준화 해체 주장
경기도 재배정 사태는 평준화 논쟁 지형에서 평준화 해체 진영 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心證에 불과하지만, 어떤 이는 '의도된 사태' 아니겠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경기도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서울에서 '강남으로'의 전학행렬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란 상상도 해본다. 경기도 사태를 본 학부모들. 깨달은 바도 있었을 테고 당장 행동으로 옮길 용기도 얻었을 터. "아,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다른 정책의 여파도 있었다. "올해 전학신청자가 예년보다 많이 몰린 것은 어려워진 수능시험의 여파에다 대학 수시모집 확대, 학급당 인원수를 35명으로 줄이는 '7.20교육여건 개선사업' 등으로 이른바 '선호학교'로 자녀를 전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이 늘었기 때문. 게다가 최근 수도권 평준화 지역의 고교 재배정 사태까지 겹치면서 성남, 고양, 수원 등의 지역에서 '비선호학교'에 배정받은 학부모들이 '서울로, 강남으로'를 외치며 전학신청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은 충분히 타당하다.
수도권 비평준화 지역의 교육운동주체들이 평준화로의 선회를 어렵사리 이끌어 냈건만, 어이없는 사태로 보람도 없이 평준화에 대한 공격을 부추기는데 일조한 격이 되고 말았다. 경기도의 평준화 실시 결정은 사실,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 흐름에 대해선 '역류'를 만드는 '짓'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경기도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까지 평준화를 도입하려 애를 썼는가? 그리고 왜 많은 학부모들이 여기에 호응을 보인 걸까? 대답은 간단하다. 비평준화 속에 있었던 당사자들은 '서열화된 체계'가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머리로가 아니라 몸(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고등학교 체제에서는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되어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입시경쟁에 매달려야 한다. 중학생들의 입시부담 해소는 과거 평준화 도입 때의 근거이기도 했다.
<학교격차>가 원래 존재해서 서열화체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서열화 체제가 인위적으로 도입되는 순간, 학교격차는 <만들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는 인위적인 서열화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학교의 교육의 질이 문제로 보이게 된다. 서열화된 체계에서 개별학교의 등급은 사실상 운영자의 교육활동에 대한 의지나 교사의 자질 따위보다는 학생구성비(어떤 학생들로 구성되었는가. 다른 말로 학생의 가정배경이 어떠한가)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 학교등급은 곧 학생 자신의 등급이다. 서열화 구조에서 일류학교는 다수일 수가 없다. 일류에 다니지 못하는 대다수는 부정적인 자기인식을 갖게 마련이다. 게다가 교육의 질에 대한 책임은 개인과 학교에게로 떠넘겨진다. "그래, 내가 공부 못해서 그렇지 뭐..", "저 학교에 가면 끝이야." 등등. 이 마당에 경기도에서 행복한 사람이 많았을까, 불행한 사람이 많았을까?
경기도 지역 주민들의 80% 정도는 이런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 평준화를 이끌어낸 힘이었다. 물론, 난맥상 속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일류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내 아이가 난데없는 평준화 때문에 집 가까이의 '(비평준화 시절의)똥통 학교'에 배정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불만은 아마 꽤 퍼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평준화 시기의) 명문에 배정받기 위해 주소를 옮기는 등 수선을 피웠을 거다. 명분이 없어 잠자코 있던 이들이 때마침 재배정 사태가 터지자 이때다 하고 마구 불만들을 쏟아낸 것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평준화 도입을 이뤄낸 사람들이 지금 모욕당하고 있다.
우리네 평준화는 사실 '절름발이'다. 형태상으로는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시행되었을 뿐이며, 내용적으로는 온전한 의미의 '질적 평준화'를 기하려는 노력도 수준 미달이었다. 서울지역만을 놓고 본다면, 그래도 평준화는 대학교육기회를 지역별로 균등하게 분배하는데 나름대로 기여를 하였다. 쉬운 말로, 강남과 강북의 차이가 지금처럼 '하늘과 땅'은 아니었다. 교육기회 균등배분에서 평준화가 했던 이런 '소극적' 기여는 혼자서가 아니라 입시형태에 힘입은 바가 있었다. '내신'에서의 불리함을 의식하여 지금처럼 '(자식 교육을 위해)서울로, 강남으로!'의 분위기는 형성되기가 만만치 않았다. 몇 년 전 일었던 과학고의 자퇴 바람이 이를 일러준다. 심층적으로는 지역별 경제격차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고, 사교육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일련의 신자유주의 교육개혁 분위기가 일고, 사교육이 엄청나게 팽창하고, 입시형태가 조금씩 바뀌는 와중에 사람들은 간파했다. 무엇이 유리한 '선택'인지를. 물론, 유리한 조건을 찾아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어정쩡한 평준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90년대 중반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입시제도의 변화("다양한" 전형)는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쳐도 대학교육기회의 (지역별) 균등배분 효과에 평준화가 기여한 바를 저하시켜왔다. 다시 말해, 본래적 의미의 교육 평준화 정착을 가로막는 외적 요인으로서 입시제도의 변동이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 '교육적'이라고 치부되는 '다양한 전형'은 평준화를 흔드는 위험한 요소이다. 사실상, 현재의 입시변화는 갈수록 특정 지역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안전하지가 않은 것이다. 최근 3년간 추세를 살핀 결과를 보면, 다양한 입시의 약발(=기득권층의 입시경쟁력을 높이고 사수하기)도 차츰 약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수능 땅값'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울 강남구, 서초구 지역 수험생들은 올해도 대학입시에서 타 지역에 비해 높은 합격률을 기록했다. 이 지역 수험생은 지난해 전체 수험생의 약 3%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요 사립대 합격자중 6∼12%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지역 수험생들이 전체 합격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예년에 비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겨레, 2002년 1월 26일)
지금 정도로도 부족한 양, 더 강력한 처방을 들이미는 격이다. 여기에서 평준화 해체 주장의 의도가 들통나버린다. 현재의 "평준화+다양한 입시체제"만으로는 입시에서의 기득권층 우위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준화 틀은 기득권층의 입장에서는 깨야 마땅할 뿐이다. 겉으로는 '국가경쟁력'이니, '학력저하'니, '평균인재만 양성해대는 비효율 교육'이니, '복제인간만 만드는 획일적 교육이니'니, '선택권 침해'니 온갖 말을 갖다붙여 평준화의 '교육적 허점'을 일면 그럴 듯하게 '폭로'하지만, 사실상은 기득권 보호가 중요한 의도로 자리하고 있다. 한 언론에서도 이를 지적한다. 국가경쟁력 제고를 전면에 내걸면서 고교평준화제도를 해체하자고 주장(=차별화된 교육시스템 구축)하는 목소리들에는 다수 국가구성원들에 대한 소수 기득권 층의 '국내 경쟁력을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바야흐로 지금은 마녀사냥 중
: 평준화가 온갖 교육문제의 주범이다?
KDI가 먼저 총대를 매고 '용감하게' 평준화 사냥에 나선다. KDI는 이미 작년 4월, 「교육의 형평성과 과외에 관한 실증 연구」라는 보고서를 펴냈고, 여기에서 평준화가 교육불평등의 주범이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KDI가 교육평준화 해체의 선봉에 설 것이라는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그때에 이어 지난 2월, 「2011비전과 과제」보고서를 내놓았다. KDI는 이 보고서에서 교육시장화의 구체적 방안을 늘어놓았다.
"우리나라의 초·중등 공교육비 총액이 1998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3.9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8%)을 조금 웃도는 수준인데도 사교육비가 3%에 육박하고 있다"며 "사교육비가 90년대 이후 급증추세를 보이는 것은 중·고교 공교육의 부실화 때문"이며, (특히) "평준화 제도아래서 경제능력 있는 학부모들은 공교육을 외면하고 고액과외를 통해 자녀들을 명문대학에 진학시켜 교육불평등 문제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라고 했다. 이러한 '독특한' 해석에 뒤이어,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으로 "학교간 차이 인정, 교육청의 학교통제 기능 철폐,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 허용 등을 통해 평준화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추리면, 여러 가지 언사를 동원하여 현재의 모든 교육제도를 '시장원리'에 따라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교 평준화에 대해서는 '보완'이라는 다소 중립적 언어도 곁들이긴 하지만, 사실상은 폐지 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고, 심지어 고교등급제 인정(즉, 교육의 질과 성과는 학교마다 다르므로 등급을 매겨 입시에서의 혜택 내지 핸디캡을 학생 개인에게 부과해야 한다.)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이뿐이 아니다. 사립학교와 입시학원을 통합함으로써 학교 역시 입시학원이나 다름없는 기능을 수행하고 그 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더 살펴보면 입만 벌어지고 열받으니 여기서 멈춘다. 한 마디로 '공'은 무조건 '악'이요, '사'는 무조건 '선'이므로, '공' 역시 '사'와 마찬가지의 질서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어, 진념은 '식민지교육'에 대한 향수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며 평준화 해체가 경제부처의 뜻이기도 함을 비췄다.
진념 경제부총리는 지난달 31일 (…) 강연을 통해 "우리 교육의 문제는 지역별 학교별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고 평준화 일변도로 이끌어 온데 있다"면서 "고교 평준화 정책 폐지 내용을 담은 건의서를 곧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진부총리는 또 "일제 때는 경성대 의대와 세브란스 의전 등은 서울에, 전북대·경북대 의대 등은 지방에 있었고 사범대는 공주사범이, 상업학교는 목포상고·선린상고·군산상고가 유명했다”면서 "그런 측면에선 차라리 일제 강점기의 교육정책이 지금보다 더 나았다"고 지적했다. (문화일보, 2002년 2월2일)
힘 보태려다 욕만 잔뜩 먹고 크게 분노를 샀지만, 이를 계기로 경제관료들의 교육에 대한 식견이 어느 정도인지 만천하에 드러났고, 교육인적자원부는 재경부에 대해 "눈치 보기 바쁘거나 혹은 어쩌다 벌어지는 힘겨루기에서 밀리거나"의 양태이다.
'덩달이 언론'도 이에 질새라, 고교 평준화 정책 깎아 내리기에 열을 올린다. 그 중 하나만 골라 일일이 살핀다. 먼저 평준화=학력의 하향평준화라고 주장한다.
평준화는 곧 학력의 하향 평준화 과정이었다. (…) 학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다. 평준화 교육정책의 소산이다.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수업시간에 비슷비슷한 교사에게 공부한 '복제학생'이 넘쳐나고 있다. 학교도 똑같고 커리큘럼도 똑같은데, 학력상승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하향평준화 주장은 강력한 평준화 깎아내리기 논지이면서도 실증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오히려 평준화 쪽이 비평준화보다 학력상승 효과가 더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작년에 나왔다. 이어 비평준화=고품질 교육을 가능케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노골적으로 교육에도 세계 각국의 '교육차별화 정책'을 뼛속깊이 베껴야 한다며 역시 입증된 바 없는 사실에 대해 변을 늘어놓는다.
지금 세계 각국의 교육방향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비평준화의 고품질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가까운 중국도 위기감을 느끼고 탈바꿈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도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능력위주의 시스템으로 나가고 있다. 일본도 능력별 인재 양성이라는 고교교육의 대변혁을 기획하고 있다. 구미 교육선진국들은 교육차별화 정책을 실행한지 오래다.
그러고 나서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어설픈'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다 대고 지독하게 편향된 교육정책이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짚어도 한참 잘못 짚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사회주의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지금 정도로는 안 된다는 뜻이겠다. 더 철저히, 교육도 '경쟁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밖에는 안 읽힌다. "교육평등주의자"들에게 색깔논쟁이라도 걸어볼 속셈인지, 사회주의 어쩌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식의 '평균인재' 육성에 매달리고 있다. 자립형 사립고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형편이다. 아예 비평준화의 싹을 잘라 버리겠다는 심산이다. 세계시장에서 '왕따'되기 딱 좋은, 지독하게 편향된 교육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학부모들이 돈이 남아돌아 너도나도 조기유학을 보내는 줄 아는가. 모두를 부모의 허황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색깔 없는 복제학생을 만들 수 없다는 수요자들의 욕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평준화정책을 깨고 교육다원화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 자율적으로 학교를 선택하고 능력별 수업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
이쯤에서 반발에 대비한 방어선을 아주 살짝 친다.
물론 국민의 교육열을 고려할 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준화 해체 소신을 굽힐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숙고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세계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엘리트를 길러내야 한다. 생각도 수준도 똑같은 '복제인간'의 양산으로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과열경쟁이니, 계층 간의 위화감이니 하는 구태의연한 소리는 이제 접어야 한다. 교육평준화 개선은 범정부 차원의 과제다. 우선 교육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교육단체의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할 일이 아니다. '무경쟁의 교육낙원'은 공교육을 더욱 피폐시킬 뿐이다.(2002년 3월9일, 문화일보)
일개 논설위원의 용감한 헛소리 쯤으로 욕하고 넘어가기엔 평준화 해체론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기에 자못 심각하게 읽힌다. "평준화는 위헌소지가 있다"는 일각(보수를 자처하는 단체라거나, 중산층 이상으로 똘똘 뭉친 학부모 이익집단이거나, 개량주의자거나 그렇다)의 주장은 평준화 일파만파 중 단연 백미이다.
이석연(전 경실련 사무총장이자 변호사)은 이상의 주장에 찬동하며 "능력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라는 헌법 정신을 무시한 고교평준화등 현 교육정책은 공교육을 황폐화하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위헌적 제도"라는 주장을 폈다. 평준화 정책에 대해 '소비자 선택권 및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근본적으로 제약'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했다. 그는 변호사라는 전문적 지위를 악용하여 '헌법'을 들먹여 가면서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학교선택권 보장'을 옹호했다. 이는 부르주아들의 논리가 투영된 헌법의 논리를 앞세워 '평등'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우리에게 주입하려든다. 교육평준화 정책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택함으로써 평준화 정책을 근본부터 의심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려 한다. 이 대목에서 과외 위헌 판결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또 하나의 목소리
: 평준화는 없는 자들의 기회를 박탈한다. 그러므로 민중의 입장에서도 깨는 게 차라리 낫다?
이로써 저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살폈다. 평준화에 대한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엇일까? 평준화는 민중교육권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가로막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유심히 살피면 KDI와 비슷한 주장임을 알게 된다. 가장 진보적 언어 가운데 하나인 "평등"을 평준화 비난의 도구로 삼는다.
90년대 중반 이후 시장화 정책이 추진되고 계층간 경제 격차의 골이 빠른 속도로 깊어 가는 가운데, 고교평준화는 애물단지마냥 취급받았다. 계층간 경제 격차는 지역간 격차로 곧바로 연결되는 구조 때문에 "가난해도 똑똑한 아이들에게 더 나은 기회가 부여될 가능성을 평준화가 박탈한다"는 미묘한 논리가 성립하게 되었다. 한 쪽에서 강한 유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런 상황을 한번 꾸며본다.
"이봐! 지금처럼 뺑뺑이 돌리면 이 지역 애들은 싸그리 똥통학교 가게 되어 있어. 지역간 경제수준 차이가 워낙 심해서인 줄 왜 모르겠나. 그게 어디 당장에 해결될 일인가? 지금 같은 평준화는 안 되지 않겠어? 이 지역 애들 오도가도 못하게 묶어두는 것 밖에 안 되잖아. 강남 애들 지들끼리 모여서 혜택 다 보는데, 여기 애들이라고 거기 못 가란 법 있어? 열심히 공부시켜서 그런 학교 보내자구. 지금은 이사갈 능력이라도 되야 기회가 있지 않냐 말야. 그저 평준화만 고집해서 될 게 아니라고 봐. 뺑뺑이 없애고 가난한 지역 애들도 좋은 학교 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진보적'이지 않겠어?"
위험천만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들마냥 '공교육을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공적영역의 일'로 보지 않기 때문이며, 또, 은근히 '능력에 따라 기회를 획득하게 하는 개인간 경쟁'에 공교육을 내맡기자는 발상을 깔고 있어서이다. 하나 더 있다. 공교육을 인간의 성장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기획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계층상승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원인은 훨씬 근본적인 곳에서 발생하며, 아주 작은 개인적 성공의 가능성에 묶여 공교육의 의미를 입신출세에 붙박아둔 채 '민중 교육권 운운'하며 갈라치기 교육, 서열화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런 목소리를 내려면, 평준화 해체론자들이 어떤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며, 그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러는 지를 먼저 살핀 연후여야 한다.
설사 선심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선택'을 강조하는 재구조화의 혜택이 민중에게 돌아간 예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미국에서 바우처 제도는 오히려 가진 자들의 권리를 더욱 굳게 지키는 구실을 했을 뿐이었다.
학교의 입시학원화를 합법적으로 강제하는 보충수업 재개 선언
- 교육인적자원부의 "공교육 진단 및 내실화 대책", 과연 '대책'인가?
한편, 교육인적자원부는 평준화에 대해서 선뜻 '해체' 쪽으로 선회하지 않았다. 신임 이상주 교육부총리는 같은 날 평준화 문제를 놓고 진념 경제 부총리와 상반된 견해를 표명했다. 거칠게 질문을 던져보자. 교육인적자원부는 '평등주의'로 기울어져 있는 걸까? 답부터 내리면, 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는 한 마디로 '교육평등'을 지키기 위해 함께 할 대상이 못된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어느 정도 맛이 간 지경인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는 최근 발표한 공교육 내실화 대책을 보면 이내 드러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보충수업 허용'쪽으로 사태해결의 가닥을 잡으면서 상황을 더욱 혼란지경으로 몰아 가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식민지 교육에 향수를 품고 있는 진념 류의 경제 관료들에게 끌려다녔다.(이건 너무 너그러운 표현인가?) 교육인적자원부는 KDI보고서 중 '사립학교와 민간학원에 통합'이라는 막 가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랬으면서도, 교육인적자원부는 사실상 학교의 입시학원화를 합법적으로 부추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내실화 대책" 중 가장 문제삼아야 할 부분이기도 한, 보충수업 허용이 그것이다. 자가당착에 빠졌다고도 볼 수 있고, 교육인적자원부나 재경부나 "그 놈이 그 놈"이라는 해석도 떠오른다.
교사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간단하다. '학교운영위원회'(학부모들은 다른 학교와의 경쟁에서 지는 것이 싫고 불안하기 때문에 아마 경쟁적으로 보충수업은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교사들을 입시준비 교육에 동원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소비자의 이기적 동기'에 따라 '공공성에 준해 행동해야 할 교사'를 동원하고 노동과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도와 다를 것이 없겠다. 교사들에게만 보충수업을 받게 한다고 발표했으면 이 정도로 긴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들이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막아내기가 한결 수월하다. 외부 강사 초빙을 허용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교사들은 기가 막혀버린다. 입시위주로 확실히 유지될 (그리고 거의 우열반 편성으로 운영할) 보충수업에 몰두할까 아니면 입시를 위해서는 시간이 아까울 지도 모를 정규수업에 순진하게 열중할까? 답은 뻔하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지경에 몰려 있는, 7차 교육과정으로 거의 파탄날 지경인 정규교육과정(교과수업)의 의미는 이 대목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교사들은 학교 안에서 사교육시장 강사들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아마 이것이 교육인적자원부의 진짜 의도였겠지. 학교교육의 존재의미가 과연 입시에 있는 것인지, 아니 입시에 있어야만 하는지, 학교가 입시에서 성공하도록만 하면 끝인지, 교육인적자원부는 정말 교육에 관심이 있기는 한 건지, 혹시 바보들은 아닌지... 묵은 질문들이 새삼스럽게 꼬리를 문다. 80년대처럼 입시위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보다라는 생각마저 교사들은 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은 온통 쑥대밭이다. 한 동료교사는 "그럼 교사는 잡무나 하고 애들 뒤치닥꺼리나 하고, 공부는 학원선생 초빙해서 보충수업으로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리고, 학부모도 학부모 나름이어서, 보충수업에 대해선 계층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를 게 뻔하다. 교육부는 대책이랍시고 10시 이후 학원 수강 금지도 곁들여 발표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한 동료교사 왈, "아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 과목에 50만원 하는 개인과외 시킬 능력은 없는데, 다짜고짜 학원도 못 보내게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그렇다고 안 보낼 수도 없고... 어떤 학원은 이제 0교시 없어진다면서 새벽반 만든다던데 거기라도 보내야 하는 건지..."라며 걱정을 늘어놨다. 그는 교사이기 이전에 한 학생의 어머니였다. 어떻게 해서든 당장 입시에서 아이를 성공시켜야 하는. 이미 학원수강 금지 덕에 '개인교습' 형태가 성행하게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고, 사교육 시장은 발빠르게 새벽반 편성 등으로 틈새를 찾고 있다. 어떻게 이들을 '10시'라는 틀로 묶어둘 수 있을까.
이렇듯 보충수업문제는 원칙(학교의 입시학원화)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간단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 교육문제는 이미 '일괄타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문제 저문제가 하도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단편적인 해법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별 기대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해결은커녕 번번이 일을 꼬이게 만든다. 예컨대, 교사 가운데서도 사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라도 보충수업은 필요한 거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여럿 있다. 그나마 학교에서라도 '붙들고 있어줘야'한다는 주장이다. 온정적 발상이다. '참'스승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민중의 편에 정말로 선 진정한 교육노동자는 아니겠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런 주장 역시 고등학교에서 훌륭한 교사의 역할은 입시에서의 성공이며, 입시의 규정력이 큰 현실에 대해 너무 끌려가고만 있는 처지를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그럴 수 있다 치자. 문제는 교육인적자원부의 대책 아닌 대책의 발표이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이율배반적인 대처를 함으로써 문제는 한결 복잡해져 버렸다. 한 손으로는 여론에 편승하여 0교시를 폐지(입시위주 교육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애처로움...)시키는데 도장 찍고, 다른 손으로는 보충수업 받기 위해 학교에 늦게까지 남겨두라(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입시준비기관이다...)고 '권장'하는 서류에 서명을 한다. 그러면 사교육 수요가 학교로 흡수된다나 어쩐다나. 장담하건데, 이번 조치로 사교육비 부담은 줄어들지 않는다. 몰래몰래, 소수정예로 비싸게 운영되는 학원, 고액 개인과외, 새벽반... 사교육 시장 움직임에 사교육 없이는 불안해 못 견디게 되어버린 우리네 '소비자'들은 미친놈 장단에 맞춰 춤추게 되어있다. 가격이 차별화되면서 과외비 지출 격차도 덩달아 더 벌어진다.
이렇게 보충수업 문제는 단순히 보충수업의 차원에 멈춰 있지 않다. 고등학교 교육이 입시와의 강한 연관 속에서 규정되고, 사람들이 그런 틀로 사고하는 한 보충수업의 부활이냐 폐지냐는 딱 갈라 말하기 어려운 주제가 된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진 필자마저 현실의 여러 면에 눈길을 주다 보면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학교 끝나고 나서 컴퓨터에만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어른거리고, 원치도 않는데 학원에서 새벽까지 있어야 하는 학생도 어른거린다. 이미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사교육 시장과 이에 대한 비정상적 의존 구조의 문제, 그 뒤의 무한경쟁 제조기인 입시체제(대학서열화 구조), 나아가 분단된 노동시장의 문제까지... 겉으로는 보충수업 하나지만 사실상은 보이지 않는 부분과도 얽혀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부와 교육인적자원부는 학교를 피폐한 곳으로 만들고 가진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무한경쟁 입시구조의 폐해와 차별적 노동시장 구조의 불온함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앵무새처럼, 재경부가 알려준 대로 '인적자원개발'만 반복적으로 되뇌이며 사람들에게 주입하려 든다.
원칙을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번 '대책'은 공교육 기관인 학교를 부실화시켜 민중의 교육권을 침해함은 물론, 교육 평등화에 역행하는 결과로 나타날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교육부 대책에 대한 진보교육연구소의 '성명서'를 참조하자.
"교육인적자원부는 교육 문제에 관한 한, 기여입학제 반대 및 고교 평준화 틀 유지 등 정부 내 경제부처의 주장과는 다른 입장을 견지해왔다. (…) 그러나 이번 대책은 '교육' 문제와 '경제' 문제를 '경쟁'과 '효율'이라는 동일한 논리로 진단, 처방하고 있음에 깊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결국 교육인적자원부'가 스스로 그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금번 대책에 포함된 자립형 사립고 요건 완화, 학생을 위한 별도 프로그램의 학교장 자율 실시, 시도교육청 연합 전국단위 모의고사 실시 등의 대책은 학교 내외의 경쟁을 활성화시켜 그 효율을 올리겠다는 경제 논리와 똑같이 닮아 있는 것이다. (…) 이번 대책이 몰고 올 파장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선 학교에서는 벌써 학교 내 보충수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요 과목의 외부 강사를 초빙하기 위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학원 강사들의 몸값은 더욱 치솟고, 학교 교사들의 자괴감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미 학원의 입시 준비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학교에서조차 다시 한번 입시 위주의 교육에 시달려야 한다. 학부모들은 학원과 과외에 들어가는 비용에 더해, 이젠 학교에도 과외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교육의 폐해를 막기 위해, 교육인적자원부가 구실로 내건 '학생/학부모의 과외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 공교육이 사교육과 경쟁을 하겠다고 하는 이번 발상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교육의 파행은 더욱 더 깊어질 것이다. 이번 대책은 이번 기회에 아예 학교를 '학원화'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2002년 3월 20일 진보교육연구소)
평준화 문제든, 보충수업 문제든 주제는 달라도 결국은 같은 곳에 이어진다. 공교육 파탄이라는. 형태가 '무화'되는 의미에서의 파탄은 아니다. 형태는 남아있으나 그 형태가 매우 '공'적이지 못한 비정상적 상태를 염두에 둔 말이다.
"저들은 한껏 고무돼 있다. 대다수 학생들이 학원 문 앞을 열심히 들락날락거리는 현실 하나만 놓고 보아도 학교는 도무지 할 말이 없을 테니 국으로 처박혀 있으라는 뜻이다. 이미 학원과의 경쟁에서 학교는 패배했다!(→이 말이 과연 논리적으로 성립하는지, 나 같았으면 이 말도 쏘아 붙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최고 화두는 '학교의 경쟁력 높이기'가 되어야 한다, 괴발개발 지지배배...."(정은교, 『진보교육』12호, 교육시평)
'상징폭력'을 가하고 있는 자, 진정 누구인가?
- "선택"이라는 외피를 둘러쓴 경쟁과 효율의 이데올로기 공세
얼마전 작고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그의 책 『재생산』에서 매우 정교한 개념체계를 선보였다. 마치, 수학 이론을 연상시키듯 일련의 명제들로 촘촘히 엮여진 그의 재생산 논의. 입이 떡 벌어진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교육행위는 "상징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상징폭력을 자행한 주범 공교육을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건가? 암울하다.
생각을 가다듬는다. 지금 민중에게 도발적 언사를 퍼붓고 있는 이데올로그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조선일보, 우천식과 이주호로 대표되는 KDI, 진념 류의 경제관료! 윤정일 따위의 보수 관변학자! 지새끼 밖에 챙길 줄 모르는 가진 넘들!
민중들은 가랑이가 찢어진다. 뱁새 마냥 그들을 따라가려다가..
값싼 학원마저도 보낼 여유가 없을 뿐더러 자식교육에 관심을 가질 틈조차 없이 먹고살기 급급한 진짜 '프롤레타리아의 자식들'은 교육은커녕, 방치된 채 '소비자 천국' 거리를 헤맨다... 그들을 반겨주는 곳은 PC방, 노래방, 방, 방, 방...... 싸이버 세계와 방에 틀어 박혀 '위로'받는 우리 아이들...
이제 지배계급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상징폭력'에만 기대지 않는 모양이다. 교묘하게 '은폐'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말한다. 그래도 조금은 쑥스러운지 우리 상징체계에서 '좋은 단어'로 기억되어 있는 '선택'의 외피를 적절히 씌워가면서(특히, 여론을 호도해야 할 때) '경쟁'과 '효율'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 한다.
"너희들은 '개발'되어 마땅한 '인적자원'이다. 선택하라! 경쟁하라! 바야흐로 넓디넓은 교육시장의 시대가 활짝 열렸으니, 알아서 살아 남으라! 도태되어도 그건 자기 책임일 뿐.'
교육은 추상적인 상태에 있으면서 의인화되어 상징폭력을 가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교육을 주무르고 있는 지배적 집단- 그 집단의 자의적 상징체계가 마치 정당하기라도 한듯 따라야 하면서도 유리한 쪽으로 제 갈 길 개척해 갈 줄 아는 중산층 학부모들- 그 뒤를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가거나 아예 포기하는 사람들. 이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오늘의 교육현실이다. 전자의 사람들이 상징폭력의 주체가 아닐까. 만일 교육의 주도권을 다른 집단이 가져온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공교육의 해체를 잠깐 말하였다. 평준화가 해체되면 공교육 체제 내부는 중심과 주변으로 양분되어버린다. 일부 중심부 학교만이 학생선발의 자유-즉, 가려뽑기- 열망을 충족시킬 뿐 나머지는 학생부족으로 허덕이는 상황으로 번져갈 공산이 크다. 고등학교는 오로지 입시만으로 평가되고 입시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지금보다 몇 배 심하게. 이렇게 옮아가는 흐름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건 바로 '상층계급의 분리욕구'이다. 현재 평준화 해체 이데올로그들의 공세는 이러한 욕구에 편승하는 걸로 모자라 기름을 부어대고 있다.
'온전한, 혹은 더 나은' 선택으로 단장하고 나타나는 학교 선택권 주장은 이질적 집단구성의 '비효율성'에 대한 직접적 공격에서 시작하여, 학교 내 과목선택 차원이 아닌, 학교에 대한 선택논의로 급격히 이동해가고 있다. 평준화 해체 주장이 전에 없이 뻔뻔스럽게 나오는 것은 입시를 의식한 대중의 행위 선택 경향이 '학교 선택'의 수용으로도 이어질 것이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 보아도 좋다. 그렇다면 나머지 계층은? 벌써 그렇듯이, 이들 중 상당 부분은 굉장히 많은 출혈을 감수하면서 '이사를 감행하거나' '위장전입을 하거나' 하다가, 평준화가 해체되면, '사교육에 의존하여' 새로운 형태의 학교(자립형사립고, 공립자율학교)에 가려고 애쓰게 되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부류는 거의 교육포기 상태로 방치되어 버린다. 지켜만 보다간 민중의 교육권이 설 자리는 바늘 끝 만큼이나 좁아져 버린다.
민중의 입장에서 평준화를 사고하는 틀은 단 하나이다. 민중교육권을 위해 어떤 교육체제가 더 나은가? 지금까지의 평준화가 파쇼정권의 산물이었고, '절름발이'였음을 인정한다 치자. 그러나, "평준화 -> 뺑뺑이 -> 학교에 대한 선택권 박탈" 식으로 연상이 일어나는 단계를 이제는 넘어설 때도 되었다. 아니 지금은 이런 따위의 연상을 할 때가 아니다. 평준화를 지금 버리자고 하는 건 공교육을 말아먹자는 얘기이고 민중교육권을 거덜내는 데 동참하겠다는 의미이다. '평준화'를 놓고 벌이는 싸움을 '선택'이냐 '뺑뺑이'냐의 사소한 문제로 생각해버리면 큰일이다. 조만간 한판 붙게 될, 평준화를 놓고 벌어질 싸움엔 교육을 건 '계급 투쟁'의 의미가 분명히 있음을 인지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평준화'의 의미를 더 멀리 밀어붙이는 것. 지역 불평등 구조를 손보는 것. 입시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교육을 펼치는 구조를 생각하는 것... 더 자세한 답은 독자 여러분의 머릿 속에 이미 들어와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