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노무현
역사의 반복
<b>1997년 대선과 이회창의 몰락</b><br>
1996년 1월, 오랜 기간 법조계와 관계를 거치면서도 강직한 성품과 ‘대쪽’같은 처신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한 어떤 인물이 신한국당에 입당한다. 1981~86년 대법원 판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10여건의 시국사건에서 과감히 소수의견을 내 ‘사법부의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9년 중앙선관위원장을 맡았을 때에도, 그는 선관위의 기능을 단순한 투개표 관리에서 불법선거운동 감시로 확대하여, 선관위의 위상을 비약적으로 강화했다. 1989년 영등포을 보궐선거에서는 심지어 노태우 민정당총재 앞으로 경고서한을 보내 세간을 놀라게 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할 때 감사원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공직사회 부패를 도려낼 수 있는 깨끗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을 때, 청와대와 사전협의 없이 관변단체 예산지원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국무총리 권한을 놓고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다. 이 때문에 끝내 그는 사임하고 마는데, 법으로 규정한 총리 권한을 무시하고 청와대가 과도하게 간섭한 것에 항명한 것이다.
DJ가 정계에 복귀하고 벌인 첫 번째 총선(1996. 4․11)에서 그는 선대의장 및 전국구 1번을 맡아 신한국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치적 상품성마저 인정받은 것이다. 삼 김에 야합하지 않는 인물이라며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던 박찬종과의 인기경쟁에서도 그는 승리했고,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5%의 지지율까지 얻어냈다. 그는 “보수 기조 하에 개혁을 추진한다”는 정치노선을 밝혔고, 삼김 청산-정치개혁을 위한 적임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의 계기를 기화로 지지율이 급락하고 만다.
1996년 12월 국회가 노동법․안기부 법을 날치기 통과했을 때, 신한국당내에서 그의 직함은 당총재였다. 날치기 통과로 신한국당은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비롯한 민중운동의 강력한 투쟁에 직면했고, 이회창 개인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기세가 등등하던 YS 정권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YS 측근 인사의 비리가 연일 폭로되고, 한보사태마저 터지면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폭발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신인인데다, YS 비리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되려 위기에 빠진 여당을 구원할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을 뿐이었다. 이때까지 그럭저럭 이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자멸하는 신한국당 배에 승선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배를 바꿔 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97년 YS 아들 김현철의 ‘국정농단’ 사건과 YS의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질 때 그는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1997년 5월 초 YS의 대선 자금을 두고 그는 “이 문제가 거론된 이상 진실이 규명돼야 한다, 그러나 대선 자금은 정치권 모두의 문제인 만큼 여당만 추궁해선 안된다”며 여야 모두의 대선 자금 공개를 요구했다. 이 소란은 정치권 전체로 일파만파 퍼졌다. (이회창 측근이 만든 원래 모범답안은 “그것은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는 당사자가 아닌 만큼 당론에 따르겠다”였다.) 나중에야 무모함을 깨달았는지, 입장을 돌연 바꾸고 만다. 97년 대선 후보로 당내 입지를 굳히려면, YS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총재로서 대선 자금을 공개할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내역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힘으로써, YS대통령의 방침을 받아들였다. (YS 측근은 이로써 우리는 김영삼 대통령과 ‘동심일체’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야 대권을 위해 불가피하게 감수했을 일일지 모르지만, 이를 계기로 대중적 지지 기반이 크게 잠식당하고 만다.
이를 극적으로 확인한 것이 바로 그의 두 아들이 병역을 기피한 의혹이다. 삼김 처럼 ‘개인사’가 모두 폭로되고 언론에게서 표적이 된 적이 없던 정치신인에게서 여론을 자극할만한 약점을 찾는 것 쉬운 일이었다. YS와 신한국당의 부패․비리로 얼룩진 5년 역사를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미련한 짓을 한 마당에, 병역기피 의혹은 단지 기폭제였을 뿐이다. 이인제 탈당은 당연한 결과이다.<br>
<b>민주당의 위기와 노무현의 등장</b>
2001년 민주당은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진다. 2001년 10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총력을 기울였건만 대패하고 만 것이다.
2000년 총선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나 한국노총 상층 인사 등 ‘개혁’ 인사를 등용하여 ‘젊은 피 수혈론’으로 무장하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등에 업고 전국정당을 꿈꾸었으나, 민주당은 여전히 한나라당에 미치지 못하는 의석을 확보했을 뿐이다. 민주당은 당내 내분을 거듭했다. 민주당은 ‘지역주의’가 민주당의 당 세를 가로막았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지구당 위원장이 당을 이탈하여 당내 분란을 자극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심화로 지역주의가 또아리 틀고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기업 및 금융 부문 구조조정으로 수도권보다는 지방이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일부나마 반도체, 전자, 자동차 등 핵심 업종 일부가 경기 회복하였지만, 그나마 이들 산업이 없는 지역에서 불황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또한 지역 중소기업이 연쇄부도를 겪은 후, 이 공백을 수도권 대기업들이 메웠는데, 이 탓에 지역 공동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한편 대형 금융기관은 부실채권 매입, 자본 출자 등 공적자금을 지원 받아 정상화 길을 걸었으나, 지역 금융기관은 금융부문 구조조정으로 대부분 합병, 퇴출 했다. 이처럼 지역 기반 기업과 금융기관이 일시에 붕괴됨에 따라, 지역은 다시 경기침체의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또한 금융의 증권화, 주식투자 열풍로 개인자금이 ‘역외유출’하고, 다시 한번 수도권 중심으로 금융시장, IT산업이 팽창한다. 결국 수도권 ‘금융센터’를 제외한 외부 지역은 바닥을 향해 경쟁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역(易) 지역차별’이라는 정치 선동이 득세할 수 있는 토양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금융화에 따른 권력비리-금융비리로 민주당은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 구조조정의 결과 주식시장이 한창 팽항하던 2000년을 전후해 이런 비리 사건이 집중했다. 김대중 정권의 정국주도권이 약화되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YS 빼고 모두다 해먹었다”는 1997년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제 민주당은 당 지도부가 누구를 후보로 결정하든, 대중은 반발하고 당은 내분에 휩싸일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국민경선제와 노무현의 등장은 1996-97년 당시 이회창의 등장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경제위기와 함께 폭발한 집권당의 몰락, 즉 대통령의 권력 누수와 최측근 인사들의 권력비리 공개가 연일 터진다는 정치배경만 유사한 게 아니다. 경제위기는 반드시 정치위기를 동반한다. 이는 지배세력을 단결하기보다는 분열을 촉진할 뿐이다. 경제위기로 분출한 대중의 불만을 모면하고, 상쟁하는 다른 세력에게 책임 전가 하려고, 사생 결단한다. 이 과정에서 각각 정치세력은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물을 간판으로 내걸고, 이를 '개혁‘ 또는 ’혁신‘의 산 증거로 내세운다. 1997년에는 이회창이 2002년에는 노무현이 그 책무를 부여받았을 뿐이다.<br>
<b>노무현의 ‘노사통합’과 ‘지역통합’</b>
노무현이 말하는 ‘통합과 화합‘은 개인사에 불과한 몇몇 에피소드에 기댄 정치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는 크게 두 축으로 통합을 말한다. 하나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통합(노사 화합)이라면 또 하나는 지역통합(영호남 화합)이다. 그는 노사가 벌인 협상에서 성공한 사례를 들어 노사화합의 지도력을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노동자 대중이 더욱 불안정해지는 마당에 즉, 타협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지극히 취약한 상황에서 노사화합이란, 노동자 ’분할관리 체계‘의 구축능력 여부를 의미할 뿐이다. 이는 노무현 개인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주체적 노선에 따라 판가름날 문제다. 그래서 노무현 지지를 주장하는 세력은 분할관리체계를 인정하는 세력과 일치한다. 그래서 노무현의 노사중개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자들은 또한 노동운동이 노선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화합은 오늘날 경제위기와 금융화 국면이 낳은 지역적 불균형 속에서 신기루일 뿐이다. DJ 정권이 하지 못한 일을, 그가 영남권 후보라는 이유로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수도권을 중심으로 금융화의 수혜를 입은 일부 집단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지속할 수 있는 ’알리바이‘로 기능할 뿐이다. 정권교체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적자로 거듭난 민주당 대선 후보가, 자기 정책을 유지하면서 노사통합과 지역통합을 이룬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1997년 이회창의 위기는 크게 세번 빚어졌다. 첫째, 1996-97년 노동자총파업으로 드러난 것처럼, YS정권에 맞선 민중운동의 강력한 대응이다. 집권 초기에는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로, 중반에는 전두환-노태우 구속과 ‘역사바로세우기’로 YS정권은 정국 주도권을 강력히 유지했지만, 이는 민중을 억압할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둘째, 대권 가도를 위해 YS정권의 부패를 감싸안으면서까지 당내 지도력을 하면서다. 대선 후보 결정은 결국 당내 의사결정을 통해 판가름나고, 기존의 보스의 역할은 지대한 역할을 미친 게 과거의 역사고 또한 현재의 역사다. 이는 권력의 악순환만을 낳을 뿐이다. 셋째, 앞서 두 문제 덕에 발생한 것이다. 병역기피는 지배세력의 관행이었고, 그밖에 대중의 분노를 자극할 지배세력의 비리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여기에는 노무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 DJ정권이 직면한 위기는 노동자, 민중을 배제하고 그들의 요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DJ정권이 저지른 온갖 악행이 이제 곧 대선 후보가 될 노무현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그는 DJ정권 청산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어투는 ‘내역이 없어서 대선 자금을 공개할 수 없다’는 이회창의 어투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 이미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구 동교동계)에 승리하려고 당내 특정 세력과 정치적 제휴를 진척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1997년 당시 이회창과 동일한 길을 밟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직 대선 시기까지 시간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김대중 정권 경제적 억압, 정치적 탄압, 부정부패와 비리에 맞서, 대중이 벌일 투쟁이 관건이다. PSSP
1996년 1월, 오랜 기간 법조계와 관계를 거치면서도 강직한 성품과 ‘대쪽’같은 처신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한 어떤 인물이 신한국당에 입당한다. 1981~86년 대법원 판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10여건의 시국사건에서 과감히 소수의견을 내 ‘사법부의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9년 중앙선관위원장을 맡았을 때에도, 그는 선관위의 기능을 단순한 투개표 관리에서 불법선거운동 감시로 확대하여, 선관위의 위상을 비약적으로 강화했다. 1989년 영등포을 보궐선거에서는 심지어 노태우 민정당총재 앞으로 경고서한을 보내 세간을 놀라게 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할 때 감사원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로써 그는 공직사회 부패를 도려낼 수 있는 깨끗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을 때, 청와대와 사전협의 없이 관변단체 예산지원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국무총리 권한을 놓고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다. 이 때문에 끝내 그는 사임하고 마는데, 법으로 규정한 총리 권한을 무시하고 청와대가 과도하게 간섭한 것에 항명한 것이다.
DJ가 정계에 복귀하고 벌인 첫 번째 총선(1996. 4․11)에서 그는 선대의장 및 전국구 1번을 맡아 신한국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치적 상품성마저 인정받은 것이다. 삼 김에 야합하지 않는 인물이라며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던 박찬종과의 인기경쟁에서도 그는 승리했고,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5%의 지지율까지 얻어냈다. 그는 “보수 기조 하에 개혁을 추진한다”는 정치노선을 밝혔고, 삼김 청산-정치개혁을 위한 적임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의 계기를 기화로 지지율이 급락하고 만다.
1996년 12월 국회가 노동법․안기부 법을 날치기 통과했을 때, 신한국당내에서 그의 직함은 당총재였다. 날치기 통과로 신한국당은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비롯한 민중운동의 강력한 투쟁에 직면했고, 이회창 개인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기세가 등등하던 YS 정권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YS 측근 인사의 비리가 연일 폭로되고, 한보사태마저 터지면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동시에 폭발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신인인데다, YS 비리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되려 위기에 빠진 여당을 구원할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을 뿐이었다. 이때까지 그럭저럭 이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자멸하는 신한국당 배에 승선하고 있었고, 그렇다고 배를 바꿔 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97년 YS 아들 김현철의 ‘국정농단’ 사건과 YS의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질 때 그는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1997년 5월 초 YS의 대선 자금을 두고 그는 “이 문제가 거론된 이상 진실이 규명돼야 한다, 그러나 대선 자금은 정치권 모두의 문제인 만큼 여당만 추궁해선 안된다”며 여야 모두의 대선 자금 공개를 요구했다. 이 소란은 정치권 전체로 일파만파 퍼졌다. (이회창 측근이 만든 원래 모범답안은 “그것은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는 당사자가 아닌 만큼 당론에 따르겠다”였다.) 나중에야 무모함을 깨달았는지, 입장을 돌연 바꾸고 만다. 97년 대선 후보로 당내 입지를 굳히려면, YS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총재로서 대선 자금을 공개할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내역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힘으로써, YS대통령의 방침을 받아들였다. (YS 측근은 이로써 우리는 김영삼 대통령과 ‘동심일체’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야 대권을 위해 불가피하게 감수했을 일일지 모르지만, 이를 계기로 대중적 지지 기반이 크게 잠식당하고 만다.
이를 극적으로 확인한 것이 바로 그의 두 아들이 병역을 기피한 의혹이다. 삼김 처럼 ‘개인사’가 모두 폭로되고 언론에게서 표적이 된 적이 없던 정치신인에게서 여론을 자극할만한 약점을 찾는 것 쉬운 일이었다. YS와 신한국당의 부패․비리로 얼룩진 5년 역사를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미련한 짓을 한 마당에, 병역기피 의혹은 단지 기폭제였을 뿐이다. 이인제 탈당은 당연한 결과이다.<br>
<b>민주당의 위기와 노무현의 등장</b>
2001년 민주당은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진다. 2001년 10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총력을 기울였건만 대패하고 만 것이다.
2000년 총선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나 한국노총 상층 인사 등 ‘개혁’ 인사를 등용하여 ‘젊은 피 수혈론’으로 무장하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을 등에 업고 전국정당을 꿈꾸었으나, 민주당은 여전히 한나라당에 미치지 못하는 의석을 확보했을 뿐이다. 민주당은 당내 내분을 거듭했다. 민주당은 ‘지역주의’가 민주당의 당 세를 가로막았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지구당 위원장이 당을 이탈하여 당내 분란을 자극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심화로 지역주의가 또아리 틀고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기업 및 금융 부문 구조조정으로 수도권보다는 지방이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일부나마 반도체, 전자, 자동차 등 핵심 업종 일부가 경기 회복하였지만, 그나마 이들 산업이 없는 지역에서 불황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또한 지역 중소기업이 연쇄부도를 겪은 후, 이 공백을 수도권 대기업들이 메웠는데, 이 탓에 지역 공동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한편 대형 금융기관은 부실채권 매입, 자본 출자 등 공적자금을 지원 받아 정상화 길을 걸었으나, 지역 금융기관은 금융부문 구조조정으로 대부분 합병, 퇴출 했다. 이처럼 지역 기반 기업과 금융기관이 일시에 붕괴됨에 따라, 지역은 다시 경기침체의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또한 금융의 증권화, 주식투자 열풍로 개인자금이 ‘역외유출’하고, 다시 한번 수도권 중심으로 금융시장, IT산업이 팽창한다. 결국 수도권 ‘금융센터’를 제외한 외부 지역은 바닥을 향해 경쟁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역(易) 지역차별’이라는 정치 선동이 득세할 수 있는 토양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금융화에 따른 권력비리-금융비리로 민주당은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 구조조정의 결과 주식시장이 한창 팽항하던 2000년을 전후해 이런 비리 사건이 집중했다. 김대중 정권의 정국주도권이 약화되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YS 빼고 모두다 해먹었다”는 1997년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제 민주당은 당 지도부가 누구를 후보로 결정하든, 대중은 반발하고 당은 내분에 휩싸일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국민경선제와 노무현의 등장은 1996-97년 당시 이회창의 등장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경제위기와 함께 폭발한 집권당의 몰락, 즉 대통령의 권력 누수와 최측근 인사들의 권력비리 공개가 연일 터진다는 정치배경만 유사한 게 아니다. 경제위기는 반드시 정치위기를 동반한다. 이는 지배세력을 단결하기보다는 분열을 촉진할 뿐이다. 경제위기로 분출한 대중의 불만을 모면하고, 상쟁하는 다른 세력에게 책임 전가 하려고, 사생 결단한다. 이 과정에서 각각 정치세력은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물을 간판으로 내걸고, 이를 '개혁‘ 또는 ’혁신‘의 산 증거로 내세운다. 1997년에는 이회창이 2002년에는 노무현이 그 책무를 부여받았을 뿐이다.<br>
<b>노무현의 ‘노사통합’과 ‘지역통합’</b>
노무현이 말하는 ‘통합과 화합‘은 개인사에 불과한 몇몇 에피소드에 기댄 정치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는 크게 두 축으로 통합을 말한다. 하나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통합(노사 화합)이라면 또 하나는 지역통합(영호남 화합)이다. 그는 노사가 벌인 협상에서 성공한 사례를 들어 노사화합의 지도력을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노동자 대중이 더욱 불안정해지는 마당에 즉, 타협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지극히 취약한 상황에서 노사화합이란, 노동자 ’분할관리 체계‘의 구축능력 여부를 의미할 뿐이다. 이는 노무현 개인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주체적 노선에 따라 판가름날 문제다. 그래서 노무현 지지를 주장하는 세력은 분할관리체계를 인정하는 세력과 일치한다. 그래서 노무현의 노사중개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자들은 또한 노동운동이 노선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화합은 오늘날 경제위기와 금융화 국면이 낳은 지역적 불균형 속에서 신기루일 뿐이다. DJ 정권이 하지 못한 일을, 그가 영남권 후보라는 이유로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수도권을 중심으로 금융화의 수혜를 입은 일부 집단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지속할 수 있는 ’알리바이‘로 기능할 뿐이다. 정권교체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적자로 거듭난 민주당 대선 후보가, 자기 정책을 유지하면서 노사통합과 지역통합을 이룬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1997년 이회창의 위기는 크게 세번 빚어졌다. 첫째, 1996-97년 노동자총파업으로 드러난 것처럼, YS정권에 맞선 민중운동의 강력한 대응이다. 집권 초기에는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로, 중반에는 전두환-노태우 구속과 ‘역사바로세우기’로 YS정권은 정국 주도권을 강력히 유지했지만, 이는 민중을 억압할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둘째, 대권 가도를 위해 YS정권의 부패를 감싸안으면서까지 당내 지도력을 하면서다. 대선 후보 결정은 결국 당내 의사결정을 통해 판가름나고, 기존의 보스의 역할은 지대한 역할을 미친 게 과거의 역사고 또한 현재의 역사다. 이는 권력의 악순환만을 낳을 뿐이다. 셋째, 앞서 두 문제 덕에 발생한 것이다. 병역기피는 지배세력의 관행이었고, 그밖에 대중의 분노를 자극할 지배세력의 비리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여기에는 노무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 DJ정권이 직면한 위기는 노동자, 민중을 배제하고 그들의 요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DJ정권이 저지른 온갖 악행이 이제 곧 대선 후보가 될 노무현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그는 DJ정권 청산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어투는 ‘내역이 없어서 대선 자금을 공개할 수 없다’는 이회창의 어투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 이미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구 동교동계)에 승리하려고 당내 특정 세력과 정치적 제휴를 진척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1997년 당시 이회창과 동일한 길을 밟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직 대선 시기까지 시간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김대중 정권 경제적 억압, 정치적 탄압, 부정부패와 비리에 맞서, 대중이 벌일 투쟁이 관건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