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지금
시작하기 앞서
이제까지 본 노동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라 하면 모름지기 처절한 생존과 투쟁의 현장에서 솟아오르는 슬픔과 분노, 감격의 결정체와 같은 것이었다. 주인공들은 너나할 것없이 ‘이보다 더 잘 싸울 수 없는’ 전사들이며 그들과 함께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이보다 더 처절할 수 없는’ 척박한 곳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대가리 들이받고 싸우는 수밖에... 영화가 끝나갈 즈음 새삼스럽게 이를 악물어보고 주먹을 불끈 쥘 때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전해지곤 한다. 한마디로 매우 교과서적인 영화보기인 셈이다.
사실 <밥.꽃.양>을 기다리면서 누구든 그와 같은 감흥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양심적인 활동가들이라면 지난 민주노조 운동사에서 도려내고 싶은 기억을 또 한번 마주하기 위해 가슴에 칼자루라도 품고 싶은 비장한 심정이었을 테니...
그러나 영화는 그 이상이었다. 운동사회의 그늘진 한 구석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는 나와 내 조직의 상처를 아프도록 파헤쳐서 고름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직접 대면해보라고 요구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 어찌 ‘고문’이 아닐 수 있으랴.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강요된 희망의 그늘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권위와 편견, 소외와 배제의 상처를 마주하며 무어라 말을 건낼 수 있겠는가.
울산인권영화제 사전검열 사건을 비롯하여 운동사회의 많은 이들이 <밥.꽃.양>에 보였던 태도의 저변에는 무엇보다 해부대에 올라있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상상했을 때와 같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난 차라리 그 두려움 앞에 자신을 까발릴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에겐 격려의 인사라도 보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영화가 제공한 진중한 성찰의 기회를 회의와 냉소로 일축하거나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특정개인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 이들이야 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적이 아닐까.
질문 하나. ‘그’들과 ‘그녀’들의 노동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프롤로그. 시끌벅적한 야유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듯 한 식당 조합원 아주머니가 카메라를 마주하고 자신의 삶을 말한다. 피를 토하는 듯 비통한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너(남편)를 포기할 수는 있어도 내 밥줄은 포기 못해”
아주머니의 이 한마디와 이어지는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그녀의 노동’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아무도 그녀의 노동이 그녀 삶의 전부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소중한 남편과 가족도, 노동조합 지도부와 동지들마저도.
알지 못하는데 그치랴. ‘그’들은 ‘그녀’들의 노동을 자본의 희생양으로 떠밀어 넣고도 떳떳하기 그지없다. 아내로서 순종적인 성적 대상이 되어주기를, 식당아줌마로서 최고의 밥상을 차려주기를, 조합원으로서 남성 못지 않은 투사가 되어주기를, 마지막으로 여성노동자이기 때문에 남성노동자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에겐 너무 당연하기 때문일까? 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그 많은 잣대들이 서로 충돌하며 생기는 모순은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닌 그녀 스스로의 삶만을 파괴할 뿐이니 ‘너 하나의 희생’은 고결하다 못해 신성하단 말인가?
노동운동가의 이런 성적 편견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는 결국 민주노조운동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나는 그들의 편견이 너무나 무섭다. 물론 그 실체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사회가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운동의 과정에서 스스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수많은 자본의 이데올로기 사슬을 끊어낼지언정 여성노동에 대한 자본의 논리와 단절하지 못하는, 아니 애써 단절하지 않으려는 듯한 그들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을까?
그러면서 되돌리기 싫은 잘못을 포장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고.
질문 둘. 조합원과 지도부의 차이는 어떻게 생겨나고 또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영화 중반부에 들어서며 카메라는 줄곧 노동조합이라는 계급조직이자 대중조직에서, 그것도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한 남성중심의 대공장 노동조합에서 조합원과 지도부가 맺는 관계 사이를 해 짚고 다닌다.
관객들은 일상적인 투쟁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그 둘의 언어와 행동의 차이를 매우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어두운 운동장 조명아래 모이는 순간이면 오로지 한 목소리만을 낸다. 얼마 후 바로 그 자리에 모인 조합원에게 정리해고를 일부 수용하겠다는 지도부의 입장이 밝혀지자 그 둘은 마치 ‘우리가 이렇게 다른 줄은 몰랐다’는 듯 서로의 차이를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이제까지 결정적인 싸움의 순간에 드러나는 지도부와 조합원대중의 오묘한 입장 차이를 지켜봐 왔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조합원대중은 머리통 깨질 각오로 쇠파이프를 들자는 데 지도부는 조합원 손끝하나 다칠까 우려하며 물러선다. 영화에서처럼 조합원들은 각종 장비를 태우며 결의를 보여주자는 데 지도부는 절대 그것만은 손을 대지 말자고 호소한다. 그럴 때마다 지도부의 근거는 일관되다. “조합원을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98년 7월 현대자동차 투쟁은 결국 누구를 책임지기 위해서였나? 지도부는 정리해고를 일부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천명하였고, 조합원들은 이 소식을 다른 어떤 경로도 아닌 TV뉴스를 통해 접했다. 그 대가로, 지도부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자’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식당 여성조합원들은 더 이상 현대자동차의 노동자임을 포기해야 했다. 살아남은 조합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 패배의식은 그때부터 그들 속에 뿌리를 내려 조직의 기반을 좀먹기 시작했을 뿐이다.
조합원과 지도부가 겉보기에 강고한 하나의 대오를 유지해오는 사이, 그들이 그리는 각기 다른 미래는 좀처럼 드러나지도 좁혀지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노동조합 지도부는 쉽게 거대 권력이 되어버리고 조합원은 말없이 순종하는 앙상한 구조만 남고 말았다. 적들은 우리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 빈틈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파고들었는가? 지도부는 자신의 하위파트너로, 식당조합원들은 희생양으로, 남은 조합원들은 너른 들에 띄엄띄엄 서있는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는 저들의 힘에 모두는 순식간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깊은 상처를 씻기 위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현대자동차노조로 대변되는 지금의 노동조합들은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필연적으로 똑같은 상처를 입고 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노동조합 내에서조차 언로가 막혀있는 수많은 비정규, 중소영세,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감당해야 할 뼈아픈 댓가를 싸우기도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깨달아버리는 건 아닐까?
질문 셋. 신자유주의 공세와 연이은 패배,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3월 30일 <밥.꽃.양> 서울상영회가 열린 후 며칠 뒤 결정적인 국면으로 치닫고 있던 발전노조의 파업이 4․2 노정합의를 거치며 중단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모두는 패닉상태에 가까운 혼란에 빠졌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개량주의, 관료주의, 조합원대중과의 괴리, 교섭력의 부재, 적과의 야합 등등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난과 분노의 목소리들을 접하면서 나는 ⌈밥.꽃.양⌋을 함께 본 한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왜 항상 지도부는 자본의 논리에 한발을 담그고 있는 걸까요?” 내가 던진 질문에 선배는 대답했다. “그동안 싸움해서 계속 졌으니까. 패배의식 때문이지”
패배의 경험은 모든 투쟁의 시작단계에서 이미 결론을 제공하는 듯 하다. 그 결과 얻어진 패배의식은 불신의 꼬리를 물고 이 고리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여기서 문제는 매우 구체적인 정세의 문제이자 이를 역전하기 위해 싸워온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은 우연히도 <밥.꽃.양>이 담고 있는 98년 정리해고 투쟁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IMF 체제 하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몰아친 신자유주의 광풍은 노동자에게 가혹한 항복선언을 요구했고 98년 2월 노사정위 합의와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를 시작으로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는 작은 틈새로 물이 흘러 나가 듯 하나하나 권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98년 정리해고, 근로자 파견제 도입과 금융권 구조조정, 단계적으로 진행된 공기업 사유화, 2001년 복수노조 금지 5년 유예와 여성노동법 개악, 2002년의 철도,가스,발전 매각 추진, 그리고 초읽기에 들어간 근로기준법 개악까지...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처절하게 투쟁했던 노동자가 있었고, 조합원의 분노를 대변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던 지도부도 있었다.
그때마다 겪어야 했던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딛고 모두는 멈추지 않고 싸우려 애 썼지만 이미 경험한 패배는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저지투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나와 내 곁의 동지, 조합원과 지도부 사이의 믿음을 잠식해 왔다.
그리고 정말로 역사적인 반전을 시도할 수 있었고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던 지난 4월 총파업의 순간, 쌓여왔던 불신이 한순간에 폭발하고 만 것은 아닐까.
끝내기 앞서
정권 말기의 권력누수와 국민 대다수의 비판적 여론에도 지배세력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완성을 위해 근로기준법 개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처한 내부적 위기를 두고 ‘이 때만큼 호기가 없다’는 듯 노사정 야합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불안정 노동을 더욱 확산시키고 중소영세비정규여성노동자들을 압살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차이와 분열을 극대화하겠다는 자본의 의도가 여지없이 관철되려는 순간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위기는 너무도 거대한 장벽 같아 보인다. 4월 2일 이후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힘있는 투쟁을 결의하는 것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이젠 정말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만 팽배할 뿐, 다시 어떤 전망으로 어떤 투쟁으로 혁신적인 지도력을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모두가 받은 상처와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멀리 뒤를 평가하고 또 멀리 앞을 구상할 힘이 부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밥.꽃.양⌋이 던지고 있는 진지한 물음을 차분히 되짚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밥.꽃.양⌋은 스크린에 투영된 상흔의 기록으로 우리를 고문하였지만, 지금은 우리의 현실 그 자체가 민주노조운동을 고문하는 듯 하다. 여기서 한번 더 우리와 우리의 운동이 품고 있는 모순을 외면한 채 백기를 들고 말 것인가? 그러고 만다면 과연 다시 일어설 여력이 우리에게 남아있을까? PSSP
이제까지 본 노동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라 하면 모름지기 처절한 생존과 투쟁의 현장에서 솟아오르는 슬픔과 분노, 감격의 결정체와 같은 것이었다. 주인공들은 너나할 것없이 ‘이보다 더 잘 싸울 수 없는’ 전사들이며 그들과 함께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이보다 더 처절할 수 없는’ 척박한 곳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대가리 들이받고 싸우는 수밖에... 영화가 끝나갈 즈음 새삼스럽게 이를 악물어보고 주먹을 불끈 쥘 때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전해지곤 한다. 한마디로 매우 교과서적인 영화보기인 셈이다.
사실 <밥.꽃.양>을 기다리면서 누구든 그와 같은 감흥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양심적인 활동가들이라면 지난 민주노조 운동사에서 도려내고 싶은 기억을 또 한번 마주하기 위해 가슴에 칼자루라도 품고 싶은 비장한 심정이었을 테니...
그러나 영화는 그 이상이었다. 운동사회의 그늘진 한 구석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는 나와 내 조직의 상처를 아프도록 파헤쳐서 고름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직접 대면해보라고 요구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 어찌 ‘고문’이 아닐 수 있으랴.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강요된 희망의 그늘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권위와 편견, 소외와 배제의 상처를 마주하며 무어라 말을 건낼 수 있겠는가.
울산인권영화제 사전검열 사건을 비롯하여 운동사회의 많은 이들이 <밥.꽃.양>에 보였던 태도의 저변에는 무엇보다 해부대에 올라있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상상했을 때와 같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난 차라리 그 두려움 앞에 자신을 까발릴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에겐 격려의 인사라도 보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영화가 제공한 진중한 성찰의 기회를 회의와 냉소로 일축하거나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특정개인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 이들이야 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적이 아닐까.
질문 하나. ‘그’들과 ‘그녀’들의 노동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프롤로그. 시끌벅적한 야유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듯 한 식당 조합원 아주머니가 카메라를 마주하고 자신의 삶을 말한다. 피를 토하는 듯 비통한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너(남편)를 포기할 수는 있어도 내 밥줄은 포기 못해”
아주머니의 이 한마디와 이어지는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그녀의 노동’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아무도 그녀의 노동이 그녀 삶의 전부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소중한 남편과 가족도, 노동조합 지도부와 동지들마저도.
알지 못하는데 그치랴. ‘그’들은 ‘그녀’들의 노동을 자본의 희생양으로 떠밀어 넣고도 떳떳하기 그지없다. 아내로서 순종적인 성적 대상이 되어주기를, 식당아줌마로서 최고의 밥상을 차려주기를, 조합원으로서 남성 못지 않은 투사가 되어주기를, 마지막으로 여성노동자이기 때문에 남성노동자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에겐 너무 당연하기 때문일까? 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그 많은 잣대들이 서로 충돌하며 생기는 모순은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닌 그녀 스스로의 삶만을 파괴할 뿐이니 ‘너 하나의 희생’은 고결하다 못해 신성하단 말인가?
노동운동가의 이런 성적 편견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는 결국 민주노조운동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나는 그들의 편견이 너무나 무섭다. 물론 그 실체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사회가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운동의 과정에서 스스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수많은 자본의 이데올로기 사슬을 끊어낼지언정 여성노동에 대한 자본의 논리와 단절하지 못하는, 아니 애써 단절하지 않으려는 듯한 그들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을까?
그러면서 되돌리기 싫은 잘못을 포장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고.
질문 둘. 조합원과 지도부의 차이는 어떻게 생겨나고 또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영화 중반부에 들어서며 카메라는 줄곧 노동조합이라는 계급조직이자 대중조직에서, 그것도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한 남성중심의 대공장 노동조합에서 조합원과 지도부가 맺는 관계 사이를 해 짚고 다닌다.
관객들은 일상적인 투쟁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그 둘의 언어와 행동의 차이를 매우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어두운 운동장 조명아래 모이는 순간이면 오로지 한 목소리만을 낸다. 얼마 후 바로 그 자리에 모인 조합원에게 정리해고를 일부 수용하겠다는 지도부의 입장이 밝혀지자 그 둘은 마치 ‘우리가 이렇게 다른 줄은 몰랐다’는 듯 서로의 차이를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이제까지 결정적인 싸움의 순간에 드러나는 지도부와 조합원대중의 오묘한 입장 차이를 지켜봐 왔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조합원대중은 머리통 깨질 각오로 쇠파이프를 들자는 데 지도부는 조합원 손끝하나 다칠까 우려하며 물러선다. 영화에서처럼 조합원들은 각종 장비를 태우며 결의를 보여주자는 데 지도부는 절대 그것만은 손을 대지 말자고 호소한다. 그럴 때마다 지도부의 근거는 일관되다. “조합원을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98년 7월 현대자동차 투쟁은 결국 누구를 책임지기 위해서였나? 지도부는 정리해고를 일부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천명하였고, 조합원들은 이 소식을 다른 어떤 경로도 아닌 TV뉴스를 통해 접했다. 그 대가로, 지도부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자’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식당 여성조합원들은 더 이상 현대자동차의 노동자임을 포기해야 했다. 살아남은 조합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 패배의식은 그때부터 그들 속에 뿌리를 내려 조직의 기반을 좀먹기 시작했을 뿐이다.
조합원과 지도부가 겉보기에 강고한 하나의 대오를 유지해오는 사이, 그들이 그리는 각기 다른 미래는 좀처럼 드러나지도 좁혀지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노동조합 지도부는 쉽게 거대 권력이 되어버리고 조합원은 말없이 순종하는 앙상한 구조만 남고 말았다. 적들은 우리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 빈틈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파고들었는가? 지도부는 자신의 하위파트너로, 식당조합원들은 희생양으로, 남은 조합원들은 너른 들에 띄엄띄엄 서있는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는 저들의 힘에 모두는 순식간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깊은 상처를 씻기 위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현대자동차노조로 대변되는 지금의 노동조합들은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필연적으로 똑같은 상처를 입고 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노동조합 내에서조차 언로가 막혀있는 수많은 비정규, 중소영세,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감당해야 할 뼈아픈 댓가를 싸우기도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깨달아버리는 건 아닐까?
질문 셋. 신자유주의 공세와 연이은 패배,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3월 30일 <밥.꽃.양> 서울상영회가 열린 후 며칠 뒤 결정적인 국면으로 치닫고 있던 발전노조의 파업이 4․2 노정합의를 거치며 중단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모두는 패닉상태에 가까운 혼란에 빠졌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개량주의, 관료주의, 조합원대중과의 괴리, 교섭력의 부재, 적과의 야합 등등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난과 분노의 목소리들을 접하면서 나는 ⌈밥.꽃.양⌋을 함께 본 한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왜 항상 지도부는 자본의 논리에 한발을 담그고 있는 걸까요?” 내가 던진 질문에 선배는 대답했다. “그동안 싸움해서 계속 졌으니까. 패배의식 때문이지”
패배의 경험은 모든 투쟁의 시작단계에서 이미 결론을 제공하는 듯 하다. 그 결과 얻어진 패배의식은 불신의 꼬리를 물고 이 고리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여기서 문제는 매우 구체적인 정세의 문제이자 이를 역전하기 위해 싸워온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은 우연히도 <밥.꽃.양>이 담고 있는 98년 정리해고 투쟁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IMF 체제 하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몰아친 신자유주의 광풍은 노동자에게 가혹한 항복선언을 요구했고 98년 2월 노사정위 합의와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를 시작으로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는 작은 틈새로 물이 흘러 나가 듯 하나하나 권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98년 정리해고, 근로자 파견제 도입과 금융권 구조조정, 단계적으로 진행된 공기업 사유화, 2001년 복수노조 금지 5년 유예와 여성노동법 개악, 2002년의 철도,가스,발전 매각 추진, 그리고 초읽기에 들어간 근로기준법 개악까지...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처절하게 투쟁했던 노동자가 있었고, 조합원의 분노를 대변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던 지도부도 있었다.
그때마다 겪어야 했던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딛고 모두는 멈추지 않고 싸우려 애 썼지만 이미 경험한 패배는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저지투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나와 내 곁의 동지, 조합원과 지도부 사이의 믿음을 잠식해 왔다.
그리고 정말로 역사적인 반전을 시도할 수 있었고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던 지난 4월 총파업의 순간, 쌓여왔던 불신이 한순간에 폭발하고 만 것은 아닐까.
끝내기 앞서
정권 말기의 권력누수와 국민 대다수의 비판적 여론에도 지배세력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완성을 위해 근로기준법 개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처한 내부적 위기를 두고 ‘이 때만큼 호기가 없다’는 듯 노사정 야합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불안정 노동을 더욱 확산시키고 중소영세비정규여성노동자들을 압살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차이와 분열을 극대화하겠다는 자본의 의도가 여지없이 관철되려는 순간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위기는 너무도 거대한 장벽 같아 보인다. 4월 2일 이후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힘있는 투쟁을 결의하는 것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이젠 정말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만 팽배할 뿐, 다시 어떤 전망으로 어떤 투쟁으로 혁신적인 지도력을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모두가 받은 상처와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멀리 뒤를 평가하고 또 멀리 앞을 구상할 힘이 부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밥.꽃.양⌋이 던지고 있는 진지한 물음을 차분히 되짚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밥.꽃.양⌋은 스크린에 투영된 상흔의 기록으로 우리를 고문하였지만, 지금은 우리의 현실 그 자체가 민주노조운동을 고문하는 듯 하다. 여기서 한번 더 우리와 우리의 운동이 품고 있는 모순을 외면한 채 백기를 들고 말 것인가? 그러고 만다면 과연 다시 일어설 여력이 우리에게 남아있을까?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