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6.26호
누가 빨갱이를 모함했는가?
1963년 대통령선거와 '사상논쟁'
1945년 여름~1946년 겨울, 박정희와 해방정국
1945년 8월 15일 박정희는 모택동 휘하의 팔로군 토벌을 주임무로 하는 만주군 보병 제8단 단장 부관의 신분이었다. 산악지대가 주작전지역이었던 부대의 사정 때문에 소련군의 참전소식도, 천황의 항복방송도 듣지 못했던 그가 종전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17일이었다.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박정희는 만주군의 한인 동료 세 명과 함께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임시정부요인들이 미군정과 지리한 협상 끝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됨에 따라 박정희도 1946년 5월 귀국하였다. 고향 선산으로 돌아온 박정희는 집에 처박혀 하릴 없이 지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고향을 떠난 지 6년여, 이미 서른 살이 되어버린 그가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며칠에 한 번 씩 대구로 나가 사범학교 시절, 교사 시절의 친구들이나 만나며 몇 달을 보내던 박정희는 그 해 9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열흘쯤 뒤, 그의 고향집에는 사관학교에 입교했다는 박정희의 편지가 날라들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제2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1946년 12월 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만주군, 일본군, 광복군에 이어 몸담게 된 네 번째 군대였다. 그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1946년 가을은 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하고 미군정과 대립 각을 분명히 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9월 총파업, 10월 대구인민항쟁, 남조선노동당 결성으로 숨가쁘게 전개되던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정희의 신변에도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구미지역 좌익세력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의 친형 박상희가 10월 항쟁의 와중에 피살당한 것이다. 박정희는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형이 피살된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고향에 내려오기도 하였다. 2년 뒤 그는 군사법정에서 이 사실을 추궁 당하게 된다.
1948년 가을~1950년 여름, 반란과 배신
1948년 10월 제주도 4.3항쟁 진압에 투입되기 위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군내 남로당 조직책들이 주동이 된 이 반란은 곧 인근의 순천으로 번져갔고, 1주일 동안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대규모 군란으로 전개되었다. 여순지구에는 곧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토벌군이 투입되었다. 여순반란은 남로당 수뇌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14연대 내 세포조직의 독자 행동으로 밝혀졌지만, 육군 수뇌부는 군 내부에 상당한 정도의 남로당 조직이 구축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 대대적인 숙군을 시작하였다. 숙군은 한 사람이 체포되면 그를 고문해서 누군가를 찍게 하고, 다시 그 사람을 체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해 11월 육사 중대장으로 근무 중이던 박정희가 체포되었다. 조직표 상의 그의 지위는 남로당 군총책 혹은 군사부장이었다. 체포당한 후 박정희는 형 박상희의 유족을 보살펴준 이재복(전 경북 인민위원회 보안부장,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에게 포섭되어 남로당에 입당했다고 자술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명단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 중에는 그가 교관 또는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포섭했던 육사 내의 세포조직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직의 명단을 자백하고 “거세당한 환관”(당시 박정희 수사담당자,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의 저자 김점곤의 증언)이 된 박정희는 그 해 연말 석방되었다. 수사가 마무리된 1949년 5월에는 군에서 ‘파면’당하고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과에 배속되었다. 목숨은 건졌으나 ‘좌익전력자’ 라는 주홍글씨는 남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1950년 7월 박정희는 피난지 대전에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인사조치였다.
1963년 가을, 빨갱이게임
5.16쿠데타가 일어난지도 어느덧 2년여가 흘렀다. 그 동안 쿠데타 주도세력은 ‘민정불참’과 ‘군정연장’ 사이에서 수차례나 입장을 번복했지만, 결국 1963년 7월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대통령선거에 자신들도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박정희는 “이 땅에 다시는 자신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와서는 안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역, 민주공화당 총재에 취임하면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야당 쪽에서는 4.19 직후 과도정부 수반이었던 ‘국민의 당’의 허정과 민주당정부의 대통령이었던 민정당의 윤보선이 후보단일화에 실패, 각각 입후보하였다. 그밖에 군정 초기 내각수반으로 한 때 쿠데타세력의 얼굴 역할을 했던 송요찬도 옥중 출마를 선언하였다. 당시 그는 1963년 8월 박정희에게 군인의 정치 참여 불가 ‘공개장’을 보낸 직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구속 수감되어 있는 상태였다.
선거전이 한참 달아오른 1963년 9월 23일 박정희는 라디오 유세를 통해 ‘사상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번 선거가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사상과의 대결”이라고 하면서, ‘민족적/비민족적’이라는 키워드를 쟁점화하였다. 이에 대해 윤보선은 “다른 것은 몰라도 사상적으로 나를 몰아대는데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격분하면서, 다음날 전주 유세에서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와 이질적 민주주의의 대결이다. 누가 민족주의자이며 누가 비민족주의자라는 것과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며 누가 아니라는 것은 각자의 역사를 캐보면 안다”고 박정희를 공격하였다. 역사를 캐보면 안다. 이 말은 명백히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박정희씨에게 묻는다.>는 제하로 ‘간첩’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를 추궁하는 ‘괴유인물’이 뿌려졌고, 9월 27일에는 허정 후보가 특별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공화당의 사전조직을 폭로하면서 “공화당의 특수교육은 민주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며 조직수법도 민주정당의 상례에 없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간첩 황모사건을 석연히 밝히기를 요구한다”고 박정희 공격에 가세하였다. 허정의 발언은 정치인에 의해 처음으로 황태성 사건이 공개 거론된 것이었다.
다음날 허정은 청주 유세에서 재차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 문제를 제기하였다. 민정당에서도 10월 4일 신문광고를 통해 “박정희 장군은 제1군 참모장을 역임했으나, 그 기간 동안 남로당의 군사부장를 지냈고 여순반란사건을 계획하여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의 친구인 소장장교들의 감형운동이 주효하여 군에 복귀할 수 있었으나 이 때 그의 자백과 증언으로 수천 명의 공산당원들이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다”는 주장을 담은 공개질의서를 발표하였다. 다음날 서울 남산 유세에서 윤보선은 “박의장의 사상을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에집트의 낫셀을 찬양했고 힛틀러도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군정기간 중 박정희의 이름으로 발간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책에 수록된 내용) 다음에 나올 박정희의 책에는 필연코 레닌, 스탈린, 모택동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찬양할 것을 우리는 예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공산당이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과 박정희씨의 소위 강력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와는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했고, 10월 9일 안동 유세에서는 “간첩 황태성이 2십만 달러를 가지고 왔으며 그 돈을 가지고 김종필은 조선호텔에 그를 모셔놓고 공산당식으로 밀봉 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 가면서 점선식 조직으로 공화당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공화당이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이 나라의 민주정당이 될 수 있겠으며 우리 당과 같은 정당이 될 수가 있겠는가” 라고 공격을 거듭하였다.
9월말부터 집중 제기되기 시작한 자신에 대한 ‘사상공세’에 대해 침묵을 지켜오던 박정희는 10월 5일 신문광고를 통해 “야당의 행동은 매카시적 수법”이라고 하면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의 주장은 “첫째, 지금 3권을 쥐고 있는 최고회의 의장을 빨갱이로 모는 구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앞으로 우리 나라에는 그들에게 밉게 보이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갱이로 몰리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둘째, 만일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면 군정 치하 2년여 서릿발 같은 권세를 갖고 왜 김일성과 야합하지 않았겠는가? 셋째, 싸우다 힘이 부족하면 빨갱이라는 모략을 하는 것이 바로 야당이다. 과거에 한민당이 이 따위 수법을 썼는데 오늘도 야당은 이와 똑같은 수법을 쓰고 있다.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면 과거에는 여당이 야당을 잡았는데 지금은 야당이 여당을 잡으려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세 가지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야당이었다. 박정희는 10월 8일 마산 유세에서 “당시 여순지구에 주둔한 국군은 14연대이고 나는 육사 생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으므로, 여순군란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신상해명발언까지 했고, 그 이틀 뒤에는 “황태성이 나의 친형과 친구관계인 것은 맞으나, 그 외 나와 황의 관계에 대한 여러 소문들은 모두 허위사실이다”라고 밝히는 등, 수세적으로 대응하였다.
사상논쟁은 여야의 치열함에 비해 민간에서는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기실 9월말 한 때 야당의 공세에 대해 박정희가 침묵을 지킨 것도 “윤보선의 사상공세가 별다른 감표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화당의 자체 분석 때문이었다. 언론에서도 “현하 이른바 사상논쟁은 정책 대결에서 백보 천보 후퇴한 것”이며 “사상의 대결이 아니라 감정의 대결”이라고 하면서, “박의장은 간첩 문제로 의혹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 매카시즘적 수법이라고만 해두지 말고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밝혀주어야 할 줄로 안다. 공격하는 야측에서도 ‘소스’를 충분히 밝혀서 국민들에게 공격을 위한 공격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해주었으면 한다”고 하는 등, 양비론적 시각을 견지하였다. 또 정치학자 신상초는 “윤씨는 박씨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니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식의 논을 폈고, 또 박씨는 윤씨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니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식의 논을 폈다. 그러나 깊이 검토하면 이 이상 더 정치이론상 무식을 폭로한 논쟁은 없다. 민족주의는 국제정치상 어떤 사회체제와도 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정치학의 초보부터 다시 공부하라”고 하여, 여야의 논쟁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무엇이 사상논쟁이냐?> <<사상계>> 1963년 11월호)
이러한 내외의 싸늘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선거전의 막바지, 투표 이틀 전인 10월 13일 민정당은 “이른바 사상논쟁을 매듭짓기 위해 ‘여수순천반란사건조사자료’를 공개함으로써 박정희가 1949년 2월 13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음을 폭로”하였다. 마지막 공세였다. 이에 대해 공화당은 이 폭로가 “악랄한 인신공격으로서 최후의 순간에서 공화당에 해명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이목을 현혹시키려는 것”이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하였다.
선거 결과 박정희는 총득표 4,7,02,642표, 42.6%의 득표율로 총득표 4,546,614표, 41.2%의 득표율을 올린 윤보선에 15만여 표, 불과 1.4% 차의 신승을 거두었다. 표의 뚜렷한 남북현상 속에서 윤보선은 서울, 경기, 강원, 충남, 충북에서 1위, 특히 서울, 경기에서는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압승을 했지만, 영호남을 동시에 석권한 박정희에게 간발의 차로 뒤졌던 것이다. 자금과 조직면에서 압도적이었던 여당에 비해 선거 직전까지도 통합을 이루지 못했으며, 별다른 정책적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던 야당이 이만큼 선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말대로 “패배라는 이름의 위대한 승리”였을지 모른다. 과연 어떠한 힘이 지리멸렬한 야당을 이만큼 끌어올렸으며, 또 어떠한 힘이 결국 박정희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을까?
기실 선거전 초반 야당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군정 2년간 노정된 실정들 -엄청난 고물가, 고리채 정리 실패, 4대 의혹사건- 과 박정희의 신뢰도 저하 -민정 이양 문제를 둘러싼 말바꾸기- 등을 제대로 호재로 이용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열세를 만회한 것은 사상논쟁이었다. 되도록 대중 앞에서 연설하기를 꺼려했던 박정희에 대해 윤보선은 대규모 대중유세를 통해 예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인 박정희의 전력 문제를 공개화함으로써 초반 판세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같이 사상논쟁을 주도했던 허정이 윤보선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를 사퇴한 것도 윤보선에게는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렇게 사상논쟁은 쟁점 없이 -없었다기 보다 정책적 쟁점을 제기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버린- 진행되던 선거전에 불을 붙히는데 주효했지만, 부메랑처럼 돌아와 야당의 목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야당에서는 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박정희는 선거기간 중 제기된 사상논쟁이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은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사상공세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참모들에게 야당의 주장이 담긴 기사가 크게 보도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조갑제, 1992 <<불만과 불운의 세월 : 1917~1960>>) 선거직후 많은 논자들은 사상논쟁이 결과적으로 박정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하였다. 언론에서는 “사상논쟁으로 다른 입후보자를 너무 비방했기 때문에 반사작용을 일으킨 것이 야당의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평가했으며, 한 정치평론가는 “정권을 쥐고 있는 자가 빨갱이로 몰려 약자로 보이고 야당이 강자로 비치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선거 광경” 속에서 “공산당을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지만 그 대신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으로 모는 것처럼 비열하고 악랄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여당의 입으로 ‘한민당적 수법’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그것은 정말 실감을 갖고 다가왔다”고 지적하였다.(최석채 <대통령선거전의 분석> <<사상계>> 1963년 11월호) 뒤늦게 야당에서도 “(박정희 지지도가 높은) 대구와 부산에는 빨갱이가 많다”고 한 한 유세원의 발언은 “2~3십만 표를 떨어뜨린 치명적인 것”이었다고 자평하였다.
후일에도 이러한 평가는 계속되었다. 선거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그의 회고록에서 “사상논쟁이 야당 붐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좌익세력의 분포가 많다고 분석되는 지역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한 지지가 ‘깜짝 놀랄 만큼’ 상승하고 있었으며” 결국 “박정희의 당선은 그 좌익표의 지지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김형욱․박사월, 1985 <<김형욱회고록>>) 1956년과 63년 대선의 투표성향을 비교한 연구에서 “사상논쟁을 매개로 박정희를 지지한 그의 득표가 해방정국의 진보세력, 56년 선거의 조봉암 지지세력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분석한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손호철, 1995 <1956년과 63년 대선 : 조봉암, 박정희의 득표는 잔존좌익의 지지였나?>)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확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식민지기, 해방정국을 통해 공산주의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남부지역 -영호남을 합하여- 에서 박정희의 지지도가 높았음은 이른바 좌익성향의 유권자와 박정희의 득표 사이의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에 대한 심증을 더해준다. 물론 이것은 심증일 뿐이다. 정말 사상논쟁은 이른바 좌익표의 결집을 가져온 것인가? 그리하여 박정희는 좌익표 덕분에 당선된 것인가?
에필로그
2002년 또 다시 대선 레이스는 시작되었다. 더불어 수십년째 되풀이 된 ‘빨갱이게임’도 재개된 듯 하다. 얼마 전 그 예선전격인 여당의 후보경선에서 1위를 따논당상으로 생각했다가 밀리게 된 한 후보는 1위가 유력해진 다른 후보를 향해 사상공세를 퍼부었다. 그 후보의 과거발언들을 꼬치꼬치 거론하면서 빨갱이라는 혐의를 제기하였다. 나아가 그 후보의 장인이 과거 좌익활동을 했다는 문제도 들추어냈다. 여기에 지금은 대단히 흐지부지해진 어느 당의 대표도 이 기회를 틈 타 주가를 올리려고 가세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의 대표는 바로 장인이 좌익활동을 하다 피살당한 사람이며, 그 점이 주요하게 빌미가 되어 1960년대 내내 미국으로부터 좌익혐의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 진흙탕 같은 언쟁에 야당이 뛰어들었음은 물론이다. 집요하게 여당 후보유력자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여당에서는 공격을 주도하는 야당의 한 인사의 과거 경력(남민전)을 들어 역공을 가하였다. 수년 전 민중정당 활동을 하다 지금은 야당(물론 그가 입당했을 때는 여당이었던)의 간부가 된 그 인사는 “민주화운동과 좌익활동도 구별하지 못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가는 사이, 어느새 사상공세의 표적이었던 여당의 후보는 ‘좌익’이 되어 버렸다. 이 후보가 좌익이 아니라는, 따라서 사실은 여야 후보간의 차이보다는 두 후보와 우리의 차이가 훨씬 더 크다는 진보정당의 목소리, 상대적으로 가장 사실 그대로를 투명하게 비추어 주는 목소리는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 악무한한 ‘빨갱이게임’에서 대중의 판단력을 구출할 수 없는 것일까? 다시 되묻고싶다. 누가 정말 빨갱이인가? 누가 빨갱이를 모함했는가?PSSP
※ 전거를 밝히지 않은 인용문은 모두 <<동아일보>> 1963년 9~10월 분에서 인용한 것임.
1945년 8월 15일 박정희는 모택동 휘하의 팔로군 토벌을 주임무로 하는 만주군 보병 제8단 단장 부관의 신분이었다. 산악지대가 주작전지역이었던 부대의 사정 때문에 소련군의 참전소식도, 천황의 항복방송도 듣지 못했던 그가 종전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17일이었다.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박정희는 만주군의 한인 동료 세 명과 함께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임시정부요인들이 미군정과 지리한 협상 끝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됨에 따라 박정희도 1946년 5월 귀국하였다. 고향 선산으로 돌아온 박정희는 집에 처박혀 하릴 없이 지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고향을 떠난 지 6년여, 이미 서른 살이 되어버린 그가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며칠에 한 번 씩 대구로 나가 사범학교 시절, 교사 시절의 친구들이나 만나며 몇 달을 보내던 박정희는 그 해 9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열흘쯤 뒤, 그의 고향집에는 사관학교에 입교했다는 박정희의 편지가 날라들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제2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1946년 12월 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만주군, 일본군, 광복군에 이어 몸담게 된 네 번째 군대였다. 그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1946년 가을은 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하고 미군정과 대립 각을 분명히 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9월 총파업, 10월 대구인민항쟁, 남조선노동당 결성으로 숨가쁘게 전개되던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정희의 신변에도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구미지역 좌익세력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의 친형 박상희가 10월 항쟁의 와중에 피살당한 것이다. 박정희는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형이 피살된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고향에 내려오기도 하였다. 2년 뒤 그는 군사법정에서 이 사실을 추궁 당하게 된다.
1948년 가을~1950년 여름, 반란과 배신
1948년 10월 제주도 4.3항쟁 진압에 투입되기 위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군내 남로당 조직책들이 주동이 된 이 반란은 곧 인근의 순천으로 번져갔고, 1주일 동안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대규모 군란으로 전개되었다. 여순지구에는 곧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토벌군이 투입되었다. 여순반란은 남로당 수뇌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14연대 내 세포조직의 독자 행동으로 밝혀졌지만, 육군 수뇌부는 군 내부에 상당한 정도의 남로당 조직이 구축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 대대적인 숙군을 시작하였다. 숙군은 한 사람이 체포되면 그를 고문해서 누군가를 찍게 하고, 다시 그 사람을 체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해 11월 육사 중대장으로 근무 중이던 박정희가 체포되었다. 조직표 상의 그의 지위는 남로당 군총책 혹은 군사부장이었다. 체포당한 후 박정희는 형 박상희의 유족을 보살펴준 이재복(전 경북 인민위원회 보안부장,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에게 포섭되어 남로당에 입당했다고 자술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명단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 중에는 그가 교관 또는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포섭했던 육사 내의 세포조직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직의 명단을 자백하고 “거세당한 환관”(당시 박정희 수사담당자,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의 저자 김점곤의 증언)이 된 박정희는 그 해 연말 석방되었다. 수사가 마무리된 1949년 5월에는 군에서 ‘파면’당하고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과에 배속되었다. 목숨은 건졌으나 ‘좌익전력자’ 라는 주홍글씨는 남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1950년 7월 박정희는 피난지 대전에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인사조치였다.
1963년 가을, 빨갱이게임
5.16쿠데타가 일어난지도 어느덧 2년여가 흘렀다. 그 동안 쿠데타 주도세력은 ‘민정불참’과 ‘군정연장’ 사이에서 수차례나 입장을 번복했지만, 결국 1963년 7월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대통령선거에 자신들도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박정희는 “이 땅에 다시는 자신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와서는 안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역, 민주공화당 총재에 취임하면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야당 쪽에서는 4.19 직후 과도정부 수반이었던 ‘국민의 당’의 허정과 민주당정부의 대통령이었던 민정당의 윤보선이 후보단일화에 실패, 각각 입후보하였다. 그밖에 군정 초기 내각수반으로 한 때 쿠데타세력의 얼굴 역할을 했던 송요찬도 옥중 출마를 선언하였다. 당시 그는 1963년 8월 박정희에게 군인의 정치 참여 불가 ‘공개장’을 보낸 직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구속 수감되어 있는 상태였다.
선거전이 한참 달아오른 1963년 9월 23일 박정희는 라디오 유세를 통해 ‘사상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번 선거가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사상과의 대결”이라고 하면서, ‘민족적/비민족적’이라는 키워드를 쟁점화하였다. 이에 대해 윤보선은 “다른 것은 몰라도 사상적으로 나를 몰아대는데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격분하면서, 다음날 전주 유세에서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와 이질적 민주주의의 대결이다. 누가 민족주의자이며 누가 비민족주의자라는 것과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며 누가 아니라는 것은 각자의 역사를 캐보면 안다”고 박정희를 공격하였다. 역사를 캐보면 안다. 이 말은 명백히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박정희씨에게 묻는다.>는 제하로 ‘간첩’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를 추궁하는 ‘괴유인물’이 뿌려졌고, 9월 27일에는 허정 후보가 특별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공화당의 사전조직을 폭로하면서 “공화당의 특수교육은 민주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며 조직수법도 민주정당의 상례에 없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간첩 황모사건을 석연히 밝히기를 요구한다”고 박정희 공격에 가세하였다. 허정의 발언은 정치인에 의해 처음으로 황태성 사건이 공개 거론된 것이었다.
다음날 허정은 청주 유세에서 재차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 문제를 제기하였다. 민정당에서도 10월 4일 신문광고를 통해 “박정희 장군은 제1군 참모장을 역임했으나, 그 기간 동안 남로당의 군사부장를 지냈고 여순반란사건을 계획하여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의 친구인 소장장교들의 감형운동이 주효하여 군에 복귀할 수 있었으나 이 때 그의 자백과 증언으로 수천 명의 공산당원들이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다”는 주장을 담은 공개질의서를 발표하였다. 다음날 서울 남산 유세에서 윤보선은 “박의장의 사상을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에집트의 낫셀을 찬양했고 힛틀러도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군정기간 중 박정희의 이름으로 발간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책에 수록된 내용) 다음에 나올 박정희의 책에는 필연코 레닌, 스탈린, 모택동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찬양할 것을 우리는 예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공산당이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과 박정희씨의 소위 강력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와는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했고, 10월 9일 안동 유세에서는 “간첩 황태성이 2십만 달러를 가지고 왔으며 그 돈을 가지고 김종필은 조선호텔에 그를 모셔놓고 공산당식으로 밀봉 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 가면서 점선식 조직으로 공화당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공화당이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이 나라의 민주정당이 될 수 있겠으며 우리 당과 같은 정당이 될 수가 있겠는가” 라고 공격을 거듭하였다.
9월말부터 집중 제기되기 시작한 자신에 대한 ‘사상공세’에 대해 침묵을 지켜오던 박정희는 10월 5일 신문광고를 통해 “야당의 행동은 매카시적 수법”이라고 하면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의 주장은 “첫째, 지금 3권을 쥐고 있는 최고회의 의장을 빨갱이로 모는 구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앞으로 우리 나라에는 그들에게 밉게 보이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갱이로 몰리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둘째, 만일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면 군정 치하 2년여 서릿발 같은 권세를 갖고 왜 김일성과 야합하지 않았겠는가? 셋째, 싸우다 힘이 부족하면 빨갱이라는 모략을 하는 것이 바로 야당이다. 과거에 한민당이 이 따위 수법을 썼는데 오늘도 야당은 이와 똑같은 수법을 쓰고 있다.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면 과거에는 여당이 야당을 잡았는데 지금은 야당이 여당을 잡으려 뒤집어씌우고 있다”는 세 가지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격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야당이었다. 박정희는 10월 8일 마산 유세에서 “당시 여순지구에 주둔한 국군은 14연대이고 나는 육사 생도대장으로 복무 중이었으므로, 여순군란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신상해명발언까지 했고, 그 이틀 뒤에는 “황태성이 나의 친형과 친구관계인 것은 맞으나, 그 외 나와 황의 관계에 대한 여러 소문들은 모두 허위사실이다”라고 밝히는 등, 수세적으로 대응하였다.
사상논쟁은 여야의 치열함에 비해 민간에서는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기실 9월말 한 때 야당의 공세에 대해 박정희가 침묵을 지킨 것도 “윤보선의 사상공세가 별다른 감표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화당의 자체 분석 때문이었다. 언론에서도 “현하 이른바 사상논쟁은 정책 대결에서 백보 천보 후퇴한 것”이며 “사상의 대결이 아니라 감정의 대결”이라고 하면서, “박의장은 간첩 문제로 의혹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 매카시즘적 수법이라고만 해두지 말고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밝혀주어야 할 줄로 안다. 공격하는 야측에서도 ‘소스’를 충분히 밝혀서 국민들에게 공격을 위한 공격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해주었으면 한다”고 하는 등, 양비론적 시각을 견지하였다. 또 정치학자 신상초는 “윤씨는 박씨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니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식의 논을 폈고, 또 박씨는 윤씨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니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식의 논을 폈다. 그러나 깊이 검토하면 이 이상 더 정치이론상 무식을 폭로한 논쟁은 없다. 민족주의는 국제정치상 어떤 사회체제와도 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정치학의 초보부터 다시 공부하라”고 하여, 여야의 논쟁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무엇이 사상논쟁이냐?> <<사상계>> 1963년 11월호)
이러한 내외의 싸늘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선거전의 막바지, 투표 이틀 전인 10월 13일 민정당은 “이른바 사상논쟁을 매듭짓기 위해 ‘여수순천반란사건조사자료’를 공개함으로써 박정희가 1949년 2월 13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음을 폭로”하였다. 마지막 공세였다. 이에 대해 공화당은 이 폭로가 “악랄한 인신공격으로서 최후의 순간에서 공화당에 해명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이목을 현혹시키려는 것”이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하였다.
선거 결과 박정희는 총득표 4,7,02,642표, 42.6%의 득표율로 총득표 4,546,614표, 41.2%의 득표율을 올린 윤보선에 15만여 표, 불과 1.4% 차의 신승을 거두었다. 표의 뚜렷한 남북현상 속에서 윤보선은 서울, 경기, 강원, 충남, 충북에서 1위, 특히 서울, 경기에서는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압승을 했지만, 영호남을 동시에 석권한 박정희에게 간발의 차로 뒤졌던 것이다. 자금과 조직면에서 압도적이었던 여당에 비해 선거 직전까지도 통합을 이루지 못했으며, 별다른 정책적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던 야당이 이만큼 선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말대로 “패배라는 이름의 위대한 승리”였을지 모른다. 과연 어떠한 힘이 지리멸렬한 야당을 이만큼 끌어올렸으며, 또 어떠한 힘이 결국 박정희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을까?
기실 선거전 초반 야당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군정 2년간 노정된 실정들 -엄청난 고물가, 고리채 정리 실패, 4대 의혹사건- 과 박정희의 신뢰도 저하 -민정 이양 문제를 둘러싼 말바꾸기- 등을 제대로 호재로 이용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열세를 만회한 것은 사상논쟁이었다. 되도록 대중 앞에서 연설하기를 꺼려했던 박정희에 대해 윤보선은 대규모 대중유세를 통해 예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인 박정희의 전력 문제를 공개화함으로써 초반 판세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같이 사상논쟁을 주도했던 허정이 윤보선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를 사퇴한 것도 윤보선에게는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렇게 사상논쟁은 쟁점 없이 -없었다기 보다 정책적 쟁점을 제기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버린- 진행되던 선거전에 불을 붙히는데 주효했지만, 부메랑처럼 돌아와 야당의 목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야당에서는 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박정희는 선거기간 중 제기된 사상논쟁이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은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사상공세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참모들에게 야당의 주장이 담긴 기사가 크게 보도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조갑제, 1992 <<불만과 불운의 세월 : 1917~1960>>) 선거직후 많은 논자들은 사상논쟁이 결과적으로 박정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하였다. 언론에서는 “사상논쟁으로 다른 입후보자를 너무 비방했기 때문에 반사작용을 일으킨 것이 야당의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평가했으며, 한 정치평론가는 “정권을 쥐고 있는 자가 빨갱이로 몰려 약자로 보이고 야당이 강자로 비치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선거 광경” 속에서 “공산당을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지만 그 대신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으로 모는 것처럼 비열하고 악랄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여당의 입으로 ‘한민당적 수법’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그것은 정말 실감을 갖고 다가왔다”고 지적하였다.(최석채 <대통령선거전의 분석> <<사상계>> 1963년 11월호) 뒤늦게 야당에서도 “(박정희 지지도가 높은) 대구와 부산에는 빨갱이가 많다”고 한 한 유세원의 발언은 “2~3십만 표를 떨어뜨린 치명적인 것”이었다고 자평하였다.
후일에도 이러한 평가는 계속되었다. 선거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그의 회고록에서 “사상논쟁이 야당 붐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좌익세력의 분포가 많다고 분석되는 지역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한 지지가 ‘깜짝 놀랄 만큼’ 상승하고 있었으며” 결국 “박정희의 당선은 그 좌익표의 지지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김형욱․박사월, 1985 <<김형욱회고록>>) 1956년과 63년 대선의 투표성향을 비교한 연구에서 “사상논쟁을 매개로 박정희를 지지한 그의 득표가 해방정국의 진보세력, 56년 선거의 조봉암 지지세력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분석한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손호철, 1995 <1956년과 63년 대선 : 조봉암, 박정희의 득표는 잔존좌익의 지지였나?>)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확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식민지기, 해방정국을 통해 공산주의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남부지역 -영호남을 합하여- 에서 박정희의 지지도가 높았음은 이른바 좌익성향의 유권자와 박정희의 득표 사이의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에 대한 심증을 더해준다. 물론 이것은 심증일 뿐이다. 정말 사상논쟁은 이른바 좌익표의 결집을 가져온 것인가? 그리하여 박정희는 좌익표 덕분에 당선된 것인가?
에필로그
2002년 또 다시 대선 레이스는 시작되었다. 더불어 수십년째 되풀이 된 ‘빨갱이게임’도 재개된 듯 하다. 얼마 전 그 예선전격인 여당의 후보경선에서 1위를 따논당상으로 생각했다가 밀리게 된 한 후보는 1위가 유력해진 다른 후보를 향해 사상공세를 퍼부었다. 그 후보의 과거발언들을 꼬치꼬치 거론하면서 빨갱이라는 혐의를 제기하였다. 나아가 그 후보의 장인이 과거 좌익활동을 했다는 문제도 들추어냈다. 여기에 지금은 대단히 흐지부지해진 어느 당의 대표도 이 기회를 틈 타 주가를 올리려고 가세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의 대표는 바로 장인이 좌익활동을 하다 피살당한 사람이며, 그 점이 주요하게 빌미가 되어 1960년대 내내 미국으로부터 좌익혐의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 진흙탕 같은 언쟁에 야당이 뛰어들었음은 물론이다. 집요하게 여당 후보유력자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여당에서는 공격을 주도하는 야당의 한 인사의 과거 경력(남민전)을 들어 역공을 가하였다. 수년 전 민중정당 활동을 하다 지금은 야당(물론 그가 입당했을 때는 여당이었던)의 간부가 된 그 인사는 “민주화운동과 좌익활동도 구별하지 못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가는 사이, 어느새 사상공세의 표적이었던 여당의 후보는 ‘좌익’이 되어 버렸다. 이 후보가 좌익이 아니라는, 따라서 사실은 여야 후보간의 차이보다는 두 후보와 우리의 차이가 훨씬 더 크다는 진보정당의 목소리, 상대적으로 가장 사실 그대로를 투명하게 비추어 주는 목소리는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 악무한한 ‘빨갱이게임’에서 대중의 판단력을 구출할 수 없는 것일까? 다시 되묻고싶다. 누가 정말 빨갱이인가? 누가 빨갱이를 모함했는가?PSSP
※ 전거를 밝히지 않은 인용문은 모두 <<동아일보>> 1963년 9~10월 분에서 인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