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의 문제: '반폭력'과 페미니즘
이제 다시 제기되고 있는 ‘계급동맹’의 문제는 바로
이 새로운 유형의 복잡성의 지표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1977)
오늘 세계의 대중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지배받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초민족적 금융독점자본은 이중의 ‘포기’를 통해 자신의 축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의 이윤율을 감소시키는,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타협에 임하기보다는 착취 그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지역, 다른 노동력을 찾아 ‘도주’함으로써 (즉 ‘약탈’을 실천함으로써) 노동력의 재생산 과정 그 자체를 공격하고, 급기야 인류를 ‘착취 가능한 인구’와 ‘착취 불가능한 인구’(쓰레기 인간들)로 분할하고는 후자를 전쟁과 기아와 전염병, 마약과 매춘과 노예매매 및 장기판매 따위로 완전히 소비/절멸시키는 폭력(일반화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조직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그간의 사회적 운동들을 통해 도시와 국제 공동체 안으로 진입한 가난한 자들에게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서 시민권을 허용하기보다 정치 그 자체를 포기하는 일종의 ‘반정치(antipolitics)’를 조직하면서, 그 공백 안에 매스컴적인 ‘소비의 폭력’ 혹은 ‘폭력을 소비시키는 폭력’(여기서 ‘착취 불가능한 인구’의 비참함은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즉 지식에 대한 대중의 의지 자체를 파괴하는 실천을 조직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여기에 우리는 다시 민족적 유대 양식의 위기 속에서 창궐하는 인종적-종교적 분쟁들과 그것의 극단적인 폭력을 목록에 추가해야만 한다. 북(North)으로 역수입된 ‘인종청소’뿐만 아니라, ‘9․11 사태’로 일컬어지는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테러 및 그에 따른 미국의 보복공격(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는 전사자들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된 채 썩어가고 있고, 이로 인한 전염병이 또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무수히 살해하고 있다), 해결책을 찾기보다 되려 반대방향으로 치닫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등이 지금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예일 것이지만, 의심할 것도 없이 다른 예들을 여기에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소멸하는 듯 보이는 야만의 복귀(여기서 자연은 인간적 폭력의 ‘매개자(vehicle)’로 등장하며, 가진 자들의 방치로 인해 자연적 재앙은 그 자체로 인위적인 폭력이 되고 만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정치적 실천조차도 그 유효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즉 정치적 주체를 소멸시키는 폭력의 포화상태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각각 ‘초-객관적 폭력(ultra-objective violence)’ 및 ‘초-주체적 폭력’으로 특징지은 바 있는데, 이는 단순히 현재 자행되고 있는 폭력의 끔찍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 나는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다시 고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현재 마주한 정치적 쟁점인 ‘전선형성’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전선의 ‘중심’에 반폭력의 정치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을 위치 짓는 것이 왜 사활적인지를 내 나름대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먼저, 이론적인 맥락 속에 스스로 자리잡기 위해, 이전에 내가 다른 곳에서 논한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관계를 요약하고자 한다. 나는 ‘먼저 도착해 있는 것으로서 상징적인 것’이라는 알튀세르의 테제는 상징적인 것이 외부로부터 주체를 일방적으로 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인간이 아닌 아기가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인 것(즉 그 아기를 가족 내에 위치 짓고 어떤 역할을 할당하는 인간적 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직접 체험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그것은 상상계 경험의 종별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상상계 단계에서 아기는 어머니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어머니의 육체를 ‘부분-대상들’(예컨대, 어머니의 젖가슴)로 조각조각 나누어 직접 체험하는데, 아기가 어머니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자마자 아기는 자신의 새디즘적인 욕구충족 행위인 젖빨기(‘식인주의’)가 사랑하는 대상인 어머니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이는 곧 사춘기까지 이어지는 장기간의 성적 잠복기로의 이행을 설명해주는 것이며, 라캉에게 이 이행은 오이디푸스적인 상징성의 형성을 통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지젝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을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내부화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으로 연결하면서,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의한)를 비판한다. 즉,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기계가 의미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경험 속으로 ‘내부화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과정에 관해서만 논할 뿐” 그 호명에 들러붙어 있는 필연적 “잉여, 나머지, 그 외상적 비합리성과 비의미”가 이데올로기적 명령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상징적 질서의 구조적인 작동은 그것이 내부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연적인 ‘잉여’로서 폭력을 동반하는데, 이때 폭력은 상징적 질서의 작동에 반해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수행성을 구성하면서 이데올로기가 원활히 작동하게 만드는 물질적 지지물로 기능한다. 하지만 지젝의 이러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알튀세르가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관계를 정식화할 때 이 양자가 기능적으로 완전히 구별되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함축한다고 말한 점을 아예 무시한 것이다(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국가장치론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보다 덜 기능주의적이다). 또한 이는 알튀세르가 이미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 질서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비의미!) ‘직접 체험’(이는 그 자체로 폭력적인 체험이다)하는 시기로서 상상계를 설명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알튀세르나 지젝 모두에게 있어 상징적 질서의 필연적 잉여로서의 ‘폭력’은 그 질서에 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수행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즉, 상상계는 여전히 상징계 안에서 작동하지만 상징적 질서에 따라 통제된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데리다의 Gewalt(권력/폭력)의 모호성에 대한 설명과도 다르지 않은 이들의 인식은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가지 암묵적인 전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것에 들러붙어 있는 ‘찌꺼기’(residue)로서 폭력적인 체험은 상징적인 것의 구성이 성공할 경우에 한해서 그것의 물질적 지지물로 기능한다. 따라서 진정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 만일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구성된 상징적 질서의 어떤 ‘붕괴’로 말미암아 상상계로의 저 ‘불가능한’ 복귀가 마침내 일어난다면, 사물의 진정한 사물성으로서 그 폭력적인 ‘찌꺼기’는 어떻게 되는가? 또한 이 때 이런 상징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던 주체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육체를 찢어 부분-대상들로 욕망하는, 극단적 폭력의 끔찍한 복귀다.
발리바르는 「지식인들의 폭력 : 반역과 지성」에서 이를 ‘상징적인 것의 불가능한 철회’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어떻게 (허구적이고 헤게모니적인 보편성인) 지배이데올로기들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각인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이렇게 ‘철회’된 결과가 다름 아닌 전체주의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러한 논의를 확장시켜, Gewalt의 경제(economie) 그 자체를 초과하고 흘러 넘치는 폭력으로서, ‘물질성과의 [벌거벗은] 무매개적 관계’로 특징지어지는 ‘잔혹(cruauté)’의 형태들을 설명했다. 여기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각인되어 있던 동어반복적 자기-긍정―즉 ‘나는 나다’, ‘법은 법이다’, 심지어 스피노자의 ‘신 즉(卽) 자연’에 이르는―은 더 이상 다양성의 위계화를 통한 내포적 총체화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끔찍한 이상성(idéalités terribles)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상상계적 욕망과 결합함으로써 ‘절편음란증(fetishisme)’을 형성하게 된다. 이로부터 폭력의 ‘초주체성’에 대한 발리바르의 또 다른 설명이 도출되는데, 상징적인 것의 붕괴 속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절편음란증’은 ‘악한’ 주체들의 창궐, 즉 무수한 악마의 얼굴을 머리에 달고 나타나는 진정한 메두사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통상적인 ‘죽음의 욕동(慾動, Todestriebe)’을 넘어서는 것으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폭력뿐만 아니라, 모든 주체들의 상호파괴로 이어지는 ‘야만적 아포칼립스(apocalypse barbare)’의 폭력(즉 모든 주체의 악마화/폭력화로서 ‘초주체적 폭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리바르의 설명은 앞서 지적한 ‘정치적 주체의 소멸’로 규정되는 초주체적 폭력이라는 테제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체들이 서로를 파괴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소멸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초인(Übermensch)’을 향한 진화(mutation)의 열망(따라서 ‘인간에 대한 혐오’로 특징지어지는 니체주의의 고유한 위험)을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이러한 상상계로의 (불)가능한 복귀는 또 다른 상징적 질서의 생산을 준비하는 통과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영겁회귀’(니체)를 목격하고 있는 것 또한 우연일 수 없다.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에 대한 문명의 과잉을 통해 묘사한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극단적 폭력과 불평등의 상황,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에서 묘사한 끔찍한 제국주의 전쟁의 아비규환이라는 상황 등을 통해 우리가 이제껏 반복적으로 보아왔던 것이 또 다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화가 성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회귀한 폭력의 강도를 우리가 예상하기 힘들다는 것만이 이전과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세계화가 문자 그대로 달성되어 버렸다(발리바르가 ‘실재적 보편성’이라고 부르는 것)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제껏 우리가 사고했던 보편성의 정치들이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이 문제며, 평등-자유테제에 입각한 도시 부르주아지들의 공산주의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된 현실사회주의의 건설 등이 이러한 야만적 상황에 맞선 대안으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또 다른 ‘회귀’를 막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히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너무나 뒤늦게 깨닫게 된) 진정한 질문은 이러한 야만이 ‘영겁회귀’하는 순환’에서 어떻게 우리가 단절하고 나올 것 인가다. 잠시 상상계와 상징계의 관계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나는 앞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란 바로 오이디푸스적인 상징성 형성을 통한 이행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이행의 한가운데 위치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프로이트의 ‘Fort-Da(사라져라-머물러라)’ 게임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반복강박’을 이론화하는 이러한 Fort-Da 게임은 정확히 그것이 성립된 언어적인 배경(독일어)을 고려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예컨대 그것을 ‘là-ici 게임’(불어)으로 번역할 도리는 없다. 왜냐하면 독일어에서 Fort(‘오-오-오-오’)는 삼키는 음이고 Da는 내뱉는 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킨다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현전(現前, presence)을 삼킨다(아기의 식인주의)는 것을 표현하며, 뱉는다는 것은 어머니의 현전을 뱉는다(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파괴될 지도 모를 불안감)는 것을 표현한다. 라캉과 지젝은 이러한 프로이트 식 설명법을 전도시켜 오히려 어머니의 현전이 아기에게 압도적인 위협으로 작용하며, 어머니에게서 보이는 페니스의 부재/구멍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입’(mouth)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때 아기는 아버지에게서 상징적 기둥(팔루스)을 빌려와 그 ‘입’을 다물지 못하게 받쳐놓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전도 자체는 참신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Fort-Da 게임의 언어적 기원을 무시하는 것이며, Fort-Da 게임이 갖는 어머니를 대상으로한 아기의 현전의 게임(즉, 아들과 아버지와의 경쟁 및 후자의 상징적 질서로의 전자의 복종/승화)이라는 성격 자체를 전혀 문제삼지 않는 ‘단순 전도’에 불과하다. 이리가레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추가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Fort-Da 게임의 주체가 여자아이가 아닌 남자아이(프로이트의 손자)라는 점이다. 그녀에 따르면, 어머니가 사라질 때 남자아이는 실패를 침대 밑으로 던지는 Fort-Da 게임을 시작하지만 여자아이는 통상적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면서 빙글빙글 돌아 어머니가 현전했던 장(場) 그 자체를 표시하던가, 인형(어머니의 투사)을 가지고 함께 춤을 추는 놀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여자아이는 결정적으로 자신과 같은 성(sex)을 가진 어머니를 ‘대상’의 위치에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자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는 주체-대상이 아닌 간(間)-주체적 관계(intersubjective relation)로 형성된다. 그러나, 주체-대상-주체라는 ‘부정의 부정’(따라서 ‘동어반복적 자기-긍정’)을 통과하는 듯 보이는 남자아이의 Fort-Da 게임과 구별되는 여자아이의 주체성 형성은 팔루스-로고스 중심주의적인 가족-사회 질서에서 그 자리를 찾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억압당하게 되며, 결국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로 동일화(identification)되어 자신의 동일성(identity)을 삭제당하게 된다.
여기에 하나의 열쇠가 있다. 우리는 앞서 발리바르의 지배이데올로기 및 전체주의에 대한 설명을 검토하면서, 지배이데올로기 안에 각인되어 있는 ‘동어반복적 자기-긍정’이 상징적인 것의 (불)가능한 철회 속에서 어떻게 전체주의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논의했다. 그런데 이리가레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남성중심주의적 방식으로 상징형성이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가? 한편, 발리바르는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공격성을 남성의 태생적 본질(심지어는 생물학적인)에서 유추하는 것은 일종의 페미니즘 식 ‘피해망상’이며 그것은 정확히 남성적 성(sexualité)의 양가성(兩價性)을 지워버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제도화된 상태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상징적인 것의 공허함(형해화)을 보자마자 마초같은(machiste) 자신의 성안에서 폭력의 도구를 발견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리가레와 발리바르의 관점이 상당한 친화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하는 또 다른 경로를 찾음으로써 야만의 ‘영겁회귀’에서 탈출하는 것이 과제라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여성적인 주체성의 구성(및 남성적 주체성의 근본적인 전화)이라는 문제를 통해 가능한 하나의 해결책을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성의 존재’(‘-됨의 -임’, being of becoming) 혹은 ‘존재의 생성’이라는 니체의 ‘영겁회귀’를 리좀(rhizome)이론으로 가공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가 ‘생성의 생성(becoming of becoming)’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생성의 생성’은 ‘반(反)-오이디푸스’로서 일체의 상징적 질서의 형성 자체를 거부하고 상상계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이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인 만큼 정확히 역설적인 ‘전체주의’로의 복귀다). 반면, 이리가레는 마찬가지로 니체의 저 영겁회귀를 비판하면서도 상징적 질서 자체를 ‘생성의 생성’이라는 관점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사고함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피한다. 즉 동일자의 자기-긍정을 위한 변증법이 아닌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타자(혹은 두 부정성)의 (윤리적) 관계맺음으로 상징적 질서의 형성을 사고하는 것이 문제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상징적인 것에 갈등이 각인되어 있다는 관점을 넘어서 상징적인 것을 차이의 상징화로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여성이라는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를 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다른 소수자의 봉기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에 맞선 아들의 반역이라는 오이디푸스적인 전도의 도식(이는 사실상 동일성 내로 포함을 목표로 하는 ‘평등화’의 논리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남성-여성의 성적 차이 그 자체의 상징화는 이러한 평등의 논리를 넘어서는 (성차화된) ‘씨빌리테(civilité)’의 문제를 사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씨빌리테를 역설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리가레가 자신의 저서에서 씨빌리테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 우연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차이를 사고하기: 평화적 혁명을 위하여』(1989)에서 이러한 씨빌리테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문화와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수호자이며, 씨빌리테의 수호자임(그녀는 오빠의 시신을 땅에 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을 주장하고, 이제는 여성운동 자체가 더 이상 소수자의 실천으로서 단순히 남성적 억압에 대한 외적 대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적 상징질서를 그 내부로부터 붕괴/전화시키는 실천들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에서 상징 형성을 하기 위한 싸움이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와 독재』 영문판 후기에서 ‘계급동맹’을 설명할 때, 쁘띠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분할된 결과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동맹의 문제를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계약’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태를 완전히 잘못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택함으로써 소위 중간계급들을 계급동맹에 가담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실천들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설명에 나는 한가지를 더 추가해야 할 것으로 보는데,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그의 후예들이 보여준 당-의식테제(「공산당 선언」)와 당-조직테제(파리코뮌이후) 사이의 동요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때, 발리바르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데올로기’ 개념의 부재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조직테제’에 대한 혐오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공산당 선언」의 ‘당-의식테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부활하는 현실에서, 이를 다시 상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위당’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다면) 이제 전선 형성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보편적 상징을 형성하려는 (즉,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려는) 지적인 교통의 문제로 봐야 한다. 이렇게 문제를 요약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의식성과 자생성이라는 대당을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정확히 대중의 의식성과 자생성이 결합하는 방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징의 형성이 문제인가?
앞에서 나는 우리가 전선형성의 문제를 사고할 때 반폭력의 정치와 페미니즘을 중심에 위치 짓는 것이 사활적임을 주장했다. 야만의 영겁회귀를 끝장내고 그것에서 탈출하기 위한 상징형성이 문제라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전선의 중심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성차화된 씨빌리테의 정치(이는 무장해제적이고 그 자체 자기-파괴적인 ‘죽음의 욕동’을 표현할 뿐인 ‘비폭력’과는 다른 것이다)를 두는 것이라고 말하게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중심’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처럼 다른 여타의 물질성을 계급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 어떤 ‘다른 중심’에 대한 사고다.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중심으로서 여성주의는 다른 여타의 물질적 다양성(지적 차이, 계급적대 등)을 허구적으로 자기 안에 위계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운동들의 실천과 사고의 ‘양태(mode)’를 변조(modulate)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 중심이 정확히 ‘부재하는 원인’(‘최종심급에서의 물질성의 전이’)으로 작동해야만 한다는 뜻이다(따라서 특히 ‘급진적 여성주의’에서 나타나는 ‘고립주의’는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인민 중의 인민’으로서 여성은 바로 모든 곳에서 팔루스 중심주의적 사고와 실천을 해체/전화하는 진정한 ‘군주’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정세적으로 곤란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인데, 우리에게는 아직 이러한 중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여성운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곤란은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여성운동의 ‘공백’은 오히려 새로운 여성주의 실천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자 마주침과 응고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른 운동에게 두 가지 실천양태가 요구되는데, 바로 이러한 여성운동의 ‘공백’을 존중하면서(즉 그것을 스스로 대체하려 하거나 침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 자신의 사고와 실천 양태를 전화하려는 페미니즘적 실천(학습과 문제제기와 논의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조직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지면이 다 되었으므로, 미처 논의하지 못한 한가지를 추가하고서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오늘날 국제주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공허한 구호로 해결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생각하는 전선의 문제는 전진하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보편적 상징을 형성하려는 투쟁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사고해야 할 것 같다. 전선(Front)은 무엇보다도 경계들(frontiers) 위를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민족-국가나 또 다른 공동체의 경계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민주화시키는 실천을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관해서 다시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바란다. 끝으로 소중한 지면을 할애해주신 사회진보연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PSSP
이 새로운 유형의 복잡성의 지표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1977)
오늘 세계의 대중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지배받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초민족적 금융독점자본은 이중의 ‘포기’를 통해 자신의 축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신의 이윤율을 감소시키는,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타협에 임하기보다는 착취 그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지역, 다른 노동력을 찾아 ‘도주’함으로써 (즉 ‘약탈’을 실천함으로써) 노동력의 재생산 과정 그 자체를 공격하고, 급기야 인류를 ‘착취 가능한 인구’와 ‘착취 불가능한 인구’(쓰레기 인간들)로 분할하고는 후자를 전쟁과 기아와 전염병, 마약과 매춘과 노예매매 및 장기판매 따위로 완전히 소비/절멸시키는 폭력(일반화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조직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그간의 사회적 운동들을 통해 도시와 국제 공동체 안으로 진입한 가난한 자들에게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서 시민권을 허용하기보다 정치 그 자체를 포기하는 일종의 ‘반정치(antipolitics)’를 조직하면서, 그 공백 안에 매스컴적인 ‘소비의 폭력’ 혹은 ‘폭력을 소비시키는 폭력’(여기서 ‘착취 불가능한 인구’의 비참함은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즉 지식에 대한 대중의 의지 자체를 파괴하는 실천을 조직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여기에 우리는 다시 민족적 유대 양식의 위기 속에서 창궐하는 인종적-종교적 분쟁들과 그것의 극단적인 폭력을 목록에 추가해야만 한다. 북(North)으로 역수입된 ‘인종청소’뿐만 아니라, ‘9․11 사태’로 일컬어지는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테러 및 그에 따른 미국의 보복공격(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는 전사자들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된 채 썩어가고 있고, 이로 인한 전염병이 또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무수히 살해하고 있다), 해결책을 찾기보다 되려 반대방향으로 치닫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등이 지금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예일 것이지만, 의심할 것도 없이 다른 예들을 여기에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소멸하는 듯 보이는 야만의 복귀(여기서 자연은 인간적 폭력의 ‘매개자(vehicle)’로 등장하며, 가진 자들의 방치로 인해 자연적 재앙은 그 자체로 인위적인 폭력이 되고 만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정치적 실천조차도 그 유효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즉 정치적 주체를 소멸시키는 폭력의 포화상태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각각 ‘초-객관적 폭력(ultra-objective violence)’ 및 ‘초-주체적 폭력’으로 특징지은 바 있는데, 이는 단순히 현재 자행되고 있는 폭력의 끔찍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 나는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다시 고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현재 마주한 정치적 쟁점인 ‘전선형성’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전선의 ‘중심’에 반폭력의 정치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을 위치 짓는 것이 왜 사활적인지를 내 나름대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먼저, 이론적인 맥락 속에 스스로 자리잡기 위해, 이전에 내가 다른 곳에서 논한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관계를 요약하고자 한다. 나는 ‘먼저 도착해 있는 것으로서 상징적인 것’이라는 알튀세르의 테제는 상징적인 것이 외부로부터 주체를 일방적으로 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인간이 아닌 아기가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인 것(즉 그 아기를 가족 내에 위치 짓고 어떤 역할을 할당하는 인간적 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직접 체험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그것은 상상계 경험의 종별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상상계 단계에서 아기는 어머니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어머니의 육체를 ‘부분-대상들’(예컨대, 어머니의 젖가슴)로 조각조각 나누어 직접 체험하는데, 아기가 어머니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자마자 아기는 자신의 새디즘적인 욕구충족 행위인 젖빨기(‘식인주의’)가 사랑하는 대상인 어머니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이는 곧 사춘기까지 이어지는 장기간의 성적 잠복기로의 이행을 설명해주는 것이며, 라캉에게 이 이행은 오이디푸스적인 상징성의 형성을 통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지젝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을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내부화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으로 연결하면서,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의한)를 비판한다. 즉,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기계가 의미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경험 속으로 ‘내부화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과정에 관해서만 논할 뿐” 그 호명에 들러붙어 있는 필연적 “잉여, 나머지, 그 외상적 비합리성과 비의미”가 이데올로기적 명령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상징적 질서의 구조적인 작동은 그것이 내부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연적인 ‘잉여’로서 폭력을 동반하는데, 이때 폭력은 상징적 질서의 작동에 반해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수행성을 구성하면서 이데올로기가 원활히 작동하게 만드는 물질적 지지물로 기능한다. 하지만 지젝의 이러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알튀세르가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관계를 정식화할 때 이 양자가 기능적으로 완전히 구별되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함축한다고 말한 점을 아예 무시한 것이다(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국가장치론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보다 덜 기능주의적이다). 또한 이는 알튀세르가 이미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 질서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비의미!) ‘직접 체험’(이는 그 자체로 폭력적인 체험이다)하는 시기로서 상상계를 설명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알튀세르나 지젝 모두에게 있어 상징적 질서의 필연적 잉여로서의 ‘폭력’은 그 질서에 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수행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즉, 상상계는 여전히 상징계 안에서 작동하지만 상징적 질서에 따라 통제된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데리다의 Gewalt(권력/폭력)의 모호성에 대한 설명과도 다르지 않은 이들의 인식은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가지 암묵적인 전제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것에 들러붙어 있는 ‘찌꺼기’(residue)로서 폭력적인 체험은 상징적인 것의 구성이 성공할 경우에 한해서 그것의 물질적 지지물로 기능한다. 따라서 진정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 만일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구성된 상징적 질서의 어떤 ‘붕괴’로 말미암아 상상계로의 저 ‘불가능한’ 복귀가 마침내 일어난다면, 사물의 진정한 사물성으로서 그 폭력적인 ‘찌꺼기’는 어떻게 되는가? 또한 이 때 이런 상징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던 주체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육체를 찢어 부분-대상들로 욕망하는, 극단적 폭력의 끔찍한 복귀다.
발리바르는 「지식인들의 폭력 : 반역과 지성」에서 이를 ‘상징적인 것의 불가능한 철회’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어떻게 (허구적이고 헤게모니적인 보편성인) 지배이데올로기들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각인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이렇게 ‘철회’된 결과가 다름 아닌 전체주의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러한 논의를 확장시켜, Gewalt의 경제(economie) 그 자체를 초과하고 흘러 넘치는 폭력으로서, ‘물질성과의 [벌거벗은] 무매개적 관계’로 특징지어지는 ‘잔혹(cruauté)’의 형태들을 설명했다. 여기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각인되어 있던 동어반복적 자기-긍정―즉 ‘나는 나다’, ‘법은 법이다’, 심지어 스피노자의 ‘신 즉(卽) 자연’에 이르는―은 더 이상 다양성의 위계화를 통한 내포적 총체화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끔찍한 이상성(idéalités terribles)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상상계적 욕망과 결합함으로써 ‘절편음란증(fetishisme)’을 형성하게 된다. 이로부터 폭력의 ‘초주체성’에 대한 발리바르의 또 다른 설명이 도출되는데, 상징적인 것의 붕괴 속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절편음란증’은 ‘악한’ 주체들의 창궐, 즉 무수한 악마의 얼굴을 머리에 달고 나타나는 진정한 메두사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통상적인 ‘죽음의 욕동(慾動, Todestriebe)’을 넘어서는 것으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폭력뿐만 아니라, 모든 주체들의 상호파괴로 이어지는 ‘야만적 아포칼립스(apocalypse barbare)’의 폭력(즉 모든 주체의 악마화/폭력화로서 ‘초주체적 폭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리바르의 설명은 앞서 지적한 ‘정치적 주체의 소멸’로 규정되는 초주체적 폭력이라는 테제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체들이 서로를 파괴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소멸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초인(Übermensch)’을 향한 진화(mutation)의 열망(따라서 ‘인간에 대한 혐오’로 특징지어지는 니체주의의 고유한 위험)을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이러한 상상계로의 (불)가능한 복귀는 또 다른 상징적 질서의 생산을 준비하는 통과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영겁회귀’(니체)를 목격하고 있는 것 또한 우연일 수 없다.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에 대한 문명의 과잉을 통해 묘사한 (‘자연과 문화의 경계가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극단적 폭력과 불평등의 상황,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에서 묘사한 끔찍한 제국주의 전쟁의 아비규환이라는 상황 등을 통해 우리가 이제껏 반복적으로 보아왔던 것이 또 다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화가 성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회귀한 폭력의 강도를 우리가 예상하기 힘들다는 것만이 이전과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세계화가 문자 그대로 달성되어 버렸다(발리바르가 ‘실재적 보편성’이라고 부르는 것)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제껏 우리가 사고했던 보편성의 정치들이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이 문제며, 평등-자유테제에 입각한 도시 부르주아지들의 공산주의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된 현실사회주의의 건설 등이 이러한 야만적 상황에 맞선 대안으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또 다른 ‘회귀’를 막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히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너무나 뒤늦게 깨닫게 된) 진정한 질문은 이러한 야만이 ‘영겁회귀’하는 순환’에서 어떻게 우리가 단절하고 나올 것 인가다. 잠시 상상계와 상징계의 관계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나는 앞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란 바로 오이디푸스적인 상징성 형성을 통한 이행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이행의 한가운데 위치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프로이트의 ‘Fort-Da(사라져라-머물러라)’ 게임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반복강박’을 이론화하는 이러한 Fort-Da 게임은 정확히 그것이 성립된 언어적인 배경(독일어)을 고려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예컨대 그것을 ‘là-ici 게임’(불어)으로 번역할 도리는 없다. 왜냐하면 독일어에서 Fort(‘오-오-오-오’)는 삼키는 음이고 Da는 내뱉는 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킨다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현전(現前, presence)을 삼킨다(아기의 식인주의)는 것을 표현하며, 뱉는다는 것은 어머니의 현전을 뱉는다(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파괴될 지도 모를 불안감)는 것을 표현한다. 라캉과 지젝은 이러한 프로이트 식 설명법을 전도시켜 오히려 어머니의 현전이 아기에게 압도적인 위협으로 작용하며, 어머니에게서 보이는 페니스의 부재/구멍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입’(mouth)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때 아기는 아버지에게서 상징적 기둥(팔루스)을 빌려와 그 ‘입’을 다물지 못하게 받쳐놓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전도 자체는 참신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Fort-Da 게임의 언어적 기원을 무시하는 것이며, Fort-Da 게임이 갖는 어머니를 대상으로한 아기의 현전의 게임(즉, 아들과 아버지와의 경쟁 및 후자의 상징적 질서로의 전자의 복종/승화)이라는 성격 자체를 전혀 문제삼지 않는 ‘단순 전도’에 불과하다. 이리가레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추가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Fort-Da 게임의 주체가 여자아이가 아닌 남자아이(프로이트의 손자)라는 점이다. 그녀에 따르면, 어머니가 사라질 때 남자아이는 실패를 침대 밑으로 던지는 Fort-Da 게임을 시작하지만 여자아이는 통상적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면서 빙글빙글 돌아 어머니가 현전했던 장(場) 그 자체를 표시하던가, 인형(어머니의 투사)을 가지고 함께 춤을 추는 놀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여자아이는 결정적으로 자신과 같은 성(sex)을 가진 어머니를 ‘대상’의 위치에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자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는 주체-대상이 아닌 간(間)-주체적 관계(intersubjective relation)로 형성된다. 그러나, 주체-대상-주체라는 ‘부정의 부정’(따라서 ‘동어반복적 자기-긍정’)을 통과하는 듯 보이는 남자아이의 Fort-Da 게임과 구별되는 여자아이의 주체성 형성은 팔루스-로고스 중심주의적인 가족-사회 질서에서 그 자리를 찾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억압당하게 되며, 결국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로 동일화(identification)되어 자신의 동일성(identity)을 삭제당하게 된다.
여기에 하나의 열쇠가 있다. 우리는 앞서 발리바르의 지배이데올로기 및 전체주의에 대한 설명을 검토하면서, 지배이데올로기 안에 각인되어 있는 ‘동어반복적 자기-긍정’이 상징적인 것의 (불)가능한 철회 속에서 어떻게 전체주의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논의했다. 그런데 이리가레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남성중심주의적 방식으로 상징형성이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가? 한편, 발리바르는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공격성을 남성의 태생적 본질(심지어는 생물학적인)에서 유추하는 것은 일종의 페미니즘 식 ‘피해망상’이며 그것은 정확히 남성적 성(sexualité)의 양가성(兩價性)을 지워버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제도화된 상태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상징적인 것의 공허함(형해화)을 보자마자 마초같은(machiste) 자신의 성안에서 폭력의 도구를 발견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리가레와 발리바르의 관점이 상당한 친화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하는 또 다른 경로를 찾음으로써 야만의 ‘영겁회귀’에서 탈출하는 것이 과제라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여성적인 주체성의 구성(및 남성적 주체성의 근본적인 전화)이라는 문제를 통해 가능한 하나의 해결책을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성의 존재’(‘-됨의 -임’, being of becoming) 혹은 ‘존재의 생성’이라는 니체의 ‘영겁회귀’를 리좀(rhizome)이론으로 가공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가 ‘생성의 생성(becoming of becoming)’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생성의 생성’은 ‘반(反)-오이디푸스’로서 일체의 상징적 질서의 형성 자체를 거부하고 상상계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이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인 만큼 정확히 역설적인 ‘전체주의’로의 복귀다). 반면, 이리가레는 마찬가지로 니체의 저 영겁회귀를 비판하면서도 상징적 질서 자체를 ‘생성의 생성’이라는 관점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사고함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피한다. 즉 동일자의 자기-긍정을 위한 변증법이 아닌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타자(혹은 두 부정성)의 (윤리적) 관계맺음으로 상징적 질서의 형성을 사고하는 것이 문제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상징적인 것에 갈등이 각인되어 있다는 관점을 넘어서 상징적인 것을 차이의 상징화로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여성이라는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를 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다른 소수자의 봉기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에 맞선 아들의 반역이라는 오이디푸스적인 전도의 도식(이는 사실상 동일성 내로 포함을 목표로 하는 ‘평등화’의 논리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남성-여성의 성적 차이 그 자체의 상징화는 이러한 평등의 논리를 넘어서는 (성차화된) ‘씨빌리테(civilité)’의 문제를 사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씨빌리테를 역설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리가레가 자신의 저서에서 씨빌리테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 우연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차이를 사고하기: 평화적 혁명을 위하여』(1989)에서 이러한 씨빌리테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문화와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수호자이며, 씨빌리테의 수호자임(그녀는 오빠의 시신을 땅에 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을 주장하고, 이제는 여성운동 자체가 더 이상 소수자의 실천으로서 단순히 남성적 억압에 대한 외적 대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적 상징질서를 그 내부로부터 붕괴/전화시키는 실천들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에서 상징 형성을 하기 위한 싸움이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와 독재』 영문판 후기에서 ‘계급동맹’을 설명할 때, 쁘띠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분할된 결과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동맹의 문제를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계약’이라는 문제설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태를 완전히 잘못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관점을 택함으로써 소위 중간계급들을 계급동맹에 가담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실천들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설명에 나는 한가지를 더 추가해야 할 것으로 보는데,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그의 후예들이 보여준 당-의식테제(「공산당 선언」)와 당-조직테제(파리코뮌이후) 사이의 동요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때, 발리바르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데올로기’ 개념의 부재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조직테제’에 대한 혐오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공산당 선언」의 ‘당-의식테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부활하는 현실에서, 이를 다시 상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위당’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다면) 이제 전선 형성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보편적 상징을 형성하려는 (즉,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려는) 지적인 교통의 문제로 봐야 한다. 이렇게 문제를 요약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의식성과 자생성이라는 대당을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정확히 대중의 의식성과 자생성이 결합하는 방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징의 형성이 문제인가?
앞에서 나는 우리가 전선형성의 문제를 사고할 때 반폭력의 정치와 페미니즘을 중심에 위치 짓는 것이 사활적임을 주장했다. 야만의 영겁회귀를 끝장내고 그것에서 탈출하기 위한 상징형성이 문제라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전선의 중심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성차화된 씨빌리테의 정치(이는 무장해제적이고 그 자체 자기-파괴적인 ‘죽음의 욕동’을 표현할 뿐인 ‘비폭력’과는 다른 것이다)를 두는 것이라고 말하게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중심’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처럼 다른 여타의 물질성을 계급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 어떤 ‘다른 중심’에 대한 사고다.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중심으로서 여성주의는 다른 여타의 물질적 다양성(지적 차이, 계급적대 등)을 허구적으로 자기 안에 위계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운동들의 실천과 사고의 ‘양태(mode)’를 변조(modulate)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 중심이 정확히 ‘부재하는 원인’(‘최종심급에서의 물질성의 전이’)으로 작동해야만 한다는 뜻이다(따라서 특히 ‘급진적 여성주의’에서 나타나는 ‘고립주의’는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인민 중의 인민’으로서 여성은 바로 모든 곳에서 팔루스 중심주의적 사고와 실천을 해체/전화하는 진정한 ‘군주’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정세적으로 곤란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인데, 우리에게는 아직 이러한 중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여성운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곤란은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여성운동의 ‘공백’은 오히려 새로운 여성주의 실천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자 마주침과 응고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른 운동에게 두 가지 실천양태가 요구되는데, 바로 이러한 여성운동의 ‘공백’을 존중하면서(즉 그것을 스스로 대체하려 하거나 침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 자신의 사고와 실천 양태를 전화하려는 페미니즘적 실천(학습과 문제제기와 논의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조직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지면이 다 되었으므로, 미처 논의하지 못한 한가지를 추가하고서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오늘날 국제주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공허한 구호로 해결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가 생각하는 전선의 문제는 전진하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보편적 상징을 형성하려는 투쟁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사고해야 할 것 같다. 전선(Front)은 무엇보다도 경계들(frontiers) 위를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민족-국가나 또 다른 공동체의 경계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민주화시키는 실천을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관해서 다시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바란다. 끝으로 소중한 지면을 할애해주신 사회진보연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