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7-8.27호
재생산의 위기, 노동운동 어디로 가야 하는가.
들어가며
작년 7․8월호 기관지 특집에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비인간화와 거기서 여성의 노동권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를 고찰했다. 87년 투쟁이후 민주노조의 투쟁은 오로지 남성노동자의 투쟁으로만 사고되었던 경향에 대해 여성노동자들이 수 세기동안 노동해왔고, 투쟁해왔음에 대해 주되게 말하고 있다. 6․70년대 수출지향적 경공업 중심의 산업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도시로 흘러들어왔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속에서 자신들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왔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에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투쟁해왔는가를 알려내고자 하는 의미였다. 그럼으로써 87년 성과에 가려진 채 한번도 투쟁하지 않았고, 투쟁에서도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일반의 지배적인 시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이에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투쟁의 역사를 이어받아 다시금 노동운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지에 대해 밝히는 것이었다.
이번 특집에서는 작년의 문제의식에서 더 나아가 단지 눈에 보이는 임노동안에서의 노동조건의 차별과 몰락의 문제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이 우리의 삶과 노동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가족’이 하나의 삶과 노동의 단위로 규정되어오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의 노동운동은 무엇을 기본으로 “노동권”의 문제를 풀어갔고,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짧은 제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성의 문제는 그 사회의 구성에 관한 문제이다’ 라는 명제에 직면하여 “노동권” 전반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노동운동의 출발과 기준이 과연 당연하다고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재생산"이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운동 전체의 심각한 문제로 사고되지 못했을 때에 결국은 전체노동의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문제의식에 직면하여 이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이는 노동운동의 위기가 회자되고 있는 지금 노동운동의 혁신을 말하기 위해 그 시작을 어디로부터 출발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어떠한 이념과 사상으로 혁신을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의 출발이다.
“재생산”, 그리고 우리의 삶과 노동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와 함께 노동할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재충전도 역시 계속적으로 진행한다. 8시간 노동, 8시간의 수면, 8시간의 재충전의 안배는 인간의 적정한 노동력을 위한 배분이었다. 고도의 산업사회가 진행될수록 인간에게 요구되어지는 노동 수행의 능력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 노동력 재생산의 척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아동의 교육의 시기는 더욱 길어졌고, 의식주의 문제도 단지 해결하는 것을 넘어 더 높은 질의 요구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와중에 도래한 자본의 위기는 신자유주의를 치료책으로 내걸면서 그 위기 비용을 민중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럴수록 가계의 생존전략은 더욱 가계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데 현재의 위기에 대한 가족의 대응은 단지 가장에게만이 아니라 가족구성원 특히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다. 여성들은 감소된 실질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노동시장으로 진출하고, 양육과 병행하기 위해 시간제나 비정규직을 선택하거나 비공식 부문으로 진출한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여성의 힘으로 지탱해왔던 재생산노동이 그 임계에 다달았음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위기는 자신들이 설정해놓은 마지노선까지 갉아 먹으며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가계는 파탄나고, 여성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
“노동권”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노동에 있어서 재생산은 앞서 말한 바처럼 매우 중요하지만, 그 재생산마저 고려하지 않은 채 무한 착취를 하는 현재의 국면에서 과연 권리로서 “노동권”은 어떻게 제기되어야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크게는 두 가지로 바라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가족’을 기본으로 하여 진행되는 노동권에 대한 설정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을 중심으로 노동권 쟁취를 만들어 갔던 투쟁의 흐름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노동권이 해석되어 왔다.
가족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 서양사회에서는 핵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19세기의 사회보장 정책과 20세기의 가족정책이 등장하였는데, 남한사회의 국가정책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가족관념을 강조하여 나타났고, 서구의 핵가족화 모델이 이식되어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가족의 전통을 유지하여 가족으로 하여금 사회복지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는 '先가족 後복지'라는 정책방향으로 나타났고, 여기에 자본의 위기에 따른 핵가족의 위기까지 중첩되면서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70년대 근대화 프로젝트는 합리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유교주의적 위계질서를 산업의 영역에서 '훈육'의 질서로 활용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가치를 '일상화'하면서 공장주변의 거리를 청소한다거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경쟁에 참여하거나 건전가요를 부르는 등 훈육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때의 여성노동자들은 국가를 위한 '희생' 과 '인내'를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비성화된 '산업전사'나 '산업역군'으로 묘사되지만,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책임있는 딸'로 계층적 위계상에서 '공순이' 라는 비하적인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미혼 딸의 노동이 가족의 필요에 따라 규정되는 일은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일이지만 남한의 빈민 가족에서 가족의 생계유지에 대한 딸들의 기여는 매우 크고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아들보다 오랫동안 가족의 생계를 분담한다. 아버지의 실직, 병고, 사망으로 생계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취해지는 조치는 딸의 진학포기와 취업에 대한 요구이다. 즉 딸의 교육비 절약을 통한 지출 극소화와 딸의 취업을 통한 수입 극대화 전략이 취해지고, 바로 70년대 수출지향적인 경공업의 발달속에서 산업 역군의 주역이라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등장은 이러한 배경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90년대 남한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하에서 역시 남한 가족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적 해체 양상이 전개되면서 가족을 기반으로 한 생계구조는 그 위기에 직면하고 가족은 그 위기에 맞서 더욱더 가족의 생계를 부여잡기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70년대 여성노동은 특히 유교적 가부장성을 중심으로 딸의 노동력이 가족의 생계를 담당했다면, 90년대 구조조정의 위기 속에서 주부들을 중심으로한 여성의 노동력은 또다시 유린당하고 파편화된다.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한편에서는 주변 노동자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을 우선적으로 정리해고 하여 비정규직․비공식 노동으로의 불안정한 노동자로 전락하게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여성을 인식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자본의 전략이 작동한다. 현재 경제활동의 주체로서 여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김대중 정권의 여성정책은 그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중심으로 한 생계구조 속에서 그리고 그 구조의 위기속에서 노동운동은 어떤 대응을 만들어 나갔는가.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작동되어왔던 ‘가족임금제’를 통해 그 면면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가족임금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여성의 사회적 노동 권리를 부정하는 구실로 작용해왔다. 가족임금제가 소수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성을 가정에 머물게 하고 전통적 성별분업의 관념을 재생산하는 기반을 제공해왔는데 이로서 여성의 노동력을 유휴 노동력으로 규정하는 일반적 가정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노동운동 내에서도 비판의 여과없이 오랫동안 작동되어왔다.
그 일례로 올해 초 발전노조 파업 당시의 ‘가족대책위’ 투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는 "가족대책위" 형태의 투쟁은 '가족'을 중심으로 투쟁을 배치하려는 노동조합의 편의적인 발상에서 시작된다. 이미 노조 안에서는 '가족'은 지켜야 되는 곳으로서 남성 생계부양자의 투쟁에 그 가족 성원 개개인의 삶은 어떠하던지 간에 동원하려는 방식일 뿐이다.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투쟁의 이성적인 호소가 아닌 그로 인해 힘들어 지는 가족들의 애절함을 동원하였을 뿐 그 투쟁에서 주체화된 여성의 모습은 볼 수 없다. 투쟁에 참여했던 여성 개개인은 ‘민영화 반대’ 투쟁의 전선에 복무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투쟁은 ‘가족대책위’ 라는 틀안에서 만들어지고 때론 폄하된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가족대책위 투쟁을 통해 지역연대 운동의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대책위가 갖는 의미와 지역연대운동의 의미는 분리되어 비판되어야함이 맞다. ‘연대’라 함은 동일한 투쟁의 전선아래 주체와 주체가 만들어 가는 것인데 가족대책위라는 동원체제를 통해서는 온전한 의미에서 ‘연대’의 의미를 읽을 수 없다. 진정한 연대라면 가족대책위로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누구누구의 아내로서 아니라 ○○○이라는 개별화된 주체로서 ‘민영화 반대’ 전선에 함께 했을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운동 역시 노동권의 문제를 ‘가족’이라는 틀로 부여잡고 있다. 가족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노동권의 문제가 개별화된 주체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그 안에서도 대표되는 누군가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의 구분속에서 제기된다는 것은 이미 노동권이라는 개념아래 배제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제의 기본에는 ‘여성’이 있는 것이다.
‘임금’을 중심으로 투쟁의 저지선을 만들어 왔던 투쟁은 고용형태의 변화, 임금 형태의 변화 등으로 흔들리고 있다.
임단투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민주노조진영의 가장 대중적인 투쟁 조직화 방식이자 시기집중 투쟁전술을 통한 전선형성의 주요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변혁적 운동진영이 해체되고, ‘신경영전략’을 앞세운 자본의 현장통제전략이 전면화되면서, 임단투는 정례적인 노사교섭의 일환으로 급속히 변해 갔다. 더구나 현재와 같이 비정규직의 만연 등 고용형태가 유연하게 변화와 연봉제․성과급제․포괄임금제 등등 임금형태가 빈번히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임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양상은 더 이상 투쟁의 저지선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예를 들어 80년대 여성노동운동 진영의 주요 요구였던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는 그 당시에는 주요한 투쟁의 요구로 작동했을지라도 현재 남성노동자의 임금 역시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임금의 적용은 사실상 의미를 잃는다. 또한, 단순히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면 최저임금이 노동자들의 임금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하는 방식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87년 이후 ‘임금’을 중심으로 투쟁의 전선을 만들었던 노동권의 문제를 재설정하여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를 지양하고 재생산의 문제를 사고하는 가운데 건강권, 인권 등의 맥락으로 투쟁의 저지선을 다시금 만들어 나갈 필요를 역설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자본과 국가가 강요하고 있는 노동의 불안정화에 맞서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노동운동 내부를 변화시키기 위한 보편적 요구를 제출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운동의 표상을 바꾸는 것이다.
소결 - 재생산의 문제를 시작으로 노동운동의 혁신을 이야기하자
앞서도 말했지만 여성의 고용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재생산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재생산의 필요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의 노동시장으로의 유입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러한 여성들의 대부분은 임시직, 파트타임 등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얼룩진 비정규직․비공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은 더욱더 고되게 재생산을 영역을 책임졌어야했다. 그것은 때로는 집안의 의사, 간호사가 되고 아이들에게는 교사가 되기도 했으며 자신의 은폐된 노동을 끊임없이 쏟아부어야만 했다.
사실 안타깝게도 이 땅 여성노동자들의 역사속에서 여성노동이 온전히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노동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여성노동자, 특히 이중의 고통을 지고 있는 기혼노동자를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주어진 노동의 환경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들어 여성사업장의 투쟁이 많아지고, 가정주부들의 투쟁은 가족대책위를 중심으로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투쟁이 더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명확히 선언하는 가운데 가족임금제, 성별분리 등의 고착화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얼마나 악랄하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투쟁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여성들만의 몫이 아니다.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일부계층(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등 미조직노동자)을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에 편향적이라는 소극적인 비판이 아니라, 결국 재생산의 문제를 방기하고 노동이 유연화되면서 나타나는 고용의 불안정화를 막지 못하면 노동의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총체적인 고민속에서 출발해야 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가장 많이 공격하고 있는 그리하여 노동의 불안정화의 가장 심각한 피해의 집중을 받을 수 있는 노동층을 주축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의 향배를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다. PSSP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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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경 『신자유주의적 '반격'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공감
- 다이앤 앨스 外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페미니즘의 시각』, 공감
- 나탈리 소콜로프 『여성노동시장이론』
- 오사와 마리 『회사인간사회와 성』, 나남
보론> 재생산과 생산적복지
역사적으로 구조조정기에는 언제나 복지정책의 노선적․제도적 변화가 동반되어 왔다. 한국의 경우도, 최근 몇 년간의 구조조정과정에서 '생산적 복지‘로 표상되는 복지정책에 있어서의 많은 변화들이 있어왔다.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은 구조조정의 사회적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직결되는 것으로, 노동대중에 대한 비용의 전가, 그에 대한 국가적 개입의 차원으로서의 복지정책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조조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주기적)고실업과 가계의 빈곤(그로 인한 가족 부양구조의 변화)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의 국가적 의존에 대한 국가적 대응이 바로 복지정책상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구조조정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 2차대전 이후의 일종의 사회협약으로서 제도화된 ‘가족임금’의 급격한 해체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보아 ‘위기’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생산적 복지‘라는 것은 그 실내용에 비해 ’위기‘적 상황이 생산해내는 ’위기감‘에 근거해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장과 왜곡은 ’위기‘의 본질과 후과를 은폐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구조조정기에 자본은 여성에게 이중적이고 서로 상반되는 적응을 요구한다. 한편으로는 가족의 생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시장 진입을 강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의 일자리 유지와 가족의 안정과 화합을 위한 여성의 유급노동을 삼가게 하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한다. 한국의 구조조정 초기 만해도 이러한 상반된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공존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노동시장의 변화(불안정화, 신축화)와 가족위기의 현실적 압력이 사회적 담론을 어느 정도 상쇄하게 되고, 기혼여성들의 노동사장으로의 진출은 급격히 증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결국 ‘가족임금’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에 강요되는 각종의 요구들에서 가족임금이데올로기는 오히려 확대․재생산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더욱이 이는 복지로 대표되는 국가적 개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시장에 진출할 때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조건’을 요구받는데, 이는 이전에 여성들이 전담하던 가사노동과 양육, 가족에 대한 보살핌노동을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적)복지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누구나 최저생계 수준의 복지를 책임지겠다’는 생산적 복지의 취지를 새삼 상기하지 않더라도, 가족임금의 해체 → 가족생계의 위기 →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 → 공백으로 남는 가족에 대한 재생산노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위기극복을 위한 국가적 개입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곳(가족의 위기, 재상산의 위기)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아버지의 위기, 생산의 위기) 처방전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에 있어서도 보다 면밀해질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이후 복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투쟁이 한국에서도 본격화되고 있다. 이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공론화하고 불안정노동 층의 권리를 주되게 제기한다는 점에서, ‘노동능력’을 근거로 사회적 위험과 비용을 개인에게로 전가하고 노동시장으로의 유인책에 불과한 한국의 보수적 복지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의 구조조정이 그 사회적 비용을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전가하는 것을 핵심전략으로 삼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진보진영의 보다 본질적인 대응이 필요함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독소조항 폐지, 최저임금 현실화, 최저생계비 현실화 투쟁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들 투쟁들은 구조조정 이후의 사회전반의 빈곤화 추세 속에서 매우 절실하고 급박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이들 투쟁들은 '가족의 생계위기‘라는 공유지반 속에서 사회적 이슈화와 투쟁의 조직화가 진행중이다. 국기법과 최저임금이 직간접적으로 최저생계비에 근거해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일부 투쟁주체들이 제기하는 바와 같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형식의, 그러하기에 함께 투쟁해야만 할‘ 사안인 것이다. 현재 중소도시 4인 가구를 기준으로 선정되는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국기법의 수급액이 결정된다. 이에 대해 진보진영은 가구의 지역별, 유형별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고, 실질적인 소비지출을 고려하지 않는 인상방식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는 부양의무기준을 폐지 내지 완화할 것을 주장한다. 최저임금제 투쟁의 경우는 일단 지나치게 낮은 액수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으며, 그러한 최저임금이 저임금노동을 오히려 정당화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의 대부분은 저임금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하는 여성노동자들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불안정노동 층의 현실이나 한국의 열악한 복지상황에서 그야말로 절박한 문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속에서 우리는 소득분배 형태의 측정단위이자 국가복지의 수급단위로서의 ‘가구’의 의미에 대해 좀더 고민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실 ‘가구’는 ‘가족’과는 다른 것으로서 혈연관계를 필요조건으로 하지 않는 경제적 단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혈연관계가 배제된 ‘가구’ 단위로 복지수급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한국의 경우도 ‘가구’는 사실상 ‘가족’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적으로 가족(가구)의 경제적 욕구의 차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왔던 가족구성원상의 차이, 성과 나이에 덧붙여 거주지역상의 특수성, 장애 등과 같은 보다 다양한 욕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진보진영의 주장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파괴력이 실질적인 가족의 토대(경제력)를 잠식해 들어가고, 재생산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의 대응은 위기 이전의 상황, 안정적인 재생산 단위로서의 가족의 부활이라는 불가능한 기획과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최저생계비로 표상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저생계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내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는 다름 아닌 가족이데올로기이고, 이는 가족임금 논리를 강력하게 추동하는 힘이다. 즉, 안정되고 화합된 가족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적정수준의 생계, 현실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하나의 이상으로서 남아있어야만 하는 가족임금, 위기상황에서의 국가개입은 개인이 아닌 가족에 대해서라는 자본의 고유한 논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편으로는 (전적으로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는)가족 안에서의 불평등을 은폐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준에 미달되는 ‘정상적이지 못한’ 가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당연시하게 된다.
다른 한편 최저임금제 투쟁과 관련하여 고려될 필요가 있는 부분은, 복지의 지출이전에 최저임금제를 통한 시장에서의 일정 수준에서의 소득보완이 자본과 국가에 의해 왜 외면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실증적 분석들에 의하면 최저임금제를 통해 임금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혜층은 가족 내의 일차소득자가 아닌 이차소득자(여성이나 청소년)들이라고 한다. 이는 여성들이 저임금-노동집중형 산업에 밀집해 있던 것이 단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역사적 경향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빈곤, 그들의 저임금에 대해 국가와 자본이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남성부양자 모델에 따른 가족임금체계를 변화시킬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은 그것의 유지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생존과 복지를 둘러싼 우리의 투쟁은 당연하게도 가족도 무엇도 아닌, ‘개인적 권리’의 보장과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제기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불안정노동 층의 노동권을 제기하는 맥락 역시 가족의 해체, 재생산의 위기라는 현재의 상황을 전변시켜 낼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복지를 둘러싼 현재의 투쟁지형이나 불안정노동 투쟁의 많은 현실적 어려움들 속에서 이러한 주장의 현실적 설득력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문제제기의 방식이 결과적으로 가족이데올로기, 가족임금 논리를 강화하는 것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대안과는 일정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즉, 현재와 같은 가족임금논리(가족단위의 복지)를 인정하는 가운데 예외적이거나 개별적인 상황의 구체성을 보충하는 것, 혹은 가족의 내외적 조건들을 충분히 반영하는 방식의 투쟁은 생존과 복지에 대한 개별적 책임을 강조하는 자본의 전략에 맞서기에는 너무 많은 우회로를 거쳐야만 하는 투쟁인 것이다. 더욱이 여성들에 대한 이중적 착취를 요구하는 재생산의 위기가 문제인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작년 7․8월호 기관지 특집에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비인간화와 거기서 여성의 노동권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를 고찰했다. 87년 투쟁이후 민주노조의 투쟁은 오로지 남성노동자의 투쟁으로만 사고되었던 경향에 대해 여성노동자들이 수 세기동안 노동해왔고, 투쟁해왔음에 대해 주되게 말하고 있다. 6․70년대 수출지향적 경공업 중심의 산업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도시로 흘러들어왔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속에서 자신들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왔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 이후에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투쟁해왔는가를 알려내고자 하는 의미였다. 그럼으로써 87년 성과에 가려진 채 한번도 투쟁하지 않았고, 투쟁에서도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일반의 지배적인 시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이에 여성노동자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투쟁의 역사를 이어받아 다시금 노동운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지에 대해 밝히는 것이었다.
이번 특집에서는 작년의 문제의식에서 더 나아가 단지 눈에 보이는 임노동안에서의 노동조건의 차별과 몰락의 문제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이 우리의 삶과 노동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가족’이 하나의 삶과 노동의 단위로 규정되어오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의 노동운동은 무엇을 기본으로 “노동권”의 문제를 풀어갔고,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짧은 제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성의 문제는 그 사회의 구성에 관한 문제이다’ 라는 명제에 직면하여 “노동권” 전반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노동운동의 출발과 기준이 과연 당연하다고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재생산"이 단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운동 전체의 심각한 문제로 사고되지 못했을 때에 결국은 전체노동의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문제의식에 직면하여 이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이는 노동운동의 위기가 회자되고 있는 지금 노동운동의 혁신을 말하기 위해 그 시작을 어디로부터 출발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어떠한 이념과 사상으로 혁신을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의 출발이다.
“재생산”, 그리고 우리의 삶과 노동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와 함께 노동할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재충전도 역시 계속적으로 진행한다. 8시간 노동, 8시간의 수면, 8시간의 재충전의 안배는 인간의 적정한 노동력을 위한 배분이었다. 고도의 산업사회가 진행될수록 인간에게 요구되어지는 노동 수행의 능력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 노동력 재생산의 척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아동의 교육의 시기는 더욱 길어졌고, 의식주의 문제도 단지 해결하는 것을 넘어 더 높은 질의 요구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와중에 도래한 자본의 위기는 신자유주의를 치료책으로 내걸면서 그 위기 비용을 민중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럴수록 가계의 생존전략은 더욱 가계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데 현재의 위기에 대한 가족의 대응은 단지 가장에게만이 아니라 가족구성원 특히 여성에게 전가되고 있다. 여성들은 감소된 실질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노동시장으로 진출하고, 양육과 병행하기 위해 시간제나 비정규직을 선택하거나 비공식 부문으로 진출한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여성의 힘으로 지탱해왔던 재생산노동이 그 임계에 다달았음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위기는 자신들이 설정해놓은 마지노선까지 갉아 먹으며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가계는 파탄나고, 여성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
“노동권”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노동에 있어서 재생산은 앞서 말한 바처럼 매우 중요하지만, 그 재생산마저 고려하지 않은 채 무한 착취를 하는 현재의 국면에서 과연 권리로서 “노동권”은 어떻게 제기되어야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크게는 두 가지로 바라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가족’을 기본으로 하여 진행되는 노동권에 대한 설정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을 중심으로 노동권 쟁취를 만들어 갔던 투쟁의 흐름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노동권이 해석되어 왔다.
가족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 서양사회에서는 핵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19세기의 사회보장 정책과 20세기의 가족정책이 등장하였는데, 남한사회의 국가정책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가족관념을 강조하여 나타났고, 서구의 핵가족화 모델이 이식되어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가족의 전통을 유지하여 가족으로 하여금 사회복지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는 '先가족 後복지'라는 정책방향으로 나타났고, 여기에 자본의 위기에 따른 핵가족의 위기까지 중첩되면서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70년대 근대화 프로젝트는 합리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유교주의적 위계질서를 산업의 영역에서 '훈육'의 질서로 활용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가치를 '일상화'하면서 공장주변의 거리를 청소한다거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경쟁에 참여하거나 건전가요를 부르는 등 훈육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때의 여성노동자들은 국가를 위한 '희생' 과 '인내'를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비성화된 '산업전사'나 '산업역군'으로 묘사되지만,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책임있는 딸'로 계층적 위계상에서 '공순이' 라는 비하적인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미혼 딸의 노동이 가족의 필요에 따라 규정되는 일은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일이지만 남한의 빈민 가족에서 가족의 생계유지에 대한 딸들의 기여는 매우 크고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아들보다 오랫동안 가족의 생계를 분담한다. 아버지의 실직, 병고, 사망으로 생계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취해지는 조치는 딸의 진학포기와 취업에 대한 요구이다. 즉 딸의 교육비 절약을 통한 지출 극소화와 딸의 취업을 통한 수입 극대화 전략이 취해지고, 바로 70년대 수출지향적인 경공업의 발달속에서 산업 역군의 주역이라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등장은 이러한 배경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90년대 남한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하에서 역시 남한 가족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적 해체 양상이 전개되면서 가족을 기반으로 한 생계구조는 그 위기에 직면하고 가족은 그 위기에 맞서 더욱더 가족의 생계를 부여잡기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70년대 여성노동은 특히 유교적 가부장성을 중심으로 딸의 노동력이 가족의 생계를 담당했다면, 90년대 구조조정의 위기 속에서 주부들을 중심으로한 여성의 노동력은 또다시 유린당하고 파편화된다.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한편에서는 주변 노동자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을 우선적으로 정리해고 하여 비정규직․비공식 노동으로의 불안정한 노동자로 전락하게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여성을 인식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자본의 전략이 작동한다. 현재 경제활동의 주체로서 여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김대중 정권의 여성정책은 그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중심으로 한 생계구조 속에서 그리고 그 구조의 위기속에서 노동운동은 어떤 대응을 만들어 나갔는가.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작동되어왔던 ‘가족임금제’를 통해 그 면면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가족임금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여성의 사회적 노동 권리를 부정하는 구실로 작용해왔다. 가족임금제가 소수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성을 가정에 머물게 하고 전통적 성별분업의 관념을 재생산하는 기반을 제공해왔는데 이로서 여성의 노동력을 유휴 노동력으로 규정하는 일반적 가정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는 노동운동 내에서도 비판의 여과없이 오랫동안 작동되어왔다.
그 일례로 올해 초 발전노조 파업 당시의 ‘가족대책위’ 투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는 "가족대책위" 형태의 투쟁은 '가족'을 중심으로 투쟁을 배치하려는 노동조합의 편의적인 발상에서 시작된다. 이미 노조 안에서는 '가족'은 지켜야 되는 곳으로서 남성 생계부양자의 투쟁에 그 가족 성원 개개인의 삶은 어떠하던지 간에 동원하려는 방식일 뿐이다.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투쟁의 이성적인 호소가 아닌 그로 인해 힘들어 지는 가족들의 애절함을 동원하였을 뿐 그 투쟁에서 주체화된 여성의 모습은 볼 수 없다. 투쟁에 참여했던 여성 개개인은 ‘민영화 반대’ 투쟁의 전선에 복무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투쟁은 ‘가족대책위’ 라는 틀안에서 만들어지고 때론 폄하된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가족대책위 투쟁을 통해 지역연대 운동의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대책위가 갖는 의미와 지역연대운동의 의미는 분리되어 비판되어야함이 맞다. ‘연대’라 함은 동일한 투쟁의 전선아래 주체와 주체가 만들어 가는 것인데 가족대책위라는 동원체제를 통해서는 온전한 의미에서 ‘연대’의 의미를 읽을 수 없다. 진정한 연대라면 가족대책위로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누구누구의 아내로서 아니라 ○○○이라는 개별화된 주체로서 ‘민영화 반대’ 전선에 함께 했을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운동 역시 노동권의 문제를 ‘가족’이라는 틀로 부여잡고 있다. 가족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노동권의 문제가 개별화된 주체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그 안에서도 대표되는 누군가와 그렇지 않은 존재로의 구분속에서 제기된다는 것은 이미 노동권이라는 개념아래 배제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제의 기본에는 ‘여성’이 있는 것이다.
‘임금’을 중심으로 투쟁의 저지선을 만들어 왔던 투쟁은 고용형태의 변화, 임금 형태의 변화 등으로 흔들리고 있다.
임단투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민주노조진영의 가장 대중적인 투쟁 조직화 방식이자 시기집중 투쟁전술을 통한 전선형성의 주요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변혁적 운동진영이 해체되고, ‘신경영전략’을 앞세운 자본의 현장통제전략이 전면화되면서, 임단투는 정례적인 노사교섭의 일환으로 급속히 변해 갔다. 더구나 현재와 같이 비정규직의 만연 등 고용형태가 유연하게 변화와 연봉제․성과급제․포괄임금제 등등 임금형태가 빈번히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임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양상은 더 이상 투쟁의 저지선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예를 들어 80년대 여성노동운동 진영의 주요 요구였던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는 그 당시에는 주요한 투쟁의 요구로 작동했을지라도 현재 남성노동자의 임금 역시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임금의 적용은 사실상 의미를 잃는다. 또한, 단순히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면 최저임금이 노동자들의 임금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하는 방식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87년 이후 ‘임금’을 중심으로 투쟁의 전선을 만들었던 노동권의 문제를 재설정하여 가족임금 이데올로기를 지양하고 재생산의 문제를 사고하는 가운데 건강권, 인권 등의 맥락으로 투쟁의 저지선을 다시금 만들어 나갈 필요를 역설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자본과 국가가 강요하고 있는 노동의 불안정화에 맞서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노동운동 내부를 변화시키기 위한 보편적 요구를 제출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운동의 표상을 바꾸는 것이다.
소결 - 재생산의 문제를 시작으로 노동운동의 혁신을 이야기하자
앞서도 말했지만 여성의 고용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재생산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재생산의 필요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의 노동시장으로의 유입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러한 여성들의 대부분은 임시직, 파트타임 등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얼룩진 비정규직․비공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은 더욱더 고되게 재생산을 영역을 책임졌어야했다. 그것은 때로는 집안의 의사, 간호사가 되고 아이들에게는 교사가 되기도 했으며 자신의 은폐된 노동을 끊임없이 쏟아부어야만 했다.
사실 안타깝게도 이 땅 여성노동자들의 역사속에서 여성노동이 온전히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노동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여성노동자, 특히 이중의 고통을 지고 있는 기혼노동자를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주어진 노동의 환경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들어 여성사업장의 투쟁이 많아지고, 가정주부들의 투쟁은 가족대책위를 중심으로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투쟁이 더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명확히 선언하는 가운데 가족임금제, 성별분리 등의 고착화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얼마나 악랄하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투쟁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여성들만의 몫이 아니다.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일부계층(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등 미조직노동자)을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에 편향적이라는 소극적인 비판이 아니라, 결국 재생산의 문제를 방기하고 노동이 유연화되면서 나타나는 고용의 불안정화를 막지 못하면 노동의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총체적인 고민속에서 출발해야 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가장 많이 공격하고 있는 그리하여 노동의 불안정화의 가장 심각한 피해의 집중을 받을 수 있는 노동층을 주축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의 향배를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다. PSSP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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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연「가대위를 통해 본 ‘가족주의’적 운동전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사회진보연대 2002 . 5
- 고광완 「가족대책위와 지역연대운동」사회진보연대 200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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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미 「여성의 노동권에 대한 여성주의적 성찰」,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주최, <동아시아 의 근대성과 여성>, 한․중․일 국제 학술대회, 2000. 6. 9
- 이미경 『신자유주의적 '반격'하에서 핵가족과 '가족의 위기'』, 공감
- 다이앤 앨스 外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페미니즘의 시각』, 공감
- 나탈리 소콜로프 『여성노동시장이론』
- 오사와 마리 『회사인간사회와 성』, 나남
보론> 재생산과 생산적복지
역사적으로 구조조정기에는 언제나 복지정책의 노선적․제도적 변화가 동반되어 왔다. 한국의 경우도, 최근 몇 년간의 구조조정과정에서 '생산적 복지‘로 표상되는 복지정책에 있어서의 많은 변화들이 있어왔다.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은 구조조정의 사회적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직결되는 것으로, 노동대중에 대한 비용의 전가, 그에 대한 국가적 개입의 차원으로서의 복지정책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조조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주기적)고실업과 가계의 빈곤(그로 인한 가족 부양구조의 변화)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의 국가적 의존에 대한 국가적 대응이 바로 복지정책상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구조조정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 2차대전 이후의 일종의 사회협약으로서 제도화된 ‘가족임금’의 급격한 해체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보아 ‘위기’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생산적 복지‘라는 것은 그 실내용에 비해 ’위기‘적 상황이 생산해내는 ’위기감‘에 근거해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장과 왜곡은 ’위기‘의 본질과 후과를 은폐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구조조정기에 자본은 여성에게 이중적이고 서로 상반되는 적응을 요구한다. 한편으로는 가족의 생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시장 진입을 강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의 일자리 유지와 가족의 안정과 화합을 위한 여성의 유급노동을 삼가게 하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한다. 한국의 구조조정 초기 만해도 이러한 상반된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공존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노동시장의 변화(불안정화, 신축화)와 가족위기의 현실적 압력이 사회적 담론을 어느 정도 상쇄하게 되고, 기혼여성들의 노동사장으로의 진출은 급격히 증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결국 ‘가족임금’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에 강요되는 각종의 요구들에서 가족임금이데올로기는 오히려 확대․재생산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더욱이 이는 복지로 대표되는 국가적 개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시장에 진출할 때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조건’을 요구받는데, 이는 이전에 여성들이 전담하던 가사노동과 양육, 가족에 대한 보살핌노동을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적)복지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누구나 최저생계 수준의 복지를 책임지겠다’는 생산적 복지의 취지를 새삼 상기하지 않더라도, 가족임금의 해체 → 가족생계의 위기 →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 → 공백으로 남는 가족에 대한 재생산노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위기극복을 위한 국가적 개입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곳(가족의 위기, 재상산의 위기)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아버지의 위기, 생산의 위기) 처방전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에 있어서도 보다 면밀해질 필요가 있다. 구조조정 이후 복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투쟁이 한국에서도 본격화되고 있다. 이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공론화하고 불안정노동 층의 권리를 주되게 제기한다는 점에서, ‘노동능력’을 근거로 사회적 위험과 비용을 개인에게로 전가하고 노동시장으로의 유인책에 불과한 한국의 보수적 복지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의 구조조정이 그 사회적 비용을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전가하는 것을 핵심전략으로 삼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진보진영의 보다 본질적인 대응이 필요함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독소조항 폐지, 최저임금 현실화, 최저생계비 현실화 투쟁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들 투쟁들은 구조조정 이후의 사회전반의 빈곤화 추세 속에서 매우 절실하고 급박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이들 투쟁들은 '가족의 생계위기‘라는 공유지반 속에서 사회적 이슈화와 투쟁의 조직화가 진행중이다. 국기법과 최저임금이 직간접적으로 최저생계비에 근거해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일부 투쟁주체들이 제기하는 바와 같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형식의, 그러하기에 함께 투쟁해야만 할‘ 사안인 것이다. 현재 중소도시 4인 가구를 기준으로 선정되는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국기법의 수급액이 결정된다. 이에 대해 진보진영은 가구의 지역별, 유형별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고, 실질적인 소비지출을 고려하지 않는 인상방식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는 부양의무기준을 폐지 내지 완화할 것을 주장한다. 최저임금제 투쟁의 경우는 일단 지나치게 낮은 액수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으며, 그러한 최저임금이 저임금노동을 오히려 정당화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의 대부분은 저임금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하는 여성노동자들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불안정노동 층의 현실이나 한국의 열악한 복지상황에서 그야말로 절박한 문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속에서 우리는 소득분배 형태의 측정단위이자 국가복지의 수급단위로서의 ‘가구’의 의미에 대해 좀더 고민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실 ‘가구’는 ‘가족’과는 다른 것으로서 혈연관계를 필요조건으로 하지 않는 경제적 단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혈연관계가 배제된 ‘가구’ 단위로 복지수급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한국의 경우도 ‘가구’는 사실상 ‘가족’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적으로 가족(가구)의 경제적 욕구의 차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왔던 가족구성원상의 차이, 성과 나이에 덧붙여 거주지역상의 특수성, 장애 등과 같은 보다 다양한 욕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진보진영의 주장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파괴력이 실질적인 가족의 토대(경제력)를 잠식해 들어가고, 재생산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의 대응은 위기 이전의 상황, 안정적인 재생산 단위로서의 가족의 부활이라는 불가능한 기획과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최저생계비로 표상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저생계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내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는 다름 아닌 가족이데올로기이고, 이는 가족임금 논리를 강력하게 추동하는 힘이다. 즉, 안정되고 화합된 가족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적정수준의 생계, 현실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하나의 이상으로서 남아있어야만 하는 가족임금, 위기상황에서의 국가개입은 개인이 아닌 가족에 대해서라는 자본의 고유한 논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편으로는 (전적으로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는)가족 안에서의 불평등을 은폐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준에 미달되는 ‘정상적이지 못한’ 가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당연시하게 된다.
다른 한편 최저임금제 투쟁과 관련하여 고려될 필요가 있는 부분은, 복지의 지출이전에 최저임금제를 통한 시장에서의 일정 수준에서의 소득보완이 자본과 국가에 의해 왜 외면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실증적 분석들에 의하면 최저임금제를 통해 임금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혜층은 가족 내의 일차소득자가 아닌 이차소득자(여성이나 청소년)들이라고 한다. 이는 여성들이 저임금-노동집중형 산업에 밀집해 있던 것이 단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역사적 경향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빈곤, 그들의 저임금에 대해 국가와 자본이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남성부양자 모델에 따른 가족임금체계를 변화시킬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은 그것의 유지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생존과 복지를 둘러싼 우리의 투쟁은 당연하게도 가족도 무엇도 아닌, ‘개인적 권리’의 보장과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제기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불안정노동 층의 노동권을 제기하는 맥락 역시 가족의 해체, 재생산의 위기라는 현재의 상황을 전변시켜 낼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복지를 둘러싼 현재의 투쟁지형이나 불안정노동 투쟁의 많은 현실적 어려움들 속에서 이러한 주장의 현실적 설득력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문제제기의 방식이 결과적으로 가족이데올로기, 가족임금 논리를 강화하는 것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대안과는 일정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즉, 현재와 같은 가족임금논리(가족단위의 복지)를 인정하는 가운데 예외적이거나 개별적인 상황의 구체성을 보충하는 것, 혹은 가족의 내외적 조건들을 충분히 반영하는 방식의 투쟁은 생존과 복지에 대한 개별적 책임을 강조하는 자본의 전략에 맞서기에는 너무 많은 우회로를 거쳐야만 하는 투쟁인 것이다. 더욱이 여성들에 대한 이중적 착취를 요구하는 재생산의 위기가 문제인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